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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13화 (13/858)

제13화

그녀의 기척을 느낀 온씨가 핏기 없는 입술을 움직여 뭔가를 물어보려고 했지만, 이내 생각을 바꾸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채 마마가 그녀를 대신해 물었다.

“아가씨, 어떻게 됐습니까?”

“엽이채와 장씨 가문의 혼사가 정해졌다.”

그렇게 되리라고 온씨도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런데도 한숨을 푹 내쉬며 주먹을 꽉 쥐었다. 손씨 그 여편네를 통째로 삼켜 산 채로 피부를 벗기고 싶었다! 그러나 아버님의 보호를 받고 있으니, 함부로 손댈 수가 없는 게 천추의 한이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온씨는 천천히 눈을 뜨더니 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하라지. 그러나 연채 너는 주씨 가문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이미 상황이 엉망이 되었으니 어제 시집간 사람이 네가 아니라고 딱 잡아떼면 그만이다. 엽이채를 주씨 가문으로 보낼 수 없게 됐으니 다른 사람을 보내자꾸나! 어찌 됐든 너를 주씨 가문에서 빼내야지.”

“마님, 그럼 아가씨를 대신해 누구를 보내실 건가요?”

채 마마는 온씨가 말한 방법이 그런대로 나쁘지 않다고 보았다. 장씨 가문과 엽씨 가문의 혼사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주인나리도 동의하실 것이고, 묘씨는 원래부터 자신과 관계없는 일에는 무관심하니 관여하지 않을 것이었다.

“방계 쪽에서 찾는 건 어떨까요?”

“그게 좋겠다.”

온씨의 캄캄했던 두 눈이 그제야 반짝거렸다.

“내일 시집가는 건 방계 아가씨다. 연채는 다른 마을에서 한 해쯤 몸을 숨기고 있다가 일이 마무리되고 나면 다시 좋은 집안에 시집가면 된다.

자네는 얼른 아버님을 찾아가서 엽이채가 장씨 가문으로 시집을 가든 말든 우린 일절 관여하지 않을 것이며, 양가의 혼인에는 변동사항이 없을 것이지만, 우리 연채는 절대로 주씨 가문으로 다시 돌려보낼 수 없다고 전하거라.”

엽연채가 깜짝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안 돼요. 저 때문에 다른 사람을 억울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억울하고 말고 할 게 뭐가 있느냐. 방계 끝자락에 있는 여식이 주씨 가문 서자에게 시집갈 수 있으면 그 아이에게도 좋은 일이지.”

온씨의 말에 엽연채는 차가운 얼굴로 대꾸했다.

“어머니, 제 말은 주씨 가문이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주씨 가문이 아무리 보잘것없는 가문일지라도 이렇게 거듭해서 모욕을 줘서는 안 됩니다.”

온씨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때가 되면 내가 직접 주씨 가문 안주인과 이야기를 나눈 후 제대로 보상해 줄 것이다.”

“보상을 받는 건 주씨 가문이죠. 그 보상이 주씨 가문 셋째 공자께 돌아가지는 않을 겁니다. 결국 손해는 그 공자께서 보는 거죠.

그렇다고 주씨 가문 셋째 공자께 보상이 돌아간다고 정확하게 밝히면 주씨 가문은 승낙하지 않을 겁니다. 결국 셋째 공자만 억울한 거죠. 어머니, 전 셋째 공자께서 또다시 억울한 일을 당하게 둘 수 없습니다.”

“이, 이 무슨……!”

온씨는 엽연채의 말에 발끈했다.

“그럼 뭘 어쩌겠다는 게냐?”

“제가 주씨 가문에 시집가겠습니다.”

“주씨 가문은 절대로 안 된다! 그저 가난하기만 한 집안이라면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그자는 서자다! 위로는 정실부인에 아래엔 적출 소생인 형제자매들이 있잖느냐. 네가 주씨 가문 서자에게 시집가는 건 사지로 들어가는 것과 다를 바 없어!”

“주씨 가문을 제한다 해도 마찬가지여요. 어머니께서는 제가 혼인할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장담하실 수 있으세요? 세상에 겉만 번지르르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제가 나약하고 만만한 사람이라면 어딜 가든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겠죠. 그러나 제가 단단하다면 어디서든 오래오래 잘 버틸 수 있습니다.”

