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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15화 (15/858)

제15화

“이,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냐!”

엽학문이 성을 내며 얼굴에 묻은 종잇조각을 떼어냈다.

“괜찮습니다, 아버님. 부인께서 자신의 잘못을 알았으면 됐죠.”

손씨는 엽학문을 말리며 말했다.

“부인, 잠시 후에 혼수 단자를 다시 적어 드릴게요.”

“다시 적을 필요 없습니다.”

엽연채는 턱을 들어 올리며 단호하게 대꾸했다.

“난 혼수 단자가 없어도 녹죽원 안에 있는 혼수품을 가져갈 거라는 걸 보여 주려고 한 겁니다. 전부 가져갈 겁니다. 하나도 남기지 않고!”

얼이 빠진 손씨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걸 왜 부인께서 가져갑니까? 이건 장씨 가문에서 보낸 예물입니다. 부인께서는 장씨 가문에 시집가는 게 아니니 이것들은 부인의 것이 아니지요. 하하, 혼수품이 더 필요하시면 주씨 가문에 가서 물어보세요!”

“내 것이 아니면 엽이채의 것이란 말입니까?”

엽연채는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무릇 공명정대한 사람들은 뒷공론하지 않는 법이죠! 엽이채가 내 남편을 빼앗고 지체 높은 가문에 시집가는 바람에 고관대작의 적장녀가 한낱 서자에게 시집갈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이건 엄연히 엽이채가 저지른 잘못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난 가문을 위해 이미 한 번 양보했어요. 그러니 여기 있는 혼수품은 엽이채와 우리 가문이 나에게 반드시 줘야 하는 보상인 셈이죠! 난 장씨 가문에서 보낸 예물뿐만 아니라 우리 가문에서 엽이채에게 주려고 준비한 혼수까지 몽땅 가져갈 겁니다. 동전 한 푼도 넘겨주지 않을 겁니다!”

“이, 이건 대놓고 빼앗아 가는 겁니다!”

두 눈을 부릅뜬 손씨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분노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맞아요. 대놓고 빼앗아 가는 거예요. 그래서요?”

엽연채가 콧방귀를 뀌며 이어서 말했다.

“왜요? 엽이채가 대놓고 내 남편을 빼앗아 간 건 괜찮고 내가 그 애의 혼수를 빼앗는 건 안 됩니까?”

손씨는 갑자기 심장에 심한 통증이 느껴져 가슴을 부여잡았다.

“이, 이! 뻔뻔해도 유분수지!”

“아, 고맙게도 이건 전부 엽이채에게서 배운 겁니다.”

손씨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런 고얀 것!”

엽학문은 엽연채가 이렇게까지 원망을 품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대놓고 훔쳤다는 말까지 서슴없이 내뱉다니, 여인의 조신함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엽학문이 미처 손쓸 새도 없이 그에게 한 방 먹여버린 셈이었다.

이 예물들은 절대로 엽연채가 가져가서는 안 되었다. 엽이채는 곧 출가하므로 혼사를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전처럼 몰락한 서자에게 시집가는 거라면 적당히 혼수를 준비해서 들려 보내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이제 엽이채가 시집가게 될 곳은 장씨 가문이었다. 제대로 격식을 갖춘 혼수를 보내야만 했다.

‘그런데 방금 저 아이가 뭐라고 했던가. 장씨 가문에서 보낸 예물뿐만 아니라 집안에서 엽이채를 위해 준비해 놓은 혼수마저 하나도 남김없이 가져가겠다고?’

엽학문이 낯빛이 어두워졌다. 엽연채가 계속 억지를 부리면 더 실랑이할 것 없이 무력으로 저지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는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이라 마음에도 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소란 피우지 말거라! 그건 그저 오해였다. 네 여동생이 다치는 바람에 의원에 데려다주려 했을 뿐이야. 너는 언니가 되어서는 포용력과 겸손함은 눈곱만큼도 없단 말이냐! 여봐라. 어서 큰아가씨를 해당거로 데려가거라!”

