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정청이 자리한 정안후부의 바깥뜰.
본채는 커다란 집채 세 개로 이루어졌는데, 정교한 문양으로 장식된 장지문들은 활짝 열려 있었다. 건물 전체에 고아한 광택이 흘렀고 또 널찍해서 호방한 기운이 넘쳐흘렀다. 지붕 위에는 비첨飛檐(장식용 서까래를 추가하여 네 귀가 높이 들린 처마)이 솟아 있었다. 이곳은 평소 귀빈을 맞이하거나 공식적인 행사가 있을 때 사용되는 장소였다.
본채의 문턱을 넘자, 정청 중앙에 남녀 한 쌍이 포승줄에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궁지에 몰린 두 사람은 바로 장박원과 엽이채였다.
장박원은 열아홉 살의 잘생긴 소년으로 점잖고 고상해 보였다. 그러나 자신의 뛰어난 재능을 겸손하게 평하지 못하고, 스스로 인품이 고결하다고 여기는 자 특유의 오만한 분위기를 온몸에서 풍기고 있었다.
최고급 항주 비단으로 만든 의복은 이미 엉망이 된 지 오래였고, 헝클어진 머리는 어깨 언저리에 늘어져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말라비틀어진 등을 꼿꼿이 세우고 턱을 살짝 쳐든 채 남들을 내려다보는 듯한 거만한 표정을 짓고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전생의 이 무렵쯤 그녀 눈에 비친 장박원은 고고한 재인才人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다며 분별없이 행동하는 어리석은 자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오연한 장박원과는 달리 엽이채는 발발 떨고 있었는데, 불쌍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장박원 곁에 웅크리고 앉은 채였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듯 엽이채의 얼굴이 무척 창백했다.
그러나 궁지에 몰린 상황임에도 입술을 물고 시선을 내리깐 채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는 더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그녀는 달걀형 얼굴에 촉촉하고 동그란 눈을 가진 미인이었다.
엽이채는 엽연채와 동갑이었지만 한 달 늦게 태어났다. 그리고 용모를 놓고 보자면 엽이채는 엽연채에게 미치지 못했다. 엽연채가 단정하고 아름다운 해당화라면, 엽이채는 새하얗고 연약한 배꽃이었다.
엽이채는 자신의 강점을 잘 알았다. 그래서 수수한 차림을 가장 즐겨 했는데, 그러면 나뭇가지 끝에 달린 한 송이 꽃이 홀로 바람을 맞는 듯한 분위기가 극대화됐다. 그 자태가 사뭇 고와서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장박원이 가장 좋아하는 여인도 바로 이런 유형이었다. 전생에 그는 엽이채 외에도 첩실 넷과 잠자리 시중을 드는 시녀인 통방通房을 하나 두었는데, 이 다섯 중 셋이 비슷한 외모였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엽연채는 자기도 모르게 자조의 웃음을 지었다. 장박원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자신은 그의 취향에 전혀 맞지 않는 여인이었다.
전생의 자신은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그의 마음이 돌아서기를 간절히 바랐었다. 그래서 엽이채의 수수한 차림을 따라하기도 했었는데, 그 모습을 본 장박원은 이렇게 평했다.
“숭어가 뛰니까 망둥이도 뛴다더니!”
장박원과 엽이채를 보자마자 온씨는 눈에 핏발을 세웠다.
“이 망할 년! 내 너를 찢어 죽일 것이야!”
온씨가 엽이채에게 달려들더니 그녀를 사정없이 두들겨 패기 시작했고, 채 마마와 엽연채가 얼른 그녀를 말렸다.
“큰애야,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엽학문이 성큼 다가와서는 굳은 얼굴로 무릎을 꿇고 있는 두 사람을 흘겨봤다. 그러곤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더 깎일 체면이 어디 남아 있다고 또 소란을 피우는 것이냐!”
“나리, 고정하십시오.”