“버틸 수 있겠느냐?”

온씨가 석연치 않은 얼굴로 물었다.

“전에는 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할 수 있습니다.”

엽연채가 결연한 눈빛으로 온씨를 쳐다보았다. 온씨는 탄식하더니 몸을 돌려 엽연채를 등지고 앉았다. 분명 그녀를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엽연채도 아무 말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마님.”

이때, 밖에서 여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점심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어디에 둘까요?”

“해당거에 두어라! 그리고 마마는 어머니께 죽을 올리세요.”

엽연채가 온씨를 바라보며 말했다.

“길게 생각해 봐야 좋을 거 없습니다. 전 이만 해당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따 다시 뵈러 올게요.”

엽연채는 인사를 드린 후 물러갔고 온씨는 눈을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밖으로 나온 엽연채는 청석판이 깔린 오솔길 끝부분에 초록색 옷을 입은 야윈 여종이 잎이 무성한 백양나무 밑에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엽연채는 그녀가 손씨의 여종인 여설임을 알아봤다.

여설은 그곳에 서서 가까이 다가오지 않고 턱을 치켜들더니 추길을 향해 비웃음과 우쭐거림이 섞인 미소를 날린 후 돌아서서 가 버렸다.

이에 혜연이 추길을 잡아끌며 물었다.

“널 보러 온 거니?”

추길은 새파래진 얼굴로 대꾸했다.

“아침에 아가씨가 손씨에게 가서 이야기를 흘리고 오라고 하셨잖아. 가서 여설이를 만났거든. 그런데 저게 분별없이 날뛰기에 내가 그만 뺨을 한 대 후려쳤어. 그러면서 장씨 가문에 시집가는 건 우리 아가씨라고 했지. 그런데 둘째 아가씨와 장씨 가문의 혼사가 정해졌으니 저게 일부러 날 찾아와서 거들먹거리는 거야.”

억울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던 추길은 엽연채를 슬쩍 쳐다봤다. 엽연채는 불그스름한 입꼬리를 올리며 입을 열었다.

“장씨 가문에 시집가면 뭐? 그 집안에는 앞으로 많은 일이 벌어질 거야. 내가 그 일을 뒤집어쓰지 않으면 그게 다 누구에게 돌아가겠니!”

추길과 혜연이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아가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내 말은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하늘도 용서치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두고 보면 된다.”

엽연채에게 뭔가 묘수라도 있는 줄 알았던 추길은 그녀의 하늘을 운운하는 소리에 실망하여 저도 모르게 작게 한숨을 쉬었다.

주인이 주씨 가문이라는 호랑이 소굴에 들어가게 되면 앞날이 깜깜할 것이었다. 앞으로 어떤 나날을 보내게 될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추길은 의기소침해졌다. 혜연도 걱정이 태산 같기는 마찬가지였다.

주인과 여종 둘이 제각기 다른 생각을 품은 채 걸어가다 보니 어느새 해당거에 당도했다.

안으로 들어서니 해당화 나무 두 그루가 동남쪽에서 그들을 반겨 주었다. 정면엔 채색화彩色畵로 화려하게 장식된 네 칸의 본채가 있었고, 양쪽으로 회랑이 구불구불 이어져 있었다. 동쪽과 서쪽에는 각각 곁채가 자리했다.

의복을 제대로 갖춰 입은 여종 대여섯과 어멈 둘이 앞뜰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주인이 돌아오자 다들 금세 곁으로 다가와 그녀를 에워쌌다.

“아가씨, 오셨어요!”

“응.”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대꾸했다. 그녀는 침실로 들어가지 않고 동쪽에 있는 곁채로 가 꽃무늬가 새겨진 나무 문을 열었다.

안에는 포목, 자기, 장신구, 정교한 장식품 등 아름답고 진귀한 물건들이 가득했다. 전부 엽연채의 혼수였는데, 절반 가량이 비어 있었다.

이를 본 추길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

“아가씨의 혼수가 어찌 이것밖에 안 남은 것이냐? 누가 가져갔느냐?”

