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73/87)

“……당신은 그걸, 내가 바랄 거라고 생각해?”

조금씩, 아주 조금씩. 리케도르안의 생명을 위해 보냈던 힘이 돌아오고 있었다. 동시에 눈앞으로 스쳐 지나가는 짓이겨진 흑장미의 모습, 집착은 사람을 어디까지 망가뜨려 놓는단 말인가.

“네 힘을 쓰면 이 세계를 좀 더 유지할 수 있겠지만.”

그는 내 한 손을 잡아 다정한 오빠일 때처럼 사근사근 속삭였다.

“그럼 네가 죽을 거야. 무슨 의미가 있겠어?”

바람이 불며, 새까만 머리칼을 잔뜩 흩트려놓았다.

“네가 없는 세상은 더는 내게 의미가 없어.”

그 순간이었다.

“돌아가.”

“…….”

“네 세계가 아닌 세상을 위해 목숨을 거는 꼴은 못 보겠으니까.”

“…….”

“그것도 다른 놈을 위해서.”

쾅! 이 공간을 가득 채운 굉음이 울려 퍼졌다. 소음의 주인공은 리케도르안이었다. 그가 거대한 검을 땅에 꽂아 넣어 마지막 그림자를 쓰러트렸다.

불꽃 같은 붉은 빛이 거대한 검 주변을 거세게 맴돌고 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기운은 역동하는 생명의 기운과도 같았다.

마지막으로 보냈던 힘이 돌아왔다. 아니, 측정하자면 손가락 한마디쯤의 힘만 더 돌아온다면 힘을 발휘할 수 있을 터였다.

이와 동시에 푸르른 빛이 내 손에서 터졌다. 정확히는 날 잡은 체이서의 손에서였다.

“어서. 모든 것이 끝나기 전에.”

나는 그가 남은 푸르른 힘으로 무언가를 하려 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보내줄게.”

선고 같은 체이서의 말이 내려앉았을 때였다. 리케도르안이 고개를 들었다.

“아니. 나는…….”

다신 얼른 시선을 돌렸다. 이제 곧 힘이 완전히 돌아올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시야가 확 뒤집혔다. 무슨 상황인지 볼 겨를도 없이 몸이 그대로 붕 떠올랐다.

푹!

섬뜩한 소리가 귀를 꿰뚫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무슨 영문인지 몰라 몸을 더듬었다. 그러나 잡히는 건 단단하고 축축한 무엇인가였다. 곧 손바닥이 따끔했다.

나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내 가슴과 아주 근접한 차이를 앞두고 멈춰선 단검. 그것은 아주 커다란 몸을 관통한 채였다.

뚝. 뚝뚝.

이어서 검 끝에 맺힌 피가 내 손등으로 떨어진다.

“……당신…….”

나는 검을 잘 모른다. 그러나 이 두꺼운 단검이 꿰뚫은 곳이 심장의 자리란 건 아주 잘 알았다.

비틀거리던 남자의 몸이 내게로 쓰러진다. 거친 숨이 귀로 느껴졌다.

“……괜찮아?”

어느새 떨어진 피가 웅덩이를 이룬다. 체이서에게서 희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 음성을 듣는 순간 이 상황이 더욱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죽여도 죽지 않을 것 같은 남자가 겨우 단검 하나에?

그럴 리 없다.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으니까. 단검에서 흘러나오는 소름 끼칠 만치 음습한 느낌을 외면하고 싶었다.

하지만 거대한 기운이 체이서를 지나쳐 나마저 덮는 순간 더는 외면할 수 없었다.

허물어진 남자의 어깨 뒤로 입을 벌려 미소 짓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여자의 머리 위로 익숙한 푸른 보석이 박힌 커다란 티아라가 보였다.

“놓쳤군?”

제복을 입은 채 티아라를 쓴 황제가 활짝 웃고 있었다. 광기에 이성을 잃은 눈빛으로. 황제가 그대로 체이서의 등을 걷어찼다. 나는 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절로 느껴졌다.

“이아나!”

리케도르안의 간절한 음성이 들렸다. 시선을 돌리면 달려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리케도르안은 곧 황제와 대치했고, 반대쪽에서 프란시아와 르나그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들은 내게 다가오지 못했다.

촤르르륵!

바닥에서 뻗어 나온 쇠사슬이 그들이 팔과 다리를 묶어버렸기 때문이었다.

“하, 하하? 하하하하! 여기 있었네? 하하!”

황제가 미쳐버린 장미라고는 하나 여기에 장미가 셋이었다. 그럼에도 프란시아와 르나그는 묶인 채로 움직이지 못했다.

“하, 하하. 하하하하!”

황제가 웃음과 함께 발을 굴렀다. 거대한 주술진을 둘러싼 기운의 색이 순식간에 변했다. 불길하고도 불길한 검보라색이었다.

“나는 천년을 기다려왔단 말이야, 응?”

천장에 무수한 박쥐 떼가 나타나 그대로 비석을 덮었다. 이와 동시에 곰팡이가 핀 것처럼 검보라빛 자욱이 오염되듯 퍼지기 시작했다.

챙!

어느새 황제는 리케도르안과 검을 맞대고 있었다. 아니, 황제의 무기는 검이 아니었다. 넝쿨을 연상시키는 검은색 채찍이었다.

“여기서 천년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진 사람이 누가 있지? 바로 나야!”

리케도르안이 이를 갈며 황제의 채찍을 쳐냈다.

