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손씨는 깜짝 놀라 숨을 헉하고 들이켰다.
“이것아, 어찌 그리 무모할 수가 있단 말이냐! 말 한마디 없이 이런 짓을 벌이다니! 정말 운이 좋았다고 할 수밖에 없구나.”
꾸짖는 것 같아 보였지만 그 말속에서 의기양양함과 감출 수 없는 기쁨이 묻어났다.
엽이채의 눈빛에서도 같은 기쁨이 보였다. 그녀도 처음에는 장박원과 함께하는 것이 허황된 꿈이라고 생각했고, 정말로 장박원과의 혼인이 성사될 것이라는 믿음도 없었다.
그저 혼례식 전날 밤 착잡한 마음에 이성을 잃고 도망가자는 말을 얼결에 꺼냈을 뿐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장박원이 자신의 말에 그러자고 응했다. 그러곤 그녀도 용기를 내어 아무 대책도 없이 도망을 쳤던 것이다.
성문을 나선 그녀는 생각할수록 자신이 영리하게 행동했다고 느껴졌다. 자신과 장박원이 도망가면 신부가 어디로 시집을 가겠는가? 할아버지는 평소 성격을 미루어 볼 때 절대 혼례식을 취소할 분이 아니었다. 아마 적당한 사람을 찾아 엽연채를 치워 버렸을 것이다. 과연, 나중에 들리는 소식으로는 엽연채가 주씨 가문으로 시집을 갔다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엽이채는 격양되고 흥분됐다. 일거양득이지 않은가. 그녀는 장박원에게 서둘러 돌아가자고 말했다. 안 그러면 정안후부와 장씨 가문에서 정말로 자신들을 찾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서둘러 돌아가던 그들은 상황을 역이용하기로 했다. 사고가 생기는 바람에 다친 그녀를 의원에 데려다준 것이지, 사랑의 도피 따위를 한 게 아니라고 말이다. 그렇게 하면 양가의 체면을 위해 집안에서 알아서 덮어 주지 않겠는가. 하늘이 그녀의 뜻을 이루어준 것이었다.
“절 아끼시는 어머니 덕분이에요. 어머니께서 지략을 써서 주씨 가문을 끌어다 엮지 않으셨다면 저희가 이렇게 빨리 돌아오지는 못했을 거예요.”
엽이채가 애교를 부리며 손씨의 팔을 감싸 안았다.
“내가 널 아끼는 걸 이제야 알았느냐?”
손씨가 그녀의 볼을 꼬집으며 말했다.
“그때 엽연채가 주씨 가문 가마에 오르지 않겠다고 소란을 피우거나 조금만 시간이 지체됐더라면 어쩔 뻔했느냐? 내가 물어보니 주씨 가문 가마가 떠나는데 모퉁이에서 다른 가마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고 하더라.
그 가마는 주씨 가문 가마를 보고는 발길을 돌려 떠났다는데, 그게 바로 장씨 가문에서 보냈던 가마라지 뭐냐! 만약 연채가 소란을 피우며 시간을 지체했다면 그 아이가 시집간 곳은 장씨 가문이었겠지.
아이고. 지금 또 생각하니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구나. 요 계집애 때문에 가슴을 놓을 수가 없어. 앞으론 무슨 계획이 있거든 이 어미와 먼저 꼭 상의하거라.”
듣고 있던 엽이채는 뒤늦게 두려움이 느껴졌으나 얼굴엔 감출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억울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랑 상의하면 분명 허락하지 않으실 거잖아요.”
손씨도 엽이채와 장박원 사이에 뭔가가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장박원이 외모로 보나 출신으로 보나, 엽이채를 능가하는 정혼녀를 포기하고 엽이채를 선택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장박원에게 희망을 품지 않았고, 딸에게 장박원을 포기하라고 설득해 왔다. 그런데 정말 생각지도 못하게 이채 스스로 장박원과의 혼사를 성사시킨 것이다.
