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간을 오래 끌진 못할 거예요.”
나는 바삐 걸으며 말했다. 우리는 나선형 계단까지 내려가는 동안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다. 이미 제지를 할 만한 이들은 복도에서 기절시킨 채 꽁꽁 묶어서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두었으니까.
“이아나 양의 말이 맞습니다.”
생각 외로 흔쾌히 작전에 동의한 팔라디스 남작 아저씨 덕에 일이 잘 풀렸으나 이것이 오래 갈만한 수는 아니었다.
미끼는 어디까지나 미끼. 황제는 곧 모든 걸 눈치채고 이곳으로 달려올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추적을 따돌리려 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어디까지나 시간을 벌면 성공이었다. 적어도 리케도르안의 몸을 원래대로 돌릴 만한 시간.
“리케도르안!”
마침내 리케도르안의 지하 감방에 도착했을 때, 나는 그로 하여금 벽을 공격하게 만들었다. 리케도르안의 강력한 공격에도 벽은 꿈쩍하지 않았다. 나는 벽을 가만히 보다가 한 곳을 짚었다.
‘리케도르안이 힘을 썼을 때, 분명 보였어.’
단 하나의 벽돌에서 기묘한 문양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나는 빠르게 그 벽돌을 잡았다. 곧바로 힘을 일으켰다. 창문조차 없는 감방에 바람이 흘러들었다. 곧 바람은 나와 일행들의 머리를 거칠게 흔들었다.
쿵!
벽돌이 부딪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눈앞에 거대한 공동이 생겼다. 리케도르안과 함께 들어갔던 그 동굴이었다.
“이쪽으로 들어가면 돼요.”
나는 일행들과 얼른 공동으로 발을 들였다. 그리고 한 걸음을 딛는 순간 알아차렸다.
……지난번에 나타났던 곳과 다르잖아?
분명 리케도르안과 둘이서 들어갔을 때는 깜깜한 복도가 펼쳐졌었고, 곧 푸르른 불이 켜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좀 더 화려한 느낌의 기둥이었고, 주변을 밝힌 조명도 색색으로 다채로웠다.
“……이게 대체. 리케도르안 저것 좀 봐요, 아무래도. 우리가 들어갔던 곳과 다른 곳인 것 같죠?”
“그런 것 같아요.”
리케도르안 또한 같은 생각인지 얼떨떨한 얼굴로 끄덕였다.
“그럼 잘못 들어온 거야?”
덩달아 심각해진 프란시아가 중얼거리자, 나는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아.”
내 손에는 희미하지만 푸르른 빛이 맺혀 있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잘못 들어온 게 아니다. 오히려…….
“제대로 들어온 것 같아. 이쪽이야.”
발을 딛고 걸을수록 정말로 마지막 무대에 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동안 다들 말없이 걸었다.
우리의 진형은 날 중앙에 두고 앞에는 리케도르안과 프란시아 뒤는 르나그가 맡았다. 다들 날을 세운 채 주변을 경계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에 반해 나는 장미들과 마찬가지로 경계하고 있었으나 조금 다른 기분을 느꼈다.
‘이상하네.’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묘함에 살짝 입술을 벌렸다.
왜 이 공간에서 향수를 느끼는 걸까? 향수,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가슴을 쿡쿡 찌르는 이 감정은 그리움이었으니까. 리케도르안과 들어왔을 때는 이런 기분을 느끼지 않았는데.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알 수 있었다. 나의 그리움이 아니었다. 내 안에 깃든 내 수호신의 감정이었다. 내 수호신이 애수에 가까운 감정의 파도를 뿜고 있었다.
우리는 긴 복도를 지나 또 한번 계단을 내려갔다. 드디어 마지막 계단을 내려왔을 때, 드넓은 공간이 펼쳐졌다. 어째서인지 창문 하나 없는 공간이 흰빛으로 가득하여 낮처럼 밝았다.
리케도르안과 공동을 걸었을 때 복도 끝에서 보았던 공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커다랬다. 그리고 공간의 중앙에는 거대한 돌이 떠 있었다.
아니, 저걸 무어라 표현하면 좋을까. 석판? 비석?
직사각형 네모반듯하게 잘린 돌에는 기하학적인 문양이 잔뜩 새겨져 있었다. 그곳에서 익숙한 문양을 발견했다. 장미와 장미의 수호신들. 분명 저것만은 리케도르안과 들어왔을 때 보았던 것과 일치했다.
“……저게 대체 뭘까?”
“제단 같은데.”
“같은 생각입니다.”
프란시아와 르나그가 차례로 말했다.
그들의 말처럼 허공에 붕붕 뜬 비석 아래로 사각형으로 만들어진 돌이 반듯하게 놓여있다. 높이는 내 어깨만큼 올듯했다.
모로 보아도 제단 같은 느낌이 물씬 풍겼다.
나는 천천히 허공에 뜬 비석을 응시했다. 차분하게 응시할수록 이제는 모두 알 것 같았다. 붉은 장미가 있는 자리에는 예전에 보았던 것처럼 붉은 보석이 박혀 있었다. 그러나 수없이 박혀 있었을 보석은 거의 깨진 상태였고, 단 하나만이 남아 영롱한 빛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치 한 한 개의 꽃잎만을 남겨둔 것처럼.
