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황은 르나그가 빠르게 일단 내가 이야기한 사람을 찾아보기로 하고 일단락되었다.
끼이익. 문이 닫힌다.
르나그가 제시한 시간은 한 시간이었다. 시간이 없었으니 최대한 빠르게 움직일 생각인 듯했다. 다시 말해 우리에겐 1시간이라는 잠시의 휴식 겸 유예 시간이 주어졌다. 그리고 나는 모두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곳에 단 한 사람과 남은 참이었다.
바로 리케도르안과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이 공간은 여러 방이 있었으며 소음이 철저히 차단되는 편이었다. 애초에 르나그가 황실 몰래 은밀한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만든 공간이었으니까.
“……이아나?”
문이 닫히자마자 리케도르안이 나를 무구하게 바라보았다. 아니, 문이 닫히기 이전부터 나만 쳐다보던 눈이었다.
“잠시만 그대로 있어요.”
나는 문고리를 잡았다. 끼익 열리는 문을 확인하고는 다시 닫았다. 철컥. 자물쇠가 돌아갔다. 그대로 빙그르 돌아 리케도르안을 응시했다.
“아, 문이 잘 잠겼나, 보려고요.”
나는 긴말하지 않고 그에게 성큼 걸었다. 그리고 이제는 참지 않고 그의 멱살을 쥐었다.
“각오는 되어 있겠죠?”
“네? 어떤 각오를 말…….”
“내게 제대로 말하지 않은 거요. 잘못한 거죠?”
리케도르안이 입을 꾹 다물었다.
“벌을 줘야겠네.”
“나를 버리지만 않…….”
“헛소리한 벌도 추가예요.”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한 채 고개를 휙 숙였다. 그대로 그의 입술을 삼켰다. 금세 상기되는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손을 천천히 옮겼다. 내 손가락이 찢어진 옷자락 틈 사이를 더듬다 너덜너덜한 단추를 벗겨냈다.
어차피 그를 탓할 마음은 없었다. 이제 와 탓해봐야 지난 일이었다. 당장 하루가 급박하고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물론 그가 죽도록 두지 않을 거지만, 소중한 시간을 실랑이에 뺏기고 싶지 않았다. 의미 없는 실랑이면 더더욱. 나는 입술을 살포시 떼어 숨소리와 함께 속삭였다.
“한 시간은 짧아요, 그렇죠?”
“……읏.”
가슴골을 슥 훑던 손가락이 그대로 붙잡혔다. 리케도르안은 내 검지를 잡아 그대로 제 입술로 가져왔다.
“……후회하지 않겠어요?”
리케도르안은 잠시 방문을 쳐다보는가 싶더니 태양처럼 붉게 상기된 얼굴로 작게 속삭였다.
“걷지 못할 수도 있을 텐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눈을 깜빡였다. 곧 웃음을 터트렸는데, 우스웠다기보다는 귀여웠던 탓이다. 얼굴은 붉어질 대로 붉어진 채로 내 옷자락은 꽉 붙잡으면서 내게 경고하듯이 조언하는 모습이라니. 어찌 사랑스럽지 않을 수가 있을까?
“왜 웃는 거예요, 이아나.”
곧 불퉁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나는 잡히지 않은 손을 입술로 가져다 대고 쿡쿡 소리 내어 웃었다.
“아니, 곧 내일 죽을지도 모를 사람이 할 대사는 아니잖아요.”
그러자 리케도르안이 붉어진 얼굴로 나를 빤히 보다 말했다.
“……이아나가 한 말도, 내일 죽을 사람에게 건넬 제안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싫어요?”
리케도르안이 도리질 쳤다.
“아니요.”
그것으로 모자랐는지, 그는 얼른 덧붙였다.
“절대요.”
