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86/87)

***

체이서가 이아나와 다시 재회한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뒤였다.

모든 흐름은 그가 계획하고, 예상하고 생각한 것과 같았다.

“뭐, 뭐야……. 앞이…….”

이성은 차갑게, 음성은 다정하게.

“쉬이, 괜찮아. 이아나.”

사실 그라고 하여 연민과 죄책감이 없지는 않았다. 여동생이 남긴 흔적은 끝까지 그의 머리 한편에 남아 그에게 죄의식을 속삭였다.

새로운 푸른 장미를 만난 그 뒤로도 꽤나 오랫동안 말이다.

감정이 결여된 것은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과거 유일하게 감정을 허용한 여동생만은 달랐다. 현재, 이 예외가 체이서의 삶 곳곳을 쫓아다니며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악몽이었다.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악몽이 그를 쫓았다.

어느 날은 그의 꿈에 나타나 그의 목을 조르기도 했다. 체이서는 이 모든 것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그가 다시 이아나와 재회했을 때. 여동생의 환영을 뒤로 겹쳐 보았다.

“나야. 이아나.”

캄브라캄이었다. 그는 면회의 날에 잠시 방문하는 것으로 둘러대며 이아나를 만나러 왔다.

그녀의 눈을 가린 것은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이아나의 주의를 잠시 빼앗으려 했던 것뿐이었다.

“이제 내게 말을 걸어 주는 거야?”

그는 눈앞의 환영을 마주한 채로, 이아나의 눈을 가린 손을 떼어내지 않았다.

다정한 오빠의 흉내를 내면서.

“사실 널 찾아간다고 해서 네가 만나 줄 거라 생각 안 했어.”

체이서는 저를 바라보는 환영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다시는 내게 말을 걸지 않겠다고 했잖아. 그래서 이제 네 목소리를 듣지 못할 줄 알았어.”

점차 은밀하게 가라앉는 그의 목소리에 따라 이아나의 몸이 긴장하는 것이 절로 느껴졌다.

곧 이아나의 손이 그의 손등을 덮었다. 떼어내려는 손이었다.

그는 당황하지 않으며, 오히려 제 손을 떼어 내려하는 이아나의 손을 붙잡았다.

“네가 날 대신해 이곳에 들어갔을 때부터.”

여동생은 언제나 그를 나쁜 인간이라 매도했다. 악당이며 잔인하고 잔혹하며 미소 속에 온기가 없는 이라 했다.

그는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네가 너무나도 보고 싶었어.”

이아나가 다시 보고 싶었다. 이름과 얼굴을 숨긴 채 만났을 그때의 그 느낌을 잊을 수 없어서.

이제 그녀가 이아나이니까.

그의 손에는 하얀 손이 붙잡혀 있었다. 체이서는 이 손을 향해 기꺼이 고개를 숙였다.

손등으로 푹신한 입술이 닿았다. 이아나의 몸이 움찔하며 작게 떨렸다.

“이아나, 너도 보고 싶었어?”

그는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아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답을 이미 알면서도 묻는 질문을.

눈앞에서는 어린 여동생의 환영이 울면서 저를 노려보고 있었다.

<너, 쿨럭. 날 기만하지 마.>

피를 흘리는 여동생은 처연했다.

그리고.

참으로 서럽게도 울었다.

<꼴도 보기 싫어. 미워. 밉다고…….>

실험실에서 애처롭게 제 옷을 붙잡고 엉엉 울던 때처럼. 이는 오랫동안 그를 쫓던 악몽이다.

체이서는 눈을 깔아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오빠.”

이아나에게서 흘러나온 단어에 체이서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동요했다.

진짜 남매로 보이고 싶지 않다며,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여동생이 절대로 담지 않던 단어였다.

“……오빠?”

이아나는 대수롭지 않게 이를 입에 담았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눈앞의 이아나를 여동생으로 여길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향기.

마치 장미들에게 오감 외에 주어진 또 하나의 감각이기라도 하듯, 그는 온몸으로 자신을 찔러오는 향기를 느꼈다.

본능이 먼저 알아차리고 반겼다. 푸른 장미, 강력한 푸른 장미다.

내 여동생.

“나를 용서한 거야?”

나를 용서하지 마.

<너 따위 다신 보지 않을 거야! 용서 안 해!>

그는 오늘부로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고 무참한 악당이 되기로 하였다.

이미 악인이나, 이제는 제게 두 번째 삶을 건넨 죽은 이를 지워 냄으로써 더욱 깊은 심연 속으로 들어가겠노라고.

