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87/87)

외전. 푸른 장미의 일기와 장송곡

***

햇빛이 반짝이는 오후,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밑도 끝도 없이 파랗습니다. 하늘을 살짝 가리듯 기울어진 커다란 나뭇잎은 녹색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여름 햇빛을 피했습니다.

“……아름답네.”

이곳은 언제나 여름입니다. 청명한 하늘로 가득하고, 세상에 나 혼자 있는 듯 고요한 언덕이 있는 아주 무덥지는 않은 그런 여름.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이 늘 머무르는 곳입니다.

저는 새삼 주변을 돌아보며, 이 그림 같은 풍경을 만끽했습니다.

이제 알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더는 출신을 감춘 완벽한 공작 영애인 척 세상 모든 우아함은 다 가져온 척 가식을 떨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요.

그래서 멍하니 턱을 괸 채 여유로운 생각에 잠겼습니다.

사실 부끄럽지만 아주 어린 시절 한때 제 꿈은 ‘왕자님’이었어요.

어느 동화책에서 본 왕자님이 아주 멋있기 그지없었거든요. 멋진 백마도 타고 검도 마구 휘두르고, 나쁜 마왕을 물리치러 신나는 모험도 떠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멋진 직업인가요?

이런 말을 했더니, 친부는 쓸데없는 생각 말고 도망이나 잘 칠 생각을 하랬어요.

그때는 숲에서 살아남는 법, 들판에서 조용히 걷는 법, 동굴에서도 머물 수 있는 법. 각종 생존 방법을 알려주는 부친이 이상하기만 했거든요.

동네 아빠들은 딸한테 동화책을 읽어주거나 안아 올려서 마차를 태워주곤 하던데 말예요.

한 번은 엉엉 울며, 밉다고 말했더니, 친부는 한숨을 쉬며 말했어요.

<네 삶은 죽기 전까지 도피와 함께할 삶이니까.>

친부는 도피가 무엇인지도 모를 어린 저한테 이렇게 말했고, 당연히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좀 더 컸을 때 들었으면 좋았을걸.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일은 없었을 겁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친부는 죽었으니까요.

이후로 가끔 생각했습니다. 친부는 아프지 않게 갔을까. 그러지 않았을까 하고요.

도뮬릿 공작의 검은 정말이지 단 한 합에 친부의 숨을 끊어놓았습니다.

그때, 마을 사람들이 모두 죽었어요. 아직도 기억합니다. 굳이 죽이지도 않아도 되었을 어린아이, 노인까지 학살하는 모습을 보며 활짝 웃고 있던 공작의 모습을요.

이것이 양부와 나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삶에서 절대 잊을 수 없던 사람을 만났지요.

저는 생각을 하다말고 고개를 돌렸습니다. 귀를 기울이면 웅장한 목소리들이 들려와요.

이른바 위대한 분들의 대화입니다.

[그래서, 어떡할 건가? 그대가 정한 ‘규칙’이 엉망이 되었어. 내 세계의 질서까지 망쳐놓았지.]

[하아, 골이 아프군.]

[인간처럼 말하지 말고, 방법을 제시하게. 방법을.]

[너야말로 인간처럼 재촉하지 말지, 그래? 시간이라면 불어터지게 많은 존재가.]

[아, 글쎄, 이대로라면 내 세계의 영혼을 빼앗긴대도!]

위대하신 존재들의 대화는 늘 같은 방향으로 끝나곤 했습니다. 끝은 늘 옥신각신 다퉜어요.

[특정 존재를 아끼지 마라. 대체 왜 너는 네 전대처럼 미련을 놓지 못하는 거냐!]

듣고 있노라면, 뭐랄까. 정말로 사람들이 싸우는 것처럼 격렬함을 느끼기보다는 마치 다툼을 흉내 내고 있다는 기분이 듭니다.

다툰다기에는 들려오는 목소리가 웅장하고 차분하고, 고요하기까지 해요.

아,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는 오늘의 다툼이 끝났나 봅니다.

다시 들판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곧이어 근처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여기 있었구나, 영혼아.]

이 우스운 호칭은 위대하신 존재께서 나를 부르는데 재미들린 호칭입니다.

차라리 이름을 불러주면 좋을 것 같은데, 위대하신 존재께서는 죽은 이에게는 이름이 덧없는 것이라며 이렇게 부르곤 했어요.

그럴 때 다시 한번 느낍니다. 아, 나 죽었지 하고요.

