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권 - 1화 (74/87)

에필로그.

1월.

푸르른 하늘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높고 파란 하늘.

하늘색 물감을 휙 엎어놓은 것 같은 색이었다.

“끄으응.”

나는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 허리를 쭈욱 폈다. 눈앞에는 녹색 통이 보였다. 이 동네 쓰레기통이다. 통 안에는 야무지게 묶인 쓰레기봉투가 가득했다.

냄새가 밖으로 퍼지기 전에 나는 얼른 통을 닫았다. 이 동네의 쓰레기통은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깨끗했다. 집 앞길에도 쓰레기가 드문 편이었고.

누군가 말하길 동네 미화는 경제력과 관련 있다 하던데 이런 걸 보면 이 동네는 나쁘지 않은 이들이 모여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왜 추측형이냐 하면 아직 이 동네를 잘 모르니까가 첫 번째겠다. 그나마 얼굴을 튼 사람이라고는…….

“안녕하세요!”

아, 깜짝이야. 나는 어깨를 움찔하다 말고 등을 돌렸다.

내 뒤쪽에는 단정한 교복을 입은 소녀가 서 있었다. 나이는 19살이었나. 낯익은 얼굴이었다.

“놀라라.”

고등학생이 웃음을 터트렸다. 꺄르르 소리를 낸 밝은 웃음이었다.

“항상 전혀 놀란 얼굴이 아닌데,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웃겨요, 언니.”

그녀는 옆집에 사는 학생이었다. 우리 옆집도 우리 집과 마찬가지로 멀끔한 담이 있는 주택인데 1층과 2층에 각각 다른 이가 살았다.

이쪽 학생은 옆집의 주인댁 쪽 막내딸이었다.

“학교가? 일찍 가네.”

“네!”

옆집 학생이 고개를 얼른 끄덕였다. 그녀는 입을 쭉 내밀었다.

“이제 고3이라고 일찍 나오래요. 3월부터는 쪽지 시험도 친다나. 하기 싫어 죽겠어요.”

나는 옆집 학생의 옷차림을 흘끗 보았다. 과연. 학교 가기 싫다는 마음이 팍팍 담기듯 잠기다 만 조끼가 긴 패딩 사이로 보였다.

“언니는 항상 일찍 일어나네요?”

“그러게. 원래 일찍 일어나는 편이 아닌데, 매번 이 시간에 눈이 떠지네.”

그렇게 말하다 말고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시차 적응이 덜 됐나.”

그러자 옆집 학생이 네? 하고 반문했다.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알아들을 수 없는 농담일 테니.

하지만 옆집 학생은 용케 몇 마디를 알아챈 모양이었다.

“시차 적응이요? 와, 언니 외국에서 온 거였어요?”

그녀가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보였다. 사실 추측하자면 학교 가는 일만 아니라면 아무거라도 하고 싶은 듯한 얼굴이었다.

“항상 어디에서 왔냐 하면 안 알려준 것도 외국이어서였어요?”

“뭐, 대충 비슷하긴 한데.”

사실 다른 사정이 있지만 대충 얼버무렸다. 그러자 그녀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와, 와. 언니 그럼 영어 잘해요? 아니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나는 옆집 아이를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었다. 이렇게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노라면 다른 세계에 두고 온 장미 하나가 떠오르곤 했다.

나는 픽 웃었다.

아마 어떤 말이든 다 못 할걸.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하지만 딱히 문제는 되지 않을 거다. 어떤 언어든 내게 지식이 있느냐와 상관없이 할 줄 알게 될 테니까.

이를테면 지금 있는 곳에서 이사 가서, 그곳에 살게 된다면 말이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옆집 학생은 알아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홀로 검지와 엄지로 턱을 잡고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였다.

“어쩐지. 어쩐지. 언니는 범상치 않았다니까요. 첫만남부터!”

“부터?”

동그란 눈동자가 나를 마구 훑었다. 머리를 감지 않은 듯 동그랗게 묶인 똥머리가 머리를 따라 달랑달랑 움직였다.

“평범하지 않았다고요. 나 우리 엄마한테 언니한테서 뭔가 막, 아우라가 느껴졌다고 했다니까요?”

“아우라?”

“왜, 연예인들이 가지고 있는 거요!”

나는 웃음을 터트릴 뻔했지만 꾹 참았다.

“잉, 왜 웃어요. 언니. 나 정말 언니가 어디 아이돌 준비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니까요. 아니다. 언니는 배우? 배우!”

