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똑똑.
물이 떨어진다. 익숙한 소리로 물이 떨어지는 중임을 알았다. 나는 의문을 느꼈다. 이상하네. 보지도 않고 이걸 어떻게 알지? 스스로에게 물은 질문에 대한 답은 곧바로 돌아왔다.
……그거야 무수히 많이 듣던 소리니까.
감방은 아무리 잘 만들어봐야 돌벽이었고 비가 오는 날엔 늘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특히나 지하에 갇혀 있던 리케도르안의 감방은 더욱 심했지. 그런데 잠깐.
‘감방?’
나는 서서히 눈을 떴다. 무의식중에 생각한 것이 틀리지는 않았는지.
“진짜 감방이잖아…….”
익숙한 방의 구조가 보였다. 다만 구조만 익숙했을 뿐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캄브라캄과는 돌의 재질과 창살의 넓이나 모양 등이 달랐다.
그러나 묵직하게 내려온 창살이나 작게 타오르는 횃불, 전체적으로 습윤한 공기까지. 내게 너무나 익숙한 공간이었다.
‘어쨌거나 감방이라는 건데.’
나는 내 손을 내려다보고는 푹 한숨을 쉬었다. 손이 무거웠다. 눈을 떴을 때 그다지 평화로운 일이 기다리진 않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철그렁. 내 손에는 차갑고 묵직한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철컹거리는 쇠사슬은 덤이었다.
“허어.”
나는 혀를 쯧 찼다.
이제는 수갑이라니. 족쇄가 아닌 게 다행인가 싶다가도 아주 감방에다 감금을 풀세트로 경험해본다 싶었다. 일단 수갑이 채워진 양손으로 머리를 크게 쓸어 올렸다.
“……어째 돌고 돌아 다시 감방이냐.”
우선 상태를 점검했다. 가장 걱정했던 푸딩이는 내 안에 잠들어 있었다. 불러도 대답하지 않는 걸로 봐서는 기절했거나 회복 중인 듯했다.
내 품에 무사히 돌아온 것만으로 다행이지만. 그리고 내 수호신 또한 얌전히 잘 있는 듯했다. 다만 이 수갑에 무슨 수를 쓴 것인지 힘이 쉬이 사용되지 않았다.
‘미안해. 너와 만나자마자 고생을 많이 시키네.’
아직 내 수호신과 제대로 된 말도 해보지 못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상황이 휙휙 뒤바뀌는 탓이었다. 내 생각을 들었는지 작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물속에서 듣는 듯 둥둥 울리는 소리는 마음을 편안히 감싸오는 것 같았다.
이게 네 위로구나.
나는 살짝 웃고는 수갑을 찬 손을 꾹 쥐었다.
‘힘을 못 쓰게 만드는 것이 수갑인지. 아니면 이 방 전체인지 모르겠지만.’
마지막으로 보았던 황제의 얼굴을 떠올린바 쉬이 풀리도록 두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 평범하게 묶어두진 않았겠지. 나는 오래전 기억을 떠올리며 한숨을 푹 쉬었다.
“묶이는 건 질색인데.”
“구속은 별로야?”
“당연하지. 그걸 누가 좋…….”
자연스럽게 대답하다 말고 우뚝 멈춰 섰다.
감금, 쇠사슬, 그리고 늘 그 뒤로 익숙하게 들려오던 목소리.
내겐 너무나 익숙하고 낯익은 상황인지라 나도 모르게 대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도뮬릿에서 늘 있던 일이니까.
‘체이서?’
고개를 돌리면 이 황홀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빙긋 웃고 있었다. 나를 보며 기쁘다는 듯 눈을 나른하게 접으며.
“다시 보네. 이아나.”
그러나 그의 상황은 여유롭게 웃을 상황이 되지 못했다.
뚝뚝.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이것의 주인은 바로 그였다. 양손이 벽에 구속된 그의 손끝 아래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금욕적이던 옷차림은 어디 갔는지, 그는 새하얀 셔츠가 반쯤 찢어진 상태로 바지만을 걸친 채 벽에 구속되어 있었다.
서지도 앉지도 못하는 악랄한 형태로 구속된 채 아프지도 않은지 그는 나를 보며 미소를 잃지 않았다.
“나를 보니 통쾌하지 않아?”
“누가.”
나는 눈을 찡그렸다.
“아닌가. 이런 걸 좋아할 줄 알았는데…….”
“쇠사슬에 그렇게 매달리는 게 취향이야?”
“그럴 리가.”
나는 자연히 체이서와 거리를 벌렸다. 친근함? 그런 건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변해버린 황제가 그렇듯이, 저 남자는 ‘적’이다.
“하지만 우리 이아나. 널 보는 건 기분이 좋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바로 옆에 구속된 그의 모습을 훑어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가 그딴 호칭에 동의한다고 했어? 날 부르지 마.”
“그럼 내 이아나?”
내가 눈에 띄게 물러나는 모습을 보았음에도 체이서의 표정엔 변함이 없었다. 나는 무심하게 시선을 흘려내며 고개를 돌렸다.
“마음대로 떠들어. 더는 너랑 말을 섞지도 않을 테니까.”
“이아나.”
머리가 좋은 남자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어서 저기 매달린 건지는 몰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협을 느끼게 하는 남자였다. 한편 이런 상태로도 아무렇지 않게 말을 하는 모습에 기가 차 말이 나오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지만 정말 기쁘다는 건 진심이야.”
