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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11화 (11/858)

제11화

이때, 맹씨가 미소를 머금고 정청 안으로 들어오자 장굉이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이야기는 잘 되었소?”

“예.”

맹씨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엽학문은 맹씨가 온씨를 보러 간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들이 구체적으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장굉이 헛기침을 하더니 말석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두 사람을 쳐다보며 말했다.

“방금 전 제 자식놈과 둘째 아가씨가… 둘째 아가씨가 다치는 바람에 의원에 데려다준 것이라고 했으니… 쿨럭.”

이 말을 꺼낸 장굉은 민망함을 견디지 못하여 온 얼굴이 새빨개졌다.

“오해가 생긴 것이니… 노후야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가친께서 장씨 가문과 엽씨 가문은 이미 사돈을 맺기로 했으니 물릴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돌아가서 길일을 잡은 후 신부를 맞이하러 오겠습니다.”

혼사를 물리지 않겠다고 하자 엽학문은 내심 기뻤다. 그러나 겉으로는 부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마지못해 응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장씨 가문에서 그리 성의를 보이니 나도 더 이상 잘못을 따져 묻지 않겠소!”

맹씨가 웃으며 말했다.

“노후야, 양가의 혼사에 관하여 이미 큰며느님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노후야께서는…….”

엽학문이 말허리를 끊으며 손사래 쳤다.

“세세한 것들은 안사람들끼리 알아서 하시오.”

말을 마친 엽학문의 시선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두 사람에게 향했다.

“너희 둘도 잘못을 인정하고 벌도 받았으니 그만 돌아가 보거라.”

“박원이가 어리석어 실수한 것이니, 저희가 데려가서 잘 단속하고 가르치겠습니다. 다음에는 제대로 된 손녀사윗감으로 만들어 보내겠습니다!”

맹씨가 미소를 지으며 장담했다. 장박원과 엽이채는 자신들의 혼사가 정해진 줄 알고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고, 꿇고 있던 무릎이 아프다고 느껴지지도 않았다.

엽학문은 속으로 몹시 흐뭇했지만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줄을 풀어 주거라.”

옆에 있던 여종이 다가가 두 사람을 옭아맸던 밧줄을 풀어 주었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손씨는 매우 기뻐하며 얼른 여설을 밀쳤다.

여설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으나 이내 도와주려는 척 얼른 장박원에게 다가가 줄을 풀어 주며 그에게 몰래 쪽지를 내밀었다.

어리둥절해하던 장박원은 몸을 돌려 쪽지를 펼쳤고 안에 적힌 내용을 보더니 낯빛이 확 바뀌었다. 그는 반쯤 풀린 밧줄을 확 잡아 풀더니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어머니, 잠시만요. 혼사에 관해 정확히 이야기하고 가시죠!”

맹씨의 고운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혼사 이야기는 이미 끝나지 않았느냐? 돌아가서 길일을 정한 후 신부를 맞이하러 올 것이다. 걱정 말거라. 양가가 정한 혼사이니 절대 번복할 일은 없을 거다.”

그러자 장박원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절 더 이상 기만하지 마세요! 여기서 정확히 말씀하세요. 다음에 제가 맞이하러 올 신부는 엽이채입니다.”

“장박원!”

맹씨가 호통을 치며 말했다.

“문제가 있거든 집으로 돌아가서 이야기하거라.”

“무슨 이야기요?”

흥분한 장박원은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큰소리를 쳤다.

“이야기하는 척하면서 저를 속이시려는 거겠죠. 제가 맞이할 신부는 여전히 엽연채인가요?”

“뭐라고요?”

엽이채의 가녀린 몸이 기우뚱하더니 그대로 땅으로 쓰러졌다.

‘염치와 명예, 절조마저 다 버려 가면서 하룻밤을 고생했는데 결국 장씨 가문에 시집가는 건 큰언니라는 말인가?’

엽학문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또한 장씨 가문에서 며느리로 맞이하는 건 엽이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장씨 가문에서 굳이 엽연채를 며느리로 들이겠다고 한다면 그 또한 상관없었다. 어찌 됐든 둘 다 그의 손녀이니까. 주씨 가문에는 적당히 콩고물 좀 떼어 주면 그만이었다. 그 집안의 상황을 볼 때 감히 뭐라고 떠들지는 못할 것이었다.