옆집 학생은 이제 숫제 허공에 네모를 그려가며 설명했다. 아무래도 영화관 스크린인 것 같았다.

“근데 언니는 어딜 봐도 한국 사람처럼 생겼는데 엄청 이쁘고, 근데 또 한국 사람 느낌은 안 들고……. 외국에서 살아서였구나.”

횡설수설하는 듯한 말이었지만 뜻은 알아들었다.

그녀의 말처럼 이곳으로 넘어온 뒤 내 모습은 이곳의 사람과 비슷하게 변형되었다. 정확하게는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위화감이 없게 보인다고 할까.

느낌상 원래 내 모습과 ‘이아나’의 모습이 뒤섞인 듯했는데, 다행스럽게 이곳에 녹아드는 데는 문제 없는 외모였다. 일단은 머리색이나 눈동자나 새까맸으니까.

나는 줄줄이 이어지는 칭찬을 듣다 말고 뺨을 긁적였다. 이 애는 프란시아와 비슷한 것 같았지만 그보다 더 강아지 같은 면이 있었다. 이를테면 프란시아의 어린 시절에 더 가깝다고 할까. 나는 뺨을 만지다 말고 상체를 슬쩍 기울였다. 이 애는 나보다 작았기에 고개를 기울여야 했다. 나는 눈을 마주한 채로 생긋 웃었다.

“예쁘게 봐줘서 고마워.”

옆집 아이는 흠칫했다. 그러다 말고 뺨을 발긋 물들였다.

“뭐야, 뭐야! 언니 나 꼬신 거죠? 그런 거죠?”

옆집 아이가 내 팔뚝을 때리려다 말고 얼른 제 팔뚝을 잡고 파르르 떨었다. 그녀의 호들갑스러운 반응이야 이제 익숙해진 일이었다.

오히려 이젠 심심하지 않달지. 옆집 아이가 눈을 반짝이며 나를 쳐다봤다.

“언니, 예쁜 건 정말 옳은 것 같아요. 저는 예쁜 언니들이 정말 좋아요.”

그러더니 진지하게 표정을 굳히며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 사촌 오빠는 여자애들이 예쁜 여자애들 질투한다고 하는데 다 개 뻥 같아요. 나는 언니 보면 기분이 이렇게 좋은데!”

“어, 음. 그러게. 정말 개, 아니. 헛소리네.”

나는 얼떨떨하게 맞장구쳤다.

“그치만 우리 오빠는 이런 헛소리 안 해요!”

“그래?”

오빠라면 아마 이 애의 친오빠, 옆집의 큰아들일 거다. 대학교 2학년생인가 그랬지.

키도 아주 크고 꽤나 훤칠하게 생겼던 걸로 기억한다.

옆집 아이는 왜인지 기대감 어린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하는데, 그녀가 슬그머니 내 뒤쪽을 향해 고개를 기웃했다.

마치 누군가를 찾고 있는 양.

“그런데 언니, 오늘은, 그, 없어요?”

“없다니?”

옆집 아이의 얼굴이 내게로 휙 돌아왔다. 그러고는 조금 전과 비슷한 정도로 상기된 낯으로 소리를 높였다.

“잘생긴 오빠요!”

아, 바로 정답을 깨닫고는 웃음을 흘렸다.

“그, 그. 어쩜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생겼어요? 볼 때마다 놀라요. 잘 밖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나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그래.”

“맞아요, 항상 언니랑 있을 때만 나와 있던 것 같고. 사람들이 마구 쳐다봐서 그래요? 아니. 쳐다보겠네요.”

글쎄. 그보다는 그냥 온종일 나랑 둘이서만 밀폐된 공간에 있고 싶어서일걸…….

진실은 아직 어린 이 애를 위해 남겨두기로 했다.

아마 내 붉은 장미는 지금도 집 안쪽에서 반쯤 벗은 채로 새근새근 잠들어 있을 테니까.

이름처럼 붉은 자국을 제 몸과 옷을 걸친 내 몸에 만들어놓은 채로.

“아무래도 그렇지.”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겠어요. 엄-청 잘생기고 눈동자까지 막 파라니까. 음, 외국인이니까 역시 어쩔 수 없는 건가 봐요.”

그녀의 말에 나는 미소로 침묵했다.

그냥 외국인은 아닐걸.

은발은 너무 눈에 띄는 터라 새까만 색으로 물들이긴 했지만 눈동자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여전히 푸른색인 그였다.

