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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먼 외출이라곤 했지만 도착한 장소는 집에서 세 정거장 정도 떨어진 공원이었다.
시원한 공기에 기분 좋은 듯 내 안에서 푸른 장미의 수호신이 노래 같은 울음소리를 내뿜었다.
‘기분 좋아?’
가만히 말을 걸면 푸르른 기운이 한차례 파도처럼 나를 감쌌다가 쓸려 내려간다. 수호신이 내게 답을 하는 방식이었다.
‘다음에, 새벽이나 밤 무렵에 나올 땐 너도 꺼내줄게. 휘슬.’
나는 기분 좋을 때 꼭 경쾌한 휘파람 같은 노래를 부르는 데에서 따, 수호신의 이름을 ‘휘슬’이라 부르고 있었다.
리케도르안은 나와 잠시 떨어져 푸딩이를 산책시키는 중이었다.
4살 수호신께서는 어울리지 않게 목줄을 차고 고양이 모습으로 산책을 즐기고 계셨다.
우스운 얘기지만 저 수호신님이 고양잇과밖에 될 수 없는 까닭에 가끔은 지나가며, 고양이는 산책시키면 안 돼요, 하는 소리를 듣곤 했다.
그러니 우리 산책이 인적이 드문 새벽이나 밤이 되기도 했지만.
보통은 내게서 절대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두 존재가 떨어진 데에는 나의 언질이 있었다.
아니, 이제는 익숙해진 일이라고 할까.
나는 벤치에 앉은 채로 새파란 하늘을 보았다. 아침에도 느꼈던 것이지만 높다란 하늘은 그대로 강물을 쏟아내도 좋겠다 싶을 만치 푸르렀다.
“공기 좋네.”
이리 중얼거릴 즈음 누군가 내 옆에 앉는 것이 느껴졌다. 흘끗 고개를 돌리면 시선 끝에 작은 할머니의 모습이 걸렸다.
등이 살짝 굽고 녹색에 잔꽃 무늬가 그려진 화려한 바지며, 검은 철사로 만들어진 수레와 등산용 모자까지 영락없이 평범한 할머니였다.
재래시장을 걷다 보면 열에 여덟쯤은 볼 수 있는 모습이랄까.
나는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왜 항상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요? 놀라게시리.”
그러자 할머니가 주름진 얼굴로 인자하게 웃었다. 웃는 모습 그대로 주름이 푹 파인다.
“이쪽이 더 놀랍지 않은 쪽 아닌가. 홀홀.”
“알맹이를 생각하면 전혀 그렇지 않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 그래요, 신님?”
조그만 할머니 모습을 한 신을 바라보며 물었다.
정확히는 저쪽 세계에서 날 이쪽으로 보낸 신에게.
할머니는, 아니. 할머니의 모습을 한 신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이미 몇 차례 만남을 통해 이것이 나름 취미라면 취미라 할 수 있는 취향임을 아는 나로선 어깨를 으쓱였다.
“근데 왜 항상 그런 모습이에요? 지난번엔 임산부, 그 이전엔 3살 여자아이였죠.”
주름진 얼굴은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진짜 같았다. 뭐. 이건 당연하겠지만.
“홀홀. 그런 말도 듣지 못했니? 학생. 신은 가장 약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학생이라 부르지 마세요.”
학생이 아닌 거 다 아는 처지에 무슨. 무심히 대꾸했더니 저쪽에서 웃음이 돌아왔다.
“무심하구먼. 서운하이.”
“허어, 끝내주게 역할에 성실하시네…….”
신과의 만남은 오늘로 세 번째였다. 이곳에 온 뒤로 첫 번째 만남은 우리가 살 곳과 앞으로 살아가는 데 지장 없도록 필요한 것을 만들어주었고.
두 번째 만남에서는 저쪽 세계와 편지가 오가도록 마지막 자비를 베풀었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의 만남에 어떤 의미가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이제 와 수명이 갑자기 확 다해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닐 테고. 이미 첫 번째 만남에서 신은 내게 이곳에서 살아갈 시간을 대략이나마 알려주었다.
그건 말하자면 과연 한 인간의 평균 수명, 어쩌면 그것보다 조금 더 긴 정도라 할 수 있었다.
아, 원래대로 이곳에 살았다면 나 꽤나 장수했겠구나 싶었지.