“오늘의 실랑이는 끝나셨나요?”

[그럼, 저쪽이 꽤나 성가시게 나오는구나. 이제 그만 굽혀주었으면 하는데 말이지.]

“힘내세요.”

이분은 제가 죽자마자 이곳으로 데려온 존재이십니다. 아마도 내 세계의 신이나 신 같은 존재가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물론, 곧일 거다. 저쪽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건데, 괜한 고집을 부리는 게야.]

위대하신 존재의 모습은 의외로 인간과 똑같습니다. 정확히는 커다란 망토를 쓰고 있는데, 아래에 응당 보여야 할 얼굴이 보일 때도 있고,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아래 얼굴이 보일 때에는 지금처럼 미소를 지을 때입니다. 이럴 땐 다섯 살 난 장난꾸러기처럼 짓궂게 웃는데. 사람인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착각하진 않습니다. 눈앞의 존재는 제게 이 공간을 만들어준 존재이기도 하니까요.

가장 좋아하는 여름이 쏟아지는 공간, 저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무엇을 기다리는지는 곧 알게 될 거고요. 이래저래 눈칫밥 먹고 자란 기간이 길어, 이런 기민함에는 자신 있거든요.

그렇게 조금 더 시간이 흘렀을 때, 위대하신 존재가 다시 나타나 저를 불렀습니다.

[영혼아, 가엾은 영혼아.]

저는 대답하는 대신 눈을 깜빡였습니다.

“왜 제가 가엾나요?”

건방진 질문인가 싶었지만, 여기 머문 시간이 있으니 이 정도야 봐주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있었어요.

저는 어린 시절부터 되바라졌거든요.

위대하신 존재는 저를 한참 보시더니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우리는 수명을 다하지 못한 모든 영혼을 가엾게 여긴단다.]

애초에 정해진 수명을 어겨 죽는 영혼은 무척이나 드물다고, 영혼은 정해진 규칙에 따라 돌고 도는 것이기에 발생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제가 무척 특이한 영혼이래요.

[특히나 너처럼 죽은 신의 파편을 쥔 채, 스스로 수명을 던져버린 이는 처음이라서 말이다.]

죽은 신의 파편에 대해서는 여기 온 처음에 들었습니다. 저처럼 푸른 장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요.

위대한 존재는 저를 탓하지 않았지만 동시에 탓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토록 주어진 것이 많았거늘.]

어째서 제게 주어진 것을 누리지 않았느냐고요.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게 정말 주어진 것이 많았을까요? 손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랬다면 저는 왜 꿈을 이루지 못했을까요.

진짜 자연처럼 만들어진 이 공간은 바람도 함께 불었습니다. 짧게 흔들리는 제 머리는 진한 갈색, 생전에 한 번쯤 해보고 싶던 머리색입니다.

눈에 띄는 내 머리색이 싫었던 저로서는 허락되지 않아 단발도 한번 해보지 못했던지라, 지금 모습에 만족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흔하던 색. 가끔은 흔하고 평범한 색을 가진 사람, 저기 굴러다니는 돌멩이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우리 안에 갇힌 토끼처럼 시선을 감내하는 삶은 더는 살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다른 세계에서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삶을 살고 싶으니?]

저는 꼼꼼하게 생각해보았어요. 이 질문에 대해서 답을 하기 위해서는 제 삶을 한번 반추해 보아야겠지요.

“저는…….”

숨을 콱 조르는 드레스, 그보다 더욱 숨통을 조여오는 집안의 공기. 비명과 울부짖음, 원한과 고통이 모든 곳에 서린 채 칼날을 걷는 듯한 나의 삶.

단 한 번도 완벽한 공작 영애가 되고 싶지 않았으나 단 한 사람을 위해 지옥에 뛰어들었던 길.

이제는 머나먼 일들이 된 날들을요.

***

오늘도 저 소년은 세상에 홀로 남은 사람처럼 나른하게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언제나처럼 소년을 바라보았어요. 검은 머리칼이 살랑살랑 흔들리는 소년은 세상 귀한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을 내었습니다.

잘생겼다. 하녀들이 속삭이던 말들을 되새기면서 시선을 떼어내진 않았습니다. 혹시라도 침이 나올 것 같아 흐흡, 입술을 꽉꽉 단속했습니다.