마치 내가 제안을 번복한다고 하여도 그건 안 된다는 듯이. 불안이 약간 어린 눈동자와 날 단단히 붙잡은 손은 대조적이었다. 왜일까. 이 말을 듣고 이유 모를 만족감과 뿌듯함. 그리고 애정이 내 안에 차올랐다.
“이아나?”
내 웃음이 달라진 것을 그도 느낀 것일까. 리케도르안이 반문하듯 나를 불렀다. 나는 그의 손을 바꿔 잡아 그대로 내 뺨에 가져다 댔다.
“조금 전의 우리 대화. 평범한 연인이 하는 것 같았잖아요.”
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난 늘 그런 걸 바랐던 것 같아요.”
처음부터 평범한 인연은 아니었다. 나는 감방에서 눈을 떴고, 그곳은 결코 평범한 공간은 아니었다.
“평범하길 바랐어요.”
거기다 한 겹씩, 한 겹씩 벗겨지는 나의 정체는 나를 평범함에서 멀리 떼어놓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어서는 이 세계에, 적어도 누군가들에게는 절대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만들었다.
나는 깨달았다.
그럼에도 나는 사랑만은 평범하게 할 수 있길 바랐구나.
적어도 보통 이들처럼 같은 위치에서 누가 누구를 우러러보지도 집착하지도. 그저 나를 나로서 봐주는 사랑을. 평온하고 평화롭게 하기를.
내가 리케도르안에게 사랑 속에 복종을 담지 말아달라 청했던 것은, 나를 위해서이기도 했구나.
리케도르안은 더는 말이 없었다. 그저 내가 하는 양을 물끄러미 보았다. 툭. 툭. 그의 찢어진 옷자락의 단추가 벗겨진다. 이미 몇 개는 풀어내고 또 나머지는 너덜너덜했기에 남아 있는 것은 몇 개 없었다.
그는 뛰어난 검사였다. 타고나길 압도하고 파괴하는 짐승의 힘을 지녔으며, 이곳을 나선 뒤로는 본인의 뼈를 깎는 노력을 더해 대단한 경지에 올랐을 것이다.
이는 지방이라곤 전혀 없이 근육으로 꽉 짜인 아름다운 상체로도 알 수 있었다. 정말이지, 신이 조각한 걸작처럼 황홀하리만치 완벽한 비율을 가진 몸이었다.
신기하게도 그럼에도 그는 눈처럼 새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마치 눈이 내리는 겨울의 나라에서 온 것처럼. 내가 풀어내리는 동안 눈 밑이 발긋 달아오른 시선은 나를 집요하게 담고 있었다. 푸르른 눈동자 속으로 무언의 욕구가 가득했다. 어느새 그의 한쪽 손이 내 다리를 잡고 있었다. 허락을 구하는 말에 나는 가벼이 끄덕였다. 곧이어 옷자락 안쪽으로 들어온 손이 허벅지를 조심스레 스쳤다. 까끌까끌한 손끝이 조금씩 올라와 문신이 있는 곳을 스쳤다.
나는 입술을 꾹 물고 신음을 참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었다.
“잘 들어요, 리케도르안.”
그의 허벅지에 살포시 걸터앉은 채로 입술을 가까이했다. 다리 사이로 잔뜩 성난 분신이 느껴졌다. 치마 속으로 손을 넣는다. 곧 툭 바닥으로 속옷이 떨어졌다. 나는 천천히 눌러앉았다. 살을 파고드는 느낌이 적나라했다.
“흐, 당신을, 절대 죽게 두지 않을 거예요.”
단 한 번도 그리 두겠다 생각한 적 없으나, 말로 뱉으니 더욱 의지가 단단해지는 기분이었다.
“……네. 이아나.”
발밑으로 옷자락이 떨어진다. 내 몸을 감싸고 있던 옷이었다. 리케도르안이 고개를 숙여 내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다 댄다. 날숨이 그대로 솜털을 간지럽혔다.
“하아, 아주 오래전에는. 단 한 번도 살고 싶다, 흐, 생각한 적이 없었어요.”