그놈의 장수가 걸림돌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특히나 이 수명, 즉 운명은 이쪽 세계를 관리하는 이가 만든 것이기에 규칙에 따라 건드리면 안 된다나.
절대자라는 신치고는 지켜야 할 규칙이 많구나 싶었다. 아니지. 어쩌면 이 대전제를 반드시 지키고 수호하기에 신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항상 창조 속에서 예외를 만드는 존재라 하지 않는가.
어울리지 않는 잔잔한 철학적 고민은 이쯤 해두고, 나는 신을 응시했다.
“그래서 왜 보자고 한 거예요?”
그저 눈을 한 번 깜빡인 것뿐인데, 어느새 눈앞에는 조그만 여자아이가 있었다. 한 8살은 되었을까. 네모난 책가방이 어울릴 것 같은 나이대의 외양이었다.
거, 노인은 반응이 구리다고 바꾼 건가.
“보고 싶어서 온 건데. 그럼 안 되나?”
“……그 말투 지금 외양이랑 정말 안 어울리는 거 알죠?”
“흐음, 그런가? 이런 거에 구애받는 성향은 아닌 걸로 아는데.”
“그건 그렇지만 이질감은 느끼죠.”
“그래. 아이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틀렸나. 흐음?”
“네?”
“넌 이만한 아이를 좋아하는 것 아니었어?”
나는 신의 외양을 자세히 보았다. 검은색이긴 하지만 길고 구불구불한 머리칼, 까슬한 뺨, 그리고 톡 치면 굴러 나올 것같이 커다란 눈동자까지.
……어린 프란시아랑 비슷한데?
물론 조금 더 어린 나이였으나 그녀를 동양인 느낌 나도록 만든다면 이런 느낌일 것만 같았다.
허어, 내가 한숨을 뱉자 신은 무구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알 수 없다는 듯이.
이어 신의 모습이 한 번 더 변했다. 이번엔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이었다. 이번에도 비슷한 느낌이 드는 사람이 떠올랐다.
“옆집 학생?”
“요즘은 이쪽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서 말이지. 뿌듯하달까.”
……스토커인가.
“그렇게 제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있다는 티는 안 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데요.”
어차피 그만두지 않을 거 하지 말라는 소리는 않을 테니까 티라도 내지 않아 줬으면. 그런 바람으로 말했다.
“왜, 너무 그렇게 느끼지 마. 응? 좋게좋게. 적적한 내 일상에 이런 재미라도 있어야지.”
“사실 재미도 아니잖아요?”
웃고 있던 신의 눈이 잠시 멈췄다. 발랄해 보이던 눈동자가 곧 한쪽으로 굴렀다. 신이 곁눈질하는 곳은 다름 아닌 리케도르안이 있는 쪽이다.
“요즘 지내는 건 어때?”
신은 제 무릎에 팔을 얹더니 그 위로 턱을 괴고는 씩 웃음 지었다. 내 물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질문이었다.
답은 하지 않겠단 말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네.
“잘 지내?”
“보다시피요.”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신이 했던 대로 나 또한 리케도르안 쪽을 흘끗 응시하면서.
리케도르안은 막 푸딩이가 풀을 뜯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어차피 풀을 먹어도 보통 고양이처럼 해가 되진 않겠지만. 진짜 고양이를 키우기라도 하듯 훈계하는 모습이 어설퍼서 우습고, 봄에 쏙 고개를 내민 푸릇한 싹인 양 사랑스러워 보였다.
나도 모르게 웃음 지었던 걸까. 빤한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면 신이 나를 보고 있었다.
아니, 이건 관찰이 아닐까.
“흐응, 행복해 보이는구나.”
“그건 질문이 아니죠?”
“그렇다고 해둘게. 그래서 궁금한 것은 없어?”
나는 신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에 그녀의 모습을 쭉 한번 보았다가 낮게 혀를 쯧 찼다.
그러고는 입고 있던 웃옷을 하나 벗었다.
“……그 모습을 할 거라면 모습에 어울리는 행동거지라도 하세요.”
나는 신의 무릎에 웃옷을 덮어주며 한숨을 푹 쉬었다. 교복을 구현한 건 좋은데, 지금은 겨울이다. 맨다리는 무엇이며 짧은 치마는 그대로 구현해놓고서 양반다리를 하는 건 뭐냐고.
신은 묘한 표정이었다.
