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17화 (17/858)

제17화

“그런 난장판에 뭐 하러 끼어드느냐!”

묘씨는 딸을 쳐다보며 꾸짖었다.

“너도 알지 않느냐? 네 아버지가 겉으로는 체면을 차리면서 속으로는 얼마나 이 혼사를 신경 쓰고 있는지 말이다. 네 아버지가 어제 사람을 시켜 장씨 가문에서 보낸 예물을 가져왔다. 연채에게 주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드러낸 게지. 그런데 연채 그게 기어코 가져가겠다고 그 소동을 벌인 거란다.

둘째는 연채를 눌러 놓고 싶었지만 더 큰 손해를 볼까 봐 그 이상 나서지를 못했다더구나. 그 아이가 그 난리를 치는데 아무도 당해내지 못했다는 거야! 지금 보거라. 네 아버지도 기가 푹 꺾여 버렸어.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그 계집애는 어쨌든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했을 텐데, 그럼 네 아버지가 자기를 돕지 않았다고 우리를 탓했을 게 아니냐.”

엽영교도 어머니의 말뜻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둘째 새언니가 곤경에 빠진 꼴을 직접 보지 못해 퍽 아쉬웠다. 비록 그녀는 엽연채와 사이가 좋진 않았지만, 그래도 엽연채보다 엽이채가 훨씬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이번에 혼사를 가로챈 일 때문에 엽영교는 엽이채를 더욱 미워하고 경멸했다.

이때, 조롱박과 쌍희문囍이 수놓인 휘장이 걷히더니 전 마마가 걸어 들어왔다. 묘씨는 위를 올려다보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생각보다 빨리 왔구나. 난동을 피우더냐?”

묘씨는 엽연채가 녹죽원에서 난동을 피웠던 것을 생각하며 둘째 며느리를 위로하기 위해 온씨에게 주어진 가사 관리권을 거두었다. 연채 그 계집애는 아직 기세가 남아 있으니 그 기세를 몰아 또 한바탕 난리를 칠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자, 묘씨는 더 많은 사람을 보내지 않은 것을 속으로 후회했다.

“예, 열쇠를 받아 왔습니다.”

전 마마가 머쓱해하며 답했다.

“큰댁 마님께서는 안 그래도 푹 쉬며 몸조리할 생각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따 둘째 댁으로 사람을 보내 장부도 전달하겠노라 하셨고요.”

“어… 어머니. 전 마마에게 큰 새언니의 가사 관리권을 회수해 오라고 하셨어요?”

엽영교도 온씨와 함께 일 년 정도 집안일을 관장하는 법을 배웠었기에 한눈에 열쇠꾸러미를 알아보았다.

그녀는 엽이채가 저지른 역겨운 짓거리가 떠올랐다. 그렇다고는 하나 득세를 한 둘째 새언니네도 아직 난리를 피우러 가지 않았는데 자기 어머니가 먼저 나서서 역겨운 그 사람들을 추켜세우다니. 그녀는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엽영교는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그 사람들은 남의 혼사를 가로챈 뻔뻔한 인간들이에요. 그런 인간들을 계속해서 추켜세워 줘야 해요? 어머니는 부끄럽지도 않으세요?”

엽영교의 말에 묘씨의 얼굴빛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추켜세워야 하면 추켜세워야지!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말거라. 넌 같은 배에서 나온 형제자매가 없어. 그러니 나중에 시집가도 친정에 의지해야 해! 아마 그 친정은 둘째네가 될 것이다. 그러니 네 둘째 새언니와 친하게 지내거라.”

엽영교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그런 구역질 나는 소리는 하지도 마세요! 필요 없거든요!”

엽영교는 그 말을 남긴 후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 버렸다.

“얘야……!”

묘씨가 고개를 들었을 때는 흔들거리는 주렴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안녕당을 나온 엽영교의 손엔 가벼운 나사羅紗로 만든 반투명한 도화선桃花扇이 들려 있었다. 호숫가를 따라 청석판이 깔린 오솔길을 사뿐사뿐 걸어가다 보니 그녀는 어느새 해당거 앞에 도착해 있었다.