그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흐르는 대로 몸을 맡겼을 뿐.”
“아! 응, 아! 흐읏.”
촉. 촉. 그는 목선을 따라 길게 입맞춤을 남겼다. 뜨거운 열기가 목을 가득 막은 탓에 내 대답은 흘러나오지 못했다.
“……이곳에서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는요.”
깊은 회한이 남긴 목소리가 점차 멎어 들어간다. 그는 빗장뼈 부근 움푹 파인 곳에 입술을 묻었다. 축축한 혀가 그곳을 적셨다. 커다란 손이 가슴의 정점을 희롱했다.
“하아, 당신의, 평범한 연인이 될게요…….”
“으, 앙, 리, 리케……. 흐으읏!”
“아, 흐, 저도, 이아나와 오래 함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의 고백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나 또한 마냥 손을 놓으려 했던 것은 아니라고. 이토록 촉박했음을 저도 몰랐노라고. 그는 용서를 구하는 한편 달콤한 숨결로 나를 유혹했다.
고였던 열기가 펑 터져나간다. 눈앞이 새하얘지고 발끝이 곱아들었다. 곧 나와 그에게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아래로 뜨거운 것이 느껴졌다. 배를 가득 채우는 감각.
“하아, 당신을 두고 죽지 않을게요.”
고개를 들어 올린 그가 바로 귓결로 다가와 귓바퀴에 대고 속삭였다.
“사랑해요. 이 말조차 마음을 담지 못할 만큼.”
물기를 담긴 숨결은 깊이만큼이나 그의 마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내 생의 무엇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내가 바란다면 세상을 바치겠다는 듯, 깊어진 눈동자는 송곳과도 같았다. 박힐 대로 박혀 더는 빠질 수 없는 가시였다. 나를 꿰뚫듯 붉은 얼굴 속 푸른 눈동자는 이를 알려주고 있었다. 절대로 나 없인 살 수 없다고. 가슴에 푹 박히는 교훈이었다. 그의 입술이 내게 다시 닿는 순간 나는 눈을 감았다.
……당신을 살리는 것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내 가슴에 얼굴을 묻은 리케도르안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나는 그의 머리를 그대로 끌어안았다.
어느새 내 안에 들어온 그의 분신이 다시 크기를 달리했다. 그의 리듬에 맞춰 들썩들썩 움직이며 고개를 내렸다. 뚝, 땀이 떨어진다.
“리케도르안, 읏……. 당신은, 흐 내가 행복하길, 바라요?”
내 안으로 깊이 들어왔던 몸이 잠시 멈칫했다.
“이아나, 흐, 그건……. 너무나 당연한걸요.”
그는 땀방울이 맺힌 내 손을 잡아 그대로 입을 맞췄다.
“어쩌면 내 목숨보다도.”
땀이 맺힌 그 얼굴이 숭고하여, 나는 차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당신이 평온하고 행복하길. 늘 바라고 있어요. 나의 이아나.”
하지 못했던 말은 연기처럼 속으로 빠져나간다.
리케도르안 당신을 살리더라도.
이 세상에서 내가 사라진다면, 당신은 괜찮은 걸까?
***
캄브라캄.
지어진 지 어쩌면 천년을 훨씬 넘을지도 모른다는 감옥은 아주 거대했으며 보통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복잡한 구조를 보유했다. 거기다 아주 오래되었음에도 어느 곳은 낡고 노쇠했으나 또 어느 곳은 금방 지은 것처럼 깨끗한 모습이 신비감과 함께 불길한 공포를 자아냈다.
보통 이들에게 있어 이곳은 악명 높은 수감소로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범죄자들이 가는 곳으로 유명했다는 이야기다.
“으으, 으스스한 느낌이군.”
이는 제국의 가장 유능한 기사단이라 할 수 있는 황제 친위대 ‘듀어블’에게도 다르지 않았다.