“역시 자비롭단 말이지. 가장 큰 조각이라서 닮은 건가?”
“이게 자비면 저는 이미 열반했게요? 부처인가?”
내 실없는 농담에 한차례 웃음이 오갔다.
“그래서 궁금한 것은?”
신이 이렇게 묻는 건 아마도 모든 걸 짐작하고 묻는 것이리라.
뭐. 그래서 신이겠지.
사실 첫 번째 만남에서 나는 여러 궁금한 것들을 물었지만 그때 신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이제 와 다른 대답이 나올까?
반신반의하면서도 물었다.
“……저쪽과 이곳의 시간은 차이가 어느 정도며, 어떻게 흐르나요?”
이미 물었지만 답을 듣지 못한 질문이 이것이었다.
이는 왕래하는 편지에도 적용되어 그들은 편지에 시간을 표시하지 못했고, 표시해도 절로 지워진 채 도달한다.
나 또한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의 일인지 알지 못했다. 그저 꽤 흘렀다는 것만 알 뿐.
“시간은 당연하겠지만 흐른단다. 네가 저쪽 세계를 그대로 두길 바랐으니까. 선택의 결과가 궁금하니?”
다시 한번 관찰하는 듯한 눈이 내게 꽂혔다. 인간의 흉내를 내지만 저 나이의 학생이 담을 수 없는 깊디깊은 눈을 하고서.
신이란 존재가 주는 의미가 그러하듯 가늠할 수 없는 깊이였다.
“이것이 널 엉망으로 만들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궁금하니?”
“네, 궁금해요.”
신은 잠시간을 더 관찰로 시간을 보내다가 입을 열었다.
“시간은 이쪽이 훨씬 빠르단다. 네겐 다행일지도 모르겠구나.”
신이 생긋 웃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네가 돌아갈 즈음엔 네가 아는 인간은 나이가 아주 많이 들었거나 남아 있지 않겠지?”
“이쪽이 빠른데, 어째서요?”
“지금은 이쪽 시간이 빠르지만, 또 어느 시기엔 이쪽이 느려지거든. 그래도 대체로 이쪽이 빠르단다.”
신의 눈동자가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저쪽의 남은 장미, 네가 거둔 존재들은 너와 묶여 있으니, 나이를 먹지 않을 거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것을 이상하게 여긴 인간들이 늘어나고 혹은 배척받을지도 모르지.”
신은 이것이 내 선택의 결과라 돌려 말하고 있었다.
“네 세대의 장미들이 아니며 네가 거둘 존재들이 아니었지.”
“그렇죠.”
나는 순순히 수긍했다.
“나는 알면서, 짐작하면서 선택했어요. 그리고 내 장미들도 모든 걸 알고, 택한 거죠?”
“…….”
“나를.”
왜일까, 신은 거짓은 뱉지 않았다. 지금처럼 침묵을 보일지언정.
그렇기에 신의 침묵은 긍정이었다.
“그러니까 우린 괜찮아요.”
나는 웃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다 괜찮으니까.
“나는 모든 걸 포기하고 날 택한 이들에게 나 또한 모든 것을 주기로 결심했으니까.”
나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앞으로 나는 꽤 오랜 세월, 어쩌면 셀 수 없이 긴 세월을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왜인지는 모른다. 신에게도 아직 묻지 않았다. 내가 처음부터 올바른 방식으로 저쪽 세계에 가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래. 규칙에 위배된 존재이기에 그렇게 된 건지 알 수는 없지만.
나와 장미들은 한 운명으로 묶였다. 긴 수명은 나에게 묶인 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우리의 선택은 가혹한 대가가 따르는 것일지도 한편으로 보면 울타리 안의 낙원일지도 모른다.
신은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저 얼굴이야말로 신에 가깝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더니 돌연 고개를 돌렸다.
“저길 보렴.”
이곳은 공원이었다. 화창한 하늘과 푸르른 잔디와 알록달록한 벽돌, 아직은 앙상한 가로수까지. 주변에서는 평범한 이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화창한 날의 공원을 즐기고 있다.
당연하겠지만 이들 중 신의 모습이 휙휙 변하는 것을 목도한 사람은 없으리라.
“무엇을 보라는 거예요?”
신은 대답이 없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사람들을 하나하나 쳐다봤다.