……저건 리케도르안의 상태를 말하는 거야.
빠르게 다른 장미들을 살폈다. 노란 장미 쪽은 예나 지금이나 활짝 핀 채 큰 차이가 없다. 흰 장미의 경우 오래전에 보았을 땐 오염된 듯 검은 반점이 찍혀 있었으나, 지금은 노란 장미와 마찬가지로 멀쩡하게 활짝 피어 있었다.
당시 프란시아는 체이서의 추적에서 벗어나기 위해 위험한 도망을 치고 있었고,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으나 이젠 그렇지 않음을 드러낸 걸까. 내 눈이 붉은 장미와 대치되는 곳을 향했다.
‘흑장미.’
그리고 흑장미를 본 순간 눈을 움찔했다. 분명 오래전에 보았을 때도 그리 정상인 모습은 아니었으나……. 처참했다.
타버린 듯이 너덜너덜하게 찢어진 꽃잎, 부러진 가시, 목탄을 그대로 짓이겨 놓은 것처럼 짓뭉개진 꽃의 형태. 저것이 만약 죽어가는 꽃이라면 가장 최악의 형태로 죽어가는 느낌이었다.
어째서 정말로 죽을지도 모를 붉은 장미보다도 더 상태가 이상한가?
그리고 끝으로 중앙을 바라보면, 푸른 장미의 자리는 움푹 파여 있었다. 보석은커녕 꽃의 모양은 온데간데없이 줄기와 잎뿐이다.
‘……어째서?’
이상했다. 저것들이 정녕 장미들의 상태를 나타낸 것이라면, 이전에야 각성하지 못했던 나지만 이젠 다르지 않은가? 왜 푸른 장미가 나타나지 않았지?
“이아나?”
“아…….”
나는 황급히 눈을 떼어냈다. 그래, 지금은 생각할 때가 아니다. 시간이 없었다.
“지금 저 제단, 그러니까 저 돌 주변으로 거대한 진이 보여요?”
“네, 보입니다.”
“응. 보여.”
“보여요.”
나는 차례로 흘러나오는 대답을 들으며 끄덕였다.
“리케도르안, 당신이 저기에 서면 될 것 같아요.”
“서기만 하면 되나요?”
“네. 중앙엔…… 제가 서야 할 것 같아요.”
나는 제단을 바라보며 눈을 좁혔다. 그저 바라보았을 뿐인데 저걸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 것 같다. 정확히는 내게 깃든 수호신이 속살거리듯 이미지를 머릿속으로 보내주고 있었다.
‘……너는 어째서 모든 걸 알고 있는 거야?’
푸딩이를 생각해보면, 푸딩이는 많은 것을 알지 못했다. 딱 자신이 태어난 만큼 또 지내온 시간 만큼만 지각하고 사유했다. 다른 수호신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내 수호신에게서는 기나긴 시간의 흔적이 느껴졌다. 마치 오랜 세월을 견뎌온 것처럼.
‘넌 왜 푸딩이처럼 내게 말을 걸지 않아?’
수많은 의문이 스쳐 지나갔지만 지금은 이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할 시간이 아니었다. 그리고 곧 모든 답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무대에서 마지막 과제만 이루어 낸다면 말이지…….
“그럼 그동안은 저와 흰 장미가 주변을 경계하겠습니다.”
“네, 부탁할게요.”
그렇게 발걸음을 제단을 향해 내딛는 순간이었다. 등줄기로 선득한 감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좌우를 살폈다. 분명 아무도 없는데?
황제가 쫓아오려면 아직 시간이 있을 터였다. 거기다 지하 감방에서 일어나는 소음은 바깥에 전달되지 않는다는 걸 이미 이곳에 있을 때 느꼈었다. 그럼에도 왜 바늘로 콕콕 찌르듯 긴장감이 느껴지는가. 드넓은 길이 흡사 외길을 걷는 것같이 아슬아슬하게 느껴졌다. 숨을 꾹 눌러참으며 다시 한번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와 동시에 내 손목이 잡혀 뒤로 휙 이끌렸다.
“이아나!”
내가 있던 자리로 푸드득 거대한 무언가가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팔랑팔랑. 내가 있던 자리로 검은 깃털이 흘러내렸다.
어느새 내 앞에는 본능적으로 만들어낸 푸르른 방벽이 있었다. 그리고 양쪽에는 각각 프란시아와 르나그가 버티고 섰다. 나는 방벽을 유지한 채로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허공을 타고 내려온 이가 가벼이 발끝으로 바닥에 디뎠다. 이어서 남자가 내민 팔로 거대한 새가 앉았다. 익숙한 독수리, 아퀼라다. 체이서가 웃으며 완전히 발을 내려놓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늘어졌던 긴장감이 팽팽하게 당겨진다.
“안녕, 이아나.”
그가 어찌 나는 듯 허공에서 내려섰는지,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이 공간에 나타났다는 점이었다.
‘불안감의 정체는 이거였나.’
황제를 따돌린 뒤로 발생할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했었다. 그리고 이건 최악의 경우였다.
“기다리느라 조금 무료했어.”