“그 힘을 내게 줘! 내 거야! 하, 하하하! 이제 전능한 장미는 내가 될 거야, 반쪽 자리가 아니라. 내가! 내가! 신이 된다!”

그러자 수없이 많은 박쥐들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붉게 타오르는 그의 힘에 못 이겨 타거나 바스러진다.

그사이 나는 황급히 내게로 쓰러진 체이서를 확인했다. 이미 새하얀 셔츠는 처음부터 붉었던 것처럼 피로 잔뜩 물들어있었다. 의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살아 있는 것이 용한 부상이었다.

…아니, 사람이 심장을 찔리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이아나.”

체이서가 손을 움직이려 했다. 그러나 그 시도는 아주 조금 움직이는 것으로 그쳤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가만히 있어. 흰 장미의 치료라도 받고 싶다면.”

그러자 체이서가 피식 웃었다. 울컥 피를 토하며.

“하하하, 살리려고? 안 될걸.”

그는 그러면서 애타게 손을 움직이려 애썼다.

“지금도 장미라서 겨우 연명하는 거야. 몇 분쯤. 심장을, 쿨럭, 찔리고도 살아남는, 사람은 없어, 이아나…….”

“……누가 그걸 모른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힘이 돌아왔지만 무슨 영문에서인지 프란시아와 르나그를 향해 뻗어나가지 않았다. 아무래도 두 사람을 묶은 저 검보라빛 사슬 때문인 것 같았다.

직접 움직여야 하는 걸까?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곧 문이 열리며 들이닥치는 황실기사단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문 쪽으로는 내 힘이 통했다. 기사단은 내가 친 푸른 벽에 가로막혀 더는 들어오지 못했다.

이가 갈렸다.

“당신, 왜 나를 구했어?”

찰나의 순간 이 이상한 힘이 깃든 단검이 노린 건 체이서가 아니라 나였다. 리케도르안의 생명을 돌리는 데 모든 힘을 쏟던 나로서는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었을 터였다.

“……소중하니까.”

체이서의 손이 아주 조금 더 내 손을 향해 움직였다. 나는 그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왜 나를 묶어둔 건데?”

오래 묵었던 원망이 그를 향해 새어 나왔다. 그때는 잘못된 것인 줄도 몰랐던, 무심히 흘려보냈던 시간을 되씹으면서. 체이서가 피를 삼키며 웃었다.

“널 나만 볼 수 있게. 그러고 싶었으니까.”

“……넌 역시 미쳤어.”

가감 없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나는 곧이어 입술에 피가 나도록 꾹 깨물었다.

“됐어. 됐고.”

체이서의 손이 조금 더 움직였다. 아직도 그와 나의 손 사이에는 약간의 거리가 남아있었다.

“살아.”

나는 주먹을 꾹 눌러 쥐었다.

“살아서 죗값을 갚아. 너 같은 인간이 죽음으로 도피하는 건 용납 못 해.”

네가 싫고, 네가 밉고, 네가 원망스럽다. 이 감정을 결코 끊어내지 못할 만큼. 그냥 죽어버리라고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이 남자가 도뮬릿 저택에서, 그 수많은 암살로부터 나를 구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더욱더 편안히 이 남자를 싫어하고 무관심해질 수 있었을까.

웃음과 분노와 허탈함. 끝내는 헛웃음이 흘렀다.

한편으로 나는 차차 깨달았다. 어쩌면 푸른 장미는 모든 장미들을 외면할 수 없게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른다고.

비석에 새겨진 사각형, 꼭짓점에 자리한 각각의 장미들과 중앙으로 이어진 선으로 연결된 푸른 장미.

이 선은 당신들과 나를 떼어낼 수 없음을 뜻하는 거였던가.

“살아.”

그의 생명의 불꽃은 시시각각 수명을 다해가고 있었다.

“살라고.”

이미 수많은 이들의 행복을 앗아간 이 남자가 행복해질 자격이 있단 말은 못한다. 아니, 하지 않을 거다. 그에게 죽고 끌려간 모든 이들을 욕되게 하는 것이니.

또한 이렇게 편안히 죽는 것으로 도피하는 것 또한 용서받지 못할 일이리라.

“이런 죽음은 네게 너무 편한 벌이잖아.”

“그건 그래.”

남자는 자신의 죄업을 외면하지 않았다. 체이서의 손과 내 손끝이 닿을 듯 말 듯 가까워졌다.

“그런데, 그건, ……명령이야?”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 명이야.”

“그래……. 그럼, 왕의, 마지막 명을, 어기지 않도록…… 노력, 해봐야겠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그도 나도 알고 있었다. 이 남자의 몸은 빠르게 식어가고 있었다.

‘몸이 이상해.’

그와 함께 나는 몸의 이상을 느꼈다. 이건 불길한 검보라빛이 비석을 오염시키고 주술진을 물들였을 때부터 느낀 기묘한 감각이었다. 나는 손바닥을 펼쳤다. 비석에서와 마찬가지로 곰팡이 핀 듯 자리 잡은 검보라빛 얼룩이 보였다.

기사단을 향해 친 방벽이 허물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본래라면 어림도 없을 일이었다. 이 검보라빛 기운이 모든 열과 성을 다해 망가트리려 애쓰는 것이 마치 나인 것만 같았다.

“……돌아가지, 않을 거야?”

죽어가는 체이서의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나는, 원래대로 돌려……놓으려고, 했어.”