사실 리케도르안은 밖을 나서도 시선에 그다지 신경 쓰는 기색이 없었다.

나와서도 오로지 나만 보고 있으니 말이지.

“그나저나 안 가 봐도 돼?”

내게 시계는 없었지만 시간이 꽤 지났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쓰레기통 근처에서는 자리를 옮겼지만 우리는 여전히 집 담 앞이었으니까.

“아! 으, 너무 가기 싫어요. 고3 싫어……. 눈 뜨면 그냥 12월이었으면…….”

이 애도 깨달은 것인지 어깨를 축 늘어뜨린다. 그러고는 시무룩한 음성을 토해낼 때였다.

벌컥!

쾅.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등을 돌려 소리 난 곳을 향했다.

문이 열린 곳은 다름 아닌 우리 집이었다. 그리고 문 안쪽은 텅 비어 있었다.

“어, 언니. 문이 저절로 열린 거예요?”

옆집 아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온 순간이었다. 나는 코를 찡그리며 웃었다. 이어 허리를 깊이 감싸는 단단한 팔을 느끼며 말했다.

“아, 우리 집 문이 좀 말썽이야.”

내가 잠깐 자리를 비울 때만 말이지.

흘끗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내 등을 감싸 안고 내 목에 얼굴을 기댄 채 낮게 숨을 내쉬는 남자가 있었다.

“……아나.”

막 잠에서 깬 듯 리케도르안의 음성은 오싹하도록 낮고 쉬어 있었다.

“어디 갔었어요…….”

나는 손을 들어 그의 정수리를 살짝 쓰다듬어 주었다.

나중에서야 안 사실인데, 장미들은 고유의 향기가 있었고 이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대로였다.

씻지 않아도 자다 깨도 불쾌한 냄새는커녕 향기로 가득하다는 소리다.

신기하게도 말이지.

우릴 번갈아 보던 학생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아마 상체를 그대로 드러낸 리케도르안 덕에 눈 둘 곳이 없는 모양이었다.

“미안해. 우리 집 애가 음…….”

나는 적절한 말을 골랐다.

“분리불안증이라.”

어째 말을 하고 보니 사람보다는 반려동물에 걸맞은 표현인가 싶었다.

-하는 짓은 짐승 맞지. 안 그러냐, 냥.

그러자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푸딩이 기다렸다는 듯 내 안에서 한마디했다.

-아무리 장미들이 체력이 좋다지만 말이다, 냥! 잠을 안 재우…….

‘조용히 해.’

나는 얼른 푸딩이의 입을 가로막고는 고개를 돌렸다.

옆집 아이는 대체 리케도르안이 언제 나왔느냐는 얼굴이었지만 자신이 못 봤으려니 하는 것 같았다.

그보다는 리케도르안의 얼굴에 시선을 빼앗겨 다른 사고를 하려 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일단 우린 들어가 볼게.”

“아…… 네? 네! 언니. 그럼 다음에.”

옆집 아이가 인사를 채 맺지 못했다. 듣고 있던 내가 들을 상태가 되지 못했으니까.

“으앗, 리…… 리케도르안!”

어느새 내 발이 붕 허공에 떠 있었다. 그는 아직 졸음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담았다.

“막 움직이면 안 돼요.”

이제는 먹빛에 가까운 흑발이 그의 새하얀 이마를 가린 채 살랑살랑 흔들렸다.

“……어제 무리했잖아.”

귀로 잔뜩 쉬어 목구멍 안쪽을 긁는 듯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더 쉬어야 할 텐데.”

분명 염려를 속삭이는 말인데 어쩜 이렇게 색정적으로 들리는지.

나는 끙 숨을 흘렸다.

“그렇게 귀로 바로 속삭이지 말아요.”

“하지만 ……이아나. 내 목소리를 좋아하잖아요. 특히 자다가 일어났을 때. 야하…….”

“그만.”

나는 얼른 그의 입을 막았다. 그러고는 찰싹 그의 맨 어깨를 두드렸다. 분명 ‘야하다’고 하려 했어. 이 남자.

“애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어. 그럼 우린 먼저 가볼게. 우리 집 남자가 이 모양이라.”

옆집 학생이 멍하니 끄덕이다 말고 얼른 내게 고개를 숙였다. 아, 들어가세요! 하면서.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리케도르안이 걸음을 옮겼다.

