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79/87)

***

이로부터 다섯 달 뒤.

달빛이 독야청청 뜬 밤, 불이 꺼지지 않는 도시로 인공적인 불이 땅을 가득 메웠다.

네온사인이 불꽃처럼 도시 곳곳을 수놓는 거리. 때마침 주말이 다가오는 날인지라 사람이 꽤나 많은 편이었다.

아니. 술집이 즐비한 거리니 없을 수가 없었다.

“으아아악!”

여러 사람이 웃고 또 심심치 않은 숫자가 걸어 다니는 거리로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달려가는 남자가 있었다.

사람들을 잽싸게 피하는 것은 물론 가끔은 사람을 치거나 넘어지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꺄악, 언니!”

“윽. 이게 뭐야. 이봐! 거기 안 서?”

넘어진 사람은 참지 않고 욕설을 뱉었지만 그 소리는 범인에게 닿지 못했다.

이미 듣지 못하는 곳으로 한참 멀리 뛰어갔으니까.

나는 뛰다 말고 멈춰 서서 얼른 넘어진 사람을 일으켰다.

장미의 힘을 깨우치며 내 신체 또한 차차 보통 이상의 신체 능력을 갖췄기에 일으키는 건 어렵지 않았다.

“괜찮으세요?”

평일이라지만 거리에 사람이 많았다. 이대로 두면 깔리거나 더 큰 불상사가 있을지 몰랐다.

“웬 이상한 사람 때문에 봉변당하셨네요.”

“아…… 감사합니다.”

일으켜진 사람이 얼떨떨한 얼굴로 인사했다. 나는 싱긋 웃고는 손을 흔들었다.

“별말씀을요.”

여유로운 척 쓰러진 사람을 일으켰지만 사실 마음은 이미 다시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얼른 몸을 돌려 다리로 자리를 박찼다. 이렇게 뛰어본 적이 언제인 건지.

아니다. 한 세 달간 몸 쓰고 뛰어다닐 일은 많았으니. 비교하려면 신이 두 번째 부탁을 한 날 이전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 거다.

이가 부득 갈렸다.

‘곱게 잡혀서 제령이나 당할 것이지. 도망치기는 왜 치는 거냐고!’

넘어진 사람을 일으키느라 뒤늦게 출발했지만 걱정은 없었다.

이미 날 대신해 먼저 달려간 리케도르안이 영혼이 빙의한 몸을 쫓고 있을 테니까.

그러나 이가 부득 갈리고 분기가 샘솟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일주일째 추격 중이었으니까.

이번 영혼은 어찌나 도망에 능한지. 우리의 정체를 깨닫자마자 도망가서는 요리조리 잘도 피해 다녔다.

이쯤 되니 만사 무심한 나로서도 화가 치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달리면서 입술을 꾹 깨물고 속으로 욕을 마구 중얼거리는데, 머릿속으로 웅장하고도 차분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응. 휘슬 고마워. 난 괜찮아.”

내 수호신, 휘슬의 위로에 나는 얼른 마음을 추슬렀다.

“후, 진정하자. 진정.”

앞을 바라보면 사람들이 가득했다. 나는 요령 좋게 사람을 피하며 리케도르안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르안이 있는 방향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첫 번째로 나는 본능적으로 리케도르안이 있는 곳을 알 수 있었다. 논리로서 설명할 수 없는 감과 능력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쪽이네.”

리케도르안이 머무른 곳에는 향기가 났다. 정확하게는 그가 힘을 쓴 곳에는 진한 장미 향기가 남아 있었다.

보통 사람 이상의 감각을 갖추게 된 내게는 아주 잘 느껴지는 향기.

이런 요소들로 그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리케도르안의 흔적을 보며 그 또한 심상치 않게 분노를 느꼈음을 알 수 있었다.

능력을 꽤 강하게 썼으니 말이다.

하긴 리케도르안의 분노는 이번 영혼이 요리조리 잘 피해서라기보다는, 이 미꾸라지 같은 놈이 나를 화나게 했다는 사실에 있는 것 같았지만.