언어나 문학은 너무나도 어려워서 채 모두 배우지 못했지만 책 문장은 유려합니다. 적혀 있는 만큼 잘 말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직은 나이가 어려서 소년만큼 유창하게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눈앞의 소년이 어떤 표현도 걸맞지 않을 만큼 눈부신 것인지. 늘 소년을 판단하기 어려웠습니다.

저는 훗날 마지막 순간까지 생각했어요. 누가 되었든 체이서 루브 도뮬릿을 표현하는 일은 참 힘든 일일 거라고.

잘생겼는데 예뻐. 예쁜데 오묘해. 소년은 어린 내게 몇 글자로 담아내기엔 너무 많은 것을 가진 표현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열심히 연습한 말을 뱉기도 했어요.

“체이서.”

물론 지금 생각해보면 캄캄한 지하실, 그것도 겨우 빛이 새어들어 오는 지하 실험실에 갇혀서 할 소린 아닌 것 같았지만요.

“체이서랑 만난 날은 나한테 시가 3000억 골드짜리 다이아몬드와 같아.”

이런 되바라진 말에 어린 오라비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한숨을 푹 쉬었습니다.

“……문학 선생이야?”

“응? 으응.”

“바꿔.”

대답하기 무섭게 마법사들이 들어왔고, 언제나와 같은 실험이 이어졌습니다. 저는 내 팔에 들어오는 굵은 주삿바늘도 무서웠지만, 체이서의 팔에 놓아지는 바늘이 더욱더 무서워서 언제나처럼 엉엉 울었습니다.

체이서는 그런 저를 보며 언제나와 같지 울지도 웃지도 않은 채 보다가 눈을 떼어냈습니다.

그리고 밖으로 나온 뒤, 어느 날 문학 선생이 바뀌었습니다.

바뀐 선생님은 더는 고백하는 데 만점이라는 말들을 알려주지 않았어요. 아쉽게도.

하지만 상관없었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앞으로 오랜 날들을.

체이서를 만나 행복하고, 앞으로 행복할 테니까요.

눈치챘겠지만 저는 이미 양 오빠를 사랑하고 있었어요.

글씨가 어여쁘게 써지지 않는 건 오랜 콤플렉스였습니다. 그건 성장한 어느 날에도 마찬가지였어요.

“체이서, 편지야.”

그토록 싫어하고 어렵던 문학도 이제 줄줄 읽을 수 있고, 시도 막힘 없이 읊을 수 있는데. 왜 편지를 쓰는 건 이리도 어려운 건지.

사나운 일갈 속에 울며불며 익힌 교양은 뼛속같이 제게 박혀 있었지만 저는 그럼에도 언제나 자유로운 왕자님이 되길 꿈꿨어요.

철이 든 즈음에 많은 것을 알았음에도요.

첫 번째로, 제가 이 삶이 다하는 날까지, 자유로운 사람도 왕자님도 될 일이 없다는 것.

“……어째서 넌 필체에 발전이 없는 거니?”

“흠흠, 숙녀에게 그런 걸 지적하는 게 실례인 줄도 몰라?”

“아아, 몰랐네. 어제는 존대를 하시더니, 오늘은 편히 말씀하시는 숙녀분?”

“……실수에 관대해지셔야죠, 오라버니.”

세상에, 체이서가 보일 듯 말 듯 미소 지었습니다.

“난 내 숙녀에게만 친절해질 예정이라.”

이제는 소년에서 벗어나 완연한 성인이 된 그는 어린 시절에 예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지만, 이 모습은 성숙한 매혹을 뿜어내곤 했어요.

체이서를 보며 깨달은 점은, 로맨스 소설에 나오는 ‘어머, 죄송해요! 주워드릴게요!’ 이따위 첫 만남들은 다 개수작이라는 걸 알았어요.

아무리 그의 앞에 떨어트려도 체이서가 사랑에 빠지는 일은 없었으니까요.

아마도 세상에 있는 모든 물건을 던져도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겁니다.

두 번째로 깨달은 것이 바로 이것이었으니까요.

그가 나를 사랑하는 일은 없을 거라는 것.

우습게도 이건 푸른 장미로서의 감이었어요.

“실험실에 다녀온 거니?”

“응. 불러서요.”

하루하루 내 힘을 빼내려 하는 실험은 더욱 잔인하고 깊어졌고, 저는 각성도 하지 않은 채로 힘을 인지하게 되었으니까요.

