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83/87)

외전. 흑장미와 주인공, 후회의 살타렐로

***

입구를 지키던 체이서는 이질적인 힘을 느끼고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저 멀리서 새로 나타난 두 사람을 알아차렸다.

새로운 힘은 아니었다. 그의 왕에게 위험한 힘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익숙하게 느끼던 힘을 7년 만에 본 것이었으니.

‘다른 세계에서 두 장미를 불러온 건가.’

이아나에게 대충 이야기를 듣긴 하였으나 실제로 보는 것은 또 다른 기분이었다.

그는 해사하게 웃는 제 왕의 얼굴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는 이제 경쟁자가 하나가 아니란 걸. 인정해야 할 처지였다.

속이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재미나기도 했다.

저 중간에 선 붉은 장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으려나. 짐작해보기도 하면서.

이윽고 다른 두 장미를 대동한 이아나가 체이서 쪽으로 걸어왔다. 이곳이 공원의 입구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체이서.”

프란시아와 르나그는 체이서를 보며 잠시 얼굴을 굳혔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이아나의 결정을 존중한다는 듯한 맹목적인 얼굴이었다.

이아나가 그에게 손을 뻗었다. 체이서는 무슨 의미인지 몰라 잠시 눈을 끔뻑였다.

머리가 좋고 눈치가 빠른 남자였지만 이아나의 행동은 종잡을 수 없었다.

저 손은, 목줄을 달라는 이야기인가?

그의 목에는 구속구가 달려 있었다. 체이서의 영혼이 흩어지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하면서, 그를 감시하는 도구였다.

그에게는 무척이나 기꺼운 일이었다. 그래. 지금 저 손에 이 줄을 주면 될 터인데.

그러나 생각과는 반대로 체이서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이아나와 그의 손이 스치듯 닿았다가 떨어졌다.

“……봄이니까. 예외를 둘까?”

잠시간의 온기였지만 체이서에게는 이것으로도 충분했다. 십 년이 걸릴 거라더니. 즐거워 보이는 그녀의 낯에는 그런 기억이 말끔히 사라진 듯했다.

아마도 나타난 저 두 장미 덕에 말이다.

이아나는 해사한 미소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체이서는 그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새하얀 얼굴과 오묘하게 말려 올라간 눈꼬리, 잘 웃는 편이 아닌 낯이라 미소가 더욱 귀했던 존재.

이제는 흑단같이 까만 머리마저도 잘 어우러지는 그녀는 한참이나 하늘에 눈을 두었다. 그러고는 반쯤 남은 미소를 그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당신도 참여해.”

체이서는 이것이 그녀가 베푼 호의임을 알았다. 평소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거란 것도.

“뭐. 오지 않아도 상관없어.”

이아나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는 돌아서서 다시 공원으로 향했다.

“뭘 하는 건데?”

체이서의 물음에 이아나는 고개만 돌려 작은 대답을 남겼다.

“피크닉.”

봄으로 돌아가는 이아나의 뒷모습은 그 어떤 별보다 반짝이며 황홀하게 느껴졌다.

“그곳엔 없던, 봄이니까.”

그런 그녀의 뒤로 팔랑팔랑. 약속이라도 하듯 꽃잎이 흩날렸다.

그의 생에 봄이란 계절은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그저 죽지 못해 사는 지나가는 시간뿐이었다.

그녀가 살짝 뒤를 돌았다.

“누리지 못한 계절을 오늘만큼은 당신도 즐겨봐.”

마치 그녀의 향기를 쫓듯이 어지럽게 흩날리는 저 꽃들 속에서 체이서는 어떤 얼굴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응시했다.

그는 웃음을 흘렸다. 어떤 감정이든 웃음으로 귀결되고 마는 건, 오래전 이런 방법밖에 배우지 못한 탓이다.

체이서는 풍경을 바라보며 잠시 망설였다. 조금 멀리서 시선이 느껴져 바라보면 리케도르안이 서늘한 얼굴로 노려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이아나의 뒤를 쫓아 걸었다. 체이서를 못마땅하게 여기더라도 이아나의 결정을 절대적으로 따르겠다는 듯이.

봄과 꽃.

그리고 이아나.

그의 눈이 떨어질 줄 몰랐다.

체이서는 문득 생각했다.

제 인생에 이토록 평화로운 날이 있을 줄 알았던가.

아니었다.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흩날리는 꽃잎 사이에서 생각에 잠겼다.

천천히 과거를 회상했다.

오래전, 시간을 회귀했던 그 이전 진짜 ‘이아나’가 살아 있었던 때로.

***

과거를 탐험하기 위해서는 꽤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여러 번의 삶을 되살았으니 말이다.

눈을 뜨면 체이서에게는 더는 이아나가 보이지 않았다.

자기 세뇌. 매혹안을 통해 사람을 세뇌할 수 있는 그는 스스로 또한 통제할 수 있었다. 깊은 꿈을 꾸듯 과거를 응시하는 것도 가능한 것이다.

