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모든 준비가 끝난 후 엽연채는 온씨를 찾아가 작별 인사를 고했다. 온씨는 훌쩍거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딸이 이렇게 얼떨결에 주씨 가문에 시집간다는 생각이 들자 억울하고 또 억울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이니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온씨는 일각가량 당부의 말을 한 후에야 엽연채를 보내 주었다.
영귀원에서 나온 엽연채는 안녕당으로 향했다. 묘씨는 나한상 위에 단정한 자세로 앉아 엽연채의 절을 받은 후 그녀를 보냈다.
엽연채는 엽학문에게 작별 인사를 올리기 위해 바깥뜰에 있는 서재로 갔다. 하지만 엽학문은 지금 장손녀의 이름을 듣기만 해도 화가 나 명치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그런데 어디 그녀의 얼굴이 보고 싶겠는가? 엽학문은 첨향에게 엽연채를 그냥 보내라고 했다.
오직 엽영교만이 엽연채를 동쪽 문 앞까지 배웅해 주었고, 엽연채가 마차에 오르자 그녀도 자리를 떴다.
“출발!”
마부가 채찍을 내려치자 마차는 안정감 있게 앞으로 나아갔다. 이 마차 뒤로 커다란 세 대의 마차가 뒤따라오고 있었는데, 이 마차들에 한가득 실린 것이 전부 엽연채의 혼수품이었다. 엽연채는 발을 걷어 올려 그녀가 나고 자란 정안후부가 점점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 지은 후 다시 발을 내렸다.
‘안녕, 전생아! 이번 생은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아 볼게!’
마차가 골목을 지나 큰길로 들어서자 길거리 행상이 호객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귓가에 들려왔다.
“아가씨.”
마차 창문에 기대어 있던 추길이 갑자기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저기 큰공자님이 계셔요.”
엽연채가 맑고 아름다운 두 눈을 가늘게 떠 보니 과연 왁자지껄한 인파 속에 열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잘생긴 소년이 보였다. 소년은 비교적 평범하게 보이는 파란색 비단 도포를 입고 있었는데, 손에 정교한 꽃무늬가 새겨진 팔각형 새장을 들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
화미조畵眉鳥(전체적으로 황갈색을 띠는 작은 새로 노랫소리가 예쁘기로 유명함)를 든 소년은 목에 힘을 주고 사람들 사이를 걸어가고 있었다. 이 사내는 바로 엽연채의 친오라버니인 엽균이었다.
엽균을 본 엽연채의 눈빛엔 복잡미묘한 감정이 가득했다. 현재 정안후부 후손들 중 사내아이는 둘뿐이었다. 하나는 엽균이고, 다른 하나는 둘째 숙모가 낳은 열세 살의 엽영이었다. 엽균은 장자가 낳은 적장손이라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랐으나 그저 호의호식하는 한량에 불과했다. 평소 짓궂은 장난이나 칠 줄 알고 매일 빈둥빈둥 허송세월할 뿐이니.
“어제 혼례식 때도 원래는 큰공자님께서 아가씨를 업고 가서 꽃가마에 태워 드려야 하는 건데 그런 일이 벌어져 버렸죠. 어디로 가 버리셨는지 아예 보이지도 않으셨고요! 오늘도 그래요. 아가씨가 친정에 오실 줄 알면서도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으셨잖아요! 진짜 너무하세요!”
추길이 화가 난 목소리로 불만을 쏟아냈다.
“아가씨, 가서 막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전생의 엽연채는 변변치 않은 오라버니 모습에 화를 내고 원망하기도 했다. 오라버니를 만날 때마다 늘 그의 행실을 지적하며 설교를 늘어놓곤 했다.
“막아서 뭐 할 건데? 훈계라도 하라고?”
“당연하죠!”
추길은 평소와 크게 다른 엽연채의 반응에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고집을 부렸다.
“훈계한다고 바뀌겠느냐?”
“아니요!”
추길은 한 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답했으나 곧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해야죠. 화풀이도 하고요!”
“훈계를 해도 듣지 않는데 화풀이가 되겠느냐? 더욱이 내가 훈계하면 할수록 오라버니는 화만 낼 텐데. 그러지 말고…….”
