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80/87)

***

“이번엔 비교적 거리가 가깝네요.”

다음날 곧바로 아홉 번째 영혼을 찾으러 가는 길, 생각보다 거리가 멀지 않다는 걸 알았다.

굳이 따지자면 버스로 두 정거장 정도? 걷기에 그리 나쁘지 않은 거리였다.

“첫 번째 영혼을 제외하면 가장 가까운 것 같네요.”

나는 손안에서 휙휙 도는 검은 나침만을 보며 말했다.

가장 멀리 있던 영혼은 무려 기차를 타고 다녀오기도 했었지. 그동안 각 영혼별로 시간이 오래 걸린 것엔 거리 문제도 있었다.

그렇게 나침반을 쭉 따라 걸어간 우리는 마침내 아홉 번째 영혼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홉 번째 영혼은 젊은 여성의 몸에 빙의한 영혼이었다.

몸 주인은 카페 알바인 듯 반듯한 유니폼과 갈색 모자를 쓰고 있었으며, 우리의 등장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은 기색이었다.

“나를 돌려보내러 온 분들인가요?”

놀랍게도 이 영혼은 나와 리케도르안의 정체를 먼저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그녀의 표정은 마치 우리가 올 줄 알았다는 듯이 여유롭고 나긋했다.

당연하겠지만 우리는 입도 벙긋하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미간을 찡그리며 손을 움직였다.

“아, 혹시 반항할까 염려한 거라면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어요.”

여성은 싱긋 웃으며 손을 뒤로 숨겼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테니까요. 돌아가는 과정에도 얌전히 협조할게요.”

뭔가 이상했다. 물론 이 여성이 말도 영 석연치 않았지만 이 여성의 말투가 조금 미묘했달까.

마치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느낌이었다. 전혀 사용하지 않던 말투를 억지로 흉내 내는 느낌이라 해야 하나.

“다만, 부탁이 있어요. 들어주실 수 없을까요?”

역시나 꿍꿍이가 있었던 걸까? 나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뭔데요?”

“이 세계를 구경하고 싶어요. 당신들에겐 협조할게요. 구경하면 안 될까요?”

나는 리케도르안과 마주 봤다. 리케도르안은 줄곧 나만을 보고 있었기에 내가 눈을 마주친 것에 가까웠지만.

여성은 부드럽게 말했지만 나는 느꼈다. 협조를 말하는 순간에 드러났던 거대한 힘을.

손이 절로 주먹을 쥐어졌다.

……이 사람은 지난 영혼들과는 격이 다른 힘이 느껴졌다. 어쩌면 리케도르안과 비등비등할지도 몰랐다.

협조하지 않을 시 무력이라도 쓴다면 이번에야말로 쉽지 않을 듯싶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얌전히 협조할 거란 건 어떻게 믿죠?”

“아. 그건 그렇네.”

여성은 손뼉을 치고는 턱을 톡 두드렸다.

곧 여성의 손끝에서 녹색 기운이 치솟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적 없는 종류였지만, 날카롭고 거대한 느낌만은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나와 여성 사이에 뜻을 알 수 없는 문자가 새겨졌다.

“이건, 우리 세계에서 ‘맹약’이라 불리는 거예요. 내 영혼을 걸고 맹세컨대 방금 말한 것을 지킬게요.”

가만히 기운을 좇았다. 그녀의 말처럼 그녀 스스로의 것인데도 자신의 목을 옥죄고 있었다.

영혼에 걸린 것을 확인하고서야 나는 찝찝하지만 이 약속을 받아들였다.

거짓말을 한 것 같지는 않았고, 구경 정도라면야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싸우더라도 이쪽이 지지 않을 거라는 자신이 있었다.

“그럼 가나요?”

몸 주인이 카페 알바생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지만 내가 어찌할 수 있는 바가 없었다.

부디 일이 끝난 뒤이기를 바랐다.

“아, 그건 걱정 말아요.”

내가 걱정을 입으로 뱉자, 여성은 문제없다는 듯 말했다. 그녀는 이 몸에 들어온 지 며칠 되었고, 그동안에 일에도 적응했단다.

“눈을 뜨니, 일을 하던 중이어서요. 대충 눈대중으로 익혔으니까요.”

눈을 뜨자마자 알바를 했단 소린데, 구경하고 싶다며. 왜 구경하지 않고서?

“아, 휴가는 며칠 뒤부터 줄 수 있다고 해서요.”

이 영혼도 뭔가 좀 특이한 영혼이었다.