이 덕에 그는 웬만해서는 과거의 일을 지울 수도 잊을 수도 없었다.

그는 천천히 과거에 빠져들었다.

***

캄캄한 실내.

눈앞에는 새카만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한때, 그의 평생을 덮었던 거대한 괴물의 그림자다. 올려다보면 그의 아버지라 불리던 남자였다.

“오늘은 네게 소개해줄 이가 있다.”

어린 체이서는 무심하게 아래를 응시했다. 부친은 눈을 똑바로 마주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이러한 까닭에 그가 폭력에 죽지 않을 힘을 갖출 때까지는 조용히 굴복함이 옳았다.

아래로 내린 덕에 체이서의 눈에 딱지가 덕지덕지 붙은 손등이 보였다.

보이는 부분이라 이 정도로 그쳤을 뿐 소매를 들어 올리면 죽지 않을 만큼 맞은 새파란 멍으로 가득할 터였다.

“고개를 들어라.”

권위적이고 위압적인 음성에 어린 체이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차가운 얼굴로 입을 쭉 찢어 웃는 남자는 체이서와 닮았으면서도 다른 낯을 하고 있었다.

부친은 여느 때와 다르게 매우 기분이 좋아 보였다. 드문 일이었다.

부친의 손이 거칠게 움직였다. 작은 비명이 들렸다.

“새 식구다.”

체이서는 우악스러운 손을 건조하게 응시했다. 그리고 커다란 손에 불편하게 잡힌 작은 아이의 모습도.

소녀라 부르기에도 어린, 아주 작은 여자아이였다.

금방이라도 울 듯이 눈물이 가득한 얼굴은 이미 새빨갰다. 이미 눈이 불도록 울고 난 뒤인 듯했다.

‘저렇게 울어봐야 소용없는데.’

어린 체이서는 무심하게 생각했다. 부친은 가학적인 성향이 있어 오히려 괴로워하는 자에게 폭력을 휘두르길 좋아했다.

이는 음습한 흑장미의 본능과도 맞닿아 있지만 그보다는 본연의 성격이 잔인하고 포악한 편이었다.

그렇기에 부친의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가는 생존하기가 힘들었을 터인데, 이상하게도 여자아이의 몸에는 어떠한 폭력의 흔적도 없었다.

그저 극도로 겁을 먹었을 뿐.

“체이서, 앞으로 네가 지켜봐라.”

어린 체이서는 미간을 찌푸리다가 재빨리 지워냈다. 부친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비춰서 좋을 것이 없었다.

더없이 만족스러워 보이는 부친의 얼굴, 아주 오래전부터 최근까지 부친이 찾던 것.

그리고 상처 하나 없는 여자아이.

체이서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어린 시절부터 나이에 답지 않은 머리와 판단력을 갖추고 있었으니.

“네 여동생이다.”

푸른 장미. 저건, 푸른 장미인 것이다.

오랫동안 흑장미가 푸른 장미를 갈취해 감금하듯이 휘하에 두고 있었지만, 몇 대 전 흑장미 가주의 동생이 푸른 장미를 도망치게 한 뒤로 행방이 묘연했다.

그런데 부친이 기어이 사라진 행방을 찾아 다시 데려온 것이다.

극도로 폭력적인 부친이 어째서 어린아이에게 손도 대지 않았는지 남김없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앞으로 이것의 이름은 이아나 로즈 도뮬릿.”

그의 부친은 특별한 힘이 거의 없다시피 한 아주 약한 자였다.

장미 가문에 태어났다 하여 모두가 특별한 힘을 가지는 것이 아니기에 미약하지만 힘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었으나, 부친은 이 힘이 약하다는 데에 대단한 열등감을 품고 있었다.

부친의 부친, 체이서의 조부가 대단한 힘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탓이다.

그런 조부는 푸른 장미를 손에 넣지 못해 말년에는 거의 광기에 사로잡혀 시들어가듯 죽었다.

이를 보며 부친은 어떤 희열을 느낀 듯했다.

힘이 약한 만큼 푸른 장미에 대한 집착 또한 약할 터인데도 부친은 힘이 강한 이들만큼이나 푸른 장미에 집착했다.

왜냐, 부친은 푸른 장미의 거대한 힘을 빼앗아 제 손에 두고 세상을 지배하고 싶어 했으니 말이다.

어린 체이서가 듣기에도 터무니없는 소리였으나 부친은 무려 황실과 손을 잡고 이 말도 안 되는 계획을 구체화하고 있었다.

이 계획에 푸른 장미는 더없이 중요한 ‘재료’였다.

“앞으로 네가 아낌없이 돌보도록.”

체이서는 무심히 여자아이의 이름을 흘리며 눈을 깜빡였다.

어린 여자아이를 보는 순간 몸속에서 기묘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뿐이었다.

