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케도르안.”
현재 리케도르안은 잔뜩 뿔이 나 있었다. 뿔이 나 있다라, 이 남자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었지만 이렇게 말고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흐음, 삐진 거지? 저거.
아니, 토라진 건가.
물론 그가 저쪽 세계에서도 유일하게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일이 있었지만…….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아서 그래요?”
“이아나…….”
그는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그대로 돌아서서 내게 팔을 뻗었다. 단단한 팔이 허리를 휘감기 무섭게 그가 내 목덜미에 푸욱 얼굴을 묻었다.
낮고 깊은 날숨이 목을 간지럽혔다.
“가지 말아요……. 응?”
마치 연인을 어디 외국에라도 보내는 듯 애절한 음성이었다. 나는 어설프게 미소 지으며 그의 머리카락을 살살 문질러주었다.
그는 내 손길을 거절하는 대신 더욱 몸을 파묻었다.
“으음, 이미 도착했는데요.”
나는 흘끗 눈앞의 가게를 보며 말했다.
“그리고 한 번은 가야 해요. 응? 리케도르안.”
그러자 리케도르안은 낮게 한숨을 푸욱 쉬고는 천천히 내게서 떨어졌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아무리 봐도 절대 떨어지기 싫어하는 사람의 것이었다. 그가 어째서 이렇게 나오는지 잘 아는 나로선 흐린 웃음을 흘렸다.
곧 리케도르안이 내 입술에 입을 맞췄다.
“빠르게요.”
“응. 빨리 나올게요.”
“8초…….”
“알았어요. 그것도 지킬게요.”
약속이니까, 나는 작게 속삭이며 이번엔 내 쪽에서 까치발을 들어 입을 맞췄다.
문제는, 리케도르안이 여기서 달아올라 그냥 뽀뽀로 그치지 않았다는 거지만. 결국 나를 놓아준 그를 토닥이고서 나는 눈앞의 가게로 들어섰다.
토요일 오전이었지만 몹시도 한산한 실내가 보였다. 당연한 일일 거다. 오늘은 장사를 하지 않을 테니. 이곳은 자그만 카페였다. 아기자기하면서도 고풍스러운 인테리어는 아마 이곳을 관리하는 이의 취향일 터다.
바 테이블같이 곧바로 점원을 마주할 수 있는 자리 중 하나를 골라 앉았다.
턱을 괴고 앞을 바라보면, 눈앞에 등을 돌린 사람이 보였다. 길고 늘씬한 실루엣, 나는 이 뒷모습을 수어 번 본 적 있었다.
단정한 셔츠 위로 앞치마, 그리고 다리 길이에 맞춘 핏 좋은 까만 바지까지. 정갈한 바리스타 옷을 걸친 이가 등을 돌렸다. 그러더니 나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이는 곧 우유처럼 부드러운 웃음이 되었다.
“왔어?”
그가 성큼 이쪽으로 걸어왔다. 이마를 덮는 새까만 머리, 그림자처럼 너울진 머리카락 아래로 상징과도 같은 붉은 눈동자 대신 검은 눈동자가 자리해 있다.
그러나 나를 담는 순간 불꽃이 일 듯 차차 붉게 물들었다. 곧 루비처럼 새빨간 눈동자가 나를 보았다.
체이서였다.
“이아나.”
설탕을 문 듯 달콤한 음성, 나는 표정 하나 동요하지 않은 채 눈만 들어 옮겼다.
“이번엔 조금 늦었네.”
“기간이 정해진 건 아니니까.”
딱 잘라 말하는 내게 체이서는 고개를 숙이며 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맞아. 기간이 정해진 건 아니었지. 그저, 내 영혼이 말라가기 전에 네가 와 힘을 불어넣고 가는 것뿐이니.”
그리 말하며 그가 손을 뻗었다. 그러나 이 손은 어떠한 것에 가로막혀 내게 닿지 못했다.
