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흰 장미의 왈츠
제국은 아주 부강한 나라였다. 침략하지 않으나 침략을 허락하지도 아니한 곳. 주변 국가의 시야에서는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국가였다.
그도 그럴 것이 긴 세월 동안 이곳을 노렸던 곳은 어찌 되었던가. 오르지 못할 나무를 기었던 개미인 양 무참한 패배의 늪에 빠졌다.
하지만 역사가들이 돌이켜 기록하였을 때, 수상히 여겼던 것은 의아할 정도로 많은 승리의 기록이었다.
정확히는 천재지변에 의한 승전기록.
이상하게도 제국이 받은 침략 중 수세에 몰린 위기가 없지는 않았다.
매 시대 훌륭한 성군이 현명한 판단을 내리는 것도 있었으나 신기하게도 그들의 승전에는 자연이 포함된 승리가 많았던 것이다.
이를테면 홍수와 적진에 일어난 가뭄, 때아닌 지진과 강의 범람까지. 자연, 하늘이 제국을 도운 것과 같은 승리.
이를 두고 사람들은 제국을 향해 신이 돕는 나라라 불렀다. 그 이름의 신격이 드높아지자 자연히 제국 내로 각종 종교가 들어왔지만 크게 성행하지는 못하였다.
이미 고대 제국민이 믿고 따르는 신적인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 존재는 역사의 뒤안길, 어느 곳에 숨어 사라지고 타국에서 넘어온 태양교, 빛의 재단이 이 자리를 차지했다.
지금에 와선 대부분의 제국민이 고대, 저들의 조상이 따른 한 존재를 기억하지 못했다.
신은 믿는 자의 신앙에 따라 격이 정해진다 하였던가. 한없이 추락한 격은 현재에 이르러 그저 오래전 망한 어느 가문의 존재로까지 추락하고 말았다.
“웃기고 앉았네.”
옥좌에 앉아 있던 이거 책을 탁 덮었다.
여인은 이도 모자라 다리를 꼬고는 머리를 나른하게 쓸어넘겼다. 길게 늘어진 여인의 머리칼은 태양과도 같이 밝고 찬란한 색이었다.
그러나 쯧 혀를 차는 얼굴은 못마땅함이 가득 어려 있었다. 그럼에도 여인은 누구라도 시선을 떼지 못할 만큼 아름다운 낯이었다.
흘끗 그녀를 쳐다보는 이들은 감히 눈조차 마주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여인의 색이 다른 눈동자가 차분하게 깜빡였다.
“이런 엉터리 책은 태워버려야겠어.”
프란시아가 두꺼운 책을 가볍게 들어 바닥으로 던졌다. 쿵. 육중한 소리가 울려 퍼졌으나 상의를 탈의한 성기사 중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프란시아는 옥좌에 앉은 채로 다리를 바꿔 꼬았다.
“태워버려.”
누군가 얼른 고개를 조아려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말인즉, 이 단 한 권의 책만을 말하지 않을 터.
오늘부로 교육기관에서 교과서로 쓰일 만큼 정밀한 이 역사서는 역사에서 사라질 것이다.
눈앞의 옥좌를 차지한 이는 그런 권력을 손에 쥔 사람이었다.
황좌.
황제의 자리를 가리키는 이것은 기실 제국에서 쓸 수 있는 사람이 오직 황제뿐일 터였다.
그러나 지금 여기 있는 이 존재에게만은 달랐다. 황실과는 또 다른 권위를 차지한 세력, 그녀야말로 이 거대한 빛의 재단의 유일무이한 왕.
신전의 태양. ‘교황’이었으니.
그러나 권좌를 차지한 프란시아의 표정은 무료하기 그지없었다. 지독한 권태로 물들어 있었다.
그녀의 측근이라면 모두 알고 있었다. 지난 7여 년간 명실상부 빛의 재단이 과거의 광영을 되찾도록 한 것으로 모자라, 그 이상의 권력을 누리게 이끈 젊은 교황, 한때는 성녀이자 전쟁의 주역.
껍데기를 벗고 지배자의 자리를 차지한 그들의 황제가 웃는 일은 좀처럼 없다는 것을.