“자네는 캄브라캄은 처음이랬지?”
옆에 있던 동료 기사가 한마디 툭 던졌다.
“그렇지. 악명만 높은 곳이니, 올 일이 무에 있겠나?”
“난 두 번째일세.”
“뭐? 자네 범죄자였나?”
황실 친위대 마틴이 동료를 경악한 눈으로 보았다.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수습 기사일 때 한 번 와본 것이네.”
“아, 그러고 보니. 가끔 수습 기사 중에서도 간수로 차출된다고 했나?”
“그래.”
이곳의 간수 대부분이 정식 기사 출신이란 건 기사라면 모두 아는 이야기였다. 다만, 자세히 들어가자면 황실에서 파견한 기사와 이곳의 관리자 발테이즈 후작가 소속이냐의 차이가 있었을 뿐. 이처럼 후작은 수감소 내 무력 집단을 양성할 수 있었고, 이는 황실이 발테이즈에게 허락한 권한이기도 했다.
“여기 말이야, 그 뭐냐. 고대의 힘이 깃들었다는 소문이 있다며? 고대의 힘이면 하나같이 불가사의한 힘들 아닌가? 특히나 여긴 괜히 으스스하단 말일세.”
“그 소문이야 유명하지. 유령이 나온다거나.”
동료가 어깨를 으쓱했다.
“왜, 아주 오래전에는 여기가 수감소가 아니라 다른 건물이었단 말도 있지 않은가. 그때 죽은 사람이 있을지도?”
“뭐, 크기부터가 수감소 같지는 않네만.”
그랬다. 여기저기 수감소임을 알리는 철제문이라거나 창살이 보였지만 가끔 보이는 고풍스러운 벽 무늬나 기둥은 기묘한 부조화를 일으켰다. 그 덕에 더 을씨년스럽기도 하였지만. 마틴이 몸서리쳤다.
“그럼 수감소가 아니라 무엇이었단 말인가?”
“글쎄. 나도 잘은 모르는데, 왜 자네도 알다시피 내 동생이 하나에 미쳐 있지 않나?”
“아, 고고학에 푹 빠졌다는 그 여동생?”
“그래. 혼인은 어찌하려고 그러는지…. 아무튼 간에 그 애가 날 붙잡고 설명하는 걸 좋아해. 나더러 이곳이 오래전에는 신전이었다고 하지 않나?”
“신전? 빛의 재단은 제국 남쪽에 몰려있지 않나?”
“그러니까 말일세. 그 이전에 아주 오래전의 고귀한 신을 모셨다고 하는데……. 자네도 알다시피 제국에 빛의 재단이 들어온 지 오래되지 않았잖나.”
“그건 그렇지.”
프란시아가 성녀로 속한 빛의 재단, 제국에서 가장 큰 신전을 떠올린 마틴이 얌전히 수긍했다.
“아주 오래전에는 어떤 숭고한 신을 모셨을지도 모른다는데, 뭐. 자세한 건 모르겠고 내 여동생이 걱정일세, 하라는 연애는 안 하고 이런 것에만 관심을 두니, 원.”
“확실히 고민이긴 하겠군.”
두 기사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실 마틴은 이 어둑한 풍경을 보며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런데 말일세, 황제 폐하께서는.”
어두운 밤, 너무나도 넓어 어쩔 수 없이 잘게 찢어져 맡게 된 드넓은 구역, 오래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잠들었을 죄수들. 적어도 이곳에는 두 사람만 있다는 걸 알기에 말이 흘러나왔다.
“……자네가 보기엔 괜찮으신 것 같은가?”
“뭐? 미친! 이 사람아. 지금 무슨 불충한 소리인가?”
“아니…….”
“가장 친한 동료만 아니었다면 검을 뽑을 수도 있었네. 알고 있나?”
마틴이 얼굴을 굳혔다.
“그러지 말고 생각해보게. 자네도 이 상황이 이상하단 건 알고 있지 않나.”