내 허리를 붙잡고 있던 리케도르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손을 뻗은 채로 체이서를 노려보았다. 체이서는 내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너, 날 방해하지 않겠다며.”
“맞아. 그 말엔 변함없어, 이아나. 네게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고 했잖아.”
“웃기지 마. 방해하지 않겠다면서 여길 나타났다고?”
“맞아. 모순이지.”
그의 음성은 노래하듯 감미로웠다.
“하지만 정말 널 방해할 생각은 없어. 정확하게 난 내 목적을 이루러 온 거야.”
체이서의 팔에 앉아 있던 아퀼라가 크게 날갯짓했다. 그와 동시에 그의 허벅지 앞으로 거대한 맹수가 나타난다. 그의 또 다른 수호신 라탄이었다. 검은 재규어는 입을 벌렸고 어느 때보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다. 무시무시한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네 목적?”
이 순간에 여기까지 나타난 이상 그의 목적이란 결코 나에게 좋은 것일 리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체이서가 고개를 기울여 그림과 같은 미소를 보였다.
“응. 목적.”
마치 도뮬릿의 저택에서 ‘다정한’ 오빠를 흉내 내듯이.
“널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려고.”
집? 도뮬릿이 아니다. 그의 손가락이 자신의 뒤쪽, 제단과 거대한 주술진을 가리킨다.
“난 너를 네 원래 세계로 돌려주기 위해서 왔어.”
그가 그렇게 말한 순간 거짓말같이 모든 장미들의 눈이 나를 향했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
내가 입을 달싹이는 사이, 스멀스멀 이 거대한 공간에 연기 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낮과 같이 밝던 공간이 점차 잠식되었다. 달도 없는 밤, 칠흑같이 깜깜한 어둠 속에 체이서의 몸도 비석도 제단도 모조리 삼켜진다.
빛이 모조리 사라지고 곳곳에서 보석이 내뿜는 희미한 빛에 겨우 앞이 보일 뿐이었다. 그사이 바로 옆에서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이아나, 이게 무슨 소리예요?”
어느새 내 옆으로 선 리케도르안이었다. 그가 내 손을 잡고 중얼거렸다. 목이 꽉 졸린 듯한 음성이었다.
“원래 세계로 돌아간다니요?”
보통 사람에게라면 명확히 보이지 않을 시야였다. 그러나 각성하면서 약간이지만 시력도 좋아진 탓일까.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트릴 듯한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리케도르안뿐만 아니라 아마도 다른 두 사람 또한 비슷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저 남자의 말대로예요.”
어차피 속일 생각은 없었다. 중요 순위를 둔 채 잠시 미뤄두었을 뿐.
“나는 이 세계 사람이 아니에요.”
나는 길을 가로막은 체이서를 보았다.
“저 남자로 인해 억지로 끌려온 평범한 사람이었죠.”
지금도 평범했던 나의 기억과 추억들을 놓지 못했던, 평화로운 삶을 살았던 사람. 고요한 분노가 가슴 깊숙한 곳에서 일었다. 그러나 나는 이 칼바람을 그대로 묻어두었다.
“하지만 리케도르안, 나는 아직 어떡할지 선택하지 않았어요. …당신을 살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립지 않다고는 할 수 없다.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솔직하면서도 최선의 대답이었다.
나는 리케도르안의 손을 고쳐 잡았다.
“현혹되지 말아요. 나도 당신도. 나는 우선순위를 정했고 그건 내 지난 삶보다도 당신의 목숨을 우선시하는 것이었어요.”
나는 리케도르안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제 말이 중요해요, 저 남자의 개소리가 중요해요?”
“당연히 언니 얘기지. 뭘 물어봐?”
바로 옆에서 프란시아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더 중요한 걸 생각해요.”
내 말에 리케도르안이 잠이 깬듯한 표정을 하더니 이내 얼굴을 굳혔다.
“이아나, 당신의 말이 옳아요. 뭐든지.”
“네. 그 말 이 순간에 참 듣기 좋네요.”
이 순간에도 황제는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가요.”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프란시아와 르나그를 향했다.
“프란시아, 르나그! 엄호 부탁해도 되겠어요?”
어둠이 자리 잡은 공간에 새하얀 빛이 내 주변으로 퍼져 나왔다. 프란시아가 흘려낸 빛, 어느새 그녀는 어깨에 거대한 망치를 가벼이 얹은 채로 웃고 있었다.
“그런 건 시키지 않아도 할 거야, 언니.”
“물론입니다.”
르나그 또한 수호신을 형상화 시킨 무기를 손에 쥐고 있었다.
“당신은 그저 앞만 보고 가십시오. 길은 저희가 뚫을 테니.”
이 대화는 체이서에게도 고스란히 들릴 터였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방벽을 해제했다. 그대로 발을 박찼다.
“이아나. 내 뒤로요!”
내게 손을 잡혔던 리케도르안이 도리어 나를 잡아당겨 자신의 뒤로 두었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처음 보는 커다란 검이 들려 있었다.
‘푸딩이인가?’
내 안에 있던 푸딩이가 사라진 감각이 들었다. 푸딩이가 자신의 의지로 리케도르안에게 간 거다. 내 뜀박질이 멈추지 않았다.