실제로 나이 든 주교 하나는 전국의 광대를 끌어모아 그녀의 자비로운 웃음을 갈구한 사례도 있었다.
그 대가로 지금쯤 어느 시골의 신전을 쓸쓸히 이끌고 있겠지만.
“궁금한데.”
모두가 프란시아의 서두에 바짝 긴장하고 귀를 기울였다.
“내가 지시한 건 어찌 되었을까나.”
고저 없는 목소리에 그녀의 가장 가까이에 있던 이가 앞으로 나섰다.
이이는 한때 허울뿐인 교황 노릇을 하였으며 현재는 성녀, 아니. 신전의 2인자 자리로 다시 내려온 고위 신관이었다.
그는 빛의 자제답게 유약하지만 반짝이는 외모를 지니고 있었으며, 프란시아의 말이라면 그대로 벼랑에도 망설임 없이 뛰어들 수 있는 이였다.
“3년 전부터 지시하신 것은…… 이제 중간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그 말은?”
“네. 수도를 비롯하여 수도 인근 지역. 나아가 각지 대도시에 무사히 안착했을뿐더러 파급 효과가 나날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고위 신관이 커다란 안경을 추어올렸다. 프란시아는 안경을 보며 저도 모르게 떠오른 얼굴에 쯧 혀를 찼다. 썩 반갑지 않은 얼굴인데, 반사적으로 떠올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는 제국 곳곳에 위치한 빛의 재단 지부에서 책임지고, 아니 사활을 걸고 대중에게 전파 중입니다. 곧 마지막 단계. 즉 제국의 끝단까지 퍼져나가는 것은 시작보다 훨씬 적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예상 중입니다.”
신관은 보고하고서 한참 바닥을 내려다봤다. 프란시아의 얼굴을 볼 수 없으니 반응 또한 알 수 없었다.
그는 속으로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다.
“그렇단 말이지.”
프란시아는 턱을 쿡쿡 찔렀다. 그러다 말고 손을 멈췄다.
<자꾸 손가락으로 찌르지 마. 상처 나면 어떡해.>
그녀의 귓가로 무심하지만 다정한 음성이 스쳐 지나간다. 그리움의 잔재였다.
<모처럼 이렇게 희고 예쁜 뺨인데.>
아니,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 말을 하던 시절에 프란시아의 몸은 상처로 가득했고, 그녀의 힘이 약해 상처가 아무는 속도가 더뎠다.
<깨끗하지 않아도 괜찮아. 설사 네 얼굴에 상처가 더 늘어도. 나한텐 귀여워 보일 거야.>
징그러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언제나 태연하게 보일 듯 말 듯 짓는 그 미소가.
<프란시아.>
작은 온기가 구원이었을 줄은, ‘그녀’는 끝내 몰랐을 터다.
프란시아의 정신은 어느새 아주 오래전 시절로 돌아갔다.
<오빠가 내게 춤을 배워보라네. 왈츠라나. 쓸데없게.>
신기하게도 꿈에는 한 번 나오지 않던 모습은 눈감으면 이렇게 그녀의 눈과 귀를 지배하곤 했다.
<프란시아, 춤출 줄 알아?>
때는 그녀가 도뮬릿 저택에 잠시 잡혀 있던 적이었다. 그곳에서 제 편이라곤 이아나밖에 없던 시절. 그녀가 제 왕인 줄 몰랐던 시절이었다.
<흐음, 내가 아는 노래 중에 ‘강아지 왈츠’란 게 있거든? 그게 꼭 너 같네.>
그날은 유달리 웃음이 없던 이아나가 미소를 많이 짓던 날이었다.
그래서 프란시아는 난생처음 배워본 서툰 발놀림에 최선을 다했다. 언니가 한 번이라도 더 웃어줄까 봐.
왈츠, 별것 아닌 단어가 폐부 깊이 새겨지던 날이기도 했다.
“살아났다고?”
프란시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이 떨림은 너무나도 작아서 이곳에 있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아아, 그녀는 이제 너무나도 두꺼운 가면을 쓴 채로 살고 있었다. 이 가면을 벗겨줄 손을 하염없이 기다리면서.