그는 제게 남은 마지막 인륜마저 지운 악당이 되기로 했다.

안녕.

작별은 짧고도 잔혹했다.

이아나, 그의 이아나는 눈앞의 이 사람이니까.

이건 고개를 막 치켜든, 흑장미의 집착인가?

아니면 감정이 결여된 그가 비뚤게 느껴버린 사랑인가?

답은 차츰 마차 바퀴처럼 굴러 다가오고 있었다.

이윽고 다시 시간이 흘러 그는 출소한 그녀와 재회했다.

“……체이서.”

“응.”

그녀는 알까. 그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그녀가 제 영역으로 한 발짝 들어오는 순간을. 눈앞의 이아나를 마음껏 관찰할 수 있는 순간이 오기를.

그가 다정함을 가장하여 웃었다.

너는 다정한 이를 좋아한다 하였지. 나는 누구보다 다정해질 수 있어.

“출소, 축하해. 내 동생.”

네 앞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사람이 되어줄게.

“기다렸어. 내 이아나.”

너와 함께 있는 순간을.

그리고 곁에 있어 줄게.

네가 죽는 순간까지.

***

세상 모든 일은 대부분 그의 예상을 빗겨나가지 않았다. 회귀를 겪은 후로는 더욱더 그러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이아나만큼은 도무지 예상할 수 없었다. 행동반경도, 생각도 그가 생각해온 것과 달랐다.

드넓은 방도, 수없이 따르는 시중인도, 산해진미와 반짝이는 금은보화도.

모두 그녀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다른 세계에서 온 영혼이니, 가치관이 다른가 하여 그럴 수도 있겠노라 이해했다.

이아나는 몸에 편한 것은 좋아라 반겼지만 그 순간뿐이었다. 그 외에는 무심히 흘려 넘겼다. 그럴수록 체이서는 묘한 초조함을 느꼈다.

“이아나, 이것만은, 허락해 주면 안 될까? ……캄브라캄에서 돌아온 네게 뭐든 해주고 싶어.”

그녀는 캄브라캄에서 들꽃을 보며 보일 듯 말 듯 짓던 미소마저 보여주지 않았다.

“이것이 보상이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해주고 싶어.”

이아나는 체이서를 흘끗 보았다.

“……일단 일어나 줘.”

그녀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잠시지만 그에게서 시선이 떠나갔다. 그는 갈증을 느꼈다.

갈증이라고?

“받을게. 받을 테니까.”

이 갈증은 이아나가 저를 본 순간 깔끔하게 지워졌다. 체이서는 서늘함을 느꼈다.

이는 짐승이 위기를 알아차리듯 등줄기를 삐죽 서게 하는 본능적인 감이었다.

그에게 있는 것이 앞으로 송두리째로 바뀔지도 모른다는 예감이기도 했다.

체이서는 이아나와 헤어지고서 고민에 빠졌다.

그는 멍청하지 않았다. 상황 파악은 누구보다 빨랐다. 그 안에서 꿈틀거리며 역동하는 이것은.

“……본능인가?”

흑장미들이 공통적으로 지닌 특성이었다. 상대를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붙들어두고 싶은 감각.

그 대상은 천년 동안 단 한 사람으로 고정되었다.

푸른 장미.

체이서는 여동생에게는 느끼지 못했던 본능을 이아나를 향해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이아나가 납치를 당하며 기다렸다는 듯 폭발했다. 잠시지만 그가 제어하지 못할 정도로.

“……오빠, 사실 나 기억을 잃었어.”

이아나를 구출하러 갔을 때, 체이서는 왜 이리도 이성을 잃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응. 기억을 잃었다는 건 이제 말해주는구나.”

그녀의 뒤로 활활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왜.

“괜찮아.”

그래. 괜찮다. 날카롭던 그의 이성의 끝이 갉아 먹히며 마모가 되어갈지라도.

그는 이것이 썩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걱정하지 마.”

그의 입술로 낮은 미소가 스쳐 갔다. 아, 이게 아니지. 그는 다시 미소 지었다.

이아나에게는 세상 무엇보다 다정한 미소로 꾸며내자.

“네게 해를 끼치는 것들은 모두 태워버릴 테니까.”

그래. 이 세상은 이 가녀린 푸른 장미에게 너무나 위험하다. 그렇지 않은가? 지금도 납치를 당해 해를 당할 뻔하였다.

자유롭게 두면, 이토록 위험한 거다.

