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78/87)

외전. 불협화음 두 장미가 앙상블이 되기까지

―프란시아와 르나그가 지구로 넘어오기 1년 전.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요.”

현재, 나는 식탁 앞에 서서 턱을 부여잡은 채로 잔뜩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밖으로 꺼내놓은 내 수호신 휘슬과 푸딩이가 슬그머니 내 눈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조그만 동물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테이블을 지속해서 쳐다봤다.

그러나 내가 바라보는 테이블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고민하는 것은 테이블 위가 아니라 사실 내 몸에 걸친 것이었으니까.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현재 내 몸에는 치수에 맞게 떨어지는 긴 원피스가 걸쳐져 있었다.

나는 한 바퀴 빙 돌았다. 발목까지 내려온 하늘하늘한 치맛자락이 종아리를 사락사락 스치며 흔들렸다.

“어째서요, 이아나?”

리케도르안은 식탁 반대편 의자에 거꾸로 앉아 있다 말고 고개를 갸웃했다.

의문이 가득 어린 눈이었다.

“잘 어울리는걸요.”

그랬다. 흰색과 보라색이 적당히 섞인 원피스는 외출용으로 적절했을 뿐 아니라 내게 잘 어우러졌다.

“나는 어울리지 않는 게 없어요, 리케도르안.”

“그건 그래요.”

……농을 건넨 것인데 냉큼 대답하는 그를 보며 잠시 멈칫했다.

“르안, 이럴 땐 그건 지나친 자신감이 아니냐, 타박을 줘야죠.”

“하지만 사실인걸요?”

“당신이 자꾸 그렇게 치켜세워주니까, 내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거라고요.”

내가 무심하게 고개를 살래살래 젓자. 리케도르안이 빙긋 미소했다.

그러더니 돌연 의자 기둥에 머리를 나른하게 기대며 입술을 달싹였다.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아요, 이아나. 그리고…… 이렇게 말해야, 당신이 내 애칭을 불러주잖아요.”

나는 옷자락을 세심하게 바라보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아직도 그게 그렇게 좋아요?”

그의 눈이 감길 것처럼 깊게 접혔다.

“네.”

나는 속으로 혀를 쯧 찼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몇 년 전에, 아니, 저쪽 세계에 있을 적부터 만들어줄 것을 그랬다.

이곳에서 머무른 지도 벌써 6년째. 내가 내 반려의 애칭 아닌 애칭을 부르게 된 것은 3년 전, 우연한 계기에서였다.

리케도르안이란 이름은 외국에서도 잘 쓰이지 않는 이름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름을 부를 때면 좀 더 시선이 몰리는 기분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눈에 띄는 외모인지라 궁여지책으로 이름의 끝을 떼어 불렀을 뿐인데…….

‘이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지.’

생각해보면 저쪽 세상에서도 긴 이름은 나름대로 짧게 줄여 부르는 것 같았다.

주로 친구나 가족, 친인척 사이에서 그렇댔지.

제이르가 옛날 제 부모님에게는 제르로 불렸다는 말을 무심코 떠올린 거였는데, 생각해내길 참 잘한 것 같다.

리케도르안은 이름 자체가 마음에 들었다기보다는 내가 짓고, 나만이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생겼단 것에 기뻐하는 것 같았지만.

“로즈.”

신이 정성 들여 빚은 듯 청초하고 아름다운 낯에 내 이름이 담겼다.

자신도 자신만이 부를 수 있는 이름이 갖고 싶다며, 부르기 시작한 것이 저 이름이었다.

거기다 부를수록 닳을까 봐 하루에 횟수를 제한하고 부르기까지 했다.

‘어디서 이런 요망함이 툭툭 튀어나오는 걸까.’

나는 리케도르안이 했듯 그에게 방긋 웃어주고는 다시 옷 쪽으로 눈을 돌렸다.

“네. 내 르안.”

나는 옷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제 그만 내 고민을 들어주지 않을래요? 이거, 어떡하면 좋을까요.”

내 말에 리케도르안이 내 손가락을 쪼로록 따라 왔지만, 역시나 조금 전처럼 잘 모르겠단 표정이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아나. 선물 받은 것이잖아요? 그냥 받으면 안 되는 걸까요?”

“끙……. 보통 선물이면 그렇겠지만.”

나는 옷자락을 잡은 채 한숨을 푹 쉬었다.

“받기엔 너무 비싸요, 이거. 옆집 아주머니가 주신 거잖아요.”

아무 생각 없이 옷 안쪽에 달려 있던 로고를 보고서 얼마나 놀랐던지. 이 동네가 그렇게 평범한 동네는 아닌 걸 알았지만…….

옆집 가족, 특히나 아주머니와 딸은 나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딸같이, 언니같이 여겨주는 건 고맙지만 가끔은 이걸 어떡하면 좋지, 싶은 선물을 건네줘서 고민이었다. 지금처럼.

