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아나 아가씨? 캄브라캄에 가셨잖아. 오래됐어.”
체이서는 발걸음을 멈췄다. 꽤 거리가 있는 곳에서 들려온 목소리 때문이었다.
“그 소문이 사실이었어? 아가씨가 정말 가주님의 죄를 대신해서? 세상에. 하늘도 무심하시지.”
“허, 입조심 해. 신입이라지만 그런 말 함부로 해선 좋지 않을 거야.”
점차 작아지는 목소리를 듣다, 체이서는 감흥 없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그가 집무실에 도착했을 때, 대기하던 마쉬멜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오쪘쭙니까?”
체이서는 문을 닫다 말고 피식 웃음을 토해냈다.
“그 발음은 어떻게 안 되는 건가?”
“……안댑니댜.”
마쉬멜이 금방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그마저도 아기와 같은 모습이었기에 마쉬멜이 바란 표정은 지어지지 않았다.
“그래. 경과는?”
본래라면 이렇게까지 어려지는 건 좀 더 뒤의 일이지만, 최근 힘을 강하게 쓴 탓에 마쉬멜의 저주가 강화되었다.
바로, 캄브라캄에서 새로운 ‘푸른 장미’를 소환한 탓이었다.
“눈을 떴댭니다.”
“그래? 처리는.”
“심쟝마비에서 다쉬 살아냔 것으로요.”
“그래?”
뒤처리는 그와 협조 중인 노란 장미, 르나그 튜즈 발테이즈가 알아서 할 터였다.
체이서가 시간이 돌아간 세상에서 눈을 떴을 때 우습게도 그는 이아나와 처음 마주한 순간으로 돌아와 있었다. 곧바로 마주한 것은 ‘껍데기’만 남겨진 여동생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몸엔 영혼이 없다.
생존 본능에 따라 먹고 마시고 잠을 자는 것은 가능했지만 그뿐이었다. 부친은 푸른 장미 자체에 집중한 탓에 어떻게든 상관없는 모양이었지만, 흑장미의 힘이 약한 탓에 알아보지 못한 듯했다.
저 육체엔 거의 찌꺼기 같은 힘이 남아 있을 뿐이고, 진정한 푸른 장미의 힘은…… 체이서 그에게 있다는 것을.
그 후로 체이서는 차곡차곡 준비하기 시작했다. 여동생이 없는 이 세상을 되도록 오래 유지하는 방법을 찾아서.
당장은 버틸 수 있으니, 만약에 힘을 잃을 때를 대비해 붉은 장미의 수호신과 푸른 장미의 수호신을 각기 빼돌렸다.
어차피 이 세상은 예정된 수순으로 멸망할 것이었다. 그러나 체이서는 이아나와의 마지막 약속을 지키기로 했다. 사는 것. 직접 죽지 않는 것. 이는 그가 살아 숨 쉬는 유일한 이유기도 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 체이서는 이대로라면 예정 이상으로 빠르게 멸망하리라 생각하고 직접 ‘푸른 장미’를 데려오기로 했다.
적어도 그는 이아나가 회귀 전 시간에서보다는 오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따름이었다. 그러기 위해 과거와는 다르게 부친의 실험도 그대로 두지 않았고 빠르게 도뮬릿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마쉬멜에게 모든 사정을 알린 뒤 푸른 장미를 다른 세상에서 데려왔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마쉬멜은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긴 했으나 그뿐이었다.
이 흑마법사는 자신의 저주를 푸는 것 외에는 무엇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성격이었다. 체이서의 예상대로였다.
저주를 완전히 풀어내는 방법을 제시하자 그는 목숨을 바쳐 충성할 것을 맹세했다.
“그롬 실행은 언제 하쉬눈 겁니까?”
“조금 더 두고 본 뒤에?”
새로운 푸른 장미를 데려오기는 하였지만 이쪽의 힘을 사용하기까지 좀 더 두고 볼 예정이었다. 물론 푸른 장미가 이 세계에 적응하도록 다른 세상의 기억을 봉인해 가져온 뒤였다.
한편으로는 그가 기억을 가져온 푸른 장미가 정말 이전의 ‘이아나’와 다른 인물일까. 혹은 가능성은 낮겠지만 같은 사람처럼 보일까. 미약한 의문이 일었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푸른 장미를 데려오고 나서 곧바로 돌아간 터라 아직 눈을 뜬 이아나와 마주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아직 도뮬릿을 안정화시키지 못한 터라 이쪽부터 먼저 정리할 예정이었다.
