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14화 (14/858)

제14화

“녹죽원에 가서 혼수품을 가져오신다고요?”

혜연이 깜짝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건… 장씨 가문에서 보낸 예물입니다!”

엽연채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이름이 적힌 혼수 단자를 보내왔으니 당연히 이 엽연채의 혼수품이지! 장씨 가문에서 보낸 거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가자!”

속으로 벼르고 있던 추길은 엽연채의 명이 떨어지자 침소로 쏜살같이 달려가 혼수 단자를 꺼내왔다.

“가자!”

여종들은 가슴이 떨렸다. 지금의 아가씨는 예전과는 다른 처지였다. 하지만 이미 힘을 잃었음에도 아가씨에게는 여전히 위엄이 남아 있었다.

평소 아가씨는 자신들을 한없이 사근사근하게 대했고 공정하고 명확한 기준에 따라 상벌을 주었다. 그런 아가씨께서 둘째 아가씨에게 남편을 빼앗겼으니 자신들도 울분이 치밀어 견디기 힘들었다.

지금 엽연채가 큰 소리로 호령하는 모습을 보니 다들 가슴속의 뜨거운 피가 머리로 솟구치는 느낌이 들었다. 여종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열 명쯤 되어 보이는 무리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문밖을 나서 녹죽원을 향해 걸어갔다. 엽연채가 여종들을 이끌고 어디론가 향하는 모습을 본 다른 하인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창고 옆 호숫가를 지나고 있는데 화초를 관리하는 배짱 좋은 두 여종이 혜연을 끌어당기며 살며시 물었다.

“혜연 언니, 지금 어디 가는 길이에요?”

“그게…….”

혜연은 솔직히 대답해야 할지 말지 망설였다. 사실대로 말하면 이 여종들은 당장에 노태야나 둘째 아가씨에게 달려가 고해바칠 텐데, 그럼 자신들은 행동을 개시하기도 전에 저지될 것이었다.

혜연이 망설이고 있는 그때,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녹죽원에 혼수품을 가지러 가는 길이다.”

말을 마친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녹죽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멍해 있던 혜연은 얼른 엽연채를 쫓아갔다. 질문을 한 두 여종은 깜짝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방금 큰아가씨께서 혼수를 가지러 녹죽원에 간다고 하셨지?”

어젯밤 엽학문은 사람을 시켜 장씨 가문에서 보낸 예물을 옮기라고 했다. 그런 큰 소식을 숨길 수 있을 리 만무했고 이미 집안에 다 퍼져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큰아가씨께서 주씨 가문에 시집을 가는 것도 아닌데 장씨 가문에서 보낸 예물을 가지러 간다고?’

눈알을 굴리던 다른 여종이 말했다.

“큰아가씨는 무슨! 주 부인이라고 불러야지! 주씨 가문에 시집가서 신분이 낮아진 부인이잖아. 가자. 얼른 가서 둘째 아가씨께 상금이나 받자.”

두 여종은 그리 말하고는 하던 일도 멈추고 재빨리 옥리원을 향해 달려갔다. 예전이었다면 아무리 담이 커도 돈 몇 푼 받자고 감히 엽연채와 적장자 집안의 미움을 사는 행동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예전과 상황이 달라졌다. 엽연채는 몰락한 집안의 서자에게 이미 시집간 반면, 엽이채는 곧 지체 높은 집안의 정실부인이 될 참이었다. 또 주인 나리는 이 혼사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으니, 정안후부 사람들의 권력 관계에 대규모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 * *

목욕을 마친 엽이채는 뽀송뽀송한 새옷으로 갈아입고 귀비탑貴妃榻(등받이가 무척 아름답고 전체적으로 우아한 곡선을 그리는 소파 베드)에 편안히 옆으로 누워 있었다. 이제야 기운을 완전히 되찾은 듯했다. 한편 손씨는 식사 준비를 위해 여종에게 이것저것 지시하고 있었다. 이때 쿵쿵거리는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마님, 둘째 아가씨. 일 났습니다!”