체이서가 그렇게 말하는 동시에 귀에 익은 목소리가 한 번 더 들려왔다.
“이아나, 닥치라고 하세요.”
낮지만 청아한 울림을 가진 나의 장미 목소리.
“시선도 눈길도 눈도 주지 말아요.”
고개를 돌리면 창살 너머 마찬가지로 구속된 리케도르안이 보였다.
“리케도르안?”
“네. 빨리 저한테 말해주세요. 저놈도 듣게.”
이쪽은 쇠사슬에 꽁꽁 묶인 채 안개까지 씌워진 채로.
“사랑한다고요.”
불빛이 희미해 거의 실루엣으로 보이는 수준이었지만 똑똑히 알아보았다. 아니, 내가 내 장미의 모습을 못 알아볼 리 없었다. 다행히도 손이 묶였을 뿐 움직임까지 구속되지는 않았다. 거기다 수갑과 연결된 쇠사슬이 길어 창살까지 걸어갈 수 있었다.
“정말 리케도르안이죠?”
“네. 이아나.”
가까이서 보니, 그의 상태가 똑똑히 보였다. 리케도르안 쪽도 그리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온몸이 빈틈없이 쇠사슬로 묶여있는 데다 얼굴에 씌워진 안대 군데군데 피가 묻어 있었다.
“……다쳤어요?”
나는 황급히 창살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어디가 아파요? 얼마나 다친 거예요?”
잔뜩 걱정 어린 내 목소리에 안대 아래로 보이는 붉은 입술이 수줍은 곡선을 그렸다.
“조금요. 아주 조금이요.”
“조금이 아닌 것 같아요.”
“정말 조금이에요.”
리케도르안은 눈이 가려져 있었지만 소리로 내 위치를 정확히 알아본 것 같았다.
“이아나가 걱정해줄 만큼만 다쳤어요.”
“……그게 뭐예요.”
리케도르안이 손을 창살 쪽으로 뻗었다. 쇠사슬 때문에 길게 뻗지는 못했다. 마치 잡아달라는 손이었다.
“아파요, 이아나.”
나는 하, 숨을 쉬며 그의 손을 잡았다. 이미 그의 손은 자잘한 상처투성이였다. 여기 묻은 피가 누구의 피인지는 알 수 없으나…… 누구의 피였든 치열한 싸움을 겪었음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사실 뒤에 있는 체이서에게 묻고 싶은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내게 경고했던 말. 황실을 믿지 마라, 혹시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했던 거냐고. 이렇게 물을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어차피 일어난 일이었다.
“그나저나 왜 당신까지 잡혀 온 거예요?”
리케도르안의 무력은 실로 압도적이었다. 이런 그를 산 채로 잡기란 웬만한 무력을 동원하지 않고는 불가능했을 텐데…….
리케도르안이 잠시 쓴웃음을 지었다.
“어쩔 수가 없었어요. 흑장미와 싸우는 도중에 황제가 나타났는데, 저쪽에서 꼼짝없는 수를 내밀어서…….”
웃는 그를 보자니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설마, 황제가 나를 인질로 내세웠어요?”
“…….”
리케도르안은 답하지 않았지만 이것이 긍정의 의미란 걸 알았다.
“……당신은 나의 유일한 약점이자, 모든 장미의 취약점이니까요.”
리케도르안이 배시시 웃었다.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내 몸은 아깝지 않아요.”
나는 발끈했다.
“아깝지 않아요, 하고 말할 때가 아니잖아요. 나라고 당신이 다치고 아픈 게 달가울 것 같아요?”
“그렇지만…… 이렇게 다시 만났잖아요.”
갈증이 스민 그의 목소리에 나는 그대로 말을 멈췄다.
모든 장미의 취약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릴 뻔했다.
……그렇다는 건 체이서 쪽도 인질 때문에 잡힌 거라는 건가. 이제 와선 도무지 저 남자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젠 이해하기엔 너무 먼 길을 와버렸다.
“그보다 이아나, 들려주지 않을 거예요?”
“……네?”
리케도르안이 혀를 내밀어 입술을 살짝 적셨다.
안대 아래로 보이는 하얀 피부와 그와 대조되는 검붉게 달라붙은 핏자국. 그리고 붉은 입술까지. 이러면 안 되겠지만…… 상황도 잊고 묘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모습이었다. 나는 숨을 삼켰다.
아니, 잠깐만 여기서 이상한 생각하면 내가 정말 쓰레기가 될 것 같아. 나는 수갑으로 얼굴을 툭툭 두드렸다. 정신 차려.
“사랑한다고, 말해주세요. 네?”
“아…….”
“흐음, 이런 식으로 자극을 주는 거라면. 참 색다른데.”
나와 리케도르안만 있는 것 같던 대화에 체이서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나는 그제야 뒤를 흘끗 보았다.
지금까지 왜 침묵을 지킨 것인지는 몰라도……. 체이서가 뚫어질 듯 우리를 응시했다. 나와 마주치자 붉은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모순적인 남자였다. 타인을 해치는 데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으면서. 내 작은 시선 하나에 상처를 받는다는 것이.
나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갑작스러운 응석을 보이는 리케도르안. 그에게 더는 참지 마라고 한 것은 나였다.
이윽고 살짝 웃었다. 내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짓궂네요. 내 리케도르안은.”
체이서가 움찔했다.