그래, 본래라면 그럴 생각이었고.
시간이 꽤 지난 어느 날, 체이서는 난데없는 편지를 한 장 받았다.
“편지?”
부친과의 일을 해결하기 위해 이아나를 캄브라캄에 두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결을 완전히 차단한 것은 아니었다.
「안녕 오빠?
이런 얘기 좀 그런데 말이야…….」
그는 편의상 편지를 두고 이아나에게 편지를 쓰면 저에게 오게 했다.
그러긴 하였는데…….
「술 좀 보내봐.」
체이서는 실로 간만에 어처구니없다는 기분을 느꼈다. 잘못 보았나 싶었지만, 그의 시력엔 이상이 없었다.
아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웬만해선 병들지 않고, 독도 견디는 장미의 몸이었으니까.
체이서는 편지와 편지를 가져온 수하를 번갈아 보았다. 체이서의 시선이 스칠 때마다 심부름꾼을 한 수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술이라…….”
수하의 턱 끝에 어느새 식은땀의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러나 수하는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하는 평범한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이곳의 주인, 그의 주인과는 감히 평범한 물음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체이서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이미 이곳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체이서의 부친, 현 공작을 따르는 이는 없다고 보아도 좋았다.
체이서가 철저하게 고립시키는 중이었으니. 공작은 저를 따르는 소수의 수하와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었다.
이 탓에 도뮬릿 저택은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뮬릿 가솔 사이에서는 묘한 소문이 돌았다.
바로 현재 도뮬릿의 소가주, 그의 하나뿐인 여동생을 두고 흘러나온 소문이었다.
부자 사이에 이토록 격렬하고 잔인한 정쟁이 진행되는바, 일찌감치 이를 예상하고 미리 캄브라캄으로 보낸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였다.
가솔 사이에서 이아나 로즈 도뮬릿에 대한 평가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언제나 먹고, 자고, 거의가 숨만 쉬는 것에 가까운 이 아가씨는 마주 본 사람들에게 인형 같다는 이야기를 듣곤 했다.
하지만 지체 없이 두들겨 패 죽이거나 고문을 즐기는 가주나, 속을 알 수 없는 소가주에 비하면 이아나의 존재는 무척이나 평화롭게 느껴졌기에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평이 좋은 축에 속했다.
물론 이아나 로즈 도뮬릿에 대한 식솔의 평가가 어떻게 나오든 관심 없었다. 어차피 껍데기만 남아 있던 것이었으니.
하나 체이서는 이 엉뚱한 편지를 좌시하지 않고, 곧바로 누군가를 불러냈다. 이 상황을 가장 잘 알고 있을 인물이었다.
“멀쩡히 걸어 다닌다고?”
“그렇습니다만…….”
천년 그 이상의 시간을 품은 캄브라캄. 캄브라캄의 진정한 역할을 알고 있는 이는 현시점에서 황제를 제외하면 체이서밖에 없었다.
“잘 먹고. 잘 잔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남자는 체이서의 수하와 다르게 아무렇지 않게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르나그가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살벌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었지만 체이서의 여유로운 낯엔 변함이 없었다.
르나그 튜즈 발테이즈. 캄브라캄의 총책임자이자, 그와 같은 장미의 일원. 노란 장미.
그리고 체이서에게 캄브라캄의 지하로 갈 수 있는 권한을 준 이이기도 했다.
르나그는 캄브라캄의 진정한 역할에 대해서는 잘 몰랐으나, 무언가 특별한 힘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것이 장미와 관련된 것이라는 것도.
사실 야성이 가장 강한 붉은 장미의 힘을 억누를 수 있단 점에서 평범한 감옥은 아니었다.
거기다 이미 발테이즈와 도뮬릿이 남몰래 손을 잡았다는 사실은 이들에게 새롭지도 않은 이야기였다.
체이서 또한 과거로 돌아간 뒤로 이 남자의 필요성을 알아차리고 기꺼이 자신과 손을 잡도록 만들었으니까.
그리고 체이서는 르나그와 오랜 시간 마주하면서 한 가지를 알아차렸다.
