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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아나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가 되돌아왔다. 방금 막 얼굴로 스쳐 간 표정은 분명 ‘또 너냐?’ 싶은 얼굴이었다.
금방 사라진 걸 보면 감정의 기복이 큰 편은 아닌 듯했다.
본디 기록상으로 전해지는 푸른 장미의 특징은 ‘무심함’이었다. 좀처럼 세상을 향해 또 그를 사랑하는 장미들에게 베풀지 않는 관심과 시선. 오랜 시간 동안 장미들을 미치게 하기엔 충분한 것들이었다.
“새 죄수예요?”
이번엔 무시로 일관하는 대신 그녀가 반응을 보였다.
캄브라캄은 매우 거대했고, 귀족 죄수들을 넣어두는 수감동 또한 상당히 컸다. 물론 일반 죄수만큼의 숫자는 아니었으니, 얼굴이 익을 시간이 있었을까.
눈을 뜬 지 오래되지 않은 그녀가 모든 죄수를 알고 있을 리 없었다. 대충 뱉은 듯했다.
“여기 있은 지 좀 되었는데.”
“아, 그래요?”
시험 삼아 말해보니, 역시나 고저 없는 목소리가 돌아왔다. 어떤 대답이듯 상관없다는 듯이.
생각해보면 그는 살면서 푸른 장미다운 모습은 전혀 보지 못했다. 여동생의 눈동자엔 언제나 갈망과 열망이 교차하듯 흐르고 있었으니까.
그의 여동생은 불붙은 마차같이 누구보다 열정과 열을 다해 살아갔고, 그렇게 자신마저 태운 채로 사라졌다.
체이서는 눈앞의 사람이야말로 지극히 푸른 장미답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 이리 생각하는 제가 우습기도 하였다. 그답지 않은 감상적인 생각이었으니.
저에게 전혀 관심 없는 듯한 옆얼굴을 보며 체이서는 알 수 없는 의문이 들었다.
“아뇨, 거짓말이에요. 사실 막 들어왔어요.”
“아. 그래요.”
나를 한 번을 제대로 보질 않네. 만약 이 얼굴이 관심을 띠고서 나를 보면 어떤 기분이려나.
기이한 열망이었다. 그 스스로도 해석하지 못한, 이해하지도 못한 그런 열망.
“사실 적응하기 힘들어요.”
어차피 할 일이 정해진 삶, 체이서는 지루한 생에 찾아온 유희 거리를 놓치고 싶지 않아졌다.
“우리 집은 무척이나 화목한 가족이었는데, 나만 동떨어져 이곳에 오게 되었거든요.”
처음으로 이아나의 고개라 완전히 돌아갔다.
사람을 꾀는 법은 참 쉽다. 공감과 이해. 체이서는 공감도 이해도 할 생각이 없었고, 한 바도 없었으나. 방법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남은 가족들은요?”
그녀가 관심을 보였다. 이 시선을 관심이라 표현해도 좋을지 모르겠으나.
기억에서는 지워졌어도 본능적으로는 이끌리는 듯했다. 체이서의 이야기는 곧 이 새로운 푸른 장미의 이야기였으니까.
그는 턱을 괸 채로 씁쓸하게 웃었다. 적어도 이아나에게 이렇게 보이도록.
“모르겠어요.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나를 찾고 있는지도요.”
사랑받고 자라난 이, 그러나 그런 사람이 어찌 이런 무심함을 타고난 것인가?
흥미가 일었다.
“나는 잊힐까요?”
이는 어린아이가 잠자리를 잡아 날개를 뜯어내는 잔악한 순수와도 같았다. 그는 이리 말하며 양심의 가책조차 없었다.
눈앞의 여자는 언젠가 이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 사라질 영혼이었으니까.
곧 체이서를 빤히 바라보던 이아나의 입술이 엷은 곡선을 그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이아나는 체이서가 하는 양을 따라 하듯 턱을 괴었다.