“어……. 그냥 받으면 안 되는 건가요?”

리케도르안이 내게 금액을 듣고 눈을 크게 깜빡였다.

전직 대공이셨던 이분께서는 어떤 금액이 나오든, 그게 어째서요? 하는 무구한 눈을 보이곤 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니 저쪽의 돈으로 치환하지 못한 것은 아닐 테고. 그냥 통이 커도 아주 큰 것 같았다.

이쪽의 자본만능주의에 찌들지, 아니 물들지 않아서 다행인 건가 싶기도 한데…….

‘이 남자, 여기서 태어났으면 나한테 건물이라도 주려고 했지 않을까.’

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한숨을 폭 쉬었다.

처음 만날 적 고등학생이었던 옆집 막내는 어느새 대학교도 졸업한 성인이었다.

휴학이니, 졸업유예니 하다가 졸업은 꽤 늦게 한 것 같지만. 대학교도 같은 도시로 진학해서 오래도록 보아온 사이라서 나도 정이 안 쌓이진 않았다.

오히려 볼수록 프란시아 같으면서도 그녀와 다르게 나름 제멋대로에 활발한 면이 귀엽다고 할지.

나는 발랄한 얼굴을 지워내며, 의자에 앉았다. 하소연하듯 말했으나 어차피 돌려주지 못할 건 나도 알았다.

의도치 않게 가족과 헤어진 탓인지 나는 유달리 자식을 둔 엄마뻘 어른에게 약했다.

“이아나에게 정말 잘 어울려요.”

내가 앉기 무섭게 리케도르안이 다가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접고 앉았다.

그러고는 나를 올려다보는 낯이 영락없이 충성스러운 짐승이었다. 나는 푸흡, 미소를 흘려냈다.

“나는 뭐든 잘 어울린다면서?”

“그렇죠.”

“그럼 이건 어느 부분이 그렇게 잘 어울리는데요? 당신 마음에 든 점이 있어요?”

괜스레 놀리는 말투로 물었더니, 그는 왜인지 진지한 낯으로 고민에 빠졌다.

이렇게 성실하게 고민하라고 던진 질문은 아닌데.

“아, 알겠어요.”

리케도르안이 눈을 반으로 접어 웃었다. 그러더니 그의 조심스러운 손이 내 발목을 잡았다.

“실례해도 되나요, 이아나?”

“네? 어, 음. 네.”

어어, 하는 사이에 그가 내 한쪽 발목을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자연스럽게 올라간 다리 사이로 그의 얼굴이 파고들었다.

“르안?”

허벅지로 축축한 날숨이 느껴진다. 그는 손가락으로 내 살갗을 더듬다가 한 지점을 꾹 눌렀다.

“흐읏…….”

그곳은 다름 아닌, 붉은 장미 문양이 새겨진 곳이었다. 한참이나 그곳에 입술을 얹고 물고 핥던 그가 천천히 얼굴을 드러냈다.

머리의 반절을 내 긴 치맛자락을 둘러쓴 채로 해사하게 미소했다.

“이런 점이 제일 좋은 것 같아요, 이아나.”

리케도르안이 번들번들한 입술을 엄지로 닦으며 고개를 느슨하게 기울였다.

나도 모르게 그의 뺨을 잡았다.

“……인격이 변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네?”

그의 뺨을 잡은 채 이리저리 돌렸다. 잠시 눈을 끔뻑이던 그는 이내 유혹하듯 웃어 보였다. 내 마음을 다 안다는 듯이.

리케도르안이 그대로 상체를 일으켰다. 단단한 팔이 의자 등받이를 잡으며, 어느새 나는 커다란 몸에 갇혀 있었다.

“그런 모습도 좋아해요, 이아나?”

“아니……. 난 당신이면 어떤 모습이라도…… 좋죠?”

“좀 더 거칠고 사나워져도요?”

“그렇긴 한데. 안 그럴 거잖아요?”

“당신이 원한다면요.”

입술이 닿을 듯이 가까워졌다. 눈이 이미 갔네, 갔어. 나는 사랑에 푹 빠진 눈을 보며 실소를 흘렸다.

6년이란 긴 시간 동안 어찌 단 하루도 변함이 없는지.

나도 천천히 눈을 감을 때였다.

찌리리링!

불쾌한 벨소리가 집을 마구 울렸다. 거실 쪽에서 나는 소리에 나는 얼른 무시하고 리케도르안의 옷자락을 잡으려 했다.

“이아나.”

“……무시해요.”

찌리리링!

그러나 제 존재감을 알리듯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소리에 난 결국 이마를 부여잡았다.

“아, 정말!”

리케도르안을 슬쩍 밀어내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그런 나를 진정시키듯 어깨를 주무르고는 자신이 직접 거실로 다녀왔다.