쇠약해져 가는 몸을 느꼈어요. 하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습니다. 약해 보이는 건 싫으니까요. 모두가 내게 천한 출신을 감추고 완벽한 공작 영애이기를 바랐어요.

지하 실험실에서는 말 잘 듣는 실험체이길 바랐고요.

저는 완벽을 요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게는 손을 대지 않으면서 체이서만을 집요하게 학대하는 공작에게 한 방 먹여줄 날만 기다리면서요.

각성하면 무엇이든 자유롭게 할 수 있을 거야. 제가 믿은 것은 이 하나였습니다.

사실은 이미 무너져가는 발밑이 두려웠지만 애써 외면한 채 겨우 버티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어요.

“요즘은 소설을 쓰고 있어요.”

문학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야기는 좋아했습니다. 특히나 모험 이야기나 행복한 사랑 이야기를요.

이미 나는 수많은 이야기를 쓰고 지웠어요. 하지만 완성되지 않았으니 아직 첫 작은 없는 셈이었죠. 그렇지만 이 글 조각들을 쓰면서 즐거웠어요.

모두가 내가 할 수 없는 것이니까. 사실 이야기를 직접 쓰게 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어요. 이야기 속에서라도 행복을 느껴보고 싶었거든요.

기왕 쓴다면 저와 체이서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네가?”

“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제대로 쓰고 있으니.”

하지만 어떤 소설가이든 첫 작에는 미숙함이 보이지 않을까요? 그러니 한번 습작을 거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쓰게 된 소설을 위해서는 다정하고 강인한 주인공이 필요했어요. 일단 저는 안 됩니다.

못된 것만 보고 자랐더니, 좀 못되게 자랐거든요. 제 음식에 독을 탄 하녀쯤은 아무렇지 않게 처리할 만큼이요.

“주인공은 성녀님이에요.”

그렇게 눈을 돌리다 보니, 들리는 소식이 막 신전에서 추대한 성녀님의 이야기였어요. 이 시기에 제국에는 세기의 사랑이 널리 퍼지고 있었는데, 대공가의 젊은 가주와 성녀님의 이야기였어요.

세상에, 두 사람은 수감소에서 운명처럼 만났다지 뭐예요?

“남자 주인공은 헤르님 대공님이요.”

“……그쪽이 정적인 건 알고 쓰는 거지?”

“그래서 오라버니는 악당이에요.”

체이서는 관심 없다는 듯 턱을 괴고 있다가 고개를 살짝 내저었습니다.

“무엇을 쓰고 싶은 건진 몰라도. 그 두 사람은 네가 알고 있는 것같이 세기의 사랑은 아니야.”

현재 도뮬릿은 알게 모르게 세력이 갈라져 있었어요. 도뮬릿 공작을 따르는 세력과 체이서를 따르는 세력.

“아마도 그 약혼은 전략적 동맹일 테니까. 둘 다 냉정하고 교활한 인간들이지.”

“오라버니처럼요?”

체이서가 피식 웃었습니다.

“그래. 나처럼.”

이제는 저 웃음이 정말 즐거워서가 아니라 누구에게든 의식적으로 짓는 웃음이란 걸 알고 있습니다. 제 고백에 지어 보이는 곤란함조차도 그저 응당 반응에 맞게 꾸며낸 거란 것을요.

아마 체이서가 저렇게 말을 했으니, 사실일 겁니다. 그렇지만 저는 믿고 싶었어요.

“그럼 가상의 이야기라 생각하고 쓰면 되니까요.”

이 세상엔 진실된 사랑도 있다는 걸.

“여기서 오라버니는 아주 악독하고 사랑 못 받는 악당으로 만들어버릴 거예요.”

“그것참 무섭네.”

거짓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다른 이와 짝지어 줄 이유도 없고, 굳이 나쁘게 표현할 이유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제 몸 상태가 악화되면서 이 소설은 미처 완성되지 못한 채 제 손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잔혹한 실험 후 다시 눈을 떴을 때, 완성된 소설이 제 앞에 도착했어요.

그건 도뮬릿 공작의 변덕이었습니다. 제가 소설을 좋아하고 쓴다는 것을 알고서 사람을 시켜 이 소설을 완성시켜 버렸어요.

가끔 잔혹한 실험 뒤에 던져주곤 하던 보상이었습니다.

제 소설은 우습게도 지지부진한 한편의 통속극이 되어 제 손에 돌아왔습니다.

악당 이름은 재미 삼아 체이서의 이름을 붙여두었을 뿐, 지우고 다시 쓸 예정이었는데…….