나는 리케도르안의 손을 꽉 잡았다. 상처를 피해서 잡았지만 그에게서 미약한 흔들림이 느껴졌다. 혹시 아픈 건가 싶어 손에 힘을 빼자, 오히려 리케도르안의 손가락이 나를 옭아맸다. 마치 놓지 말라고 하는 듯.
“그 말 질리도록 해주겠다고 했잖아요.”
체이서가 들으라는 듯 리케도르안은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나는 더는 체이서, 저 남자를 용서하지 않기로 했다. 이해해보려고도 하지 않을 거다.
“내 리케도르안.”
당신이 지겹도록 부르던 그 호칭은 이미 다른 이에게 줘버린 뒤라고.
“고개 들어요. 움츠리지 않아도 된다고 했잖아요.”
나를 묶고 감금했던 사람을, 수많은 이의 눈에서 피와 눈물을 낸 사람을 이해하고자 하는 건 그들을 향한 기만이었다. 이 남자 스스로 멀리 걸어가 버린 길이다. 더는 나와 교차할 일 없이 아주 멀리.
“당신이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다면 나는 몇 번이고 말할 수 있어요.”
내게 연민마저 앗아간 것은 당신이며, 당신이 만든 결과다.
“사랑해요.”
나는 리케도르안의 손을 들어 올려 기꺼이 입을 맞추었다. 피로 얼룩진 손에서 풀 내음과 진흙 내음 그리고 피가 마구 뒤섞인 냄새가 났다. 나를 지키기 위해 흘렸던 피야. 리케도르안은 손을 빼려는 듯 움찔했지만 저항은 미약했다. 내가 놓기를 바라지 않는 듯이. 이에 부응하듯 나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입술을 옮겼다.
리케도르안이 했던 것처럼 손톱이 갈라진 손 끝에 입을 맞춘다.
“……더러워요, 이아나.”
“전혀요.”
비릿한 피 내음이 입술로 달라붙었다. 그러나 불안해하는 내 장미의 마음을 토닥일 수 있다면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았다.
“당신만을 사랑해요.”
사랑하는 사람이 다치고 엉망이 된 모습은 생각 이상으로 마음을 아프게 하는구나.
“이젠 알겠어요. 사랑이 뭔지.”
리케도르안에게 말을 했으나 이는 체이서에게도 분명히 들리리라. 그러나 비단 이 남자가 들으라 하는 말만이 아닌 진심이기도 했다.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내가 진정 사랑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이 대목에서 고개를 살짝 숙여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다시 말해야겠네요. 사랑이 나를 이렇게 바꿔버릴 줄은 몰랐어요. 이 순간 당신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가 대신 아프고 싶을 정도로 나도 아파요.”
다신 당신이 쇠사슬에 묶이지 않길 바랐다. 그런데 이것이 내 탓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
“내 탓 같아요.”
지금도 손을 뻗어 피를 지워주고 싶은데, 그의 얼굴까지 손이 닿지 않는다. 하나 날 알아챈 것인지 리케도르안이 고개를 숙였다. 심지어 안대를 한 얼굴로 내 손 가까이 다가오더니 오래전 감방 속 짐승 모습처럼 킁킁 냄새를 맡았다.
“아파하지 말아요. 이아나.”
“…어떻게 그런 생각을 안 해요. 마음이 많이 아파요.”
“……당신은 제가 어디에 있든, 그곳을 낙원으로 만들어요.”
“그런 말 말래도. 감방은 당신에게 그다지 좋은 기억이 없는 곳이잖아.”
“그럼에도 지금 여긴 내 천국이에요.”
그는 그러고는 이내 제 뺨을 내 손에 비볐다.
“……당신이 있으니까.”
그와 동시에 목이 졸린듯한 작은 음성이 터져나왔다.
“이아나…….”
나는 뒤로 들려오는 애절한 내 이름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체이서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관심 없었다. 나를 묶고 감금했던 사람을, 수많은 이의 눈에서 피와 눈물을 낸 사람을 이해하고자 하는 건 과거의 나와 아팠던 이들에게 못할 짓이었으니까.
“프란시아와 르나그는요?”
“모르겠어요. 나와 같이 있지 않아서.”
아직 장미 제전이 진행 중이었다. 참여를 외치곤, 각자 영지에서 약속된 지점으로 움직였을 터다.
나는 빠르게 고개를 돌려 창살을 확인했다. 벽이 없는 대신 창살이 자리한지라 바로 옆 방들이 훤히 보인다. 일단 저쪽 반대편 감방은 아무도 없는 것 같고, 불이 희미하긴 해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많다. 마찬가지로 리케도르안 방 너머에도 아무도 없는 듯했고. 우리의 대화에도 반응이 없는 걸로 봐서는 간수도 없다.
‘간수가 없다는 건…… 이 방에 만들어진 장치를 신뢰한다는 건가?’
아마 르나그와 프란시아가 이 감방에 없는 것으로 보아서는 이들은 붙잡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자, 그럼 이젠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 나는 회의적이지만은 않다. 작전은 완전히 어긋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일단, 여기서 벗어나야 할 것 같은데…….”
제전이 끝나기 전까지 캄브라캄으로 가야 한다. 체이서를 의식해 목적지를 말하지 않았다. 체이서가 뒤에서 듣고 있단 걸 알고 있으니까.
“여기서 어떻게 나가죠?”
내가 이렇게 묻는 순간 두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대답했다.
“그건 걱정하지 말…….”
“그건 걱정하지 말아, 이아나.”
리케도르안이 말을 하다 말고 멈칫했다. 그러고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그림같이 미소한 남자가 있었다. 조금 전의 대화를 모두 들었을 텐데도 체이서는 전혀 동요가 없는 기색이었다.