엽연채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하자, 추길과 혜연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눈을 깜박거렸다.
“훈계를 해도 화가 안 풀릴 테니, 두들겨 패면 되지!”
엽연채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혜연아, 가서 은 다섯 냥을 경인이에게 건네 주며 건달 몇 명을 구하라고 전해라. 그런 다음 동쪽 거리에 있는 송화松花 골목에서 오라버니를 붙잡아 얼굴을 가리고 흠씬 두들겨 패라고 하거라. 죽이지는 말고 팔다리 하나쯤 부러뜨리는 정도가 좋겠구나.”
“아, 아가씨!”
추길과 혜연은 깜짝 놀라 어안이 벙벙했다. 사람을 사서 자신의 친오라버니를 매질하라고 하다니, 세상에 이런 여동생이 어디 있단 말인가! 살다 보니 정말 별일을 다 보는구나 싶었다.
“얼른 가거라!”
엽연채의 재촉에 혜연은 어쩔 수 없이 알겠다고 대답한 후 보따리에서 은 다섯 냥을 꺼냈다. 마차 앞쪽을 두드리자 마차에 달린 작은 창문이 열리더니 말끔한 사동 경인이 얼굴을 내밀었다.
경인은 심부름을 하는 사동으로, 전부터 엽연채의 말을 잘 들었다. 혜연이 경인에게 은 다섯 냥을 건네자마자 그가 마차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아가씨, 정말로 큰공자님을 매질할 생각이세요? 좋아요. 진짜 매질하신다 하더라도… 큰공자님이 동쪽 거리에 있는 송화 골목을 지나가실지 아닐지는 어떻게 아세요?”
혜연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엽연채의 눈에 순간 서늘함이 비쳤지만 그녀는 그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다 아는 수가 있다. 틀림없으니 거기 가서 붙잡기나 하거라!”
방금 전 엽균은 왼손에는 새장을 들고 오른손에는 떡 상자를 들고 있었다. 그 떡 상자는 객락재客樂齋의 것이 분명했다. 객락재는 떡으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포장으로도 유명한 곳이었다. 그리고 객락재는 떡 종류마다 포장이 모두 달라 내용물을 쉬이 맞출 수 있었다.
방금 전 엽균이 손에 들고 있던 떡은 객락재의 한매수정고寒梅水晶糕였다. 이 한매수정고는 전생에서 임종 직전의 엽연채를 가장 분개하게 만들었던 것이었다. 어찌나 분했던지 지금도 이 떡을 떠올리면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 * *
엽균은 열 살 때 바깥뜰로 거처를 옮긴 후 어머니와 누이동생과 점점 멀어졌고, 그러면서 놀고먹는 한량으로 변해 버렸다. 온씨와 엽연채는 엽균이 훌륭한 사람과는 거리가 멀게 성장하자 그를 볼 때마다 훈계를 늘어놓았다. 그러나 훈계를 하면 할수록 그는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피했고, 결국 엽연채 모녀를 보기만 하면 발걸음을 돌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전생에서 엽연채는 장씨 가문에 의해 외딴 마을로 보내진 후로 오라버니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녀가 병으로 몸져누운 후 임종을 하기 보름 전에야 엽균이 다리를 절뚝거리며 그녀의 침상까지 온 것이었다.
수염이 덥수룩한 엽균이 놀랍고 이상하다는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네 꼴이 왜 이렇단 말이냐? 아버지와 할아버지께서는 네가 도량이 좁아 이채가 장씨 가문에 들어온 데 분개한 나머지 이곳으로 와서 다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것뿐이라고 하시던데, 어떻게 아프다고 꼴이 이렇게까지 엉망인 것이냐?”
화낼 기력도 없는 엽연채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그렇게 말씀하시던가요. 하하……. 오라버니야말로… 도성에서 유유자적하며 즐겁게 보내고 계신 거 아니었어요? 어찌 그런 모습인 겁니까? 어떻게 된 거예요? 둘째 숙모가 득세를 하더니 오라버니를 집안에서 쫓아내기라도 한 거예요? 우리 가족의 씨를 싹 다 말려 버릴 셈인가 보죠?”