거기다 우습게도 이 소설에서 저는 일찍 죽은 악당의 동생이 되어 있었습니다.

제 이름 또한 언젠가 쓸 또 다른 이야기를 위해 적어둔 것인데, 이 소설에 쓰였더라구요.

도뮬릿 공작은 대체 무어라고 명을 내린 걸까요? 제 소설은 제가 생각했던 것은 거의 줄기만 남은 채, 순수하고 낭만적인 사랑은 어디 가고 육체관계만 남은 도색 소설이 되었어요.

어차피 이 소설은 출간되지 못할 겁니다. 이토록 실존하는 거물들을 써놓았는데, 어찌 가능하겠어요. 도뮬릿 공작 또한 이를 알고서 단 한 권만 만들어준 것이겠죠.

그날 저는 책을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내 이야기는 끝끝내 완성되지 못하겠구나.

이 순간에도 기시감이 들었어요. 언젠가 체이서는 이 책처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할지도 모른다는. 그런 예감이 들었으니까요.

“흡…… 흐흡.”

눈물 방울이 하염없이 뚝뚝 떨어집니다.

저는 왕자님이 되고 싶었습니다.

동화 속 왕자님은 사악한 마왕의 수하들과 불을 뿜는 용을 물리치고, 마침내 성에 갇힌 공주님을 구해냈습니다.

저는, 저를 대신해 주삿바늘을 견디고, 그것이 아픈 줄도 모르던 소년을 구해주고 싶었어요.

감정이 무엇인지 모를 오라비에게 사랑을 하면 이토록 행복하다는 마음도 알려주고 싶었어요.

하지만 내 지옥을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 준 사람의 상대는 내가 아니었나 봐요.

“그러니까 네 마음은 받아줄 수 없어. 미안해.”

“오빠!”

왜 제 꿈은 늘 좌절되고 마는 것일까요. 실험을 일삼던 마법사들은 모두가 제가 아주 대단하다고 하였는데.

아주 오래전 과거 신처럼 모셔졌다는 푸른 장미는 이제 이 실험실의 죽어가는 꽃에 지나지 않는걸요.

그들은 제가 기록된 힘보다 약하다고 조롱하고 비웃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저는 그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지탱하는 힘없는 사람일 뿐이었어요.

그래서 끝내, 죽음의 순간엔 원망을 토해내고 말았습니다.

“꼴도 보기 싫어. 미워. 밉다고!”

잘못된 각성이었습니다. 실험에 의해 이리저리 흔들리고 억눌리며 엉망진창으로 빼내어진 힘은 결국 폭주를 가져와, 실험을 하던 모든 이들의 목숨을 빼앗았습니다. 함께 있던 도뮬릿 공작마저요. 잘된 일이죠.

죽어 마땅한 자들이었으니까요.

체이서만은 살아서 다행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원망스러웠습니다.

나는 더 이상 네 곁에 있지 못할 테니까.

저는 그리 착하지 않습니다. 못됐어요. 그래서 체이서의 마음에, 기억에 가장 오래 남을 방법을 택한 겁니다.

“……사랑할게.”

이 말이 거짓이란 것도.

“널 다시 만나면 거짓말하지 않을 테니까. ……아프지 마.”

지켜지지 않을 약속이란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모든 힘을 넘긴 순간. 시간이 돌아간 세상에 저는 없을 테니까요.

그저, 마지막 순간에야 제가 온 삶을 다해 바랐던, 온기를 품은 눈이 저를 향했다는 것이 원통하고 비통했습니다.

원망스러웠어요.

왜냐면, 우리는 다시는 만나지 않을 테니까.

기적이 일어나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요? 그렇다고 해도.

넌 나를 끝내 사랑하지 않을 테고.

나는 그런 너를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으니까.

마지막 순간에야 저는 사랑이 저를 죽였다는 것을 알았어요.

***

죽은 뒤에 이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며, 멍하니 생각에 빠진 것만은 아닙니다.

신기하게도 이 공간에서 제가 있던 세상을 볼 수 있었거든요.

저는 그곳에서 체이서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랑에 빠진 그를 보았어요.

제가 죽은 뒤에야 여러 감정을 배워가는 그를 보며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안타까웠습니다.

그의 사랑이 제가 저지른 잘못으로 비극을 향해 치닫는 것이 보였으니까요.