여설이 달려 들어오며 말했다.

“무슨 일이냐?”

깜짝 놀란 손씨는 하마터면 손에 들고 있던 청증계화어清蒸桂花魚(쏘가리 찜) 그릇을 떨어뜨릴 뻔했다.

‘설마 내 딸의 혼사에 무슨 변고가 생긴 건 아니겠지?’

여설은 쭈뼛쭈뼛하며 손씨를 쳐다보더니 금세 용기를 냈다.

“큰아가씨께서 혼수품을 가지러 여종들을 데리고 녹죽원에 가고 있습니다.”

“뭐라? 혼수품을 가지러 가? 녹죽원에 있는 혼수품은 연채의 혼수품이 아니다!”

손씨가 두 눈을 부릅뜨고 외치자 엽이채가 물었다.

“녹죽원의 혼수품이 뭐예요?”

“장씨 가문에서 보낸 예물을 말하는 것이다.”

손씨는 냉소를 짓더니 손에 들고 있던 접시를 탁자 위에 탁 내려놓고는 말했다.

“네 큰어머니가 자기 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너도 알 거다. 딸이 혼인한다니까 글쎄, 장씨 가문에서 보낸 예물을 그대로 혼수로 다시 보내려고 했어. 그런데 이젠 장씨 가문에 시집을 못 가게 됐으니 내가 네 할아버지께 장씨 가문에서 보낸 예물을 옮겨 달라고 부탁드렸지.”

어제 엽연채는 급하게 출가하는 바람에 혼수를 가져갈 겨를이 없었다. 손씨는 자기 딸이 장씨 가문에 시집갈 가능성이 크지만 엽연채가 친정에 오면 분명 혼수를 가져갈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젯밤 엽학문에게 사람을 보내 장씨 가문에서 보낸 예물을 옮겨 달라고 청한 것이었다.

엽이채는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큰언니가 가져가게 둘 수는 없어요! 어머니, 얼른 가서 큰언니를 막아 주세요.”

엽이채는 감히 자기가 나설 수 없었다. 그녀는 줄곧 사촌 언니를 무서워했다. 게다가 장박원을 빼앗기까지 했으니 양심의 가책을 느껴 더더욱 엽연채를 마주할 수 없었다.

“걱정 말거라!”

손씨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시집을 가면서 신분이 높아지는 게 누구더냐? 그 아이는 아직도 자신이 예전처럼 온 식솔들이 떠받들어 주는 적장녀라고 생각하나 보구나. 이젠 몰락한 집안의 서자에게 시집간 신세란다. 가져가고 싶다고 가져갈 수 있겠느냐? 그 아이가 가져간 후에 우리가 다시 가서 내놓으라고 하면 꼴이 아주 우스워질 게다.”

엽이채의 조그만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렇게 가져가고 가져오고 하면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이 뻔뻔하게 언니의 혼사를 도둑질했다는 사실을 각인시키지 않겠는가?

자신이 그런 짓을 벌여 승리를 거머쥐기는 했지만 벼룩도 낯짝이 있다고 했다. 당시엔 이성을 잃고 사랑의 도피를 했지만 지금 냉정을 되찾고 보니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어머니……. 얼른 가 보세요. 일단 할아버지를 찾으셔요.”

엽이채가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초조해하지 않아도 된다. 알겠다, 지금 가마.”

손씨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으며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이 무렵, 묘씨와 셋째 일가도 엽연채가 위풍당당하게 혼수를 가지러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저 멀리서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녹죽원은 비어 있는 작은 정원이었다. 두 칸짜리 본채와 회랑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뒤뜰엔 대나무가 심어져 있어 녹죽원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장씨 가문에서 납폐納幣(사주단자 교환이 끝난 후, 정혼이 이루어진 증거로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보낸 예물)를 보냈을 때, 그 예물은 녹죽원의 본채로 보내진 후 다시 해당거의 곁채로 보내졌다.

