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묘씨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차를 마시며 혀를 끌끌 찼다. 상황이 갈수록 재미있게 흘러가고 있었다.
엽승신과 손씨의 눈에는 웃음기가 비쳤다. 어제 엽연채가 주씨 가문으로 들어갈 때부터 둘은 일이 이렇게 마무리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 벌어진 일은 집안의 명예를 더럽히는 추잡한 사건이었다. 두 가문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누군가는 참고 덮어 줘야 했다. 그리고 그 손해는 원치 않더라도 첫째네가 봐야 했다.
온씨는 화가 목구멍에 걸려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욕을 한바탕 퍼붓고 싶었지만 분노가 치밀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숨이 턱 막혀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흐렸다.
엽이채는 잘못을 빌며 처량한 모습으로 눈물을 흘렸다.
“언니, 전… 정말 의도한 게 아니었어요. 그저 언니 혼인 선물인 장신구를 찾으러 나갔던 것뿐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미안해요, 언니. 저 때문에 언니가 서자에게 시집가게 됐어요!”
장박원이 얼른 이어서 말했다.
“그때 처제가 심하게 넘어지는 바람에…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제가 돌아왔을 땐 아가씨는 이미 주씨 가문에 시집을 가 버리셨더군요……. 탓하려면… 우리 집에 든 도둑놈을 탓해야겠죠. 그 도둑놈 때문에 신부를 맞이하러 갈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아가씨께서도 그렇습니다. 왜 좀 더 기다려 보지 않고 냉큼 다른 집안에 시집가 버린 겁니까!”
장박원의 마지막 말로 이 사달은 되레 엽연채의 책임이 되어 버렸다. 이에 엽연채는 기가 차서 웃고 말았다.
장박원이 급하게 말을 이어갔다.
“이제… 아가씨는 주씨 가문에 시집을 간 몸이고, 양가의 혼인을 없던 일로 할 수도 없으니 내가 처제와 혼인을 할 수밖에요…….”
엽연채는 지금껏 이리도 뻔뻔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져 나왔다.
“하하, 두 분만 좋으시다면 그리하시죠.”
묘씨 옆에 서 있던 엽영교가 도리어 눈살을 찌푸렸다.
“저런 뻔뻔한…….”
온씨는 장박원의 말에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지만,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지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어머니!”
깜짝 놀란 엽연채는 얼른 어머니를 부축하며 말했다.
“어서 어머니를 부축해 모셔가고 의원을 부르거라.”
채 마마와 혜연 등 하인들이 얼른 온씨를 부축해 자리를 떴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손씨는 싸움에서 이긴 수탉처럼 대단히 의기양양하게 앞으로 나섰다.
“아버님, 보세요. 전부 오해였습니다. 오해였어요! 혼인을 피해 달아나다니요. 어서 포박을 풀어 주시지요!”
그렇게 말하는 손씨는 얼굴에 드러난 화색을 감추려 애를 썼다.
‘내 딸이 장씨 가문 적자에게 시집을 가다니, 귀한 몸이 되는 것이 아닌가!’
엽영교는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경멸하는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엽학문이 두루뭉술하게 넘어갈 분위기를 풍기자 엽연채는 차갑게 웃으며 막아섰다.
“풀기는 뭘 풉니까! 그대로 무릎 꿇리세요!”
이에 손씨가 반박하려는데 엽연채가 또다시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쳐서 의원에 데려다준 것이든 아니든 간에 전부 저 둘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덕분에 두 가문이 도성의 웃음거리로 전락해 버렸고, 이 손녀는 일생을 망치게 되었습니다. 설령 할아버지께서 저 둘을 풀어 주라고 하시더라도 장 백야께서는 그러시지 않을 테죠?”
엽연채의 얼굴을 본 장굉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저놈이 잘못했으니 마땅히 벌을 받아야지!”
그 말을 들은 엽학문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됐다.
큰손녀가 몰락한 주씨 가문에 시집갔으니, 둘째 손녀가 장씨 가문에 시집가는 일은 이미 기정사실이 되었다. 그러니 엽이채와 장박원을 더는 난처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엽연채의 말을 듣고 장굉이 벌을 내린다고 하니, 자신이 장씨 가문과의 혼인에 안달이 나 수그리고 있는 꼴이 되어 버렸다. 엽학문은 부끄러움에 성을 내며 말했다.