두 사람의 자세는 거울을 보듯 대칭적이었다. 하지만 얼굴에 걸린 표정은 상이했다.
“보자마자 신상을 풀어내는 사람은 둘 중 하나예요.”
“……그래요? 어떤 사람인데요?”
이아나는 턱을 괴지 않은 손에서 두 손가락을 펼쳤다.
“정말로 기구해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자기 연민에 빠진 사람.”
생각하지 못한 냉정한 평가였다. 그녀의 손가락 하나가 접혔다.
“그리고.”
남은 검지가 까딱 움직였다.
“사기꾼.”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내 친구 사기꾼 아저씨가 첫 만남에 이야기하는 데 능숙한 사람은 피하는 게 상책이라던데.”
“그래요?”
“그렇게 웃는 사람도.”
그녀의 검지가 그를 가리킬 듯 휘어지다가 그대로 접혔다.
체이서가 눈을 휘어 웃었다.
“첫 만남은 아니잖아요?”
“앞으로도 첫 만남으로 끝이었으면 좋겠는데.”
이아나는 체이서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 혼잣말하듯 툭 던질 뿐이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미련 없이 일어났다.
“내 말이 사실이면 어쩌려고 그래요?”
“어쩌긴요. 듣고 싶지 않은 사람한테 억지로 토하는 것도 폭력이지. 실례예요, 그거.”
이아나는 심드렁하게 이야기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녀는 걸음을 옮기지는 않았다. 잠시 체이서를 보는 듯했다.
“딱히 사실도 아닌 것 같아 보이는데.”
체이서가 씩 웃었다.
“맞아요. 그래도 하나는 사실이에요.”
체이서는 양손을 들어 항복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하나밖에 없는 가족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몰라요. 나를 찾고 있는지도.”
사실이었다. 몸에서 사라진 영혼은 어디로 가는 걸까. 그대로 사라진 걸까. 아니면 그를 이 시간에 보낸 대가로 어떤 시간을, 혹은 머나먼 차원을 헤매는 걸까.
“나를 잊었을까요? 잊었으면 좋겠는데.”
체이서는 여동생이 자신을 잊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동생이 마지막으로 남긴 선물은 사실, 두 사람 모두에게 잔인한 형벌이나 다름없었다.
체이서는 어째서 자신이 이아나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때때로 사실을 그대로 말하는 것이 거짓보다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바람이 불었다.
여동생의 모습을 한, 이아나의 긴 분홍빛 머리칼이 흔들렸다. 여동생은 땋은 머리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백조같이 우아한 제 모습에 자부심이 넘치던 아이였다.
눈앞의 모습처럼 길게 풀어헤친 머리는 교양이 없어 보인다며 몹시도 싫어했다.
부친에게 폭언을 듣고 싶지 않았을 테니 생존본능에 가까운 취향이었을 것이다.
“여긴 감옥이에요.”
바람이 부는 사이에서 엉뚱한 말이 흘러나왔다.
“이상한 사람도 있고, 미친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고.”
이아나는 손을 뻗어 하나하나 접으며 말했다.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은 사람과 고의로 죄를 지어 들어온 사람도 있겠고.”
귀족 죄수동은 귀족이기만 하면 연쇄 살인이나 반역죄같이 무거운 중죄가 아닌 이상 죄질에 관련 없이 모두가 같은 건물을 사용했다.
귀족이란 이름값을 팔아 차지한 자리였다. 그러니 그녀의 곁에는 도둑도 사기꾼도 살인자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사람이 살아가요. 숨 쉬는 데에 필요한 공기 앞에서는 모두가 공평해지니까.”
새로운 푸른 장미는 염세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그저 그녀는 정말 모든 것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굳이 자기를 괴롭혀봐야 얻을 건 없을걸요.”
이아나는 손을 등 뒤로 겹쳐 잡은 채로 고개를 기울였다.
“여기서는 모두가 죄인이니까.”
“내가 괴로워한다고 했나요?”
“탓해달라고 말한 거잖아요.”
이아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시선을 내렸다.