내가 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손은 마치 반투명한 유리창에 갇힌 듯 꾹 눌러진 살갗만 보일 뿐이었다. 체이서의 얼굴로 이루 말할 수 없는 표정이 스쳤다. 나는 그것을 보지 못한 척 눈을 내렸다.
“언제 봐도 당신이랑 커피는 안 어울리는 것 같아.”
본래 육신을 잃은 영혼은 금방 사라지기 마련이었으나, 대가를 치러 그는 이쪽 세계에 머무를 수 있었다. 문제는 내가 거둔 탓에 내가 있어야 한다는 거다. 신에게 청한 끝에 이렇게 신이 만든 공간에 찾아와 잠시 동안 머물다 가는 것으로 만들었다. 버틸 수 있는 힘을 주는 건 내가 짧게 머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네가 좋아했으니까.”
그의 붉은 눈이 유혹하듯 가늘게 접혔다.
“내가? 난 커피 안 좋아하는데.”
“아, 이제는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지?”
이 세계에 살았을 때의 기억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내 과거 기억을 가져간 탓에 그는 지구에서의 ‘나’를 알고 있다.
아니, 이제 세상에서 이 남자만이 알고 있을 거다.
“하긴, 도뮬릿에서도 넌 차 하나를 늘 마시곤 했지. 그게 이곳의 커피와 비슷하단 걸 알았어.”
“그랬나.”
체이서가 컵 하나를 내밀었다. 컵에서 모락모락 김이 흐른다.
“다른 건 전혀 아쉬운 게 없는데, 네가 다가오는 것조차 알지 못하는 것. 이거 하나만은 아쉽네.”
그가 팔을 쭉 뻗었다. 그의 손은 다시 한번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혔지만, 그는 고집스럽게 나에게 뻗을 수 있는 최대한으로 손을 뻗었다.
체이서가 말한 것처럼 그는 내가 언제 이곳에 올지 모른다. 감각이 이곳에 갇혀 닫혀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내가 오늘 오는 것도 몰랐을 텐데. 이 커피는 따끈하기만 했다.
“방금 낸 것 같은데?”
“매시간마다 만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
그가 컵을 툭 두드렸다. 그의 앞에는 내 것과 같은 것이 담긴 잔이 있었다.
그는 우아하게 컵을 들이켰다.
“네가 올 거라 기대하는 건, 늘 배신당하면서도 행복하지.”
커피가 식을 때마다 다시 만들었단 얘기였다. 내가 언제 올 줄도 모르면서.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울리지 않았다. 한평생 왕좌에 앉아 사람들을 부리던 이가 모든 이들이 동등한 세계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니. 리케도르안이 이곳에 넘어온 것과 별개로 이런 별리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안타깝거나 그런 건 아니다. 다만, 참으로 모순적인 남자란 생각이 들 뿐.
“반대로 겪어보는 심정이 어때.”
한숨처럼 빠져나간 말에 체이서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철그럭.
그곳에서는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체이서는 발목을 둘둘 맨 쇠사슬과 족쇄를 보면서도 그저 웃을 뿐이었다.
“글쎄, 넌 모르겠지만 사실 이런 건 어린 시절에 많이 차봐서.”
“그런데 내게 채웠단 말이야?”
“그런 방법밖에 몰랐으니까.”
우리의 시선이 팽팽하게 부딪쳤다. 부드럽게 꼬리를 내린 건 저쪽이었다.
“그땐 이게 너를 가장 안전하게 지키는 방법이라 생각했어.”
“그것뿐이 아니잖아.”
“맞아, 널 손에 넣고 싶었지.”
육신만이 없을 뿐 이 남자는 내가 아는 체이서 루브 도뮬릿, 그대로였다. 붉은 입술을 끌어올리는 방식이나, 죽였다고는 하나 여전히 광기가 깃든 붉은 눈까지.
“이아나, 날 살리기로 한 것을 후회해?”