“당신들이 오는 느낌에 얼른 퇴근했죠.”

여성은 거기까지 말하고는 나를 흘끗 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당신, 정말로 강하네요? 괜히 이런 일을 하는 게 아니구나.”

순수하고 솔직한 감탄이었다. 전투 능력이라면 리케도르안이 더 뛰어날 텐데. 나는 심드렁하게 끄덕였다.

“나보다 강한 사람은 처음 봐요. 우리 세계에는 없었거든요.”

나야말로 조금 전의 힘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근데…… 당신에겐 여러 힘이 엮여 있네요?”

이어진 엉뚱한 소리에 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정확하게는 그녀가 걸음을 멈춘 것에 따라 멈춘 것이었다.

“아니다. 정확히는 고삐? 고삐를 쥔 거군요.”

내 상황을 꿰뚫어 보는 말에 나는 미소를 지웠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으음, 두 개는 너무 멀고…… 하나는 붉은색. 이쪽이고.”

여성의 눈이 데굴데굴 굴러 리케도르안을 담았다. 그러고는 의문 가득한 얼굴로 깜빡였다.

“왜 검은 쪽은 데리고 다니지 않아요?”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굳이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여성의 눈동자는 20대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깊었다. 부드럽게 생긋생긋 웃고 있지만 미소가 습관일 뿐 숨기지 못한 기도가 조금씩 느껴졌으니까.

본인은 잘 숨기고 있는데, 내게 느껴지는 걸 수도 있고.

아무튼 무시하려 했으나 나보다 먼저 반응한 이가 있었다.

어깨를 감싸는 팔과 함께 술렁 움직이는 기운을 느꼈다.

어느새 내 등 뒤에서 나를 반쯤 껴안은 리케도르안이 저쪽을 노려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런 날카로움을 드러내서야 보지 않고도 상상이 가능했다.

“르안.”

나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그를 불렀다. 괜찮다는 듯이 팔을 토닥여주자 거짓말처럼 기운이 사그라들었다.

한 번 더 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느낌상 반응을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이미 한쪽에서 드러낸 뒤였다.

“당신이 말한 쪽은 집에 두고 왔어요.”

“그렇군요?”

여성은 나와 리케도르안을 한 번씩 보고는 끄덕였다.

“사이가 좋지 않나 보네요.”

그녀 나름대로 이해한 듯한 얼굴이었다.

“검은 쪽은 애타게 당신을 갈구하는 것 같은데. 그 기운이 계속 당신 주변을 머물고 있어요.”

“…….”

“차마 건들지 못하고.”

당연하겠지만 이 여성이 말한 사람은 단연 체이서였다.

검은 장미. 그는 여전히 카페처럼 만든 그 공간에 있었다. 생명을 유지할 힘이 사라질 즈음 방문함으로써 보는 것이 전부였지만.

괜히 복잡한 생각이 드는 것을 피하려 고개를 내저었다. 어차피 대답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말이었다.

그사이 여성은 이미 이쪽에 관심을 잃은 뒤였다.

여성과 함께 도착한 곳은 의외라고 할지. 놀랍게도 도시의 시내 한복판이었다.

“여기가 도시의 중심인가요?”

“네. 맞아요.”

여성은 신기하다는 듯이 고개를 좌로, 우로 돌렸다.

주말 한낮, 사람이 꽤 많을 시기였다. 나로서는 여성이 군집된 아주 많은 사람들에 놀란 것인지, 수없이 올라간 고층 건물과 화려한 간판들에 놀란 것인지.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었지만.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물었다.

“저기, 이제야 생각난 건데. 이름이 뭔가요? 무어라 부르면 되나요?”

생각해보면 앞서 만났던 영혼들 중 대다수는 이러했다.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이 몸은 누구누구다’ 하고 이름을 알려주기 바빴던 것이다.

물론 아닌 영혼도 있었지만, 그들은 우리를 보자마자 도망가기 바빴다.

여성은 눈을 크게 깜빡이더니 잠시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알려주기 난감하면 적당한 호칭을 정해주세요. 마땅히 부를 말이 없어서.”

“아, 아니요. 난감한 건 아니고, 뭐랄까……. 내 이름은 이곳에서 아주 길다고 할지.”

“그래요?”

“그러니, 우르슬이라 불러줘요. 내 어릴 적 이름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여성의 얼굴이 처음으로 누그러졌다. 잠시지만 진짜 미소를 엿본 느낌이었다.

“좋아요, 우르슬.”