다시 돌아온 리케도르안 손에는 조그만 쪽지가 들려 있었다.

“르안, 그거 가져오지 말아요. 버려버려요.”

“하지만 이아나, 필요하잖아요?”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끙 숨을 흘렸다.

“우리가 저걸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떠올려 봐요. 그 신은 사실 신이 아니라, 악신이라니까요?”

“그건…….”

리케도르안은 부정할 수 없는지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이아나의 소원이 달린 일이니까요.”

“맞아요. 그건 그런데……. 아니, 내 장미들을 직접 보게 해달란 소원치고는 너무한 것들을 바라잖아요.”

그랬다.

저 쪽지의 기원을 향해 올라가자면, 5년 차 되는 날 프란시아와 르나그가 너무 보고 싶었던 내가 참지 못하고 신에게 방법이 없느냐 물은 날로부터였다.

완강히 안 된다고 말할 것 같았던 신은 왜인지 턱을 문지르더니, 제 ‘부탁’을 들어준다면 고려해보겠다는 애매한 말을 흘렸다.

말이 부탁이었지 명령이나 다름없다는 걸 나도 리케도르안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1여 년간 받은 부탁은 솔직히 맨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아무튼 간에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나는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차원 간의 균열이 일어난 걸 대체 왜 우리가 메꿔야 하는 건지.”

“으음. 신이 건들 수 없는 영역이라고……. 저도 이해는 가지 않아요, 이아나.”

“지난번엔 웬 다른 곳으로 넘어가서 고생했잖아요? 그때 도와준 사람만 아니었다면 위험했을 거예요. 신도 그렇게 말했잖아요.”

신의 첫 번째 부탁을 수행하다 말고 나나 리케도르안이나 큰일을 겪을 뻔했다.

우연히 만난 저쪽 차원, 무슨 제국의 황제라나? 자기도 나처럼 차원을 넘은 적 있다며.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뻔했다.

지금 생각하면 오싹한 일이다.

몰랐던 사실이지만 지금 내가 있는 이 세계는 여러 차원과의 연결을 겸하는 광장 같은 곳이라나.

어쩐지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소설이 그렇게 많다더니, 알고 보면 이런 영향이 아닐까. 엉뚱한 생각마저 들었다.

“으으, 모두가 보고 싶은 건 사실이지만……. 정말 힘드네요.”

신은 약조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부탁을 들어준다면 프란시아와 르나그를 직접 만나게 해줄 것이고.

세 번째 부탁을 들어준다면…… 이곳에 머무는 시간을 줄일 수 있게 해주겠다고.

어떤 사정이든 간에 나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리케도르안을 사랑하는 만큼 미안함과 그리움이 함께 성장했으니까.

“펼쳐볼까요?”

한숨을 푹 쉬며 쪽지를 펼쳤을 때, 나와 리케도르안의 표정은 약속이라도 한 듯 굳었다.

아니, 뭐 씹은 표정이었다.

“로즈, 이, 신은 변태 아닐까요?”

리케도르안 말이 일리 있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신이 전한 쪽지에는 내가 생각해도 참 터무니없는 소리가 적혀 있었으니까.

‘변태라……. 으음, 과연.’

그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리케도르안이 사용한 표현은 흔히들 사용하는 ‘성도착적 이상증을 가진’ 의미로서 사용된 건 아니었다.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을 만큼 이상하긴 하다고 할까.

속된 말로 또라이네, 이거? 할 만한 소리였다.

“리케도르안, 우리가 첫 번째로 했던 일이 뭐였죠?”

이미 조금 전에 이야기를 나눴음에도 한 번 더 물었다. 물론 몰라서 물은 것은 아니고 이 어처구니없음을 더욱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차원의 균열을 메꾸는 거였죠?”

“맞아요. 우리가 그거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어요? 사실 신이 제대로 알려주지 않아서!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이었단 건 나중에 알았죠?”

나와 리케도르안은 특수한 경우에 속했다. 일단 리케도르안은 이쪽 세계의 영혼이 아니었으며.

나의 경우 이 세계에서 태어났지만 르나그와 프란시아가 있는 세계에 머물며 본의 아니게 장미들과 저쪽 운명에 깊이 연관이 된 탓에, 결과적으로 이쪽도 저쪽도 아닌 영혼이 된 상태였다.

이런 상태를 무어라 하는지 몰라도 신이 당장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할 영혼이라 했으니.

그 말이 맞을 것이다.

아무튼 간에 우리 둘 다 이쪽 세계에 속한 영혼은 아닌 탓에 세계의 영향력을 덜 받는다고 했다.

이쪽 세상의 관리자 입장에서는 우리가 불법 체류자나 다름없는 것이나 저쪽 신과의 협상 덕에 머무르는 것이라 해나.

일단은 내겐 수명까지는 여기 머물러야 하는 의무가 있었으니까.

