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가려는 건가?
그것만은 안됐다. 나는 급히 발을 굴러 결계를 펼쳤다.
“도망 못 가.”
누가 그렇게 둘 줄 알고. 새파란 반원의 구가 커다란 공간 곳곳에 펼쳐졌다.
“으음, 그렇겠네요.”
이제 그녀는 말투조차 숨기지 않았다. 리케도르안의 얼굴로 빙긋 미소했다.
“하지만 어쩌죠? 처음부터 도망갈 생각은 없었는데.”
동시에 리케도르안의 신형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쾅!
그의 검이 눈앞에서 나타났다. 다행스럽게도 빠르게 펼쳐진 푸른 기운과 맞붙어 떨어졌지만.
나는 그녀의 손에 쥐어진 붉은 검을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검까지 쓸 수 있는 건가?’
아니나 다를까 머릿속으로 푸딩의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어, 어찌된 거냐 냥! 붉은 장미가 이상하다!
‘푸딩, 계속 르안에게 말 걸어 봐. 티는 내지 말고. 그리고 저 여자의 몸도 좀 제압해보고.’
-많다!
‘그래도 해.’
푸딩은 투덜거렸지만 이것이 투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서로 알고 있었다.
그사이에 우르슬은 리케도르안의 팔로 검을 붕붕 흔들었다.
“오호, 살아 있는 검인가요? 대단한 무기네요.”
그녀는 나를 보며 눈을 휙 접었다.
“그리고 당신의 무기도 대단해 보이고요.”
어느새 내 손엔 긴 왕홀이 들려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꺼내는 무기였다.
왕홀에 깃든 휘슬이 긴 울음소리를 토했다. 그 어느 때보다 사납고 거대하며 웅장한 울음소리였다.
그래, 그래. 휘슬아. 너도 빡치지? 나도 그래.
평소 르안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휘슬도 상당히 분노한 듯했다.
곧 우르슬의 손에서 녹색의 넝쿨 같은 마력이 쏟아졌다. 색을 보아서는 그녀의 본래 힘인 것 같았다.
그것이 리케도르안의 손과 검을 꽁꽁 묶었다. 저 넝쿨 같은 것을 자르지 않고는 풀지 못하게끔.
“무기가 아무래도 절로 도망을 가려 하는 것 같아서.”
그녀는 짧게 설명하고는 움직였다.
그녀의 검과 내가 펼친 보호막이 부딪쳤다. 몸 주변으로 펼친 힘은 굳건했으나 한편으로는 느낄 수 있었다.
이거 완전 르안의 힘이랑 저쪽의 힘이랑 합쳐진 꼴이잖아?
무기를 쓰는 모습을 보아서는 저쪽도 전방위 전투형 같은데.
이래서야 포지션 상 내게 불리했다.
곧 푸르른 기운이 그녀를 튕겨냈다. 리케도르안의 몸을 한 영혼은 아무렇지 않게 자리를 잡았지만.
곧 거센 공방이 이어졌다.
리케도르안을 막는 한편 문을 열어보려 시도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저쪽이 너무 빠른 데다 내가 다른 행동을 취할라 치면 거짓말처럼 나를 공격했다.
혹은 밖으로 나가려 결계를 두드리거나.
쾅!
지축을 흔드는 굉음과 함께 땅이 마구 진동했다. 떼어낸 발아래로 후드득 흙과 돌이 떨어진다.
마치 거미줄 형태처럼 균열이 간 대지는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하아, 하아.”
나는 좀처럼 내쉰 적 없던 거친 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조금 전 내가 있던 자리로 거대한 검이 꽂혀 있었다.
아마 움직이는 것이 조금만 더 늦었어도 저 날카로운 대검에 베였을 것이다.
-이, 인간. 어떻게 좀 해보라, 냥! 이러면…….
푸딩이의 안타까운 울음소리가 마구 머릿속을 울렸다. 대답해주고 싶은데 그럴 겨를이 없었다.
검이 다시 내게로 날아왔으니까.
‘장난 아니네. 정말.’
저 검이라도 떨어트려 놓으면 좋을 텐데. 장미 줄기로 손과 꽁꽁 묶어둔 검을 떨어트리기란 요원해 보였다.
마침내 검을 다시 들어 올린 르안이 고개를 느슨하게 기울이며 나를 바라봤다.
달빛이 선명한 아래 내게 검을 겨눈 이는 아름답게 미소 지었다.
그의 눈은 완전히 맛이 가 있었지만.
“르안.”
내 부름에 리케도르안의 몸을 가진 영혼의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검을 휘두르는 것과 함께.
나는 검을 피하며 생각했다.
……이걸 어떻게 제정신으로 되돌리지?
머릿속으론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나 되짚어보면서.
하지만 곧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해서는 답이 없다.
리케도르안 하나만을 벅찬데, 그와 비견될 만한 강자의 힘까지 합쳐졌다.
물론 아직까지 힘의 총량은 내 쪽이 우세하다는 걸 느낀다.
중요한 건 이 힘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다.
평생 검을 잡아 온 저쪽들과 다르게 10년이 채 안 되는 나는 전투에 한에서는 미숙했다.
말도 안 되는 힘 덕에 이렇게 버티고는 있지만. 이대로는 지지부진한 소모전일 뿐이다.
저쪽이 지칠 때까지 기다릴까 생각했지만, 저쪽도 바보는 아니었다.
리케도르안의 몸으로 자해라도 벌이면 곤란했다.
‘제압할 누군가가 필요해.’
