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3화 (3/858)

제3화

그 시각, 해당거海棠居.

엽연채는 침상에 앉아 있었고, 추길은 초조한 마음에 문 앞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혜연이 돌아왔다. 추길은 얼른 혜연에게 물었다.

“어떻게 됐어?”

“아마… 혼사가 성사되지 않으려나 봐.”

혜연이 창백한 얼굴로 대답했다.

“마님이 계신 안녕당으로 달려갔는데, 밖에 있던 하인들이 못 들어가게 막는 바람에 셋째 아가씨랑 같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어. 그러다가 셋째 마님이 나오셔서 말씀해 주시길…….”

“뭐라고 하셨는데?”

추길은 초조한 마음에 눈이 다 새빨개질 정도였다.

“큰아가씨를 둘째 아가씨가 혼인하기로 했던 정국백부 서출 셋째 공자에게 시집보내기로 했대. 그렇게 하라고 둘째 마님이 주인나리를 부추기셨다나 봐. 주씨 가문에서는 이미 승낙했으니 조금 있으면 주씨 가문에서 보낸 꽃가마가 도착해 새신부를 데려갈 거야…….”

대번에 얼굴이 새파래진 추길이 목소리를 높였다.

“아가씨의 남편을 빼앗아간 걸로도 모자라서, 아가씨를 몰락한 집안의 서자에게 시집보내겠다고? 그렇게 후안무치하고 비열한 사람일 줄은! 대체 큰마님께서는 뭘 하고 계셨대? 그렇게 하도록 그냥 두고 보셨다는 말이야?”

“큰마님께서는 충격에 그대로 혼절하셔서 여태 일어나지 못하고 계시대. 지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어. 아가씨, 이제 어떡하면 좋을까요?”

혜연이 엽연채를 바라보며 물었다.

엽연채는 등을 꼿꼿이 펴고 앉아 진홍색 치마를 꽉 쥐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가 입을 열었다.

“시집가면 되지 뭐.”

“아가씨?”

혜연은 대경실색해 말을 더듬었다.

“시, 시집을 가신다고요? 누구에게요? 설마 주씨 가문을 말씀하시는 건 아니죠?”

“아가씨, 너무 화가 나셔서 아무렇게나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추길 역시 순간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주씨 가문은 몰락한 집안이에요. 장씨 가문과는 비교할 것도 없고, 저희 집안과 비교해 봐도 훨씬 뒤처진다고요. 거기다 그 가문의 서자입니다! 서자!”

“주씨 가문이라. 좋아, 그래도 괜찮아.”

엽연채가 태연하게 답하자 추길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흐느껴 울며 말했다.

“아가씨……. 도대체 왜 아가씨가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해야 하는 거예요……. 꿈도 꾸지 말라고 해요! 제가……!”

“추길아.”

혜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말렸다.

“그럼 어떡해, 다른 방법도 없잖아. 난동이라도 부리려고?”

“못 부릴 거라도 있어? 난동 부리지, 뭐! 아가씨께서 이런 일을 당하게 놔둘 순 없어! 둘째 아가씨 좋은 일만 시킬 순 없다고!”

추길이 시뻘게진 눈을 부릅뜨며 소리를 질렀다. 고개를 든 엽연채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일순간 그윽함이 번졌다. 난동이라. 그래. 전생에선 난동을 부렸었지.

* * *

전생의 엽연채는 추길과 같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분노했고, 치욕스러웠다. 이런 원치 않는 상황을 맞이하게 됐다는 절망감에 휩싸였다.

당시 그녀는 속으로 이리 생각했다.

‘나는 어엿한 정안후부의 적출 소생이야. 그리고 대리시경의 적장손이자 열세 살에 과거에 급제한 수재秀才(향시 합격자)와 혼인하기로 되어 있었지. 그런데 비천한 서출의 여식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내 남편이 될 사람을 채간 바람에 내 체면은 땅에 떨어졌어. 도성의 웃음거리로 전락했다고!

