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일각쯤 지나자 혜연과 추길이 백부에 당도했다.
“아가씨! 쿨럭쿨럭……!”
두 사람은 숨이 넘어가도록 헐떡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혜연과 추길은 가문에서 서열이 제일 높은 여종이라 지금껏 엽연채의 곁에서 시중을 드는 것 외에는 하는 일이 없었다. 평범한 여인들보다 편하게 지냈으니 어디 쏜살같이 걸어가는 가마꾼들을 쫓아갈 수 있었겠는가. 그들이 반쯤 쫓아갔을 무렵, 가마는 이미 그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 정국백부가 어디에 위치하는지도 모르니 둘은 길바닥에서 울음을 쏟을 뻔했다. 그런데 이때 열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사동이 달려오더니, 본인은 정국백부의 사동이며 혜연과 추길을 데리러 왔다고 말했다.
“아가씨, 괜찮으신 거죠?”
주변을 둘러보던 추길의 안색이 싹 변했다. 지금 그들이 있는 방이 너무 초라해 여종인 자신이 지내던 방보다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 괜찮아. 머리에 올린 것들이나 좀 빼 주렴.”
엽연채의 분부에 혜연이 그러겠다고 답했다. 다만 엽연채의 장신구를 빼 놓고 화장을 지워 주고 싶어도 이 방에는 그럴싸한 화장대 하나 보이지 않았다. 있는 것이라고는 창 아래 놓인 탁자가 전부였다.
탁자 위에는 작은 손거울과 양의 뿔로 만든 회색 빗, 간소해 보이는 옥잠玉簪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딱 봐도 사내의 몸치장에 쓰이는 것들이었다.
혜연은 이곳이 낯선 사내의 방이라는 생각에 얼굴을 굳혔다. 그의 물건은 손대지 않는 편이 좋았다. 그랬다가는 나중에 난처해져도 뭐라 반박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아가씨, 여기서 장신구들을 빼 드릴게요. 추길아, 이리 와서 도와줘.”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엽연채의 머리에서 관과 장신구들을 빼 주었다. 빗이 없어서 머리꽂이의 꼬리 부분으로 올림머리를 푸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니 꼬박 한 시진時辰(2시간)이 지나서야 장신구를 모두 제거할 수 있었다.
밖에는 이미 어둠이 깔려 있었다. 관과 장신구를 펼쳐 놓으니 탁자를 한가득 메울 정도의 양이었다. 혜연은 눈앞에 가득한 아름다운 장신구들을 보니 마음이 아파 눈시울을 붉혔다. 붉은 천을 올리는 남편의 눈에 아름답게 보이려고 얼마나 정성 들여 이 장신구들을 준비했던가! 그런데, 이제 어떡해야 좋단 말인가.
“뭐 하시는 겁니까?”
갑작스러운 추길의 호통에 깜짝 놀란 엽연채가 고개를 들었다. 추길이 두 팔을 벌려 문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리고 경계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누군가를 쏘아보고 있었다.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이 방의 주인이자 주씨 가문 셋째 공자인 주운환이었다.
주운환은 순간 멍해졌다. 방에 신부가 있다는 사실을 그만 깜빡했던 것이다. 오늘 일어난 일 때문에 마음이 울적했던 그는 서재로 가서 책을 보고 오는 길이었다.
그는 그저 밤이 되니 씻고 잠자리에 들어야겠다는 생각에, 다 씻은 후 습관처럼 방으로 돌아온 것뿐이었다.
그의 앞을 가로막고 서서 눈을 부라리는 두 여종을 본 주운환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추길아,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엽연채가 걸어 나오며 주운환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주 공자.”
주운환이 곁눈질로 흘끗 쳐다보자 화장기가 전혀 없는 새하얀 그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청초하고 고운 모습이 다시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는 더 이상 그녀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어 시선을 아래로 깐 채 무뚝뚝한 목소리로 알겠노라 말하고는 발길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났다.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엽연채가 고개를 휙 돌려 추길을 쏘아보았다.
“공자께서 주인이시고 우리는 손님이다. 주인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게 말이 되느냐?”
“아가씨의 평판을 생각해서 그런 거예요.”
추길은 억울한 듯 입을 비쭉거렸다.
“제가 막아서지 않으면 들어왔을 텐데… 저 사람은 외간 사내라고요!”