“이아나, 제가 저 주술진 안에 있기만 하면 되는 건가요?”
“네? 맞아요!”
제단과 제단 주변을 둘러싼 땅에 그려진 거대한 주술진. 내가 중앙에 도착하면 저걸 일으킬 수 있다. 내 수호신이 연신 노랠 부르며 속삭이고 있었다.
“그럼 먼저 가세요.”
“뭐라고요? 하지만 당신이 필요한 일.”
그렇게 말한 순간 나는 멈칫했다. 공간 가득 자욱하게 깔린 어둠, 바닥에서 무언가 꿈틀대며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저게 뭐야…….”
“이아나, 미처 말을 못 했네, 사실 여긴 내가 한번 썼던 공간이야.”
어느새 그림자 사이에서 자리를 옮긴 체이서가 뒷짐 진 채로 서 있었다.
“이곳에서 너를 이 세계로 불러냈으니까.”
어둠 속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보고 있노라면 섬뜩한 감각이 들었다. 마치 대성당의 홀에서 이지를 잃은 사람들을 보는 듯한 기분…….
“그러니까 사실. 이곳은 내가 만반의 준비를 해두었던 곳이라는 거지.”
적, 이 순간 누구보다 강한 나의 적이 황홀하리만치 웃었다.
“어때, 널 돌려보내기에 적절한 공간이지 않니?”
왜일까. 가질 수 없다면 부숴버리겠다는, 끔찍한 말이 떠올랐다.
저 남자는 저가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멀리 보내버리겠다는 건가? 누구도 가질 수 없게?
쿵!
육중한 소리가 들렸다. 거대한 굉음은 섬뜩한 감각에서 나를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언니!”
소리의 주인공은 프란시아였다. 그가 막 다가온 그림자를 날려버린 채로 소리치고 있었다.
“어서!”
나는 리케도르안과 내 위치를 확인했다.
“리케도르안, 반드시 주술진을 밟고 있어요!”
리케도르안은 내 말에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대화할 시간은 많지 않았다.
“그럴게요. 이아나, 그러니!”
“내 걱정은 말아요!”
리케도르안과 함께 주술진의 원을 우회해서 뛴 탓에 우리 주변으로는 아직 일그러진 그림자가 많지 않았다. 리케도르안이 가장 수가 많은 방향을 자진해서 맡은 동안 나는 곧바로 제단을 향해 뛰었다. 반투명한 푸르른 방벽이 그림자를 마구 튕겨냈다.
‘하나하나가 그리 강하지는 않아.’
그러나 수가 많아도 너무나 많았다. 다행히 인간이 아니란 점은 좋았지만 쓰러져도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는 것 같았다. 마치 좀비처럼. 이래서야 쓰러트려도 끝이 없을 것이다.
광범위하게 능력을 쓴다면 쓰러트리는 게 어렵진 않을 것 같았으나 그러면 발이 묶인다. 차라리 이 채로 빠르게 제단에 가는 쪽이 좋았다. 슬쩍 돌아보면 프란시아는 수많은 그림자들을, 르나그는 라탄과 그림자를 동시에 상대하고 있었다.
남은 것은 나다. 나는 방벽의 범위를 좀 더 넓혔다. 그러고는 그대로 있는 힘껏 뛰었다.
내 몸 주변으로 푸르른 아지랑이가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생긴 것이 물결과 비슷할 뿐만 아니라 이것은 역할도 파도와 비슷했다. 움직일수록 몸이 더 가벼워진다. 내 몸을 물결처럼 밀어주고 있었다.
쾅!
나는 그대로 내가 할 수 있는 속도보다 더욱 빠르게 박차고 달려간다. 다행스럽게 제단의 앞까지 도착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는 숨을 크게 몰아쉬며, 손을 뻗었다. 손이 닿기 직전, 빠르게 뒤쪽을 확인했다. 리케도르안은 나와의 약속대로 전투를 이어가며 한껏 뒤로 뺀 상태였다. 리케도르안의 발이 확실히 주술진 안에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돌렸다. 제단에 손이 닿았다.
‘바로 지금!’
그 순간이었다. 닿은 면적에서부터 눈 부신 빛이 퍼져 나왔다.
쿠쿵. 바닥 전체가 진동하며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실의 주술진을 움직였던 것처럼 움푹 파인 사이로 푸르른 아지랑이가 가득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신기하게도 내 힘은 푸르른 색뿐 아니라 갈수록 붉은빛을 함께 띠었다.
왜일까. 주술진으로 스며들어간 힘은 내 힘임에도 더는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아울러 증폭된 힘이 내게 묻는 것 같았다. 무엇을 원하느냐고.
당연히, 리케도르안의 회복과 생명을 되찾는 일이지!
속으로 거세게 외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빛이 크게 쏟아졌다. 모두가 몇 초도 안 되는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화아악!
점점 커지는 빛에 눈이 절로 감겼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가렸을 때였다. 나를 노리는 날카로운 감각을 느꼈다.
방벽이 두꺼워진다.
캉!
내가 한 것이 아니었다. 내 안의 수호신이 더욱 두껍게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그 방벽에 쩌적쩌적 금이 가더니, 곧이어……
쨍그랑!
