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70/87)

***

“언니. 괜찮아?”

프란시아는 살금살금 걸으면서 연신 내 얼굴을 쳐다보기 바빴다.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머리를 귀 뒤로 넘기는 척하며 혹은 옷자락을 정리하는 척하며 눈을 굴리는 모습은 오래전 도뮬릿 저택에서의 어린 소녀를 떠올리게 했다.

보통 때 같았다면 빙긋 웃어주었을 나는 힘겹게, 억지로 입을 끌어올렸다. 겉으로는 엉망인 속이 드러나지 않게 웃었다.

“응. 괜찮아.”

나는 아무런 설명도 이유도 붙이지 않았다. 프란시아는 이런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도리어 그녀는 무언가 짐작한 것이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흑장미, 그 개새, 아니. 그놈이 무슨 수작을 부린 거지? 또 그놈인 거지?”

내가 어째서 눈물을 뚝뚝 흘린 것인지 사정을 말하는 대신 3일간 그동안에 있었던 일은 털어놓은 뒤였다. 리케도르안, 체이서와 함께 이곳으로 이동한 것까지 말이다.

“그놈이 아닐 리가 없지.”

프란시아가 이로 엄지를 꽉꽉 깨물었다. 고민에 잠기거나 초조할 때 나오는 그녀의 버릇이었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정말 거지 같은 경우네. 황제가 적인 상황에 그놈까지 여기까지 나타나다니.”

프란시아는 내 앞에서 최대한 말을 곱게 쓰려 노력했던 모양이지만 흥분하며 실패한 것 같았다.

나도 프란시아에게 간단히 이곳 사정을 전달받았다. 본래 프란시아와 르나그는 각각 다른 길을 이용해 캄브라캄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리고 무사히 만나는 데는 성공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황제가 기사단을 이끌고 이곳에 난입했다고. 그때의 황제는 정말이지 미친 사람 같아 보였다고 한다.

이미 장미 제전이 시작할 때 황제의 참여 선언을 들은 두 사람은 결코 황제가 곱게 보이지 않았던 차에, 황제가 ‘푸른 장미의 부탁으로 이곳에 왔다.’라고 한 말에 더욱 의심을 굳혔다고 한다. 내가 그런 말을 했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두 사람은 황제의 명에 따라 이곳을 지키는 척하며 몰래 감시 체계를 파악하는 데 주력했으며, 그러던 와중에 내가 나타난 것이고 지금이었다.

“황제는 흑장미가 언니를 해치려고 이곳으로 달려올 거라 했어. 그러니 우리가 함께 지켜야 한다고 말이지. 그놈이 공동의 적이라나.”

싸늘하게 가라앉은 프란시아의 눈에는 황제를 향한 존경은 찾아볼 수 없었다.

“웃기지도 않지. 본인도 적인 주제에.”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걷는 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프란시아가 적절하게 인적이 드문 길로 걷는 덕분이었다.

이미 중앙동 귀족 죄수 전원을 다른 동으로 옮긴 지 오래라고 한다. 이를 보면 황제 또한 이 캄브라캄 지하에 있는 동굴에 대해 아는 듯하지만.

‘모를 리가 없지.’

나는 프란시아의 말을 들으며 마음을 다스렸다. 동요하지 않기 위해 얼굴을 몇 번이고 쓸어내렸다. 물론 이런다고 동요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여전히 마음은 쉼 없이 울렁거렸다.

눈을 꾹 감았다.

내가 있던 곳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많았다. 죽었다가 살아나 책 속으로 들어가는 이야기. 다른 세계에서 환생하는 이야기.

그리고 어느 날 눈을 떴더니, 내가 읽었던 책 속이었던 이야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주인공들은 무리 없이 그 세계에 적응했다. 그들은 때로 고아였고, 때로 교통사고로 죽었고, 때로는 병으로 죽었다. 마치 작가가 주인공에게 미련을 가지지 않게 배려해준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야속하게도 너무나 행복하게 살다가 갑자기 방랑자가 되었고, 그리움을 5년간 잊고 살았다.

