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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19화 (19/858)

제19화

인파로 북적거리는 길을 푸른 덮개가 쓰인,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마차가 덜컹거리며 나아갔다.

비단옷을 입은 소년은 정교한 새장과 떡 상자를 든 채 휘파람을 불며 동쪽 거리로 의기양양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이 앞에서 자신을 흠씬 두들겨 팰 불한당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한 채였다.

한편 마차들은 큰길을 지나 모퉁이를 돌더니 도성의 북쪽을 향해 나아갔다. 도성에서 집값이 가장 비싼 곳은 아니었지만, 조용해서 살기 좋은 곳이었다.

정국백부는 개국공신이라, 건국 초기에 황궁에서 가까운 도성의 중심부에 저택을 지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정국백부는 장군부답게 시끌벅적하며 사치스럽고 방탕한 환경을 꺼려 북쪽에 살기를 택했다.

정국백부가 위치한 장승가長勝街를 지나 정문에 들어서자, 엽연채는 발을 걷어 올린 후 주변을 자세히 훑어보았다. 처음으로 정국백부의 전경을 바라본 것이었다.

낡았지만 웅장한 분위기를 풍기는 저택은 높다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담장은 본래의 색을 잃어 거무칙칙해 보였다. 오랫동안 다시 칠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허름한 담장을 넘고 내부를 들여다보니 정자들이 드문드문 늘어서 있었다. 흥성했던 당시의 모습이 어렴풋하게나마 느껴졌다. 더 이상 새뜻하지 않은 붉은 대문과 수환獸環(짐승 머리 모양의 문고리), 그리고 그 위에 줄지어 박힌 장식용 못은 세상 사람들에게 주씨 가문이 과거 얼마나 큰 영광을 누렸었는지 말해 주고 있었다.

혁혁한 전공을 세운 주씨 가문의 수많은 사내들이 이곳에서 태어나고, 전쟁터에서 전사해 말가죽에 싸여 돌아왔다. 그런데 지금은 발톱이 뽑히고 손발이 잘려 죽어 가는 늙은 사자처럼 이곳에서 조용히 엎드려 있는 형국이었다. 웅장하면서도 황폐한 정국백부를 바라보며 엽연채는 저도 모르게 상념에 빠져들었다.

마차는 모퉁이를 돌아 정국백부의 동쪽 쪽문이 있는 골목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사동 둘이 등받이가 없는 기다란 나무 걸상에 앉아 재미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거리에서 떠도는 소문 들었어? 원래부터 엽씨 가문 둘째 아가씨께서 장씨 가문에 시집가는 거였고, 큰아가씨께서 우리 셋째 도련님께 시집오기로 한 거래!”

그러자 다른 사동이 웃으며 타박했다.

“큭큭, 그런 거짓부렁을 믿는단 말이야? 처제가 형부를 꼬셔 달아났다는 걸 누가 몰라?”

“쯧, 우리 셋째 도련님은 운도 참 지지리도 없으시지! 정혼녀가 도망가니 시집 못 간 신부가 떠밀리듯 들어온 거잖아. 물론 신부가 괜찮은 사람이면 전화위복이 되겠지. 어쨌든 정실부인이 낳은 적장녀니까. 그런데 현실은 참 냉혹해. 어엿한 정안후부의 적장녀가 서자에게 시집오고 싶어 하진 않을 테니 말이야.

어제 셋째 도련님이 방에 들어가셨다가 엽씨 가문 큰아가씨한테 쫓겨나셨대. 그리고 오늘 아침 정안후부에서 사람을 보내 그 아가씨를 데려갔잖아. 분명 돌아오지 않을 거야!”

“누가 아니래! 몇 년 전에 유씨 집안 아가씨도 그랬잖아. 유씨 가문에서는 정혼자 집안이 중간에 가세가 기울었는데도 혼약을 지켰는데, 웃어른들께 절을 올리려고 신부가 머리에 덮어쓴 붉은 천을 걷어 올렸더니 글쎄… 집안만 기운 게 아니라 신랑이 추남이었던 거야.

결국 화가 난 신부가 그 자리에서 봉관을 벗어 던지고 꽃가마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잖아. 남편이 찾아가 따지자 유씨 가문에서 돈을 좀 쥐여 주고 마무리 지어 버렸지.”