거기다 나는 리케도르안이 다칠까 봐 마음껏 힘을 쓰지 못하는 상태.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푹, 날숨을 내쉬었다.
……방법이 없잖아.
나는 고개를 휙 들어 올렸다.
“이봐요, 하나만 묻자. 당신 목적이 뭐야?”
이곳에서 살아가고 싶다고 했다. 남의 몸으로.
“나를 죽이고 싶은 거야?”
“……그럴 생각도 했지만. 그랬다간 이 몸이 망가질 것 같네요? 다만 당신을 제압하려 했죠.”
“어떻게?”
“글쎄요. 일단 제압해보고 머리 쪽을 건드려보려 했는데.”
리케도르안이 악당처럼 웃었다.
보아하니 몸에서 몸을 옮겨 다니는 것도 그렇고 뭔가 비장의 방법이 있는 듯했다.
그렇단 말이지.
“……그럼 나도 거리낄 것이 없겠네.”
“네?”
“봐줄 생각 없다고.”
나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잘 알아둬. 당신.”
나는 손에서 휘리릭, 왕홀을 돌렸다. 이 방법만큼은 절대, 쓰고 싶지 않았는데.
“당신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쓰기 싫은 수를 쓰게 한 거야. 지금.”
나는 입술을 삐뚜름하게 비틀면서 양손으로 무기를 잡았다.
“곱게 돌아갈 생각은 접어.”
내 결정에 화답하듯 휘슬이 길게 울음을 토했다.
쾅!
그 순간 왕홀이 바닥에 푹 꽂혔다. 동시에 푸르른 기운이 폭발적으로 샘솟았다.
이건 이 세계에 도착한 뒤로 단 한 번도 건드린 적 없는 힘이었다.
왜?
누군가를 구속하는 힘이었으니까.
촤르르륵.
푸르른 쇠사슬이 이 공간에 가득 펼쳐진다. 그리고 자욱한 푸른 안개 사이로 곧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새카만 신발. 검은 정장 하의. 언제나처럼 빈틈없이 채워진 새하얀 단추들까지.
달빛 아래, 검은 머리칼이 푸르게 물들었다.
한 마리의 재규어를 연상시키게 하는 크고 긴 실루엣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올린다.
“흐음? 이게 무슨 일이람.”
남자가 쇠사슬 사이에서 저벅저벅 걸어왔다.
그는 풍경을 쭉 돌아보는 것만으로 붉은 눈동자에 이채를 띠더니, 내게로 다가왔다.
그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나의 왕. 제가 무엇을 하면 될까요?”
언젠가 도뮬릿의 수장으로서 그러했듯이. 여유롭지만 갈증이 섞인 음성으로.
촤르르륵.
그러나 전과 다르게 그의 목에는 검은 초커와 사슬이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사슬의 끝은 내 손과 이어졌다.
체이서.
그가 반듯한 순종을 드러냈다.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게요. 어둠 속에서 그의 눈동자가 어둑하게 빛났다.
“이 목숨이라도.”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당연하겠지만 체이서가 이곳에 나타나는 건 결코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
이 남자는 나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순간 내가 그를 데려온 것을 탐탁지 않아 하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평소보다, 아니. 평소 이상으로 얌전히 고개를 내린 것이다.
지금처럼.
나는 한 손을 꾹 쥐었다가 폈다. 손에 쥔 쇠사슬이 살짝 흔들렸다.
“무엇을 하면 될까요?”
체이서가 이 진동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는 무엇이든 안다는 낯으로 나를 응시했다.
시간이 없었다. 이쪽을 이상하게 보는 우르슬의 기색이 심상치 않았다.
“대충 상황은 파악했겠지?”
나는 체이서의 손을 잡아당겨 일으켜 세웠다.
“어느 정도는. 하지만 명확히 명을 내리지 않으면 모르겠는데?”
“리케도르안의 몸에 다른 차원의 영혼이 들어갔어.”
“아아.”
체이서가 그제야 알겠다는 듯 시선을 흘끗 던졌다.
“어쩐지. 평생 가도 못 볼 풍경을 보았다 싶더니만. 미쳐버린 게 아니라니 아쉽네.”
“체이서.”
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내 손을 잡았다가 놓았다.
“그래서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요? 나의 왕.”
“존대든 반말이든 한쪽만 해.”
“네 이름을 부르게 허락하는 건가요?”
체이서가 잠시 망설이더니, 말했다.
“이아나.”
이 이름을 담는 데 아주 한참의 순간이 지나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겨우 몇 초가 흘렀을 뿐이었다.
“……리케도르안의 몸을 제압해줘. 저 영혼을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릴 거야.”
나는 그대로 눈을 돌렸다. 거기다 일부러 체이서가 말할 틈을 주지 않고서 말했다. 그의 얼굴로 아쉬움이 스쳤지만 무어라 하는 대신 몸을 돌렸다.
“분부대로.”
체이서의 몸 주변으로 검은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체이서가 한쪽 발을 내미는 것과 동시에 폭발적으로 치솟았다.
스물스물. 안개 같은 기운 사이로 어느새 수없이 많은 검들이 둥둥 떠 있었다.
언젠가 몇 번 목도한 체이서의 수호신이 무기화된 모습이었다.
무기는 거의가 검이었지만 단검의 종류가 가장 많았다.
거기다 체이서의 팔 위로 아퀼라가 앉은 채 길게 울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새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짝퉁은 어느 정도나 되는지. 한번 볼까?”
아퀼라가 날개를 활짝 펼치더니 거대한 불꽃으로 산화했다.