그것도 모자라 내가 몰락한 가문에 시집을 가야 한다고? 내가 너 대신 몰락한 가문으로 가고, 너는 부귀한 집안의 자제에게 콧노래를 부르며 시집간다고? 분명 잘못을 저지른 건 넌데 왜 내가 네 추잡한 행동을 덮기 위해 손해를 봐야 하지? 거기다 또 우쭐대는 네 모습까지 지켜봐야 한다고? 내가 왜! 뭐 하러 그래야 하는데!’

전생의 그녀는 분노와 절망감을 느끼며 혼례복을 입은 채로 규방에서 뛰쳐나와 내달렸다. 그녀는 손님들의 조소인지 동정인지 모를 눈빛을 받으며 조부 엽학문이 있는 서재로 갔다. 그리고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엽학문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서재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연채야,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문밖에서 무릎을 꿇다니. 아직도 잃을 체면이 남아 있을 줄이야!”

엽연채가 울면서 말했다.

“할아버지, 제 체면은 이미 땅에 떨어진 지 오래입니다! 둘째 때문에 이미 구겨질 대로 구겨졌단 말이에요!”

“누가 그러더냐! 내 그래서 좋은 방도를 찾아 주지 않았더냐?”

“지금 좋은 방도라고 하셨어요?”

엽연채는 눈물이 맺힌 눈을 똑바로 뜨며 되물었다.

“그 좋은 방법이라는 게 저를 주씨 집안 서자에게 시집보내는 건가요? 그러고 나면요? 두 집안의 체면을 위해 사실을 숨기고, 둘째를 장박원에게 시집보내는 건가요? 결국 그렇게 되는 거지요?”

손녀가 진이 다 빠져서 쉰 목소리로 묻자 마음이 약해진 엽학문은 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손녀가 말한 것이 바로 그가 생각해 낸, 손해를 줄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이게 공평한 처사인가요? 분명 둘째가 저지른 잘못인데 왜 제가 그 책임을 져야 하는 거죠? 전 죽어도 손해 보지 않을 거예요!”

그러자 엽학문이 오히려 성을 내며 말했다.

“그럼 뭐 어쩌겠다는 말이냐? 뭐가 됐든 오늘 혼례식은 절대로 취소할 수 없다.”

그때 유이가 안으로 들어오며 알렸다.

“어르신. 주씨 가문에서 보낸 꽃가마가 도착했습니다!”

“여봐라, 연채를 묶어라! 묶는 김에 아예 꽃가마에 묶어 버려!”

그러자 엽연채가 날카롭게 외쳤다.

“꿈도 꾸지 말거라. 난 죽어도 꽃가마에 오르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장씨 가문으로 시집갈 것이야!”

그녀는 곧바로 머리꽂이를 빼 들어 목에 갖다 대더니, 주씨 가문에 들어가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협박하며 버텼다. 그렇게 이각二刻(30분)쯤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데 사동이 와서 아뢰었다.

“어르신, 장씨 가문에서 보낸 꽃가마가 도착했습니다!”

그 소리에 엽연채와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 그대로 굳었다. 그때 장씨 가문 여종이 걸어오더니 땅에 무릎을 꿇고 사죄하며 말했다.

“저희 장씨 가문에 일이 생기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되고 말았습니다. 어떤 몹쓸 것들이 함부로 입을 놀렸는지 모르겠지만, 바깥에 도는 소문은 모두 사실이 아닙니다. 새신랑은 지금 댁에 계십니다!”

여종은 이어서 사정을 설명했다.

“어젯밤 집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이 고약한 도둑놈이 물과 음식에 맹독을 넣는 바람에 일가 전원이 몸져누우셨지 뭡니까! 지금에야 몇몇 분들이 겨우 정신을 차리시고 바로 꽃가마를 보낸 겁니다.

당장 새신랑이 찾아뵙고 사죄를 드려야 마땅하나, 새신랑 역시 침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중이십니다. 그래도 내일이면 털고 일어나, 직접 찾아뵙고 사죄를 드릴 겁니다.”

설명을 들은 엽연채는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신랑이 정말로 사촌 여동생과 달아난 것이든 장씨 가문에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핑계를 대는 것이든 간에, 장씨 가문의 설명과 그들이 보이는 태도 덕분에 적어도 그녀의 체면은 서게 되었다.