소리를 내며 산산이 조각났다. 무형의 아지랑이가 유리 조각같이 부서져 비처럼 내리는 사이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이아나.”
체이서였다. 내 방벽을 부순 그는 내 앞에 가볍게 내려섰다. 나와 그의 거리는 채 세 걸음도 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손을 보며 작게 숨을 삼켰다.
‘……힘이 일어나지 않아.’
손을 쥐었다가 편다. 흘끗 시선을 굴리면 주술진에서 이어진 거대한 붉은 끈이 리케도르안과 연결되어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고대의 힘은 무사히 리케도르안에게로 닿았다.
‘한 번에 돌려받는 게 아니었나.’
그러나 나는 깨달았다. 리케도르안이 저주를 풀고 생명을 돌려받는 것은 한 번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란 것을.
남은 것은…… 리케도르안이 완전히 돌려받을 때까지 시간을 끄는 일이었다.
내 시선이 다시 돌아갔다.
현재 내게서 힘이 일어나지 않는 건, 리케도르안의 생명을 돌려주는 데 모든 힘을 쏟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나는 눈을 들어 올렸다. 체이서의 손에서 일렁거리는 저 푸른 빛, 나와 똑같은 푸르른 저 빛 때문일까? 어느 쪽인지 혹은 둘 다 일지 몰라도 힘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는 건 분명했다. 낭패감이 등 뒤를 적셨다.
“이아나.”
“…….”
“왜 그래, 경계할 것 없어.”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옆으로 들리는 병장기 소리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의 눈은 마치 치료해, 방해하지 않을 테니까. 이렇게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네게 아직 전하지 못한 것이 있다고 했는데, 기억해?”
옆으로는 전투가 한창이었다.
체이서가 무슨 수를 쓴 것인지 몰라도 지하엔 더욱더 많은 그림자가 일어나 있었다. 거기다 어떻게 생겨난 건지 몰라도 인간의 형태가 아닌 거대한 괴수 형태를 한 그림자가 보였고, 르나그가 이것과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나는 눈을 굴렸다.
“기억하지. 그리고 난 듣지 않겠다고도 했고.”
프란시아에게는 자신의 성기사를 주변에 소환할 수 있는 도구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그녀는 르나그의 옆에서 마찬가지로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이렇게 전투가 맹렬한 도중에는 도구를 쓸 수 없다. 시간을 끌수록 상황이 나빠질 것은 자명했다.
“하지만 꼭 들어야 할 거야.”
체이서의 몸 주변으로 무수히 많은 검이 떠올라 있었다. 나는 이것이 아퀼라가 무기로 만들어졌을 때의 형태임을 알고 있었다. 날 다정히 부르는 이 음성이 더는 좋게 느껴지지 않았다.
“약속대로 나는 네가 하는 일을 방해하지 않았고, 너는 바라는 바를 이뤘어. 붉은 장미를 살렸잖아?”
체이서의 주변에 떠 있던 검이 한곳을 향해 날아간다. 바로, 그림자를 쳐내며 이곳으로 달려오는 리케도르안이었다.
“리케도르안!”
깜짝 놀라 그를 보았지만 다행히 리케도르안은 체이서의 검을 가벼이 쳐냈다. 다만 몸이 뒤로 밀리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지 표정을 찡그렸다.
그사이 리케도르안에게로 그림자가 덮친다. 순식간에 주변에는 프란시아와 르나그 주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까맣게 그림자가 가득했다.
“이대로 두면 붉은 장미는 본래의 생명을 회복하겠지. 곧 모든 힘을 되찾으면 저 그림자 정도야 아무렇지 않게 떼어내겠고. 모든 게 네가 바라는 대로지. 안 그래?”
리케도르안을 회복하게 두면서 내게 할 말이 있다고? 도무지 이 남자의 목적을 알 수 없었다.
“대체 네가 바라는 게 뭔데!”
“네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것.”
이제 와 나를 내 세계로 돌려보내겠다? 멋대로 이 세계에 데려다 놓은 것이 자신이면서? 이런 심리를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당연히 시도조차 하고 싶지 않다.
“이아나, 네가 건드린 이 제단과 주술진은, 느꼈듯이 푸른 장미의 소원을 들어주는 곳이야. 달리 말하자면 푸른 장미의 힘을 품은 공간이지.”
체이서에게서 나른하고도 차분한 음색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위험한 푸른 아지랑이가 주변에서 마구 일렁거렸다.
차가운 칼로 만든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그동안 흑장미는 황실과 손을 잡고 고대 주문을 통해 여러 실험과 악행을 벌여왔어. 끔찍한 족속이지.”
악행, 흑장미인 그가 스스로 가문의 일을 비난하는 모습이 모순적으로 느껴졌다.
“내 아버지는 한때 푸른 장미를 완전하게 손에 넣고, 붉은 장미 가문을 멸문시키고 노예로 만드는 꿈을 꾸기도 했어.”
헤르님과 도뮬릿은 역사 속에서 결코 사이가 화목한 가문이 아니었다.