그녀가 말한 세상 유람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녀가 바라는 곳 어디든 갈 수 있도록 도왔다.

발길 닿는 곳으로 그녀가 걸음을 옮기면 내가 함께 이동하면서 이곳에 대해 설명을 해주는 식이었다.

리케도르안은 별로 말을 섞고 싶지 않은 듯 침묵을 유지했다. 평소에도 나 아닌 사람과는 이야기를 거의 나누지 않을뿐더러 유일한 예외가 옆집 막내딸이었을 정도니.

우르슬 쪽에서도 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소 닭 보듯 닭 소 보듯 서로를 본다고나 할까.

“저쪽은 당신의 반려인가요?”

그러다 딱 한 번 묻긴 했다.

“네. 맞아요.”

“그렇구나. 여기도…….”

반려라니, 이곳에서 잘 쓰이지 않는 말에 잠시 움찔했긴 했지만. 그녀는 나름대로 납득한 듯했다.

그렇게 한참 돌아다녔을 즘, 그녀가 한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음엔 저기에 가고 싶은데, 어떻게 가나요?”

“저긴 안 돼요.”

“왜요?”

“스위스란 곳인데, 너무 멀어요.”

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비행기로 한참을 가야 하는 나라였다. 다음 영혼도 남아 있으니 여길 오래 벗어나서도 안 되고, 너무 오랜 시간을 할애할 수도 없었다.

그녀에게 거리를 이야기해주자 쉽사리 물러났다.

“그렇군요. 이해했지만 궁금하긴 하네요.”

“어떤 것이요?”

그녀가 콜라를 쪽 빨아 마시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지 않아도 30분 전,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먹은 것이 바로 저 콜라와 햄버거였다. 생각지도 못한 음식이라나.

그녀의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몰라도 이곳과는 다른 식문화를 가진 곳인 모양이었다.

“당신은 길 잃은 영혼을 인도하는 수행자죠?”

“뭐. 쉽게 말하면 그렇죠.”

신이 정한 명칭은 따로 없지만 설명하면 그렇지 않을까.

“지금까지 영혼들은 모두 이 땅에서만 나타난 건가요?”

“이 땅에서만 나타났다기보다는…… 음, 설명하면 이래요. 차원과 차원 간에는 가끔 관리자들이 생각지 못한 구멍이 뚫리는데, 그걸 ‘균열’이라고 해요. 이 균열은 관리자가 손대기 어렵고, 기다리면 시간이 좀 걸리긴 해도 보수가 된다고 하더라구요?”

물론 신의 첫 번째 부탁이 이 균열을 메꾸라는 내용이었지만. 이는 당시 소멸을 기다리는 대신 빠르게 메꿔야 할 필요가 있었댔지.

이는 언급하지 않고 말했다.

“영혼이 넘어올 만큼 큰 균열은 흔치 않은데, 커질 것을 예상하고 관리자가 이 땅으로 균열을 옮겨 놓은 거예요.”

“아하, 길 잃은 영혼들이 이곳에서만 발생하도록?”

“네. 정답이에요.”

나는 빨대를 문채로 컵을 톡톡 두드렸다.

나도 햄버거 먹은 지는 꽤 오래됐는데, 오랜만이라 그런지 맛나게 느껴졌다.

흘끗 옆을 보면, 나는 시선을 돌리다 말고 푸흡, 웃음을 터트렸다.

“르안, 뭐해요?”

리케도르안이 햄버거를 먹다 말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 재료를 보고 있었어요.”

“재료를 왜요?”

“당신이 맛있게 먹는 것 같아서요.”

르안이 방긋, 해사하게 웃었다.

“집에서도 만들어볼까 하고요.”

“어, 음…….”

“이아나가 맛있게 먹어주면 행복할 것 같아요.”

나는 햄버거와 르안을 번갈아 보다가 슬그머니 상체를 들어 그의 어깨를 꾹 눌렀다. 그는 내 손에 순순히 내려와 주었다.

그런 그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르안, 밖이 아니었더라면 지금 당장 당신의 얼굴을 붙잡고 입 맞췄을지도 몰라요.”

짧지만 단호한 말에 입술을 떼어냈을 즘엔 그의 귀가 발긋 달아올라 있었다.

“당장 해줘도 좋은데…….”

“돌아가서요.”

“침대에서요?”

“요, 입. 입.”

나는 그의 입술을 꾹 누르며 웃음을 터트렸다.

말했듯 우린 밖으로 오래 나오지 않았고, 음식은 직접 해 먹는 편이었다.