이쪽 세상의 관리자는 리케도르안에다 체이서까지 여기 머무르는 대신에 몇 가지를 요했던 모양이고 그것이 신이 우리에게 주는 부탁과 맞물린 듯했다.

신끼리의 이해관계가 일치한 것이겠지? 결과적으로 우리가 속된 말로 뺑뺑이, 뺑이 치는 결과를 낳았지만.

첫 번째 부탁이 그러했다. 신들이 손댈 수 없는 차원과 차원 간의 결계를 신에게 건네받은 물건과 우리의 힘으로 납땜 비스무리하게 했으니까.

“그래요. 제가 먼저 신에게 청한 것도 있지만 말이에요…….”

프란시아와 르나그가 보고 싶다. 이 마음은 실로 진심이었다. 하지만 이 신이 우리를 공짜 노동 인력으로 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단 말이지.

“이게 뭐예요, 영혼? 영혼을 돌려보내? 우리가 무슨 불법 체류자 추심원이에요?”

화를 참지 못하고 식탁을 두드렸더니, 쪽지가 나풀나풀하게 흩날리다 말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닥에 대기하고 있던 푸딩이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앞발로 툭툭 건드렸다.

“푸딩, 건드리지 마. 지지야. 그거.”

-냥! 이상한 힘이 느껴진다, 인간!

“그렇겠지.”

신이 보낸 것이니 어련하겠어. 나는 차게 식은 표정으로 필기체 가득 새겨진 내용을 보았다.

볼수록 어처구니가 없는 내용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다른 세계에서 온 영혼들 돌려보내기 (0/10)」

열? 열? 내용도 내용이지만, 저기 써 있는 숫자가 더욱더 어이를 가출하게 했다.

정말 날로 먹는 공짜인력으로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아나…….”

어느새 끝내주는 미남부터 시작해 바닥에 얌전히 앉은 조그만 설표와 허공에 둥둥 뜬 조그만 고래의 얌전한 눈까지.

세 쌍의 눈동자가 나만을 향했다. 정말이지 긴 시간 동안 변함없는 순수하고도 맹목적인 눈들이다.

정확히는 내 결정을 기다리는 거겠지. 나는 고심 끝에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거절은 불가했다.

나는 쪽지를 주워서 손에 꾸깃 구겼다. 어느새 분노를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심드렁한 표정으로 손을 응시했다.

……하긴 하더라고, 결코 잊지 않을 테다.

“해요. 해.”

***

리케도르안과 이곳에 온 지도 6년째. 이쪽 세계와 프란시아, 르나그가 있는 세상의 차이점을 꼽으라면 아주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개중 특별히 손꼽히는 것이 있다면 신분제 사회일 것이고.

두 번째로는 이쪽 세계의 사람들에게 나와 리케도르안이 아주 특별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이건 비단 외모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나야 동네 사람들처럼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이라 쳐도 리케도르안은 상당히 눈에 띄었다.

거기다 보통 사람은 따라오지도 못할 만큼 예쁘고 청초하며, 아름다운 미남이었다.

이건 팔불출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진실이다.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하나 말했듯 외모에서 그치지 않고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단 점이다.

“언니? 외출하시나 봐요!”

리케도르안과 대문을 나섰을 때 반가운 목소리가 우릴 반겼다.

고개를 돌리면 편안한 옷차림을 한 옆집 학생, 아니. 이제 학생이 아니지. 옆집 막내딸이 손을 붕붕 흔들고 있었다.

“오랜만인 것 같아요!”

이제 막 파릇한 신입 사원이 되었다는 옆집 막내딸은 마치 대학교 신입생이던 날처럼 여전히 푸릇한 인상을 주었다.

언제 봐도 참 밝단 말이지. 고민도 구김살도 없어 보여 보는 것만으로도 웃음 지어지곤 했다.

“응, 지아야. 주말인데 넌 어디 놀러 안가?”

“놀러는요. 주중 내내 굴려졌으니까 주말은 쉬어줘야죠. 언니……. 으으. 먹고 살기 힘들어요.”

돈 벌기가 쉬운 일이 아니라며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오빠가 언니 잘 지내냐고 묻던데.”

“아, 그래?”

옆집으로 산 지도 6년이나 되다 보니 저 집 식구랑은 거의 친인척처럼 가까워진 것이 사실이었다.

물론 애석하게도 그런 사람은 나뿐이었던 것 같지만.

“네! 얼굴 본 지 꽤 됐다고…….”

“됐다고?”

내 허리로 단단한 팔이 감기는가 싶더니 어깨너머로 불쑥 얼굴이 내밀어졌다.

흘끗 리케도르안을 보면 그는 이전의 대공 모습일 때처럼 새파란 한기를 얼굴에 둘둘 감고 있었다.

……애 체하겠다.

그러나 옆집 막내딸은 눈치가 없는 편이었다.