“그래. 네가 죽은 것도 욕심을 부린 실험 때문이었어. 모든 힘을 손에 쥐고 싶은 내 아버지의 욕망이 만든 꿈.”
체이서가 빙긋 웃었다.
“너랑 나를 이용해서 누구보다 강하고 오래 사는 장미가 되려 했지. 네가 죽기 전까지 힘을 도려내며.”
그건 내가 아니다. 나는 더는 침묵하지 않았다.
“그건 내가 아니야.”
“맞아. 내 여동생의 이야기야, 이아나.”
체이서는 순순히 수긍했다.
그사이 난 손을 다시 쥐었다가 펴며 힘을 일으키려 했으나 여전히 응답이 없었다. 대신 이 순간에 리케도르안에게로 넘어가는 힘들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쾅!
르나그가 막 거대한 그림자 괴수를 쓰러트리는 모습이 보였다. 프란시아가 커다란 망치를 휘두르는 모습도. 내 안에서 수호신이 긴 울음소리를 토하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만 더 견뎌달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내 여동생이었던, 그 애는 소설을 쓰길 좋아했지.”
체이서의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이 치열한 풍경과는 관련 없다는 듯 평온하고 나긋했다. 그렇기에 오싹했다.
“그 애가 쓴 기록을 본 적 있지? 일기장.”
나는 가만히 ‘이아나’의 기록을 떠올렸다 자신이 피 섞이지 않은 양오빠를 사랑하며, 푸른 장미라 고백하던 담담한 서술들을.
“난 그 일기장 말고도 그 애가 쓴 이야기를 알아. 그 애는 무언갈 쓰는 걸 좋아했어.”
이제 와 ‘이아나’의 이야기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죽어 돌아올 수 없는 이를 말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 애가 쓰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그래, 저기 있는 흰 장미이기도 했지만.”
체이서의 말끝이 길게 늘어졌다.
“보통은 스스로를 주인공으로 썼지.”
“그게 지금, 어쨌다는 거야?”
“이아나. 나도 한참 뒤에야 알았지만. 그 애의 이야기 속 남자 주인공은 나였어.”
아주 잠시지만 체이서의 미소로 겨울 바싹 마른 가지 같은 씁쓸함이 스쳤다.
“이 세상이 거대한 이야기라면 내가 제 세계의 남자주인공이 되어주길 바랐던 거겠지.”
나는 숨을 삼켰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애가 완성한 이야기는 단 하나뿐이야. 그것도 중간에 내 아버지에게 들켜 엉망으로 난도질당한 이야기지. 거기엔 내가 악당이라나?”
저 남자가 말하는 과거나 진실에는 관심 없다. 내가 체이서의 말 따위를 길게 들어주는 건 오직 시간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아나. 그런데 말이야.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어?”
그 순간 체이서의 음색이 달라졌다.
“나는 푸른 장미가 아니야. 그런데 어떻게 푸른 장미의 힘을 쓸 수 있었을까?”
“……당신 여동생이 당신에게 힘을 주었겠지. 아니, 주었다며.”
“그래. 이아나. 그 점이 이상하지 않아?”
무엇이 이상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인지 모르겠다. 그렇기에 대충 대꾸했다.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자 싶었다. 한쪽에서 점차 속도를 내며 차오르는 리케도르안의 힘을 선명히 느꼈으니까. 좋아, 조금만 더, 더. 견디면 돼.
“시공간은 오직 푸른 장미에게만 허용된 궁극의 힘인데 왜 내가 쓸 수 있지? 나는 의문이었어. 푸른 장미의 힘을 받았다고 시간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
그러나 체이서의 말은 무심하게 흘려 넘기려던 나를 억지로 붙들었다. 아니,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결국은 깨달았어. 이 세계는 이미 무너지고 있었고, 이게 내게 힘을 준 그 애가 사라졌기 때문이란 걸.”
상황은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기분 나쁘게도 심장이 쿵쿵 뛰었다.
“한때는 푸른 장미가 세상의 중심이니, 신의 조각이니 떠들어대는 소리가 그저 우스웠거든. 그런데 이런 허무맹랑한 소리가 사실이었던 거야.”
그렇게 말하는 체이서의 말이야말로 허무맹랑하게 들렸지만, 한편으로 내 무의식은 근거를 찾았다. 황제가 이야기해주던 장미들의 근원, 터무니없이 격이 높아진 신의 조각이란 이야기. 그리고 차원을 뛰어넘는 거대하고 신비로운 힘까지.
이런 힘이 가능하다는 건 결국 세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않을까?
“결과적으로 푸른 장미의 힘은 푸른 장미만이 쓸 수 있었던 거지. 그 결과가 무너지는 세상이었고.”
어째서 이 순간 저 비석의 짓뭉개지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흑장미의 모습이 떠오르는가?
“나는 이곳에서 너를 소환했어. 다른 곳에서 또 다른 푸른 장미를 데려오면 무너져가는 세계가 붕괴를 멈추리라 생각했지.”
체이서가 빙긋 웃었다.
“그리고 그건 착각이었어. 그러니, 이제 원래대로 돌릴 생각이야.”
“……세계를 멸망하게 두겠다고?”
“그래.”