이에 엽연채는 큰소리를 치기는커녕 희고 매끈한 손을 들더니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세워진 꽃무늬 기둥을 가리켰다. 그러곤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다쳐서 의원에 보낸 것이든 눈이 맞아 사랑의 도피를 한 것이든 저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제게 혼수를 주지 않으시겠다면 저기에 머리를 들이받고 이곳에서 죽을 겁니다.”

“지금 죽겠다고 협박하는 겁니까? 아이고, 누가 신경이나 쓴다고요! 죽고 싶으면 죽으세요!”

손씨는 냉소를 지으며 손에 들고 있는 부채를 흔들었다.

“아, 정말 신경 안 쓰신다는 거죠?”

엽연채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러자 부채를 흔들던 손씨의 안색이 갑자기 확 변했다. 마치 파리를 삼킨 것처럼 메스꺼운 표정이었다.

그녀는 엽연채의 목숨 따윈 안중에도 없었고 엽연채가 빨리 죽어 버리기를 간절히 바라기까지 했다. 하지만 지금 죽어서는 안 된다. 정안후부에서 죽는 건 더더욱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엽이채의 평판이 어떻게 되겠는가?

청첩장이 잘못 쓰였을 뿐이라고, 원래 주씨 가문에 시집가기로 한 건 엽연채고 장씨 가문에 시집가기로 한 건 엽이채라는 소문을 이제 막 퍼뜨린 참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 소문을 그리 쉽게 믿지는 않을 테니 시간과 노력을 들여 천천히 포장해야 했다.

지금 도성 내의 모든 눈이 정안후부를 주시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엽연채가 집 안에서 자진했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면, 엽이채가 정말로 형부를 꼬셔 사랑의 도피를 했고 그걸 따지러 온 사촌 언니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 된다.

그렇게 되면 치부를 가릴 수 없게 되는 건 물론이고, 체면을 중시하는 장씨 가문에서는 절대로 부덕婦德도 없고 언니를 죽음으로 내몰기까지 한 악독한 엽이채를 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장씨 가문에서 자기들이 엽이채와 한통속이 되어 못된 짓을 벌였다는 의심을 받게 놔둘 리가 없었다.

손씨는 가슴에 손을 얹은 채 격하게 숨을 들이마셨고, 상황이 파악된 엽학문은 깜짝 놀라 외쳤다.

“저 아이가 기둥에 들이받지 못하게 붙잡아라! 어서 묶어 버려!”

“반항하지 않을 테니 묶으세요!”

엽연채는 배시시 웃더니 그를 향해 몸을 굽혔다. 그러곤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 손녀는 급할 게 없습니다. 있는 게 시간이니까요. 하지만 저는 이제 주씨 가문 며느리이며, 한평생 친정에 묶어 둘 수는 없다는 걸 잊지 마세요. 내일 아침 대문 앞에 머리를 들이받고 죽은 시신으로 발견되는 것도 괜찮겠네요!

아, 맞다. 죽기 전에 이채와 할아버지께서 어떻게 절 핍박했는지 분명히 적어 둬야겠어요. 생각해 보니 내일 죽는 게 더 충격적일 거 같네요. 감사해요, 할아버지, 둘째 숙모.”

엽학문은 화가 나서 목구멍에서 피가 솟구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이런 고얀 것! 대체 원하는 게 뭐냐?”

“할아버지, 건망증이 심하시네요. 제가 방금 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장씨 가문에서 보낸 예물로 제 혼수를 채울 거라고요. 그리고 전에 엽이채를 위해 준비해 둔 혼수도 함께 가져갈 겁니다. 하나도 남기지 않고요!”

견디지 못한 손씨는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엽학문은 험상궂은 얼굴을 씰룩거리더니 소매를 거칠게 휘날리고는 돌아서서 가 버렸다.

상황을 지켜보던 추길과 혜연은 깜짝 놀라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녀들은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에서도 존경스러운 눈길로 엽연채를 쳐다봤다.

둘은 어제부터 아가씨가 변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예전의 아가씨였다면 우선 불같이 화부터 냈을 것이다. 그런 다음 콧방귀를 뀌며 자신은 장씨 가문에 시집가는 게 아니니 그곳에서 보낸 예물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라고 선포했을 것이다. 어디 지금처럼 대놓고 빼앗아가는 통쾌한 복수를 했을까!