화르르륵!
불꽃이 우르슬이 있던 자리에 퍽 떨어진다. 이 순간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아나, 이쪽이 당신 지원군인가 봐요.”
검으로 불꽃을 쳐낸 우르슬이 표정을 잔뜩 굳히고 있었다.
“큰일이네. 영혼 이동은 이번 한 번만 가능했는데.”
여유로운 웃음은 온데간데없었다.
“그 멀리 있다던 검은 쪽?”
지금껏 우르슬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그녀는 몇 번이고 바깥쪽 결계를 두드렸지만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하고 이쪽과 싸우기로 결심한 듯했다.
아마 깨달은 거겠지. 나를 쓰러트리지 않고서는 이 결계를 없앨 수 없다는 걸.
쾅!
불이 또 한 번 우르슬이 있는 자리로 떨어졌다. 체이서는 불덩어리를 손에 둥둥 띄운 채로 내게 물었다.
“이아나, 상처 입혀도 되는 거야?”
나는 여유롭지만 장난스러운 음성 속에서 묘한 기색을 눈치챘다.
“……일부러 치명상 입히는 건 용납 안 해.”
“일부러 한다니. 제압에는 어쩔 수 없이 상처가 동반되니까 한 말이지. 그리고 나도 다칠 것 같은데.”
체이서가 불쌍한 척 한 손을 꽃받침 하듯 제 턱밑을 바쳤다.
“다치면 걱정해줄 거야?”
“제압이나 해.”
어째 영혼 상태가 되어서도 저 능글능글함은 변함이 없는지.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뒤로 물러났다.
체이서가 제압을 하는 사이에 빠르게 문을 열 요량이었다.
물론 결계를 유지한 채로 문을 여는 건 내게도 꽤 버거운 일이었지만 전투를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이아나, 정말로 날 상처 입힐 거예요?”
슬슬 장난이 아니라 느낀 건지, 우르슬이 재빠르게 나를 쳐다봤다.
리케도르안의 얼굴로 울먹이는 모습이 퍽 애처롭게 보이긴 했다. 물론 ‘진짜’였다면 마음이 약해지고도 남았겠지만.
오히려 저 모습은 분노만 더욱 일으켰다.
“뭐해?”
체이서가 눈을 휘었다.
“우리 왕께서 빨리 해치우시라네. 짝퉁 빨간 장미.”
그와 함께 체이서의 주변으로 떠 있던 검이 세차게 쇄도했다.
쉬이익!
비상한 검들이 제각각 움직이며 리케도르안을 노렸다. 내가 알기로 체이서는 장미들 사이에서도 결코 만만찮지 않은 실력자였다.
거기다 생전의 그는 푸른 장미의 힘마저 가지고 있던 상태였다.
그리고 이 힘들은 영혼에 새겨지는 바, 이 순간에도 변함없었다.
“이거야, 원. 진짜보다 더 약한데? 재미없게.”
체이서가 팔짱을 낀 채 느긋하게 미소했다. 당해본 사람으로 저 여유로운 미소가 이 순간에 얼마나 열받게 하는지를. 아주 잘 알았다.
“이익!”
이는 침착해 보이던 우르슬에게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녀는 전과 다르게 더욱 초조한 얼굴을 숨기지 못하며 검을 고쳐잡았다.
그녀의 검에서 암울하고도 짙은 녹색 빛이 치솟았다. 리케도르안의 붉은 검과 어우러지며 마치 붉은 꽃과 잎사귀 같은 느낌을 자아냈다.
느낌상 우르슬은 지금까지 숨기고 있던 힘을 모조리 토해낸 것 같았다.
아마도 결계를 부수거나 나를 쓰러트리고 도망가는 데 쓰려 한 힘이었겠지.
어쩐지 이 순간 그녀가 낮에 내게 다른 나라에 대해 물어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주 먼 곳으로 도망가려 한 거야.’
더는 찾기 어렵도록.
생각할수록 치밀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더더욱 지금 이 순간에 돌려보내야 했다.
물론 최후의 수단까지 사용하게 만든 그녀를 곱게 보내줄 생각도, 놓칠 생각도 없었다.
쾅!
하지만 저쪽도 최후의 발악이었는지 제압은 쉽지 않아 보였다.
“오, 검 좀 쓰던 영혼이었네?”
체이서의 음색은 변화가 없었지만 조금 전과 다르게 그는 팔짱을 푼 채로 긴장된 상태였다.
리케도르안의 검으로 거대한 기운이 솟아올랐다.
“이런.”
챙!
아퀼라가 불의 검으로 산화하더니 리케도르안의 검을 막아섰다.
왜인지 체이서의 낯으로 낭패한 기색이 어렸다.
“이아나.”
꽤나 떨어져 있음에도 체이서의 음성이 바로 귀 옆에서 들려왔다. 어찌한 것인지 몰라도 곧바로 대답했다.
“무슨 일이야?”
“좀 곤란한 사안이 생겼는데.”
체이서가 검을 막아내며 작게 속삭였다.
“……저 쪽에게 치명상은 안 된다. 아직 유효한 거지?”
“당연한 소릴.”
“그럼 안쪽에서 깨우는 건?”
“뭐?”
그렇게 말했을 때, 리케도르안. 아니 우르슬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더욱 강해졌다.
“안쪽에서라도 깨워야 할 것 같은데. 죽기 싫으면.”
이와 함께 잠시 끊어졌던 푸딩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인간! 인간! 큰일 났다! 들리냐, 냥?
무척이나 다급한 목소리였다.