뒤에 서 있던 묘씨가 나긋하게 말을 건넸다. 그녀 뒤로 사람들이 줄을 지어 늘어서 있었다. 차남인 엽승신과 그의 부인 손씨, 삼남인 엽승강과 그의 부인 나씨, 그리고 열대여섯 살쯤으로 보이는 한 소녀였다.
그 소녀는 옅은 자색 빛깔의 꽃무늬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이 아이가 바로 엽학문과 묘씨 사이에서 태어난 늦둥이 엽영교였다.
엽영교는 엽연채보다 한 살 많은 열여섯이었다. 묘씨를 빼다 박은 엽영교는 퍽 사랑스럽고 아리따운 아가씨였다.
어릴 적 엽연채와 고모 엽영교는 사이가 아주 좋았다. 그러나 커 가면서 둘은 사이가 점점 멀어졌다. 엽영교가 자라면서 당당히 미녀의 반열에 올랐으나 그래도 엽연채의 미모에는 못 미친 것이 화근이었다.
엽영교는 이 사실이 못마땅했다. 엽연채에게 경쟁심을 느낀 그녀는 자신의 항렬이 더 높다는 것을 이용해 허세를 부리곤 했다. 하지만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보기만 할 엽연채가 아니었다. 그렇게 차츰 고모와 조카는 서로를 의식하며 마뜩잖게 여기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엽영교는 전생에 엽연채가 외진 곳에 보내졌을 때 유일하게 그녀를 보러 와 준 사람이기도 했다. 그 생각이 들자 엽연채는 저도 모르게 엽영교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엽연채의 미소를 본 엽영교는 순간 깜짝 놀랐다. 자신의 특출한 외모를 믿고 교만하게 굴어 늘 거슬렸던 조카가 갑자기 자신을 보고 미소를 짓다니! 특히 장씨 가문이라는 좋은 혼처를 구한 후에는 언제나 기고만장해서 자신의 속을 박박 긁어 놓은 그녀였다.
‘큰조카가 지금 둘째 조카에게 새신랑을 빼앗긴 일을 짚고 넘어가려고 여기 달려온 참이지. 내게 웃어 보인 건 분명 나한테 잘 보여서 날 제 편으로 만들려는 생각이구나!’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엽영교는 냉소를 지었다. 네가 잘 풀릴 땐 날 그리 못살게 굴더니 이제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도와달라는 게냐? 흥, 어림도 없지! 그렇게 생각한 엽영교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고개를 살짝 쳐들곤 묘씨 곁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엽학문과 묘씨는 태사의에 앉아 있었고, 엽영교와 두 내외는 그 양쪽에 서 있었다. 엽연채의 아버지만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부친을 비웃듯 엽연채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올라갔다.
“나리, 마님! 장씨 가문 사람들이 왔습니다!”
그때 유이가 헐레벌떡 안으로 뛰어 들어오며 소리쳤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중년 남녀가 본채 대문 앞에 나타났다. 부축을 받으며 들어오는 두 사람은 낯빛이 창백하고 걸음걸이에 힘이 없는 것이, 병색이 완연한 모습이었다. 두 사람은 장박원의 부모인 장굉과 맹씨였다.
엽학문은 자신의 숙적인 장찬이 오지 않고 아들 내외를 보낸 이 상황이 몹시 불만스럽다는 듯 안색을 바꾸었다. 그는 어떻게 화를 내야 좋을까 궁리하기 시작했다.
화가 너무 과하면 두 집안 모두 체면을 구기게 되므로 적절한 행동이라 할 수 없었다. 엽학문은 여전히 장씨 가문과 사돈을 맺고 싶었으니, 장씨 가문의 체면을 어느 정도 지켜 줄 요량이었다. 그렇다고 제대로 화를 내지 않으면 장씨 가문을 두려워해 할 말도 못 하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으니, 그것도 좋지 않았다.
“노후야老侯爺를 뵈옵니다.”
장굉이 엽학문 앞으로 다가서며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노후야, 어제 일은 정말 송구합니다! 저희 가친家親께서 오늘 자신이 직접 찾아뵙고 사죄를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와병 중이라 도저히 오실 수가 없었습니다.”