혜연도 이 말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추길의 태도가 무례하기는 했지만 자기도 급한 상황에서는 그리했을 것이다.
엽연채는 마음이 답답했지만 여종들의 태도를 이해했다. 자기들이 모시는 아가씨가 갑자기 주씨 가문 서자에게 시집왔다는 사실을 단번에 받아들이기는 힘들 테니까.
그녀는 일단 친정 쪽 일이 얼마간 수습되고 난 후에 여종들과 어머니를 설득하기로 마음먹었다. 엽연채는 답답한 마음에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아가씨, 피곤하시죠?”
혜연이 다가와 그녀를 부축하며 말했다.
“그래. 좀 피곤하구나!”
갑자기 과거로 돌아온 데다 고작 두 시진 만에 이렇게나 많은 일을 겪었으니 몸이 못 버틸 만도 했다.
“그럼 아가씨, 얼른 쉬시지요.”
추길은 침상을 쳐다보았으나 이내 낯선 사내가 누웠던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차를 마시거나 독서를 할 때 쓰는 나한상羅漢床(좌우와 후면에 낮은 난간을 두른 형태의 널찍한 상)으로 엽연채를 데려갔다.나한상에 누운 엽연채는 이미 눈꺼풀이 천근만근인지라 이내 깊은 잠에 빠졌다.
* * *
주운환이 지내는 서쪽 뜰은 궁명헌穹明軒이라 불렸다.
몰락한 집안인 정국백부에는 식솔이 많지 않아 궁명헌에 기거하는 사람은 주운환과 그를 모시는 사동 여양과 여한뿐, 시중을 드는 어멈조차 없었다. 그래서 청소는 평소 여양과 여한, 두 사람이 도맡아 했다.
궁명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작고 아담한 난죽거蘭竹居가 있었다. 궁명헌을 나온 주운환은 그곳으로 향했다. 난죽거는 한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먼지로 가득했다. 주운환은 걸레를 들고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곁에서 여양이 ‘쳇’ 하고 혀를 차자 먼지가 펄펄 날렸다.
“엽씨 가문이 대체 뭐라고 입만 열었다 하면 후부侯府 소리를 해 대는지. 겉만 번지르르하지 속은 얼마나 시커멀지 알게 뭡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시집 못 간 여식을 도련님께 떠넘기겠어요!
도련님의 방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모자라 문 앞을 가로막고 못 들어가게 하다니. 도련님께서는 정말이지 너무 관대하셔서 탈이라니까요! 도련님께서 아량이 넓으시니 망정이지 다른 사내들 같았으면 벌써 내쫓았을 거예요.”
“어찌 됐든 우리 가문보다는 낫지. 백야께서 그 수모를 당하시고도 한마디도 못 하셨잖아. 그러니 우리라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어.”
여한은 그렇게 대꾸하며 주운환을 흘끗 쳐다봤다. 무표정한 주운환은 차가워 보였지만, 어두운 곳에서도 빛을 발하는 듯 외모가 수려했다. 그가 말없이 걸레를 탁자에 집어 던지자, 여한이 겸연쩍은 얼굴로 말했다.
“도련님께서는 밖에서 쉬고 계셔요. 저랑 여양이 얼른 치워 놓겠습니다.”
그러자 주운환이 말했다.
“치울 것 없다. 그 여인은 여기서 오래 머무를 사람이 아니야. 내일이면 돌아갈 테니 여기서 대충 하룻밤만 보내면 된다.”
그 말을 들은 여양과 여한의 낯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여양이 흥분하여 말했다.
“사람을 업신여겨도 유분수지요. 저희 가문을 무슨 들어오고 싶으면 들어오고 나가고 싶으면 나가는 닭장 정도로 본다는 말입니까? 그 아가씨가 그리 행동하면 저희는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겁니다!”
“이미 웃음거리가 된 지 오래지 않더냐. 그리고 밖에서 사람들이 수군댄다 해도 다들 장씨 가문과 엽씨 가문을 이야기하느라 바쁘지, 누가 우릴 흉볼 만큼 한가하겠어.”
주운환의 대꾸에 말문이 막힌 여양과 여한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국백부는 이미 기가 한풀 꺾인 집안이었다. 비유하자면 거지가 허름한 누더기를 입게 된 꼴인데, 그걸 누가 신경이나 쓰겠는가. 비웃는다 하더라도 갑자기 누더기를 입게 된 대단한 집안, 장가와 엽가를 비웃을 것이었다.