그가 더없이 진지해지자 동료도 화를 멈췄다. 오히려 정곡을 찔렸단 표정이었다.
“현재 수도에서 황성이 공격받았어. 공작의 군대였다고 하지 않나. 반란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단 소리까지 나오는 상황일세. 그런데 우리는…….”
나라의 심장은 수도다. 그중에서도 황제가 기거하는 황성. 지도적 정치적 및 행정적 거점으로서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한데, 폐하께서는 이 위급한 상황에도 한 곳에만 집착하지 않으신가. 마치…….”
거기까지 이야기했을 때였다. 마틴이 입을 다물었다.
“왜 그러나? 아.”
의아해하던 동료도 금세 표정을 굳히고 빠른 태세로 몸을 돌렸다. 어둑한 복도, 분명 아무것도 없던 곳이었으나 곧 선명한 발소리가 들렸다. 먼 곳에서 뛰어오는 듯한 다급한 소리였다.
“간수!”
이윽고 그들 앞으로 뛰어온 사람은 중년의 남성이었다. 거기다 익숙한 죄수복을 걸치고 있었다.
‘죄수?’
마틴이 의아한 마음을 버리지 못하며 경계했다.
“아니, 간수가 아니군. 기사요?”
마틴은 죄수의 말투를 듣고 곧바로 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귀족 죄수군. 얼마 전까지 중앙동에 수감되었던 이들이 그들이 감시하는 동으로 이동해왔다.
귀족 죄수의 경우 다른 죄수들과는 취급이 달랐다. 이 중에는 밤에 자유로이 화장실을 다녀오는 놀라운 조건 또한 있었는데, 이는 감시 인원이 적절하지 못한 이 상황에서 대단한 자유를 준 것이기도 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이미 그들이 귀족 죄수의 신원을 모두 파악했을뿐더러 특히 그들 중에서도 이런 자유를 누리는 건 출소를 얼마 두지 않은 죄수뿐이었다. 달려온 죄수는 자신이 달린 상황을 빠르게 설명했다.
“나는 팔라디스 남작이요. 아 글쎄, 내가 소피가 급해 황급히 나서는데…….”
그의 표정은 다급했고 상당히 놀란 얼굴처럼 보였다. 사정을 모두 들은 마틴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수상한 사람을 보았다고?”
죄수가 보았다는 누군가의 인상착의를 듣자 하니, 간수도 이곳에 파견된 황제 친위대 및 황실 기사단도 아니었다.
“아 글쎄, 여성이랑 남성이었다니까?”
더군다나 한 사람은 여성이라니. 마틴은 기사단 내 여성 기사를 떠올렸지만 일치하는 이가 없었다.
무엇보다 이쪽 건물에 파견된 기사 중에 여성 기사는 없었다. 들을수록 황제가 일갈한 이와 비슷하였다. 마틴의 동료는 그 즉시 황제에게로 보고했다.
잠시 후, 죄수는 황제 앞으로 인도되었다. 기사들의 뒤를 걸으며 죄수, 팔라디스 남작은 고개를 숙였다.
‘여기까지는 잘 되었는데, 말이지. 당연한 일이지만.’
사실 팔라디스 남작으로 할 것 같으면 앞서 설명되었듯이 출소를 얼마 남지 않은 죄수였다. 그에겐 남을 속이는 일이 무엇보다 쉬웠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러한 죄목으로 옥살이를 하는 죄수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는 벌써 세 번째 수감생활이었다. 몇 년간 들락날락하기도 세 번째. 이어 세 번째 출소를 앞둔 참이다. 어찌된 게 출소를 앞두고 캄브라캄 상황이 영 이상하다 싶더니, 그는 몇 시간 전에야 왜 그러한지 이유를 알았다.
‘허허, 그리운 친구가 이런 큰 건을 물어올 줄이야.’