이이 막 설 수 있을 때부터 그에게 쏟아진 폭력과 실험 때문이었다. 날 때부터 강대한 흑장미의 힘을 품고 태어난 아이.

체이서는 폭력으로 인해 감정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배우지 못했다 보아도 좋았다.

그렇기에 세상이 떠나갈 정도로 우는 여자아이를 보며, 연민도 동정도 느끼지 못했다.

***

흑장미의 힘. 매혹안.

이는 단순히 사람을 통제하고 세뇌하는 힘뿐만 아니라, 통제하는데 필요한 뛰어난 두뇌 능력이 함께 주어졌다.

나이보다 영리하고 영특한, 아니, 그 이상으로 천재적인 체이서에게 있어 흑장미의 세력 구도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부친 몰래 조금씩 그의 성장 속도에 맞춰, 세력과 장악력을 앗아오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소가주님, 그래서 이건…….”

막 그에게 충성한 이가 부친 몰래 상회 회계와 계획을 흘리고 돌아갔을 때였다.

체이서는 보좌를 자처하는 이와 함께 걷고 있었다.

“너는 갈수록 어려지는데.”

“아마 더욱 어려질 겁니다.”

흑마법사 마쉬멜은 실험을 위해 무수하게 붙잡혀 온 대상자 중 하나였다.

이 제국에서 흑마법사는 흑마법을 배운 것만으로 범죄자로 치부했기에 제국에서는 어떻게 다뤄도 좋을 죄수였다.

여기서 마쉬멜은 제 몸에 새겨진 끔찍한 저주를 들키지 않기 위해 도망치다 붙잡혀 죽을 처지에 처했고, 그 순간에 성벽을 산책하던 체이서와 만나 목숨을 구제했다.

놀랍게도 마쉬멜은 체이서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저주가 어느 정도 눌러진다는 것을 깨닫고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살기 위한 선택이기도 했다.

“언젠가 걷는 것도 어려울 만큼 어려지다가 그때 가서야 멈출 겁니다.”

“그 후로는?”

“평생 어린 채로 살아야겠지요.”

이미 마쉬멜의 몸은 올해로 갓 18살이 된 체이서보다 작았다. 얼굴은 17살이나 되었을까 싶도록 어려 보였다.

마쉬멜은 흑장미의 힘이 이 저주의 속도를 늦추고 있다는 점을 주시해, 체이서의 허락에 따라 이를 연구하고 있었다.

물론 체이서가 원할 때는 언제고 그의 능력을 사용하면서.

“실험 도중에 받게 된 저주라 했나.”

“예. 그렇지요. 정확히는 스승이 제게 맞도록 만든 겁니다.”

마쉬멜이 머물렀던 흑마법사의 탑은 불에 탔고, 뛰어났던 스승은 죽었다. 모두 폭주한 마쉬멜의 손에서였다.

마쉬멜은 이를 두고 그렇게 빨리 죽여서는 안 됐다고 중얼거리곤 했다.

체이서의 입술로 옅은 미소가 스쳤다. 누가 보아도 황홀함을 선사할 아름다운 낯이었다.

“악당이네.”

“……예. 필요에 따라서는 그렇게 되어야겠지만.”

마쉬멜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즐기거나 내키는 건 아닙니다.”

“그거 알아?”

폭력에 말없이 굴복하던 소년은 아름다운 청년으로 자라났다.

눈짓 한 번에 남녀를 불문하고 유혹할 금욕적인 외양으로도 모자라 능력조차도 사람의 생을 아무렇지 않게 주무를 수 있는 대단하고도 위험한 것을 품은 채로.

“양심을 가진 악당이야말로 가장 기만적이고, 악한 악당이란 걸.”

“어설픈 연민과 동정이 더 잔인하단 겁니까?”

“글쎄.”

체이서는 걸음을 멈췄다.

“적어도 내게 물어봐야 소용없는 일일 거야. 나는 처음부터 그런 걸 갖추지 못한 사람이니까.”

주어진 것은 폭력과 굴복, 자라나며 보아온 것은 학살과 정쟁, 그리고 고문.

이미 훌륭한 악당이었던 가문 아래서 체이서는 가문의 모든 것을 학습하고 사람을 손에 넣었다.

“다만, 사람이 무너지는 건 마지막 희망이 사라질 때니까.”

모든 것은 은밀하고 계략적이었다. 정작 당사자인 부친이 무엇을 빼앗긴 것인지 모를 정도로.

“만약 이 희망만 손에 넣고 있다면, 특별한 능력 없이도 얼마든지 사람을 통제할 수 있단 거지.”

“……누구보다 나쁜 인간처럼 들립니다만.”

“부정은 안 할 건데.”

체이서가 미소 지었다.

그 순간 체이서와 마쉬멜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한 면이 뻥 뚫린 1층 복도였다. 거대한 기둥 사이로 아름다운 정원이 보였다.