이미 알고 있던 사실과 충격적인 이야기가 교차해서 흘러나온다. 그래 그뿐인데. 왜 불안감이 떨어지지 않는가.
“하, 그런 모순이 어딨어? 정녕 무너진 세계를 살리기 위한 것이라 해도 날 멋대로 데려온 건 당신이야! 그리고 이제는 멋대로 쫓아내겠다고?”
곁눈질로 본 시야에 현저하게 줄어든 그림자들이 보였다. 뛰어나고 유능한 장미들은 착실하게 줄여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할 거란 내 예상과 다르게 그들은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우리가 승기를 붙잡을지도 모른다. 그럴 텐데.
체이서의 입술이 부드럽게 떨어진다.
“쫓아낸다니 원래대로 돌리는 것뿐이야. 이제 난 네 귀환을 바라.”
“그러니까, 어째서 이제 와…….”
“내가 죽기 전에 돌아가.”
참지 못하고 토해내려는 목소리가 그대로 멈췄다.
“내 목숨으로 지탱하던 이 세계가 한계를 맞이했으니까.”
“그게 무슨 헛소리야.”
나는 애써 침착하려 애썼다. 대체 무슨 말이지? 저 남자가 죽는다고? 세상을 지탱해? 잘못 들었다기에는 너무나 이상한 말이었다. 그러나 난 저 남자가 내게만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명제를 믿었다.
그러니…… 모두 진실이라면.
“나는 더는 푸른 장미를 대신해 세상을 지탱하지 못한다는 거야.”
“내가 있잖아!”
“눈 앞을 봐, 이아나. 네가 있는데 저 석판은 왜 비어 있을까?”
“…….”
나조차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분명 내가 각성했는데도 석판의 중앙은 여전히 비어 있다.
“넌 푸른 장미가 맞지만 이 세대, 이 시간의 푸른 장미는 아닌 거지. 내가 억지로 데려왔으니까.”
“당신……. 이 사실을 언제 알았던 거야? 왜, 왜 진작에 말하지 않았지?”
“그야…… 처음엔 널 사랑하지 않았고.”
체이서가 성큼 앞으로 걸어왔다.
“널 사랑한 뒤에는 방법을 찾으려 했고.”
어째서인지 도뮬릿에서 주기적으로 자리를 비우던 모습을 떠올렸다. 어딜 가냐는 말에 늘 은밀한 미소만 띠던 모습이.
“끝내 네가 나타나도 소용이 없으며 멸망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그냥 널 독차지하고 싶었지. 내가 죽을 때까지.”
칼바람이 뺨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간다. 그가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미 이 세계는 빠르게 무너지고 있어.”
그의 푸른 힘은 나를 해치지 않았다. 날카롭게 일렁이던 푸르른 기운은 정말 나와 똑같은 푸른 장미의 힘이었다.
“억지로 부여받은 푸른 장미의 힘과 내 힘. 거기다 붉은 장미의 수호신까지 데려왔지만 역부족이었더라고.”
그 순간 푸딩이를 떠올렸다. 다른 수호신에 비해 자각도 늦고 유달리 유약해 보이던 어린 수호신. 푸딩이의 성장이 느렸던 건……. 모두 빼앗겨서였던가.
“역사 속에서 푸른 장미는 감금될지언정 절대 죽는 일 없이, 제 수명을 유지하고 죽었어. 이아나. 자살이나 타살조차 없이 언제나 죽음은 언제나 자연사.”
바람이 요동친다.
“적어도 더 오래전 장미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거지. 푸른 장미가 세계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물론 쉽게 죽지도 않으나 절대 죽지 않을 이유가 있었던 거야.”
체이서가 고개를 숙여 설핏 미소했다.
“어리석은 내 아버지 때문에 그 애는 죽었지만.”
이 순간 참으로 우습게도 리케도르안의 힘이 완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모든 저주가 풀릴 시점이 얼마 남지 않았다. 생명이 차오르는 느낌이 가슴을 강하게 두드렸다. 모순적인 상황이었다.
“푸른 장미의 힘을 다른 이가 써봐야 푸른 장미처럼 세상을 유지할 수는 없는 거야. 그래서 내가 푸른 장미를 대신해 세계를 지탱할 때 쓰인 건 내 수명이었지.”
그는 아무렇지 않게 고백했다.
“그래도 강한 편이라 좀 더 오래 살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더라고.”
그 모습은 내가 출소한 날 보았던 능청스러운 모습과 겹쳐 보였다. 믿기지 않을뿐더러 분이 치밀어 올랐다.
“어차피 난 죽어. 널 만나기 전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전혀 감흥은 없었지만 내겐 당연한 일이었어. 이아나.”
신이 이 남자에게 넘긴 보물이 이 목소리가 아닐까 싶은 감미로운 음성이 귓바퀴를 파고들었다.
“……그럼 왜 날 데려온 건데.”
“이따위 세상 멸망해버려도 좋지만. 그 애와의 약조에 따라 유희처럼 시도해본 거지. 다른 세계에서 내 장미를 데려오자.”
내 목소리는 내가 들어도 잔뜩 혼란이 어려 있었다.
“나는 본래 불러들인 푸른 장미를 이대로 가둬 세계를 지탱하는 데 쓰려 했어.”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도구로 쓰려 했음을 함께 고백했다.