‘왜 그래?’
-이쪽 영혼이! 붉은 장미의 생명력을 끌어쓰는 것 같다! 잠깐이라면 몰라도 오래 버티지 못할 거다! 이건 치명적이다, 냥!
생명력, 그 단어가 주는 무게에 덜컥 심장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르안은? 아직 답이 없어?’
-답이 없다 냥, 저 영혼의 힘인지 깊게 잠든 것 같다……. 아주 잠깐 반응이 있었지만.
푸딩은 맨 처음에 자신이 강하게 불렀을 때 르안이 답을 했었다고는 하였으나 그 후로는 아예 연결이 되지 않는다 말했다.
아무래도 우르슬이 이 연결을 방해하는 데 온 힘을 다하고 있다고 하면서.
때마침 타이밍 좋게 체이서의 음성이 들려왔다.
“저쪽 수호신이 뭐래?”
“……깨우지 않으면 위험할 거라고.”
“맞아. 내가 보기에도 저 힘이 기생에 가까운 것 같거든. 이아나. 짝퉁이 진짜의 힘을 갉아먹고 있어.”
골치 아픈 유형이다. 여유로운 척 말했으나, 그의 음성도 이전보다 심각해진 상태였다.
“충격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사지 절단은 흰 장미가 없으니 수복이 어려울 테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전직 도뮬릿 수장, 악당답게 체이서는 지극히 자신의 기준에 맞춰 대안을 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신체 일부를 자르다니 말도 되지 않았다. 리케도르안의 회복력이 아무리 좋아도 그의 세계가 아닌 곳에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동안에도 체이서는 리케도르안의 공격을 잘도 쳐냈다.
그러나 싸움을 깊이 알지 못하는 내 눈에도 보였다. 이는 소모전이라는 걸.
시간을 끌어봐야 이쪽, 리케도르안에게 불리했다. 머릿속으로는 푸딩이 애타게 나를 부르고 있었다.
휘슬 또한 초조해하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흐음. 저쪽은 자멸을 각오한 것 같고. 이렇게 해서는 끝이 나지 않겠는데.”
체이서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이아나, 내게 쓸 만한 방법이 있는데. 들어줄 거니?”
이 음성이 귀를 푹 파고든다. 나는 문을 만들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이젠 당장 송환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뭔데?”
“들어준다면 시도해볼게. 확실한 방법이야.”
“설마 아까처럼 신체 일부를…….”
“아니. 그건 아니야. 알잖아, 난 네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걸. 그리고 이젠 네가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아.”
챙!
체이서가 리케도르안의 검을 튕겨냈다.
“그래서 지금도 널 위해 저 붉은 장미를 살릴 방안을 모색 중이잖아?”
“…….”
“저자가 죽으면 넌 울 테니까.”
이곳에 온 지 6년이 흘렀다. 체이서는 변한 것인가, 변한 척하는 것인가.
달콤하게 속삭이는 모든 말을 믿을 수는 없었다. 하나 듣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의 말처럼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까.
“……쓸데없는 소리면 앞으로 평생 다신 네 가게에 발걸음하지 않겠어.”
“이런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말이네.”
체이서가 낮게 웃었다. 격렬한 전투 중인 까닭에 그의 숨소리가 마구 흔들렸다.
“……뭐. 애정의 차이가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거겠지만.”
이아나. 그가 나를 불렀다.
“나를 네 울타리 안에 넣어준 것만으로 난 됐어.”
그 순간 리케도르안과 맞댄 그의 검이 기이하게 변형되더니 그대로 리케도르안의 몸을 묶고 밀어냈다.
“앞으로 몇 년이, 몇십 년이. 어쩌면 백 년 가까이 걸리더라도. 네게 다가갈 기회가 생겼으니까.”
화르르륵!
리케도르안의 주변을 감싸고 거대한 불이 붙었다. 우르슬은 마구 발버둥 쳤지만 강하게 묶은 체이서의 무기 덕에 옴짝달싹못하는 모습이었다.
“어쨌든 내가 하려는 방법은 확실한 방법이야.”
꽤 거리가 있던 체이서의 신형이 그대로 스르륵 사라지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눈앞에 나타났다.
눈앞에 드리운 그의 얼굴이 그대로 가까워졌다.
“흐음, 이 각도가 좋을까나.”
그는 내 어깨를 잡고 살짝 각도를 틀더니, 그림같이 미소했다.
“화, 내지 않을 거지?”
도뮬릿에서 둘만 생활했던 때처럼 그는 장난스러운 낯이었다.
여기서 그가 ‘내 동생’하고 말한다면 마치 그때로 돌아갈 것만 같았다.
영문을 알 수 없었기에 내 목소리엔 삐죽 날이 섰다.
“네가 하는 걸 봐서.”
그때였다.
으아아아! 우르슬이 거센 비명을 토해냈다. 그녀는 마지막 힘을 짜낸 듯 심상치 않은 기운이 치솟았다.
뚜두둑.
체이서의 무기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다.
“네가 화내지 않아야 진행돼.”
우르슬의 모습을 본 나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으니까, 뭐가 됐든 얼른……. 뭐든 해!”
“분부대로. 나의 왕.”
내게 화답하는 목소리는 불만일 정도로 느리고 여유로웠다. 아니, 착각이었을까? 뒤로 갈수록 그의 숨소리가 긴장한 것처럼 느려진 것도 같았다.
얼굴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무어라 할 새도 없이.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은 언제나처럼 능글맞던 얼굴과 휙 휘어진 붉은색 눈이었다.