“아닌가.”
참으로 우습게도 사람을 손쉽게 세뇌해 다룰 수 있던 그는 처음으로 무력감을 느꼈다.
푸른 장미에게는 그의 능력이 통하지 않았다. 통했더라면 그는 여동생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게 했을 터다.
거기다 사람을 홀리게 만들던 외양조차 마법으로 뒤집어쓴 껍데기에 가려져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체이서는 모습을 감춘 이 순간에 날것으로 누군가를 마주한 기분이 들었다.
불쾌해야 할 터인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것이 푸른 장미의 힘인가? 과연 이게 힘인 걸까.
“편히 살란 말이에요.”
“편히.”
“하고 싶은 대로.”
“멋대로 해도 될까요?”
이아나가 설핏 이마를 찡그렸다.
“물론 밖에 나가서 그러면 안 되고. 그건 미친놈이죠.”
적어도 상식이 통용되지 않은 이곳에서는 멋대로 하고픈 대로 하란 소리였다. 그가 짊어진 짐을 모두 떨쳐낸 채로.
체이서는 우스웠다.
제가 진 짐을 알고서도 그녀는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내가 죄인이라도 말입니까?”
나는 당신을 당신의 세계에서 앗아온 사람이며, 당신의 기억을 빼앗아 봉인시킨 사람인데.
그리고 언젠가 당신의 영혼을 이 세계의 존속을 위한 재료로 쓸 사람이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이아나에게서 똑같은 한마디가 다시 터져 나왔다.
“내가 말하면 그대로 할 건가.”
심드렁한 한마디에 체이서가 반응했다.
“그렇다면요?”
“당신 미친 사람이에요?”
어차피 여기 이 이아나의 쓸모는 정해져 있다. 끝은 정해져 있을 터. 그전까지 체이서는 그녀가 하고 싶은 거라면 무엇이든지 하게 해줄 생각이었다.
지금 막, 든 생각이었다.
어째서 이런 생각이 든 건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순 없었다.
“다음에 만나면 거짓말이나 하지 말아요.”
체이서가 멈칫했다.
우습게도 동생의 껍데기를 쓴 이는 그가 여동생에게 약속한 바를 정확히 말했다.
이아나가 등을 반쯤 돌렸다.
“난 거짓말은 별로 안 좋아해.”
하늘을 올려다보는 옆얼굴은 어디에도 미련이 없어 보이는 낯이었다. 금방이라도 어디로든 날아가 버릴 것같이.
체이서는 웃음 지었다.
그는 여동생이 죽던 날까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했다. 자신이 메마른 사람이리라 생각했다.
폭력을 감내하다 모두 말라버린 것일지도 모르지. 체이서는 눈앞의 이아나에게서 눈을 떼어내지 못했다.
가엾은 여동생, 네 모습은 이제 어디에도 없구나.
이아나와의 대화는 여기서 끝이었다. 체이서는 또 한 번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이윽고 이아나가 완전히 사라졌을 즈음, 그의 근처의 공간이 울렁 움직였다. 물방울이 떨어진 듯 일그러진 공간 사이에서 희끄무레한 형체가 나타났다.
그것은 점차 선명해지며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갖췄다.
“쥬인님.”
마쉬멜이었다. 어린아이 모습인 그는 고개를 조아렸다.
“도라가지 않우십니까?”
사실 체이서는 현재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개중에는 당장 부친을 뒤쫓는 것과 같이 급한 일도 있었다. 언제 또 꼬리를 숨길지 모르니.
“기사단쟝이 찾숩니다.”
체이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네 목소린 진지한 분위기나 감상엔 어울리지 않네.”
“쥬인님.”
분명 돌아가, 한시바삐 움직여야 했다. 남은 일이 쉬워지려면 말이다.
“아아.”
어느새 제 모습으로 돌아온 체이서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붉은 입술로 엷은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조금만 더.”
그는 마쉬멜을 쳐다보지 않은 채, 한곳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존재감을 가득 드러낸 꽃의 향기. 역시나 향기가 이 공간 가득 남아 있었다.