수없이 많은 이야기 속에 그리움을 포기하지 못한 주인공은 그리움에 매몰되었다. 이상한 나라를 모험한 앨리스가 아니라 도로시로서 따뜻한 집으로 돌아가기를 염원했다.

이제, 도로시가 된 나는 우습게도 구두를 부딪치길 망설이고 있었다.

기억을 되찾은 순간에는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것이 비통할 정도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언니?”

프란시아가 걸음을 멈췄다. 더는 걷지 않고, 멈춰선 내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인다.

내가 돌아가고자 마음먹는다면 이들은, 맹목적으로 나를 따르는 내 장미는, 내 장미들은.

프란시아의 어여쁜 낯으로 염려가 스쳤다. 나는 괜찮다는 듯이 웃어주었다.

“여기 어딘가에 리케도르안도 함께 이동했을 거야. 꼭 찾아야 해.”

“대공이라면 문제없을 텐데. 무슨 문제 있어?”

“……리케도르안의 몸 상태가 이상해. 열이 끓었어.”

지금은 추억이 만든 해일에 파묻힐 때가 아니었다. 억지로 돌을 만들어 꾹꾹 눌렀다.

“열이? 그럴 리가 없는데.”

프란시아가 비스듬히 고개를 꺾은 채로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그 사람, 평범한 병으로는 꿈쩍도 안 할 몸이야. 웬만한 중상을 입어도 빠르게 나을걸?”

리케도르안을 설명하는 프란시아의 목소리는 산뜻하기만 했다. 그녀는 그를 얄미워하기는 해도 믿음은 있는 것 같았다.

“그건.”

나는 거기에 대꾸하려다 말고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푸딩이가 무어라 말을 하려 했다. 분명 이동하기 직전에 나를 불렀다.

‘푸딩.’

속으로 한참을 푸딩아, 불렀지만 답이 없었다.

프란시아는 일단 르나그와 합류하자며 나를 이끌었다. 내 표정에서 심각함을 눈치챈 듯 그녀의 걸음은 조금 전보다 더 빨랐다.

한참을 걷는데, 돌연 속에서 작게 낑낑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인간…….

푸딩이었다. 나는 잰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얼른 답변했다.

‘무슨 일이야, 아까 무슨 말 하려 했어? 왜 죽어가는 목소리야. 아직 회복 중이라 그래?’

나치고는 말이 많았다. 왜일까, 이유 모를 불안함이 덮친 탓이었다. 항상 이런 기분이 들 때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는데……. 쿵쿵. 심장이 엇박자로 뛰는 것 같았다.

-인간, 너는 알아야 할 것 같다…… 냥.

‘그러니까 뭐를.’

-금제가 풀렸어. 그가 죽어가는 거다, 냥.

이상했다. 푸딩은 회복을 하는 중인 수호신치고는 목소리에 지나치게 힘이 없었다.

-풀릴 정도로 위독한 거다 냥…….

‘뭐가?’

알 것 같음에도 물었다. 묻지 않고서는 몸이 파르르 떨릴 것 같았으니까. 초조한 내 마음에 화답하듯 정답이 흘러나왔다.

-붉은 장미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 냥.

이번에야말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나를 부르는 프란시아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게 언젠데?’

이윽고 한 번의 침묵 끝에 어린 수호신의 무겁디무거운 소리가 가슴에 짙게 울려 퍼졌다.

-……오늘이다, 냥.

쿵. 가슴에 거대한 돌이 떨어진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충격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순간엔 쉼 없이 나를 흩트려 놓던 전 세계의 기억마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아니, 어떠한 말도 머릿속에 꾸려지지 않았다. 죽어? 누가? 푸딩이는 죽는다 언급하지 않았지만 결국엔 같은 소리였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떨림을 참아내려 꾹 다물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언니? 언니!”

때마침 프란시아가 내 어깨를 흔들었다. 프란시아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으로 얼룩져 있었다.