“……네가 허락한 거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와 함께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툭.
입술이 맞닿았다. 푹신한 감촉에 눈을 크게 뜨기도 잠시, 나는 눈을 천천히 가늘게 좁혔다.
체이서는 뜻을 안다는 듯 눈을 가늘게 휘었다.
마침내 그가 잠시 입술을 떼어내는가 싶더니. 흘끗 눈짓했다.
“효과, 어때 보여?”
체이서의 말에 나도 모르게 눈을 굴렸다. 버둥거리던 우르슬이 거짓말처럼 몸을 멈춘 것이 보였다.
“지금이 기회야.”
체이서가 유혹하듯이 속살거렸다. 정말이지 막 지옥에서 튀어나온 악마라 해도 믿을 정도로 녹진하고 은밀하게.
“아직 이 정도로는 모자랄걸.”
그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분명 우르슬은 멈칫했지만 그뿐이었다.
표정 또한 살짝 찡그렸을 뿐. 더는 징조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인간! 지금! 잠깐이지만 붉은 장미가 반응했다! 냥! 지금!
……인정하기 싫지만 이게 효과는 있단 말이지.
푸딩이의 말까지 얹어지자 더는 무시할 수 없었다.
나는 손을 들어 체이서의 멱살을 쥐었다.
“너. 어디까지, 계산한 거야?”
“흐음, 억울한데, 이아나. 너도 알다시피 나는 조금 전 막 소환되었을 뿐이야.”
너도 잘 알잖아?
그의 말은 곧 내가 괜한 트집을 잡았단 소리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키잉!
이 순간에도 체이서의 무기는 실시간으로 잘려가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나는 체이서의 멱살을 꽉 쥐었다. 그는 거짓말같이 내 신호를 눈치챘다. 내게로 그림 같은 얼굴이 내려온다.
“이번엔 주사기가 없네.”
“……칼 맞고 싶어?”
“네가 주는 것이라면, 그것도 좋지.”
입술로 낮은 숨소리가 내려앉았다. 그가 웃음을 터트린 것 같았다.
다시 한번 입술이 닿는 순간. 이번엔 체이서가 입술을 살짝 벌렸다. 인정하기 싫지만 완급 조절을 할 줄 아는 남자였다.
나는 입술이 닿기 무섭게 그의 멱살을 확 잡아당겼다.
휙.
순식간에 그의 몸이 움직였다. 아마도 우르슬이 보는 시야에선 체이서의 등밖에 보이지 않을 터였다.
잠시 깜빡거리던 체이서의 눈이 이내 뜻을 알겠다는 듯 가늘게 접혔다.
전직 악당 아니랄까 봐 위험하고도 야살스럽기 짝이 없는 눈이었다.
입술 또한 휙 끌어올려 웃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입술을 열었다. 부드러운 것이 그대로 나를 건드렸다. 살살 달래듯 나온 그의 것으로도 모자라 뜨거운 숨이 함께 넘어온다.
잠시간의 시간이 이어질수록 내 몸이 점점 뒤로 밀렸다. 이를 막아 주듯 버들가지처럼 휙 휘어진 팔이 나를 지탱했다.
“윽…….”
나도 모르게 그의 가슴에 손을 올리고는 찡그렸다.
체이서가 만만치 않게 크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몸도 마찬가지로 좋은 것 같았다. 항상 금욕적으로 사는 탓에 볼 일은 거의 없었던 거지.
체이서는 내 허리에 팔을 감은 채, 한 손으로 제 가슴에 올라온 내 손을 살짝 거머쥐었다.
내 손목을 잡은 채로 살살 손가락을 문지른다. 마치 잘 봐달라는 듯이.
할짝. 느슨한 혀 놀림이 살갗을 스치고 지나간다. 마치 놀리는 듯한 움직임 같다. 내 눈이 더욱 찌푸려졌다.
이제 그만 리케도르안의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체이서가 가린 탓에 볼 수 없었다. 그저 시간이 꽤나 지났지 않나 싶었을 뿐.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리케도르안에게 굳이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 탓에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쉬웠다.
……그나저나. 너무 고요하지 않나?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등줄기로 솜털이 삐죽 서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황급히 손을 떼어냈다.
체이서 또한 느꼈는지 그가 몸을 뒤로 물리기 무섭게 ‘쾅!’ 거대한 소리가 이 공간을 울렸다.
체이서가 있던 자리로 거대한 검이 꽂혀 있었다. 얼마나 세게 내려친 것인지 검의 반 이상이 파묻혀 있다.
나와 체이서가 붙어 있었기에 나 또한 위험할 수 있던 일이었다. 그러나 그럴 걱정은 없었다.
내 앞으로 붉은 아지랑이가 내가 있는 곳만 감싸고 있었으니까.
마치 오직 나만을 보호하듯이.
-이, 인간? 괜찮냐, 냥?!
“어어…….”
나는 이 힘이 리케도르안의 것이란 걸 알았다. 아니, 모를 수가 없었다.
체이서가 몸을 뒤로 물린 채로 고개를 탈탈 털었다. 그가 머리를 들었을 때, 주르륵. 그의 뺨으로 붉은 핏줄기가 흘렀다.
“이런.”
그가 낭패한 낯으로 잠시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이내 혀를 쯧 찼다.
“이 세계의 의복은 영 강도가 약한 것 같네.”
체이서는 픽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그렇지 않아, 이아나?”
그렇게 말하는 그의 가슴 부분은 부욱 찢어져 있었다. 그곳만 검에 베인 것처럼.