죄수 팔라디스 남작의 범죄는 ‘사기죄’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사기를 치는 사람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에 해당한다. 생존을 위해서인가, 돈을 위해서인가. 팔라디스 남작은 둘 중 어느 쪽도 아니었다. 왜냐, 그는 첫 번째 사기로 무시무시한 돈을 벌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평생 먹고살아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의 돈을.
그런 그가 왜 다시 이 감옥에 수감되었느냐, 그건 바로 그는 남을 속이는 그 행위에 중독되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도박중독과 다르지 않았다. 누군가를 속여 넘어가는 순간의 희열과 기쁨, 행복. 이미 그 맛을 들여 발을 뻗은 자는 돌아갈 수 없다는 점에서 마약 중독과 아주 비슷했다.
그렇기에 한때 그의 어린 죄수 친구는 말했다.
<아저씨는, 사기로 망하겠어요.>
분홍빛 머리카락이 유달리 눈에 띄던 죄수, 자신이 얼마나 눈에 띄는 외모인지도 모른 채 열렬한 관심과 시선에도 관심 없이 모든 것에 무심하기만 하던 얼굴.
그는 경험상 이런 인상의 얼굴이 때로 특정 사람을 미치게 할 수 있단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훗날 사교계에서 들릴 소문을 기대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 무심한 친구는 때로 재미난 소리를 많이 했다.
<아저씨가 대가 없이 좋은 얘기를 할 때는 사기를 칠 때뿐이니까.>
이렇게 한 번씩 눈을 번뜩이며 영특한 소리를 했지. 그런 이가 갑작스레 무려 황제에게 쫓기는 고귀한 이로 나타나 말했다. 안녕, 아저씨. 여전히 무심하면서도 퍽 친근한 말투로.
<아직도 사기, 좋아해요?>
물론이었다. 팔라디스 남작은 한때 이 지루한 감옥에서 무료함을 잊게 해준 그녀의 재등장이 반가웠다.
<그럼 목숨 걸고 크게 한탕 해보실래요?>
그녀가 어째서 수감실 벽 하나를 허물고 나타났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감방 동기는 마침 무료하고 허기진 그의 나쁜 중독을 채워줄 일을 알려주었으니까.
“고개를 들라.”
자칫 실패한다면 그의 목이 어찌 될지 몰랐다. 가짜 동화를 팔 때 그를 업신여기던 대귀족들을 속여넘길 때와 상황이 전혀 달랐다. 그럼에도 팔라디스 남작은 받아들였다. 일단 잘만 넘긴다면 그렇게까지 위험할 가능성은 낮다는 점과, 그가 빠져나갈 구멍 정도는 충분히 존재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사기를 칠 때에는 너무 당당해서도 안 된다. 적어도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말이다.
적절한 공포와 떨림이 오히려 신빙성을 높여줄 때였다. 팔라디스 남작의 이야기가 끝나자 고귀한 황제가 입술을 비틀었다.
“……그 말이 실로 참말인가?”
제국에서 성황으로 소문이 자자하던 황제의 시선은 생각보다 더 음습하고 어두웠다. 팔라디스 남작은 본능적으로 떨리는 몸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아이고, 예! 제가 분명 들었습니다, 세상에, 폐, 폐하.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은…… 캄브라캄 가장 동쪽으로 향한다고 하였습니다!”
캄브라캄 동쪽 끝, 그곳은 악질 중에서도 가장 악질 죄수를 가둬두는 곳. 그리고 그 꼭대기에는 총 간수 관리장의 감시실이 있었다.
그 감시실에는 이 감방 내의 마법진을 관리하는 마법진이 하나 있다. 팔라디스 남작은 여기까지 몰랐으나 이아나를 비롯한 르나그는 이것이 황제에게 좋은 미끼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 당장, 모든 기사를 소집해라!”
끝내, 떨어진 황제의 명을 들으며 팔라디스 남작은 고요히 생각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나, 어린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