그가 보는 제 어린 환영은 아마도 처음 느껴보는 죄책감의 발로였을 거예요. 이렇게라도 감정을 느끼는 그가 대단하다고 해야 할까요. 장하다고 해야 할까요.

결국엔 제 존재와 이름을 완전히 지워내는 그을 보며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기쁨이 더 큰 것은…….

네가 나처럼 아프고 아파서 결국엔 처절해지는 처지를 알아서일 거야.

어쩌면 저와 그는 남매가 더 걸맞았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못된 사람이라서 그가 행복하기를 바라면서 저를 잊는 것이 싫었어요.

용서하고 싶지 않았어요. 널 살린 나를 기억해달라고, 그 사랑을 주지 않아도 좋으니 나를 기억하라고 괴롭히고도 싶었어요.

이렇게 못된 저라서, 그의 고통이 달갑게도 느껴지네요.

[영혼아, 왜 우는 거니?]

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습니다.

“기뻐서요.”

[……하지만 네 감정은 그게 아니라고 하는구나.]

“기뻐서 우는걸요.”

못난 사람. 기껏 사랑에 빠졌다면 보란 듯이 행복해지기라도 할 것이지.

내 존재를 남김없이 지워낼 거라면, 아끼고 귀애할 것이지.

저는 깨달았습니다. 제가 사랑했던 사람은 제가 지은 죄로 형벌을 받듯 사랑하는 이와 영영 가까워지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하고요.

이런 결말을 바란 것은 아닌데……. 원망과 미련이 교차하듯 일렁였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저는 죽은 사람이니까요.

“꼭 다른 세상에서 태어나고 싶어요.”

체이서의 생각은 제게 닿았습니다.

훗날 제가 어느 세상에서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요.

저는 만족하기로 했습니다.

그가 생애 처음으로 행복을 바란 사람이 가족인 나였다는 것에 대해서.

“행복한 가족이 있는 곳에 태어나서, 다정한 오빠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사랑에 빠질 일이 없는 그런 다정한 가족이요.

“친한 친구가, 아니면 언니가 하나쯤은 있었으면 좋겠네요.”

단 한 번도 친구를 사귀어본 적이 없으니까요.

“아무것도 모른 채로 행복하고 아주, 아주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이곳에서 갈색으로 물들이고 잘라낸 머리처럼. 그렇게.

“……그렇게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생각해보면 저는 단 한 번도 푸른 장미이길 바란 적이 없어요. 기쁜 적도 없고요.

그래서 저는 누구보다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던 건지도 모르겠어요.

[네 소원을 들어주마.]

저는 위대한 존재의 마지막 말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눈을 감았습니다.

***

“언니, 새해 복 많이 받아요!”

이아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제게 손을 붕붕 흔드는 소녀를 보며 슬쩍 미소했다.

“나가는 거야?”

“네! 해돋이 보러 가려구요.”

흘끗 이아나가 본 풍경에 소녀의 뒤로 고개를 꾸벅 숙이는 이가 있었다. 소녀의 남매였다.

“우리 오빠는 맨날 저래요. 언니한테 인사하기 부끄럽다고.”

“그래?”

“완전 숙맥이라니까요. 다정해 빠져서는. 쯧쯔. 이래서야 여자친구나 사귈지 모르겠어요.”

소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이아나는 추위도 잊고, 과장스럽게 움직이는 옆집 아이를 관찰했다.

프란시아를 떠올리게 해서일까, 퍽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볼수록 사랑받고 자란 티가 물씬 풍겼다. 그러니, 낯선 그녀에게도 이토록 스스럼없이 다가가고 밝게 웃는 것이리라.

지금은 이아나도 소녀를 예뻐라 여겼지만,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었다. 막 이 세계에 왔던 시점에 그녀는 알게 모르게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럴 때 만나게 된 것이 소녀였고. 그녀는 제게도 언니가 있었으면 했다며, 어여쁜 옆집 언니가 좋다고 졸졸 쫓아다녔다. 성가시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잠시일 뿐 이아나는 차차 마음을 열며 감화되었다. 착하고 사랑스러운 소녀였다.

두 사람이 가까워진 건 순전히 이 소녀의 공이 컸다.

“해돋이 보러 가는데, 짐이 가득이네?”

“아, 여행 겸 가는 거거든요. 아빠는 내일 여행 가겠다고 휴가도 냈대요. 엄마는 캠핑하자며 부산스럽게 짐을 챙겼구요.”