“예. 적어도 사람이 모인 대도시, 중소도시에는 누구도 모르는 이가 없을 것입니다.”
눈앞의 고위 신관, 프란시아의 오른팔이자 최측근이 또랑또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고대로부터 모셔져 온 유일신. ‘푸른 장미’. 고귀한 존재를 더는 하찮은 가문으로 생각하는 이는 없습니다, 성하.”
“……푸른 장미의 마을은?”
“재건이 순조롭습니다. 거주민들도 전력을 다해서 재건을 돕고 있습니다. 이미 숲을 깎아 길을 내었습니다. 계획대로, 3년만 더 거친다면 훌륭한 도시가 될 것입니다.”
프란시아는 왜일까, 자신이 무려 7년 동안 해온, 그리고 해낸 일을 들으며 눈물이 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울지 않았다. 아니. 그녀는 눈물을 받아줄 수 있는 단 한 존재가 없는 한 울지 못했다.
‘언니…….’
모두 물러가.
프란시아의 단호한 명에 모두가 제단에서 사라졌다. 남은 것은 옥좌에 홀로 앉은 그녀뿐이었다.
“……언니, 보고 있어?”
그녀는 들리지 않을 부름을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불러도. 아무리 애타게 불러도 들리지 않은 부름임을 안다.
고작, 7년이 흘렀을 뿐이다.
그녀가 기다려야 할 긴긴 기다림 중에 고작 7년만이.
아이가 엉엉 울었다. 프란시아 가슴 속 자라지 못한 아이는 떼를 쓰고 언니를 데려오라 엉엉 울었다.
그러나 권좌 위에서 권위를 알고 권력의 단맛을 휘두르는 젊은 교황의 표정에는 미동도 없었다.
7년 전, 모든 일이 끝나고 정신을 차린 황제는 이아나를 찾았다. 그러나 황제는 끝내 제 소원을 들어준 푸른 장미를 만나지 못했다.
그야 당연했다. 이 세상에 없었으니까.
황제는 이를 보상하기라도 하듯이 장미들에게 관대한 처사를 보였다. 그래. 보상이었다. 평생 숙원을 들어준 존재에 대한 감사.
이 덕에 프란시아가 이끄는 빛의 재단은 번번이 황제들의 통제를 받았던 과거와 다르게 마음껏 교세를 확장할 수 있었고, 황제는 새로운 신을 제창하는 프란시아의 계획 또한 눈을 감아주었다.
아니, 황제는 오히려 부추기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각기 수장을 잃은 헤르님과 도뮬릿이 실로 무너지지 않은 것 또한 황제의 자비가 있었을 터였다.
프란시아 또한 도뮬릿을 건드리지 않았다. 이아나에게 저 가문을 어찌할지 듣지 못했다.
처단은 그녀가 따르는 왕의 몫이다.
프란시아는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보고 싶어.”
7년간 얼마나 많이 이 말을 중얼거렸을까. 프란시아는 알지 못했다. 세지 못할 만큼 긴긴 하루들이 지나갔으니까.
장미들 중 생명력이 가장 넘치는 장미는 붉은 장미였다.
“언니, 내 선물이 어때?”
그러나 장미 중 가장 오래, 길게 피어 있는 장미는 흰 장미였다.
“언니는…… 내 신이야.”
누구보다 오래 살아남아, 단 하나의 존재를 치유하며 살아야 하니까.
“그 누구도 언니를 잊지 못하게 할 거야.”
프란시아의 목소리가 안으로 삼켜지듯 사그라들었다.
“……제국민은 모두 언니를 기억해. 그러니까 언니는 딱 한 사람분만큼만.”
프란시아가 손을 꾹 쥐었다가 폈다.
“나를 생각해주면 좋겠어.”
심장에 사는 작은 아이가 엉엉 울었다. 어느새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온 아기곰이 프란시아의 다리를 꼬옥 붙잡았다.
칼리스토가 걱정스럽게 말을 걸었다.
“괜찮아.”
프란시아는 고개 숙여 웃었다.