입을 뻐끔거렸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이렇게 흔들릴 때가 아니야. 나는 이를 악 다물었다. 커다란 충격이 남아 있었지만 동시에 생각할 틈이 생겼다. 왜, 어째서 갑자기 수명이 다된 것인가? 분명히 마지막으로 들었던 일자는 한참이나 남아 있었는데!

-인간…… 그건…… 이유는 알 수 없다, 냥.

푸딩이는 자신조차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했다. 그저 어느 날부터 갑자기 급속도로 그의 생명이 꺼져가는 속도가 빨라졌다고.

금제가 걸려 말할 수 없었으나 그가 약해져 풀렸단 푸딩이의 설명은 눈앞을 아찔하게 했다. 붉은 장미에게 수명이란 곧 생명이자 힘의 근원이었다. 혹시 나를 구하려다 지나치게 힘을 쓴 건 아닐까? 눈을 감았다. 원망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왜, 당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거예요?’

아프고 아리다.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았으며, 상처에 모래를 뿌린 것처럼 쓰라리고 묵직한 둔통이 함께 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곧 가라앉고 말았다. 그가 말하지 않은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왜였나. 내가 바빠 보이니까, 신경 쓰지 않길 바라서?

아니다. 사실은 잘은 모르겠다. 이는 곧 그를 말 못 하게 만든 원인이 나라는 것, 나에 대한 자책으로 변했다. 그러나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고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니, 이건 누구의 탓도 아니다. 탓을 찾는다면…….

리케도르안의 몸을 이따위로 만들어놓은 기형적인 이 세계와 사람의 운명을 폭군처럼 멋대로 휘두르는 이 힘에 있는 거다. 갈 곳 잃은 원망이 이정표를 찾자, 그대로 몰아닥쳤다.

“언니…….”

프란시아는 내 어깨를 붙잡은 채로 입술을 달싹였다. 할 말을 찾으려 했으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어깨 위로 올려진 손을 잡았다.

“프란시아. 아무래도. 큰일이 일어난 것 같아.”

나는 내 마음속에 일어난 재난을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차마 직설적인 말이 나오지 않았으니까. 하나 설명해야 했다. 끝내 튀어나온 것은 하고 싶지 않았던 직설적인 한 마디였다.

“리케도르안이…… 죽을 것 같아.”

프란시아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어? 죽어? 누가? 대공이?”

그녀는 말도 안 된다는 얼굴이었다. 거세게 내젓는 고개가 부정을 표했다.

“말도 안 돼. 죽으려 해도 그러기 어려운 사람이야! 왜? 갑자기?”

팔다리라도 잘렸냐며, 프란시아는 그 정도는 자신이 고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차라리 그랬다면 좋을까마는. 나는 빠르게 상황을 설명했다. 최대한 간결하고 간단하게.

모든 이야기를 들은 프란시아는 입을 벌린 채, 아무런 말도 못 했다. 내가 그랬듯 말을 잊은 듯했다. 그녀는 곧 표정을 단단하게 굳혔다.

“일단, 발테이즈 후작과 합류하자. 언니도 알겠지만 노란 장미가 가진 능력은 요새화야. 이 캄브라캄 구조를 전부 꿰고 있어. 대공 성격 상 죽어간다고 해도 절대 황실 기사들에게 잡히진 않았을 거야. 죽어도 언니에게 피해 주긴 싫을 테니까.”

프란시아가 손끝을 잘근잘근 깨물며 말했다. 나 또한 동의하는 바였다.

“그래, 얼른 가자.”

그렇지 않아도 르나그와 합류 지점이 머지않았다고 했다. 프란시아와 부지런히 걸어 합류 장소에 도착했다.

“후작.”

도착한 공간은 감방 한쪽 텅 빈 공동이었다. 이미 죄수들은 다른 곳으로 보냈다더니 지나온 수감실은 모두 비어 있었다.

평소에는 간수들이 한담을 나누는 공간이었는데……. 프란시아가 르나그를 불렀지만 사실 이곳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프란시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벽 이곳저곳을 두드리더니, 곧이어 벽돌 하나를 쑥 빼냈다. 묵직해 보이는 돌이었으나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들고 있었다.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스르륵 벽이 돌아갔다.