“꿈도 꾸지 마세요!”

그러나 장박원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불효막심한 놈!”

장굉도 지지 않고 소리를 꽥 질렀다.

“너랑 혼인을 약속한 사람은 본래 엽씨 가문 적장녀였다. 엽씨 가문 큰아가씨는 너 때문에 곤경에 빠졌어! 잘못은 네가 먼저 했으니 이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큰아가씨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 넌 반드시 큰아가씨와 혼인해야 해!”

“아버지, 자기 아들을 구렁텅이로 내모는 아버지도 있습니까? 이미 몸을 더럽힌 여인을 제 부인으로 삼으라니요!”

부자가 격돌하자 사이에 낀 맹씨는 머리가 다 어지러웠으나 얼른 목청을 높였다.

“그 입 다물지 못할까! 연채는 아직 순결한 여인이다.”

“그 사람은 이미 주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외간 사내랑 무슨 짓을 했을지 어떻게 압니까? 아직 순결한 여인은 무슨, 몸을 더럽힌 여인일 뿐입니다.”

장박원이 냉소를 지으며 비아냥거렸다. 그 말을 들은 장굉과 부인 맹씨는 깜짝 놀라 헉 하고 숨을 들이켰고, 하마터면 피를 토할 뻔했다.

“아, 내가 주씨 집안에 한 번 갔다 왔다고 몸을 더럽힌 여인이 되어 버렸네. 그럼 거기 두 사람도 밖에서 하룻밤을 보냈고 곁엔 여종 하나 없었으니 무슨 짓을 벌였는지 알 길이 없겠네요?”

이 말과 함께 차가운 조소가 들려왔다. 한 소녀가 이쪽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화려한 붉은 치마를 입고 있는 소녀의 곱고 아름다운 얼굴엔 득의양양한 미소가 담겨 있었다.

장박원의 시선이 엽연채에게 향했다. 그도 엽연채가 아름답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엔 엽연채의 아름다움이 오만방자함, 기세등등함으로 비칠 따름이었다.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품속에 끌어안고 싶은 보호 본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을 비꼬는 엽연채의 말을 듣자 장박원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그녀를 헐뜯었다.

‘드세기는!’

“어째서 이곳에 온 것이냐? 네 어머니가 몸져누워 있는데 곁에서 돌보지 않고?”

엽학문의 얼굴빛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방금 전 그녀가 한 말을 듣고는 화가 나서 하마터면 허리를 삐끗할 뻔했다. 그녀의 순결과 평판에는 이미 흠이 생긴 셈이었다. 그런데 지금 뛰쳐나와 이렇게 말다툼을 하게 되면 둘째 손녀의 순결마저 장담할 수 없게 된다.

엽연채가 말했다.

“어머니도 함께 오셨습니다. 그런데 문 앞에 계시던 어머니는 화가 나신 나머지 서 있는 것조차 힘에 부쳐 부축을 받고 방으로 돌아가셨어요. 가시기 전에 저에게 안으로 들어가 보고 오라고 하셨죠.”

“연채야…….”

맹씨가 말했다.

“부인.”

엽연채는 품위 있게 미소를 지으며 스스럼없이 그녀에게 인사를 올렸다.

“절 아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억지로 밀어붙인 일에는 좋은 결과가 있을 수 없다고 하죠. 공자님께서는 절 마음에 두고 계시지 않으니 저도 혼인을 강행할 생각은 없습니다.”

엽연채의 우아한 미소와 대범한 태도는 방금 전 시정잡배처럼 엽연채를 헐뜯던 장박원의 모습과 대비되었다. 맹씨와 장굉은 부끄러움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들은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머뭇거렸다.

“양가가 혼례식을 치르긴 해야 하는데 큰아가씨께서 혼인을 물리시니… 둘째 아가씨께서 혼례를 올릴 수밖에 없겠군요.”