“둘째 마님, 둘째 아가씨. 전씨가 왔습니다.”
밖에서 여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나가 보마.”
손씨는 문양이 조각된 흑단 병풍을 돌아 욕실에서 나갔다. 갈색 배자를 입은 어멈이 소청小廳에 서 있었는데, 이 사람은 묘씨의 몸종이었다.
“마님, 인사드리옵니다.”
전 마마가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손에는 붉은 빛깔의 쟁반이 들려 있었다. 쟁반엔 선홍색 무늬 비단이 깔려 있고 그 위에는 모란꽃이 새겨진 작은 도자기 병이 놓여 있었다.
“어제 둘째 아가씨가 다치셨다지요? 이 설옥고雪玉膏는 최고의 금창약金瘡藥입니다. 효과도 빠르고 흉터도 남지 않지요.”
손씨는 ‘어머’ 하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머님께서 이렇게 신경을 써 주시다니! 여설아, 얼른 마마가 마실 차를 내오너라.”
“괜찮습니다. 저는 이만 가 봐야 합니다.”
전씨가 이렇게 말한 후 자리를 뜨려 하자, 손씨가 그녀를 잡아당기더니 돈을 얼마간 쥐여 줬다.
“어머니, 전 마마예요?”
욕실에서 엽이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씨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욕실로 들어가 말했다.
“이것 좀 보거라. 너희 할머니께서 네게 보낸 설옥고다.”
설옥고는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는 수준의 영약靈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매우 귀한 약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부차적인 것이었고 가장 중요한 건 조모 묘씨의 태도였다.
손씨가 손에 든 설옥고를 만지며 말했다.
“형님께서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을 테지.”
그 말을 들은 엽이채의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하얗고 보드라운 두 팔을 목욕통 가장자리에 걸친 그녀는 기쁜 마음에 우쭐거렸다. 이전까지 자신은 이리 중요한 사람으로 대접받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건 그저 시작에 불과했다. 자신이 장씨 가문에 시집가 지체 높은 가문의 정실부인이 된 후에야 비로소 대단한 사람이 됐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 *
한편, 정청에서 나온 장굉 부부는 앞장서서 걸어갔다. 사동 두 명이 장박원을 부축하며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사실 부부는 엽씨 가문에 부탁해 가마를 준비할 수 있었지만, 장박원에게 화가 나 있는지라 그에게 벌을 주려고 일부러 가마를 부르지 않았다.
장박원은 배도 고프고 힘이 들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장박원 일행은 협문夾門(샛담에 달린 문)을 나서다가 기품이 넘치는 중년 사내가 걸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바로 엽연채의 아버지 엽승덕이었다. 엽승덕을 본 장굉과 맹씨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장굉이 먼저 공수拱手한 후 웃으며 알은체했다.
“형님.”
그러자 엽승덕도 인사를 하더니 장박원을 쳐다보며 말했다.
“자네 이리로 좀 와 보게. 내 할 말이 있네.”
그러더니 가까운 나무 그늘로 걸어갔다.
“얼른 안 가고 뭐 하느냐!”
장굉이 작은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그러곤 이를 갈며 말했다.
“가서 죄송하다고 제대로 사과드려라!”
흠칫 놀란 장박원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잘생긴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그는 마지못해 엽승덕 쪽으로 걸어갔다. 나무 그늘 아래서 장박원은 몸을 굽히고 머리를 조아린 채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백야, 제가…….”
“이게 다 무슨 꼴인가?”
엽승덕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지금 자네가 얼마나 힘든지 내 알고 있네. 그러나 자신이 옳다고 굳게 믿어야 하네.”
“예? 백야……?”
깜짝 놀란 장박원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엽승덕을 바라봤다. 그는 엽승덕이 엽연채의 아버지이므로, 분풀이를 하기 위해 자기를 데려다 때리지는 않더라도 욕을 한바탕 퍼부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도리어 자신을 격려해 주다니,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다.
