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색색.
쥐 죽은 듯이 고요한 공터에 작은 숨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보통 사람에게는 귀 기울여도 들리지 않을 작은 소리였지만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 두 존재에게는 귀 바로 옆에서 들리듯 선명하게 들린다. 세상 그 어떤 소리보다 거대한 존재감을 가진 소리였다.
“……잠든 건가.”
체이서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는 조금 전까지 언제 비틀거렸냐는 듯 자세를 바로 했다.
쉬지 않고 이어지는 암투, 암살 시도. 수없이 많은 부상을 겪어온 그로서는 이 정도 부상은 심각한 축에도 들지 않았다.
체이서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달빛이 선연하게 내리쬐는 아래 둥근 곡선을 그린 등이 보였다.
그와 마찬가지로 너덜너덜한 옷을 걸친 리케도르안이었다.
체이서는 부둥켜안은 두 사람의 모습을 보았다.
안았다라.
표현은 그리했으나 저 모습은 숫제 한쪽이 잡아먹힌 것처럼 보였다. 저 커다란 몸에 갇혀 제 왕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체이서가 고개를 들었듯 저쪽에서도 고개를 들어 올렸다.
짐승같이 사나운 두 시선이 허공에 교차했다.
두 남자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누구도 입술을 떼지 않았다.
우습게도 두 남자의 의지는 일치했다. 자그만 소리에, 곤히 잠든 이아나가 깨서는 안 될 일이니.
체이서의 낯이 막 식사를 끝낸 맹수의 것처럼 나른했다면, 반면 리케도르안은 며칠 굶주린 아귀같이 맹렬하고도 사나웠다.
두 남자의 관계는 언제나 이와 같았다. 증오하지 않고서는 결코 지나갈 수 없는, 뿌리박힌 원한이 서로에게 자리한 사이.
하나 이제 리케도르안에게는 더는 아버지로 인한 원한 따위는 상관없었다.
이아나가 곁에 있었다. 그 외에 무엇이 필요한가?
삶이 가득 채워져 완전해진 지금에야 그런 원한 따위야 아무래도 좋았다.
리케도르안의 입술이 천천히 떨어졌다. 잡아먹을 듯 사납게 노려보는 시선은 여전했으나 푸른 눈으로 침착하고 서리 같은 서늘함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수장의 직위에 올라 오직 본신의 힘으로 군림한 자.
진창을 제 발로 나온 이답게 세상 누구보다 냉정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아나에게만은 드러내지 않는 모습. 대공으로서의 리케도르안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꺼져.’
리케도르안의 입 모양에 체이서는 픽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우습지도 않았다.
‘싫은데?’
하지만 인사를 받았으니, 정중한 답변을 돌려주었다.
이제 그들은 더는 대공도 공작도 아니었다. 아니. 더욱더 고귀한 자리가 주어진다 한들 시선조차 주지 않겠지.
그들은 이제 하나의 왕을 두고 오랜 싸움을 치를 꽃들일 뿐.
체이서는 이 가련한 신세가 몹시도 마음에 들었다.
세상에 꽃과 왕뿐이란 소리 아닌가. 이제 기나긴 삶을 살 이아나의 삶 속엔 이 꽃이 뿌리 깊게 박혀 결코 뽑아낼 수 없었다.
이 울타리 속의 꽃, 그 꽃 중 하나의 이름이 검은 장미임에야 어찌 황홀하지 않을 수 있을까.
비록 그의 자리가 울타리 가장자리. 가장 볼품없는 자리더라도 그는 상관없었다.
발을 들인 이상.
들어갈 일만 남았으니. 안쪽으로. 더 안쪽으로.
저쪽의 붉은 짐승은 이를 경계하는 것일 터였다. 가장 빛나는 자리를 차지한 채로.
체이서의 눈이 어둡게 빛났다.
그는 천천히 머리를 들며, 고개를 느슨하게 기울였다. 이어서 엄지로 덜 마른 피를 쭉 닦아 내렸다.
“나도 피 나는데. 닦아주지.”