체이서는 피를 토하면서도 꿋꿋하게 아무렇지 않은 음성으로 이었다.

“……도뮬릿에 네가 그대로 머물렀다면, 내가 만족한 뒤에. 단, 한 달만…… 더 만끽한 뒤에.”

아마도 그에게 주사기를 꽂아 넣던 날을 말하는 것이리라. 이제 그의 입술에서는 핏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거짓말하지 마.”

“……내가, 네게 거짓말 못 하는 거 알면서.”

그는 피 묻은 입술로 웃었다. 눈꺼풀이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내가, 가지지 못한다면… 아무도, 널, 가지지 않기를 바랐어. …내 거니까…….”

끝까지 이토록 삐뚤어진 남자였다.

“하지만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러면서도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날 사랑했다.

“……돌아가, 내 이아나. 네가 있던 곳으로.”

이 사랑이 결코 고맙지도 기쁘지도 않았다.

“……넌, 정말 개새끼야.”

그와 동시에 기사단을 막고 있던 방벽이 깨졌다. 내 몸이 강하게 흔들렸다.

와아아아!

한눈에 넣기 힘든 기사들이 그대로 들어왔다.

휘청. 흔들리던 손이 체이서의 손을 잡았다. 그대로 몸을 지탱했다. 흘끗 시선을 돌리면 프란시아가 내게 무어라 소리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무언가 방해라도 하는 것처럼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미안해. 이런 것밖에 난, 배우지 못했으니까…….”

마침내 닿은 손에 체이서는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내가 죽어도, 힘은 잠시 동안…… 남아 있을 거야. 이아나. 더 늦기 전에, 돌아가.”

그가 더듬더듬 말했다. 굳어가는 혀를 움직이는지 또박또박 말을 하려 애쓰면서.

“지금이…… 마지막 기회야.”

수없이 달려온 기사들이 묶여있던 프란시아와 르나그를 향해 달려간다. 그들의 몸에 검이 꽂혔다. 힘을 보내려 했지만 저 사슬에 가로막혀 힘이 나가질 않았다. 그 사이 검보라빛 얼룩이 팔뚝까지 올라왔다.

안 돼…….

내 외마디 비명은 채 목소리로 나오지 못했다. 손을 뻗는 순간 강한 향수가 온몸을 사로잡았다.

집으로 가고 싶다. 화목한 내 가족이 그립니다. 언니가 보고 싶었다. 엄마의 포근한 품이 그리웠다. 위로가 그립다. 둘밖에 없는 딸을 위해 매일 밤이면 데리러 오던 든든한 아빠의 그림자가, 익숙한 차 시동 소리가 그리웠다.

“……안돼…….”

뺨으로 한줄기 눈물이 가로질러 흘러내린다. 내 장미들이 나를 향해 울부짖고 있었다.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내 세계를 사랑했고, 너무나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다. 무심하던 성격이 이렇게 온난하게 받아들여지는 곳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미안해요.

“……나는. 너무 화목하게 자랐어.”

내가 없으면 멸망하는 세계.

나를 짓누르는 무게들.

내 품에 있던 남자의 체온이 싸늘하게 식어간다.

내게 마지막 선택지를 주고서.

나는 그대로 바닥을 짚었다. 내 안에 깃든 수호신의 노래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나는 너무 늦게 깨달은 것인지도 몰랐다. 이 노래는… 수호신이 할 수 있던 최선의 말이었다.

‘있잖아, 줄곧 네 노래가 계속 어딘가 서글펐던 건…… 넌 알고 있었기 때문이야?’

내가 네 말을 듣지 못하는 건 다 이런 이유 때문에서였냐고. 내 물음에 수호신은 답하지 않았다. 구슬피 흘러나오는 울음소리가 긍정에 가깝다는 것을 짐작할 뿐이었다.

“하하, 하하하! 드디어, 드디어 모든 힘이 내 손에 들어온다! 내 손에!”

광기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이 순간을 무려, 천년을, 천년을 기다려왔다! 모든 장미가, 내 손에! 신이 되는 순간을!”

나는 손바닥을 펼쳐 바닥에 가져다 댔다. 속이 울렁거렸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내 안에 퍼져나가는 이 검보라빛 얼룩이 내 몸을 망가트리는 것 같았다.

내가 시작한 싸움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쿨럭, 세찬 기침이 흘러나왔다.

“있잖아, 나 좀…… 도와줘.”

마무리를 하고 싶어.

“아하하하!”

내 강한 열망에 맞춰 아무리 불러도 나오지 않았던 기운이 조금씩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몸으로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손등의 핏줄이 보랏빛으로 물들어 울룩불룩 튀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크게 힘을 일으켰다. 차차, 내가 있던 곳에서부터 보랏빛이 뒤로 주춤하더니 한곳을 향해 뻗어 나간다.

벽에 가로막힌 기분이 들었다. 더, 더욱더 강한 힘이 필요해.

손가락이 바닥을 지이익 긁었다. 고통으로 인해 눈앞이 아릿했지만 입술을 깨물어 참았다.

와장창!

마침내 프란시아와 르나그 주변을 가로막은 사슬이 부서져 내렸다. 동시에 내 입에서 피가 한 움큼 쏟아진다. 뚝뚝. 떨어지는 피를 받는 남자는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주먹이 새하얘지도록 꾹 쥐었다.

“언니! 언니! 언니, 괜찮아?”

마침내 프란시아의 소리가 다시 들렸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남자를 그대로 조심스레 내려놓고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한 손을 천장을 향해 뻗었다.