“당연히 벌을 받아야지! 연채, 언제 이 할아비가 저 둘을 풀어 준다고 했느냐? 너희 둘은 똑바로 꿇어앉거라!”
엽학문은 차가운 눈길로 손씨를 쏘아보았다. 이에 손씨가 벌벌 떨면서 얼른 뒤로 물러섰다.
입술을 꽉 물고 있는 엽이채는 금방으로 쓰러질 듯 위태위태해 보였다.
장박원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어제 도망을 치느라 밤에 제대로 잠도 못 잤고 배도 고프고 피곤해 더 이상 못 견딜 지경이었다. 하지만 소란을 피우다가 뜻대로 되지 않을까 염려되어 조용히 무릎을 꿇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엽연채는 미소를 짓더니 돌아서서 자리를 떴다.
* * *
그 시각 영귀원.
온씨가 누워 있는 발보상에는 휘장이 겹겹이 쳐져 있었다. 꽃무늬가 수놓인 검은 비단 베개 위로 온씨의 가느다란 손이 올려져 있었다.
맥을 짚던 의원은 분노를 못 이겨 의식이 혼미해진 것이니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온씨에게 침을 놓아준 후 약도 처방해 주었다.
엽연채는 어머니가 답답하지 않도록 푸른 휘장을 양쪽 고리에 걸어 공기가 원활히 통하도록 했다. 일각쯤 지나자 온씨의 의식이 서서히 돌아왔다.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것이냐. 아, 그 죽일 것들은…….”
온씨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엽연채는 얼른 그녀를 부축하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머니, 더 쉬세요. 이번 일은 제게 맡겨 두시고요.”
“네가 뭘 하겠다고? 됐다. 내가…….”
“마님, 장씨 가문 부인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채 마마가 안으로 들어오며 알렸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호리호리한 체형의 귀부인이 채 마마 뒤를 바짝 쫓아 들어왔다. 이 사람은 바로 장박원의 모친인 맹씨였다. 엽연채는 눈을 게슴츠레 뜨며 생각했다.
‘방금 전 정청에서는 아무 말도 없었으면서 왜 혼자 찾아온 거지? 무슨 속셈인 거야?’
전생에 시어머니였던 그녀에게 엽연채는 일말의 호감도 없었다.
엽연채의 어머니와 맹씨는 오랜 벗이었다. 장씨 가문이 입신출세하기 전, 온씨와 맹씨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오래 사귄 친구처럼 잘 지냈다.
특히 온씨는 도성 안 귀부인들 모임에 맹씨를 데리고 다니며 많은 도움을 주고 또 많은 것들을 가르쳐 주었다. 장씨 가문의 위상이 높아진 후, 맹씨가 귀부인들 사이에서 웃음거리가 되지 않고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 역시 상당 부분 온씨의 도움 덕분이었다.
이런 이유로 두 사람의 친분은 두터웠고 서로를 자매라고 칭하며 사돈을 맺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온씨는 그 자매가 그리도 모진 사람인지는 몰랐다. 전생에 엽연채가 장씨 가문으로 시집을 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맹씨도 여러 방면으로 며느리를 잘 보살펴 주며 장박원을 호되게 꾸짖기도 했다.
하지만 엽연채가 난산을 겪고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자 그녀의 태도는 즉시 냉랭하게 돌변했다.
거기다 아들이 엽이채와 혼인하겠다고 마음을 굳히고, 엽이채가 회임까지 하자 맹씨는 엽이채를 떠받들며 그녀가 엽연채를 업신여겨도 본체만체했다. 엽연채의 생사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결국 어머니가 화병으로 돌아가신 데는 이 맹씨도 한몫을 한 것이었다. 채 마마는 엽연채에게 모친의 부고를 알리러 와서는 이렇게 말했었다.