체이서는 다시 한번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선택을 했다.
“더 있지.”
***
“당신은 이름이 뭐야?”
걸음을 딛던 체이서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로 흐릿한 놀람이 스쳐 지나갔다.
“그런 걸 물을 줄도 알았나요?”
본모습이 아니었기에 그의 웃음엔 그림 같은 아름다움은 없었다. 부드러운 미소를 보던 이아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매번 당신, 저기 할 수는 없으니까.”
체이서가 이곳에 머문 지 꽤 시간이 흘렀다. 체이서는 정말 급한 사안만 도뮬릿으로 돌아가 처리하고서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제 모습을 숨긴 채로.
이런 저를 르나그가 이상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이 이상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그저 궁금했다. 알아야 할 것만 같았다. 눈앞의 이 여동생의 탈을 쓴 이아나가 어떤 이인지.
그렇게 시간이 꽤 흐른 만큼 체이서는 이아나와 많은 대화를 나눴다. 미약하지만 그녀가 더는 그를 불편하게 여기지 않는 걸 느꼈다.
그에게는 상대의 반응을 기민하게 알아차리는 능력이 있었다.
분명 가까워졌음을 느꼈다.
하지만 체이서는 이렇게 가까워져,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지 아직도 알지 못했다.
자신은 멍청하지 않은데, 어째서일까.
“이서. 이서라 불러주세요.”
대답을 지체할 수 없기에 체이서는 자신의 이름 반절만 내뱉었다.
“루브라 불러주면 더 좋고요.”
세상에서 그 누구도 불러준 적 없는 자신의 중간성까지 입에 담으며.
이아나는 놀란 눈을 했다.
“이서. 익숙한 느낌의 이름이네.”
그렇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는 약간의 즐거움마저 묻어나왔다.
“왜 익숙한데?”
“아주 먼 곳에, 그래. 여기서 먼 곳에 그런 느낌의 이름을 쓰는 곳이 있거든.”
체이서는 그곳이 이아나의 원래 세계라는 걸 알았다. 원래 세계의 기억까지는 지우지 않았으니까.
“그립단 생각은 별로 안 했는데. 이상하게 그런 느낌이 드네.”
“왜 그립지 않나요?”
“다신 돌아가지 못할 테니까?”
그 목소리는 건조하되 체념이 어려 있었다. 이제 그 체념마저 바스라졌다.
“내 고향은 너무 멀어요.”
차원을 이동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여기는 것 같았다. 자신의 정체조차 알지 못할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체이서는 잠시 시선을 내렸다. 그래, 그녀는 제 세계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희생당할 테니까.
그는 왜 언젠가 죽을 희생양의 옆에 모든 일을 제쳐두고서 있는가.
궁금하니까.
“오늘은 작별 인사를 하러 왔어요.”
하지만 더는 이런 유희를 누릴 수 없었다. 체이서가 맡은 일은 너무나도 많았다. 마쉬멜이 한탄하듯 악당도 부지런해야 할 수 있는 업이라며 농을 하듯이.
“출소해요?”
“그렇죠.”
게다가 여기서 르나그의 의심을 지펴서 좋을 일이 없었다.
“다신 못 보겠네요.”
이아나는 이별에 담담해 보였다. 체이서는 그런 모습에 속이 체한 듯 꽉 막힌 기분을 느꼈다.
“뭐. 건강해요. 건강이 최고더라.”
언제나처럼 턱을 괴고 저를 올려다보는 이아나에게 체이서는 충동적으로 물었다.
“당신은 가족이 있나요?”
체이서는 의식적으로 눈앞의 이를 이아나라 부르지 않았다.
“가족? 음, 으음……. 있는 것 같아요.”
이아나는 선선히 끄덕였다.
“다정한 오빠가 있네요. 아빠도 있는 것 같고.”
“마음에 드나요?”
순간 이아나의 눈이 체이서에게로 돌아갔다.