우리가 앉아 있던 벤치 앞으로 사람들이 태연하게 지나갔다. 각각 즐겁고 행복한 미소를 띤 채로. 개중에는 다른 이들보다 유달리 행복하고 화목해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신이 그 순간 내 손가락을 잡아당겼다.
“지금.”
지금? 저 사람들을 보라는 건가? 내 시선이 자연히 막 멈춰 서서 웃는 이들을 보았다.
부부와 성인 여성, 셋으로 보이는 단란한 가족이었다.
왜일까, 그들을 본 순간 아주 잠깐이지만 심장이 욱신거렸다. 아니다. 아프다기보다는…….
“저들이 네 가족이야.”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 말을 들었지만…… 당연하게도 내 기억에는 없었다.
“이젠 서로가 서로에게 기억이 없고 존재조차 지워진 가족이라 해야겠구나.”
내가 대가로 내놓은 것은 내 모든 과거, 저들에게는 기억뿐 아니라 존재 자체를 이르는 것. 이 세상에 ‘내’가 살았던 흔적은 없다. 모조리 사라졌으니까.
그리고 나는 이를 아파하고 씁쓸하게 느낄 감정조차 대가로 보냈다. 그러니, 저들을 본다 한들 무언갈 느낄 리 없었다. 다만 둔중한 고통이 들었다. 이또한 내가 평생 안고 갈 것이었다. 한편으론 어째서 신이 내게 그들을 보여준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왜 보여주시는 건가요?”
내 목소리는 덤덤히 흘러나왔다.
“이별의 순간마저 주어지지 않은 선택이었지. 작별 인사를 하는 건 어떻겠느냐.”
작별? 이제 와 왜? 서로 기억도 없는데? 신은 내 마음을 안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기억이 없는 이별은 이별이 아닌 것 같으니?”
잔잔한 한마디였다.
“그렇지 않나요? 의미가…… 없는 것 같은데.”
“네가 그리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신은 턱을 괸 채로 웃음을 살짝 지웠다.
“과거의 너는, 가족을 몹시도 사랑했더구나. 그건 네 가족도 마찬가지였고. 맑은 영혼들만 모인 화목한 가정이었지.”
“…….”
“기억은 혼에 속한 것, 기억을 가져간다 해도 들어낸 자국이 남지.”
그저 아무것도 아닌 한마디였을 뿐인데.
주르륵.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영문을 알 수 없다. 왜? 가슴이 저릿하지도 아프지도 않은데.
“생의 끝에 사가 오듯이 연의 끝에도 매듭이 필요한 법. 이별을 하렴.”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나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행복하게 웃고 있는 가족.
그렇구나.
“마무리라……. 그래요.”
나는 한참이나 그 가족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살짝 웃었다. 모두 지워졌다지만 그것이 있던 흔적이 남아 있다면.
이제는 그 흔적조차 보내줄 때로구나.
“행복해 보여서 다행이네요.”
이젠 기억에는 없지만 실로 소중히 여겼던 존재라면 나로 인해 아프지 않았으면 했다. 결과적으로 이건 역설적이게도 가혹하지만 서로에게 행복한 결과였다. 찌꺼기같이 남은 눈물이 한 번 더 흘러내린다.
속으로 수많은 말과 생각이 지나가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화목하던 가족은 아주 작아진 뒷모습을 보이다가 공원 저 끝으로 사라졌다.
어떤 말을 건넨 것도 하다못해 인사를 나눈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가슴에는 민트 잎을 머금은 듯 청량한 바람이 불었다.
씁쓸하면서도 속이 시원한 감각이었다.
“신님.”
내 눈동자에 신이 담겼다.
“내가 어느 날 내 세계와 이름을 빼앗긴 건 내 탓이 아니에요. 그런데 이런 처사는 잔인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신은 후후, 소리 내어 웃었다. 고등학생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다.
“힘들었니?”
나는 무심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진 않았지만요.”
“그럼 강제로 널 저쪽으로 데려간 이를 원망하니?”
“……그것도 아니고요.”
나를 저쪽으로 데려간 이를 원망하는 것은 내게 저쪽 세계에서 보낸 시간, 나아가 리케도르안, 프란시아, 르나그와의 연을 후회하는 것과 같았다.
“물론, 솔직히 그랬던 적도 있는 것 같은데. 이젠 아니네요.”
나는 담백하게 말하곤 눈을 깜빡였다. 하고픈 말이 있었다.