그리고 이건 체이서에게는 조금 곤란한 사실이었다.
“……제가 신경 써야 할 점이 있다면 알려주십시오.”
정중한 태도와 진중한 목소리, 날카로운 검과 같은 사나운 눈매와 다르게 각이 잡힌 우아한 태도까지.
발테이즈 후작가는 전통적으로 폐쇄적인 가문이었다. 대대로 감옥인 캄브라캄을 관리하며 상주하다시피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는 노란 장미의 능력 ‘요새화’와 관련 있었다. 노란 장미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요새’라 지정 혹은 생각한 곳에서 떠나지 않으려 하니까.
그런 까닭에 이들은 사교계에 얼굴을 내미는 일이 드물었지만 르나그의 경우, 결코 평범치 않은 외양 덕에 드문 등장에도 존재감을 드러낸 케이스였다.
여러모로 체이서가 이용하기 좋았지만……. 가장 유용했던 점은 바로.
“약혼자로서…… 신경을 쓰고 싶습니다만.”
이 남자가 제 여동생 이아나를 사랑했다는 점이었다.
체이서는 흥미로웠고 동시에 우습고 곤란한 심경을 느꼈다.
현재는 시간이 되돌아간 시점이다. 그러니, 자연히 이전의 ‘이아나’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어야했다.
여동생의 힘을 이어받은 체이서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르나그는 일부지만 회귀 전 과거를 기억했다.
설마하니…… 과거에 이아나와 르나그가 만난 적이 있을 줄이야. 이는 체이서로도 생각지 못한 점이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도 회귀 전에 여동생은 저도 모르게 저 후작에게 푸른 장미의 힘을 썼던 듯했다. 그 덕에 영향이 남아, 르나그는 불안정하게나마 과거를 기억하게 되었다.
체이서는 르나그를 관찰하며 알아차렸다. 저 남자가 가진 기억이 불안정하다는 걸.
“……내 여동생을 언제 봤다고 했지?”
“그야, 연회에서입니다만. 당신도 있었지 않습니까.”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이 시간에는 없던 일과 현재를 혼동하고 있었다.
르나그가 말한 연회는 이번 시간대에 있지 않았다. 당연했다. 이 시간의 이아나는 껍데기만 남은 몸이었다. 살아 있기는 하여도 연회 참석이 가능할 리 없었다.
르나그가 자신의 착각을 깨닫지 못했던 까닭은 그의 가문이 몹시도 폐쇄적이어서 알려줄 이와 교류하지 않는 까닭도 있었고.
그 스스로도 진실을 알길 거부하고 있었다. 알아차리지 못한 본능인 듯했다.
이번에 르나그를 부른 것도 혹시나 달라진 이아나를 보고 무언가 알아차리지 않았을까 해서였지만 하지 않아도 될 염려인 듯했다.
그리고 체이서는 굳이 르나그의 착각을 바로잡아주지 않았다.
“그랬지. 나도 있었어.”
과거에서처럼 여동생을 사랑한다면, 이를 이용하면 그만이었으니. 그러기 위해서 두 사람을 과거에서처럼 약혼으로 짝지어준 참이기도 했다.
과거 부친은 노란 장미마저 실험에 이용하기 위해 짝지어준 것이었지만 이번 생엔 체이서가 이를 이용하기로 했다.
체이서는 피식 웃으며, 팔걸이로 팔을 걸치고는 나른하게 고개를 기댔다.
“후작.”
체이서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까딱까딱 움직였다. 그의 어깨 부근에 앉아 있던 아퀼라가 길게 날갯짓했다. 그와 동시에 불과 연기가 피어올랐다.
“내 동생이 건강해졌다니, 참 다행인 일이야. 그렇지?”
연기 사이에서 체이서는 눈을 가늘게 휘었다. 누구라도 혹할 매혹적인 웃음이었다.
체이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부친이 하던 것을 좇고 싶지 않았으니.
다만, 그가 유희삼아 하는 짓은 담배를 태우는 모습에 가까웠다. 체이서의 손에서 타오른 불이 그을림을 남겼다. 이런 행동은 폭력적이고 방탕하던 부친에 대한 조롱이기도 하였다.
거기다 그는 흐트러짐 없는 금욕적인 모습이었다. 그는 상당히 모순을 유발하는 모습으로 눈을 굴렸다.