체이서는 이것이 비논리적인 열거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본능이 쉴 새 없이 속삭이는 것이란 것도.

또한 이것이 상관없다 여겼다.

“도망가지 못할 감방이 저택에도 있으면 좋겠어.”

배우지 못한 탓으로 미루기엔 그는 지나치게 머리가 좋았고, 감정의 영역을 이해하지 못하여도 비슷하게나마 체득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기꺼이 가장 쉬운 길을 택했다.

스스로 만든 죄업의 길이었다.

그때의 그는, 어느 길로 가든 그녀는 그의 손에 있으며, 그녀의 최후는 그의 손에 달려 있다 생각했으니.

이것이 잘못 매단 단추임을 알지 못하고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이것으로 인해 끝내 사랑받지 못할 것을 모른 채로.

그는 결정했다.

묶어두자.

무엇이 좋을까? 줄은 풀릴 거야. 쇠사슬이 좋겠어.

쇠사슬로.

어디에도 가지 못하게 말이야.

그가 손수 만든, 비극의 시작이었다.

***

체이서는 어린 시절 학대를 제외하면 실패와 손해를 거의 겪어보지 못했다. 아니, 나락을 겪지 않았다.

예를 들어 투자를 하였다가 실패하면, 다음에는 더욱 큰 거래를 성사시켰다.

미래를 아는 그로서는 실패하는 것이 더욱 힘들었다. 과거에는 꽤 힘에 부쳤던 황제와 부친마저도 더는 그의 적수가 되지 않았다.

남은 것은 끝으로 몰아낸 부친에게 최후를 고하는 것. 죽음을 선사하는 것뿐이었다.

철그렁.

체이서는 미약한 진동을 느꼈다. 그에게 마법으로 이어진 쇠사슬의 소리다. 이 쇠사슬의 끝에는 그의 여동생, 이아나가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비록 그와 그녀를 향한 암살 시도가 지독할 정도로 늘어나긴 했으나, 체이서는 이것이 자신이 컨트롤 할 수 있는 정도라 느꼈다.

“이거 놔.”

그녀는 제 발목을 묶은 족쇄와 쇠사슬에 대해서 달가워하지 않았다. 반겼다면 이상할 일이다.

“이, 미친놈아!”

체이서는 반발을 충분히 이해했다. 동시에 그는 그녀가 이런 반응도 보일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사람을 묶어? 이게 정상이야?”

그가 보아온 이아나란 사람은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은 무심함을 지닌 사람이었다.

실제로 그런 이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에게도 이런 감금과 구속은 경악할 일이었던 듯했다.

실제로 그녀는 몇 번 더 도망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오래 가지 않았다.

쉬이익!

챙강!

날카롭게 날아간 단검이 검은 아지랑이에 가로막혀 그대로 부서진다. 그대로 챙그랑. 떨어졌다.

체이서는 낮게 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돌렸다.

“괜찮아?”

그의 뒤쪽에는 이아나가 앉아 있었다. 그의 손에 밀려 주저앉은 채로.

이번엔 조금 위험했다.

체이서는 잠시지만 낭패감을 느꼈다. 이번 상대는 몇 달을 잠입했다. 아니, 이아나가 캄브라캄에서 돌아오기 전부터 일했던 시간을 포함하면 7년이었다.

7년을 일한 식솔이 배신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릴라…….”

이아나에게서 쓰러진 이의 이름이 스쳐 갔다.

체이서는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이가 이아나와 퍽 친밀하게 지냈던 하녀였다는 것을 떠올렸다.

저 여자를 향해서는 감방에서처럼 제법 웃기도 하던 이아나였다.

‘숨만은 붙여둘 것을 그랬나.’

체이서는 웅덩이진 피를 바라보며 무심히 이리 생각했다.

이아나의 손이 쓰러진 여자를 향하는 듯하였다. 하나 그 손은 왜인지 닿지 못하고 멈췄다.

다섯 번째였다.

이아나의 주변 식솔이 검을 든 괴한으로, 암살자로 변모하여 그녀를 덮친 횟수가.

처음 인사를 건네던 시종이 검을 들이밀 때는 얼떨떨해 했다. 맛있는 음식이라고 칭찬을 해주었던 조리사가 독을 건넨 음식을 억지로 먹이려 했을 때는 당혹스러워했다.

친한 하녀가 차례차례 그녀에게 독이 묻은 바늘이며 단검 따위를 내밀었을 때…….