“정안후부에서는 얼마나 줄 것 같냐?”

“그걸 누가 알겠어!”

사동이 새롱거리며 웃었다.

“얼마를 주든 셋째 도련님에게 돌아가진 않을 테지.”

두 사동은 서로를 보며 헤헤 웃었다. 그들 딴에는 이 이야기가 꽤나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이때, 말발굽 소리와 수레바퀴 소리가 들려왔다. 커다란 마차 몇 대가 들어오는 모습이 보이자 두 사동은 친척 혼례식에 참석하러 갔던 마님과 그 일행들이 돌아온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주씨 가문 마차가 아니었다. 두 사동은 어리둥절해하다 얼른 몸을 일으켰다. 그중 한 사동이 물었다.

“누구를 찾아오셨는지요?”

발이 걷히며 담황색 배자를 입은 온화한 얼굴의 여종이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혜연이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셋째 마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그 사동은 영문을 몰라 했다.

“셋째 마님이요? 저희는 셋째 마님이 안 계시는데요…….”

그러자 다른 사동이 팔꿈치로 그를 툭 치며 말했다.

“엽씨 가문 큰아가씨께서 오셨나 봐!”

‘엽씨 가문 큰아가씨?’

사동은 깜짝 놀랐다. 셋째 마님이라면 셋째 도련님의 아내를 말하는 게 아닌가? 그는 여종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궁명헌 소속이 아닌 그들은 어제 소문의 엽씨 가문 큰아가씨를 직접 볼 기회가 없었다. 그저 멀리서 낯선 두 여종이 집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봤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때 보았던 두 여종 중 한 명이 바로 앞에 있는 이 여인이 확실했다.

‘엽씨 가문 큰아가씨가 돌아왔다고?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두 분?”

혜연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오늘 부인께서는 친정에 인사를 드리러 가셨던 겁니다!”

두 사동은 얼이 빠진 채 마차 네 대가 안으로 들어오도록 문을 열어 주었다.

* * *

그 시각 궁명헌.

깔끔하고 소박한 방 안, 주운환이 목제 침상에 누워 부족한 잠을 보충하고 있었다. 그는 잠자리를 가리는 편이라 어젯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런 데다 오늘도 아침 일찍 수업을 듣느라 점심밥을 먹은 후에야 겨우 쉬게 된 참이었다.

“셋째 도련님! 셋째 도련님!”

밖에서 여양이 쏜살같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운환은 잠에서 막 깬 탓에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있었으나, 그래도 얼굴에서는 여전히 귀티가 났다. 그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웬 소란이냐?”

방 안으로 뛰어 들어온 여양이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엽씨 가문 아가씨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주운환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돌아왔다고?”

“예.”

여양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도 들은 듯 눈을 크게 떴다.

“게다가 커다란 마차 세 대에 물건을 가득 싣고 돌아오셨어요! 정말로 시집온 것처럼 말이에요.”

어안이 벙벙한 주운환은 몸을 일으켜 구겨진 옷을 폈다. 재빨리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곧 수화문에 도착했다. 그곳엔 과연 마차 네 대가 세워져 있었고, 여종과 하인들이 물건을 열심히 옮기고 있었다.

꽃무늬 장식이 돋보이는 가장 세련된 마차 뒤로 여종 둘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한 명은 등받이가 없는 네모난 작은 걸상을 내려놓았고, 다른 한 명은 마차의 발 안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새하얗고 보드라운 손이 여종의 손 위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연꽃을 수놓은 비단신이 땅에 닿자 꽃무늬가 수놓아진 암홍색 치맛단이 스르륵 내려왔다.

이어서 아리따운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찬란한 햇살이 구슬로 장식된 정교한 금잠 위에 내려앉으며 빛을 사방으로 퍼뜨렸다.

윤곽선을 연하게 그린 그녀의 매력적인 붉은 입술이 시선을 끌어들였다. 그녀가 눈길을 살며시 돌리자 청초함이 한층 더 빛을 발했다. 주운환은 한참을 멍하니 서서 넋을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가씨, 셋째 공자님이십니다.”