그랬어, 나의 왕?
대답 없이 곤히 잠든 왕을 바라보며 체이서가 만족스럽게 미소했다.
깨어있다 한들 들어주지 않을 청임을 잘 알고 있었다. 질린다는 표정을 지을 모습도.
하지만 그럼 어떠한가?
사랑의 반의어가 무관심이었다는, 잔인한 문장을 되새기는 지난 6년보다야 나았다. 무표정하게 나가는 것보다 무엇이든 지어주는 쪽이 좋았다.
앞으로 평생 이 끔찍한 갈증에 시달리겠지만 그는 그럼에도 좋았다.
숨죽여 사는 것이라 해도 왕의 곁이라면 얼마든지 감내하리라.
“아아. 측실은 성향에 맞지 않는데.”
체이서의 권태롭게 중얼거렸다. 누군가에게 속삭이듯이.
“그래도 뭐. 한번 해볼까?”
목표가 선명하다면, 그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 온몸으로 멸망도 버텨보지 않았던가?
“정실 목표로?”
이 순간 왕은 잠들었으니. 이 말을 들을 이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체이서는 사납게 내리꽂히는 시선을 무시하며 그윽하게 웃었다.
“덕분에 예쁨 좀 받아보겠어?”
곧이어 곤히 잠든 이아나, 왕을 바라보는 붉은 눈이 차차 가라앉다가, 이내 시간에 잠식되었다.
***
눈을 다시 떴을 때 익숙한 천장 아래였다. 하늘을 보니 새파란 아침이었다.
밤 동안 푹 잠들었다가 일어난 건가?
몸을 일으키니 무척이나 가벼웠다. 물론 허기가 지긴 했지만. 막 우르슬을 송환하고 나서 거짓말같이 피로하고 졸렸는데, 자는 동안 몸이 회복된 모양이었다.
그대로 이불을 걷고 일어나, 거실로 향했다. 나의 대가는 이쪽 세상에서 수명을 다할 때까지 살아 있는 건, 존재 그 자체였기에 생활 전반적인 건 모두 준비된 상태로 받았다.
둘이 살기에 좁지도 넓지도 않은 집. 리케도르안은 아주 거대한 성에 살았던 사람이었으나 손쉽게 적응했다. 오히려 감방보다는 넓은 곳이라 맑게 말을 하기도 하면서.
어쨌거나 두 사람이서 사는 데다가 푸딩이 같은 애완동물(?)을 키우기에도 부족함 없는 집이었다.
……하지만 셋이나 되면 조금 비좁게 느껴지는구나.
나는 거실로 나가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눈을 크게 깜빡였다.
눈앞에는 말도 안 되는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두 장미가 나란히 소파에 앉은 채 잠들어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 나란히는 아니었다. 꽤 길쭉한 소파에 각기 끝단을 차지한 채 잠들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각각이 워낙 체구가 있는 탓에 소파를 거의 다 차지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거기다 길쭉한 두 쌍의 다리는 아무렇지 않게 쭉 뻗어 길이와 태를 자랑했다.
나는 침착하게 생각해보려 했다. 일단 내가 잠에 빠졌으니 집으로 옮겨왔을 거고, 체이서는 돌아가지 못했을 거다.
체이서를 돌려보내고 그곳에 묶어두는 건 내 힘이 필요하니까. 그래서 우리 집에 같이 왔고……. 우리 집 소파에 나란히 잠이 들었다?
아무리 봐도, 중간 과정이 많이 생략된 것 같은데.
그보다 체이서는 왜 이러고 있는 걸까. 나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체이서를 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체이서의 몸은 붉은 힘으로 꽁꽁 묶여 있었다. 저 힘이 누구의 힘이냐는 안 봐도 자명했다. 리케도르안의 힘일 테니까.
“구경, 다 했어?”
어젯밤에 들었던 것과 똑같은 말이 들려왔다. 시선을 들면 체이서가 어느새 눈을 뜬 채 싱긋 웃어 보였다.