그녀에게서 표정이 차츰 사라졌다.

“괜찮아, 이아나?”

체이서는 한쪽 무릎을 접어 이아나와 시선을 맞췄다. 어딘가 넋이 나가 보이던 시선이 그에게로 돌아왔다.

“……그런 거구나.”

한발만 늦었다면 그는 시체가 된 그녀를 발견했을 터였다. 음독과 기습이 합쳐진 유형이었다.

이아나는 체이서의 질문과 전혀 다른 대답을 중얼거리더니 바닥을 응시했다.

“이게 내 삶…….”

그동안 시도가 어디 이것뿐이었을까. 그가 기억하기로 34번째 암살 시도였다. 납치가 어려우니, 암살로 시도하는 경우가 늘었다.

이는 오직 체이서에게 타격을 주려는 그의 정적들과 아직 살아남은 부친의 개들이 벌인 합작이었다.

이러한 시도는 결국 이 다음에 이어진 암살 시도에서 절정을 이뤘다.

“악마 같은 도뮬릿! 너희는 전부 죽어야 해! 네 아비로 인한 원한을 돌려주마!”

그가 도착했을 때, 상황은 꽤나 긴박했다. 이 저택에서 11년을 일해온 이가 이아나에게 검을 겨누고 있었으니까.

하얀 목덜미에서 피가 흘렀다.

“악마의 자식들! 죽어! 죽어라! 아비의 죄를 받아라!”

체이서가 회귀한 시점은 그가 어린아이이면서 이아나를 처음 만난 날이었다.

부친이 쌓은 죄업은 그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그가 회귀한 시점까지 쌓인 것만으로도 수많은 이들의 원한을 사기 충분했다.

이토록 10년을 걸쳐 숨죽일 정도로 말이다.

처절하게 살아보지 못한 그는 밑바닥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저열하고 간절한 원한을 가져본 적도 이해하지 못했다.

“……미안해, 이아나.”

그가 놓친 것은 작은 것이었으나 그녀의 목숨을 노리기엔 충분했다. 그는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한 것에 대해 처음으로 사과했다.

그는 그녀를 묶을 때에 사과하지 않았다. 이 저택에 감금할 때도 사과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그녀를 구하지 못했을 뻔한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너무나도 쉽게 사과가 흘러나왔다.

심장이 반으로 쪼개지고 갈라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보이지 않게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청소가 덜 됐나 봐. ……미안해.”

그의 무릎으로 피가 젖었다. 어느 틈엔가 베인 듯 허벅지로 작은 상처가 보였다. 피가 검은 것을 보아서 독이 묻은 검에 베인 듯했다.

상관없었다.

그는 어차피 쉽게 죽지도 않는 제 몸의 상처보다 이아나의 새하얀 치마 끝단이 젖어가는 것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체이서는 검을 내려놓고, 손을 뻗었다. 어떤 생각을 하는 것인지 모를 자색 눈동자가 그제야 그에게 닿았다.

투명한 눈동자였다. 그 속에는 우습게도 그를 향한 미움도 원망도 없었다.

오히려 아무것도 없어서 그를 안달 나게 만들었다. 차라리 원망했더라면 네 미움만큼은 내 것이었을까? 이리 생각하고 말 만큼.

“괜찮아.”

마침내 이아나가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막 깨달은 건데.”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또렷하게 들렸다. 지금 이 상황에 정신을 빼놓지 않았다는 듯이.

“감금도 나쁘지 않네.”

그녀가 보일 듯 말 듯 작게 웃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그가 보아온 미소와는 전혀 달랐다.

안개처럼 희미하며 무언가를 잃은 듯 혹은 내려놓은 듯 사라질 것같이 아스라한 미소였다.

“고마워.”

살려줘서 고맙다는 그 말은 오히려 체이서의 심장을 산산이 조각 내었다. 차라리 이걸 풀라며 역정을 내고, 도망을 시도하던 때가 생기 있다고 느껴질 만큼. 온기도 온도도 없는 그 말에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그는 회귀한 날 계획했던 것들을 차곡차곡 실현했다. 멸망을 늦추기 위한 복잡하고도 세밀한 계획들.

이걸 행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어느 순간부터 가장 중요한 요소를 계획에서 제외했다.

푸른 장미를 희생시켜야 할 시점. 그것이 계획에서 남김없이 사라졌다. 아니, 이렇게 된 지는 꽤 오래되었다.

그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모시는 마쉬멜은 이 이야기를 굳이 꺼내지 않았다.