“앞으로도 난, 괜찮을 거야.”
이것은 그녀 스스로에게 외는 주문과도 같았다.
그리 말하다 말고 프란시아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빛이 어리지 않은 곳, 기둥 사이에 까만 공간을 가만히 응시했다.
“거기서 뭐 해?”
조금 전 성기사들 앞에서 위엄어린 음성과는 다르게 편안하지만 삐딱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곧 아무도 없을 것만 같던 어둠 속에서 누군가 고요하게 걸어 나왔다.
차분한 모습과 잘 어우러지는 걸음걸이였다. 그림자같이 조용한 모습이 차라리 암살자의 기도와 같았으나 실상 드러난 모습은 눈에 띄는 미형의 청년이었다.
다만, 안경 속에 갇힌 시선이 실로 날카로워 벼려진 칼과 같았다.
이아나가 떠남과 동시에 저 남자는 다시 안경을 쓰기 시작했다. 다만 이유는 이전과 달라보였다. 자신을 걸어 잠근 것처럼 보였으니까.
프란시아는 7년 전과 비교해도 전혀 변함없는 외형을 심드렁하게 볼 뿐이었다.
“침입이 취미야?”
“침입이든 잠입이든. 어느 쪽이든 내겐 어렵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프란시아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장미를 물끄러미 담았다.
“왜 늙지도 않아? 기분 나쁘게.”
“누가 할 소릴 하는 겁니까? 같은 처지에.”
이미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의 왕이 떠나며 자신들의 시간이 멈춰버렸음을.
“나는 늙은 티를 내지 않아도 알아서 신성시하는 위치란 말이야. 그러는 당신은 계속 그 얼굴로 살아선 불편하겠어?”
“그렇지 않아도 누가 교도소에서 죄인들의 피를 내서 목욕이라도 하는 거 아니냐는 내 소문을 아느냐고 그러던데. 당신 짓입니까?”
“아니? 내가 쓸데없는 짓을 왜 해.”
그는 오늘도 깔끔한 얼굴이었다. 저 날카롭게 생긴 게 뭐가 좋다고, 인기가 좋기도 좋았지. 아마?
몇 개월 전 황실 연회에서 내로라하는 영애들로 둘러싸인 르나그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는 그녀였다. 물론 시선조차 주지 않고 떠난 모습도 함께 말이다.
사교계에서 르나그는 사라진 약혼자를 그리워하며 오래도록 홀로 남은, 우수에 찬 후작이었다.
과연, 그 말이 사실이었지만 프란시아는 우습지도 않았다.
“당신이 엉뚱한 소문을 퍼트린 것이 한두 번이었습니까.”
“에이, 같은 처지에 인사치레지. 인사치레. 당신이 고자라거나. 지독한 냄새가 난다거나. 덕분에 구애하는 아리따운 영애들도 쳐냈잖아?”
프란시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근데 방금 말한 소문은 나 아냐.”
르나그가 눈썹을 미미하게 들어 올렸다.
“아닌 척하는 건 아닌지?”
“어머나. 당신, 이 얼굴을 봐. 거짓말하는 얼굴이니? 응?”
르나그는 미동조차 없었다. 프란시아는 혀를 찼다.
프란시아는 가끔 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세월을 견디는 저 장미가 부러우면서도 밉기도 했다.
이 남자가 저 껍데기 속에 무엇을 숨겼는지는 그녀는 모른다. 하지만 알 게 뭐란 말인가?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거스러미가 타인의 팔이 잘린 부상보다 아프다.
프란시아는 제가 잘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녀의 뜻이 고스란히 드러난 자세다.
이미 르나그 또한 익숙한 태세이기도 했다.
“시비 걸러 온 거야? 싸움을 원한다면야. 우리 칼리스토가 상대해줄 거야.”
그러자 아기곰이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러나 칼리스토는 이내 결연한 표정으로 작은 주먹을 주먹끼리 콩콩 마주했다.
르나그는 조금 한심하단 표정으로 응수할 뿐이었다.
“도발이 우습지도 않군요. 당신의 수호신 따위 상대도 되지 않을 겁니다.”