모든 수호신은 무기로 형상화될 수 있다.

리케도르안의 검과 프란시아의 망치처럼. 한 손에 맺힌 푸르른 기운이 하나의 현상을 이루었다.

내 손에 깃든 것은 기다란 ‘왕홀’이었다.

황제가 가진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은 거대한 보석 속 찬란한 푸른 빛이 일렁거렸다. 나는 왕홀 끄트머리를 바라보다 그대로 바닥에 힘껏 내려찍었다.

쾅!

바닥에서 일어난 거대한 푸르른 힘이 파도를 이루며 한곳을 향해 뻗어나간다. 그리고 푸른 파도같이 원을 빙 둘러 한 사람을 가뒀다.

황제의 움직임이 그대로 멎었다. 아니, 움직일 수 없으리라. 핏발 선 눈이 재빠르게 나를 향했다.

“이런다고 나를 막을 수 있을 것 같나? 아니, 죽어가는 꼴로는 날, 못 막아. 아하하하하!”

“……언제는 인외의 힘이 인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나와 생각이 같다 하지 않았나요?”

그 순간 미친 황제의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푸른 기운은 연신 파도처럼 출렁이며 그녀의 힘을 봉쇄했다. 마치 조금 전에 그녀가 내게 했던 것처럼.

“미치지 않고 싶다며.”

나는 입술로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닦았다.

“그렇게 나약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는데. 실망이야.”

“……큽, 쿨럭! 하하하하! 그런 말은 이미 통하지 않을 거다! 이미 네가 아는 황제는 잡아먹혔어!”

“그런 삼류 악당 같은 말 말고. 정말 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거친 숨을 내쉬며 왕홀을 지팡이처럼 짚고 몸을 기댔다. 쓰러지고 싶지 않았다. 어느새 내게 달려온 프란시아가 내 몸을 잡았다. 그녀는 제 몸도 엉망이면서 나를 치료하려 했다.

나는 황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 힘을 없애고 싶다면서요.”

르나그 또한 내 옆으로 와 자리를 잡았다.

그때였다. 미친 듯이 웃던 황제의 얼굴이 몽롱해졌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제 손을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다음 순간 손을 들어 올렸다. 뾰족한 채찍의 끝이 그녀의 배에 푹 꽂혔다.

“……지금……어서…….”

나는 미약한 음성을 들었다.

“끼야아아악! 미친 계집! 안돼! 아니된다! 우리의 천년 숙원을 망칠 셈이냐! 안 돼! 안 돼!”

그러나 황제의 무기는 제 배에 꽂힌 채 빠지지 않았다. 나는 더욱 큰 파도를 일으켰다. 파도는 황제의 머리를 감싸고, 그녀의 머리 위에 올려둔 티아라를 잡아 붕 띄웠다.

“아, 안 돼, 그건! 안 돼! 내 거야, 내 거라고!”

황제의 얼굴로 낭패감이 어렸다.

“리케도르안, 지금이에요!”

리케도르안은 틈을 놓치지 않았다. 푸른 힘이 황제의 팔다리를 구속한 순간에 푸욱, 그의 검이 채찍이 자리한 옆을 관통했다.

황제의 몸이 그대로 허물어진다.

활활 타는 듯한 붉은 힘과 나의 힘은 황제의 몸에 들어간 순간에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으리라. 그녀의 힘은 아주 강한 껍데기를 가진 대신 알맹이와 영혼은 한없이 여리디여렸다.

이를 알려준 것은…… 노래하듯 속삭이는 내 수호신이었다.

“하아, 하아….”

황제가 쓰러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내 몸도 함께 비틀거리며 쓰러진다.

“이아나!”

마침내 괴물을 쓰러트린 영웅이 내게 다가와 눈물을 뚝뚝 흘러내렸다.

“이, 이아나……. 이아나.”

내게 달려온 리케도르안은 쓰러진 내 손을 잡고서 한없이 울었다. 나는 힘없이 고개를 들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힘을 써, 이 공간에 있던 황제와 모든 황제의 기사단을 황궁, 내가 떠났던 그 자리로 돌려보냈다. 다시 한번 속에서 피가 울컥 넘쳤지만,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일어난다 하더라도 더는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리라. 애초의 그녀의 힘은 이 주술진과 태초의 푸른 장미의 물건인 티아라에서 나온 것이었으니까.

“왜, 왜. 치료가 안 되는 거지? 빨리 치료해봐!”

“모르겠어. 이런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언니, 언니!”

나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또 다른 힘이 느껴져.’

이미 모든 힘을 소진해버린 내 힘은 아니었다. 나와는 비슷하면서도 아주 조금 다른 푸른 장미의 힘. 이건 체이서가 남긴 힘이었다. 주술진은 또 다른 주문을 향해서 거대한 힘을 드러냈다. 내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주문.

이제까지 들리지 않던 거대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웅웅 울렸다.

-귀환을 원하는가?

나는 힘겹게 눈을 떴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푸르른 기운으로 맺힌 무언가가 보였다. 얼굴도 표정도 없었지만 사람과 같은 형상이었다.

저것이 물은 질문은, 당연히 내 세계로 돌아갈 것이냐는 질문일 것이다. 나는 저물어가는 눈을 깜빡였다.

‘돌아간다라.’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숨을 거둔 남자의 모습을 보았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다.

나를 만류하는 손길이 느껴졌지만 괜찮다는 듯이 토닥여주고 떼어냈다. 그대로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언니!”