“아니.”
나를 위해 멸망하는 세계에서 빼내려던 남자, 차라리 같이 죽자 외칠 것 같던 남자가 세상이 멸망해도 나만은 살아 돌아가라 외치던 모습이 선했다.
그것이 설사 자신이 아닌 누구도 갖지 못했으면 하는 삐뚤어진 집착이었음에도.
“너는 더는 예전처럼 살 수는 없을 거야.”
나는 그를 똑바로 마주했다.
“누구도 죽이지 못할 거야.”
이 남자가 가진 모순적인 모습만큼이나 내가 이 남자에게 가진 감정 또한 상반되고 모순적이었다. 그러나 누그러질 생각은 없었다.
“갚아.”
체이서는 이미 모든 사정을 알고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이야기했으니까. 우리는 언젠가 저쪽 세계로 돌아갈 것이다.
“네가 죽인 숫자보다도 더 많이 살려서라도.”
무수히 많은 이들을 살해하고, 고통을 준 이 남자는 더는 누구도 죽일 수 없다.
내가 내 힘으로서 죄업의 대가를 치르게끔 만들었으니까.
그래. 나는 그가 죽음으로 도피하게끔 두지 않았다.
체이서가 고개를 느슨하게 기울이며 웃었다. 목 끝까지 단추를 채운 금욕적인 모습은 저쪽 세계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다고 내가 죽인 이들이 살아 돌아오는 건 아닐 텐데.”
그의 손이 꾹 벽을 눌렀다. 그는 무언가를 참아 누르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이런 모습을 무심히 응시했다.
“속죄해.”
이렇게 말한다고 하여서 그가 쉽사리 속죄할 거란 생각은 없었다.
“네가 명한다면.”
어찌나 힘을 주었는지, 벽에 꾹 눌린 그의 손가락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얼마든지.”
내가 이 남자를 살리는 데 바친 것이 이곳의 삶과 기억이었다면, 이 남자가 치러야 할 대가는 바로 이 벽이었다. 체이서는 모든 죄업을 씻어낼 때까지 내게 닿을 수 없을 것이다. 할 말을 마친 나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아나.”
이미 머무는 시간은 충족했다. 앞으로 꽤 시간이 지날 때까지 나는 이곳을 찾지 않을 것이다.
저 남자도 나도 이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우습게도 장미들은 내게 묶여있다. 아니, 묶여버렸다. 이는 이 남자도 다르지 않았다.
결국엔 이 남자와의 연조차 내가 책임질 것이 되었다. 나는 그럼에도 후회하지 않았다.
나는 문고리를 잡은 채 천천히 등을 돌렸다.
체이서가 주먹을 쥔 채 벽을 누르고 있었다. 마치 사막을 열흘 동안 헤맨 고독한 사냥꾼 인양 지독한 갈증 어린 얼굴로.
“언젠가, 언젠가! 수없이 많은 이들을 살리게 되면. 그때는 이아나, ……네게 닿을 수 있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가게를 나섰다.
***
“이아나!”
기둥에 기댄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리케도르안이 거짓말처럼 고개를 돌리곤 달려왔다. 한걸음에 달려온 그의 모습 뒤로 긴 꼬리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아니지. 정말 있었다면 프로펠러처럼 빠르게 붕붕 흔들고 있지 않을까. 옆에서는 진짜 짐승이 펄쩍펄쩍 뛰며 함께 나를 반기고 있었다.
-인간! 늦었다! 늦었다, 냥!
푸딩이, 얘는 고양잇과가 분명한데, 가끔 강아지처럼 굴 때가 있다. 이걸 개냥이라 하는 건가.
나는 피식 웃으며, 한 팔에 푸딩이를 안았다. 그러고는 리케도르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우리 손 잡을까요?”
그는 푸르른 눈을 크게 깜빡이더니, 이내 함박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내가 푸른 하늘을 좋아하는 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의 눈을 닮아서인지도 모르겠다.