노란 기운을 본 것 같았다.

그리고 활짝 열린 공간 앞으로 낯익은 얼굴이 드러났다. 하아, 하아. 갈색 머리를 아무렇게나 흩트린 채로 숨을 몰아쉬는 이, 르나그였다.

“이아나 양……!”

그는 나를 보자마자 성큼 다가와 내 손을 잡아당겼다. 어어, 할 틈도 없이 공간으로 끌려 들어갔다. 쿵. 뒤로 문이 닫히고, 프란시아의 작은 투덜거림이 들렸다.

“문 좀 조용하게 닫을 수 없어?”

나는 프란시아에게 시선을 주는 대신 앞을 응시했다. 어둠이 자욱하게 깔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차차 눈에 익어 실루엣이 보였다. 르나그는 손등에 제 이마를 가져다 댄 채로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잘못되신 줄 알았습니다.”

그가 끊어질 듯 작게 말했다. 그의 커다란 어깨가 쉴 틈 없이 오르락했다 다시 내려왔다.

“황제는 갑작스럽게 나타나 당신의 청으로 참여한 것이라, 이곳에 나타난 것도 당신의 뜻이라 하는데…… 믿을 수가 없고. 당신께선 사흘간 전혀 연락이 되지 않고 닿을 수단조차 없으니.”

빛이 한줄기 새어 들어왔다.

“그런 능력조차 없는 제가 미련하고 한심하게 느껴졌습니다.”

반대편 문이 저절로 끼익 열리며 보이는 횃불의 빛이었다. 그리고 이는 눈물과 땀으로 얼룩진 반쪽 얼굴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거기다 당신과 함께 해야 할 붉은 장미가 돌연 기절한 채로 이곳에 나타나, 제가 정말 얼마나…….”

나직하지만 차분하게 울음을 참는 목소리, 애틋함에 동요하다 말고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대로 르나그의 손을 휙 잡아당겼다. 절로 손가락끼리 깍지가 끼워졌다.

“잠깐만요, 르나그. 뭐라구요? 리케도르안이 여기 함께 나타났어요? 어디로요?”

다급하게 묻다 말고 멈칫했다. 느릿하게 깜빡이는 금색 눈동자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깍지를 끼지 않은 손가락을 들어 천천히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미안해요. 당신의 걱정을 결코 가벼이 느낀 건 아니에요. 다만 이곳에 오며 체이서를 만난 데다 리케도르안의 상태가…….”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다급히 말했다.

“정말로 좋지 않아요. 위험할 정도로요. 어쩌면… 죽을지도 몰라요.”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흑장미도 이곳에 함께 나타났지요?”

르나그는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리케도르안이 알려준 건가요?”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그는 조금 전에야 막 눈을 떴습니다. 이아나 양을 모시러 가기 바로 직전이겠군요.”

그 말인즉 수 분 전까지도 기절해 있었단 말이다. 역시나 몸 상태가 최악이구나. 다시 한번 깨닫게 된 나는 초조한 기분을 되새겼다.

“체이서가 온 건 어떻게 아셨나요? 혹시 마주쳤어요?”

“아닙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기회가 없어 제 능력을 제대로 알려드리지 못했군요. 저는 이 감옥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뭐든 알 수 있습니다.”

르나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빨랐다. 내 표정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낀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설명했다.

“정확하게는 어느 한 땅을 저만의 요새로, ‘요새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지요. 제가 요새로 지정한 건물에 공간을 만들 수 있으며 어디로든 이동 가능합니다. 단 한 사람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한 능력이니까요.”

르나그의 한 손에서는 어느새 나타난 그의 수호신 아줄르가 칭칭 감겨 있었다.

“제 수호신은 어떤 무기로도 변할 수 있습니다만, 본래 기본 형태는 방패입니다.”

“그럼 활은…….”

“오래 전 배신자 소리를 들은 뒤로부터 바뀐 것이지요. 방패를 자처할 자격이 없다고 말입니다.”