하얀 셔츠가 찢어진 사이로 새카만 검은 장미 문신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으로 베인 자욱이 선명했다. 깊은 상처는 아니었지만 상처 주변으로 셔츠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저쪽 세계에서처럼 전투니, 전쟁이니. 암살이니 하는 것이 없는 세계니까.”
당연히 체이서가 저쪽 세계에서 걸치던 웃옷같이 한 번쯤 검을 피하게 해줄 질긴 옷감을 덧댈 이유도 없다.
나는 성의 없이 그리 말하고는 얼른 고개를 들었다. 검을 쥔 리케도르안이 숨을 거칠게 내쉬고 있었다.
아직 호흡이 진정되지 않는 듯 상당히 혼란스러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르안?”
이미 나를 보호하려 힘을 두른 것과 푸딩이의 외침으로 르안이란 것은 알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려 그를 불렀다.
“르안, 당신이에요?”
얼른 걸어가 그의 팔을 붙잡는 순간이었다.
탁!
그가 거칠게 내 손을 뿌리쳤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와 함께한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는 차마 그를 부르지도 못하고 얼떨떨하게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동시에 리케도르안이 고개를 홱 들어 올렸다.
“로, 로즈?”
그 또한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마치 제가 이런 짓을 할 줄 몰랐다는 듯이.
혹시나 우르슬이 빠져나가지 못한 걸까 싶었지만 더는 불길하고도 음습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가 그의 몸에서 완전히 사라졌단 소리였다.
리케도르안은 여전히 숨이 고르지 못했다. 체이서를 공격한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고 검날을 부여잡고 있었다.
천천히 시선을 올린 리케도르안의 표정이 그대로 흐려졌다.
왈칵. 아주 서럽고 섧게.
“죄, 죄송해요…….”
내 손을 쳐낸 손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공을 맴돌았다. 그러나 리케도르안의 손은 채 내게 닿지 못하고, 그대로 손가락이 안으로 움츠러들었다.
“이제…… 내, 내가 싫어요. 이아나?”
그의 얼굴은 엉망으로 붉어져 있었다. 곧이어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눈물에 더욱더 엉망이 될 것만 같았다.
나는 리케도르안의 얼굴을 보다 말고 흠칫 놀랐다.
“당신, 손. 손! 피가 나잖아요!”
검날을 그대로 잡은 손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찌나 세게 잡은 것인지 상처가 깊어 웅덩이가 패일 지경이었다.
어쩌면 이 순간에 우르슬의 영혼이 잽싸게 도망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는 그런 것은 떠오르지 않았다.
얼른 리케도르안의 손을 검에서 떼어냈다.
리케도르안의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눈을 마주치면 그는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려 했지만.
이미 후두두둑. 떨어지는 눈물을 본 뒤였다.
그는 내가 보았던 그 어느 때보다 서럽게 울었다. 보는 이가 가슴 저릴 만큼 섧게.
“이제, 흡. 다른, 다른 장미가 좋은 거예요?”
“네?”
눈을 가린 리케도르안의 손 밑으로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내가, 잘못, 잘못했어요…….”
턱 끝에 매달린 눈물이 아슬아슬하다 못해 애처로웠다.
“……시, 싫어하지만 말아요.”
내가 체이서와 닿았다는 것이 싫었던 것인지, 나를 공격했다는 사실이 미안하다는 것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그는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울었다. 마치 제 전부였던 부모를 잃은 아이같이.
“제발…….”
어찌 됐든 그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의 잘못은 아닌데…….
나는 뺨을 긁고 싶은 심정이 됐다. 이 순간 그에게 정말, 정말로 미안하지만.
……나 때문에 붉어져 서럽게 울고 있는 모습이 설렌다고 하면.
나 너무 쓰레기 같겠지?
나는 끙 숨을 내쉬며 필사적으로 하늘을 바라봤다.
아니면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올 것만 같았다. 정말 행복한 웃음이.
하. 나는 전생에 대체 무슨 복을 받았기에 이런 미남이 평생 나만 바라보게 생겼나.
속으로 어울리지도 않는 주접을 떨며 얼른 마음을 가라앉혔다.
“흠흠, 리케도르안?”
“……흡, 이제, 애…… 애칭도…….”
“아, 르안! 르안!”
어째, 이젠 우르슬이 정말로 도망갔어도 상관없을 것 같다. 까짓거 한 번 더 추적해서 잡지 뭐.
눈물범벅이 된 청순한 미남을 보고 있으려니, 이젠 그 말고는 아무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지 뭔가.
“크흠, 그러니까 우리 정리를 하자구요.”
나는 그 앞에 쪼그려 앉은 채로 눈을 똑똑히 마주했다. 그가 다시 검날을 잡지 못하게 손을 잡으면서.
“일단 당신이 날 공격한 건 르안 탓이 아니에요. 우르슬이 잘못한 거지. 왜 당신이 자책을 해요? 나쁜 새끼는 따로 있는데.”
“하지만 제가, 정신력이 조금만 더.”
“‘하지만, 그렇지만, 그런데’ 모두 금지예요.”
“그, 그래도!”
“‘그래도’도 금지!”
리케도르안이 울다 말고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럼……. 저, 안 싫어요?”
조심스럽게 올려다본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사람 괜히 나쁜 맘먹게 만드는 무구한 눈이었다.
“……만약에 싫어한다면요?”
그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꾸물꾸물 움직여 내 손끝을 잡으면서.
“다시. 조, 좋아해 줄 때까지. 기다릴게요.”