***

대한민국의 고등학생 윤지아는 눈을 크게 깜빡였다. 조금 전의 일을 망막에 콕콕 아로새겨 넣기라도 하듯이.

입으로는 연신 자신의 엄마가 하듯 어머나, 세상에를 버릇처럼 사투리로 중얼거렸다.

놀랐을 때의 그녀의 버릇이기도 했다.

“언제 봐도 놀랍네.”

오늘도 미친 듯이 잘생겼다. 그녀는 10대들이 사용할 법한 비속어를 잔뜩 섞어서 마구 중얼거렸다.

그녀의 모친은 그놈의 욕 좀 덜 하라며 잔소리하지만 옆집에 사는 이들의 미모에는 언제나 이런 감탄이 나오고야 말았다.

하기야 이는 그들이 어느 날 자신의 옆집에 이사 왔을 때부터 그러했다.

어느 날 소리소문없이 나타난 그들은 무엇을 하는지도 알 수 없게 조용히 살아가고 있었다.

특히나 ‘이아나.’ 성이 이고 이름이 아나일까? 여성 쪽은 몇 살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분명 제 오빠와 비슷한 대학교를 다닐 나이가 아닐까 했지만 이아나가 그건 아니라고 했다.

사실 이는 이아나 스스로도 자신이 이곳에서 몇 살이었는지, 혹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으나 윤지아의 입장에선 이마저 신기하게 느껴졌다.

“애들한테 가서 말해야지.”

그녀는 남들보다 살짝 호들갑스럽고, 수다스러운 학생으로 평소에도 가십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나 연예인보다도 더 연예인 같은 미모의 이들이라면, 또래 애들에게 멋진 자랑이 되지 않을까.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그녀의 표정이 곧 몽롱해졌다.

이어서 그녀가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묶여 있던 머리가 느슨하게 풀렸다. 윤지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라, 방금까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지?’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제 손을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아, 학교 가기 싫다.”

조금 전까지 쳐다보던 옆집은 모조리 잊은 채,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신경 쓰지 않으면서.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는 옆집의 신비로운 이들에 대한 것은 모두 잊혀진 뒤였다.

그들을 다시 보기까지는 계속 이럴 터였다.

지난 1여 년간 그래왔듯이.

***

“내가 있던 세상에서는 18살은 성인이에요, 이아나.”

나는 식탁에 앉아 있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푸흡, 마시던 물을 뱉을 뻔했다.

“그…… 지금 한 말은 둘째치고, 리케도르안. 대체 그건 무슨…… 옷차림이에요?”

리케도르안은 무려 맨살 위 그대로 앞치마를 맨 채였다. 다행히 바지는 걸치고 있었지만…….

그 바지가 내가 얼마 전 사준 핏이 아주 좋은 청바지란 점에서 아주 오예, 아니, 눈이 호강하다 못해 사치에 배가 부른 느낌이었다.

늘씬하고 탄탄한 곡선을 보고 있노라면, 그는 흡사 외국의 유명 청바지 광고판에서 톡 튀어나온 것 같았다.

‘얼굴은 이쪽이 훨씬 좋지만.’

리케도르안은 프라이팬을 든 채 고개를 갸웃했다.

“마음에 들지 않아요?”

“아주 마음에 들어, 가 아니라. 대체 그런 건 어디서 배웠어요?”

내 질문에 잠시 고민하던 리케도르안은 곧 산뜻하게 대답했다.

“붉은 장미의 수호신이 그러던걸요.”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퍽 무구한 얼굴로.

“이아나가 날 보며 내가 이런 모습이었으면 그날로 환장했겠…….”

“푸딩!”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선가 냐앙! 하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착각이 아닐 거다.

밖으로 꺼내놓은 수호신님은 위기를 직감하고 빠르게 몸을 빼냈다.

그러나 날고 기어봐야 손바닥 안, 내가 손을 뻗자 손으로 푹신한 감각이 느껴졌다.

“도망가려 했겠다.”

-으응? 냥? 도망이라니.

“재빠르게 움직이는 걸 봤는데.”

-이 몸은 도, 도망 같은 걸 치지 않는다!

허공에 둥둥 떠서 붙들려온 푸딩이 빠르게 부정했다.

-다, 다만 낮잠을 자려 했을 뿐이다, 냥!

“쇼파 밑에서?”

-…….

뻘뻘 진땀을 빼며 내 눈을 피하던 조그만 설표가 커다란 젤리를 내 앞에 내밀었다.