독과 방패, 노란 장미 가문의 상징을 언급한 르나그는 이는 공격의 수단뿐 아니라 지키는 데도 유용하다 일렀다.

“더는 설명할 시간이 없군요. 이쪽입니다, 이아나.”

설명은 짧았고, 르나그는 얼른 나를 다른 방으로 인도했다.

걸으며 르나그는 이곳은 그가 특별히 만든 공간으로, 캄브라캄 내에서도 그의 최측근이 아니면 모르는 공간이라 일렀다. 걸음을 디딜수록 무언가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말로 일일이 모두 표현할 수 없지만 반갑고 애틋한 기분, 이런 기분을 일으키는 기운은…….

내 걸음이 빨라졌다. 휘청거리는 내 팔을 양쪽에서 붙잡아주었다.

“조심하십시오.”

“조심해, 언니! 급한 건 알지만 천천히. 응?”

각각 내 팔을 하나씩 잡은 르나그와 프란시아가 한마디씩 말했다. 나는 끄덕이고는 다시 걸었다. 이윽고 또 한 번 문이 열리며 열린 틈 사이로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고작해야 수십여 분 보지 못한 것뿐인데, 마음이 마구 울렁거렸다. 내게 이러한 기분을 이끄는 이는 단연 한 사람밖에 없었다. 앉아 있던 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감옥에서 나온 그대로 너덜너덜한 셔츠를 걸친 리케도르안이었다.

“이아나!”

하나 평소와 다르게 그보다 내가 더 빨랐다. 나는 성큼 걸어가 그에게 안기는 대신……. 덥석. 그의 얼굴을 붙잡았다.

“이, 이아나?”

순식간에 뺨을 붙잡힌 리케도르안은 눈을 깜빡이면서도 순순하게 고개를 숙여주었다. 내가 불편하지 않도록. 그 모습에 가슴이 쿵 떨어지며 손끝이 파르르 떨렸지만 오히려 손에 힘을 주었다.

울지 않을 거다. 끝날 때까지는 끝이 아니니까.

“누가, 이렇게 나오래요.”

난 숨을 삼켰다.

“누가……. 이렇게 멋대로 굴라 했어요!”

리케도르안은 화들짝 놀랐다. 그는 영문을 모르는 얼굴이었다.

“저, 이아나. 무슨…… 일이 있었나요? 혹시 조금 전에 제가 쓰러졌던 것 때문이라면 미안해요. 아니. 걱정시켜서 미안해요. 미처 몸 관리가 되지 않아서……. 피곤해서 그랬나 봐요.”

수줍은 듯 푸르른 하늘처럼 맑게 웃는 얼굴과 그의 말에 기가 막혔다. 아직도 들키지 않은 것이라 생각 하는 건가?

“지금 붉은 장미가 피로를 느낀다는 말을 믿으란 얘기에요?”

리케도르안이 멈칫했다. 그가 무어라 변명하려 했으나 그보다 내 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자리를 가로챘다.

“그럴 리가 있나요. 붉은 장미가 피로하다니. 이 무슨 개소리가 따로 있나. 안 그래요, 노란 장미?”

“당신의 말에 정답게 대꾸하고 싶진 않습니다만, 그건 그렇군요.”

“그죠? 참신한 개소리였어요. 짝짝짝.”

프란시아가 입으로 짝짝짝, 박수 소리를 내자, 리케도르안의 낯으로 찡그림과 함께 난감한 빛이 돌았다. 이와 함께 나는 리케도르안이 생각보다 더 연기에 능할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러면 어떻단 말인가.

“당신,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죠? 사실대로 불어요. 그렇잖아요.”

이와 동시에 웃고 있던 리케도르안의 어깨가 그대로 굳었다.

“더는 거짓말은 통하지 않아요.”

놀란 건 리케도르안뿐만 아니었는지 르나그가 무어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 프란시아가 설명하는 소리도.

“왜 말 안 했어요?”

그들의 말을 흘러내며, 나는 오로지 리케도르안만을 응시했다. 한참이나 날 보던 리케도르안이 입술을 달싹였다. 마침내 그에게서 무어라 흘러나올 때, 나는 손을 들어 올렸다.