“저한테 왜 자비를 베푸세요?”
솔직하게 말해서 내가 치렀던 대가는 유달리 후한 편이었다.
“내게 자비롭다고 말씀하지만 사실은 당신이 더 자비로운 것 같단 생각이 들어요.”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가혹하다 이르지만 천천히 따져보면 심히 가혹하지는 않았던 대가들.
잃어버린 기억, 존재가 지워져 아파할 자격조차 없어진 자리에 남은 무심함.
끝으로, 이곳으로 돌아가며 특별히 리케도르안이 함께 넘어갈 수 있게 한 것까지.
돌이켜보면 모든 대가는 내가 견딜 수 있는 자극만을 주었다. 오래 추측하고 생각해왔다. 어쩌면 이 세계로 온 뒤로 계속, 아주 오래.
“하지만 사실은 자비를 베푼 게 아니죠?”
그러다 나는 어떤 결론에 이르렀다. 사실, 내가 미쳐선 안 되는 게 아닐까.
“사실 내가 망가지면 안 되는 거죠?”
신이 내게 말했었다. 본래 나는 이 세대의 장미가 아니고 더 오랜 시간 뒤에 넘어와야 했다고.
장미들이 생겨난 것은 죽은 신의 조각을 자연스럽게 파괴하기 위함이라 했다.
그 말대로라면, 나는 원래 훗날 저쪽 세계로 다시 넘어가야 하고, 내 안의 신의 조각이 그곳에서 파괴되어야 했다.
“모든 걸 돌이켜 생각해보니, 내 정신이 온전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었어요. 그저 내가 미치지 않았으면 한 거야.”
나는 작게 웃었다.
“그렇죠?”
100퍼센트 확신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추측으로 시작한 추론은 논리를 갖춘 끝에 힘을 얻었다.
“그래서 가족들의 모습도 마지막으로 보여준 거죠? 후환이 없도록.”
신은 침묵했다. 그러다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네 말이 맞아.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지만 말이다.”
그녀는 턱을 괸 채 검지로 뺨을 살살 문질렀다.
“사실 올바른 대가를 치렀다면, 너는 기억을 가진 채로 평생 괴로움을 지고 가는 것이 맞긴 하지.”
그녀의 깊은 눈동자가 내게로 또르르 올라왔다.
“그러나 말했듯 모든 게 네 정신을 망가지지 않기 위한 보호 장치는 아니었단다. 그래……. 네가 표현한 대로 자비라 해도 좋겠어.”
신의 입술이 곡선을 그렸다.
“왜 이렇게까지 한 거예요?”
여기에 대한 대답은 산뜻하게 흘러나왔다.
“이미 네가 의지와 상관없이 그곳에 넘어간 것이 형벌과 같다고 판단했으니까.”
“그건.”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부정하진 못하겠네요.”
결과가 행복했다 한들 모든 과정이 기쁘고 행복했던 것만은 아니다. 나는 이점은 인정했다. 이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돌려 리케도르안을 보았다.
“물론 지금은 행복하지만. 선택에 후회도 없고요.”
앞으로 기나긴 세월을 함께할 나의 반려.
“앞으로도 하지 않을 거예요.”
망설임 없이 모든 걸 버리고 혈혈단신으로 나를 택한 사람, 그 결과로서 이곳에 있었다.
아마도 리케도르안이 지금처럼 나와 온종일 둘만 보내는 시기는 지금이 유일할 것이다.
“지금 저는 아주 행복해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새파란 하늘이었다. 그래서 하늘이 좋았다. 이쪽 세계나 저쪽 세계에나 푸른 하늘은 존재할 테니까.
“앞으로는 더 행복해지겠지요.”
신을 보지 않았지만, 그녀가 있는 곳에서 자그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구나.”
나는 신 또한 감정을 느끼고 후회와 그리움을 느끼는지는 알 수 없었다.
“죽은 신의 조각이 죽은 자의 모습을 따르는 건 당연할지도 모르겠구나.”
영문 모른 말에 회한이 담겨 있는 것 같았지만 눈을 감아 못 들은 척해주었다.
그렇게 한참 뒤 거처로 돌아가기 직전, 신이 내게 물었다.
“그 아이는 어쩔 것이니?”
신이 묻는 ‘아이’가 누구인지 알고 있던 나는 대답 대신 미소했다.
“보러 가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