없는 것인지, 모두 갈무리하는 것인진 몰라도.
나는 적어도 후자라고 생각했다. 미처 꺼트리지 못한 감정의 찌꺼기가 얼굴에 덕지덕지 묻어있었으니까.
“왜 그래? 나가야 하는 처지는 똑같잖아? 잠시 동안 악당이랑 손잡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 어때?”
찰랑. 위로 묶인 체이서의 손 위로 굵은 쇠사슬이 미약하게 흔들렸다. 그는 매달린 채로 아찔하게 미소를 지었다. 사로잡힌 악마같이.
횃불 그림자가 진 아래에서 체이서의 붉은 눈동자가 가늘게 휘었다.
“보다시피 내가 쓸모 많은 패잖아. 그렇지?”
너는 날 잘 알고 있잖아, 하고 묻는 듯한 시선이었다.
“난 여길 평화롭게 나가는 방법을 알아. 이아나.”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내게서 눈을 떼어내지 않았다. 끝까지 들어달라는 것처럼.
“나도 오래 갇혀 있으면 안 되는 입장이라서.”
그렇다면 처음부터 붙잡히지 않았다면 될 것 아닌가? 이렇게 묻고 싶었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뭘 믿고 당신과 손을 잡으란 말이야?”
“이런, 이아나. 그건 좀 슬픈 말인데. 사실 네가 날 믿어준 적 있었어? 그랬다면 나야 고마운데……. 그런 적 없잖아?”
“말장난하지 마. 어차피 이곳을 나가면 다시 나를 붙잡을 널 알아.”
“이아나.”
“너와는 함께 안 해. 아무것도.”
나는 단호하게 체이서의 말을 잘랐다.
“더는 날 현혹할 생각 마.”
그제야 체이서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아니, 천천히 미소가 사라진 얼굴은 와그작 금이 간 것처럼 보였다. 체이서가 잠시 말을 잃었다. 곧 다시 입을 뗐다. 그러나 그보다 다른 이가 빨랐다.
“한번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예요.”
나는 깜짝 놀라 리케도르안을 보았다.
“리케도르안?”
내 부름은 그게 진심이냐는 말을 품고 있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리케도르안에게서 나올 거라 생각 못한 말이었으니까.
“계략에 있어서는 제국의 누구라도 따라잡지 못할 남자에요. 특히나… 질 나쁜 계략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죠.”
체이서가 싱긋 웃었다. 언제 표정을 굳혔다는 양.
“본인은 마치 깨끗한 것처럼 말을 하는군. 섭섭한데? 나의 라이벌이라 불리던 대공께서.”
“내가 얼마나 더럽든, 고귀한 손을 잡은 건 이쪽이지.”
“아아. 내 앞에서 선택받은 걸 뽐내보겠다?”
체이서가 부득 이를 갈았다.
“내 이아나와 함께하고 싶지만 이딴 식의 도움은 그다지 달갑지 않은데.”
철그렁. 체이서의 손을 매단 쇠사슬이 거칠게 움직였다.
그의 손끝에서 막 피어나려던 검은 기운이 강제로 치이익 소리와 함께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그와 동시에 체이서의 손목에는 타는 듯한 상흔이 남았다. 그러나 체이서는 아랑곳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대신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내 자존심을 이렇게 부숴 바닥에 깔아줄 작정이라…. 정의의 장미께서 쓰는 수 치고는 저열한 방법 아닌가.”
나는 두 남자의 대화를 듣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리케도르안의 손을 살짝 잡아당겼다.
“리케도르안, 다툴 시간 없어요.”
“……알고 있어요, 이아나. 하지만…….”
리케도르안이 말을 살짝 흐리더니 이내 한숨을 쉬었다.
“저놈이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이유가 있는 걸 압니다. 짜증 나서 당장 치워버리고 싶지만요.”
“이유요?”
“그거, 내가 설명해야겠는데.”
“닥쳐.”
리케도르안은 체이서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하며 말했다. 이를 갈 듯 씹는 음성으로.
“하아, 젠장. 저도 전혀 기쁘지 않아요. 하지만 저쪽과 이쪽의 힘을 합쳐야 나갈 수 있어요. 이아나.”
“힘을 합쳐요? 지금 내가 보는 사람이 리케도르안 당신이 아니라 가짜는 아닌 거죠? 진자 당신이 한 말이에요?”
“…네. 이아나. 믿기지 않겠지만 저예요.”
조금 전에도 그랬지만 리케도르안의 입에서 나온 거라고는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저 또한 지금 당장 제 스스로가 혐오스럽지만.”
리케도르안이 이를 악 물었다.
“…가장 중요한 걸 위해 포기할 줄도 알아요, 전.”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다른 이도 아니고 체이서랑? 리케도르안이 체이서에게 가진 감정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데. 리케도르안의 음성을 듣자 하니 그도 그리 달가운 기분은 아닌 것 같았다.
“대체 어떤 방법이기에 그래요?”
“……이아나. 제 직위가 어떻게 되죠?”
“네? 그거야……. 대공이잖아요?”
“그리고 저쪽의…….”
리케도르안이 막 이렇게 말한 순간이었다.
끼이익.
녹슨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건 문이 열리는 소리다.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 희미한 빛이 보였다. 곧이어 저벅저벅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이아나, 부탁인데 내 옆으로 와주겠어? 옆방의 헐벗은 장미께서는 당장 널 지키지 못할 거야. 응?”