“이아나 양!”

날 위해 엉망이 된 프란시아와 르나그를 보았다. 마지막까지 제 몸은 돌보지 않고 나를 치료하려 했던 그녀와 몸을 아끼지 않고 방패가 되어주었던 나의 장미들. 푸르른 빛이 어리며 그들이 그대로 눈을 감았다.

나는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덥석 누군가 내 손을 잡았다.

“이아나!”

눈물로 엉망이 된 리케도르안이었다. 그의 장미와 같이 붉디붉은 피 칠갑을 하고서.

“가, 가지 말아요. 제발. 제발…….”

나는 차마 세게 쥐지 못한 손을 응시했다. 버석한 입술이 열렸다.

“사랑하는 나의 장미.”

미약한 음성이 흘러나온다. 나는 한 손을 들어 그의 뺨을 쥐었다.

“내 리케도르안.”

그의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닦아도 닦아도 계속 닦아달라고 보채듯이. 나는 그의 뺨을 닦아내고서는 손을 떼어냈다. 괜찮다는 듯 토닥이고는 까치발을 들어 입을 맞췄다.

“괜찮아요.”

무엇이 괜찮다는 것인지, 그는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나를 더는 붙잡지 못했다. 나는 돌아서서 한곳을 향해 비틀비틀 걸었다. 푸르른 기운이 뭉친 인간 형상을 향해서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푸르른 형상이 내게 손을 내민다. 나는 그 손을 보았다가 손을 뻗어 잡았다.

파아아!

푸른빛이 확 터지더니, 눈을 뜨면 전혀 다른 공간이었다.

-가겠는가?

다시 한번 질문이 흘러나왔다. 아마도 이건 마지막 질문일지도 모른다.

돌아간다.

나는 다시 한번 속으로 중얼거려보았다. 그리움과 향수가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억제할 수 없는 추억의 조각들.

이것이 머리를 차지한다. 그러다 돌연 웃음 지었다.

그런데, 이아나.

넌 정말 이들을 버리고 갈 수 있어?

글쎄, 이미 답은 나와 있었다.

나는 스스로를 이아나라 칭하고 있는걸.

그럼에도 눈물이 연신 흘러내렸다.

사랑하는 나의 세계.

나의 가족. 이제는 선택할 시간이었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나는 눈앞의 푸르른 형상을 향해 물었다. 나와 비슷한 힘을 풍기지만 이질적이다. 조금 전까지는 그저 체이서가 남긴 힘이기에 그렇다 여겼다. 그러나 그것과도 다른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가까이로 가자 더욱더 잘 알 수 있었다.

“당신은 신인가요?”

얼굴도 표정도 없는 푸르른 형상은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눈이 없는데도 본다는 것이 느껴졌다. 곧 물과 같은 형상이 울렁 움직이더니 모습이 변화했다. 검고 커다란 망토를 뒤집어쓴 사람의 형태. 망토 속 얼굴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그저 흐릿하게나마 보이는 턱과 입, 입술이 매끄러운 곡선을 그렸을뿐.

나는 이 미소가 내 질문에 대한 답이란 걸 알았다.

“네게는 다른 소원이 있구나.”

남성도 여성도 아닌 기묘한 느낌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말해보렴.”

“그 전에 한 가지 묻고 싶어요.”

“묻거라.”

“이 세상은 정말로 푸른 장미가 없다면 멸망하나요?”

나는 입을 달싹였다. 눈앞의 존재가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줄 수 있는 이임을 알았다.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지.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너희의 존재 가치와 이 세상의 특수함을 먼저 알아야겠구나.”

“특수함?”

“그래. 넌 이미 네가 죽은 신의 조각이라는 것을 들었지. 네가 머문 이 땅은 죽은 신의 조각을 가둬둔 땅. 대륙에서도 이곳만은 시공간이 특수하게 흘러간단다. 다시 말해 이 땅의 시간만 과거로 돌릴 수도, 다른 차원이 열릴 수도 있지.”

“어째서…… 그렇게 만든 거죠?”

“죽은 신의 조각을 안전하게 처리하기 위해서.”

역대 푸른 장미의 죽음은 그럼 조각이 사라지는 것과 동일하다는 건가.

“호기심은 풀렸니? 그럼 이제 네 세계로 돌아가자꾸나.”

“잠시만요. 내가 돌아가면 남겨진 세상은 어떻게 되는데요?”

눈앞의 신은 무심히 옆으로 고개를 돌리는가 싶더니 그대로 갸웃했다.

“저 세상은 사라지겠지. 그리고 네가 나타날 즈음에 다시 생겨날 거야.”

“내가 나타날 즈음?”

“아. 오해는 말렴. 네가 원래 세상에서 수명을 끝내고 다시 이 세계로 돌아올 때를 말하는 것이니.”

다정한 음색을 내고 있으나 어딘가 무기질적으로 들리는 목소리였다.

“너는 그때 비로소 네 시대의 장미들을 만나 네 운명을 살고 죽을 거야. 지금의 너는 순리를 거스른 채 데려와진 영혼이니.”

“무슨 소리예요? 분명 나 말고도 차원을 이동한 푸른 장미가 있을 텐데…….”

“적어도 차원을 건너온 이들은 그곳에서 제 수명을 채우고 온 이들이지. 네 세상에선 환생이라 부르겠구나. 이제 가도 되겠니?”