그곳에는 화사한 분홍빛 머리칼을 가진 소녀와 그 앞에서 쩔쩔매는 중년이 하나 있었다.

“흐음? 죄송하지만 후롯트 경. 저는 당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걸요.”

체이서의 귀에 소녀의 음성이 고스란히 들려왔다. 꽤 거리가 있었지만 인간 이상의 신체 능력은 두 남녀의 목소리 모두를 잡아냈다.

“아이참. 후롯트 경. 경과 내 나이 차가 24살이고. 저는 늙고 못나고 배까지 튀어나온 남자는 싫어요.”

마쉬멜이 콜록, 헛기침했다. 이쪽은 마법으로 소리를 들은 듯했다.

“저는 미남이 좋은걸요?”

소녀는 그렇게 툭 던지는 것으로 모자라 한걸음 뒤로 물렸다.

“내가 이것밖에 안 되나 싶어서, 이런 고백은 기쁘지도 않아요.”

“……!”

“분수를 알라는 말을 모르는 건 경의 탓이 아니지만. 아, 침이 튀어서요.”

소녀의 화사한 목소리로 독설이 휙휙 튀어 나가자, 결국엔 당연한 수순처럼 중년이 참지 못하고 손을 들어 올렸다.

“마쉬멜.”

체이서의 말에 마쉬멜이 빠르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소녀가 들고 있던 지팡이를 양손으로 잡아 휘둘렀다.

퍼억!

시원스러운 소리였다. 그리고 정확히 목을 후려쳤고 말이다. 중년인이 형편없는 몰골로 바닥에 쓰러졌다.

소녀가 후려친 지팡이는 놀랍게도 중년인의 것이었고, 소녀는 방심한 틈을 타 이것을 빼앗은 것이었다.

소녀가 우아하게 지팡이로 바닥을 짚은 채로 생긋 막 피어난 풀잎처럼 웃었다.

“이런. 말을 예쁘게 해준다고, 이 말을 향기로운 장미처럼 느끼면 곤란해요.”

얼떨떨해하던 중년이 일어서는 순간, 새카만 마법이 중년을 가뒀다.

소녀는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보다가 이내 고개를 휙 돌렸다. 정확히 체이서가 있는 방향이었다.

그녀는 원피스 자락을 잡고 빠른 걸음으로 이쪽으로 걸어왔다. 지팡이는 내다버린 지 오래였다.

물론 걸음 하나하나가 마치 잘 교육받은 귀족처럼 고아하기 짝이 없었다. 한 걸음도 예법에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

“안녕하세요, 오라버니.”

마침내 두 사람이 계단을 사이에 두고 마주했다.

“좋은 오후네요.”

먼저 건넨 미소에 체이서도 보일 듯 말듯한 미소로 화답했다.

“그러게, 이아나.”

놀랍게도 얼굴 생김새는 전혀 달랐지만 두 사람의 미소는 거울을 마주한 것처럼 흡사했다.

특히나 입술을 살짝 가리면서 웃는 모습이야말로 체이서와 너무나도 유사한 방식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불한당에게 위기를 겪고 있다면 달려와 주심이 마땅하다 생각하는데. 너무, 무서웠어요.”

“기사 마쉬멜 경이 멋지게 마법을 써주던데. 이쪽이 슬퍼하겠는 걸.”

“오라버니의 검이 더 기뻤을 거란 걸. 이미 아시면서.”

분홍빛 머리칼, 저 멀리서도 눈에 띌 화사한 색을 품은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가라앉히며 눈을 휘었다.

“지켜주셔야죠.”

“그랬나?”

체이서는 건조하게 미소 지었다.

“딱히 내가 나설 만큼, 위험해 보이진 않아서.”

고요하기 짝이 없는 자색 눈동자는 이미 체이서의 눈동자가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한 눈동자였다. 실제로 체이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여유로운 낯이었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마쉬멜은 일찌감치 한걸음 뒤로 물러난 뒤였다. 그런 마쉬멜을 보며 이아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상황을 유도한 보람이 없잖아요. 하마터면 검으로 찌를 뻔한걸.”

이아나 로즈 도뮬릿. 흑장미의 성 안에 감금된 푸른 장미.

“오늘도.”

10여 년이 지나 푸른 장미는 검은 꽃잎의 성에서 아주 훌륭한 악당으로서 성장했다.

“좋아해요, 오라버니.”

체이서를 열렬하게 사랑한 채로.

***

체이서는 어린 시절 그대로 성인이 되었다.

이 말인즉 그는 어린 시절과 다를 것 없이 감정을 몰랐고, 이제는 알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했다.

이미 변덕스러운 부친의 행동을 보며, 쓸모없는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다시 2년이 지나 그가 스물을 넘겼을 즈음. 성인을 넘긴 여동생이 또 한 번 사랑을 고백했을 때도 그는 그저 건조한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었다.