-인간, 언제 오냐 냥!

“간다, 가.”

곧 인적이 드문 길로 돌입했다. 오르막길이 쭉 이어지니 자연히 사람이 줄어든 꼴이었다.

리케도르안이 적절하게 이런 길로 잘 유인한 듯했다.

나는 마침내 도착한 어둑한 공터에 우뚝 서 있는 남자를 보았다.

르안이었다.

“하아, 잘 잡았어요?”

나는 멈춰 서서 숨을 골랐다. 사실 숨은 그리 차지 않았지만 마음을 다스리자는 공산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며칠 전 나흘씩이나 이끈 추적에 분을 이기지 못해 빠르게 송환시키려다 말고 이 영혼을 놓쳤으니.

머리를 가라앉히자. 신중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벌써 8번째 영혼이었다.

지난 다섯 달여간의 과정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여정이었다.

그래. 이제 와서 망칠 수는 없지.

나는 마지막으로 이를 갈고는 표정을 정돈했다. 저벅저벅 걸어갈수록 르안의 힘이 가득 느껴졌다.

“아니. 유인을 잘했다고 해야겠네요.”

“이아나.”

검을 들고 있던 리케도르안이 고개를 돌렸다. 아마 보통 사람에겐 저 무기가 보이지 않았을 터다.

한없이 차갑고 진지하던 얼굴 위로 봄볕같이 무구한 미소가 떠올랐다.

“왔어요?”

“이미 내가 온 걸 알았으면서.”

내가 리케도르안을 느끼듯이 그도 나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르안에게 나와 같이 장미를 찾는 능력이 있다기보다는…….

물론 장미로서 푸른 장미를 찾게 되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와 나의 힘이 일부지만 섞인 탓이 클 것이다.

푸딩이가 내 소유나 마찬가지니, 섞이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가장 큰 건 역시 몸을 섞은 거겠지만.

밤을 돌이켜보면 음, 좀 과장해서 안 한 날이 없는 것 같은데.

괜히 힘이 ‘짐승’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렇게 말하니 새삼 남사스럽네.

“이아나?”

리케도르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 급박한 순간에 나도 모르게 잘나빠진 내 반려 미모를 감상했다고는 할 수 없어, 얼른 정신 차렸다.

“미안해요. 새삼 너무 잘생겨서요.”

리케도르안이 해사하게 웃었다.

“로즈의 마음에 든다니 행복하네요. 앞으로 가꿔야 할까 봐요.”

“이미 타고났는데. 뭘 가꿔요.”

엄지를 치켜 세워주었더니, 리케도르안이 귀를 발긋 물들였다.

이곳에 온 지 몇 년씩이나 지난 지금 리케도르안은 여전히 이 세상에, 또 사회에 관심이 없었다.

지배자로 살아온 세월 때문일까. 가끔 마주치는 사람들도 리케도르안을 어려워했다.

짐승화란 힘 때문인지, 그는 보통 사람에게 위압감, 압박감 등 긴장을 일으키게 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의외로 순수하게 외모에 감탄하는 사람은 옆집 막내딸밖에 없었다고 할지.

나는 어찌 보면 태평하게 보일 대화를 나누면서도 한곳에 흘끗 시선을 던졌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면 그곳엔 꼼짝없이 서 있는 한 노인이 있었다.

파지직.

그러나 노인의 주변으로 번개와 같은 스파크가 튀며, 노인의 얼굴 위로 어떤 형상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다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이것은 고장 난 홀로그램 같은 느낌이었다.

저렇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모습, 저 젊은 남성의 모습이 저 몸에 깃든 영혼의 진짜 모습이었다.

그는 우리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언짢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이 한 쌍의 바퀴벌레 같으니.”

주름진 입술이 떨어지며 흘러나온 말에 난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뭐라는 거야.

“허, 못 본 사이에 이곳 언어가 늘었네요?”