그때 묘씨가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둘째가 돌아왔답니다. 둘째는 사랑의 도피 같은 건 하지도 않았고, 그저 신부에게 선물을 하려고 장신구 상점에 갔던 것뿐이라는군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장씨 가문에도 일이 생겨 제시간에 신부를 맞이하러 오지 못했던 것이고요.

두 우연이 겹쳤을 뿐인데 속이 시커먼 사람이 이를 이용해 헛소문을 퍼뜨린 겁니다. 못된 사람 같으니라고.”

그 말을 들은 엽연채는 모든 게 그저 오해라는 이야기를 믿어 버렸다. 체면이 선 엽학문도 엽연채를 장씨 가문이 보낸 꽃가마에 태웠다.

엽연채가 장씨 가문에 도착하자 사람들은 장박원이 아직 병중이라 이곳에 나올 수 없으니 대신 수탉과 절을 올리라고 했다. 엽연채는 그 말을 따라 절을 올린 뒤 신방으로 안내받았다.

방에 들어가니 엽연채의 시누이가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붉은 천을 올려주었다. 그러고는 장박원이 몸이 안 좋아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해 신방에 올 수 없으니 먼저 쉬고 있으라고 했다.

이튿날 저녁이 되어서야 장박원은 신방으로 와 모습을 비쳤다. 엽연채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쌀쌀맞기 그지없었으나 그녀는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그녀의 성정이 그다지 세심하지 못한 편이기도 하고, 이미 시어머니에게서 아들의 성격이 본래 이러하니 너무 따지려 들지 말고 그러려니 하고 지내라는 충고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주일쯤 지났을 때, 엽연채는 장박원의 성격이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재에서 그와 자신의 사촌 여동생이 주고받은 서신을 발견한 것이다.

서신에 따르면 혼례식 당일 둘은 정말로 도망치려고 했었다. 누군가가 장씨 가문 음식에 독을 탄 것 또한 사실이었는데, 더욱 기가 막히게도 독을 탄 자가 바로 장박원이었다는 것이다!

엽연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모욕감을 느꼈다. 그녀는 이 사실을 두고 장박원과 크게 싸웠다. 그러자 장박원도 연극을 집어치우고,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은 그녀의 사촌 여동생이라는 것을 대놓고 인정했다. 당연히 그때부터 부부 관계는 더욱 엉망이 되었다.

그 후 어떻게 엽연채가 회임을 하긴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장박원이 그녀에게 잘해 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를 핑계로 바깥채에서 지내기 시작했다. 열 달 동안 마음고생에 시달린 그녀는 결국 난산 끝에 아이를 사산하고 말았다.

그녀 자신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다시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소식을 들은 장박원이 산실 밖에서 아이 하나 못 낳는 쓸모없는 여인이라고 비아냥거렸다. 엽연채는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그것을 빌미로 보름 후, 장박원이 첩을 들였다. 데려온 여인은 다름 아닌 엽연채의 사촌 여동생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엽연채의 어머니가 화병으로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장박원은 첩실로 들인 사촌 여동생을 첩이 아닌 부인으로 부르도록 했다. 시어머니는 방관할 뿐이었다. 몸이 망가져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엽연채에게 잘해 줄 필요가 없었으니, 차라리 대를 이어 줄 첩실을 잘 보살피는 편이 나았다.

더군다나 엽연채와 엽이채는 같은 가문 출신이었다. 온씨마저 세상을 떠났으니 좀 소홀히 대한다고 해서 정실부인의 친정에 미움을 살 일도 없을 터였다.

엽연채는 호칭 문제를 놓고 장박원과 또다시 크게 싸웠고, 장박원은 이렇게 말했다.

“엽연채, 대체 내게 뭘 바라오? 나는 혼례식 당일 혼인을 피해 도망갔던 사람이오! 우리 가문 사람들이 신부를 맞이하러 가지 못하게 독까지 탔소! 그런데 당신은 울고불고 온갖 궁리를 하더니 결국 죽겠다고 협박하며 이 집에 시집왔지!

게다가 내가 당신을 원하지도 않고 사모하지도 않는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잖소. 그런데도 이 혼인을 붙들고 놓지 않은 건 당신이오. 그러니 당신 체면이 안중에도 없다는 이유로 날 탓하지는 마시오. 당신에게 지킬 체면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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