나는 입술을 뻐끔 움직였다가 닫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었다. 이제 들을 것은 모두 들었다. 선문답은 끝이었다.

“아니요. 나는 가지 않아요.”

신에게서 발걸음을 한걸음 뒤로 물렸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결정은 이미 내렸다.

“내 세계를 포기할게요.”

끝내 그 맹목적인 이들을 버리지 못한다. 나는 이미 우리를 엮는 보이지 않는 끈에 묶여버린 건지도 모른다.

상관없었다. 묶이길 선택한 건 나니까.

신의 입술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무표정한 채로 열렸다.

“이들은 네 시대의 장미가 아니다. 그 선택을 후회할 거다.”

음색마저 달라진 위압적인 목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 장미들이에요.”

“그 선택을 위해서는 수많은 것을 포기해야 할 텐데도? 앞으로도 견딜 수 없는 거대한 애수와 그리움이 너를 평생 괴롭힐 텐데?”

“상관없어요.”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푸른 장미의 힘. 차원을 이동할 수 있는 힘은 회귀를 할 수 있다. 회귀는, 죽은 사람도 살려낸다.

“내 힘으로 체이서 도뮬릿을 살려낼 수 있나요?”

신은 답이 없었다. 잠시의 침묵 끝에 의문이 돌아왔다.

“인간의 기준으로 그 영혼은 수많은 타인을 죽이고 삶을 빼앗았다. 죄업이 많은 영혼을 되살리겠다?”

“살아서 죗값을 치르게 할 거예요.”

“윤회하면 치르게 되어 있을 것이다.”

“아니요. 기억한 채로 갚는 것과 그렇지 않은 건 달라요.”

너무나 많은 이들을 괴롭혀왔다. 죽어 마땅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그가 살아서 죗값을 치르게 해달라 말했다.

어쩌면 다시 살아나 평생이 걸리더라도.

“그를 살리고 이 세계를 지우지 말고 남겨주세요.”

신은 이제 자세를 달리했다. 살짝 굽어 있던 등이 펴진다.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온몸을 통해 느껴졌다.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 네 과거의 생, 과거의 기억을 모두 바쳐야 한다면?”

“…….”

“너는 네가 겪은 모든 행복을 바쳐야 할 것이다. 그곳에서 차차 잊혀진 채로.”

나는 멈칫했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그리운 얼굴이 스쳤다.

나의 가족. 지금도 가슴을 괴롭히는 행복한 웃음들.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러다 조금 허탈하고도 후련하게 웃었다.

“네. 내 과거를 포기하겠어요.”

조금, 아주 조금만 이기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사랑하는 내 부모님에겐 나 말고도 언니가 있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유일무이하게 나만을 따르는 이들보다 늘 화목하고 행복했던 그들이 나을 거라고.

눈물이 뺨을 적셨다.

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신은 그런 나를 한참이나 응시했다. 관찰하고 탐색하듯이.

“이제 보니 너는 죽은 신의 조각 중에서도 가장 큰 조각이었구나. 그래. 그랬어. 그래서 닮은 거였나…….”

왜인지 조금이지만 애수가 담긴 음성이었다.

“하나 대가는 그것으로 채울 수 없다.”

“네?”

“대가가 부족하단 말이다.”

신이 단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너로 인해 한차례 꼬인 세계다. 여기서 이미 죽은 자는 시간을 돌려서 살릴 수 없다.”

차차 내 표정이 흐려지는데, 신이 돌연 이어 말했다.

“그러니 이렇게 하지.”

발밑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신의 발아래서 흘러나온 빛은 저들끼리 똘똘 뭉치더니 빛으로 만든 공처럼 둥둥 떠 있었다.

“순리에 따라 너는 반드시 네 세계에서 남은 수명을 보내고 돌아와야 한다. 이건 바꿀 수 없다.”

“하지만!”

“끝까지 듣거라. 네 소원대로 세계는 지우지 않으마. 대신 너는 모두가 너를 잊고 기억하지 못하는 세계에서 외로이 수명을 모두 보내고 오도록. 그게 네 대가다.”

신이 손짓하자 빛의 구가 그의 손위로 올라와 둥둥 허공을 부유했다.

“또한 너는 이전 세계의 모든 기억을 잃을 것이다. 이게 네가 치러야 할 두 번째 대가이며.”

신의 손위에 놓여 있던 빛의 구가 반짝 빛을 드러냈다.

곧 우리 사이에 반달 형태로 공간이 찢어졌다.

그 사이로 푸르른 빛이 일렁거렸다.

신의 손짓에 따라 빛의 구가 찢어진 사이로 들어가더니, 찢어진 틈이 천천히 닫혔다.

“네가 돌아올 때, 이 자도 돌아오는 것으로 하지.”

“네? 그럼, 지금 그건…….”

“네가 살려달라던 영혼이지. 문제 있나?”

아니, 그것부터 말해줘야지. 나는 황당한 낯으로 신을 응시했지만 신쯤 되는 존재에게 인간의 상식을 들이밀면 안 되겠구나 하는 깨달음만 얻었다.

“이쯤 하면 계약은 제대로 이루어지겠군. 또 데려가고 싶은 것이 있나?”

마치 선심 쓰는 듯한 어조였다. 역시나 나는 당황스러움을 숨길 길이 없었으나 곧 차분하게 생각했다.

“그럼 혹시…….”

이어진 내 질문에 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곧 몇 가지 더 이야기 끝에 신은 나를 돌려보냈다. 이전 세계가 아닌 조금 전까지 내가 있던 곳, 리케도르안과 장미들이 있던 공간이었다.