이는 이미 한 발짝 앞서 체이서의 의중을 알아차린 것일 테고, 동시에 이아나에게 나름의 호의와 정을 느낀 것일 터였다. 이것만 제외하면 모든 것이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이토록 성공가도를 달려온 그는 어느 날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이아나가 뭐라고?”

“아가씨가…….”

아니. 이미 한번 느꼈던 것을 또 한 번 되새긴 것에 가깝다.

“잘 먹지도 자지도 않으십니다. 가주님께서 주시는 선물도…… 열어보시지 않습니다.”

이아나의 곁에 꽤 오래 머물렀던 시중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배신할 일이 없는 완전한 그의 수하였다. 말을 하면서도 연신 체이서의 분위기를 살피는 기색이 역력했다.

“……표정도, 거의 사라지신 것 같습니다.”

점차 표정이 사라지는 이아나를 바라보면서, 그는 이미 아득히 먼 곳에 와버렸음을 알았다.

더는 시간을 반복하지 못한다.

그가 사용할 수 있는 힘은 정해져 있었고, 세상의 멸망을 막는 힘을 제외하면 남은 힘으로는 시간을 돌이키기에 부족했다.

그날은 여동생의 기일이었다.

체이서는 여동생이 죽은 날짜를 기억했다. 그가 회귀를 한 날이기도 했다.

무덤조차 없는 여동생이었다.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여동생의 환영이 다시 한번 나타났다.

“되게 예뻐졌네.”

“네가 걸을 길이니까.”

정원은 주황빛 장미로 가득했다. 체이서가 이아나를 위해 만든 꽃밭. 장미가 활짝 만개할 시기였다.

퍽 낭만적인 공간이었다.

그리고 이아나가 활짝 웃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그를 향해 있지 않았다. 저 멀리 아웅다웅 다투다 말고 서로의 길을 향하는 아퀼라와 붉은 장미의 수호신에게 둔 채였다.

팔랑팔랑.

그런 이아나의 머리칼 위로 흩날리던 꽃잎이 내려앉았다.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장난치듯 굴러다니는 귀여운 동물들과 활짝 웃는 여인.

체이서의 얼굴에서 차차 웃음이 사라졌다. 이윽고 이아나의 시선이 그에게로 돌아왔다.

체이서의 표정을 본 이아나에게로 의문이 스쳤다.

체이서는 아득함을 느꼈다. 웃을 줄 알았지만 단 한 번도 웃지 않던 그녀를 향해서.

그는 무릎 꿇어 갈구하고 애원하고픈 충동을 느꼈다. 동시에 이미 돌이키기에 늦었다는, 소회가 스쳤다.

“내가 미워?”

생각하지 않았던 말이 불쑥 튀어 나갔다. 그래서 제게는 미소를 보여주지 않은 거냐고.

그녀의 몸을 소유하고 자유를 빼앗아 구속하였는데, 그는 그녀를 가졌다는 기분을 느끼지 못했다.

역대 푸른 장미를 마주한 흑장미들이 이런 나락에서 허덕였구나 싶었다.

이건 오아시스 없는 사막과 같았다. 끝없는 갈증만 있을 것이다. 더는 손을 뻗어서는 안 된다.

“……아니, 넌 날 싫어할까.”

딱 이 정도만 본능에 몸을 내어주자. 그는 그때까지도 이성을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딱히 싫어하지 않는데.”

이는 감정을 내포하지 않은 나직한 한마디에 와르르 무너질 모래성이었다.

“밉지 않아.”

아무런 의미도 담지 않은 담백한 말은 그를 끝내 나락으로 이끌었다.

그는 깨달았다. 이미 손쓸 새도 없이 제가 빠져들었다는 것을. 그리고 이것이 끝이 아니라 더욱 깊어질 것임을.

멀지 않은 곳에 여동생의 환영이 존재했다. 아마 저 환영과 마주하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일 것이었다.

여동생의 환영은 그와 그가 눈을 가린 이아나 두 사람을 울며 노려보았다. 무어라 소리치는 것 같았지만 소리는 닿지 않았다.

저건 그에게만 보이는 환영이었으니까.

“그래.”

오늘이 여동생과의 마지막일 것이다. 왜? 오늘부로 그의 세상 속에 이아나는 눈앞의 이아나 하나뿐일 테니까. 영원히.

“응. 이아나.”

고개를 들면 이아나가 눈을 크게 뜬 채로 그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뺨으로 주르륵 무언가 흘러내렸다. 체이서는 눈물을 느끼며 해사하게 미소했다. 진심에서 우러른 미소였다.