녹죽원에 도착한 엽연채 일행은 본채에 채워진 커다란 자물쇠를 보았다. 엽연채는 냉소를 지으며 외쳤다.

“자물쇠를 부숴라!”

추길은 어멈에게 망치를 가져오라고 분부했다. 탕탕거리는 소리가 몇 번 울리더니 결국 커다란 자물쇠가 부서졌다. 꽃이 조각된 나무 문이 ‘끼익’ 하고 열리자 아름답고 진귀한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옮기거라.”

엽연채가 차가운 목소리로 명했다. 추길은 얼른 여종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 물건들을 밖으로 옮기라고 지시했다. 침향사계여의沈香四季如意 병풍과 목아매화능한木牙梅花凌寒 병풍을 막 옮기고 있는데, 엽학문의 몸종 첨향이 황급히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큰아가씨, 나리께서 중요한 일이 있으니 아가씨를 모시고 서재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숨을 헐떡거리는 첨향은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었다. 부랴부랴 걸어온 모양이었다.

엽연채는 태연히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가서 할아버지께 말씀드려라. 내가 친정에 너무 오래 머물렀기에 이젠 속히 돌아가야 한다고.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급히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으니 정리를 마치면 잠시 후에 건너간다고 전하거라.”

첨향의 얼굴이 굳어졌다. 엽학문이 그녀를 보낸 건 엽연채가 물건들을 정리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서였다.

나리께서 자신에게 내린 명은 큰아가씨를 서재로 데려오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큰아가씨가 가지 않겠다고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첨향은 고분고분한 성격이라 문제를 일으키기 싫어 더는 말하지 않고 엽학문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러 갔다.

혜연과 추길을 비롯한 다른 여종들은 이 모습을 보고 겁이 나서 벌벌 떨었고 하던 일을 멈추었다. 그러자 엽연채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상대할 것 없다. 어서 옮기거라.”

이에 여종들은 계속해서 혼수품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굳은 표정의 엽학문이 뒷짐을 지고 손씨와 함께 바람을 일으키며 걸어왔다. 엽연채가 흘끗 쳐다보니 셋째 일가와 묘씨는 보이지 않았다. 관여하지 않으려는 생각임이 분명했다.

혼수품이 밖으로 들려 나오는 장면에 엽학문은 이마에 핏대가 섰지만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애쓰며 좋게 말했다.

“방금 전 널 서재로 불렀는데 왜 오지 않은 것이냐?”

그러면서 주위를 둘러보더니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여긴 또 이렇게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놓고. 대체 뭐 하는 짓이야?”

“할아버지, 저는 제 혼수를 옮기고 있습니다.”

엽연채가 태연자약하게 인사를 올리며 말했다.

“부인, 여기 부인의 혼수품이 어디 있다는 말입니까?”

손씨가 눈썹을 높이 치켜올리며 앙칼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부인’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엽연채가 주씨 가문에 시집간 몸임을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미 주씨 가문에 시집간 주제에 장씨 가문에서 보낸 예물을 가져가려 하다니 정말 뻔뻔스럽기 이를 데가 없구나.’

손씨는 혹여나 엽연채가 제 뜻을 알아듣지 못했을까 봐 말을 덧붙였다.

“부인, 이것들은 장씨 가문에서 보낸 예물입니다.”

“장씨 가문에서 보낸 예물이든 아니든 간에 내 이름이 적혀 들어온 혼수품이니 내 것이지요.”

엽연채가 말했다.

“허튼소리 말거라!”

인내심이 바닥 난 엽학문이 호통을 쳤다.

“혼사에 변동이 생겼으니 네 혼수 단자도 무효다. 잠시 후에 다시 한 장 써 주마.”

엽연채는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대신 살짝 미소를 지으며 손에 쥐고 있던 혼수 단자를 북북 찢어 버렸다. 그러곤 엽학문과 손씨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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