“마님께서 근심과 걱정으로 병이 깊으셨는데, 사위가 처제를 집안에 들인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화가 치밀어 각혈을 하다가 그대로 혼절하셨어요. 어제 둘째 마님이 오셔서 맹씨 부인이 둘째 아가씨를 얼마나 떠받드는지 한바탕 떠들고 가셨고요.
마님이 깨어나신 후 저한테 맹씨 부인을 모셔오라고 했는데, 맹씨 부인은 글쎄 시간이 없어 갈 수 없다고 핑계를 대지 뭡니까. 나중에 그 댁 여종에게서 들었는데 맹씨 부인은 그때 둘째 마님과 마조馬弔(보통 120장짜리 패를 쓰는 노름)를 하느라 안 오신 거였어요! 그 말을 들은 마님은 또 각혈을 하셨고 저녁에 결국 숨을 거두셨죠.”
맹씨는 직접 누군가를 모해한 적이 없으니 그녀가 얼마나 간사하고 악독한 사람인지 단정 지어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맹씨가 야박하고 쌀쌀맞은 성정에 자신의 이익만 챙길 줄 아는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해득실과 관계된 일이라면 긴 시간 쌓은 우정과 넘치게 받은 은혜도 모조리 저버릴 수 있는, 다른 사람의 생사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사람이었다.
엽연채의 어머니가 세상을 뜬 후, 맹씨는 가증스럽게도 대성통곡했다. 그러나 자기 집으로 돌아와서는 엽이채가 엽연채를 업신여기는 걸 또 가만히 놔뒀다.
게다가 장박원이 몸져누운 엽연채를 외진 마을로 보내버릴 때도, 그녀가 다시 도성으로 돌아와 소란을 피우지는 않을까 염려되어 험상궂은 하녀 둘을 보내 그녀를 감시하게 했다.
맹씨는 무정하고 이기적이었으며, 상대방이 득세할 땐 미소 지으며 알랑거리고 별 볼일 없어지면 최대한 멀리할 뿐만 아니라 짓밟기까지 하는 사람이었다. 엽연채는 이런 사람을 최대한 멀리하고 싶었다.
“아우!”
맹씨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유감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제 일은 정말 미안하네.”
“형님…….”
온씨는 겨우 그 말만 내뱉고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장박원이 함께 도망친 여인이 다른 집안 규수가 아닌 자기 조카였기 때문이다. 장씨 가문에 한바탕 분풀이를 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도 없었다.
“연채야, 정말 미안하구나.”
맹씨가 엽연채 곁으로 다가오더니 그녀의 손을 쥐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 주씨 가문에서 널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느냐?”
그러자 온씨가 냉큼 답했다.
“어딜 감히! 우리 엽채는 순결한 아이입니다. 주씨 가문도 제 분수를 아는 집안이니 감히 우리 연채의 털끝 하나 못 건드렸을 겁니다.”
추길이 거들며 말했다.
“맞습니다. 우리 아가씨께서는는 그 댁 나리 내외에게 절도 아직 안 드렸는 걸요! 주씨 가문에서 하룻밤 자고 온 것뿐입니다. 그게 무슨 혼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연채가 끝까지 정조를 지킬 아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단다.”
그러더니 맹씨는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그럼 아우네 집안에선 아직 밖에 아무 이야기도 안 한 거지? 지금 밖에선 별의별 이야기가 다 떠돌고 있어. 어떤 이는 연채가 시집을 못 가니 어쩔 수 없이 주씨 가문에 떠밀리듯 들어간 거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어제 시집간 사람은 따로 있다고 하고.
아우는 내가 연채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지? 나도 연채가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아이라는 걸 믿는다네. 그러니 말인데, 사람들에겐 어제 우리 장씨 가문에 일이 생겨 신부를 맞이하러 오지 못한 것이고, 엽씨 가문에서는 이미 연회를 연 상황에서 혼례식을 취소할 수가 없어 일단 엽이채를 보낸 거라고 하면 어떨까?
어쨌든 주씨 가문은 엽이채의 시댁 아닌가? 그러니 어제 시집보낸 아이를 엽이채라고 말하는 거지.”
“네?”
그 말을 들은 온씨는 믿을 수 없어 하며 되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