“아니, 말하지 말아요.”

내 손은 리케도르안의 입술을 막았다. 그대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야기가 길어질 테니까.”

그의 이유가 어찌 됐든 우리의 이야기는 길어질 것이다. 원망이 없진 않다. 그러나 무엇이 되었던 간에 이 남자의 모든 행동의 근원이 ‘나’라는 것에는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결심하고 입술을 떼어냈다.

“당신을 죽게 두지 않아.”

또박또박, 한마디씩 뱉어냈다.

“절대로.”

반드시 지켜내리라. 시선이 잠시 뒤로 향했다가 다시 리케도르안에게로 돌아왔다.

“나만 믿어요.”

직접 움직이리라. 어느 누구도 잃지 않게. 그 누구도 다치지 않게. 동시에 다짐했다.

“이 상황, 내가 다 부숴버릴 테니까.”

이 모든 건, 내 손으로 직접 끝내겠노라고.

4장. 장미의 진심

어떤 일이건 간에 무작정 앞만 보고 진행할 수는 없었다. 이는 당장 죽을지 모를 일 또한 마찬가지였다.

섶을 지고 불 앞에 뛰어들어 봐야 불나방이 될 뿐이다. 마라톤에서도 일부러 속도와 페이스를 조정하는 시간이 있듯 우리 또한 정비를 가졌다. 물론 길게 가질 수는 없지만, 한동안 떨어져 있던 우리에겐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푸딩이에게 재차 확인했어요.”

간단하게 꾸려진 회의, 회의의 구성원은 리케도르안, 프란시아, 르나그를 포함한 프란시아와 르나그의 보좌 겸 수하들이었다. 특히나 르나그의 수하 중에는 낯익은 얼굴도 있었는데, 감방의 간수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 또한 내 얼굴을 알아본 기색이었으나 언질 받은 게 있는지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리케도르안에게 남은 시간은 오늘, 정확하게는 하루예요. 그러니까 오늘 밤이 지나고 내일 밤.”

이미 프란시아와 르나그가 믿을 수 있는 이들로만 꾸린 참이었다.

“내일 밤이 끝이라는 것이죠.”

리케도르안 당사자치고는 너무나 태연한 얼굴이었다. 푸딩이에게 듣기로 죽음이 머지않았던 건 알아도 언제인지는 몰랐을 거라 했는데. 나는 속에서 끓는 말을 꾹꾹 참으며 좌중을 돌아보았다.

“저흰 어떻게든 이 지하로 가야 해요.”

도뮬릿 저택에서 보았던 장미와 관련한 주술 문양들. 그곳에 푸딩이가 봉인되어 있었고 이것의 원본으로 추정되는 것이 이곳 지하에 있었다.

이뿐이 아니라도 온몸의 감각이 본능적으로 그곳에 가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어쩌면 내 안에 깃든 푸른 장미 수호신이 속삭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목적지가 정해졌다면 바로 출발하는 게 좋겠으나, 우리에겐 변수가 두 가지 있었다.

황제와 흑장미.

“일단 황제는 기사를 빈틈없이 배치해 감시하고 있습니다.”

바통을 건네받은 르나그가 상황을 설명했다.

“현재 모든 기사들과 간수들은 이아나 양이 나타나는 즉시 상부에 신고하도록 명받았습니다.”

그는 눈짓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기존의 간수들과 함께 행동하나 권한은 그쪽에서 가져간 상태입니다.”

“예를 들어서 눈앞에 제가 나타난다면요?”

“그럼 황실 기사의 명령을 들어야 할 겁니다. 듣지 않으면 반역일 테니까요.”

황제가 각 기사들에게 커다란 권한을 줬다. 이 말인즉 그녀도 나를 잡는 데에 혈안이 되었을 거란 소리다.

“이아나 양의 말처럼 황성이 엉망이 되었다면 당연히 돌아가야 할진대, 황성에 남은 장군에게 맡기고 돌아가지 않는 것만 보아도.”