체이서가 낮게 속삭였다. 나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동시에 발걸음이 멈췄다.
“일어나셨습니까?”
낯익은 목소리였다. 어디서 들어봤더라? 하나 나는 기억을 뒤져볼 필요가 없었다. 낯선 방문자가 망토를 내린 순간, 누군지 알아보았으니까.
“당신은…….”
기억하는 것이 맞다면, 그는 황제의 알현실에서 보았던 늙은 사내였다. 비밀스러운 알현을 할 때면 유일하게 자리를 지키던 사람. 그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생각보다 빠르게 일어나셔서 다행입니다.”
“생각보다 빠르게? 제가 얼마나 누워있었는데요?”
“3일입니다.”
나는 움찔했다. ……그렇게 오래 기절해 있었다고? 체감상 얼마 되지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이곳이 황성 내 감옥이라면 아마도 마법을 이용해 빠르게 나를 데려왔겠거니 했을 뿐.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에 혼란을 숨기지 못한 사이, 사내가 얼른 말을 이었다.
“시간이 없으니 빠르게 전달드리겠습니다. 이것은 황제 폐하의 마지막 명입니다.”
“마지막 명이라니, 그게 무슨.”
“온전한 정신이실 때 하달하는 마지막 명이라 하시면 알아들으실 거라 하셨습니다. 이후론 ‘미친 황제’가 될 것이라고.”
나는 숨을 멈췄다. 그 말에 흔들렸기 때문이었다. 미친 황제,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녀의 모습은 그 이름에 딱 걸맞았다. 이내 사내가 내게 서신을 하나 건넸다. 경계를 풀지 않은 채 주춤 그 서신을 받았다. 뒤에서 리케도르안이 가지 말라 말했지만, 위험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 외에 남긴 말씀은 없으신가요?”
“…우려했던 일이 일어날 거라고, 그렇게 전하셨습니다. 영애께선 모두 아실 거라고도.”
두 남자의 부름을 넘긴 채 사내의 한 말을 곱씹었다. 한 가지 결론이 나왔다.
‘……역시 정신을 빼앗긴 거구나, 황제는.’
나는 바스락 내 손에서 구겨지는 편지를 보았다. 천천히 열어보면, 편지 속에 적혀 있는 말은 예상대로였다. 자신에게 한계가 왔으며, 마지막 이성을 다해 이 편지를 남기노라고. 종이 끝에는 약도가 하나 그려져 있었다. 꽤 상세하게 그려진 지도였다.
‘웬 약도지?’
사내는 내가 편지를 읽는 동안에 가만히 자리를 지켜주었다.
“이 수감실을 벗어나면 서쪽으로 쭉 뛰어가십시오.”
내가 모두 읽고 고개를 들기 무섭게 그가 말했다.
“황제 폐하의 마지막 안배가 그곳에 있습니다.”
그는 다시 망토 모자를 뒤집어썼다. 그러고는 미련 없이 뒤로 물러났다. 여기까지가 자신의 일이며 나머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선을 긋는 태도가 느껴졌다.
“종이 마지막에 그려진 약도를 따라가시면 됩니다. 사용 방법은 그곳에 적힌 대로 하시면 되실 겁니다.”
“알겠어요. 이 편지가 사실이라면 거긴…….”
“예. 황제 폐하께서는 당신이 바라는 곳으로 바로 떠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두었습니다.”
목적지는 캄브라캄일 터다.
“조심하십시오, 이미 현재 황제 폐하께서는 그쪽까지 점령하셨으니.”
“네? 잠시만요, 아직!”
나는 물러나는 사내를 황급히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이미 멀어진 사내에게는 닿지 않았고 대신 창살을 붙잡았다.
“장난해요? 여기서는 어떻게 나가라는 건데요?”
황제의 편지는 내가 황실로 잡혀 올 때를 가정하여 이야기했으나 여기엔 감방에서 탈출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
이봐요, 나가야 복도에 갈 거 아냐? 황당했다. 그러나 사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나갔다. 참다못한 내가 소리치는데도 문은 무정히 끼이익 닫혔다.
“잠깐, 잠시만. 야! 허. 미친.”
어처구니가 없었다. 통로가 있으면 뭐 하는가. 당장 쇠사슬도 벗지 못하는데! 웬만해선 흥분도 분노도 크게 느끼지 못하는 편이나 이건 참을 수 없었다. 내가 화를 참지 못하고 창살을 쾅 두드렸을 때였다.
“저, 이아나. 그렇게 화내지 않아도 괜찮아요.”
뒤에서 날 진정시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면 역시나 리케도르안이 내가 있는 방향을 정확히 향하고 있었다. 안대까지 쓴 모습을 보니 울컥 무언가 차올랐다.
“하지만 리케도르안. 지금 그런 말이 나와요?”
가장 강하다는 내가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럼 리케도르안이나 체이서 또한 움직이기 어렵다는 것.
“상황이 이런데!”
당장 밖으로 나가도 모자랄 상황에서 갑갑하게만 느껴졌다. 리케도르안은 이런 나를 청초하고 다정한 음성으로 달래듯 계속 말을 걸었다. 이상하게도 보통은 내가 그를 진정시키는 역할이었는데, 역할이 반대로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순탄한 것도 내가 이렇게 오래 기절한 줄 몰랐을 때 일이다. 우린 반드시 정해진 시간 내에 캄브라캄에 도달해야 했는데!
