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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4화 (4/858)

제4화

엽연채는 순식간에 혼인을 밀어붙인, 뻔뻔스러운 여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하인들까지 그녀를 업신여기고, 뒤에서 장박원의 말을 들먹이며 조롱했다.

몹시 우울해하던 그녀는 형색이 점점 초췌해졌고, 겨울에 고뿔에 걸린 후로는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회임한 사촌 여동생이 아들을 순산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니, 그녀의 병색은 더욱 짙어졌다.

이에 추길과 혜연이 주인의 친정으로 가 울면서 호소했지만, 엽연채의 조부는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사촌 여동생 하나도 받아들이지 못하냐며 큰손녀를 나무랄 뿐이었다.

거기다 아이를 못 낳는 자기를 대신해 아이를 낳아 줬으니 고마워 눈물이라도 흘려야 한다는 둥, 그런 고마운 사촌을 모함하다니 배은망덕하기 그지없다는 둥 황당한 소리를 늘어놓더니, 결국 엽연채 같은 손녀는 없는 셈 치겠다고 호통까지 쳤다!

장박원은 엽연채의 조부가 그녀의 생사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요양을 핑계로 그녀를 외진 곳에 위치한 별채로 보내 버렸다. 엽연채는 그곳에서 2년여를 버티다가 끝내 세상을 뜨고 말았다…….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 엽연채는 저도 모르게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장박원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그 지경에 몰린 것은 전부 그 혼인에 매달렸기 때문이었다.

전에 어머니께서 ‘너희 조부는 체면을 중시해 고생을 사서 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자신도 할아버지만큼 체면에 죽고 못 사는 사람이었을 줄이야.

전생에 장박원이 자기 사촌 여동생과 달아났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어째서 그녀 자신은 이 사내가 혼인할 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 알고 있었지만 자존심 때문에 그와 혼인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장씨 가문으로 시집가지 못했을 때 받을 모욕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이리 만든 사촌 여동생이 잘사는 꼴은 죽어도 보기 싫었다.

‘너희 둘이 도망을 갔다 이거지? 좋아, 너희 사이에 껴 주마. 절대 너희들 뜻대로 되게 놔두지 않을 거야. 벌 받을 짓을 한 것은 너희들인데 왜 내가 손해를 봐야 해?’

오만함, 오기, 승부욕은 결국 못돼 먹은 두 남녀를 질리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그녀 자신의 삶 또한 망쳐 버리고 말았다. 남을 망치려다가 자신이 더 큰 손해를 입게 되었으니, 거기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아가씨, 아가씨. 뭐라고 말씀 좀 해 보세요!”

그때 추길의 초조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말썽을 일으킨 장본인도 아닌데 아가씨께서 덤터기를 쓸 필요는 없잖아요! 어서 가서 어르신께 말씀드려야 해요. 이러다 주씨 가문이 보낸 꽃가마가 도착하면 정말 끝입니다!”

서두르지 않으면 늦는 건 맞다. 장씨 가문에서 보낸 꽃가마도 조금 있으면 도착할 테니까.

장씨 가문도 아들이 신부의 사촌 여동생을 꾀어내 달아나려 한 일로 체면을 깎고 싶지는 않았으니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장박원이 정말 가증스럽게도 일을 꾸몄다. 신부 맞이 행렬을 막기 위해 집안사람들에게까지 약을 먹이다니. 그러나 그도 장씨 가문 사람들이 자기 예상보다 빠르게 회복해 신부를 맞이하러 꽃가마를 보낼 줄은 몰랐다.

‘장씨 가문의 꽃가마가 도착하면 조부가 나를 주씨 가문에 시집보낼 이유도 사라져.’

엽연채는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장씨 가문에서는 신부를 맞이하러 오지 않을 거야. 그렇다고 할아버지 성격에 혼례식을 취소하실 리도 없고. 내가 가지 않겠다고 버티면 날 묶어서라도 시집보내실걸. 그럼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시댁에도 미움을 사게 돼.”

순간 멍해진 추길이 입술을 꽉 물었다.

“신부를 맞이하러 꽃가마가 왔습니다! 신부를 맞이하러 왔어요!”

어떤 어멈이 이리 소리를 질러 대는지는 모르겠으나, 주씨 집안으로 데려갈 꽃가마가 도착한 모양이었다. 밖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조잘대는 소리도 들려왔다.

“아이고, 꽃가마가 도착했나 보구나.”

“신랑은? 신랑은 어디 있는 거야?”

앞장선 매파媒婆(혼인을 중매하는 여인)는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부를 맞이하러 왔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매파가 문을 확 열어젖혔다. 방 안에 있던 여종 둘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매파를 쏘아보았다. 달가워하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 정작 새신부는 차분히 침상 위에 앉아 있었다.

이 매파는 유이가 급히 데려온 자라 내막을 거의 모르고 있었다. 그저 갑자기 저를 찾아와 신부를 데려오라는 걸 보니 분명 말 못 할 이유가 있겠거니 짐작하고 있을 뿐이었다.

매파는 그들의 모습을 못 본 척하고 어서 자신이 맡은 일을 끝내고 싶을 뿐이었다. 매파가 엽연채 쪽으로 걸어가 쭈그려 앉고는 말했다.

“아가씨, 제 등에 업히세요.”

엽연채는 알겠다고 말한 후 매파의 등에 올라탔다.

“아가씨…….”