“어머나. 지금 날 무시한 거야? 내 수호신이 얼마나 강한데.”
“수호신은 그대만 있습니까?”
“왜 이래.”
프란시아가 옥좌 손잡이에 턱을 괸 채 씩 웃었다.
“곰은 뱀을 찢어.”
“……가끔 당신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릴 농처럼 하는데, 위엄은커녕 격마저 떨어져 보이는 건 아는지.”
르나그가 차가운 눈으로 시선을 올렸다.
“사람만 우스워 보입니다.”
“당신이야말로 그 혓바닥으로 행정 관리들 좀 때리고 다닌다며? 아주 당신을 캄브라캄에 처박아야 한다고 그냥 이를 갈던데.”
프란시아는 손바닥을 들었다. 르나그는 적당히 가까워진 거리에서 멈춰 섰다.
남겨진 두 장미의 거리는 7년간 언제나 이 자리를 유지했다. 그들은 친구가 아니었으나 적 또한 아니었다.
고행자며 동지였다. 언제가 될지 모를 시간을 견디는 길동무.
“그래서 왜 온 건데?”
르나그가 실로 이상하다는 표정을 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겁니까?”
단 한 사람 앞을 제외하면 표정 없는 남자가 보이는 최대한의 변화였다.
“오늘이 ’편지‘를 보내는 날이잖습니까.”
“아, 정말?”
프란시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신기하게도 권태로 시들어 있던 표정이 막 피어나는 풀잎처럼 싱그럽게 피어났다.
르나그는 이를 별 놀람 없이 받아들였다.
“왜 놀란 척입니까?”
“이렇게 해야, 더 극적이잖아.”
물론 프란시아가 이 날을 잊을 리 없었다. 잊은 척은 했을지언정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편지, 이아나가 있는 세계로 보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
가끔 프란시아는 매시기마다 열리는 구멍으로 머리를 집어넣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건 눈앞의 남자 또한 마찬가지이리라.
만약 구멍이 고양이 머리나 겨우 들어갈 만큼 작지 않았다면, 그녀는 기를 쓰고 시도했을 것이다.
이아나를 볼 수 있다면야 목숨 정도 한 10번쯤 걸어볼 만하지 않겠는가.
사실 처음에야 누가 먼저 보낼지, 차례와 순서를 정했으나 7년이란 시간이 지나는 동안 차례는 무색해진 지 오래였다.
곧 있으면 공간의 틈이 찢어질 것이다. 그리고 우편함이나 될법한 작은 구멍만이 보이겠지.
얌전히 시간을 기다리던 프란시아의 표정이 차차 흐려졌다. 이는 7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처음으로 있는 일이었다.
“있잖아, 노란 장미.”
르나그는 차분하게 냉정한 시선을 옮겼다.
“당신은…… 정말로 괜찮아?”
왜일까. 오늘도 견디면 그만인데. 이상하게도 프란시아는 참을 수 없이 힘들어졌다.
그저 다른 날과 다르지 않은 하루일 뿐인데.
“수없이 긴 날을 다시 이렇게 기약 없는 편지로만 기다리는 나날이…….”
당신은 정말 괜찮은 거냐고. 같은 길을 걷는 동지에게 그녀는 물었다.
르나그의 표정은 프란시아처럼 무너지지 않았다.
그를 오래 봐온 프란시아는 겉모습에 속지 않았다. 이미 짧지 않은 시간으로 알고 있다.
저 남자는 속에서부터 무너지는 사람이었다.
제 속은 썩어 문드러질지언정 끝내 자신의 정인 앞에서는 상처 하나 티 내지 않았던 마지막 날처럼.
“……되짚어봐야 소용없는 일이니. 곱씹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 감정이 이성으로 잡아지나? 잡아져?”
“…….”
“그렇지 않잖아.”
“그럼에도. 잡아야 하는 것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그리 말하는 남자의 음성은 프란시아를 향해 왜 어리석은 생각을 하냐 말하는 듯했다.
“아니, 노란 장미. 나는…….”
권좌를 차지한 젊은 교황은 그리움에 무너졌다.
“……오늘만큼은…… 견디지 못하겠어.”