“당신 말은 언제고 위안이 되지만 리케도르안, 지금만은 괜찮지 않은 것 같아요.”
나는 수갑을 찬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실패해선 안 된단 말이에요. 알잖아요.”
무엇보다 이 작전의 궁극적인 목표는 리케도르안의 수명을 늘리는 것. 이 남자의 생명이 달린 일이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아나. ……제 말은 화를 내지 않아도 이 수감실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거예요.”
“네? 그게 정말이에요?”
“네.”
“그걸 왜 이제 말……. 아니, 흥분한 건 나였죠. 하….”
나는 이마를 짚은 채로 멈칫했다. 그런데 방법이라니? 어떻게? 리케도르안과 체이서를 번갈아 봤다. 한쪽은 온몸이 쇠사슬로 꽉 묶인 데다 안대를 쓰고, 한쪽은 벽에 매달려 있는데? 거기다 나 또한 수갑을 차고 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요?”
“이아나. 제 직위를 알고 있죠?”
“네. 대공이라고, 아까 대답했잖아요?”
리케도르안이 입술을 깨물었다가 거친 숨을 내쉬었다. 일련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은 말을 앞둔 사람처럼 보였다. 마침내 그의 입술 끝에서 작게 말이 이어 나왔다.
“……저쪽의 직위는 어떻게 되죠?”
“저 남자? 그거야…… 공작이죠.”
“그럼 이아나. 질문.”
불쑥 끼어든 건 체이서의 음성이었다.
“과연 황제가 대공과 공작을 얼마나 붙잡아둘 수 있을까? 그것도 황제와 권력을 분립하고 있는 양대 세력의 수장을.”
“뭐?”
“쓰러진 우리를 데려가며, 그것을 본 사람은 몇이나 될까?”
리케도르안이나 체이서나 결코 홀로 움직이지 않았을 둘의 다툼에는 적든 많든 그들의 수하 혹은 기사가 있었을 것이고……. 황제가 두 사람을 붙잡아 가는 것을 보았다?
“벌써 3일이 지났지.”
체이서가 고개를 기울이며 씩 웃었다. 아찔한 미소였다.
“사실 3일씩이나 기다린 건. 네가 잠든 모습을 다시 보지 못할 것 같아서 말이야.”
그 순간 뿌드득, 마찰음이 들렸다. 나는 놀란 눈으로 천장 쪽을 응시했다.
하늘에서 솔솔 먼지와 돌가루가 떨어졌다. 위쪽에 아무렇지 않게 뜯긴 벽이 보였다. 체이서가 그대로 벽을 뜯어버린 것이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아직 저를 구속하는 쇠사슬을 슥 보더니 발로 밟아 꽉 잡아당겼다.
동시에 검푸른 기운이 일어나 쇠가 부식되었다.
“너…….”
“물론 기회를 기다린 것이기도 했지.”
여전히 수갑을 차고 있지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손을 툭 흔든 체이서가 부드러이 미소했다.
“개수작 부리지 마.”
동시에 투두두둑, 무언가가 억지로 찢기고 부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난 얼른 고개를 돌렸다.
쾅!
거대한 굉음과 함께 먼지 바람이 날렸다. 가라앉는 바람 사이로 창살이 쓰러진 것이 보였다.
이어서 바닥으로 쿵, 소리를 내려 떨어진 건 반 토막 난 쇠사슬이었다. 그리고 언제 온 것인지 내 몸을 가로막은 커다란 체구가 보였다. 리케도르안이었다.
“왜 그런 눈으로 보지?”
체이서가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풀풀 흩날리는 흙먼지는 이 순간 팽팽한 긴장감을 대신 표현해주는 것만 같았다.
“붉은 장미, 그대도 이 상황을 예견했잖아?”
체이서가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아주 먼 곳에서 함성이 들렸다. 아스라이 들렸지만 똑똑히 알 수 있었다. 거대한 발소리, 수많은 사람이 움직이는 소리였다.
“그대의 세력, 내 세력. 잠시 동맹 아닌 동맹을 취한 이들이 이곳으로 찾아오겠지, 다름 아닌 나와 그댈 찾기 위해서.”
격식 있는 체이서의 어조는 나른했고 동시에 비꼬고 있었다.
“기다렸던 상황이 찾아온 것뿐이야. 우린 이아나가 바라는 대로 여기서 나갈 수 있어.”
아니, 틀렸다. 내가 나가길 희망했던 상황에 체이서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체이서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적어도 그대와 내가 이곳에서 싸우지 않는다는 전제가 바탕 되어야겠지만. 동의하나?”
“…….”
“싸워 봐야, 내전이 되겠지만. 그럼 황제가 원하는 대로 되겠지.”
그리 말하는 체이서의 옆으로 검은 기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지랑이 같던 기운이 만들어 낸 것은 거대한 재규어와 커다란 새였다.
익히 아는 체이서의 수호신이었다. 라탄과 아퀼라를 바라보며 조용히 숨을 삼켰다. 적으로 보게 되니 공연히 무시무시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모습이었다.
푸딩이는 아직 내 안에 있다. 내 수호신이라도 부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동맹을 제안하는 것치고 무척이나 위협적이니 말이다.
“누가 너와 손을 잡는다고 했지?”
“이런, 그대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 것. 내 말에 동의하는 것 아니었나?”
“아니.”