엽영교는 새하얗게 칠해진 외벽을 쳐다볼 뿐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안에서는 조잘조잘 떠드는 목소리와 물건을 나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엽영교가 새까만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안을 들여다보니 앞뜰의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엔 진귀하고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 쌓여 있었고, 여종들은 그 물건들을 옮기며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고모.”

그때 엽연채가 금실로 꽃무늬를 수놓은 암홍색 비단 치마를 휘날리며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걸어 나왔다. 엽영교는 엽연채를 쓱 훑어봤다. 반듯하게 일자一字를 유지하는 검은 눈썹, 살짝 위로 솟은 눈꼬리, 반짝반짝 빛나는 눈빛에 아름답고 매력적인 미소를 보니 지금 그녀의 기분이 아주 좋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엽영교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전부터 이 큰조카와 마음이 맞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전 엽이채가 엽연채의 혼사를 가로챈 것을 보며 속으로는 그녀를 동정하고 있었다.

그러던 참에 엽연채가 녹죽원에서 한바탕 소동을 일으킨 후, 혼수를 바리바리 싸 들고 되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속으로 저도 모르게 엽연채의 행동에 감탄했다.

그 덕분일까. 엽연채가 지금 자신의 곁으로 다가와 생기가 넘치는 미소를 보이자, 그동안 품고 있던 적대감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엽영교가 입을 오므리며 말했다.

“흠, 이제 어떻게 할 거니?”

“주씨 가문으로 돌아가려고요.”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엽영교가 깜짝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통도 참 크다. 그냥 그렇게 시집가겠다고?”

“안 그러면요?”

생각해 보니 엽연채의 말이 맞긴 했다.

“그 장박원이라는 놈이 겉으로 보기에는 여러 면으로 완벽해 보이더니 속은 그렇게 썩어 있는 놈인 줄 누가 알았겠어! 제 집안 식구들에게 독이나 먹이는 불효막심한 개자식인데 그런 놈한테 시집가는 여인은 재수 옴 붙은 거지, 뭐!”

장씨 가문에서는 도둑이 들었다고 둘러대긴 했지만 다들 똑똑히 알고 있었다. 어느 간 큰 도둑놈이 대리시경의 집에 도둑질하러 들어가겠는가? 거기다 사람들이 밤을 새우며 당직을 서는 혼례식 전날 밤에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장박원이 벌인 짓이 분명했다.

“주씨 가문이라……. 사실 주씨 가문 셋째 공자가 인품만 좋다면 뭐 나쁠 거 없지. 그 공자는 출신도 별로인데 네가 혼수를 이렇게나 많이 가져가면 널 부처님 모시듯 떠받들지 않겠어? 나중에 분가할 방법을 찾아서 그 집에서 나오면 분명 만족스럽게 지낼 수 있을 거야.”

“고모 말씀이 맞아요.”

엽연채가 작게 한숨을 쉬며 동조했다. 그러곤 감개무량한 눈빛으로 엽영교를 쳐다보며 말했다.

“예전의 저는 승부욕만 강한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고모가 남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만 챙기는 사람이라고만 오해했고요. 근데 지금 와서 보니 사실 고모가 이 집안에서 절 가장 이해해 주는 사람이지 뭐예요.”

그 말을 들은 엽영교의 조그만 얼굴이 붉어졌다. 자신은 남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이 맞았다. 하지만 엽연채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속상한 일들을 겪는데도 침착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며 깨달은 바가 있었다.

“방금 했던 말을 이따가 저희 어머니에게 해 주세요. 고모는 제삼자이니 고모가 나서서 이야기하시면 어머니도 들으실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엽연채의 눈빛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저희 어머니께서는 충동적으로 화를 잘 내는 분이세요. 앞으로 둘째 숙모가 의기양양하게 설칠 테니 고모가 잘 좀 보살펴 주세요.”

이에 엽영교가 부채를 살살 흔들더니 부끄러운 얼굴로 말했다.

“우리 어머니도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강한 사람이지. 그래도 우리 어머니는… 그 정도가 다야. 둘째 새언니네 편을 들긴 해도 도를 넘어서까지 편들지는 않을 거야.”

그 말을 들은 엽연채의 눈이 번뜩였다.