“이아나? 이아나!”

공간으로 내려가기 무섭게 나를 발견한 리케도르안이 달려왔다. 그는 그러다 말고 내 뒤로 펼쳐진 빛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하나 이도 잠시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리케도르안, 인사를 하러 왔어요.”

이게 어떤 인사가 될진 모르겠지만. 나는 활짝 웃었다. 이에 리케도르안의 얼굴이 흐려지나 싶더니, 이내 다시 눈물이 맺혔다. 금방이라도 눈에서 뚝 떨어질 것만 같은 청초한 낯이었다.

“시……싫어요. 저, 저는 당신이 없으면…… 살수가…….”

“리케도르안.”

“싫어요. 이아나. 당신이 없으면 사는 의미가 없어요. 싫어요…….”

“리케도르안.”

그를 단호히 부르며, 나는 그의 양 뺨을 잡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이 나를 향했다.

“나한테도 말을 할 기회를 줄래요? 나 아직 아무런 말도 안 했어. 어떤 인사가 될지도요.”

앞으로 그의 대답에 따라 어떤 인사가 될지 정해지겠지만. 나는 설탕을 머금듯 입술에 한껏 미소를 품고는 그대로 떼어냈다.

“있잖아요, 리케도르안.”

지금 이 질문은 어쩌면 그의 삶, 삶의 근간을 모두 뒤흔들 질문이 될지도 모른다.

“당신은…… 날 위해 무엇을 포기할 수 있어요?”

리케도르안이 내게 뺨을 잡힌 채로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곧 어떤 생각에 미친 건지 활짝 웃었다. 눈부실 정도로 환한 미소였다.

“전부요.”

그가 이렇게 말하기까지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것이 실로 당연하다는 듯이.

아무리 신이 어느 영혼이든 데려가도 좋다고 했다지만 망설이는 기색조차 없다니. 그가 포기해야 할 것은 그가 이 세상에서 이룩한 모든 것이었다. 미지의 세계로 가는 일이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프란시아와 르나그가 서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 먼저 프란시아를 향했다.

“프란시아.”

신이 내게 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프란시아가 말이 이어지기 전에 먼저 말을 꺼냈다.

“나는 여기 남을게. 언니.”

“……뭐?”

프란시아는 잠시 르나그와 시선을 마주하는 것 같더니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왜인진 모르겠지만 누군가 머리에 속삭여주더라. 누군가는 이곳에 남아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그래야 언니가 헤매지 않고 이쪽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데?”

그녀는 그리 말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언니가 하기 어려운 말을 대신해줄 만큼 언니에게 친절한 존재인가 봐.”

그녀는 안심했다며 한마디 더 덧붙였다.

“나와 노란 장미가 이곳을 지킬게.”

“……저는 제 의견을 단 한마디도 피력한 바 없습니다만, 흰 장미.”

“뭐예요. 당신도 같이 들었잖아요? 두 사람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나와 당신 말고 더 있나요?”

“…….”

르나그는 잠시 침묵한 채로 시선을 돌렸다. 프란시아에게 대답하는 대신 나를 향하기로 한 것 같았다.

프란시아가 쯧, 혀를 차면서 옆으로 비켜섰다. 르나그가 그 자리를 채우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르나그는 망설이는가 싶더니,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럼에도 차마 닿지 못한 손이었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그는 그제야 내 손을 마주 잡고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다녀오십시오. 저는,”

그는 목이 메는지, 잠시 말을 멈췄다.

“아가씨, 저는 이곳에서…….”

손등에 입술이 오래도록 머물렀다. 나는 그의 뺨으로 흐른 것을 모른 척해주었다.

“당신의 이정표로 남아 있겠습니다.”

마지막까지 그 다운 말이라 생각했다. 그의 작별은 이토록 담백하고도 끝까지 나를 배려했다.

“건강하세요. 제가 돌아올 때까지요.”

그가 나지막하게 대답하며 미소 지었다.

“꼭 돌아올게요.”

“……예. 기다리겠습니다. 왕이시여.”

안경이 없어진 저 눈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언니, 나의 왕.”

프란시아가 다가와 나를 품에 꼬옥 안았다. 안기보다는 안기고 싶어 하는 어리광이 느껴지는 포옹이었다.

“언제까지고 곁에 있을게.”

나는 그녀의 품에서 눈을 꼭 감았다.

이윽고 정해진 시간이 흘렀다. 신이 약조한 푸르른 빛은 나와 리케도르안의 몸을 감쌌다. 짧을수록 좋다는 것이 이별이라곤 하나, 언젠가 돌아올 것임을 알면서도 너무 짧은 이별은 도리어 가슴에 흉터를 남겼다.

그렇게 나는 함께한 세계를 떠나 차원을 넘었다.

***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너무나도 익숙한 거대 빌딩이었다.

고풍스러운 저택도 웅장한 성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길을 걷는 이들은 칼같이 각이 잡힌 제복도 레이스가 달린 메이드복도 입지 않았다.

조금 텁텁한 공기가 폐부를 채운다. 그제야 나는 다른 세상에 왔음을 자각했다.

모든 사람이 지나가며 흘끗 우리를 쳐다봤다. 홀린 듯이 바라보는 이도 있었다.

아마도…… 나보다는 내 옆의 이에게 시선을 빼앗긴 듯했다.