“그대가 앞으로도 잘 봐주리라 생각해. 지금처럼.”
르나그는 눈을 찌푸렸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지 않아도 그럴 겁니다. 당연한 일이니.”
“그래.”
아마, 저 영리한 남자는 시간이 지나며 이상함을 알아차릴 것이다. 체이서는 언젠가 르나그가 자신의 착각을 알아차리고 진실을 알게 되리라 예상했다.
그때 가서, 과연 이 남자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앞으로 열렬히 사랑하도록 해. 내 동생을.”
어떤 선택을 하든 이 세상의 끝은 정해져 있으니 꽤나 즐거운 유희겠구나 싶을 뿐. 어차피 현재의 푸른 장미는 언젠가 이 세상을 지탱하기 위한 희생양이 될 것이다.
그러니 체이서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래. 상관없었다.
그때까지는.
***
현재의 푸른 장미가 언젠가 세상 멸망을 미룰 도구가 될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정해진 사실이었다.
그녀를 데려올 때부터 말이다. 그러니 체이서는 최소한의 소통 창구를 열어두었을 뿐 그 외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니, 한동안은 쓸 겨를이 없었다고 봐도 좋았다. 생각보다 부친의 발악이 거셌던 탓이었다.
회귀한 체이서에게는 간지럽지도 않은 수준이었으나, 소파 밑으로 들어간 벌레를 잡기 번거롭듯 숨어버린 부친의 세력을 잡아 지워내는 것은 꽤나 성가신 작업이었다.
“억, 소, 소가주님, 악, 사, 살려주세요…….”
발밑을 뒹굴던 남자가 덜덜 떨며 체이서의 발을 잡았다. 체이서는 매끈한 검은 구두 위로 올라온 피투성이의 손을 한참 응시했다.
그의 한 손에서 긴 연기가 흘러나왔다. 이윽고 손끝에서 피어오른 불을 보는 순간 남자가 화들짝 놀라 발작하듯 몸을 일으켰다.
“제, 제발. 체이서님! 제, 제가 잘못…… 했습니다요. 제발…….”
눈앞의 남자는 오랜 시간 도뮬릿 저택의 집사로 지내온 사람이었다. 하얗게 샌 머리가 그가 살아온 시간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리고 부친의 충성스러운 개로서 회귀 전 과거 그에게 고문을 서슴지 않던 이이기도 했다.
물론 이제 와 하잘것없는 복수를 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이 남자를 이용해 부친의 꼬리를 잡을 생각이었다.
“그대도 가족이 있네?”
체이서가 툭, 들고 있던 종이를 던지며 발로 짓이겼다. 그러고는 여상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참 많이도 죽였어.”
체이서가 던진 종이는 이 남자와 관련한 보고서였다. 혹은 이 남자 손에 죽어간 이들의 명단.
부친이 수없이 죽인 시중인 중에는 여기 있는 집사가 죽인 이도 있었다. 충분히 살 수 있었음에도 죽은 자들.
그 주인의 그 개라고. 이 남자는 부친처럼 가학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집에서는 평범하고 다정한 가장이었다.
체이서는 그 모순이 참으로 우스웠다. 그렇게 능력을 사용해 정보를 알아내려 할 때였다.
“가주님.”
나지막한 수하의 목소리에 그가 손을 멈췄다. 곧 체이서의 손 위로 새하얀 봉투가 올라왔다.
체이서는 낯익은 봉투에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열어보았다.
「술, 맛이 좋대.
오빠는 뭐해?」
종이 크기에 비해 내용은 너무나도 짧았다. 거기다 허술했다.
만약 뒤에 붙인 것이 안부 인사라면 교양을 귀히 여기는 이들이 끔찍해 할 수준이었다.
「좀 더 주라.」
거기다 주어에 목적어까지 상실된 마무리까지.
“……하?”
체이서는 헛웃음을 지었다.
서걱!
곧 나풀나풀 흩날리던 종이가 네 등분으로 잘렸다. 체이서는 단검을 휙휙 돌려 수하에 던졌다.
바닥에는 잘린 편지 조각들이 그대로 피에 젖었다.
“캄브라캄으로 술 더 보내.”
“예!”
이아나로부터 답장이 온 건 그로부터 나흘 뒤였다.