그러자 엽균이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둘째 숙모가 뭐라고! 코흘리개 엽영이로 날 어찌할 수 있단 말이냐! 지금 우리 집안 꼴이 어찌나 잘 돌아가는지 모른다. 아버지가 그 정랑과 허서를 데리고 들어온 후부터 어찌나 우습던지!”
그러더니 엉엉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연채야……. 이제야 너와 어머니가 옳았다는 걸 알게 됐어. 내가 잘못했다. 어머니께 정말 죄송하구나. 네게도 미안하고. 부지런히 공부해서 시험에 합격해 공명을 떨치고 가정도 꾸리고 했어야 하는 건데! 내가 아버지 말씀만 철석같이 믿고 어리석었다.
예전에 아버지께서 내게 우리는 공훈이 있는 후작 집안이라 부귀를 영원히 세습할 수 있으니, 공부는 그저 글자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만 하고 도리만 알면 된다고 하셨어. 과거 시험은 가진 것 없는 자들이나 보는 거라고 하셨지!
그때 아버지께서 자신은 아무리 오래 공부해도 시험에 떨어져 공명을 떨치지 못했지만, 장국후부莊國侯府 아들은 공부도 안 했는데 황제 폐하와 사냥을 나갔다가 호랑이를 잡았다는 이유로 관직에 임명됐다고 하셨어.
그러니 우리같이 공훈이 있는 귀족들은, 세습봉작世襲封爵을 계승할 수 있으니 고생하면서 시간 낭비할 필요 없다고 말씀해 주셨지. 적당한 나이가 되면 관직을 물려받아 체면치레나 하고, 집안의 대를 이으면 되니 가진 것 없는 사람들처럼 고생할 필요가 없다면서.
그때는 아버지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해 공부하는 게 싫었어. 너와 어머니가 다 나를 위해서 공부하라고 한 건 알고 있었다. 나는 그저… 그저 너와 어머니가 어리석고 낡아 빠진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원망만 했단다. 공명과 관록에만 눈이 멀었다고 생각했어. 정랑과는 달리 식견도 없고 사람 마음을 이해할 줄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그 말을 들은 엽연채는 하마터면 피를 토할 뻔했다. 그녀는 오라버니가 그저 자신과 어머니를 멀리한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동안 아버지의 첩실과는 가깝게 지냈을 줄이야 꿈에도 몰랐었다.
“보름 전에… 내, 내가…….”
엽균이 머뭇거리며 그녀를 쳐다봤다.
“내가 말을 타다가 승은공承恩公 장손의 다리를 다치게 했어. 그날은 공교롭게도 방을 붙이는 날이었지. 그런데 허서가 과거 시험에 합격한 게야. 그러자 아버지께서는 허서가 정이와 정이의 죽은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아니라 자신과 정이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어.
그러곤 적골법滴骨法(망자의 유골에 산 사람의 피를 떨어뜨려 스며들면 혈연관계임을 인정하는 친자 확인법)으로 친자임을 증명하셨지. 할아버지께서는 자신을 닮은 훌륭한 손자가 생겼다고 말씀하셨고, 승은공이 두려웠던 할아버지는 내 다리를 꺾어 버린 후 날 집 밖으로 쫓아내 버리셨단다.”
엽균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정이가 전에는 나한테 정말 잘해 줬어. 나도 그 사람한테 잘해 줬고. 객락재를 지날 때마다 한매수정고를 사다 주곤 했지. 그런데 허서와 함께 날 곤경에 빠뜨리다니!”
그 말을 들은 엽연채는 분통이 터져 그만 각혈을 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엽균은 저렇게 장성할 때까지 단 한 번도 어머니와 자신에게는 떡 한 덩이 사다 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 금수만도 못한 인간이 아버지의 첩실을 극진히 섬기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허서가 엽승덕의 친아들이라는 것도 분명 거짓일 게 분명했다. 그리고 엽승덕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었다.
여인에게 잘 보이려고 자신의 친아들을 가차 없이 내쳐 버리다니, 그건 엽승덕이나 할 수 있는 짓이었다. 거기다 그런 짓을 벌여 놓고 자신은 퍽이나 위대한 사람인 줄 착각하고 있었다.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겠다? 개차반 같은 인간! 구역질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