“사랑해.”

체이서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어째서 이 실체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비상식적인 행동을 보이는지.

무엇보다 비이성적인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이 그가 모셔야 할 왕, 푸른 장미라는 것도.

그는 성에 차지 않았다. 아니,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단 한 번도 채워진 적 없던 그의 가슴은 언제나 텅 비어 있었고, 본능적인 허무감을 불러왔다.

그는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것에 가까웠다. 이미 외양과 두뇌, 빈틈없이 갖춘 교양은 사람을 사로잡고도 남는다.

그런데 그의 능력은 더욱 손쉽게 사람을 사로잡고 통제했다. 이는 충족감은커녕 허무감을 더욱 부추길 뿐이었다.

그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자신을 학대하고 멋대로 실험체로 사용했던 부친에 대한 복수와 권력의 전복이었지만, 사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신을 알기에 움직이는 것에 가까웠다.

그런 체이서에게 여동생 ‘이아나’는 성가신 기물에 가까웠다. 그가 그리는 판에 사용할 수는 없는데, 이용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마음대로 움직여지지도 움직일 수도 없다.

부친이 가장 집중하는 존재였기에 때가 될 때까지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영리한 여동생은 이를 너무나 잘 알고 이용했다. 하기야 보고 자란 것이 체이서와 부친이었으니, 닮아버린 건 어쩔 수 없을 터다.

“왜, 내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거야?”

‘이아나’는 언제부터인가 교양 섞인 존대를 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해봐야 체이서의 시선을 끌 수 없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우린 남이잖아.”

그러나 이미 배운 것은 어디 가지 않아서, 치마를 꽈악 붙잡고 고개를 숙이는 모습은 몹시도 청초하고 우아했다. 이내 진주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는 모습마저도.

누가 이렇게 울면, 교양이 넘쳐 보일 것이라 가르친 것처럼 반듯하기만 했다.

그렇기에 체이서는 이아나가 한 여성으로서 보이기보다는 어설피 자신을 흉내 낸 존재를 보는듯한 감상에 사로잡혔다.

만약 그녀가 학생이었다면 체이서는 박수를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체이서는 눈을 굴려 아무도 없는 복도를 확인했다.

“이아나.”

“그렇게 부르지 마.”

이아나가 옷자락을 꽉 잡은 채로 한 번 더 눈물을 후두둑 떨어트렸다.

“그 정도는 다 알아. 일부러 다정한 체, 그런 목소리를 낸다는 것쯤은.”

이아나가 눈물을 닦지도 않은 얼굴을 홱 들어 올렸다.

“사실 네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다는 것도. 전부 알아.”

체이서는 조금 놀랐다. 늘 아무 생각 없이 인형처럼 생글거리는 듯하던 이아나가 자신을 꿰뚫어 보고 있으리라 생각지 못했으니까.

“그러니까 내게 일부러 그런 가식적인 표정은 보이지 말아. 그게 더 비참하니까.”

흑장미 성에서 자라난 공주님은 자존심이 강했고, 오만했으며 고고하고 도도했다. 모든 마음을 바쳐 체이서를 사랑했지만 동시에 휘어지지도 부러지지도 않는 기개를 보이곤 했다.

사실 손에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으면서.

체이서가 곧 작은 미소를 틔웠다. 곤란하다는 듯한 ‘오빠’의 얼굴을 만들어내면서.

“알잖아, 이아나. 나는 너를 여동생처럼 생각해. 아니. 아버지가 정해주신 여동생이지.”

“체이서.”

“그러니까 네 마음은 받아줄 수 없어. 미안해.”

“오빠!”

이아나는 성인이 되고서 좀처럼 체이서를 오빠로 부르는 일이 없었다.

조그맣던 시절엔 퍽 순진한 눈을 하고서 ‘오빠’ ‘오빠!’ 하고 쪼르르 쫓아다녔던 게 전혀 없던 일이 되었단 듯이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결국 감정을 추스르지 못할 때가 되고서야 체이서를 이렇게 부르곤 했다.

“내가 푸른 장미잖아……. 그래도, 그대로 안 돼?”

모든 장미는 본능적으로 푸른 장미에게 이끌린다. 이는 절대적인 사실이었다.

체이서 또한 이아나가 미약한 힘을 드러낼 때면 금방이라고 무릎 꿇어 경배하고픈 기분이 들곤 했다.

“나를 따라. 체이서 루브 도뮬릿.”

그러지 않은 것은 순전히 체이서의 능력이 매우 뛰어났을 뿐 아니라 자신을 통제하는 것에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저쪽에게 줄 감정이란 것도 그는 느끼지 못했으니까.

“네가 바라는 것이 거짓으로 점철된 것이라면야.”

체이서가 살짝 고개를 숙여 거리를 띄운 채로 작게 속삭였다.