리케도르안 쪽을 보면 곤히 잠들어 있었다. 이상하게 새하얀 얼굴이 묘하게 피곤해 보이는 낯이었다.
“저쪽은 잠깐은 못 일어날 거야. 힘을 필요 이상으로 썼거든.”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설명이 필요하단 말을 한마디로 압축해서 물었다. 그러나 체이서는 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리고 이어서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이아나, 너 나흘 동안 깨어나지 못했어.”
“쓸데없는 말 말고, 내가 나흘……. 뭐?”
“이제 막 처음으로 눈을 뜬 거야.”
질문에 대답이란 하란 말을 꺼내지 못했다. 나는 그대로 입을 달싹였다. 반나절 만에 깨어난 기분이었다.
그런데 나흘이나 잠들어 있었다고?
“역시 몰랐구나.”
체이서는 불편한 몸을 움직여 팔걸이에 팔을 올려뒀다. 깊고 깊은 붉은색 눈동자가 하염없이 나를 푹 담았다.
그가 이어 깊은 한숨을 쉬었다.
“걱정했어.”
나지막하게 흘러나온 진심에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남자인 걸 알지만 진실인 줄 알면서도 굳이 믿고 싶지 않은 말도 있는 법이다.
체이서도 내 표정을 모르지 않을 터였다. 체이서가 날숨을 뱉듯 한마디를 더 붙였다.
“저쪽도.”
널 걱정했겠지. 저쪽이란 당연하게도 리케도르안이었다. 그 말에 내 표정이 묘하게 누그러진다.
반면에 날 바라보는 체이서의 표정은 살짝 굳었다. 그러나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재빠르게 그 표정을 지웠다.
“네 말은, 르안이 피로한 얼굴로 잠든 것과 관련 있는 거야?”
“르안? 아……. 저쪽.”
체이서는 잠시 쓴 차를 마신 듯한 얼굴을 했다가, 끄덕였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그렇지.”
체이서는 소파 턱걸이에 얹은 팔에 턱을 괴려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팔걸이가 그의 키에 너무 낮았던 모양이다.
가끔 르안도 저러다가 아차 싶은 얼굴을 했기에 잘 알았다. 체이서는 턱을 괴길 말끔히 포기하고, 입을 열었다.
이어서 폭탄을 던졌다.
“네 식대로 표현하자면 10번째 영혼? 나와 저쪽이 그 영혼을 봉인했어.”
“뭐?”
“정확히는 제압.”
“아니!”
큰 목소리를 내려다 말고 곤히 잠든 르안을 보고는 황급히 목소리를 낮췄다.
“잠든 남자 앞에서 목소리를 낮춘다라, 우리 흡사, 밀회 중인 연인 같은데?”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설명해. 잇새로 소리를 냈더니, 체이서가 낮게 웃었다.
이어진 그의 설명이란 이러했다. 내가 잠들고 다음 날 집으로 신의 쪽지가 도착했다고 한다.
신의 쪽지는 여느 때와 다른 다급함을 이야기했고, 내용대로라면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르안은 그대로 나를 기다리려 했지만 이틀이 지나도 내가 깨어나지 못하자 그 영혼을 직접 잡으러 갔다.
체이서와 함께.
미리 제압해두고 내가 깨어나면 바로 문을 열어 송환만 시킬 수 있게 말이다.
체이서의 설명 속에는 무수한 생략이 함께 존재했다. 리케도르안과 ‘함께’ 잡으러 갔다는 것만 봐도 어쩌다, 어떻게 신의 부탁을 알게 되고 함께 갔다는 것인지 말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거기까지 캐묻는 대신에 머리를 쓸어 올렸다.
“어쨌거나 결과가 지금 이 모습이란 거지?”
체이서가 정답이라는 듯 여유롭게 웃었다. 물론 묶인 꼴로 저렇게 웃어봐야 우스워 보이기만 했지만.
“근데 왜 넌 그렇게 묶여 있는 건데?”
“아, 밤에 잘 곳이 없으니까. 잠든 왕 옆에서 자겠다고 했더니. 묶어버리던데?”