리케도르안이 살벌한 얼굴로 체이서를 보고는 천천히 눈을 돌렸다. 내게 어떻게 하고 싶으냐고 묻는 듯한 낯이었다.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이런 그의 모습에서 상황도 잊고 생경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분명 체이서는 리케도르안에게 절대 잊을 수 없는 원한을 가진 철천지원수일 텐데.’
그의 얼굴은 더는 내게 맹목적으로 결정을 넘기는 수동적인 시선이 아니었다. 오히려 말 그대로 내게 결정을 맡긴 듯한 표정이었다.
무엇을 말하든 함께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믿음.
내가 조언을 한 것이 그리 먼일이 아닐 텐데 달라진 변화에 가슴이 괜히 시큰거렸다.
당신은 정말, 내가 원하면 무엇이든지 하는구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째서인지 리케도르안과 체이서는 구속한 사슬을 풀었으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무언가 다른 방법이 있는 걸지도 모른다. 이 작은 감방 내에서 싸워 봐야 서로 손해 보는 일이다. 특히나 시간이 촉박한 우리에게 더욱이 불리했다.
“체이서.”
내 입술이 열리고 매끄럽게 흘러나온 부름에 체이서가 잠시지만 움찔했다. 붉은 눈동자 속의 동요를 눈치채고는 슬쩍 눈을 휘었다.
그러고는 시선을 살짝 내렸다. 8초 이상 눈 마주치지 말 것, 이걸 기억하고 있지.
“그렇게 나와 있고 싶어?”
붉은 눈이 흔들릴수록 내게 유리했다. 틈을 보아야 했다. 나는 리케도르안의 찢어진 셔츠 사이로 드러난 가슴을 살짝 쓰다듬다가 눈을 깜빡였다.
“그런데 너와 리케도르안은 손쉽게 쇠사슬을 풀었는데, 왜 난 여전히 능력을 못 쓰는 거야?”
“이아나, 그건…….”
“요령이 없어서야, 내 이아나.”
두 남자가 경쟁이라도 하듯이 한 번에 말했다.
“이아나, 모든 장미는 어린 시절에 능력을 구속하는 도구로 벗어나는 법부터 배워요.”
“어린 후계자들은 납치당하기에 십상이니까 말이지.”
“그런 범죄는 대체로 너희가 저지르는 편이지, 흑장미.”
“아아, 그 말도 맞긴 한데 그렇다고 우리라고 안전한 것도 아니어서 말이지. 지금 봐, 역대 황제가 어디 하루 이틀 미쳤던가? 광증이 도질 때면 장미들을 괴롭혀왔지.”
나는 체이서의 말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그래서 어떻게 벗어난 건데?”
체이서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이내 순순하게 방법을 이야기했다.
“……힘을 수갑에 집중하지 말고 바깥, 표면에 압력을 준다고 생각해.”
체이서가 설명했다. 이 방법이란 생각보다 간단했지만 과연 보통 상황에서 생각하긴 어려운 요령이나 편법에 가까운 것이었다.
‘힘을 바깥에 집중, 부식시키듯이…….’
그러자 아무리 해도 일어나지 않던 힘이 거짓말처럼 공기 중에 맺혔다. 이내 내 수갑에 파지직 금이 가더니, 챙강 부서진다. 반 토막 난 수갑이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수갑이 떨어진 순간에 우리 사이로 긴장감 어린 침묵이 흘렀다.
“이아나, 난 네 적이 아니야.”
마치 뱀이 사람을 유혹하듯 나긋하고 부드러운 음성이 체이서에게서 흘러나온다.
“적어도 지금은.”
그는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 하지?”
체이서의 말대로 당장의 적은 그가 아니나 그렇다고 그가 적이 아닌 것은 아니었다. 등 뒤에 놓으면 반드시 등을 칠 상대.
여기서 멈춰 상대할 수도 없다.
어떡할까.
잠시 손을 잡을 것인가. 말 것인가. 짧은 시간 수많은 생각이 스쳤다. 생각하는 와중에도 체이서에게서는 어떡할 거냐는 시선이 느껴졌다.
이윽고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쿠르르릉!
바닥이 거세게 진동했다. 아니, 바닥이 아니었다. 천장, 위층으로부터 내려온 진동이었다. 위쪽에서 커다란 힘이라도 받은 것인지 천장에서 큰 돌이 떨어진다. 부서진 천장 일부였다.
그것을 시작으로 천장이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렸다.
“이아나!”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리케도르안, 나를 안아요!”
단단한 팔이 내 몸을 감싸는 것과 동시에 휙 시야가 뒤집혔다. 정신 차리면 몸이 절로 이동하고 있었다. 주변 풍경이 휙휙 바뀌었다.
“리케도르안, 문은요?”
“조금 전에 천장이 무너져 내리며 열렸어요.”
먼지 사이로 드러난 문은 열렸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았다. 부서진 수준이었다. 벽이 허물어졌단 소리였다. 이런 상황에서 지하에 머무르는 건 매우 위험한 선택이었다.
먼지바람을 가리려 눈을 가늘게 뜨고 소매로 입을 가렸다. 그러다 말고 손을 내려 치맛자락을 잡고 있는 힘껏 찢어냈다. 푸른 장미의 기운을 빌리니 이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는 잘라낸 천을 리케도르안의 코와 턱을 빙빙 감았다.
화재는 아니지만 먼지를 잔뜩 마셔서 좋을 건 없을 것 같았다. 왜인지 이렇게 해야 할 것 같았으니까. 리케도르안은 인간을 뛰어넘은 능력을 가진 이답게 순식간에 지하를 빠져나왔다. 뒤로 쫓아올 체이서의 행동이 염려되었지만 일단은 길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아나, 길을 알겠어요?”