“마님! 마님! 정신 차리세요!”

여설과 다른 여종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땅에 쓰러진 손씨를 부축하며 계속 흔들어댔다.

“어서 너희 마님을 모시고 가지 않고 뭐 하느냐? 여기서 뿌리라도 내리려는 거냐? 내가 거름이라도 뿌려 주랴?”

추길이 앞으로 다가서더니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설은 창백해진 얼굴로 씩씩거리며 되받았다.

“그래 봤자 혼수품 조금 가지고 우쭐대기는! 우리 둘째 아가씨가 장씨 가문으로 시집가면 지체 높은 가문의 정실부인이 되시는 거니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데. 앞으로 원하시는 건 다 가질 수 있으실 거야.”

여설은 다른 여종과 손씨를 부축하며 허둥지둥 자리를 떴다.

* * *

그 시각, 옥리원.

귀비탑에 옆으로 누운 엽이채는 수심에 잠긴 얼굴이었다. 소청에는 둥근 칠소반漆小盤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다섯 가지 반찬과 국 한 그릇이 준비되어 있었다. 엽이채의 여종 류아는 상 위에 젓가락을 내려놓은 후 고개를 돌려 말했다.

“아가씨, 어서 와서 식사하세요.”

엽이채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머니께서 오신 후에 먹을래!”

“아가씨, 걱정 마세요. 이젠 예전과는 상황이 다릅니다. 아가씨 편을 들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류아가 웃으면서 안으로 들어왔다.

“아가씨, 그렇게 걱정하실 바에야 차라리 직접 가 보시죠.”

그 말에 엽이채의 표정이 굳어졌다.

“난 안 가.”

“아가씨! 아가씨!”

이때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울리더니 이내 회색 배자를 입은 어린 여종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마님께서 쓰러지셨습니다.”

“뭐라?”

엽이채는 벌떡 일어나더니 밖으로 나가 물었다.

“어머니가 어찌 되셨다고?”

“큰아가씨께서 녹죽원에서 혼수품을 가져가려고 하자 노태야와 둘째 마님께서 이를 막으려고 녹죽원으로 가셨어요. 그런데 큰아가씨께서…….”

여종은 머뭇머뭇하며 엽이채의 눈치를 살폈다.

“큰아가씨께서 혼수품을 못 가져가게 하면 기둥에 머리를 들이받고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아가씨께서 장씨 가문에 시집가지 못하도록 막으시려는 거죠.”

얘기를 들은 엽이채의 머리가 윙윙거렸다. 온몸이 덜덜 떨리며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녀는 두려움과 동시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아가씨, 어서 마님을 보러 가시지요!”

류아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난 안 간다!”

엽이채는 창백해진 얼굴로 뒷걸음을 치더니 결국 침실로 숨어 버렸다. 지금쯤 온 집안에는 자신이 사촌 언니의 혼사를 가로채고 혼수까지 빼앗으려고 했다는 소문이 쫙 퍼졌을 것이었다. 어떻게 사람들 앞에 얼굴을 내밀 수 있겠는가.

“아가씨…….”

류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녀는 속으로 엽이채를 나무랐다.

‘형부를 가로챘으면 당연히 체면이 깎이리라는 것을 몰랐나? 이미 체면은 깎였으니 끝장을 봐야지. 이제 와서 왜 겁먹고 난리람!’

그러나 류아는 결국 혼자 문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손씨의 방에 도착하자 여설이 그녀의 인중을 눌러 주고 있었다. 잠시 후 손씨가 작게 신음소리를 내더니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장씨 가문에서 보낸 예물은……?”

손씨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몸을 일으켰다.

“그 빌어먹을 년이 가져갔구나!”

“마님, 고정하십시오. 지금 제일 중요한 건 둘째 아가씨의 혼사입니다. 쥐새끼 한 마리 잡으려다 귀하신 우리 둘째 아가씨께서 다쳐서는 안 되잖습니까. 혼수야 다시 준비하면 되죠.”

여설이 좋게 달래자 손씨는 숨을 한번 깊이 들이마시더니 알았다고 대답했다. 지금으로서는 아무런 대책이 없으니 그리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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