“뭘 그리 깜짝 놀라는 겐가. 난 그저 옳은 사람 편에 서는 것뿐이라네.”
엽승덕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실 박원이 자네가 뭘 잘못했는가. 사랑은 잘못이 아니라네!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용감하게 자신의 사랑을 좇을 줄 알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와 내 외실外室(정식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외부에 거주하는 첩), 정랑처럼 말이네. 그래도 자네는 우리보다 운이 좋은 편이네. 혼인 전에 사모하는 사람을 만났으니 말이지. 거기다 결단력 있게 혼인을 피해 도망치고 사랑을 택했으니, 자네는 옳은 일을 한 거야.”
“백야…….”
감동한 장박원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어제 혼인을 피해 달아난 후부터 모든 사람들이 그를 비난했다. 온 세상이 그가 틀렸다고 손가락질하니 자신마저도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드디어 자신을 인정해 주는 사람을 만났다. 게다가 그 사람이 엽연채의 아버지라니, 정말 상상조차 못 했던 일이다.
더없이 큰 격려를 받은 장박원이 고양감에 정신이 번쩍 차렸다.
‘이 말이 옳다. 천번 만번 옳아!’
“백야, 정말 감사합니다. 이 세상에서 절 완전히 이해해 주시는 분은 백야밖에 없습니다!”
장박원이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엽승덕은 장박원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사람은 말이네. 이런저런 속박에 구애받아서는 안 된다네. 언제 어디서든 용감하게 자신의 사랑을 추구해야지. 자네는 틀린 적이 없어. 그러니 포기하지 말고 꼭 버텨 내야 하네!”
장박원은 눈물을 머금고 결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틀린 건 제가 아니라 이 세상입니다!”
엽승덕은 장박원의 눈빛을 바라보며 더욱더 그를 높이 평가했다. 처지가 비슷한 두 사내는 상대에게서 동질감을 느꼈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서 지극한 동지애를 느끼는 동안, 근처에 있던 장굉과 맹씨는 놀라서 얼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특히나 장굉은 대로해 두 다리가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었다.
장박원과 엽승덕의 목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으나, 두 부부가 귀를 쫑긋 세우고 듣고 있었기에 그들의 대화가 대부분 들렸다.
부부는 엽승덕이 이 불효막심한 아들놈을 훈계해 주길 바랐다. 그런데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외려 엽승덕은 정신 나간 소리나 해대고 있었던 것이다. 욕을 한바탕 퍼부어 정신이 번쩍 들게 해 주기는커녕 엉뚱한 소리나 하고 있다니!
“장박원, 어서 이리 오거라!”
빽 소리를 지른 다음 장굉은 공수하면서 가식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엽 형님, 그럼 또 뵙겠습니다.”
이에 엽승덕이 장박원의 어깨를 치며 배웅했다.
“가 보게!”
엽승덕의 말에 고무된 장박원은 고개를 들고 가슴을 활짝 편 후 씩씩하고 위풍당당하게 부모 곁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본 장굉은 순간 마음이 와르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아들이 잘못된 길로 빠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엽승덕이 첩실을 끼고 사는 건 그도 이미 들어 알고 있던 바였다. 그러나 그저 풍류를 즐기는 정도겠거니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여인 하나 때문에 가족도 몰라보는 뻔뻔한 인간이었다. 장굉은 앞으로 그를 최대한 멀리하겠노라 다짐했다.
* * *
영귀원, 온씨는 침상에 누워 담청색 모기장의 천장 부분을 응시한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장박원이 자기 딸을 몸을 더럽힌 여인이라고 모욕하는 것을 똑똑히 들었다. 혼인을 약속한 정혼자에게 조금의 애정도 없어 보였다.
그녀는 이런 자를 사위로 들여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런 자에게 딸을 데려가라고 강요하는 건 딸을 불구덩이로 밀어 넣는 일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때, 엽연채가 안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