그의 한마디에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던 포커페이스가 흐려졌다. 결국 그를 달래다 말고 피식 웃고 말았다.
“뭐야. 내가 다시 좋아해 줄 거란 자신감은 있는 거예요?”
어쩜 이렇게 요망하담. 어여쁜 소리나 하고 말이야. 나는 그의 손을 잡지 않은 손으로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가 망설이다 말고 나를 천천히 마주했다.
“……어떻게든 유혹해서라도?”
닦아주었음에도 다시 흐른 눈물이 톡 맺혔다. 턱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눈물이다. 거기다 여전히 그렁그렁한 눈망울까지.
……이 남자는 정말 오늘 나를 심장마비를 한번 시킬 작정인가?
나는 조금 심각해졌다. 이제까지 그가 이성을 잃을 때 고삐를 잡는 것은 내 쪽이었는데. 처음으로 이것이 깨어질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다.
야외에서 안겨 오는 남자를 꽉 안아주는 정도야, 그럴 수 있는 거 아닐까. 굴러서 더러워지고 눈물로 적신 옷도 좀 펴줄 수 있는 거고……. 여기에 입술 정도는 부대낄 수 있는 거 아니냐고.
요는 벗기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닐까. 이 생각까지 갔을 때였다.
“흐음, 이아나.”
그 순간 잠시 잊고 있던 나직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체이서. 얼른 그가 쓰러져 있던 곳을 응시했다. 아무도 없었다.
“그쪽이 아니야. 여기.”
반대쪽을 돌아보면 생각보다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 체이서가 있었다.
“너…….”
입술이 절로 벌어졌다.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잠시지만 리케도르안을 잡은 채 놀랐으니까.
체이서는 어딘가에 앉은 채로 손을 팔랑 흔들었다.
“이제 그만 나도 예뻐해주면 안 돼?”
나비 날갯짓처럼 흔들린 긴 손가락이 차차 아래로 향했다.
그리고 체이서의 밑에는 놀랍게도…… 우르슬의 반투명한 영혼이 체이서의 무기에 꽁꽁 묶여 있었다.
“나도 착한 짓 했는데.”
그가 한 손에 턱을 받치며 나른하게 웃었다. 이제는 거의 굳어버린 피를 닦아내면서.
“나의 왕.”
그가 제 목에 달린 쇠사슬을 잡고 가볍게 한번 흔들었다.
“칭찬해줘.”
일부러 멍, 하고 한번 짖어주면서.
단둘이 살았을 때, 수없이 보았던 장난이었다. 유쾌하지 못한 기억이다. 그때 종류별로 가져오던 개목걸이가 아직도 기억에 선연했다.
미친 인간.
내 표정이 삽시간에 찡그려진 것은 물론이었다.
한편으로 우습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6년간 내가 그에게 보인 것은 일관된 무관심이었다.
하지만 현재 그가 보인 모습에 어처구니없음과 함께 미미한 분노, 당황이 뒤섞여 있었으니까.
내 손목으로 연결된 사슬이 촤르륵 움직였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똑같이 쇠사슬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었다.
사슬 끝을 잡은 이만 뒤바뀐 채로.
체이서의 낯엔 한 점 부끄러움도 불만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만족스럽게 쇠사슬을 바라볼 뿐.
“……어떻게 잡은 거야?”
“열심히.”
우르슬은 리케도르안의 몸을 사용하면서 많은 힘을 사용했다. 마지막까지 만만찮은 힘을 뿜었지.
그때 힘 대부분을 사용한 게 아닐까 했다. 체이서 또한 쉽사리 잡은 것은 아닌 듯 조금 전보다 상처가 늘어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몸을 감싼 흰 셔츠는 너덜너덜하다 못해 옷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검은 재규어를 연상시키는 듯 날렵한 실루엣이었다. 분명 그는 검사는 아니었던 걸로 아는데…….
리케도르안만큼이나 아니, 다른 타입으로 몸이 좋았다.
툭 불거진 가슴 근육으로 새까만 장미 문신이 보였다. 조금 전이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보였다면 이번엔 달빛 아래 윤곽이 선명하게 드러난 채였다.
까만 밤하늘 때문인지, 아니면 저 새카만 머리카락 때문인지.
이 밤과 저 남자의 흐트러진 모습은 묘하게 야릇하고 관음적인 조화를 자아냈다.
체이서가 싱긋 웃었다.
“구경은 끝났어?”
“구경은 무슨.”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체이서의 머리가 사르르 기울어졌다.
“더 해도 괜찮은데.”
그가 한 손으로 툭툭 제 목을 두드리다 말고 손가락이 스르륵 미끄러진다.
“어디에 관심 있는 거야?”
“뭐?”
“여기?”
그리고 가슴 쪽으로……. 잠깐. 잠깐.
지금 저게 뭐 하는 거야?
무어라 하려는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다. 나는 내 손을 덮은 것을 얼른 붙잡았다. 리케도르안의 손이었다.
“로즈…….”
다 죽어가는 음성에 놀라 나는 얼른 고개를 돌리고, 리케도르안의 손을 떼어냈다.
“르안? 왜 그래요? 몸이 이상해요? 아파? 어디 가요?”
르안은 대답 없이 스르륵 내게로 쓰러지듯 상체를 숙였다. 툭 그의 머리가 내 어깨 위로 떨어졌다. 그의 몸이 다소 뜨거웠다.
“나 아파요…….”
열기에 가득 찬 음성에 나는 그를 붙잡아주다 흠칫 놀랐다. 이 열이 우르슬이 빙의한 여파인지, 전투로 잔뜩 몸을 쓴 탓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것만은 알았다.