그는 행복했으나 처참하게 불행했다.

“네가 영원히 곁에 있었으면 좋겠어.”

그는 잘못 끼운 이 단추로 인해 남은 생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날 떠나지 마.”

그는 이 후회가 오래도록 제 삶을 묶어둘 것임을 느꼈다. 그럼에도 그는 이 욕심을 버리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영원히.

“……곁에 있어 줄 거지?”

우습게도 그는 깊은 수렁 같은 사랑에 빠지고서야 죽어 사라진 여동생을 이해했다.

이것은 병이었다. 지독히 앓는 감정이었다.

그는 죽어 사라진 동생을 연민했고, 동정했으며. 처음으로 누군가의 행복을 바라보았다.

동생이 살아 있었다면 그는 끝내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였을 터다. 그에게 기회를 준 것을 감사해야 할까?

아니면, 황홀한 절망을 선사한 것이야말로 동생이 바라는 일이었을까.

남매는 서로가 서로에게 가시와 같은 관계였다. 동생에게 그는 냉정하고 가혹한 가족이었으니, 그는 끝까지 이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만약에 여동생이 훗날 어느 세상에서 다시 태어난다면, 그때는 다시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아나.”

그는 이제 이 이름 앞에 엎드려 빌고 갈구할 것이다. 제발 그를 보아달라고. 한 번만 보아달라고.

그러나 여전히 그는 제대로 된 방법을 몰랐다. 그것이 그를 끝내 끔찍한 벼랑 끝으로 몰아내는 것도 알지 못한 채였다.

“이아나…….”

그의 사랑에 여동생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에게는 사랑과 집착이 공존했다.

눈앞을 엄습한 지독한 본능의 갈망 속에서. 회귀 후, 생애 첫 눈물이 턱 끝에 매달렸다.

이미 이 푸른 장미를 제물로 바쳐 멸망을 미루겠다는 생각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차라리 이 순간 이아나에게 목줄을 쥐여주고 싶었다.

사랑이었다.

그가 사랑을 깨닫는 순간은 황홀한 봄인 동시에 스스로가 판 업화로 가득한 지옥이었다.

체이서는 눈물 맺힌 눈으로 황홀한 미소를 지었다.

틈을 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훗날의 그는 이렇게 생각했으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언제고 그녀는 그의 심장을 두드릴 듯, 부숴버리고는 멀리 손에 잡히지 않을 만큼 멀리 가버렸으니까.

그렇기에 그가 무너져 후회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었다.

***

그는 죄인이었으며, 업을 등에 쥔 사형수였다.

아마 그는 죽는 날까지 제 목을 묶은 이 목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편이 좋았다.

이아나는 모른다.

사람을 살리길 바란다면, 죽을 때까지 그렇게 할 테지만 결국은 그의 본능이 변한 것이 아니라…….

그녀를 위해서 삶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세상 멸망도 막아온 그에게 이 정도는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다.

툭.

긴긴 회상을 깨우는 손길이 있었다. 곧이어 익숙한 향기가 느껴졌다.

“피크닉, 즐거워?”

그는 기나긴 회상에서 깨어나,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제게 질문을 던진 왕이 존재했다.

나의 왕.

나는 죽을 때까지 후회와 죄업을 등에 쥔 채로 불기둥을 밟는 듯 회한 가득한 걸음을 걷겠지요.

하늘에서는 그의 왕의 머리칼색과 똑같은 꽃비가 내리고 있었다.

도뮬릿 저택의 꽃밭을 주황 장미로 가득 채워둔 일이 떠올랐다.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도.

그는 그곳을 주황색으로 가득 채운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지독한 본능을 품은 흑색 장미보다야 무엇이든 낫겠느냐마는.

시작부터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후회는 지독하게 쓴맛이었다. 그럼에도 좋았다.

“즐거워.”

체이서는 눈을 접어 웃었다. 그날처럼 진심을 다한 웃음이었다.

“이대로 죽어도 좋을 만큼.”

어떤 지옥이 되었든 네가 곁에서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도, 그곳은 천국이 되니까.

체이서는 뻗지 못할 곳에 존재한 왕에게 가만히 고백을 건넸다. 말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속으로 삼켜내면서.

사랑해, 이아나.

수천 번은 더 건넨 사랑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만 번을 더 담을 이름이자, 어쩌면 영원히 닿지 못할 고백이기도 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