“배웠느니라.”

무려 여덟 영혼이나 제령, 송환을 거치며 느낀 거지만 영혼들은 빙의 후 비슷한 적응 과정을 거쳤다.

여기서 훌륭하게 적응하는 영혼이 있는가 하면 시간이 지나도 이곳의 말을 제대로 발음하지도 못하는 영혼도 있었다.

저 영혼은 단연 후자에 속했다.

그런데 며칠 못 본 사이에 언어가 수준급이 되어 나타났다.

“조그만 네모 상자에서 보았지. 당신들 같은 남녀를 바퀴벌레라 하였노라.”

영혼은 보란 듯이 턱밑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꽤나 고풍스러운 말투였으나 내겐 탐탁지 않게 들렸다.

하기야 그가 뭘 하든 일주일씩이나 고생시킨 영혼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지금까지 영혼은 가지각색의 차원에서 넘어왔는데, 내가 알기로 저 영혼이 넘어온 차원은 이쪽 세계에서 무협지에 나오는 곳과 비슷한 곳이었다.

실제로 경공이니 뭐니 운운하면서 잘도 움직였었고.

나는 고개를 돌려 리케도르안을 보았다.

“야. 푸딩아, 저거 네 말투인데? 네 처음 말투랑 엄청 비슷하다.”

정확히는 그의 검을 보며 말했더니, 곧 머릿속으로 캬아옹 하는 하악질 소리가 들려왔다.

-비, 비교하지 마라! 이 몸은 저러지 않았다, 냥!

“허,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더니. 그새 까먹은 거야?”

-안 그랬다! 안 그랬다, 냥!

“내가 열심히 교정시켜줬잖아. 섭섭한데.”

푸딩이랑 이야기하는 사이 노인이 잽싸게 몸을 움직였다.

퍼억!

“어딜.”

그러나 노인의 움직임은 곧 새파란 벽에 가로막혔다. 노인과 우리를 둘러싼 반투명한 푸른 벽.

노인이 이곳에 도착하기 전부터 깔아둔 것이기도 했다.

“내가 이걸 깔아두느라 얼마나 개고생을 했던지.”

“크, 크흠.”

“사용 못 했으면 울 뻔했어.”

노인이 머쓱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하는 동안 나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아저씨, 정의로운 정파니 뭐니 운운하면서. 하는 짓은 참 얍삽합니다?”

“필요에 따라서, 또 생존을 위해서는 결단을 내려야 할 때도 있는…….”

“개똥철학이네요. 신념이 필요에 따라 움직이면 그게 어디 신념이던가.”

심드렁하게 던진 말에 노인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 사이 리케도르안의 손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울면 안 돼요, 이아나.”

르안이 몹시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기에 나는 한차례 당황했다가 곧이어 얼떨떨하게 끄덕였다.

“안 울어요.”

울 뻔했다는 거지. 르안은 영 신경 쓰였는지 내 얼굴 곳곳을 담았다.

나는 씩 웃으며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착하네. 지나가는 말 한마디도 신경 써주고.”

“착하진 않아요.”

리케도르안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내가 쓰다듬기 좋게 내려주었다. 그러고는 작게 미소했다.

“로즈, 고삐를 쥔 당신 손에만 길들여진 거죠.”

이에 나는 비슷하게 작은 웃음을 터트리며 동의했다.

“그런 것 같네요.”

세상에서 오직 내게만 길들여진 짐승이라, 함께 지낼수록 느꼈다. 이건 참 행복한 일인 것 같다고.

내게도 스스로 몰랐던 독점욕과 집착이라도 있듯이 갈수록 마음이 커져가니까.

“자, 그럼 한담은 여기까지 하고. 할 일을 해볼까요?”

“네.”

나는 고개를 돌려 몰래 이곳을 나가려 힘을 움직이던 노인을 응시했다.

“자, 영감님. 아니. 안쪽에 든 건 아저씨인가? 아무튼 이제 집에 돌아가자고요.”

