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그 시각, 녹죽원.
엽연채의 명을 받은 추길이 여종들에게 계속해서 지시를 내리며 혼수품을 옮겼다. 그동안 엽연채는 혜연에게 밖에 나가 마차를 구해 오라고 명했다. 그런 후에 자신은 영귀원으로 향했다.
영귀원 대문 앞에 도착한 엽연채는 계단에 서서 두리번거리는 채 마마를 발견했다. 엽연채를 본 채 마마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아가씨, 혼수품을 가지러 녹죽원에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엽연채가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어머니께는 말씀드리지 않았죠?”
“그럼요. 어제저녁 주인나리께서 장씨 가문에서 보낸 예물을 아가씨 거처에서 가져가신 일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채 마마는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님께서는 화를 잘 내시는 분이시잖아요. 주인나리께서 아가씨에게 들어온 것을 빼앗아 가신 걸로도 모자라 오늘은 그렇게까지 하셨다는 걸 마님께서 알게 되시면 화를 못 이기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요. 그건 그렇고 아가씨께서는 방금 전 녹죽원에서…….”
엽연채는 미소만 살짝 짓더니 그녀를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갔다. 침실로 들어서니 여전히 약 냄새가 풍겼다. 어두운 안색의 온씨는 두 눈을 꾹 감고 침상에 누워 있었다.
“어머니, 깨어 계신 거 다 알아요. 괜히 아픈 사람처럼 거기 누워서 두 눈을 꼭 감고 계시지 마세요.”
엽연채가 말했다. 온씨는 괴로워 죽겠는데 딸이 이렇게 볼멘소리를 할 줄은 몰랐다.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가 말했다.
“너…….”
“어머니, 제가 말씀드렸죠.”
엽연채는 침상 옆에 놓인 수돈繡墩(도자기로 만든 북 모양의 걸상) 위에 앉았다.
“어제저녁 제가 집을 떠나 있을 때 할아버지께서 사람을 시켜 제 혼수품의 절반을 녹죽원으로 가져가셨답니다.”
“뭐라?”
그 말을 들은 온씨는 화가 나 벌떡 일어났으나 이내 분노로 의식이 희미해졌다.
“그런데 제가 방금 여종들을 데리고 녹죽원으로 가서 혼수품을 전부 빼앗아 왔어요.”
그 말에 방금 전까지 성을 내던 온씨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네가 말한 게 전부 사실이냐? 그런데… 아버님께서 네가 혼수품을 가져가게 놔두셨느냐? 이 집안엔 강자에겐 아첨하고 약자는 짓밟으려는 자들뿐인데, 네가 어떻게 혼수품을 손에 넣었느냐…….”
온씨는 분노를 느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엽연채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내놓지 않으면 기둥에 머리를 들이받고 죽어 버린다고 협박했어요. 그러면서 엽이채를 장씨 가문에 시집보낼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했죠. 너 죽고 나 죽는 거죠!”
“얘가…….”
그 얘기를 들은 온씨는 잘했다고 생각하면서도 뒷일이 걱정됐다.
“어떻게 네 목숨을 걸고 협박을 하니. 만약에 저들이 안 받아들였으면 어떡하려고?”
“어머니도 아시겠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절 때려잡고 싶어도 자기들이 더 큰 손해를 볼까 봐 염려되어 절대 그러지 못했을 거예요. 제가 체면을 버리고 진짜 그렇게 할 수 있나 지켜보는 게 고작이었겠죠.”
엽연채가 이어서 말했다.
“어머니께서도 스스로가 허약한 환자가 아니라는 걸 아셔야 돼요.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침상에 누워 화만 내셔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에요. 아무도 저희를 동정하지 않아요!”
온씨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은 일들이 벌어질 거예요.”
엽연채는 작게 한숨을 쉬며 모친을 다독였다.