체이서에게 다녀온 날이면 더욱 기분이 저조해지는 리케도르안은 그와 다르게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않았다.
그렇기에 내 쪽에서 먼저 이실직고 이야기하곤 했다.
“음, 리케도르안. 미안해요.”
“어떤 것이요?”
“……그, 8초는 지키지 못한 것 같아요.”
8초 이상 눈 마주치지 않기를 말했는데, 다는 못 지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그러자 리케도르안은 잠시 망설이나 싶더니, 곧 내 손을 꾹 눌러 잡았다.
“괜찮아요.”
괜찮지 않은 얼굴로 괜찮다고 말해봐야, 음……. 리케도르안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이런 모습도 귀여워 보인다고 하면 화를 내려나.
사실 리케도르안도 함께 저기 들어갔다가 사생결단을 낼 뻔한 뒤로 문 앞에서 기다리게 된 것이었다. 그땐 정말 체이서가 성불하는 줄 알았지. 리케도르안도 반쯤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다치고.
그사이 우리는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아직은 겨울나무가 앙상하지만 그 사이로 흐드러지게 핀 하얀 동백꽃이 보였다.
흰 동백, 꽤 드물게 느껴지는 꽃이었다.
나는 과거를 반추하는 것을 멈추고 문득 입을 열었다.
“아마도 긴긴 세월이 흐를 거예요.”
사실 아직은 내 선택이 옳았는지, 내가 잘한 것인지 잘은 모르겠다.
모든 것에 대해서 말이다.
나는 신과 같이 완전한 존재가 아니었고, 불안정했으며 언젠가는 내가 선택한 것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처럼 유한한 굴레에 있는 우리지만 이런 채로 아주 오랜 시간을 살아갈 거다.
“무뎌질 날도 있을까요?”
주어도 목적어도 붙이지 않았지만 많은 것이 붙을 수 있는 말이다. 이를테면 지금 활활 타오르는 당신의 사랑 또한. 나라고 불안을 느끼지 않는 건 아닌 까닭에 내 물음은 조심스러웠다.
리케도르안이 걸음을 멈췄다. 그의 등 뒤로 그의 머리칼을 닮은 새하얀 동백꽃이 보였다. 여기서 눈이라도 내린다면 아주 절경이 될 것 같았다.
리케도르안이 포근한 미소를 지었다.
“이아나, 저는 한때 이런 생각을 했어요.”
어떤 생각인지 묻지 않았으나 리케도르안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있던 지하감방으로 오던 당신의 발자국은 늘 조심스러웠어요. 언제라도 떠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의 손이 깍지 사이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는 다른 손을 뻗어 내 뺨을 감싸 쥐었다. 연기처럼 새하얀 입김이 부서져 나왔다.
“당신은 곧 지나갈 인연이라고 하였죠.”
맞다. 나는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 아주 많이.
“하지만 이아나, 저는 늘 그런 생각을 했어요. 당신의 조심스럽던 발자국이 심장에 족적을 남겼다면. 저는 평생 당신을 잃지 못할 텐데.”
그가 내 손을 입술로 가져다 댔다.
“당신 앞에 무릎 꿇고 빌어 나를 거둬달라고 간절히 빌어볼까.”
“…….”
“언젠가 버려도 좋으니. 곁에만 있게 해준다면…… 죽을 때까지 그림자도 밟지 않고 쫓아갈게요.”
그가 눈을 내리깔며 미소했다.
“그렇게 빌었어요.”
천천히 그의 눈이 뜨였을 때, 새파란 눈동자는 바다 같았고, 다시 하늘 같았으며 영원토록 변치 않을 바위 같았다.
왜일까. 이상하게도 뺨으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 밑을 발긋 물들인 이 남자가 지나간 봄처럼 바라보고 있는데도 그립고 애틋하여서. 다시 찾아올 계절처럼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하지만 이 순간에 당신의 곁에 있으니, 무엇이 두렵고 어렵겠어요. 이제는 그저 당신을 사랑하기만 하면 되는걸요.”