“연기하는 것은 어렵지 않아. 알잖아?”

한 가지 첨언하자면 체이서는 나름의 이유로 이 불쌍하고 가여운 왕을 동정했다. 물론 동정하는 체하는 것에 가까웠으나, 이성적으로 이쪽도 피해자라는 데에 동의했다.

그녀 또한 자신의 의지로 이곳에 오지 않았을뿐더러 신체적인 폭력이 없었을 뿐 이 성은 어린아이가 살기엔 무척이나 가혹하고 잔인한 환경이었다.

푸른 장미가 튼튼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망가지기 딱 좋은 그런 환경.

매일매일 사람이 죽어가고, 고문에 견디지 못한 비명이 흘러나오는 곳이었으니.

체이서는 채 가려지지 않은 이아나의 어깨를 응시했다. 가녀린 피부 위로는 주사기를 마구잡이로 꽂은 듯 붉은 자욱이 역력했다.

실험의 흔적이다.

푸른 장미의 힘을 억지로 빼앗으려는 멍청하고도 비정상적인 실험.

두 사람은 참 많이도 실험실에 끌려갔더랬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 단둘이서 갇힌 적도 여럿 있었다.

<흡……. 오빠……. 오빠……. 무서워…….>

그렇기에 이아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체이서를 맹목적으로 따랐다. 마치 말라가던 싹이 마침내 빛을 보기라도 한 듯이. 이것이 사실 빛을 흉내 낸 깊고 깊은 그림자라는 것도 모른 채로 말이다.

어쨌거나 힘조차 제대로 각성하지 못한 왕은 아이러니하게도 왕답게 고고했다. 그 누구도 이런 고귀함을 가르친 적 없는데도, 은은하게 빛을 드러내곤 했다.

“……거짓은 싫어.”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인간이 체이서의 가식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로 받아들이는 중에 이아나만이 그를 꿰뚫어 보았다.

그리고 상처받을 줄 알면서도 이렇게 그의 본연의 모습을 끌어내곤 했다.

체이서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여겼다. 어느 날 이아나가 자신을 대신해 검을 맞기까지는.

이건 실수였다. 당시, 체이서는 부친이 숨긴 마지막 장부를 찾기 위해 연극을 꾸며낼 작정이었고, 이를 위해 곧 찾아올 암살자에게 일부러 맞아줄 작정이었다. 상처는 부친을 방심시키기 아주 좋은 수단이었다.

그러나 체이서는 곁에 있던, 아니 갑자기 찾아온 이아나가 눈먼 검에 뛰어들 줄은 알지 못했다. 그것도 무의식중에 푸른 장미의 힘으로 저를 밀쳐내면서까지.

“콜록, 콜록!”

암살자는 이미 처리했다. 저기 쓰러진 시체는 곧 찾아올 마쉬멜과 수하들이 치울 것이다.

“오빠…….”

문제는 체이서에겐 상처를 치유할 능력도 딱히 치유할 약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이아나가 세찬 기침을 토해냈다. 피가 기도를 막기라도 한 듯했다. 아울러 보아하니 꽤나 깊이 찔린 듯했다.

새하얀 대리석타일 틈으로 붉은 액체가 스며들었다.

체이서가 자신을 치료할 약을 들고 다니지 않는 건 어디까지나 그가 검 정도로는 쉽게 죽지 않는 몸인 탓이었다. 붉은 장미만큼은 아니어도 장미들의 몸은 튼튼했다.

그러나 여기 각성하지 못한 푸른 장미의 몸은 달랐다. 이미 실험 결과, 평범한 사람의 몸과 같다고 알려진 뒤였다.

“……바보 같지 않아?”

체이서는 이아나의 머리맡에 앉은 채로 턱을 괴었다. 방은 그가 죽인 암살자들과 이아나의 피 내음으로 가득했다.

“어차피 그 검에 찔렸어도 나는 죽지 않는단 걸 알 텐데. 너는.”

“……하아, 독이 있으면. 어떡해?”

“있어도 마찬가지지. 너나 나나 독을 맞으며 컸으니까.”

이아나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곧 우아하게 웃었다.

“그건 그러네. 근데 말이야. 이렇게 하면…… 오빠가 오늘을, 나를 기억할 거잖아?”

체이서는 이 미소가 자신과 닮았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게 사랑이야. 체이서. 어떻게든 상대의 눈에 들고 싶은 거.”

그와 그녀는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다. 시간이 흔적을 남겼다는 점도 체이서는 인정했다. 부친이 억지로 내맡긴 여동생. 그리고 푸른 장미.

어둡고 축축한 실험실에서 의지할 것은 서로의 미약한 체온밖에 없었다. 어린 푸른 장미는 끝끝내 체이서의 옷자락을 쥐고 놓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멍청한 짓을 한 걸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콜록, 흐……. 체이서 넌, 아직 어리네…….”