-이, 인간! 오해가 있다! 냥! 이 몸이 알려준 것이 아니다, 냥! 붉은 장미가 멋대로 이 몸의 혼잣말을 들은 거다 냥!

리케도르안은 푸딩이 내 안에 있을 때의 말은 듣지 못하지만 이렇게 바깥에 나왔을 때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 또한 푸딩이 의식적으로 차단한다면 듣지 못하는 모양이지만 그러지는 않았으니까.

결국 범인은 이 조그만 설표란 소리였다.

-이, 이것 놓아라! 냥!

내 손이 느슨해지기 무섭게 푸딩이 버둥거렸다. 그러나 그보다 내 손이 빨랐다.

“어딜 가려고.”

푸딩이 도망가지 못하게 푸르른 힘이 손끝에서 일었다.

“지난번에도 쓸데없는 소릴 했지, 너?”

-아야, 아야! 아프다 냥! 이건 반료 동물 학대랬다 냥! 동물보호법 위반이다, 냥!

“반려동물이겠지. 그리고 미안하지만 댁같은 영체는 동물법에 들어가지 않거든? 요게 하루 종일 티브이만 보더니!”

-억울하다! 아픔은 느낀다. 냥!

내가 그대로 푸딩이의 뺨을 마구 꼬집어 늘리는 순간이었다.

나는 돌연 푸딩이를 놓고 벌떡 일어났다. 나뿐 아니라 요리도구를 들고 있던 리케도르안 또한 한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의 시선이 향한 곳은 거실에 위치한 긴 전신 거울이었다.

쳐다보기 무섭게 거울이 울렁, 마치 파도의 단면처럼 마구 울렁이더니, 돌멩이를 톡 떨어트린 호수처럼 파동을 그렸다.

이윽고 그 파동에서 무언가 톡 튀어나왔다. 마치 거울이 집어삼킨 것을 퉤 내뱉는 듯한 모양새였다.

나는 푸딩이를 내려놓고 황급히 거울 앞으로 향했다.

거울 밑에는 양피지가 떨어져 있었다. 정확히는 정갈하게 접힌 편지 봉투였다.

봉투 겉면에 쓰인 것은 아주 익숙한 필체였다.

「나의 언니에게」

나는 그리운 눈으로 이것을 바라보다 눈을 내리깔았다. 작은 미소와 함께.

“프란시아네요.”

프란시아, 그녀가 다른 세계에서 보낸 편지였다.

「안녕, 언니? 잘 지내?」

그녀의 필적은 성격만큼이나 경쾌했다.

「이번엔 내가 편지를 보낼 차례라 얼른 써버렸지, 뭐야. 노란 장미 차례는 잘만 오는 것 같은데, 왜 내 차례는 이렇게 느리게 느껴지는지 모르겠어!」

편지를 보고 있자니, 그리움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고작해야 5년 남짓 있었을 뿐이지만, 평생을 함께할 사람을 만난 곳.

나의 다른 장미들이 살아 숨 쉬는 세계.

나는 눈을 감았다 뜨며 그리움 조각을 밀어냈다.

“저쪽 세계는 문제없이 잘 흘러가고 있나 봐요.”

프란시아의 편지를 모두 읽은 뒤 작게 중얼거렸더니,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리케도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단한 팔로 나를 감싸 안으면서.

“다행이네요.”

나는 나를 감싸 안은 팔을 물끄러미 보다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말하면 되나요, 대공님. 오늘도 당신의 마법사는 당신의 역할을 대행하느라 바쁠 텐데.”

이곳에 온 지 1여 년, 저쪽의 신은 마지막 자비를 베풀어 저쪽의 세계와 편지로 왕래할 수 있게 해주었다.

물론 자주는 아니고 사람은 두 장미로, 봉투는 하나로 한정되어 있지만.

언제나 그 봉투를 꽉꽉 채워 왔기에, 저쪽의 상황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헤르님 대공가는 현재 그의 보좌관이자 대마법사인 제이르가 이끌고 있었다.

리케도르안의 최측근이자 프란시아와 르나그의 협력까지 더해지니 가신들도 나름의 납득을 한 모양이었다.

이것이 언제까지 갈진 알 수 없지만.

그들도 각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하는 것이리라.

“제이르 씨가 이르길, 머리가 다 빠질 것 같대요.”

“머리칼이 나는 마법도 할 줄 알 거예요.”

“……그렇게 말해도 돼요?”