르안은 결코 쉽게 아프단 소릴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머리칼을 살살 쓸어내리며 황급히 그의 안색을 살폈다.
“어디가 아파요? 많이 아파?”
아. 어디가 아픈지 알아도 해줄 수 있는 게 없겠구나.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 순간 그립던 프란시아의 모습이 더욱더 그리워지는 기분이었다.
“……나요?”
“네? 르안, 안 들려요.”
“나, 나랑…….”
르안이 내 어깨에 기댄 채로 웅엉웅얼 속삭였다. 르안의 목소리도 낮은 탓에 상황도 잊고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입. 맞춰주세요…… 로즈.”
새빨개진 옆얼굴. 손끝마저 발긋 붉어진 손가락이 더듬더듬 내 입술 부근을 더듬었다.
자신의 상징처럼 새빨갛게 붉어진 남자를 보며 이상하게도 그와 처음 만난 날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권태기는 아니었지만 가끔 이런 자극도 나쁘지 않구나 싶었다.
다음엔 일부러 발긋 달아오르게 만들어볼까?
“내가 잘할게요.”
“네.”
“더……. 네?”
내 요망한 장미가 해달라면 해줘야지. 톡. 입술과 입술이 맞닿았다 떨어졌다.
“이아나, 이쪽은 어떡할까?”
낮은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면 리케도르안이 그대로 내게 달려들었을지도 몰랐다.
“슬슬 깨어나려 하는 것 같은데.”
시선을 돌린 곳에 체이서가 여전히 우르슬을 붙잡고 있었다. 그는 어깨를 축 떨어트렸다.
“나, 힘이 없어.”
힘이 없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놓아주려 하는 것인지. 어느 쪽인지 몰라도 저 과장된 행동의 뜻은 훤했다.
그리고 그 말이 과장은 아닌 듯 우르슬이 영혼이 꿈틀꿈틀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꽉 묶인 영혼을 바라보며 잠시 확, 다른 세계로 송환시켜 버릴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지금까지 송환시킨 영혼들의 차원 좌표를 알고 있기에 문을 열 수는 있지만, 신의 부탁을 수행하는 중에 그런 짓을 했다간 대가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 부탁인지 뭔지가 얼마나 거지 같았던 간에 말이다.
반드시 이 대가는 크게, 후하게 받아내리라 결심하며 르안에게서 살짝 떨어졌다.
“르안, 저거. 빠르게 돌려보내고 올게요.”
이제 존칭이나 이름조차 내게서 흘러나오지 않았다. 하마터면 르안을 잃을 뻔했는데. 곱게 나갈 리가.
이를 부득 갈며 바닥에 손을 짚었다.
곧이어 붙잡힌 우르슬의 밑으로 거대한 마법 문양이 떠오르며, ‘문’이 활짝 열었다.
막 정신이 깨어난 듯 우르슬이 거칠게 움직이며 무어라 소리치는 것 같았지만, 체이서의 무기의 가로막혀 잘 들리지 않았다.
힘이 빠진 영혼을 보내는 건 무척이나 쉬웠다. 조금 전까지 치열했던 싸움을 생각하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송환이 그렇게 손쉽게 끝이 났다. 문을 닫은 나는 그대로 바닥을 짚은 채 긴 숨을 내쉬었다.
이 세계의 관리자가 내려준 권한이라고 하나 문을 만드는 건 내게도 꽤 부담이 되었다. 평소엔 이렇게까지 힘겹지 않지만.
우르슬이 도망가지 못하게 결계를 친 데다 힘을 써서 체이서까지 불러내고. 르안의 제압에 힘을 보태기까지 했다.
여러모로 진이 빠졌다.
하아……. 세찬 숨이 허공으로 빠져나온다.
‘이제 하나 남았나. 어휴. 속 시끄러워.’
신의 부탁이 이렇게까지 성가시고 귀찮으며, 당혹스러운 일이 가득할 줄 누가 알았을까.
무엇보다 절대 쓰지 않으리라 생각한 방법까지 쓰게 될 줄은.
나는 흘끗 시선을 돌리다 말고 더는 체이서를 담지 못했다.
커다란 몸이 내게 폭 안겼기 때문이었다.
“……끝났어요?”
내 시야를 가린 이는 당연하겠지만 리케도르안이었다.
“네. 이제 드디어 하나 남았네요.”
이리 대답하는 동안 목으로 간지러운 날숨이 느껴졌다. 그가 입술을 문질렀다. 나는 리케도르안의 등을 가만히 토닥여 주었다.
“한동안은 평화롭겠네요.”
힘을 크게 쓴 탓인지 리케도르안의 몸에 기대다시피 무게를 실었다. 단단한 몸은 아무렇지 않게 나를 받아냈다.
나는 그의 어깨에 기대며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체이서…….’
그 남자에게도 할 말이 있는데. 갑작스레 몰려오는 잠 탓에 생각이 느려진다. 눈을 애써 크게 떠보지만 체이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리케도르안이 나를 안으며 휙 몸을 돌린 탓에 내가 보는 건 텅 빈 공터뿐인 듯했다.
눈을 다시 깜빡인다. 그러나 이런 노력도 잠시뿐 눈이 슬며시 감겼다.
조금 있다가 기회를 봐서, 저 남자에게 고맙다는 인사 정도는 해야겠다 생각하며.
‘부상이 깊던데.’
……사람으로서 도리는……. 가물가물한 시야 너머로 감정이 미미하게 파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