“내 여동생, 너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고. 곧 죽을지도 모르겠어.”

“죽게 두게?”

“마쉬멜이 한 발짝 늦으면, 그럴지도 모르지. 이렇게 쉽게 죽으면 네 목숨이 아깝지 않아?”

그리고 지금도 이아나는 함께 실험실에 갇혔던 그날처럼 체이서의 바짓자락을 붙들고 있었다. 어디에도 가지 말아달란 눈을 한 채로.

“하지만……. 오빠는, 내가 피를 흘려야 인정할 것 같더라고.”

물론 이 시선은 체이서에게 어떤 감흥도 일으키지 못했다. 그에게 그녀는 단 한 번도 여성이 된 적 없었다.

“너, 이 막돼먹은 모습, 나한테만 보이잖아.”

“그게 특별한 거라고 믿고 싶은 거야? 그런 거라면 이 모습을 본 건 마쉬멜도 있는데.”

“……못됐네. 정말.”

그러나 그럼에도 체이서는 인정하고 말았다.

“맞아. 이렇게, 비참하게라도 네 곁에 있고 싶은 거야. 오빠.”

“…….”

“사랑하니까.”

이아나가 붙든 저 손이 허무함을 헤치고 마음 터럭 하나 정도는 잡은 것 같다고.

그러나 이는 이아나가 말하는 것같이 말랑하고 부드러운 것 따위는 아니었다.

오히려 보통 사람이 버려진 강아지를 보는 듯한 연민에 가까웠다.

“그게 사랑이라면 평생 안 하는 게 낫겠네.”

체이서는 느슨하게 고개를 기댄 채 피식 웃었다. 딱히 아무것도 가지고 싶지 않은 남자의 미소였다.

“비효율적이야. 이아나.”

체이서는 인정하기로 했다. 10여 년이 넘도록 저를 쫓아다닌 소녀가 결국은 자신과 똑 닮아버렸다는 것을.

“뭐, 그래. 그대로 내 여동생 해. 이아나.”

“……오빠?”

“대신 거기까지야.”

사랑하고 사랑하다 결국은 그림자처럼 흉내 내고 만 비참함을 그가 이해할 날이 오진 않겠지만. 인정은 하기로 했다.

“내가 널 사랑하는 날은 오지 않을 거야. 평생.”

그가 누군가를 제 선으로 받아들인 날이자, 가족이란 이름으로 받아들인 날이었다. 물론 당시의 체이서는 이것이 어떤 이름인지 알지 못했지만.

어쨌거나, 그는 여동생 이후로는 누구든 진심을 내보일 일이 없으리라 믿었고, 그렇기에 이별의 순간은 몹시도 크게 다가왔다.

솨아아아.

비가 거세게 쏟아지는 날이었다.

회색 구름이 멋대로 뭉친 하늘, 어쩌면 폭풍이 몰려올지 모를 거센 바람마저 몰아치고 있었다.

체이서는 눈앞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치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차차 체이서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윽고 흘러나온 목소리는 잔뜩 쉬어 탁하기 그지없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대답을 해줄 이는 그저 웃음만을 보였다. 끔찍하리만치 저를 닮은 미소였다.

“보다시피.”

체이서의 눈앞에는 이아나가 부서진 돌벽에 기대어 있었다. 그리고 가녀린 어깨너머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본디 거대한 저택, 철옹성 같은 도뮬릿 저택이 있어야 했다. 체이서, 그가 잠시 외부로 나간 사이 저택은 이 세상에서 처참하게 사라졌다. 바로 눈앞의 푸른 장미가 힘을 개화하면서.

그러나 체이서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눈앞의 이아나는 죽어가고 있다는 걸.

그 사이 비틀비틀 걸어온 이아나가 마침내 체이서 앞에 도달해 그대로 쓰러졌다. 체이서는 한쪽 무릎을 접어 그녀를 안듯이 편히 눕혀주었다.

“……하아, 아버지가 널 죽이려 했어.”

이아나가 힘겹게 말을 털어놓았다. 부친은 체이서가 잠시 외출한 틈을 타 그를 죽이려 하는 준비를 끝냈다.

“아버지가 푸른 장미의 티아라를 손에 넣고……. 그 힘으로 널…….”

부친은 약하긴 하나 흑장미였고, 힘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누구보다 흑장미에 대해 잘 알았다. 그러니 흑장미를 죽이는 방법 또한 알고 있었다. 부친은 그렇게 조부를 죽였을 테니까.

“알고 있어.”

이렇게 말하는 체이서의 몸은 피투성이였다. 외출을 나간 체이서에게도 대대적인 기습이 있었던 탓이다. 아마 부친은 그의 힘을 빼놓으려 했을 것이다.

그리고 명령을 내린 부친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죽었을 테니까.

“곧, 쿨럭. 황제의…… 군대가…… 몰려올 거야.”

“……그래?”

“미안. 내가 모두 죽여버렸어…….”