그저 오랜만에 먹는 햄버거가 반가웠을 뿐인데, 내 시선과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써주는 그가 고마운 한편 애틋하게 느껴졌다.

“사이가 좋네요.”

어느새 턱을 괸 우르슬이 말했다. 나는 부끄러워하는 대신 무심히 씩 입술을 끌어올렸다.

“한창 뜨거울 때라서요.”

6년이 지났지만 말이지. 이 말은 덧붙이지 않으며 말했다.

“조금만 이해하세요.”

그녀 또한 웃음을 터트렸다.

온종일을 돌아다니고, 밤이 찾아왔다. 우리나 우르슬이나 체력으로 지칠 일은 없는 몸인 덕에 적어도 도시에 가볼 만한 곳은 전부 가본 것 같았다.

덕분에 나도 6년씩이나 살면서도 가보지 않았던 곳을 가게 되었다고 할지.

“알차게 돌아다닌 것 같아요.”

우르슬 또한 우리 일정을 인정했다.

“마지막으로 가보지 못한 곳은 아쉽지만요.”

그녀가 가보고 싶어 했던 곳은 ‘놀이동산’이었다. 하나 그녀가 브라운관에서 이를 발견했을 즘에는 시간이 한참 늦은 뒤였다.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거긴 내일 가볼래요? 주말이라 사람은 많겠지만.”

많은 정도가 아니라 미어터지지 않을까 싶었지만 기구를 타는 건 내 쪽이 아닐 테니 상관없겠다 싶었다.

우르슬은 잠시 눈을 크게 뜨더니 곧이어 목을 쓸어내렸다.

“당신은…….”

그녀는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이 애매한 표정이었다. 기쁘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한. 여러 가지가 섞여 있었다.

“선한 사람이군요.”

우르슬이 천천히 허리를 바로 했다. 그녀의 손이 절도 있게 가슴 위로 올라왔다.

“당신의 친절에 경의를 표합니다.”

조금 달라진 목소리와 말투로. 그러나 이걸 지적할 새도 없이 그녀가 손을 풀어냈다.

“덕분에 꽤 오랜 시간 동안 잊고 있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소.”

갈색 눈동자가 한 번 바닥으로 내렸다가 다시 올라왔을 때, 더는 온종일 짓고 있던 온화함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둘러본 결과, 나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결론?

“이제부터 여기에서 살아야겠다고.”

그녀는 여유로운 듯 결연한 표정이었다. 나는 당황하지 않은 채 태연히 응수했다.

“약속이 다른데요.”

“당신을 배신하게 된 꼴이라 유감입니다. 고작 하루지만 당신이 선한 사람인 것은 알겠습니다.”

그녀가 자신의 눈을 톡톡 두드렸다.

“힘을 얻고, 군림하며 얻은 것은 이 사람 보는 눈밖에 없었으니까.”

“뭐. 좋게 봐줘서 고마운데.”

나는 한쪽 발을 뒤로 빼냈다.

주변은 약속이라도 한 듯 조용한 공원이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이곳은 근처에 새 공원이 생기며 거의 버려지다시피 한 곳이었다.

여기서 그녀의 하루 거처를 정하려 했던 거지만.

“그런 아부는 통하지 않는 거 알고 있죠?”

공기로 긴장감이 흘렀다. 보진 않았지만 리케도르안 또한 전투태세를 하고 있으리라.

이미 굳이 말이 하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쯤은 짐작할 수 있으니까.

“그 맹약이란 거, 깨기 참 쉬운 모양이네?”

“그렇지는 않아요. 아직 심장에 새겨져 있을걸요?”

잠시 나긋한 말씨로 돌아온 그녀가 말했다.

“다만 우리가 맹약할 때에 기간을 말하지 않았을 뿐이죠.”

“처음부터 사기를 칠 공산이었다. 이거네?”

“당황하지 않으시네요?”

“뭐. 나도 철석같이 믿고 있던 건 아니라.”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곱게 살아온 건 아니라. 적당히 의심하고 거리 두는 법은 알거든.”

손끝마다 푸르른 기운이 치솟았다.

“싸움을 각오한 거라면야.”

처음부터 그녀가 약속을 지키든 지키지 않든 저 영혼이 돌아가는 건 정해진 일이었다.

“부딪치면 그만이지.”

어차피 있을 것 같던 싸움 지금 일어난 거나 마찬가지인 거지.

“……저를 믿지 않는 것과 별개로 잘해주던걸요?”