“널 데려온 뒤에 널 재료로 쓰면 너 또한 오래 버티지 못할 거란 걸 알았어. 똑같은 푸른 장미인데 왜일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세계는 아마 그 애가 아니면 안 되었던 모양이야. 그때는 네가 그대로 죽어도 상관없다고도 생각했지.”
체이서의 매끄러운 얼굴로 회한과 의문, 희미한 분노가 스쳐갔다. 체이서가 날 잡은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언젠가 내가 죽을 때 너도 함께 죽어도 상관없다고도 여겼는데 말이지.”
갈수록 작아지고 희미해지는 음성이었다.
“하지만 너를 사랑하고 말았어. 그게, 내 생에 가장 큰 변수였어.”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대로 널 차지해 버틸 대로 버티다가 같이 죽을까. 아니면 나만 가진 채로 내가 죽을 쯤에야 그대로 돌려보낼까 싶었는데.”
왜 이런 걸 도뮬릿에선 말하지 않은 거지?
“당신, 이런 걸 알고 있으면서, 줄곧……. 말하지 않았다고?”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묻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해했기에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때에도 절절하게 목숨을 다할 것처럼 말하더니, 그는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하지 않았다.
“너도 알다시피 난 멋대로잖아.”
거짓을 말하진 않아도 진실은 숨기는 남자. 그는 끝까지 제멋대로였다.
“네 이름이 뭐야?”
체이서는 내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일부러 말하지 않는 것처럼. 그저 손을 잡힌 채로 노려보면 체이서가 그대로 시선을 내려 울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게는 들을 자격이 없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나는 이제야 비석 속의 짓뭉개지고 으깨져 형태조차 알아볼 수 없는 흑장미의 뜻을 알았다. 죽은 ‘이아나’가 자신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바랐다고 했던가. 줄곧 이 세상이, 이 남자가 만든 거대한 감옥이라면. 본래 ‘이아나’가 만날 이 남자는 이 감옥 같은 세상에서 만난 그녀의 남자주인공이었으리라.
그저 우스웠다.
이 복잡하게 얽히고 삐뚤어지고 일그러진 관계가.
비현실적인 힘들이. 결국은 엉키고 엉킨 실타래의 끝은 파멸만을 가리키는 것만 같아, 날 것의 거친 감정이 마구 몰려들었다.
“돌아가. 네 세계로.”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가득했다. 왜? 이 거대한 세계가 어째서, 고작해야 푸른 장미란 사람 하나 없다고 무너진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한편으로 답을 알았다.
한때 그녀를 위한 나라까지 있으며 그녀를 숭배하는 신전까지 있었다. 이것은 보통 사람을 향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런 힘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그리워했잖아.”
미친 세상이다.
평소의 무심하고 태연하던 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나는 엉망인 모습으로 그를 마주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내 목소리는 짧은 시간동안 잔뜩 쉬어 더는 평소와 같지 않았다.
“네 기억은 항상 외치고 있던걸.”
리케도르안과 연결된 힘이 조금씩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전 세계에서의 행복한 모습을 난 보았으니까.”
나를 이 세계로 억지로 데려와, 기억마저 앗아간 남자가 말했다. 이토록 가증스러울 수가 없었다. 결국 참고 참았던, 끝내는 터트리지 않으려 하던 원망이 폭탄 터지듯 폭발했다.
“하, 이제 와서?”
내 목소리는 쉬고 끓고 있었다. 오로지 리케도르안을 살리기 위해, 참았던 감정이 마구 뛰쳐나왔으니까.
“그건, 네가, 네가 할 말이 아니야!”
“알아.”
그의 손을 그대로 뿌리치고 가슴팍 옷자락을 거세게 휘어잡았다. 체이서는 멱살을 내준 채로 나를 빤히 보았다. 붉은 눈이 광기와 표현할 수 없는 것으로 일렁거렸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
그는 울지 않았다. 그렇다고 도뮬릿에서처럼 사랑을 갈구한 것도 아니었다.
“여기서 이 세계의 종말과 함께 죽기보다는.”
어딘가 포기하고 체념한 얼굴 같았으나 동시에 숨길 수 없는 광기와 집착이 동전의 양면처럼 자리 잡은 채 내게서 시선을 떼어내지 않았다.
“네가 행복했던 세계로 돌아가는 게 낫지 않겠어?”
그는 언제나 배려하는 척했고, 다정한 척했으나 나를 정말로 배려했던 것이 아니다. 그의 배려는 언제나 내 눈을 막고 귀를 가리는 폭거였다. 그렇게 나를 괴롭혔다.
“너와 함께 있는 세상을 위해 모든 수를 동원했어. ……정말로.”
하지만 방법이 없었던 거지. 달콤한 목소리가 절절하게 들끓었다.
“내가 죽기 전에 네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니까.”
아니다. 이건 선물이 아니다. 당신이 도뮬릿에서 수없이 던져준 귀하디귀한 보물처럼. 내게 필요치 않은 것이라면 그것이 어째서 선물이란 말인가.
내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무엇하나 선택할 수 없는 현실이 지긋지긋하고 섧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