이아나는 그저 부친을 죽이고 싶었을 터다. 그러나 폭주한 힘은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을 무로 돌렸다.

도뮬릿 저택이 사라졌다는 건, 곧 체이서 또한 근거지를 잃었단 소리였다. 체이서는 도리어 마음이 편해졌다. 이제는 더는 무엇을 해야 한다는 감각에 사로잡히지 않아도 되니까.

“앞이, 안 보여……. 오빠, 거기 있지?”

“보다시피.”

“……쿨럭, 안 보인데도…….”

이아나가 기침을 하며 살짝 웃었다.

“피 냄새가 너무 독하네.”

이 순간 체이서는 이아나에게 말하지 않은 사실이 있었다. 그의 부친은 최후의 수를 염두에 두었고, 마지막 습격 속에 유효한 타격을 먹였다.

체이서는 흘끗 피가 줄줄 새어 나오는 제 옆구리를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부친은 실험 끝에 잠시지만 장미의 몸을 일반인의 것과 같이 만드는 약을 만들어냈다. 체이서의 현재 몸은 일반인과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그를 치료해줄 수하들은 습격 속에 죽고 말았다.

멀리 나간 이들이 돌아오기까지는 한참이 걸린다. 그러니 그의 몸이 원래대로 돌아오기 전에 과다출혈로 먼저 죽을 것이다.

물론 지금 찾아올 황제의 군대를 상대할 힘도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 이아나가 그의 손을 잡았다.

“넌 죽지 마.”

“…….”

“하아, 오빠 목숨은…… 내가 살렸으니까, 오빠는 내 거야.”

제 여동생은 그를 닮다 못해 흑장미라면 본능적으로 갖게 되는 ‘집착’마저도 닮아버렸다.

물론 체이서는 이런 본능을 제대로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닮은 것을 보며 어쩌면 핏줄보다 연이 더 강한가 하는, 저답지 않은 감상적인 생각을 했다.

“대답해.”

체이서는 또 한 번 제 상처를 흘끗 보았다가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다 그녀가 앞이 보이지 않는단 사실을 떠올렸다.

“……그래.”

이아나는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하, 하하……. 죽어서 가지면 뭐해?”

솨아아아.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창백해진 여동생의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난 죽을 건데.”

피와 섞인 붉은 물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체이서, 이 순간에야 알 것 같아. 이렇게…… 각성하면 안 됐어. 콜록. 이대론 돌아가도…….”

이아나는 들리지 않을 말을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이대로는 돌아가봐야 자신의 몸이 성치 않을 거라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체이서.”

힘을 잃어가던 눈동자가 체이서를 응시했다. 앞이 보이지 않았으니, 정면을 본 것에 가까웠다.

“……다음 생에 날 만나면 오빠는 내 거야.”

지독한 집착이 어린 음성이었다. 오만하고도 표독스러운 그 음성을 듣던 체이서가 천천히 고개를 세로로 움직였다.

“그래.”

끝내 체이서는 ‘이아나’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죽어가는 그녀를 위해 거짓을 말했다.

“널 다시 만나면 사랑할게.”

“……거짓말!”

“약속할게.”

체이서는 살면서 단 한 번도 하지 못했던 사과를 처음으로 건네보았다. 끝까지 너를 사랑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너, 쿨럭. 날 기만하지 마.”

“…….”

“꼴도 보기 싫어. 미워. 밉다고…….”

“그래.”

“너 따위 다신 보지 않을 거야! 용서 안 해!”

그가 생애 처음으로 느낀 감정은 기쁨도 슬픔도 아니었다. ‘연민’이었다.

“……이아나…….”

악을 쓰던 여동생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체이서는 그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내 동생.”

그는 자신이 평생 감정 따위 모르리라 생각했다. 처음부터 이걸 배우지 못하게 태어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였다. 그러나 죽어가는 유일한 가족을 보니, 그것도 아니었구나. 깨달음을 얻었다.

너무나도 늦은, 깨달음이었다.

“……사랑할게.”

체이서는 의미 없는 거짓을 중얼거렸다.

“널 다시 만나면 거짓말하지 않을 테니까.”

그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가식적일지언정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내며.

“……아프지 마.”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다음 생 따위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빗속에서 웃었다. 참담한 웃음이었다.

살아.

여동생은 끝끝내 이기적인 소원을 빈 채로 그대로 눈을 감았다. 체이서는 이대로 끝이라 생각했다.

마지막 순간 눈부신 푸른 빛이 쏟아지며, 그는 원하지도 않던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지기 전까지는.

“하, 하하…….”

눈을 떴을 때, 시간이 돌아가 있었다.

그리고…….

이아나는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하하하하. 하…….”

체이서는 깨달았다. 자신이 이 세상을 떠받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이게 네 선물이니? 내 동생.”

그리고 앞으로 천천히 죽어가리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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