‘지금은 그저 둘째 새언니의 편을 조금 들어주는 것뿐이며 작정하고 어머니를 괴롭히지는 않겠지만 앞으로는…….’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엽연채는 자기도 모르게 복잡한 눈빛으로 엽영교를 쳐다봤다.

얼마 후면 고모의 정혼자가 사고로 세상을 뜨게 된다. 그럼 묘씨는 완전히 둘째 숙모의 편으로 돌아서서 그녀의 비위를 맞추며 갖가지 방법으로 어머니를 괴롭힐 것이었다.

엽영교에게는 이미 혼인을 약속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묘씨의 외삼촌 댁 사촌 오라버니인 묘기화였다. 하지만 엽연채는 묘기화가 명이 짧은 사람이란 걸 알고 있었다.

전생에서 그녀는 장씨 가문에 시집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소식 하나를 전해 듣게 되었다. 바로 묘기화가 주루酒樓에서 친구와 술을 마신 후 계단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실족사했다는 소식이었다. 크게 상심한 엽영교와 묘씨는 어떻게 그렇게 허무하게 세상을 떠날 수가 있냐며 안타까워했다.

게다가 그 일 탓에 엽영교는 혼담 이야기를 꺼내기 어려운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묘씨는 묘기화의 죽음이 엽영교에게 그저 곤란한 사정 정도가 아니라 굉장한 치명타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묘기화가 세상을 떠난 후, 묘씨의 새언니인 팽씨가 찾아와 울고불고 소리를 지르며 행패를 부렸다. 그러면서 묘기화는 엽영교에게 진심을 다했으니, 엽영교도 자기 아들을 위해 망문과부望門寡婦(정혼한 사내가 혼례 전에 죽어서 시집도 가 보지 못하고 과부가 된 여인)로 살아야 한다고 강요했던 것이다.

물론 묘씨는 그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귀하디귀하게 키운 딸을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 때문에 망문과부로 살아가게 할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팽씨는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묘씨가 끝까지 자신의 요구에 응하지 않자, 앙심을 품은 팽씨는 엽영교가 기가 세서 묘기화를 잡아먹었다고 헛소문을 퍼뜨렸다.

거기다 그날 엽영교와 묘기화가 주루에서 함께 식사하기로 했는데 엽영교가 일이 생겨 약속을 깼고, 그 바람에 시간이 빈 묘기화는 마침 그곳에서 친구를 만나 함께 술을 마신 후 변을 당했다는 말까지 덧붙인 것이었다.

소문이란 참 무서운 법이다. 더군다나 이 시대 여인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두 단어가 바로 ‘삼수변氵(‘물 수水’ 자의 부수)’과 ‘극부克夫(남편에게 독이 되는 여인)’였으니, 정혼자를 잡아먹었다는 꼬리표가 붙은 엽영교의 혼사는 더욱 막막해졌다. 그렇게 그녀가 열여덟 살이 되도록 어느 가문에서도 혼사를 맺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 후 엽연채는 난산으로 병을 얻어 몸져눕게 되고, 엽이채가 장씨 가문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엽이채의 신분은 첩실에 불과했지만 아이를 가지면서 엽씨 가문에서의 위상이 높아졌다. 묘씨는 장씨 가문에서 엽영교의 혼사를 주선해 주길 바라며 둘째 며느리 손씨에게 온갖 아첨을 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바짝 엎드려 아랫사람을 자처했던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엽연채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자식을 위하느라 마음고생했을 묘씨에게 안타까움을 느꼈다. 이번 생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할 것이다. 묘기화가 그리 헛되이 세상을 뜨지 않게 막아 낼 것이다. 어머니를 위해서, 또 고모를 위해서도 말이다.

“뭘 그렇게 멍하니 있는 거니?”

엽영교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엽연채가 웃으며 대꾸했다.

“고모, 제가 주씨 집안에서 자리 좀 잡고 나면 함께 바깥나들이나 할까요?”

“그래, 나야 좋지.”

엽영교는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응했다.

“시간이 늦었네요. 이제 가 봐야겠어요.”

“물건들은 다 정리된 거지?”

“네. 녹죽원에서 가져온 혼수품도 마차를 구해 와 거기에 옮겨 놓았어요. 방 안에 있던 것들도 거의 준비를 마쳤고요.”

엽연채는 그렇게 말하며 방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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