노인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발버둥 치는 쪽에 속했다. 그러나 지난 일곱 영혼 중 이런 영혼이 없진 않았기에 수월하게 제압했다.

애초에 다시 도망만 치지 않으면 상대하기 어려운 상대는 아니었다.

리케도르안이 지난 과정들처럼 노인을 꼼짝없이 제압하고, 노인의 몸 밑으로 거대한 ‘문’이 열렸다.

푸른 기운이 세찬 바람을 만들었다. 짐승의 아가리와 같은 문이 오직 영혼만을 데려가고, 마침내 공터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는 바람으로 마구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내리며 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여덟 번째가 끝났네요.”

문과 거대한 주술진이 사라진 곳엔 쓰러진 노인의 몸과…… 진하게 남은 장미 향기뿐이었다.

어느새 검을 푸딩으로 다시 되돌린 리케도르안이 성큼 걸어왔다. 그가 상반신을 숙여 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문득 든 생각인데, 지금 수행 중인 이 일련의 과정은 리케도르안이 없었다면 상당히, 아니. 정말 힘들어졌을 듯싶었다.

보다시피 영혼들이 하나같이 얌전한 작자들이 없었던지라 내가 문을 여는 동안에 제압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나도 제압하는 건 어렵지 않았으나,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할 수 없었으니.

‘나 잘했어요?’ 묻듯이 내게 몸을 묻는 남자를 마주 안아 등을 토닥여 주었다.

“잘했어요.”

“그럼 잘해줄 건가요?”

“어디서요?”

귓가로 낮은 웃음소리가 넘어왔다.

“침대에서요.”

리케도르안의 당돌한 말에 푸흡, 웃음을 터트렸다.

“나쁘지 않네요.”

오늘도 새벽 별을 볼 즈음에 잠이 들려나. 여러모로 나쁘지 않았다. 특히나 하나의 영혼을 돌려보내고 며칠쯤 맘 편히 쉴 수 있는 날에는 더욱더.

이제 남은 것은 둘.

나는 이 과정이 성가시긴 하여도 쉬울 거라 예상했다.

앞선 과정이 그랬듯이 말이다.

그러나 이건 실수였다.

아니. 아주아주 큰 오산이었음을 알게 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

쾅!

지축을 흔드는 굉음과 함께 땅이 마구 진동했다. 떼어낸 발아래로 후드득 흙과 돌이 떨어진다.

마치 거미줄 형태처럼 균열이 간 대지는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하아, 하아.”

나는 좀처럼 내쉰 적 없던 거친 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조금 전 내가 있던 자리로 거대한 검이 꽂혀 있었다.

아마 움직이는 것이 조금만 더 늦었어도 저 날카로운 대검에 베였을 것이다.

-이, 인간. 어떻게 좀 해보라, 냥! 이러면…….

푸딩이의 안타까운 울음소리가 마구 머릿속을 울렸다. 대답해주고 싶은데 그럴 겨를이 없었다.

검이 다시 내게로 날아왔으니까.

저 검이라도 떨어트려 놓으면 좋을 텐데. 장미 줄기로 손과 꽁꽁 묶어둔 검을 떨어트리기란 요원해 보였다.

마침내 검을 다시 들어 올린 남자가 고개를 느슨하게 기울이며 나를 바라봤다.

달빛이 선명한 아래 내게 검을 겨눈 이는 아름답게 미소 지었다.

저 눈은 완전히 맛이 가 있었지만.

“르안.”

내 부름에 리케도르안의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검을 휘두르는 것과 함께.

나는 검을 피하며 생각했다.

……어떻게 제정신으로 되돌리지?

머릿속으론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나 되짚어보면서.

시간은 리케도르안이 이상해졌던 한 시간 전으로 돌아간다.

신이 내린 임무 완수, 고지가 코앞이었던 그때로.

***

리케도르안이 내게 검을 휘두르게 된 이유를 되짚기 위해서는 좀 더 거슬러 올라가 그전의 상황을 알아야 한다.