“엽이채가 득세를 했으니 권력이 둘째 숙모에게 넘어갈 거예요. 하인들은 힘을 얻은 숙모에게 알랑대면서 어머니를 업신여길 거고요. 아버지는 첩실에게 온 정신이 쏠려 있고, 오라버니는 변변치 않죠. 저도 수시로 친정에 오기는 힘들 거예요.
어머니, 이미 일은 벌어졌습니다. 어머니께서 아무리 목이 쉬도록 울고불고 화를 내셔도 아무 소용이 없단 뜻이죠. 그래도 제가 항상 어머니를 걱정하고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이 딸을 위해서라도 꼭 건강을 잘 챙기셔야 해요. 저희는 고통스러운데 저들을 통쾌하게 해 줄 수는 없죠. 누구 좋으라고요.
그리고 애초에 장씨 가문과 엽씨 가문의 혼사는 떳떳하지 못한 혼사예요. 그 사람들도 내심 꺼림칙할 겁니다. 만약에 그것들이 어머니를 박대하면 체면을 챙기느라 앉아 가만히 당하지 마시고 그것들의 약점을 공격하셔야 해요. 그렇게 해서도 안 되면 그땐 절 찾으시고요.”
엽연채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온씨의 얼굴은 눈물범벅이 됐다. 그녀는 승부욕이 강하고 화를 잘 내는 사람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귀한 적장자의 가족이었지만, 숨겨진 고충을 아는 건 그녀 자신뿐이었다.
남편과 아들이 믿음직하지 못해 그동안 모든 고민을 혼자서 짊어졌다. 거기다 딸마저 중요한 혼사를 빼앗겨 버리자 그녀는 말 그대로 거의 정신이 붕괴된 상태였다.
그런데 지금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는 딸을 보자 그제야 자기 혼자 모든 고민을 짊어지고 있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거기다 딸이 장씨 가문에서 보낸 예물까지 도로 되찾아 왔으니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격려가 됐다. 딸이 이제 정말로 어른이 된 것이다.
“어머니, 아직 말씀 안 드린 게 있어요. 전 장씨 가문에서 보낸 예물을 손에 넣었을 뿐만 아니라, 엽이채에게 주기로 했던 혼수까지 동전 한 푼 남기지 않고 싹 쓸어 올 거예요.”
엽연채의 얼굴은 득의양양했다.
“얘야, 너무 심한 거 아니니? 뒷일은 걱정도 안 되느냐?”
온씨가 깜짝 놀라 물었다.
“어차피 절 미워하기는 마찬가지인데요, 뭐. 이리 안 한다고 안 미워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얘는!”
온씨는 딸의 말에 눈물을 거두고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모녀가 속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밖에서 온씨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님, 전 마마가 왔습니다.”
잠시 후, 여종이 바깥에 달린 선홍색 발을 걷었다. 엽연채는 청색 배자를 입은 어멈이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이고. 약 냄새가 진동을 하네요. 마님, 괜찮으신 겁니까?”
전 마마는 그렇게 말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침상에 기대어 앉은 온씨의 얼굴에는 방금 전에 짓고 있던 미소가 아직 남아 있었다.
“자네가 걱정해 준 덕분에 아주 좋아졌네.”
전 마마가 주렴을 걷어 올리고 침실 안으로 들어와 온씨의 침상 앞에 섰다. 온씨의 모습을 본 그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녀의 기억으로는 오늘 아침 정청에서 온씨를 봤을 때만 해도 그녀의 피부는 까칠했고, 두 눈은 어둡고 흐릿했으며, 원망으로 가득한 얼굴이었다. 한마디로 산송장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다소 창백하기는 해도 두 눈이 반짝거리고 활기가 넘쳐흐르는 것이, 신수가 훤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에 전 마마는 하려던 말을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오늘 그녀가 여기에 온 건 집안일을 관장하는 권한을 둘째 댁에 넘겨주라는 주인마님 묘씨의 명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온씨가 아침에 봤을 때처럼 비실비실하고 침상에 누운 채 일어나지도 못했다면 그녀는 손쉽게 온씨에게 묘씨의 명을 전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상태를 보니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머쓱해진 그녀는 일단 화제를 돌렸다.