“좋은 가족을 뒀네.”

소녀는 한숨을 짓다가도 곧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으며 허리에 손을 짚었다.

“그렇죠? 너무 유난이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웃는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사실 옆집 소녀는 더는 소녀가 아니었다. 성인이 된 지도 오래되었지만 처음 각인이 무섭다고 이아나의 눈에는 여전히 교복을 입은 아이로 보였다.

“언니는요?”

소녀의 물음에 이아나는 자신이 든 쓰레기봉투와 소녀를 번갈아 보았다. 이내 봉투를 흔들었다.

“보다시피. 쓰레기 많지? 손님이 왔거든.”

프란시아와 르나그, 그리고 그들의 수호신들까지 떠올린 이아나가 작게 미소 지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제가 쓰레기를 버리겠다고 나서다 말고 싸우는지라 결국 그녀가 버리게 되었다.

“꽤 왔나 봐요?”

“먹보들이지.”

수호신들이 어찌나 많이 먹던지, 쓰레기의 반은 그들이 먹어치운 것들의 껍데기였다.

“언니, 행복해 보여요.”

고개를 들면 성인이 된 소녀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이아나 또한 눈을 접어 보였다.

“응, 그러네.”

한 해가 저물고 다시 새로운 해가 다가오는 시기였다.

사락사락.

고요한 함박눈이 내린다.

해의 마지막 날, 푸른 장미는 서로 마주한 채로 행복하게 웃어 보였다.

“이아나.”

그때였다. 문이 찰칵 열리며,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오지 않으면, 술에 취한 빨간 장미가 집을 부숴놓을 것 같은데.”

감미로우면서도 장난스러운 목소리, 체이서였다. 이아나는 미간을 살풋 찡그리며 얼른 고개를 돌렸다.

“갈게.”

“음, 빨리 오는 게 좋겠는걸. 흰 장미도 취한 것 같은데.”

체이서가 안쪽에서 휘파람을 휙 불었다.

“오. 소파가 부서지겠어.”

“언니, 얼른 가봐요.”

소녀가 이아나를 떠밀었다. 이아나 또한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체이서가 밖으로 나올법한데, 나오지 않는 게 이상했지만.

그만큼 급한 상황인가 싶었다.

“응, 먼저 가볼게.”

“네. 저도 가족들한테 가봐야겠어요.”

소녀가 손을 흔들고 막 돌아설 때였다.

“아, 잠깐만.”

이아나가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소녀가 제일 편히 여긴다던 단발이 팔랑팔랑 움직였다.

“새해 복 많이 받아.”

이아나는 제가 저쪽 세계에 익숙해지긴 했나보다 여기며, 이제는 낯설어진 이 세계의 인사를 뱉었다.

“너도 행복해.”

그리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 말을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도 쭉.”

소녀가 방긋 웃었다.

“언니도요!”

그렇게 돌아간 소녀는 가족들의 품에 감싸여 차에 올라탔다. 그 차가 붕 멀어지는 모습을 오래도록 보다가, 이아나는 얼른 돌아섰다. 그러다가 흠칫 놀랐다.

“뭐야, 거기 서 있었어?”

“아? 어.”

체이서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어쩐지 손을 흔드는 양이 누군가를 막 떠올리게 했지만 이아나는 무심히 넘겼다.

“이제 나가도 될 것 같아서?”

“그게 무슨 소리야?”

“음, 나도 모르겠네.”

체이서 또한 알 수 없는 감각이었으므로 어깨를 으쓱했다. 이아나는 체이서에게 닿지 않게끔 신발장으로 달려갔다.

스쳐 가는 이아나를 보며 체이서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오래전 가족이었던 이들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 채 다시 멀어졌다.

아마도 앞으로도 그들이 만날 일은 없을 터였다.

고요한 함박눈 사이로, 기묘한 푸른 꽃잎 하나가 바닥에 내려앉았다.

[끝으로 남길 말은 없니?]

신이 수명을 다하지 못한 푸른 장미에게 물었다.

“그럼, 언젠가 제 오빠에게 닿지 않게 속삭여 주실래요?”

신은 기꺼이 엉뚱한 부탁을 들어주었다.

***

오빠,

너를 원망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부디 긴긴 시간이 지난 뒤에 너는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난 이제 너를 잊은 채로 행복해질 테니까.

안녕,

내 첫사랑.

<완결>

감방에서 남자주인공을 만났습니다 6권

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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