주운환이 말을 이었다.
“여양아, 유모에게 가서 궁명헌에 먹을 것 좀 보내라고 하거라. 그리고 뭐 더 필요한 게 있는지도 물어보라고 하고.”
말을 마친 주운환이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그건…….”
여양은 주운환의 명이 달갑지 않았기에 복잡한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정확히 따지자면 여양은 엽씨 가문 큰아가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아가씨는 시집을 못 갈 상황이 되자 울며 겨자 먹기로 셋째 도련님에게 시집을 왔다. 그러니 셋째 도련님을 임시 피난처쯤으로 생각할 뿐, 일이 수습되고 나면 가차 없이 도련님을 떠날 게 분명했다.
여한이 생각에 잠긴 여양을 밀치며 말했다.
“얼른 안 가고 뭐 해! 듣자 하니 엽씨 가문 큰아가씨도 가련한 처지더라. 그 아가씨 말고 일을 이렇게 만든 장씨 가문을 탓해야지.
엽씨 가문 그 어르신도 참 금수만도 못한 분이야. 적출 소생인 손녀의 인생은 생각도 안 하고 자기 체면만 신경 쓰다니. 그 댁 둘째 아가씨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쳇!
차라리 잘된 거야. 안 그랬으면 그런 여인을 집안으로 들일 뻔했잖아. 그 여인은 대대로 피를 볼 액운을 불러왔을 거야!”
여양이 여한을 쏘아보며 날카롭게 받아쳤다.
“그래서 넌 지금 내가 그 큰아가씨한테 감사의 말씀이라도 드려야 한다는 거야? 내 눈엔 언니든 그 여동생이든 같은 족속으로 보이는데!”
여한은 그 말에 웃으며 대꾸했다.
“알겠으니 말썽은 이제 그만 부리라고. 그 아가씨도 우리 도련님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란 말이지. 이제 가 봐. 인정을 베풀면 다시 돌아온다고 하잖아.”
여양은 입을 삐죽거리더니 돌아서서 문을 나섰다.
* * *
해 질 무렵, 교 마마媽媽(직급이 있는 나이 든 하녀)는 주방에서 정신없이 각 방과 후원으로 보낼 음식을 나누고 있었다. 교 마마는 주운환을 키운 유모였는데, 주운환이 장성하자 정실부인 진씨가 다 큰 사내에게 무슨 유모가 필요하냐며 그녀를 주방으로 보내 잡일을 맡게 했다.
문득 고개를 들어 보니 창밖에서 여양이 교 마마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마마는 두르고 있던 앞치마에 손을 닦고 얼른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여양이 그녀를 한쪽으로 잡아당기며 말했다.
“유모, 셋째 도련님께서 세 명이 먹을 음식을 더 준비해서 궁명헌에 계신 엽씨 가문 큰아가씨께 가져다드리라고 하셨어요.”
“에휴, 복은 지지리도 없는 우리 도련님…….”
교 마마도 엽씨 가문 큰아가씨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오늘 주인어른이 갑작스레 며느리를 데려와 한바탕 소란스러웠던 바람에 하인들 중 이 일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각 방과 후원에 있는 하인들 모두 그 이야기를 하느라 하루 종일 정신이 팔려 있었다.
도련님 생각에 교 마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는 돌아가셨지, 보호해 주는 사람 하나 없는데 주인나리마저 도련님께 신경도 안 쓰시지, 남이 남긴 것들을 주워다 쓰며 겨우 돌봐 드린 정도라 그리 힘들게 자라셨는데…….
어렵사리 혼처가 정해졌나 했더니, 정혼한 여인은 다른 사내와 눈이 맞아 도망가 버리고 웬 아가씨 하나를 데려다가 희생양으로 삼다니……. 지금 이 집에 우리 공자님을 비웃지 않는 사람이 없겠구나.”
“에잇, 유모. 그런 소리는 그만하고 어서 가요!”
여양은 그녀에게 돈을 조금 쥐여 준 후 자리를 떴다. 여양이 불평을 잘하긴 했지만 그래도 상황에 따라 할 말 못 할 말을 구분할 줄은 아는지라,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간에 주운환과 여한 앞에서만 이야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