고개를 돌리면, 마치 시선을 내게로 고정한 듯 시선을 떼어내지 못하는 남자가 있었다.

“저, 리케도르안.”

“네.”

“그…… 구경 안 해요? 다른 세상인데.”

“……해야 하나요?”

“어, 안 신기해요?”

“신기……. 신기한 건 모르겠지만 이아나가 옆에 있는 건 좋아요.”

내가 그의 손을 잡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내 손을 감싸 쥐었다. 그의 커다란 손에 폭 들어가는 크기였다.

“머리가 까매졌어요, 이아나.”

“네. 어째서인지 당신은 그대로네요…….”

왜 이 사람만 그대로지, 이 세계 사람이 아니라서인가?

“있잖아요, 잘 생각해봐요. 이제 둘뿐이라 온종일 나만 볼 텐데 질리면 어쩌려구요.”

리케도르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아나만 보아도 온종일 심심하진 않을 것 같은데.”

그 말에 나는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으음, 그 말 좋네요. 오랜만에 와서 낯선 동네도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걸요?”

이곳은 내가 살던 세계였다. 그러나 나는 이곳에서 가족도 친척도 더는 연고가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도려내진 가슴이 아팠다. 신기하게도 정말 아프다.

“신이 그래도 양심은 있네요. 여러 가지 고려할 게 많은데 주민등록이라거나…… 부동산이라거나…… 아, 너무 현실적이야.”

“어, 제가 어떻게든 해볼게요.”

“아니에요, 이런 건 좀 뻔뻔하지만 신보고 책임지라고 해야죠. 최소한 생활권은 보장했으니 다행이에요.”

나는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럼, 갈까요?”

아마도 내 가족은 내가 있단 걸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이 세계에서 지내던 ‘나’는 모든 흔적이, 존재가 사라진 뒤였으니까.

내게는 가족이 있었단 희미한 기억만이 남아 있었다. 기억이 빠져나간 자리로 텅 빈 공허감이 없지는 않았다. 그 자리에 박힌 미안함도. 그리고 아릿한 아픔도. 아마 평생 가는 고통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 선택을 받아들였다.

이제는 나를 위해 모든 걸 포기한 이 남자와, 함께 살아가는 일만이 남았으니까.

“음, 리케도르안. 앞으로 적응할 것이 많을 거예요.”

“네.”

“아. 이름부터 지어야 하나? 철식이, 철수 같은 음. 미안해요.”

“무엇이 미안한 건지 모르겠지만 다 괜찮아요, 이아나.”

마주 잡은 손은 단단했다. 신이 마지막 호의로 건넨 그와 나의 집으로 향하는 걸음은 가벼웠다.

“당신과 함께라면 어디든지. 그리고 무엇이든지. 다 좋아요.”

어느 초여름 햇살이 쏟아지는 아래에서.

“아, 여기인가 봐요. 나쁘지 않은 곳이네.”

낯선 집, 문을 열었을 때 내 옆에 존재하는 것은 이 싱그러운 하늘만큼이나 반짝거리는 미소.

나를 사랑하는 오직 나만을 위해 활짝 편 장미 한 송이.

아니, 세 송이.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남자.

“어때요? 으리으리한 성은 아니지만. 대공님 모시고 살기에 나쁘지 않게 만들어볼게요.”

“이아나랑 함께라면 맨땅 위에서 자도 괜찮아요. 하지만 이아나를 맨땅에 재울 수는 없으니까. 뭐든 할게요. 그리고 제가 모시게 해주세요.”

“뭐예요, 그럼 서로 모시는 걸로 할까요?”

선택의 대가는 가혹했으나 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단단하게 굳어져 가는 내 땅을 지킬 거야.

“사랑해요.”

나는 걸음을 멈췄다.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요, 리케도르안.”

잠시 눈을 깜빡이던 그가 이내 상체를 기울였다.

눈을 감으면 입술로 거친 듯 날것에 가까운 입술이 파고들었다. 조급하지만 애정으로 가득한 몸짓.

나는 비로소 나를 옭아매던 모든 감방에서 빠져나왔다.

이 탈출 뒤에는 내가 만들어가는 길이 존재할 것이다.

“하아, 저도 사랑해요. 이아나.”

그리고 그 길의 이름은…….

“영원히.”

행복이리라.

긴 입맞춤 뒤에는 얼굴을 발긋 물들인 청초한 얼굴이 보였다.

“앞으로 낮이 길겠네요. 당신 얼굴 보느라.”

갓 피어난 물망초처럼 활짝 편 얼굴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낮만 길까요?”

“흐음, 잔뜩 붉어진 채로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리케도르안.”

나는 얼굴을 붉힌 채 언제나 처음 만난 날처럼 수줍은 고백을 토해내는 남자가 사랑스러워 웃고 말았다.

“리케도르안. 어쩌면 행복해지기 직전의 순간이 행복한 순간보다 값질지도 몰라요.”

나는 행복했다.

“앞으로 쭉 행복할 거란 기대로 가득하니까요.”

해사하게 웃던 내 장미가 기꺼이 입을 맞췄다.

“리케도르안, 언젠가…….”

꽃이 막 지고 푸르른 여름 잎이 팔랑팔랑 흘러내리는 날이었다.

“우리 세계로 돌아가는 날에 청혼할게요.”

당신에게.

너와 내가 사랑하는 날은 앞으로도 그렇겠지.

<6권에게 계속>

감방에서 남자주인공을 만났습니다 5권

안경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