“정상적이진 않다 이거군요.”

“예, 그렇지요.”

나는 입술을 툭툭 두드렸다. 이미 황제가 제정신이 아니다 못해 완전히 미쳐버렸단 사실은 알고 있다. 그리고 나, 푸른 장미에 대한 집착 또한 대단하단 것도. 가둬뒀던 이가 탈출했으니 여기로 올 거란 것도 알고 있을 거고, 언제 나타날지 몰라 상당히 긴장하고 있을 터다.

‘반대로, 이걸 이용할 수는 없나?’

나는 두드림을 멈추고 고민에 잠겼다. 그러다 말고 눈을 들어 올렸다.

“르나그, 흑장미의 위치는 어때요?”

“똑같습니다.”

르나그가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알려드린 위치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르나그는 이 감방의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알 수 있으나, 다만 체이서의 위치를 알아내는 건 불가능할 수 있다고 하였다.체이서가 힘을 사용해 기척을 숨겨버리면 찾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한데 체이서는 힘을 쓰지 않고 한곳에 조용히 숨어 있었다. 마치 내게 말한 약조를 지키기라도 하듯이.

“계속 주시해주세요. 언제 움직일지 몰라요.”

“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체이서가 이렇게 나온다 한들 의뭉스럽고 가증스럽기만 했다.

“확실히 어떤 수로 뒤통수를 칠지 모르겠군요. 교활한 남자니까요.”

“뭘 남자씩이라고 해줘요? 그냥 그놈이라 해요. 아! 개새끼라 해도 좋겠다.”

프란시아가 손을 교차해 턱을 기대며 배시시 웃었다.

“말만 하면 왈왈. 꼬리치고 사람 등 처먹는 꼴이 아주 딱인데.”

웃음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살벌한 말이었다. 르나그가 잠깐이지만 질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개한테 미안할 노릇이군요.”

르나그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참견할 일은 아닙니다만, 이제 내숭은 완전히 거둬낸 겁니까?”

“어머, 내가 언제 내숭을 보였다고 그러세요.”

프란시아가 웃으며 손을 우아하게 휙휙 저었다.

“난 언제나 이랬는걸.”

물론 프란시아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내가 보아도 프란시아가 말을 조심하는 척이라도 하던 모습을 벗고 과격해졌음을 느꼈으니까.

“그리고 언니는 내가 어떤 모습이어도 날 좋아해 줄 거야.”

그녀의 내부에서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나를 바라보는 색이 다른 눈동자는 전에 없던 확신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물론 그 말은 딱히 틀리지 않았다.

“그건 그래.”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는 순간에 전과 다른 씁쓸함을 느꼈다. 이제는 전처럼 마냥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봐, 우린 이렇게 오래오래 함께 행복하게 살 거라고.”

속이 울렁거린다.

머리를 또 한 번 덮치는 전 세계의 기억을 억지로 밀어냈다. 급한 상황이 만든 공기 덕에 울렁거리는 기분은 금방 가셨다.

“이아나 괜찮아요?”

그러나 오직 내게만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이 공간에 셋이나 있었다. 내 어깨를 잡은 이는 리케도르안이었다.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자기 수명이 단 하루 남았다는 것에는 전혀 동요가 없던 남자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걱정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내 얼굴에 감사했다.

“괜찮아요. 아까 이동하면서 힘을 좀 많이 썼나 봐요.”

“피로하신 겁니까?”

“그건 아니에요. 그냥, 가벼운 현기증?”

이어진 르나그의 질문에 대답하며 나는 리케도르안의 어깨에 머리를 묻었다. 리케도르안의 어깨가 잠시 굳었다가 이내 등을 토닥이는 손이 느껴졌다. 토닥임이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처럼. 나는 리케도르안의 서투름에 다시 한번 미소했다. 갑작스러운 심적 동요가 있었다고 해도 몸에 체득된 버릇은 어디 가지 않는 법이라, 동요가 드러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보다 내게 생각이 있는데요.”

나는 리케도르안의 어깨에 기댄 채로 작게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작았으나 이곳에 있는 이들에겐 충분히 들렸으리라.