「음, 생각해보니 지난 편지는 너무 짧았지? 미안.
술 잘 받았어. 이번 것이 더 좋더라.」
이번에 온 편지에서는 짤막한 감상이 더해져 있었다. 확실히 성의란 게 생겼지만……. 여전히 터무니없이 짧았다. 거기다가.
「이번엔 술이랑 담배도 줄 수 있어? 가능하다면 말이야.」
이번엔 품목이 늘었다.
체이서는 편지를 보며 팔걸이를 툭 두드렸다.
……술을 하나?
꾸준히 요청했으니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담배도?
체이서는 잠시지만 고민에 잠겼다. 그동안에도 그의 발치에서 쓰러진 이가 저를 알아달라는 듯 신음했으나 그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번 편지를 보았다. 길어졌다고는 하나 원체 조촐했기에 순식간에 모두 읽었다.
짧다.
그는 곧 헛웃음을 지었다. 어처구니없음에서 흘러나온 웃음이었다.
‘건강에 좋지 않을 텐데.’
줄곧 체이서는 이 푸른 장미에서 날아온 편지에 가상의 ‘오빠’로서 장단을 맞춰주었다.
여동생과 한 약속은 두 가지.
이 긴 생을 자의로 죽지 않고 살아내는 것.
그리고 다시 만난 그녀를 사랑하는 것.
체이서는 이 모든 약속을 지킬 생각이었다.
하나, 여기서 그가 사랑할 여동생이 진짜 여동생인가? 그는 이 부분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것이 껍데기만 남은 몸을 귀히 보호한 이유기도 했으니까.
이미 세상에서 사라진 영혼과의 약속을 지킬 의미가 있겠느냐마는 이것이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존재하던 가족에게 보이는 마지막 예의며 경의였다.
의무적으로 사랑하는 것.
바람에 편지 끝이 거칠게 팔랑거리며 흔들렸다.
본디 이아나의 몸은 허약했다. 푸른 장미의 몸이 다른 장미와 다르게 각성 전엔 보통 사람의 몸에 가까웠지만.
이아나는 그 보통 사람보다도 못한 허약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워낙 타고난 자존심과 오만함, 그리고 오기 탓에 이를 드러내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회귀 전의 과거에서는 실험으로 몸이 극도로 나빠지기도 하였다. 물론 이번 시간에서는 ‘실험’이 없었으나 오랜 시간 영혼이 없던 탓인지 극도로 허약하고 병치레가 잦았다.
그러니 지금 영혼이 들어갔다고 하여 새삼 보통 사람과 같은 몸이 되지는 않았을 터였다.
술과 담배.
아마 그 병약한 몸이라면, 오래 못 살지도.
체이서는 피로 얼룩진 바닥을 보며, 냉정하게 판단을 내렸다.
이런 식이라면 푸른 장미를 희생시킬 의식을 당겨야 할 듯했다. 술과 담배에 찌들어 죽어버리면 곤란했으니까.
체이서는 손등으로 뺨을 닦아냈다. 장갑에 묻어난 검은 얼룩을 보다, 이내 장갑을 이로 물었다.
입술을 쭉 잡아당겨 장갑을 벗는 모습이 몹시도 퇴폐적이었으나, 감탄할 이는 여기에 아무도 없었다. 툭. 피로 얼룩진 장갑이 아래로 떨어졌다.
체이서는 무심히 시선을 흘렸다.
“알아봐.”
이와 함께 편지를 툭 던지자, 대기하고 있던 수하가 빠르게 잡아 고개를 숙였다.
“옛.”
이때까지만 해도 체이서는 이아나의 몸 상태가 엉망이라는 그런 보고서가 날아오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며칠 뒤 돌아온 보고는 상이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 가주님.”
좀처럼 당황하는 법 없던 철혈 같은 수하의 얼굴이 약간이지만 난감한 빛이 스쳤다.
“음…… 아가씨가 하시는 게 아닙니다.”
“그럼.”
“간수를 매수하고 있습니다.”
“……뭐?”
체이서는 다른 보고서를 보다 말고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무릎 꿇은 수하는 곤란한 빛을 띠면서도 모두 보고했다.
이미 꽤나 많은 간수를 매수한 걸로 모자라, 죄수 사이에 추종자도 있단다.