“아빠는 모르겠고, 오빠는 다정해서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아니, 좋은가. 좋네요.”
“그렇구나.”
“그런데 요즘은 답장이 뜸하네요.”
그럴 것이다. 그 오빠는 바로 그녀의 눈앞에 있었으니까.
“아쉬워요?”
체이서가 한 걸음 다가와 물었다. 이아나에게로 긴 그림자를 드리운 채로.
곧 고개를 갸웃하는 그녀의 눈은 이상한 사람이네, 하고 말하는 듯했다.
체이서는 다시 물었다.
“당신은 다정한 걸 좋아하나요?”
“무심한 것보다는 낫겠죠.”
저는 무심하기 짝이 없으면서 그녀는 뻔뻔하게도 그렇게 말했다.
체이서는 웃었다. 눈앞의 이아나와 만난 것은 정말 짧은 시간이었다. 체이서가 살아온 수많은 시간에 비하면 짧은 시간. 이 뻔뻔함에 시선을 사로잡혔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눈앞에서 거대한 식충식물이 아가리를 쩍 벌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제 꾀에 제가 당한 듯, 지독한 낭패감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눈앞의 이아나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고?
이게 어딜 봐서 호기심에 사로잡힌 사람의 행동인가.
체이서가 한 걸음 앞으로 옮겼다. 낙인을 찍은 듯 발자국이 꾹 바닥에 찍혔다.
“날 다시 소개할까요.”
그는 엉뚱한 소리에 눈을 깜빡이는 이아나의 손을 살짝 거머쥐었다.
발밑에서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깃털과도 같이 나부끼는 이것은 체이서의 힘이었다.
“내 이름은 체이서 루브 도뮬릿.”
다섯 장미 중 검은 장미. 그는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제 본능이 꿈틀거리는 감각을 느꼈다.
“흑장미의 수장이라고도 불려요. 푸른 장미.”
“……그 이름, 설마. 악. 아니아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진실을 고하는 겁니다. 당신이 거짓은 싫다고 했으니까.”
아지랑이가 휙 흩날리며, 꽃잎이 흩날리듯 바람에 날아간다. 그 사이로 새카맣게 돌아온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나는 그대의 ‘오빠’이지만, 동시에 아니기도 하죠.”
이아나는 눈을 크게 떴다.
“당신은 내가 데려온 푸른 장미예요.”
체이서는 알았다. 그는 언젠가 이아나에게 이 말을 다시 한번 더 할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처음부터 거짓 없이 고하리라.
“당신을 진심으로 대하고픈 마음이 들었어요.”
“지금, 무슨…….”
“그러니까, 다시 시작해요.”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얼굴은 지독히도 아름다웠다. 이아나마저도 잠시만 말문이 막혔을 만큼.
푸른 장미의 영혼을 다른 차원에서 데려와 이아나의 몸에 옮긴 것은 체이서였다.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이아나의 몸에는 체이서의 힘이 남아 있었다. 정확히는 흔적이.
“당신의 무심한 다정함이 마음에 들어요. 가지고 싶을 만큼.”
“대체…….”
이아나가 마지막 말을 잇지 못하고 스르륵 쓰러졌다. 체이서는 그녀를 가벼이 안아 들었다.
한들한들. 봄바람이 불었다.
그의 얼굴로 농익은 미소가 흘러갔다.
“이아나.”
붉은 입술이 처음으로 이름을 머금었다. 이는 곧 각인이었다.
너는 앞으로 이아나야.
“내 이아나.”
내가 사랑할 이름이지.
그는 끝내 새롭게 치켜뜬 감정의 이름을 익숙한 단어에 붙여보았다.
이 가슴 속에 꿈틀거리는 것은 과연, 세상에서 처음 느껴보는 장미로서의 본능인가.
아니면 이 낯간지러운 감정의 이름인가.
다음에는 이 답을 느낄 것이다. 반드시 알아차리란 예감을 느끼면서.
체이서는 천천히 힘을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