리케도르안은 말없이 미소할 뿐이었다. 그 얼굴에서 미련은 찾을 수 없어서 나는 잠시 난감한 미소를 띠었다가, 그의 팔을 토닥여주었다.

“우리가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헤르님을 맡고 있는 건데요.”

“네.”

“아주 오래 걸릴지도 몰라요.”

“네.”

“앞으로 저쪽이랑 이쪽 시간이 어떻게 흐를지도 모르니까. 저쪽에서는 음, 제이르는 평생 당신을 보지 못할지도 모르고.”

리케도르안의 맑은 웃음은 지워질 줄 몰랐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가 비슷한 웃음을 그렸다.

“그래요.”

당신이 만족하고 있다면야.

그는 이 상황에 아주 만족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정말이지, 중증이라니까.’

이런 그가 싫지 않으니, 어쩌면 나도 같이 중증인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편지로 고개를 돌렸다.

사실 이들이 앞서 주었던 편지엔 도뮬릿의 이야기도 있었다. 저쪽에 남은 이들은 언급하길 꺼려했지만 내가 부탁한 정보였다.

현재 도뮬릿은 헤르님과 마찬가지로 수장 겸 혈족을 모조리 잃고 와해 및 붕괴되기 직전의 상태였다.

그러나 무너지기 직전 누군가 도뮬릿의 핏줄이라 이르며 작은 아이를 데려왔는데, 그 아이를 중심으로 가신들이 똘똘 뭉쳐 간신히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단다.

체이서 곁에서 간간이 발견되곤 했던 조그만 아이, 나는 아이의 외양 묘사를 들으며 알았다.

흑마법사, 마쉬멜이다.

나는 어째서 그가 도뮬릿을 지키기로 결심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체이서 아니기에 두 사람 간의 계약은 그저 짐작만 할 수 있었으니까.

결국엔 헤르님과 도뮬릿 양 가문은 충성스러운 수하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는 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프란시아의 편지를 갈무리하려 했다. 그러다 그녀의 편지 끝자락에서 아주 작게 쓰인 몇 마디를 발견했다.

너무 작아서 한 번 더 보지 않았다면 발견 못 했을 터였다.

「언니, 난 너무 착한 것 같아. 휴. 내가 편지를 보내려 하니까 너무 불쌍하게 쳐다보길래 한 번쯤 자비를 베풀어주기로 했어.

……뭐. 저쪽에서도 내 편지를 자기 차례에 끼워준 것도 있고.

아무튼! 난 챙겨 넣었어! 저쪽 것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가, 곧 알아차렸다. 프란시아의 편지 더미 사이로 자그만 종이가 나왔으니까.

메모에 가까운 작은 크기였다. 아마 뒤적거리지 않았다면 간과했을지도 모를 크기.

카드를 뒤집으니, 사선으로 반듯이 눕혀진 정갈한 글체가 보였다.

카드의 내용을 읽는 순간 나는 어설피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당신의 이정표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내 장미들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점이 참을 수 없는 미안함과 책임감, 그리고 따뜻한 그리움을 불러일으켰다.

눈을 감으면 흘러나오는 추억의 풍경을 만끽하다 지워내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나는 손가락으로 리케도르안의 팔을 톡톡 두드렸다.

“우리 잠깐, 나갔다가 올까요?”

이곳에서 모든 수명을 보내야 하는 대가, 그러나 신은 아이러니하게도 리케도르안을 함께 보내주었을뿐더러 저쪽 세계와도 완전히 차단시키지 않았다.

가끔은 의문이었다. 나는 내 세계로 돌아오는 것을 대가, 즉 형벌에 가깝다 여겼는데.

돌아볼수록 그것만이 아닌 것 같아서.

내가 이리 말한 순간 거울이 세차게 한 번 울렁거렸다. 그러고는 프란시아의 편지를 토해낸 것처럼 무언가를 툭 토해냈다.

이번엔 봉투가 아니라 가지런하게 접힌 메모였다.

그것도 저쪽 세계의 양피지가 아니라 지금 이 세계의 현대적인 종이다.

나는 종이를 펼쳐 내용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옷을 챙겼다.

“갈까요?”

어느새 옷을 함께 걸친 리케도르안이 나를 따라나섰다. 그의 품에는 고양이로 변한 푸딩이가 함께였다.

항상 투닥투닥 싸우더니, 이럴 때는 참 얌전히 안겨 있단 말이지.

난 속으로 웃음을 짓고는 집을 나섰다. 오랜만의 꽤 먼 외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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