체이서는 기민하게 판단했다. 만약 여동생이었다면 저렇게 할 수 있었을까. 그 애는 오만하고 당당해 보여도 사실 제 울타리 안의 사람이 아니면 관심조차 없던 사람이었다.
“추종자?”
“예. 아가씨 옆에서 이것저것 편의를 봐주는 동료가 있는데……. 그게, 한쪽은 유스테라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용의자고. 다른 한쪽은 위조 화폐를 만들었던 사기꾼입니다.”
당연하겠지만 상류층으로 갈수록 상당히 보수적이다. 각 땅의 위치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여전히 가부장적인 전통 세습제를 고집하는 가문 또한 있었고,
어느 날 이 고리타분한 전통에 돌을 던진 사건이, 바로 유스테라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이었다.
대가문 유스테라 자작가로 할 것 같으면 유서 깊은 가문인 동시에 주요 동력원인 석탄 광산과 마력석 광산을 가장 많이 보유한 곳이었다.
부친과 장자를 죽인 이는 다름 아닌 장녀, 샐리 유스테라.
그녀는 자신을 학대하다 못해 사창가로 팔려 했던 이들에 대한 당당한 정당방위였다 주장하며, 작위를 막냇동생에게 양위하고는 스스로 캄브라캄에 수감되었다.
형질대로라면 그녀는 중죄수가 가는 수감실로 인도되어야 했으나 작위를 이어받은 막냇동생이 황제를 비롯한 발테이즈 후작과 거래한 뒤 그녀는 온건한 귀족 죄수동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뿐 아니라 서류적으로는 막냇동생의 사기죄로 수감한 죄수로 꾸며놓기까지 하였다.
물론 눈 가리고 아웅하는 수준의 가림막이었으나, 유스테라의 광산이 황실의 손으로 넘어간 것을 보면 과연 그 정도는 가능하겠다 싶은 처사였다.
그리고 위조 화폐를 만들어낸 사기꾼 쪽은 또 어떤가. 전문가도 혀를 내두를 기술에다 당시 수없이 많은 고위 가문을 털어먹던 솜씨로 유명했던 이였다.
어마어마하게 벌어들인 돈으로 제 죄질을 낮췄으니, 수완 또한 만만하게 볼 자가 아니었다.
“절친한 동료인 것 같습니다.”
그런 이들이 대체 여동생에게 왜 관심을 갖는단 말인가.
“편의를 봐주는 정도가 추종자라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이 시간의 이아나는 사교계에 나가지 않아, 존재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술과 담배는 그쪽도 가져갔나?”
“예? 아, 예. 아가씨께서 호의로 주는 듯합니다.”
이아나가 어떤 수단을 사용했든 그녀는 귀족 죄수동에 적잖은 존재감을 알렸다. 우스운 건, 보고에 따르면 본인은 이를 잘 모르는 듯했다는 점이다.
그러던 중 다시 한번 편지가 도착했다.
「술.」
체이서는 감탄했다. 어찌 매번 어처구니없음을 안겨주는 것인지.
이젠 한마디로군.
체이서는 입술을 툭툭 두드렸다. 곧 그의 손끝에서 느릿하게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는 이내 손끝에서 피어난 불꽃으로 편지를 태웠다.
그을림과 함께 올라온 연기에 그를 앞에서 본 사람이라면 담배를 피우나 착각할 만한 모습이었다.
체이서는 타오르는 편지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사실 그가 회귀 전 과거, 여동생과 편지를 나눠본 적이 없지는 않았다. 나이가 들수록 그는 바빠졌고 여동생은 홀로 저택에 남겨지는 일이 많았다.
그럴 때면 여동생은 귀찮을 정도로 편지를 보냈다. 거의가 제 안부로 빽빽하게 차올라 끝은 보고 싶다는, 절절한 한마디로 끝을 맺는 연서였다. 가끔은 띄어쓰기를 하지 않아 체이서가 한마디 하기도 했다.
그때의 체이서는 이 모든 편지를 무시하다시피 했다. 회귀 후 편지란 수단을 사용하게 된 건 미약한 죄책감 때문이기도 하였다. 참 우습게도.
이 편지를 받을 이는 같은 사람이 아닐 텐데도 말이다.
「오빠, 담배.」
그는 약속했다. 그녀를 사랑하기로. 하지만 돌아온 것은 껍데기만 남은 육체였고.