“묶일 만했네. 르안이 갔다 버리지 않길 잘한 일이야.”
“너무해.”
체이서가 뺨에 손을 얹고는 일부러 다정하게 말하듯 한마디를 붙였지만 나는 무시했다.
“푸른 장미의 수호신까지 기겁을 한 바람에 실현을 못했을 뿐이지만. 무척 바라는 일이었어.”
나는 팔짱을 끼고 혀를 차다 말고 다시 그를 응시했다.
“네가 편히 잠드는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 내게 평화를 주곤 했으니까.”
붉은 눈은 과거를 더듬는 듯한 시선이었다. 저렇게 말하는 시기란 아마도 그와 둘이서 도뮬릿에 살던 시기일 거다.
나는 못 들은 척 귀를 한번 후비고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나저나 제압, 이라고 해야 하나 영혼을 묶어두는 게 가능했어?”
“네가 깨어날 때까지 매일같이 결계를 유지하고, 저쪽이 영혼이 힘을 되찾는 족족 소모시켰지.”
체이서가 결계와 묶어두고 유지하는 일을, 리케도르안이 전투로 힘을 빼놓았다는 것 같은데.
여기서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은……. 나는 설마 하는 생각과 함께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사실 두 사람, 힘의 상성이…….”
“아주 잘 맞아.”
오래전 푸딩이와 휘슬을 봉인한 것만 봐도 그는 결계에도 능했다.
“우리의 기원은 너를 보조하던 존재였으니, 장미끼리 맞지 않을 수가 있겠어?”
체이서가 장난치듯 한마디를 붙였다.
“한때는 그저 수족이었던 존재가 감정을 얻으면서 욕심마저 갖게 된 거니까. 너를 곁에 두고 싶어서.”
나는 그대로 돌아섰다.
그러고는 리케도르안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곤히 잠든 내 반려는 불편한 자세로 푹 잠들어있었다. 감각이 예민한 남자였다.
이렇게 깊게 잠들기까지 얼마나 피곤한 일을 겪은 것인지.
영혼들은 뒷 순번이 될수록 조금씩 더 강해졌다. 우르슬이 아홉 번째였으니……. 열 번째 영혼은 그녀보다 더 성가신 영혼이었을 게 분명했다.
신이 다급하게 호출한 이유도 있었을 거고.
‘분명 쉽지 않았겠지. 르안에게.’
그리고 함께한 저 남자에게도.
리케도르안의 머리를 가만히 쓸어주자, 그의 미간이 설핏 찡그려지더니 곧 내 뺨을 찾아 마구 비볐다.
잠든 와중에도 내 손을 따라 움직이는 모습이 참 애틋하고 사랑스러웠다.
“……사람이 변할 수 있다 생각해?”
르안이 잠들어 있으니, 르안에게 하는 질문은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보지도 않고 던진 질문에, 뒤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글쎄, 하고.
“변할 수 있지 않을까?”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깊고 붉은 눈이 나를 집요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변하지 않을 수도 있고.”
그의 눈동자 속에는 나른함과 초조함. 공존할 수 없는 두 감정이 교차하듯 흘러갔다.
어쩌면 평생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을 것 같던 두 사람이 함께 행한 업적이라. 이 결과는 내게 참 묘한 감정을 가져다주었다.
“고마워.”
나는 여전히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남자가 멈칫했음을 알 수 있었다.
한순간이지만 숨소리가 뚝 끊어졌으니까.
“……이런. 칭찬은 그게 다야?”
이윽고 흘러나온 체이서의 목소리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기왕이면 손도 잡아주고, 머리도 쓰다듬어주면 좋겠는데.”
나 아파.
일부러 어리광을 부리는 듯한 낮은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숙이며 피식 웃었다.
내게서 매끄럽지만 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갔다.
“그건 십 년은 일러.”
시간이란 알 수 없는 마법과 같았다. 길다면 긴, 혹은 짧다면 짧은 이곳에서 보낸 시간 동안 체이서와 마주한 시간은 너무나도 적었다.