“앗, 안녕하세요, 오빠! 무슨 얘기냐면요, 우리 오빠가 언니를 보고…….”

“보고 싶어?”

하지만 리케도르안의 표정이 서늘해지자, 이것까지 못 알아보진 않았다.

얼른 나와 리케도르안의 눈치를 보더니 리케도르안의 반대편으로 걸어와 슬그머니 내 소맷자락을 잡았다.

“으앙, 언니!”

“아하하하……. 미안. 우리 집 애가 낯을 많이 가려서.”

그놈의 낯, 벌써 6년째 가리고 있었지만 그 점은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왜인지, 리케도르안은 옆집 아들을 매우 싫어했는데 이 이유를 짐작 못 할 바는 아니라 지적하는 대신 이렇게 슬그머니 넘어가곤 했다.

다행히 옆집 막내 아가씨도 얼른 이야기를 넘어가 주었다.

“그래서 언니, 오늘은 어디 가세요? 데이트?”

“데이트…… 음, 그렇긴 하지?”

따지고 보면 데이트긴 한데. 목적이 달콤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언니랑 오빠는 연애도 같이 사는 것도 오래오래 하는 것 같아요. 보기 좋아요!”

옆집 아주머니는 넌지시 나와 리케도르안이 결혼은 하지 않았느냐 묻곤 하던데. 이곳에서 결혼을 할 순 없으니, 그저 조금 더 있다 하겠노라 말하고 말았지.

“……보기 좋아?”

리케도르안이 넌지시 표정을 풀고 물었다. 지아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엄청요. 우리 엄마는 이렇게 사이가 좋으면서 결혼은 왜 안 하냐고 하는데, 저는 생각이 달라요.”

그녀는 주먹까지 꾸욱 쥐고 말했다.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을 때가 있잖아요. 설레고, 가슴 아릴 만큼 두근거리고요. 그런 사이라면 혼약은 언제 맺든 무슨 상관이겠어요?”

“혼약?”

잘 안 쓰이는 단어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보통은 결혼이라 하지 않나?

저쪽 세상에서는 약혼, 혼약을 많이 쓰는 것 같았는데. 이건 새삼 내가 저쪽 세계가 그리워서 연관 짓는 걸지도 모른다.

“혼약……. 결혼…….”

리케도르안은 왜인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넌 꼭 사랑을 해 본 듯한 말이네?”

“제가요? 아니요? 한 번도 안 해봤어요. 언니.”

언니랑 오빠 덕에 눈만 높아진 까닭이라며 지아가 울상을 지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말고 생긋 미소 지었다.

그러면서 손을 뻗어 탁탁 털어주었다.

“왜 그럴까. 인기 많을 것 같은데”

“그렇지도 않아요. 인기도 없을뿐더러 아닌 사람한테 인기는 인기가 아닌 거 아시죠?”

“응. 확실히 다른 인기는 있는 것 같다.”

“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 하며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동시에 그녀의 어깨를 터는 손은 멈추지 않았는데, 아마 이 아가씨는 보지 못했을 거다.

내 손에 희미하게 새어 나온 푸르른 빛을.

“언니 그럼 잘 다녀오세요!”

그렇게 옆집 아가씨와 헤어져 한참을 걸어가, 골목을 빠져나왔을 때쯤 리케도르안이 입술을 열었다.

“이아나, 치워준 거죠? 이번에도.”

“음, 네. 뭐. 그렇죠.”

내 손끝에는 여전히 푸른빛이 달라붙어 있었다.

“힘을 너무 쓰지 말아요. 그렇지 않아도 저쪽 세계와는 환경이 다른데……. 고갈되면 어떤 부작용이 올지 몰라요.”

걱정스러운 리케도르안의 말에 나는 동의하듯 고개를 주억였다.

“네, 그럴게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얼마 쓰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나는 조금 전 윤지아의 어깨 주변을 떠올리며 한숨을 푹 쉬었다.

“우리 옆집 아가씨는 ‘다른 존재’들에게 인기가 너무 많던걸요.”

이것만은 리케도르안도 동의하는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영혼들에게 그렇게 인기가 좋아서 좋을 게 없을 텐데 말이에요. 특히나 이 세계에서는.”

여기서 말하는 ‘영혼’이란 이 세계 말로 쉽게 풀이해서 ‘귀신’이었다. 죽었으나 떠나지 못한 영혼들, 혹은 반 토막 난 조각들.

나와 리케도르안이 이곳의 평범한 사람들과 가장 다른 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다른 세계의 힘을 가진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세계의 영적 힘, 즉 영혼과 귀신을 볼 수 있었다.

……이런 걸 대체 어디 써먹으려는지.

지금까지는 참 성가신 옵션이다 생각했지만 누가 알았겠는가.

이런 힘 덕에 신의 어처구니없는 부탁을 들어주게 되리란 걸.