“그건. 댁들 영혼이 어떤 상태든 내게 일을 시킨 신은 신경 쓰지 않지만 내가 나름대로 복지를 챙겨준 거라 하자고.”

나는 손에 푸른 기운을 둥둥 띄운 채로 씩 웃었다.

“내가 딱 댁 몸 같은 나이대 여성에게 참 약하거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건 그리움이 만들어낸 상처고 흔적이었으니까.

동생 같던 하얀 장미의 잔상을 흩트리며 나는 고개를 좌우로 한 번씩 움직였다.

“유감스럽지만, 나도 돌아갈 수 없는 사정이 있어요.”

“흐응, 그놈의 유감. 그만 찾아도 되지 않나?”

“나는 이미 내 세상에서 죽었거든요.”

나는 멈칫했다.

그녀가 내 얼굴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반응을 보아선 역시, 여태 돌려보낸 영혼은 육체가 남은 영혼들이었나 보네요.”

우르슬은 그리 말하며 상체를 살짝 숙였다. 그녀의 손이 자신의 허벅지를 더듬나 싶더니, 이내 녹색 기운이 마구 뭉쳤다.

그 사이로 손을 꺼냈을 때 그녀의 손에는 가늘고 긴 검이 들려 있었다.

“그러니 난 전력을 다할 생각이에요. 남아서 더 살고 싶거든요.”

나는 리케도르안을 흘끗 보고는 자세를 낮췄다. 이대로 문을 열어 바로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그녀가 여기 남으면 저 몸의 주인은 어쩌라고?

죽은 자라면, 더욱이 산자의 육체를 앗아가선 안 될 일이다.

“미리 경고했어요. 나는 전력을 다하겠다고.”

“리케도르안!”

동시에 리케도르안이 검을 들어 올렸다.

땡그랑!

그러나 우르슬은 놀랍게도 자신의 검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무기를 버려? 어째서?

잠시 당황하는 사이에 그녀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왜 쓰러진 거지?

“리케도르안, 일단 저 사람 몸을 확인해봐야…….”

“아뇨. 영혼이 사라졌어요. 그대로 도망간 것 같아요, 이아나.”

영혼만 빠져나와 도망갔다고? 그럴 수가 있나? 내 표정이 절로 심각해졌다. 지금까지 송환 중에 전혀 없던 사례였다.

“영혼 홀로 도망갈 수 있었어요?”

“그건 잘 모르겠지만 저 몸에서 더는 힘이 느껴지지 않아요.”

그랬다. 나 또한 쓰러진 몸에서 더는 강대한 힘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한순간에 어디로 갔단 말인가?

심지어 나는 영혼의 모습조차 보지 못했다. 분명 영체가 빠져나올 때는 흐릿하게나마 모습을 보였었는데…….

기운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그녀의 힘 정도와 크기를 잘못 판단한 걸까 싶었다.

지난 영혼들처럼 도망가지 못하게 장벽부터 쳤어야 했나. 입술을 꾹 깨무는데 문득 위화감이 느껴졌다.

“리케도르안?”

“네. 이아나.”

어느새 리케도르안이 검을 땅에 꽂고 내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는 잔뜩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그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죄송해요. 이아나. 제가 좀 더 자세히 관찰했다면 놓치지 않았을 텐데…….”

“아니에요.”

나는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는걸요. 이건 둘 중 누구의 탓도 아니에요.”

나는 손을 들어 그의 턱을 톡 두드렸다. 힘을 풀라는 듯.

“굳이 찾자면…… 이런 사례를 알려주지 않는 망할 신의 탓이죠.”

나는 리케도르안을 달래는 한편 조금 전 느낀 위화감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그러다 말고 흠칫했다.

“르안?”

어느새 리케도르안이 내 손바닥에 얼굴을 비비고 있었다.

“네. 이아나.”

이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는 실수할 때면 축 처진 짐승마냥 눈치를 보며 매달리곤 했다.

오늘만 해도 햄버거집에서 그가 실수로 케첩을 엎고 정리하는 동안 눈치를 보며 울상을 지었으니까.

잘 실수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럴 때마다 최선을 다해서 귀여움을 보이는 남자였다.

나는 리케도르안의 뺨을 만져주며 생각에 잠겼다.

그사이 리케도르안은 큰 몸을 내게 안기다시피 매달렸다. 나는 그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그의 얼굴이 차차 아래로 내려가며 목줄기에 입을 맞출 듯 가까워졌다가…… 떨어진다. 곧 그는 내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음, 르안?”