그는 자연히 이 몸만이라도 귀히 여기며 사랑해야 했다. 그가, 그러기로 했다.
이제 그 육체에 다른 영혼이 들어갔다 한들 다르지 않았다.
체이서에게 저것이 이아나였고, 그가 사랑해야 할 이아나였다.
그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생명으로 받게 된 의무였으니.
그는 사람을 통제하는 능력을 가진 만큼 강박적인 사람이었다.
부친처럼 방탕해지지 않기 위해 고수하던 금욕은 어느새 한 치도 흐트러짐 없는 의복처럼 제 몸에 달라붙고 말았다.
머지않아 이 전제도 제 머릿속에 달라붙으리라 생각했다.
「아참. 마지막으로 보내 준 게 좋더라. 향긋하대.
많이 줘.」
그래, 그럴진대. 체이서는 이 짤막한 편지에서 솟아오르는 의문을 느꼈다.
수없이 편지가 이어졌다. 언제나 짧디짧은 내용뿐이었다. 분명 기억이 없을 텐데. 가문은커녕 저에 대해서, 스스로에 대해서조차 묻지 않는다.
체이서의 눈이 오래도록 편지에 머물렀다.
이건 제 여동생과 너무 다른 필체, 너무 다른 내용, 그리고 몇 글자로 흘러나오는 무심함 때문일까.
담배라.
「담배 피우는 사람이 좋니?」
이쪽이 언젠가 희생당할 영혼이라 해도, 어쨌거나 이아나였다.
답장은 빠르게 날아왔다.
「담배는 편리해.」
이번에도 예상하지 못한 답변을 품은 채로.
「근데 담배 피우는 사람은 별로.」
냄새가 싫다며 드물게도 길게 불평을 덧붙인 편지였다.
체이서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제 손을 보았다.
어차피 그는 담배를 손에 대지도 댈 생각도 없었다. 그럼에도 옆에 둔 건 이아나에게 보내는 것을 제가 한번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체이서는 담배 하나를 쥐었다가 툭툭 털었다.
바스락.
곧 그의 손에서 가루가 된 담배가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체이서는 무심하게 이것을 보다가 곧 이로 장갑을 물어 벗겨냈다.
앞으로도 담배를 손에 댈 일은 없을 것이다.
이번 생에는 이아나의 기호에 맞추기로 했으니.
거기까지 생각하던 체이서는 멈칫했다.
그는 잠시지만 간과했다. 본래 자신은 누군가에게 맞추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홀려서 저에게 맞추게 하는 사람이었다.
이는 새로운 푸른 장미도 마찬가지였다. 직접 만나 담배를 좋아하게 하면 되지 않나? 그런데 왜, 굳이.
체이서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 순간, 그가 읽지 못했던 한 줄이 눈에 들어왔다.
「오빠는 어떤 사람이야?」
체이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주님?”
늘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던 수하들이 그를 쫓아 나왔다. 체이서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로 고아하게 툭 한마디를 뱉었다.
“캄브라캄에 알려. 그곳에 가겠다고.”
그래, 직접 봐야겠다. 보고서 판단해야겠다.
체이서는 이때까지도 가슴을 툭 두드린 이 호기심이 더는 자리지 않게 둘 생각이었다.
결국 눈을 마주한 순간에 와장창 부서져버릴 줄은 생각도 못하고서.
“……당신이 여기까지 어쩐 일입니까?”
마침내 르나그를 마주한 순간에 체이서는 여유롭게 미소했다.
“그냥.”
그는 다리를 꼰 채로 턱을 까딱했다.
“내 동생이 보고 싶어서 말이야.”
르나그는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이상한 점을 찾지 못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잠깐. 기다리겠어? 내가 평범한 면회를 하려는 건 아니고.”
르나그는 다음에 이어진 체이서의 요청에 더욱 찡그렸다.
“……실례지만, 각하. 혹시 미치셨습니까?”
“많이 듣는 얘기군. 애석하게도 그건 아니니 안심해.”
몇 차례 반대하긴 했으나 그는 결국엔 허락했다. 그의 입장에선 이아나에게 해가 될 일이 아니라 판단한 듯했다.
“마쉬멜.”
“……예.”
이 모든 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마쉬멜은 오늘따라 제 주인이 이상하다 싶었지만 얌전히 명을 따랐다.