추길은 여전히 달가워하지 않는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혜연은 그런 추길의 손을 잡아당기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매파는 얼른 엽연채를 업고 문밖으로 나가, 그녀를 가마에 태웠다. 이어 매파가 큰 소리로 외쳤다.

“출발!”

매파의 신호에 가마꾼들은 재빨리 가마를 들고 주씨 가문으로 향했다. 가마꾼의 발이 어찌나 빠른지 혜연과 추길은 도무지 쫓아갈 수가 없었다.

* * *

정국백부의 저택은 도성 북쪽에 위치한 허름한 집이었다. 몰락한 이후 수년간 보수를 하지 않아 낡고 초라했다. 하지만 주인 일가는 물론 하인의 수도 적어 살기에는 꽤 널찍했다.

주운환은 주씨 가문 서자이자 셋째 아들로, 서쪽 뜰에 거주했다. 그는 본래 엽씨 가문 둘째 손녀와 정혼한 사이였다.

그러나 두 가문은 아무리 왕래를 해도 데면데면한 사이였다. 엽이채가 적녀이기는 하지만 서출이 낳은 적녀였고, 그 또한 서자였으니 양쪽 집안 모두 별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운환은 오늘도 게으름을 피우며 병이 나서 못 나간다고 말해놓고 책을 보는 중이었다.

공교롭게도 오늘은 주 백야의 정실부인 진씨의 조카가 장가를 드는 날이라, 진씨가 자식들을 데리고 친정이 있는 민주閔州에 간 참이었다. 두 첩실도 산으로 불공을 드리러 가 집안은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셋째 도련님!”

이때 사동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며 말했다.

“어르신께서 일… 일이 생겼다고 얼른 대청으로 오시랍니다.”

“무슨 일로?”

주운환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게 어찌 말씀을 드려야 할지…….”

사동은 머리를 긁으며 말꼬리를 흐렸다.

“가서 보시면 아실 겁니다.”

주운환이 대청에 가자 봉관하피鳳冠霞帔(여인의 혼례복식) 차림의 여인이 서 있었다. 깜짝 놀란 주운환이 물었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주 백야가 헛기침을 하더니 엽연채를 가리키며 소개했다.

“네 부인이 될 사람이다.”

말을 마친 그는 ‘흠’ 하고 뒷짐을 지더니 그대로 돌아서서 가 버렸다. 그러자 그의 몸종이 사건의 전말을 들려주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면요…….”

주운환은 그 이야기를 듣고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아버지께서 축하주를 마시러 가셨다가 그 집 신부를 데려오시다니!

“셋째 도련님……. 괜찮으신 거죠?”

몸종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괜찮으신 거면…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몸종은 재빨리 가시방석을 피해 몸을 내뺐다. 그래서 대청에는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맺어진 한 쌍의 부부만 남게 되었다. 두 사람은 어색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 서로를 마주 보며 서 있었다.

주운환은 마음이 복잡했다. 마주한 새신부는 귀해 보이는 진홍색 혼례복을 입고 있었다. 금실로 봉황을 수놓고 물총새의 깃을 넣은 혼례복에서는 만든 이의 정성이 느껴졌다. 화려하고 진귀한 혼례복을 입은 그녀는 초라하고 썰렁한 대청의 모습과 대비되어 더욱 가련하고 쓸쓸해 보였다. 그 모습에 주운환은 탄식해 마지않았다.

외로이 서 있는 엽연채는 얼굴을 가리고 있는 붉은 천조차도 올리지 못한 상태였다. 그녀의 곁에는 시중드는 여종 하나 없었다. 대청 밖에선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하인들이 슬그머니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비웃는 것인지 잡담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생각을 마친 주운환이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갑시다!”

주운환은 엽연채를 데려가면서도 그녀가 앞이 보이지 않을까 봐 염려하여 중간중간 걷고 멈추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그가 그녀를 침상에 앉히고는 말했다.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앉아 있어요. 가서 시중들 여종을 데려올 테니까.”

밖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주운환은 저렇게 계속 붉은 천으로 얼굴을 덮고 있는 것도 마땅치 않은 듯하여 그녀의 얼굴을 덮고 있던 붉은 천을 올려 주었다.

천 아래로 봉황이 새겨진 정교하고 아름다운 관이 보였다. 양쪽으로 늘어진 순금 술이 그녀의 조그만 얼굴을 환하게 비추었다. 그녀는 갑자기 들어오는 빛에 눈을 찡그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눈썹먹으로 그린 그녀의 눈썹이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기다란 속눈썹은 부드럽게 말려 올라가 있었다. 그녀가 빛을 가득 담아 반짝이는 눈으로 힐끗 곁눈질하더니, 이내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눈을 다시 아래로 떨구었다.

그녀의 미간에는 여전히 가느다란 주름이 잡혀 있었다. 그 모습이 한없이 온화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주운환은 넋이 나가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고귀하고 고운 자태를 지닌 그녀는 천하에 둘도 없는 절세가인이었다.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던 주운환은 자신이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감탄하고 있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혼인하기로 약속한 엽연채의 사촌 여동생을 전에 멀리서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엽이채의 용모는 눈앞에 있는 이 여인에 비할 바가 못 됐다.

‘이렇게 되면 더 잘된 거 아닌가?’

속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주운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귀한 여인이 이곳에 오래 머무를 리 없다는 것쯤은. 주운환은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엽연채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녀는 운이 좋았다. 주씨 가문 셋째 공자가 이렇게 고상하고 멋있는 사내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성격만 괜찮으면 좋은 배필이 될 성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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