혜연이 엽연채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열일곱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 수화문에 서 있었다.

연청색 비단 도포는 마치 새로 자라난 대나무처럼 곧은 그의 자세를 더욱 돋보이게 했고 검은 머리칼은 살짝 헝클어진 채로 어깨에 늘어져 있었다.

화려한 생김새인 그의 눈썹과 눈에서는 귀티가 흐르면서도 소탈한 느낌을 풍겼으나, 눈꼬리가 살짝 쳐진 것이 몽롱해 보였다. 보아하니 막 잠에서 깬 눈치였다.

엽연채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부군.”

‘부군’이라는 두 글자가 귓속을 파고들자 주운환은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그는 겨우 입꼬리를 씰룩거리더니 돌아서 버렸다.

“우선 방으로 갑시다.”

간신히 그렇게 말한 주운환이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어리둥절한 엽연채는 추길, 혜연과 함께 재빨리 그의 뒤를 쫓아갔다.

추길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엥? 왜 쳐다도 안 보시고 그냥 가 버리시지?”

“부끄러워하시는 건가?”

혜연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에 추길은 흡족한 투로 화제를 돌렸다.

“지금 자세히 보니까 더 잘생기신 것 같아! 저 얼굴만 봐도 시집가는 게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겠어!”

엽연채가 고개를 돌리더니 여종들을 쏘아보며 말했다.

“쉿. 조용히 하거라! 부군께서 놀라서 도망이라도 가시면 너희들이 책임질 것이냐?”

앞장선 주운환은 비틀거리다가 넘어질 뻔하더니 이내 빠른 걸음으로 다시 걸어갔다.

엽연채가 앞서 걷는 주운환의 뒤를 쫓아갔다. 지나가다 그 모습을 본 두 여종이 둘을 보며 혀를 끌끌 차더니 작은 목소리로, 놀랍고도 이상하다는 듯 말을 주고받았다.

“엽씨 가문 큰아가씨 아니니? 돌아오셨나 보네. 정말 이상한 일이야. 진짜로 셋째 도련님에게 시집오시려는 건가?”

“이야, 진짜 곱다 고와. 우리 셋째 도련님 횡재했네.”

아무 거리낌 없이 방자하게 주운환을 비웃는 여종들의 목소리를 들은 엽연채는 그가 주씨 가문에서 얼마나 푸대접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꼿꼿한 자세로 걸어가고 있는 소년의 뒷모습이 보였다. 쌓인 눈처럼 푸르스름한 도포를 입은 그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은 발묵潑墨(먹물이 번지어 퍼지게 하는 산수화 기법) 기법으로 그린 듯 짙어, 흑색과 연청색의 조화가 마치 수묵단청화水墨丹靑畵(먹색을 위주로 하고 단청색을 보조로 하는 수묵화)처럼 풍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걸음걸이 역시 여유만만한 것으로 보아, 그는 다른 사람들의 말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나 뒤에서 따라오던 추길과 혜연은 그 말들을 듣고 있자니 가슴이 답답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주운환과 엽연채 일행은 서쪽으로 계속해서 걸어갔다. 뜰 몇 개를 지나자 풍경이 점점 생기를 잃어 갔다. 정자 주위로는 잡초만 무성했다. 딱 봐도 아무도 살지 않는 곳임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그곳까지 가서야 수군거리는 여종들과 더 이상 마주치지 않을 수 있었다. 동시에 엽연채는 주씨 가문이 몰락한 이후 내보낼 수 있는 하인들은 다 내보냈기에 자기들을 돌봐 줄 사람이 없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행은 이내 궁명헌에 도착했다. 뜰 바깥의 담장은 곳곳이 허물어져 있었다. 사방을 둘러보니 주위에는 가지가 아래로 살짝 처진 버드나무가 보였다.

안으로 들어서니 정면엔 수화문 두 개가 서 있었고, 그 뒤로 네 칸짜리 본채와 양옆으로 구불구불 이어진 회랑이 자리했다. 그리고 동쪽과 서쪽엔 각각 곁채가 있었다. 궁명헌은 저택 서쪽에서는 가장 큰 뜰이라 매우 널찍하기는 했으나, 손질은 잘 안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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