나는 웃음을 흘리며 그의 어깨를 톡 두드렸다.

“아직 밖인데 집에 들어가서 나머지를 하면 어때요?”

허리에 감긴 리케도르안의 팔에 아프지 않게 힘이 들어가며 나를 잡아당겼다. 나는 순순히 이끌려가 주었다.

리케도르안이 이마를 비볐다. 그러고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귀로 속삭였다.

“일이 잠시지만 끝났잖아요. 예뻐해 주세요, 응?”

분명 내 르안은, 일이 끝나기 무섭게 내게 달라붙는 남자이긴 했다…….

그때마다 이렇게 순진하고도 야살스러운 얼굴로 웃기도 했고.

나는 천천히 그의 어깨에서 손을 떼어냈다. 그러고는 살살 그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이윽고 고개를 숙이다 말고 헛웃음을 들이켰다.

미안해요. 르안.

콱.

그의 머리칼을 콱 잡아당겨 들어 올렸다.

“이, 이아나?”

허공에서 시선이 교차했다. 나는 입술을 삐뚜름하게 끌어올렸다.

“어디서 내 르안 행세야?”

미안하지만 난 하늘에 맹세코. 내게 매달리는 동안 이 얼굴이 붉어지지 않는 경우를 본 적 없다.

“왜 그래요. 이아나?”

리케도르안이 내게 머리를 잡힌 채로 울상을 지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무서워요…….”

“미안한데, 내 르안은 그런 소리 안 해.”

“어떤 말을요? 무섭단 거요?”

“마음 아프게도 어린 시절에 너무 험한 진창을 굴러서 말이야.”

리케도르안은 성인이 되어서도 아픔은 물론 공포와 두려움을 잘 느끼지 못했다. 유년 시절이 남긴 흉터였다.

오직 나를 잃는 것에 두려움을 느낄지 모르나…… 그는 내게 부담이 될까 그런 말조차 입에 담지 못하는 남자였다.

“이아나. 왜 알 수 없는 소릴 하는 거예요?”

리케도르안이 울상인 얼굴을 차차 지워내며 입술로 나른한 미소를 그렸다.

청순한 얼굴 위로 띄워진 유혹적인 낯은 이미 오래전부터 보아온 미소이기도 했다.

늘 이 남자가 작정하고 유혹하고자 마음먹는다면, 누구든 당해낼 재간이 없으리라 생각했었다.

달빛은 기가 막힌 조명이었다.

그는 고개를 기울인 채로 나를 물끄러미 담았다. 그는 그대로 내 손을 들어 이로 살짝 깨물었다.

“어디가 달라 보인다는 거예요?”

내 손을 빼내며 붉은 혀로 입술을 축인다. 누구라도 숨을 삼킬만한 광경이었다.

“난 그대로인데.”

그는 내 얼굴을 바라보며 나직한 미소를 터트렸다. 손가락을 움직여 내 손바닥을 살살 문지르는 것마저 녹진한 유혹을 드러냈다.

“이상하네. 이아나. 내 얼굴에…… 약한 것 아니었어요?”

“에이. 이미 졸업했죠.”

난 씩 웃었다.

미안하지만 이런 유혹은.

“고작 얼굴에 칠렐레 팔렐레 하기엔.”

이미 그의 짐승 버전이 판을 칠 즈음에 졸업했다 이 말이다.

“당신이 너무 많은 유혹을 해왔잖아요. 내 르안.”

그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그러고는 그대로 르안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우리의 얼굴이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가까워졌다.

달빛에 선연한 이 푸른 눈동자는 더는 내가 알고 있던 시선이 아니었다.

고작 이 정도도 눈치 못 챌까 봐?

나는 생긋 웃으며 한 글자, 한 글자 뚝뚝 끊어 똑똑히 말했다.

“그래서 내 남자의 몸을 차지한 막돼먹은 영혼 새끼야. 좋은 말 할 때 나오죠?”

울먹이던 리케도르안이 천천히 표정을 지워냈다. 곧이어 손가락으로 입술을 닦아내며 피식 웃었다.

“안 통하네?”

그 순간 펑! 근접거리에서 작은 폭발이 일었다. 이는 나를 상처 입히지는 않았지만 한순간 시선을 빼앗기엔 충분했다.

퍽!

거친 손아귀에 리케도르안의 멱살을 놓쳤다. 눈을 뜨면, 어느새 한참 멀어져 있는 르안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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