엽학문은 장굉이 와서 사과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장굉이 자신의 아버지가 오지 못한 이유를 먼저 설명하자 엽학문의 불편했던 심기가 조금 누그러졌다.
“양가가 혼례식을 올리기로 한 날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지는 바람에……. 제 변변치 못한 아들놈은 오지 못했지만 그래도 저희 가문에서는 가마를 보내 새신부를 데려와 혼사를 마치려고 했습니다.”
장굉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제저녁 집안에 도둑이 들어 물과 음식에 독을 탔지 뭡니까. 식솔들이 전부 몸져누워 지금에서야 정신을 차렸습니다. 저희 아버지도 그런 연유로 아직 병석에 누워 계십니다.”
거기까지 말한 장굉은 다시금 화가 치밀었다. 기껏 저를 생각해서 고르고 골라 귀한 집 적녀를 아내로 맞이하게 해 줬는데, 복을 마다하고 염치도 모르는 서출 딸과 눈이 맞아 달아날 줄은.
거기다 독을 탄 범인이 바로 자신의 잘난 아들 장박원이었다니! 제 부모에게까지 손을 대는 불효막심한 자식은 차라리 밟아 죽이는 편이 더 나았다. 그런 생각이 들자 장굉은 그만 참지 못하고 장박원을 향해 달려가 그의 등 한가운데를 발로 세게 걷어찼다.
“이 불효막심한 놈, 어디 개백정이나 할 짓을 벌이고!”
발길질을 당한 장박원이 그대로 땅에 엎어졌다. 그는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들더니 두려움에 벌벌 떨며 말했다.
“아버지! 제, 제가 벌인 짓이 아닙니다!”
깜짝 놀란 엽이채도 정신없이 고개를 조아리더니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흑흑……. 할아버지, 할머니. 저희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젠 거짓말까지 하는 것이냐!”
온씨가 손에 들고 있던 작은 난로를 던지며 말했다.
“형부가 될 사람이랑 도망을 치다니. 어디 이런 뻔뻔한 년이 다 있단 말이냐!”
“큰애야!”
엽학문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방금 전 장씨 가문에서 사과를 했는데 이 사리 분별 못 하는 어리석은 며느리가 쓸데없는 말을 뱉은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책임이 우리 가문에 있다고 인정하는 꼴이 아닌가!
엽이채는 눈물을 흘리며 입술을 꽉 깨물더니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했다.
“큰어머니, 저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전 형부를 꾀어 도망치지 않았어요. 어제는 그저 언니에게 줄 축하 선물을 사러 외출했을 뿐입니다……. 보세요, 이게 바로 보석상에 예약해 둔 장신구예요. 그런데 제가 그만 발을 헛디뎌 넘어졌고, 그 바람에 형부와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형부는 절 의원에게 데려다주셨을 따름입니다, 정말로…….”
“맞습니다!”
장박원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해명했다.
“저희는 혼인을 피해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넘어져서 머리를 부딪혀? 그럼 상처는 왜 보이지 않는 것인가? 그리고 의원에게 데려다주려고 성 밖으로 나가? 허점투성이인 거짓부렁을 늘어놓다니, 여기 있는 사람들을 세 살 먹은 어린애로 보는 것인가!
과연 엽학문과 장굉의 얼굴은 한층 상기되어 있었다. 그러나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 부끄러운 일을 덮고 싶은 게 분명했다.
명문대가를 자처하며 우쭐대는 엽학문은 자기 가문에 형부를 유혹해 사랑의 도피를 한 손녀가 있다고는 절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을 것이었다.
장굉 또한 청렴과 정직이라는 집안의 가풍을 자랑으로 삼는 사람이니, 자기 집안에 처제를 유혹해 도망을 친 데다 식솔들에게 독까지 먹인 불효막심한 아들이 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둘은 손녀와 아들이 말한, 그저 의원을 찾아간 것이라는 거짓 변명을 받아들일 것을 암묵적으로 합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