그가 빨갛게 익은 얼굴로 따뜻한 불과 같은 고백을 읊조렸다.
“사랑해요. 아마도 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영원히.”
리케도르안은 잠시 망설이다가 주변을 보았다. 평소 시선이라고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그치고는 드문 행동이었다. 내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그가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어떤 프로그램을 봤어요.”
“티브이에서요.”
“네. 거기에서요.”
리케도르안이 천천히 한쪽 무릎을 접었다. 나는 눈을 크게 깜빡였다. 푸른 하늘과 붉은 동백, 하얀 머리칼, 그리고 새하얀 미소.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미안해요.”
“네?”
그가 사과했다. 더는 견디지 못한 말을 하게 된 건, 당신의 사랑스러움 때문이라고.
“우리 세계로 돌아간 뒤에야 하려 했는데……. 그때서야 당신이 내게 해준다고 했지만.”
아, 다음 말을 알 것 같아. 내 입술로 행복이 가득 스민 미소가 흘러나왔다.
“나랑 결혼해줄래요?”
“…….”
“평생 행복하게 해줄게요.”
그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늘 사랑을 입에 담는 것치고는 투박한 청혼이었다. 그러나 파르르 떨리는 눈가에서 흔들리는 눈동자에서 진심은 자그마한 부분 하나하나에서 물씬 느껴진다. 난 이것이 그의 전부를 다한 청혼임을 알고 있었다.
“……어머나. 진심이에요? 물릴 수 없을 텐데.”
“네? 당, 당연하죠! 물론 당신의 정원에 꽃은 많겠지만…….”
“당신을 사랑할 거고요.”
“……하하, 네. 약간은 아주 약간은 그런 자신감을 가져볼까 싶어요.”
리케도르안이 내 손으로 뻗어 제 뺨 위에 올렸다. 그러고는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다. 아주 행복하다는 듯이.
문득 손가락이 간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고개를 내리면 어느새 그를 닮은 새빨간 꽃이 손가락에 피어 있었다. 네 번째 손가락만 차지할 만큼 아주 작고, 작지만 몹시도 탐스럽게.
“……꽃이네요?”
“네. 앞으로 이 손가락도 제게만 주셨으면 해서요.”
“……정말이지 당신, 요망하네요.”
우리는 앞으로 수없이 긴 세월을 살아갈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생각했다.
긴긴 삶 동안에 이 순간이 금빛 테를 두른 액자에 담겨 내 심장에 영원토록 걸려 있으리라고.
“하지만 로맨틱하네요.”
나는 그처럼 해사하게 웃었다.
“행복해서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 싶을 만큼…….”
모든 감방을 벗어난 우리의 이야기 끝에는 으레 나오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뒤로 더 이어 나올 무수한 이야기로 가득하겠지만.
나는 이제 안다.
페이지마다 적힌 것은 ‘행복’일 것이다.
“나의 장미.”
나는 다가가 그를 일으켜 꽉 끌어안았다. 손가락에 피어난, 세상에서 하나뿐인 반지를 소중하게 양손으로 잡으면서.
“돌아가면 그럴까요? 행복한 부부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당신의 말대로, 내 정원에 장미는 많겠지만, 당신이 가장 가까이 있길 바라면서. 나는 처음으로 수줍게 모든 마음을 고백했다.
바람이 불며 동백 꽃잎이 팔랑 떨어진다. 그의 어깨로, 머리로 그리고 우리가 마주 잡은 손 위로.
“이 순간만큼은 내가 더 사랑할 거예요.”
나는 이 순간에 붉은 장미가 정원 가득 활짝 피어 있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사랑해요.”
내 앞에는 내게만 영원히 피어 있을 장미가 있었으니까.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