마침내 신이 정해준 첫 번째 이정표를 따라 도착했을 때, 나와 리케도르안은 신음을 흘렸다.

“……로즈, 이 일 꼭 해야 하는 거죠?”

“으음. 그런 것 같은데요. 르안.”

어두운 골목길, 신이 건넨 쪽지 위 검은 나침반이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여기가 정확한 목적지란 말인데. 이 골목길에는 단 한 사람만이 존재했다.

아니, 정확히는 한 소년만이 서 있었고 중학생인지 체구가 아담하고, 교복을 걸치고 있었다.

그 소년 앞에는 같은 교복을 입은 무수히 많은 아이들이 그대로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패싸움이라도 했나?

싶기에는 양상이 1대 다수였다는 느낌이 강했다. 유일하게 서 있는 소년은 교복 넥타이가 흐트러졌을지언정 몸에는 상처가 전혀 없었고, 쓰러진 아이들은 하나같이 상처를 매단 채 신음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서 있던 소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새하얀 얼굴에 단정한 느낌이 드는 소년이었다. 그러나 그 얼굴은 순식간에 찡그려지고, 곧 손을 들어오더니,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크큭, 이 몸은 로시팔 제국의 흑마법사이시다, 큭, 크큭. 감히 누굴!”

나는 흠칫 놀라며 신이 건넸던 말을 떠올렸다.

신은 내게 지령을 준 뒤로 친히 편지를 한 장 더 보내, 주의사항 따위를 알려주었다.

이런 신에게 이 세계로 넘어온 영혼들이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미리 듣긴 했지만…….

“크큭, 하하하, 이곳의 인간들은! 약하기 그지없구나! 하하하하!”

나는 한 번 더 소년과 쓰러진 아이들을 보았다.

왼쪽 팔로 이마를 짚는 소년을 보며 나는 더욱 아연해졌다.

이걸 아홉이나 더 봐야 한단 말이야?

나는 비틀거리는 시늉을 하다 말고 발밑에 차이는 무언가를 보지 못했다.

땡그랑. 발에 차인 캔이 데구루루 굴러간다.

“누구냐!”

미친 듯이 웃던 소년이 거짓말처럼 웃음을 멈추고 고개를 홱 들었다.

골목의 그림자 속에서 번뜩이는 눈동자는 놀랍게도 금을 녹인 듯 진한 황금색이었다.

이 세계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색에다…… 소년의 몸 근처에서 기묘한 마력이 철철 느껴졌다.

이거야, 원. 재차 확인할 필요도 없겠네.

“아니, 대체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던 거지?! 감히…….”

소년이 한 발을 뒤로 물렸다. 금방이라도 싸울 자세였다.

“이 몸의 눈을 피하다니. 후, 너희는 이 세계의 기사들인가? 가디언?”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뭐라는 거야. 나와 리케도르안은 멀쩡히 걸어서 들어왔는데. 심지어 우린 따로 기척을 숨기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저쪽이 미친 듯이 웃느라 우리를 눈치채지 못한 거지.

“우린 걸어서 들어왔는데.”

심드렁한 내 말에 소년의 눈썹이 꿈틀했다.

“하, 이 몸의 감각을 피할 만큼 대단한 실력자들이란 건가……. 쿡. 이 세계도 재미나군.”

“웃느라 놓친 거겠지.”

“재밌구나. 아직 이 몸이 이 육체에 적응하지 못했지만, 곧!”

소년의 왼쪽 손은 하얀 셔츠가 단추가 풀린 채 팔꿈치까지 걷혀 있었다. 새하얀 팔에 검은 문신이 보였다. 모양이 흡사 날개 달린 검은 용 같았다.

이것이 살아 있는 듯이 꿈틀꿈틀 움직이더니 검은 연기가 흘러나온다.

눈을 깜빡이는 사이 어느새 소년의 손에는 나무로 된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저거, 이 세계에서 유행했던 판타지 영화에 나온 것과 비슷하게 생겼네. 거기서 하얀 수염을 배까지 기른, 나이 든 노인 마법사가 가진 마법 지팡이랑 비슷하게 생겼다.

구불구불한 나무 지팡이 끝으로 불길한 느낌이 드는 기운이 휘이이, 소리를 내며 맺혔다.

“이 세계는 바로 로시팔의 자랑스러운 흑마법사가! 지배!”

“……는 무슨.”

그러나 그보다 먼저 내가 한쪽 발을 들어 올렸다.

쾅!

발이 바닥을 찍는 순간 푸르른 기운이 파도처럼 몰아쳤다. 넘실넘실 흐르다 못해 골목을 가득 메운 내 기운이 소년을 에워쌌다.

“무슨 헛소리야. 대체.”

나는 한 손은 커다란 점퍼 주머니에 꽂은 채 미간 사이를 꾹꾹 눌렀다.