손씨가 냉큼 끼어들었다. 그 말을 들은 맹씨는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손씨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네가 대체 뭔데? 서출의 부인 주제에 감히 주제도 모르고 설쳐대기는! 엽연채가 직접 나서서 혼인을 물렸는데 이제 와 무슨 혼례식을 진행하자는 겐가. 내 아들과 엽이채는 절대 맺어질 수 없어!’

맹씨가 거절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엽학문이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조금 전 상황이 복잡해 말하지 못한 것이 있소. 우리 엽씨 가문에서는 이미 본래 주씨 집안에 시집보내기로 한 건 장손녀였고, 장씨 집안에 보내기로 한 건 둘째 손녀였다고 사람들에게 밝혔소. 양가 모두 잘못한 부분이 있지만 어제 장씨 가문에서 약속대로 신부를 맞이하러 왔다면 일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오!”

그러자 장굉 역시 헛기침을 하며 말을 받았다.

“그럼 혼사는 그리 정하시죠!”

엽학문이 사람들에게 한 변명이 두 집안의 체면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는 했다.

“나리!”

낯빛이 변한 맹씨가 말했다. 그녀는 저런 여인을 며느리로 맞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고작 서출의 여식에 뻔뻔스럽기 이를 데 없고 사내를 꾀어 도망이나 치는, 수준 떨어지는 계집이 내 며느리가 되겠다고?’

“그 입 다무시오! 집안에 먹칠하면 안 된다는 걸 잊었소!”

장굉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 말을 들은 맹씨는 순간 딸의 장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깜짝 놀란 그녀는 늦가을 매미처럼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장굉은 고개를 돌려 엽학문을 쳐다보며 인사했다.

“노후야, 변변찮은 제 아들놈은 이만 데려가겠습니다. 내일 아버지께서 직접 노후야를 찾아뵙고 혼사에 관해 의논하실 겁니다.”

“알겠소.”

맹씨는 이를 악물었다. 자신을 거치지 않고 엽 노후작이 직접 혼사를 주관하게 되다니. 집안이 책잡힐까 염려된다는 이유로 자랑스럽기 그지없는 자신의 아들이, 염치라고는 눈을 씻고 찾으려야 찾을 수 없는 천박한 여인에게 장가를 들게 된 것이다.

그에 반해 장박원은 뛸 듯이 기뻤다. 조부는 일언이 중천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내뱉은 말은 반드시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거기다 직접 혼사를 주관한다고 하니, 엽씨 가문에 무슨 일이 생기지 않는 한 이 혼사는 쐐기를 박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장굉 부부는 인사를 드린 후 장박원을 데리고 나갔다. 그들이 나가자 손씨는 얼른 엽이채에게 달려가 그녀의 작은 손을 만지며 말했다.

“아이고. 손이 다 빨개졌구나. 어떤 못된 것이 이렇게 꽉 묶어 놓았단 말이냐? 아버님, 이채를 데려가 목욕을 시키겠습니다.”

엽학문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 * *

뜨거운 물을 미리 준비해 놓은 손씨는 거처인 옥리원玉梨院으로 돌아오자마자 엽이채를 욕실로 데려가 씻겼다. 따뜻한 목욕통에 들어가 앉은 엽이채는 ‘후’ 하고 긴 숨을 내쉬었다. 손씨가 곁에서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장씨 가문 정실부인으로 시집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우리 딸이 마음속으로 다 준비해 둔 게 있었어. 일단 시작한 일은 끝을 봐야 하고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더니, 아예 장박원을 데리고 도망갈 줄은!”

진이 빠진 엽이채는 목욕통에 몸을 맥없이 기댔지만 가슴은 여전히 두근거렸다.

“사실 그렇게까지 많은 걸 생각했던 건 아니에요. 그 순간에는 정말 마음이 착잡하더라고요. 얼떨결에 ‘이럴 바에야 차라리 도망가요.’라고 말했던 건데… 정신을 차려 보니 정말 도망을 치고 있더라고요. 지금 생각해 보면 꿈을 꾼 것만 같아요.”

“…뭐라? 계획도, 이후의 계책도 없었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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