당연하겠지만 용서한 것은 아니다. 쉽게 용서할 수 없고 쉬이 잊어서도 안 될 일이었다.
적어도 저 남자의 손에서 손쉽게 사라졌던 사람의 목숨들을 생각한다면.
나는 눈을 깔았다가 천천히 들어 올렸다.
살아서 죗값을 치러야 한다. 이 생각은 변함없다.
하지만 6년이란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는, 아니. 일부 이해하게 되었다고 할지. 앞으로 기나긴 세월을 살아가는 동안에 이 남자도 함께할 것이란 걸 말이다.
본래라면 르안이 저 남자와 협력하는 것은 죽어도 아니 될 말이었다. 그러나 다른 세계여서일까. 새 세계. 새로운 생활. 이것이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어쩔 수 없이 위급하였다고는 해도, 한번 경험한 것은 절대로 어디 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리케도르안의 허벅지 옆에 팔을 기댔다. 그러고는 고개만 슬쩍 옆으로 돌렸다. 시선 끝에 체이서가 대롱 매달렸다.
“노력해봐.”
내게서 느릿하고도 심드렁하게 말이 빠져나갔다.
나는 아마 저 남자가 치를 죗값의 시간 동안에 함께하겠지.
“나는 당신이 어떻게 하면 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미 알려줬어.”
저쪽 세계로 돌아간 남자는 무수히 많은 사람을 살려야 할 것이다.
오랫동안 타인을 도구 삼아 쉽사리 희생시켜온 남자였다. 값을 치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고, 쉬워서도 안 된다.
“난 사실 불가능할 거라고도 생각해.”
이미 굳혀진 삶의 방식을 뒤집는 것.
그것이 좁혀질 때까지 이 거리는 평생 가까워지지 않을 것이란 걸.
내가 하는 말들은 이 남자가 거짓말처럼 모두 알아차리고 새기고 있을 것이다.
“수십 년을 노력하면 가능할지 어떻게 알겠어?”
장난인 듯 아닌 듯 흘러가는 목소리는 언젠가 도뮬릿에서 그가 하던 식과 흡사했다.
체이서는 한 방 맞았다는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고는 제 얼굴을 붙잡고 한참을 어깨를 떨며 웃었다.
그것이 웃음이었는지, 흐느낌이었는지. 나는 알고자 하지 않았다.
그의 떨림은 계속되었다. 이윽고 리케도르안이 눈을 뜰 때까지.
“로즈?”
나는 아침을 맞이한 나의 장미의 이마에 입을 맞춰주었다.
“네. 좋은 아침이에요.”
세상이 끝나도 오지 않을 것 같은 앙상블을 본 것 같은 아침.
나는 르안을 향해서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다정하게 웃었다.
나의 웃음에 내 꽃이 청초하게 피어난다.
“아프진 않아요?”
“네, 아프지 않아요.”
이곳에 있는 두 사람과 저쪽 세계에 핀, 두 장미까지. 나를 위해 불구덩이로 뛰어들 사람들. 나의 꽃들.
모두 나를 위해서 무엇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는 존재들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 무게를 죽기 전까지 짊어지겠지.
난 르안을 바라보며 행복한 듯이 웃었다.
내 가장 예쁜 장미.
이대로 평생 꽃을 가꾸는 정원사로 살겠지만 그럼에도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장미는 당신일 테죠.
속으로 나지막한 고백을 건네면서.
***
그로부터 1여 년이 지난 뒤.
초봄이 빠르게 찾아온 어느 날. 시간은 새파란 하늘로 뭉게구름이 퐁퐁 띄워진 한낮이었다.
길을 걸으면, 나무로 꽃이 슬금슬금 피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일주일이나 이주쯤 지나면 만개할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 꽃을 피우는 것도 가능하다고?”
휘슬이 내 안에서 진한 울림을 토해냈다.
“허어, 별게 다 가능하네.”
나는 내 손과 나무를 번갈아 보며 눈을 깜빡였다.