“날도 추워지는데 등골 한번 더 썰렁하게 만드는 인간이네.”

미간 사이를 꾹꾹 누르는 손을 휙 휘저었다.

촤르르륵.

곧 내게 익숙한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고함이 들려왔다. 소년이 내지른 비명이었다.

“이, 이게 뭐야! 놓지 못해? 놓아라! 감히 누굴!”

“뭐긴 뭐야. 사슬이지.”

나는 그대로 주먹을 꾹 쥐었다. 촤륵! 푸른색의 쇠사슬이 그대로 움직였다. 소년을 에워싸다 못해 느슨하게 묶었던 사슬이 그대로 힘주어 묶였다.

소년이 놀란 눈으로 날 보며 버둥버둥 움직였다. 나는 잠시 입을 막은 사슬은 풀어줄까 생각했지만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봐요, 사정은 알겠는데.”

조금 전에 보니까 지팡이에 기운이 맺히는 순간 무어라 외치려는 것 같았다.

만약 제이르처럼 뭔갈 외쳐서 마법을 쓸 수 있는 거라면 입을 동여매야 했다.

나는 한숨을 푹 쉬며 다른 손도 점퍼 주머니 안으로 넣었다.

“여기가 생각처럼 그리 녹록한 곳이 아니거든요.”

내가 본 신은 저쪽 세계의 날 여기로 보낸 신뿐이지만.

그 신에게서 이 세계의 관리자에 대해서는 들은 바 있었다. 이곳은 아주 많은 차원의 터미널 같은 역할을 해서 많은 영향을 받지만 그럼에도 멀쩡한 건 여기 관리자가 그만큼 존재감이 강해서라고.

그 관리자와 저쪽 세계의 신이 협의했기에 내가 저쪽으로 빠르게 넘어가는 대가를 두고 이렇게 움직이는 거였다.

결과적으로 졸지에 힘없는 내가 외주에 하청까지 받아서 움직이지 않는 게 아니겠나.

“봐요. 내가 그쪽 제압할 만큼 센데. 부탁받아서 그쪽 잡으러 움직이잖아요.”

소년, 다른 세계의 흑마법사가 눈을 깜빡깜빡 움직였다.

“얌전히 이야길 들을 준비 됐어요?”

이야기는 무슨. 사실 집행과정만 설명해주고, 바로 원래 세계로 돌려보낼 생각이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저쪽이 말로 뱉는 동의가 필요했다.

소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허튼짓하면 아주 그냥 쇠사슬로 미이라를 만들 테니 그렇게 알아요.”

아마 이 사람이 미이라를 알겠나 싶었지만 대충 짐작했겠거니 하고 쇠사슬을 풀어냈다. 물론 얼굴에 있는 것만.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파하! 감히 이 몸을!”

소년이 뜻을 전혀 알 수 없는 소리를 외친 순간 질척한 기운이 폭발적으로 쏟아졌다.

챙강!

푸른 쇠사슬이 조각조각 나더니 가루가 되듯 흩어졌다. 크게 힘을 쓴 것도 아니라 그다지 타격을 받지 않았지만 문제는 쇠사슬이 날아가며 소년의 몸이 자유로워졌다는 점이었다.

“하, 방심했어. 큭, 네 얼굴이 반반해서 방심한 거라고. 사실 이 몸의 끝은 여기가 아니지!”

무엇보다 저 말투를 더 듣고 싶지 않은데. 나만 그런가.

한숨을 쉬며 다시 힘을 일으키려 하는데, 그보다 빠르게 쿵! 바닥을 찧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면 소년이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으음, 이아나.”

그리고 리케도르안이 소년의 등을 밟은 채로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죽이는 건 안 되겠죠? 아, 안 되겠구나.”

리케도르안의 손에는 거대한 검이 들려 있었다. 붉은 장미가 새겨진 저 검은 그의 수호신 푸딩으로 형상화한 고유 무기였다.

“이 자가 당신을 욕되게 했어요.”

쟤가 욕을 했나? 아, 나보고 반반한 얼굴이라 그랬지.

딱히 기분이 나쁘진 않았지만 나는 난감한 얼굴로 리케도르안과 소년의 목에 겨눠진 검을 번갈아 봤다.

무기가 된 푸딩도 머릿속으로 가만히 두지 말라 아우성치었다.

“……딱히 욕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욕이에요. 그리고 당신을 마구 훔쳐봤어요.”

“노려본 거 아닌가요?”

“쳐다본 거예요.”

나는 눈을 슬쩍 굴리다가 뺨을 긁적였다.

“일단은 죽이는 건 안 돼요.”

“그럼 영혼만 빠져나오지 않을까요?”

“안 돼요. 몸은 저 학생 거예요.”

앞날이 창창한 청소년의 몸에 상처를 남기고 싶진 않았다. 거기다가 리케도르안 말처럼 죽인다고 영혼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일단 르안, 그대로 검을 들고 있어 봐요. 자세 딱 좋네.”