꾹꾹 참아온 눈물이었다. 여기서 흘리기에는 너무나 아깝고,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끝내 차오르고 만 그리움이 소나기처럼 뺨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내가 어리석다고 생각해?”
“…….”
“내 그리움이 어리석어?”
르나그가 깊은 숨을 내쉬었다.
“밖에서 무너지든 안에서 무너지든 같은 붕괴입니다. 왜 쓸데없는 것을 묻습니까?”
르나그의 음성이 짐짓 사나워졌다. 아무리 조용하게 그림자처럼 제 존재를 가려도 뱀의 성질은 맹수이며 짐승이었다.
“프란시아 올르 로제니아. 전부 알면서, 묻지 마.”
르나그의 금빛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로운 예기를 띠었다.
“너나 나나 자칫 이성을 잃고 권력이라도 휘두르면, 이 제국은 금세 혼란의 도가니가 되겠지.”
그들이 7년간 쌓은 것은 거대한 권력의 탑이었다.
“그래서? 언젠가 우리의 왕이 돌아올 땅을 엉망으로 만들고 싶은 건가?”
프란시아는 눈물을 머금은 채 생긋 웃었다.
“아아, 좋다.”
보기 좋네. 그녀가 우아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만 망가지는 것은 싫었거든.”
그녀는 성격이 나빴다. 못되고 이기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라도 속으로 썩어 문드러져가는 동지에게 건넬 동정과 연민은 존재했다.
프란시아가 보기에 자신보다 더 위험한 것은 저쪽이었다.
“범죄자들을 잡아들이는 손속이 점차 잔혹해진다고 하던데. 이제 그만 인정해. 망가지는 건 나뿐이 아니잖아.”
“……그걸 인정하는 게. 무엇이 중요하지?”
르나그가 안경알 속으로 차분한 분노를 보였다. 분노마저도 고요한 빛을 띤 남자였다.
“표출이라도 하란 거지.”
미련한 노란 장미. 프란시아는 고아한 미소를 품었다.
“활화산은 모조리 토하고 쉬기라도 하지. 입구를 꽉 틀어막은 산은, 그저 자멸할 뿐이야.”
색이 다른 눈동자가 팽팽하게 맞섰다. 그들은 동지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살가운 친우 따위는 평생 될 수 없는 관계였다.
굳이 표현하자면 사이가 평생 좋지 못할 악우라고 할까.
그와 동시에 공간이 흔들렸다. 이는 프란시아에게도 르나그에게도 익숙한 진동이었다.
곧 공간이 찢어지고 조그만 구멍이 뚫릴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 미리 준비한 편지를 넣는다면 작은 소통은 그것으로 끝이겠지.
저 남자와도 헤어져, 또 한동안은 마주칠 일이 없으리라.
사실, 수년 전 두 사람은 의도치 않게 세기의 스캔들로 휘말린 적이 있었지만, 그 소문을 떠드는 일을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한 것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사이를 똑똑하게 드러냈다.
그러니 다시 틈이 열릴 때까지 볼 일은 없을 터였다.
‘다음엔 또 얼마나 걸릴까.’
프란시아는 얼굴을 부여잡았다. 한 번만, 단 한 번만 그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이렇게 살다간 목이 말라 죽을지도 모르겠군.”
프란시아는 그 말이 자신의 마음과 같다 생각했다. 이리 말한 르나그의 얼굴 또한 섧은 애수로 가득했다.
아주 머나먼 여정, 그들이 앞으로 걸을 여정을 보듯이.
저 남자는 단 한 사람을 떠올릴 때만 저런 얼굴을 하곤 했다.
프란시아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말이 나오지 않는 침묵 사이에서 르나그만이 작게 중얼거렸다.
“이아나.”
르나그는 허공을 향해 중얼거렸다. 이따금 그는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이런 모습을 보이곤 했다.
“……유달리 당신이 보고 싶은 날이군요.”
이아나 양, 그리운 목소리는 그의 심장에 도리어 낙인을 찍은 듯했다. 그가 피를 토한 사람처럼 가슴을 부여잡았으니.