여종과 어멈들이 일제히 땅에 무릎을 꿇었다. 그중 한 여종이 눈시울을 붉히며 빌었다.

“아가씨, 용서해 주십시오! 어제 아가씨께서 출가하시고 마님도 몸져누워 계시는 바람에 저희도 정신이 없었습니다.

저녁이 되자 어멈 몇 명이 들어오더니 혼수를 가져가려 했습니다. 제가 누가 보내서 온 것이냐고 묻자 노태야께서 보내셨다고 했습니다. 노태야께서 혼수를 녹죽원綠竹苑으로 옮기라고 하셨답니다. 노태야 분부이니… 저희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혜연이 자세히 들여다보자 안에 남은 혼수는 전부 온씨가 준비했던 것이고, 가져간 혼수는 장씨 가문에서 보낸 예물이었다.

딸을 무척이나 아끼는 온씨는 장씨 가문에서 정혼 성립의 증표로 보낸 돈으로 다시 혼수품을 사서 딸이 출가할 때 딸려 보낼 생각이었다. 그래서 엽학문도 장씨 가문에서 보낸 예물만 가져오라고 명한 것이었다.

추길은 고개를 힘없이 떨구었다. 이미 분풀이를 한바탕 한 사람처럼 성을 낼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 아가씨께서 장씨 가문에 시집가지 않기로 이미 결정됐으니, 장씨 가문에서 보낸 예물을 이쪽에서 받을 이유도 없지.’

엽연채는 차가운 눈빛을 번쩍이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밥상부터 차려라.”

주방에서는 장씨 가문을 대접하기 위해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잘 몰랐다. 상전이 따로 지시한 바도 없어서 식모는 일단 성대한 연회상을 차렸다. 그런데 장씨 가문은 식사도 하지 않고 떠나 버렸고 엽학문도 입맛이 없다며 국수 한 그릇만 서재로 가져오라고 분부했다.

이런 난감한 상황에서 다행히 해당거에서는 밥을 차리라는 말이 떨어졌다. 온씨의 사람들인 주방 사람들은 얼른 준비해 놓은 음식을 절반가량 보내 상다리가 부러지게 한 상 거하게 차려 놓았다. 상 위에는 열두 가지 반찬과 국 두 가지가 차려져 있으니 성대하기 그지없었다.

자리에 앉은 엽연채는 맞은편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혜연아, 추길아, 앉거라. 그리고 너희들도 안으로 들어와 함께 먹자꾸나.”

“아가씨…….”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 정안후부에서는 주인과 하인이 함께 밥을 먹는 법이 없었다. 주인이 은혜를 베풀어 함께 먹는다 하더라도, 바로 곁에서 주인을 모시는 대시녀 정도나 주인과 한자리에서 식사할 자격이 있었다.

“추길 언니와 혜연 언니가 아가씨를 모시고 식사를 하고 저희는 이따 따로 먹으면 됩니다.”

밖에 있던 여종 한 명이 조심스레 사양했다.

“꾸물거리지 말고 모두 와서 앉거라.”

그러나 엽연채는 단호했다.

“아가씨가 그러라 하시니 모두 와서 앉거라.”

추길이 여종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제야 머뭇거리던 여종들이 앞으로 다가와 하나둘 자단나무로 만든 둥근 식탁의 가장자리에 둘러앉기 시작했다.

여종들은 아가씨가 둘째 아가씨에게 남편을 빼앗기고 몰락한 집안의 서자에게 시집을 가게 되자 화가 난 나머지 이상행동을 하시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눈치 보지 말고 양껏 먹거라.”

엽연채가 먼저 옥 젓가락을 들었다. 그러자 여종들도 공손하게 대답하고는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이각 후, 여종들이 하나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엽연채가 물었다.

“다들 배불리 먹었느냐?”

“예. 배불리 먹었습니다.”

“기운이 생겼느냐?”

“예!”

“좋다. 추길아, 그럼 가서 혼수 단자單子(선물 목록)를 가져오너라. 녹죽원에 가서 혼수품을 다시 가져올 것이다!”

엽연채가 옷매무새를 바로 하더니 일어서며 태연히 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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