리케도르안이 생각 이상으로 제압을 잘해주었다.

소년이 들고 있던 지팡이가 어느새 저 멀리 떨어진 걸 보아선 그가 나선 것과 동시에 발로 뻥 차버린 모양이었다.

나는 소년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시선을 마주했다.

저쪽이 누워 있는 탓에 자연히 내려다보는 모양새가 되었지만.

“이봐요, 사실 우리는 아주 평화적으로 해결하러 왔거든요.”

사실 이 영혼들이 넘어오게 된 건 이 사람들 탓이 아니라고 들었다. 어쩌다 우연히 넘어오게 된 탓이라고.

나처럼 인공적으로 불려오는 건 아주아주 드문 케이스라나.

그러니 이 사람들 탓도 없겠다 나는 아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마음을 먹었단 말이다.

신은 충돌이 없진 않을 거라고 조언을 해줬긴 해도.

나를 빤히 보던 소년이 이내 빨개진 얼굴로 마구 소리쳤다.

“넌, 세이렌이로구나! 세이렌이지! 이 세계에 괴물이 있었나? 외모로 홀리려 해도 소용없다!”

왜 묶인 채로 악을 쓰는 건지. 나는 눈살을 찌푸리다 말고 말했다.

“저기요, 나한테 반했어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툭 내놓은 가정에 왜인지 소년의 얼굴은 걷잡을 수 없이 빨개졌다.

저 몸이 워낙 볕을 보지 못한 듯 새하얀 피부를 가진 탓에 고스란히 보였다.

“그, 그럴 리가! 이 몸은 위대한 제국 로시팔의 흑마법…….”

“빨개진 거나 치우고 말해 봐요.”

“이아나, 역시 죽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르안, 과격해지지 말아요.”

그러나 이미 리케도르안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나와 눈이 딱 마주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순진하고도 해사하게 미소했다.

“아니에요. 이아나. 죽이려는 건 아니에요. 생각해보니까. 이 영혼이 꼭 돌아갈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네?”

“붉은 장미의 수호신이 말하길 영혼마저 손상을 주는 방법이 있다네요.”

리케도르안이 순한 얼굴로 다정하게 말을 이었다.

“저, 이거 써도 될까요, 이아나?”

“안 돼요.”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리케도르안은 청순한 얼굴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릴 하고서, 거절당하자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동시에 오랜만에 등으로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이 남자는 세상에서 오직 내 말만을 스스로 고삐처럼 받아들인 짐승이었다.

오죽하면 힘 자체가 짐승화이지 않았던가.

나는 얼른 고개를 내렸다.

“들었죠? 영혼이 쥐도 새도 없이 사라질래요. 그냥 얌전히 돌아갈래요.”

아마 우리의 대화를 들었을 터였다. 소년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것인지 끝내 얼어붙은 얼굴로 귀환에 동의했다.

그보다는 리케도르안에게서 흘러나온 날카롭다 못해 무시무시한 기운에 굴복한 것 같았지만.

“도, 돌아가겠다. 돌아가겠다!”

그와 동시에 이 골목에 거대한 푸르른 주술진이 펼쳐졌다. 졸지에 신의 심부름으로 제령까지 하게 된 나의 힘이었다.

“돌아가서는 다신 이곳으로 오지 마세요. 다음엔 평화적으로 돌아가지 못할지도 몰라요.”

돌아가기 직전 내 경고와 같은 말에 영혼으로 돌아간 반투명한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리케도르안의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흘끗 나를 보았다.

-그…… 혹시 내가 있는 차원으로 오게 된다면……. 그땐 이름이라도…….

“로즈, 문이 닫히겠어요.”

“네? 아. 네. 얼른 가요. 당신.”

영혼이 건넨 말이 너무 작아서 들리지 않았지만 리케도르안 말처럼 오래 문을 열 수는 없었기에 얼른 영혼을 쫓아 보냈다.

그렇게 우리의 첫 번째 송환이 마무리되었다.

일이 끝나기 무섭게 리케도르안이 내게 폭 끌어안겼다. 물론 몸집이 몹시 큰 탓에 내가 안긴 느낌이 들었지만.

“이아나, 협박이 잘 통해서 다행이에요…….”

“협박이요? 아. 설마, 당신 일부러 그렇게 말한 거예요?”

고개를 든 리케도르안이 눈을 굴리다 말고 작게 미소했다.

“당신이 모든 사람에게 매력적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리케도르안이 들릴 듯 말 듯 작게 속삭였다.

“그래도 마지막엔 정말로 질투했어요.”

응? 르안이 질투할 게 무엇 있었지?

내가 되짚어보는 동안 입술이 내려앉았다. 나는 곧 웃음을 흘리며 입술을 맞이했다.

그렇게 우리 첫 번째 송환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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