프란시아는 앞으로 열릴 구멍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가 눈을 내리깔고 아마도 구멍이 열릴 곳을 향해 편지를 든 손만 내밀었을 때였다.
‘……왜 삼켜지지 않지?’
툭. 이질적인 소리가 들렸다. 프란시아의 손을 떠난 편지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였다.
이럴 리가 없었다. 구멍이 열리면 당연히 편지를 삼키니, 이런 소리가 들릴 리 없는데.
“음, 뭐야. 보지도 않고 주는 거야?”
그리운 목소리였다. 프란시아는 고개를 돌린 채 그대로 굳었다.
그저 착각이려니 했다. 아니다. 착각일 거라 생각했다.
고개를 들면 한곳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르나그의 얼굴이 보였다.
“이번엔 직접 편지를 받으러 왔는데.”
실로 그립고 그리운 목소리, 꿈에서조차 그렸지만 끝내 등장하지 않았던 모습.
프란시아의 얼굴이 천천히 돌아갔다.
“사실 편지보다는 내 장미들을 보고 싶었지만.”
헤어질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처음 보는 복식을 몸에 걸친 채로.
무심한 듯 다정한 미소는 프란시아를 처음 만났을 적의 아이로 만들었다.
“……언니?”
“이아나 양…….”
이아나는 울음을 머금은 자신의 장미 두 사람을 다정하게 담았다.
“응. 미안해.”
이내 칼을 가는 듯 길고 날카롭던 그리움의 종점을 찍듯 활짝 미소를 띠면서.
“너무 오래 걸렸지?”
어제 만난 것처럼 인사를 건넸다.
프란시아보다 르나그가 한발 빨랐다. 달려가 이아나를 한 품에 감싼 팔이 덜덜 떨리는 것이 보였다.
차갑고 냉혹하던 얼굴로 가로지르는 눈물 줄기를 보았다.
프란시아는 그 심정을 익히 이해했다. 수년을 자식을 찾아 헤멘 부모라 한들 지금 그들의 심정에 비할 바가 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눈을 뻔히 뜨고 있는 이 순간에도 믿기지 않았으니까.
아니,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프란시아.”
하지만 부름 한 번에 프란시아는 거짓말처럼 움직였다.
그녀는 달려갔다. 이 순간만큼은 자신이 평생을 쌓아온 권력도 권좌도 자리도 모두 필요 없었다. 버려도 좋다 여겼다.
“언니? 언니……. 언니! 진짜, 진짜. 언니야?”
“……응.”
프란시아는 마침내 되찾은 왕의 품에 안겨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한참, 아주 한참을.
“미안해. 정말 미안하게도 아직 완전히 돌아온 것도…… 너희를 데려갈 수도 없지만.”
이아나의 목소리가 아픔과 안타까움에 물든 채 작아졌다.
“얼굴을 보고 싶었어. ……신과 거래하는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네.”
제자리를 찾은 듯 온 마음이 단 하나를 향했다.
이것이 운명이라면, 프란시아 스스로가 택한 운명이었다.
“프란시아, 르나그.”
다정한 목소리.
“우리 집에 갈래요?”
그리고 이윽고 그녀는 내밀어진 손을 망설임 없이 잡았다.
넘어간 계절은 봄이었다.
아아, 기쁨과 행복을 담아 꽃잎들이 왈츠라도 추는 듯 분홍 잎이 한들한들 흘러내리는 봄.
프란시아는 왜일까. 아주 오래전 서툰 발놀림을, 언니와 함께 추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봄이 분홍 꽃으로 연주하는 이 풍경 속에서 있노라면, 자신의 세상이 온통 이아나의 색으로 물들지 않을까 하고.
“프란시아, 이쪽이야!”
“응!”
그녀는 달려가며 생각했다.
언니는 아마, 내가 얼마나 언니를 좋아하는지 모를 거야.
나의 유일신.
새하얀 장미가 품은 단어는 존경. 제가 따르는 하늘만을 우러르는 경애.
새하얀 기둥처럼 단단하게 맺힌 이 맹목적인 애정은 죽을 때까지 한 사람을 위해 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