“마님, 식사는 하셨습니까?”
“죽을 좀 먹었네.”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대신 대꾸했다.
“추길아, 어서 차를 따르거라.”
전 마마는 껄끄러운 이야기를 전하러 온 참이다 보니, 엽연채가 녹죽원에서 보였던 사나운 모습이 절로 떠올랐다. 어찌 감히 차를 마실 수 있겠냐는 생각이 들어 미소를 띤 채 손사래를 치며 사양했다.
“괜찮습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또 물건을 드리러 주인나리를 찾아뵈어야 해서요. 제가 여기 온 건…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주인마님께서 말씀하시길 마님께서는 와병 중이시니 집안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마님께서는 마음 편히 몸조리에 집중하고 푹 쉬시라고…….”
말을 마친 전 마마는 온씨가 분명 펄쩍 뛰며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엽연채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그 일 때문에 왔군요. 그러잖아도 어머니께서 이 번거로운 잡무를 어떻게 떠넘겨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셨는데, 마침 할머니께서 사람을 보내셨네요.”
온씨는 힘을 잃은 자신을 이리도 빨리 밀쳐 내는 묘씨를 떠올리며 마음이 언짢아졌다. 하지만 딸이 한 말도 있고, 이미 힘을 잃은 것도 사실이니 더 이상 오기를 부려 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았다.
온씨가 미소를 지으며 채 마마를 불렀다.
“곳간 열쇠를 가져오게. 그리고 모든 장부를 정리해서 이따가 둘째 댁에 보내 주고.”
전 마마는 깜짝 놀랐다. 온씨가 이렇게 말이 잘 통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둘째 댁에 보내 주고.’라는 마지막 말을 듣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잠시 후, 채 마마가 다가와 미소를 짓더니 열쇠꾸러미를 건네주었다.
“언니, 여기 열쇠요.”
열쇠를 받아든 전 마마는 더는 머무를 염치가 없어 감사하다는 인사를 올리고는 얼른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흔들리는 주렴을 쳐다보며 채 마마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가문의 안주인이라는 사람이 먼저 나서서 손아랫사람인 둘째 며느리에게 알랑거리는 꼴 좀 보세요. 창피한 줄도 모르고!”
온씨는 그만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속이 다 후련해졌다.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분명 불쾌해하며 전 마마와 말싸움을 한바탕 벌였을 테고, 그랬음에도 결국 가사 관리권을 빼앗겼을 터였다.
그러나 이번엔 자신이 나서서 직접 건네주며 도리어 전 마마의 체면을 제대로 구겨 놓았다.
“보세요, 어머니. 집착할 필요가 없는 것도 있다니까요.”
“그래. 네 말이 맞구나.”
온씨는 엽연채의 손을 꼭 잡으며 맞장구쳤다.
“내 딸이 이제 다 컸구나.”
그 말에 엽연채는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그 시각 안녕당.
묘씨는 옻칠한 나한상 위에 옆으로 누워 있었다. 국화 꽃잎이 새겨진 청자 찻잔의 뚜껑을 열자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향을 맡아보니 최고급 대홍포大紅袍(무이암차라고도 불리며, 우롱차 같은 반발효차임)였다.
수돈에 앉아 있는 엽영교는 조그만 입을 삐죽 내밀고 손수건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곧 그녀가 볼멘소리를 했다.
“어머니, 다 들었어요. 연채가 녹죽원에서 한바탕 소동을 벌였다면서요? 그런데 왜 절 깨우지 말라고 하셨어요? 어머니 때문에 좋은 구경거리를 놓쳤잖아요!”
엽영교는 평소 낮잠을 자는 습관이 있었다. 매일 묘씨와 함께 점심밥을 먹은 후 안녕원의 장지문에 기대어 낮잠을 자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