때는 화창한 낮이었다.

여덟 번째 영혼을 송환시킨 뒤 일주일이 흐른 날이기도 했다.

“신에게서 신호가 왔네요.”

최근 몇 달간 수행 중인 업무를 제외하면 우리는 집에만 콕 박혀 있는 편이었다.

그도 나도 약속은 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둘만 있는 공간을 선호했다.

아무래도 밖으로 나가면 워낙 눈에 띄니 말이다.

“일주일 만에요? 이번엔 좀 빠르네요. 아니다. 보통인 건가.”

“들쑥날쑥했으니까요.”

우리가 영혼을 돌려보내는 방식은 이러했다. 신이 처음에 10명이라 통보한 뒤로 한 사람씩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을 처리하고 나면 다음 사람의 위치를 알려주는 식이었다.

“무슨 신의 일처리가 이렇게 주먹구구식이래요?”

다음 영혼의 위치를 알려주는 시기는 제각각이었다. 하루 만에 알려주는 경우도 있었고 길면 한 달 뒤에 위치를 알려주는 경우도 있었다.

일주일 만에 준 건 평균이라 할 수 있는데…….

“아니, 우리를 이 세계로 보낼 때는 세계의 규칙이니 원리니 엄청 운운해 놓고서.”

외주는 이런 식으로 주니까 불만인 거다.

“언제 줄 거면 줄 거라고 미리 말을 해주든가. 규칙적으로 주기라도 하든가.”

턱을 괸 채 투덜거리는 동안 허리 뒤로 둥글게 감싸는 팔이 느껴졌다.

탄탄한 팔이 내 허리를 감싸 안는 것과 동시에 등 뒤에서 탄탄한 벽과 같은 몸이 느껴졌다. 아마도 지금 등으로 느껴지는 살은 맨살일 거다.

리케도르안은 일어날 땐 늘 상체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으니.

목덜미로 낮은 숨이 느껴졌다.

촉.

리케도르안은 내 뒷목에 부드러이 입술을 맞췄다. 그만이 할 수 있는 귀여운 위로에 웃음을 살짝 터트렸다.

“화난 건 아니에요.”

“네. 로즈.”

“그냥 좀 불만인 거지.”

나는 웃다 말고 곧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내 입술이 열리며 나지막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솔직히 이번 일 말이에요. 아니, 전의 일도 그렇고.”

“네.”

사실 모든 임무의 시작은 내가 다른 세계의 장미들을 보고 싶어서 벌인 일이었다.

“내 소원을 이루기 위한 일인데, 괜히 당신이 고생을 많이 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조금 별로예요.”

리케도르안의 손이 멈칫했다.

신이 준 두 번째 임무는 아무리 봐도 나 혼자 했다면 상당히 힘들었던 일이었다.

말했듯 내가 문을 여는 동안 상대를 제압하고 움직이지 못하게 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리케도르안이 이 역할을 너무나도 잘 수행해준 터라 일이 더 쉽게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여덟 번의 시도 동안 항상 쉬웠던 건 아니다.

다른 세계에서 차원을 넘어온 건 대체로 이 이동을 견딜 만큼 강인한 육체와 정신을 가지고 있단 소리였다.

차원간 벽이 잠시 허물어지는 것을 ‘균열’이라 하는데. 균열이야 우연히 생겼다고 해도, 이 균열이 끌어당기는 건 강인한 영혼이라 한다.

그래서 상대한 이들이 하나같이 뭔가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던 것이다.

평범한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지?

그 덕에 리케도르안이 무기를 꺼내지 않는 일이 없을 정도였다.

어째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돌아가기 싫어했으니 말이야.

어디 소설 주인공 같은 능력자들이 후두둑 떨어지는데, 아무리 리케도르안이라도 성가셨을 거다.

다행인 점은 제압 자체는 어렵지 않았던 거다.

그 덕에 난 새삼 리케도르안의 힘이나 내 힘이 만만찮은 정도란 걸 알았지만.