“현재 황제가 내게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 잘 알겠어요. 그러니…… 이걸 이용해서, 관심을 다른 곳에 옮겨보면 어때요?”

“미끼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르나그가 기민하게 눈치채고 물었다. 나는 끄덕였다.

“네. 제가 다른 곳에 나타났다고 하는 거죠. 이를테면 이곳이 중앙동이니 서쪽이나 동쪽으로요.”

둘 중 한 곳은 대단한 흉악범이 있는 곳이었고, 다른 하나는 예전에 제이르가 몰래 잠입해있던 곳이었다. 르나그는 이 중 후자라면 잠입할 통로가 있을 거라며 긍정했다.

“하지만 미끼는 누가 하는 건데?”

듣고 있던 프란시아가 의문을 던졌다.

“언니가 갈 수는 없잖아. 저주를 풀어야하니까.”

“그렇지.”

직접 주문을 푸는데, 내 힘이 필요했으므로 내가 빠지는 건 어렵다. 무엇보다 미끼를 던지는 일에 내가 가서야 소용없는 일.

“그럼 우리 중 하나가 갈까? 나나 노란 장미?”

합리적인 말이었으나 나는 단호하게 고갤 저었다.

“아니. 소용없을 거야.”

나는 황제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황제가 정상적인 상태는 아닌데, 머리를 못 쓰는 건 아니야. 오히려 이성적으로 미쳤다고 봐야 해. 나를 협박해서 붙잡았으니까.”

나를 손쉽게 납치할 수 있단 판단을 내리고, 아무렇지 않게 마을을 불태우려 했다. 이는 그전에 내 행동과 미세한 표정을 파악, 그리고 빠른 판단을 내린 결과였다. 황제는 이 망령이 깃들면 제국을 위해 현명한 판단을 내리되, 푸른 장미에 관해서만 집착적으로 변한다고 했다.

“만약 둘 중 한 사람이 미끼로 나타난다면, 바로 함정인 걸 눈치챌 거야.”

이래서야 시간을 끌 수 없다.

“두 사람은 우리와 함께 움직이는 게 나아.”

리케도르안이 언제 다시 쓰러질지 모르니까. 나는 이 말을 삼키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럼 이아나 양, 누가 좋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니면 제 수하나 하얀 장미의 성기사라면 어떻습니까?”

“아니요. 르나그나 프란시아의 최측근도 마찬가지예요.”

나는 리케도르안의 어깨에서 머리를 들었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툭 건드렸다.

“여기선 차라리 일반 간수가 그렇게 말하는 편이 좋은데……. 문제는 여기서 연기해줄 사람은 충성심은 둘째치고, 황제의 앞에서도 제대로 말을 할 줄 알아야 해요.”

“겁먹지 않고 떨지 않아야 한다는 겁니까?”

“아뇨. 겁먹거나 떠는 건 상관없어요. 오히려 자연스러운 모습이니까 괜찮죠. 제 말은 황제를 속일 정도로 능청스럽고…… 시간을 끄는 데도 능한…….”

나는 말을 하며 결론을 내렸다.

“그래. 사기.”

나는 손가락을 부딪쳤다.

“사기를 쳐줄 사람이 필요해요.”

되도록 우리와도 관련 없는 사람일수록 좋다. 모든 설명을 듣던 르나그의 얼굴로 난감한 빛이 어렸다.

“그런 사람이 있을지…….”

르나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번쩍 어떤 생각이 번개가 치듯 스쳐 갔다.

“르나그!”

“예?”

“죄수들을 전부 한곳으로 옮겼다고 했죠?”

황제가 들이닥치며 본래 이곳에 수감 중인 귀족 죄수는 모두 옮겨갔다.

“내가 말하는 사람을 하나 찾아 줄래요? 성은 팔라디스, 남작이에요.”

여기는 캄브라캄, 내가 수감되었던 감방이다. 이 말인즉 어쩌면 현재 감방에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사기에 있어서는 최고를 자부하던 내 어떤 감방 동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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