체이서가 긴 복도 끝을 걸어 한 곳에 도착했을 때, 그는 미려한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평범한 얼굴에 죄수복을 입은 남자가 되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마침내 그는 마주했다. 제 여동생의 탈을 쓴 새로운 푸른 장미와.
정원에서 꽃을 바라보고 있던 얼굴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를 마주한 자색 눈동자는 보석처럼 오묘한 빛을 띠었으나 평범한 이들이 으레 가질 법한 호의마저도 없는, 심드렁한 눈이었다.
체이서는 잠깐이지만 멈칫했다. 언제나 저를 향한 열망이 가득했던 눈이 텅 비어 있다.
아니, 지독하리만치 무심했다.
단 한 번이라도, 이런 시선을 마주한 적 있던가?
그는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을 느끼며 입술을 끌어올렸다.
위험한 호기심이 심장을 다시 한번 찔렀다.
“좋은 날씨네요.”
체이서가 미소 띤 낯으로 안부를 건네는 순간 답변이 들려왔다.
“뭐야.”
이번에도 전혀 생각지 못한 답변이 말이다.
“말 걸지 마세요.”
이아나가 손을 휙휙 휘저었다.
“훠이.”
체이서는 기묘한 전율을 느꼈다. 이는 떨림이기도 했다.
그는 확고한 길을 택해 걷는 사람이었다. 뛰어난 두뇌와 사람을 세뇌, 통제하는 능력은 그가 군림하도록 만들어주었다.
비록 지난 과거에서는 부친의 마지막 수 하나를 막지 못해 망쳐버렸으나, 한차례 회귀한 그는 결코 실패할 수 없었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
오직 하나,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다준 여동생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같은 세상이었다.
오래전부터 갇혀 있던 붉은 장미에게서 수호신을 빼앗고, 노란 장미의 감정과 그가 가진 이질감을 알아차리고 배신할 수 없는 나이트로 삼았다.
쓸모가 많은 흰 장미는 이미 추적 중이었으며, 곧 붙잡힐 터였다.
가장 성가신 부친은 이미 쥐구멍에 몰린 쥐와 같았다.
이 세상이 자연히 멸망할 때까지, 멸망이 코앞까지 다가올 때까지 그는 모든 수를 쓸 생각이었고, 수단은 모두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체이서는 이아나를 보는 순간 어긋남을 느꼈다. 너무나도 작은, 손으로 더듬지 않으면 느끼지 못할 어긋난 홈.
체이서는 손을 쥐었다가 폈다. 붉은 혀가 입술을 적셨다.
고개를 돌렸던 이아나가 어느새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기요. 어디 아파요?”
무심하던 자색 눈동자에 다시금 그가 담겼다. 그러나 말의 내용과 말투에는 선명한 온도 차이가 있었다.
차갑지는 않았지만 따뜻하지도 않았다. 미묘한 미지근함, 이것이야말로 관심이 없음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듯했다.
이내 이아나가 엄지를 들어 올리더니 어깨너머를 툭툭 가리켰다.
“병동은 저쪽이에요.”
그러고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를 털더니, 그대로 미련 없이 돌아섰다.
“끙, 분명 사람 하나 없었는데. 어디서 나타난 거야.”
생각도 못 하게. 아주 작은 중얼거림이었지만 체이서에게는 똑똑히 들렸다.
“아, 밥 먹을 시간이다.”
체이서는 잠시 이 상황을 생각했다. 이곳에서 눈을 뜬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로운 푸른 장미, 체이서로 인해 스스로에 대한 건 전혀 기억하지 못하며, 기억하지 못하는 것조차 알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새 세상에서 깨어난 얼떨떨함 정도는 있겠지. 혼란도.
혼란스러워하는 낯은 전혀 아니지만.
제가 아닌 이아나 입장에서 고려하는 동안 이아나가 한참 멀어졌다. 체이서는 그 뒷모습을 한참이나 보았다.
이상하지. 영문 모를 향기가 공기 중에 남아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체이서는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푸른 장미마다 향기가 다른 건가?”
텅 빈 정원, 그의 작은 중얼거림을 들을 이는 없었다. 체이서는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가 놓았다.
문득, 나쁘지 않은 유희거리가 생각났다. 왜 이렇게 결심한 건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