리케도르안의 손을 두드리는 속도가 느려졌다.

‘그러고 보니 나는 죽은 신의 ‘파편’이라고 했지.’

아직도 이 개념을 완전히 이해하진 못하겠지만 쉽게 생각했을 때 신의 일부라고는 하나 신은 신이니까. 그래서 센 건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었다.

우리의 기원으로 올라가면 신과 신을 가장 따르던 어떤 존재.

죽은 신을 따라 기꺼이 함께 장미가 된 거라 했지. 가만히 지난 이야기를 되새기는 동안 툭 뒷목으로 살짝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 없어요. 이아나.”

리케도르안에게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잠에서 덜 깬 탓에 동굴에서 흘러나오는 것처럼 깊고 웅웅 울렸다.

그는 몽롱함이 느껴지는 음성과 함께 부빗, 머리를 비볐다.

“이아나가 하고 싶은 일이 제가 하고 싶은 일이에요.”

“르안.”

“순종이 아니에요. 제가 스스로 하고 싶은 걸 선택한 거죠.”

촉. 목 뒤로 다시 한번 입술이 내려앉았다.

“소원이 이뤄졌을 때 당신의 환한 미소를 볼 수 있다 생각하면, 전혀 힘들지 않은 것 같아요.”

작은 바람 소리가 느껴졌다.

“물론 지금도 전혀 힘들지 않지만요.”

소리만 들었을 뿐인데 나를 껴안고 얼굴을 비비며 웃는 남자의 얼굴을 고스란히 그려졌다.

“당신 옆에 있는 것만으로 좋아요.”

리케도르안은 내 손을 잡아 그대로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어깨너머로 머리를 내밀어 내 손목이 쪽, 입을 맞췄다.

“당신이 날 영원히 구속해줬으면 좋겠어요.”

“또또 나쁜 말.”

“진심인걸요.”

“……어디 붉은 끈으로 내 손이랑 당신 손목이라도 묶어줘요?”

한숨을 푹 쉬며 농담처럼 말했을 뿐인데 리케도르안이 번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시야가 휙 흔들리나 싶더니, 나는 어느새 리케도르안의 허벅지에 반대로 앉혀져 있었다.

그를 마주 보는 자세였다.

엉덩이 밑으로 단단한 허벅지가 느껴졌다. 문제는…… 느껴지는 게 허벅지만은 아니었단 점이지만.

아니, 오늘은 어디에 수납했는지 이렇게 알고 싶은 건 아닌데. 나는 티를 내지 않는 척 속으로 숨을 삼켰다.

“정말? 정말 묶어줄 거예요?”

“……농담이니까. 진심으로 좋아하지 말아요.”

그러자 리케도르안이 눈에 띄게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그에게 귀가 달려 있었다면 축 늘어졌을 것 같다.

“대체 왜 묶는 걸 좋아하는 거예요? 당신 감옥에서 좋지 못한 기억이 있잖아요.”

“감옥에서 지냈기 때문에 상상에 한계가 있는 거예요. 로즈…….”

“윽.”

이런 식으로 받아칠 줄은 몰랐던지라 나는 말문이 막혔다. 이렇게 불쌍한 척하기야?

“묶어 줄 거예요?”

“……침대 위에서 이런 자세로 말하지 말아 줄래요? 의미가 달라지거든요?”

리케도르안이 낮게 웃더니 곧 발긋 물들인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대로 내게 이마를 툭 부딪쳤다.

“로즈, 저는 어떤 의미라도 좋은데…….”

커다란 손이 내 손을 살살 문지르며 깍지를 껴왔다.

나보다 한참 큰 남자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불편한 자세로 잔뜩 구부린 모습은 거대한 짐승이 애교를 부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리케도르안이 잔뜩 붉어진 눈 밑을 숨기지 않으며 속삭였다.

숨소리와 함께.

“저를 가져주실 거죠?”

결국 나는 늦은 오후가 될 때까지 움직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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