내가 서 있는 곳은 버려진 공원이었다. 평소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곳이었다.
하지만 단 한 시기만은 달랐는데, 바로 벚꽃이 피는 봄이었다.
이곳엔 벚나무도 꽤 많아서 이것이 피어날 즈음에는 사람이 와르르 몰리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개화 시기가 아니었기에 공원은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거기다 근처에 공사를 하다 만 건물들 덕에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나는 풍경에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들었다.
“좋아, 그럼 제대로 해볼까.”
사람들이 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아마 체이서가 입구에서 결계를 펼치고 있을 테니까.
리케도르안 또한 내가 힘을 쓰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멀리 떨어진 상태였다.
나는 그대로 손을 들어 올렸다. 손을 오므렸을 때 내 손엔 긴 왕홀이 들려 있었다.
나는 이것을 망설임 없이 바닥에 꽂았다.
퍽!
이윽고 바닥에서 거대한 푸르른 기운이 아낌없이 치솟았다.
막, 신이 내린 세 번째 부탁을 한창 실행 중이었다. 그러던 중 차원 간의 결합이 맞아떨어져, 프란시아와 르나그의 얼굴을 볼 수 있도록 허락이 떨어진 참이었다.
물론 나는 하던 일 모두 제쳐놓고 달려갔다.
내 장미들을 맞이하려면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공간에서 맞이하고 싶었다. 무로 7년 만의 재회였으니까.
예쁘고 화사한 봄 아래서 맞이하고 싶었다.
내 기대처럼 주변으로 몽실몽실한 분홍빛 꽃이 피었다. 현재는 새까만 색이지만, 저쪽 세계에서의 내 머리색처럼 연한 분홍빛 꽃들이 만개하였을 때,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문 너머로 반가운 손이 보였다.
“음, 뭐야. 보지도 않고 주는 거야?”
나는 나를 향해 굳은 반가운 얼굴을 하염없이 응시했다.
“이번엔 직접 편지를 받으러 왔는데.”
시간이 꽤나 흐른 듯 두 사람에게는 전에는 보이지 않던 시간의 성숙함이 보였다. 그럼에도 내가 알던 두 사람이었다.
미안해.
나는 양손을 펼쳤다.
“너무 오래 걸렸지?”
이윽고 내게 달려온 프란시아가 와락 안긴 채로 엉엉 울었다. 그녀는 처음 만난 날에도 토하지 못했던 울음을 아이처럼 마구 흘렸다.
“흐어엉! 언니. 언니이!”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프란시아를 한참 달래다가. 겨우 고요한 남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다정하게 미소한다.
그리고 눈앞, 차마 다가오지 못한 채 눈시울을 붉힌 르나그와도 재회의 인사를 나눴다.
“르나그.”
이 이름을 다시 부르기까지 얼마나 걸렸던가. 그와는 긴 인사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가 먼저 참지 못하고 나를 품 안에 가뒀으니까. 쉽사리 지칠 몸이 아닐 텐데도 그는 오랫동안 달린 사람처럼 숨이 거칠고 말을 잇지 못한 채 헐떡였다.
나는 언제고 부드럽고 차분했던 남자의 혼란을 이해했다. 나를 가둔 채로 어찌할 줄 모르는 손이 조심스럽게 닿는다.
“……나의 왕.”
나는 점차 뜨거워지는 몸을 가만히 토닥여 주었다.
“이정표는 여전히 제 자리에 있었네요.”
내 한마디에 르나그가 끝끝내 참던 눈물을 흘렸다.
“……예.”
그가 내 어깨 기댄 채로 내 옷자락을 적셨다. 가지런히 묶인 긴 머리카락이 떨어져 흔들린다.
“당연한 일이니까요.”
모두가 모인 봄의 풍경 아래, 이제야 완성된 퍼즐을 보는 것 같이 비어 있던 가슴이 가득 채워진 기분이 들었다.
“프란시아, 르나그.”
나는 오랜 시간 기다렸던 말을 토해냈다.
“우리 집에 갈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