“……네. 대충 외웠어요.”
복잡한 헤르님 성이나 도뮬릿 저택. 그리고 황성까지 이리저리 거닐어본 것이 도움이 된 건지. 거대한 기둥들이 흔들리는 틈에서도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다.
“콜록, 리케도르안. 혹시 천사 석상이 보여요? 나팔을 든 석상요.”
“저기, 보이는 것 같아요.”
나는 리케도르안에게 안긴 채로 길을 안내했다.
“일직선으로 쭉 달려요. 계속!”
이상하게도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큰 함성이 들렸는데도. 아무래도 이곳을 찾아온 인원은 모두 여길 지나간 뒤인 것 같다. 지하로 가는 길을 찾아내지 못한 걸까? 조금 전에 보니 우리가 나온 문은 벽이 무너진 사이에 있었다.
아마 우리가 있는 곳을 찾기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한참을 달렸을까. 리케도르안에게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어쩐지 나는 그가 난감한 숨을 흘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아나. 그놈이 쫓아오고 있어요.”
누군지는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나는 숨을 작게 내쉬었다.
“어떡할까요?”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역시나. 나는 쇠사슬의 감각과 끌려가는 사람들을 잊지는 못하겠다. 하지만.
“리케도르안, 만약 체이서 그 남자와 손을 잡고 여길 탈출하면 어떨 것 같아요.”
리케도르안은 잠시 말이 없었다. 이런 와중에도 그의 다리는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지금 가장 최선의 선택이자, 기분으로는 어쩔 수 없는 최악의 선택이겠죠.”
리케도르안은 담담하게 감정이 배제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 좋아요. 당신의 뜻이라면.”
“리케도르안.”
“복종이 아니에요, 이아나. 믿음이지.”
나는 숨을 후, 내쉬었다.
“만약 대공으로서 당신이 이 순간에 판단하면 어떤 결정을 내렸을 것 같아요?”
“손을 잡았을 거예요.”
리케도르안이 산뜻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세상엔 100중의 100 모두 이득이 될지라도 손을 잡을 수 없는 상대가 있어요. 제겐 흑장미가 그런 사람이니, 감정에 밀려 잡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만.”
그 순간 커다란 장식장이 넘어지며 우리 앞을 막았다. 리케도르안은 아무렇지 않게 이를 뛰어넘으며 말했다.
“이아나, 계획한 것이 있는 거죠?”
생각한 것이 있어서 물은 것이 아니냔 말이었다. 나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뗐다.
“황제의 편지에는 약도와 함께 그곳에 있는 고대 주술진을 사용하는 방법이 적혀 있었어요.”
그랬다. 황제가 안배해둔 것은 캄브라캄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는 ‘통로’였지만, 이는 평소에 알던 마법진이 아닌 조금 특별한 것이었다.
“이건, 오직 장미만이 사용할 수 있다네요.”
그렇다는 건 체이서 또한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다만…….”
“다만요?”
“끝에 적힌 말이 아리송했어요. 어쩌면 푸른 장미만이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거든요.”
황제는 내게 사용법을 알려주면서 부정확한 정보 또한 함께 주었다. 자신도 이걸 이용해본 적은 없다는 말로. 뒷받침하는 증거로 그녀의 설명은 자신의 경험이 아닌 누군가의 기록을 고스란히 적어둔 느낌이었다. 아마도 이것 또한 선대 황제 망령 사이에서 들은 정보인 것 같았다.
“그러니까, 확률은 반반이에요.”
황제가 내게 준 최후의 호의이자 도움이었다. 이걸 이용해야했다. 아니, 이 방법밖에 없다. 나는 흘끗 그의 어깨너머를 응시했다.
“저 남자를 떼어두고 가거나 끝내 쫓아오면 함께 이동하거나.”
“함께 이동하면…….”
“그게 더 문제죠.”
우리의 목적을 들킬 테니까. 그때 가서는 정말 손을 잡을 방법을 강구해야 할지도 모른다. 결론을 내리지 못한 사이 마침내 우리는 황제가 말했던 장소에 도착했다.
또 다른 성 아래, 거대한 지하 공간이었다. 드넓은 크기를 증명하듯 아주 커다란 문이 가로막았다. 그러나 황성을 격타한 거대한 진동이 여기에도 영향을 미친 것인지 문은 뒤틀린 채로 열려 있었다.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사람이 있는 걸까요?”
“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이아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요.”
그의 말처럼 홀 안쪽엔 아무도 없었다. 거대한 공동을 하나하나 살펴볼 겨를은 없었다. 홀의 중앙에는 황제가 편지로 설명했던 그대로 기하학적인 곡선의 주술진이 있었다.
이게 바로 황제가 말한 고대 주술진이다.
‘어째 캄브라캄에서 봤던 것과 비슷한데.’
천천히 모양을 관찰하고, 캄브라캄에 있는 벽화와 비슷하게 생겼단 걸 알아차린다. 하나하나 보고 물을 겨를은 없었다.
“리케도르안, 이리로.”
나는 리케도르안을 내 옆에 세워놓고 심호흡을 했다. 그런데 왜일까, 아주 잠깐이지만 리케도르안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고개를 돌리면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한 얼굴이었다.
“리케도르안, 혹시 어디 아파요?”
“아… 아뇨. 아니요, 이아나.”
그는 언제나 그렇듯 볼을 살짝 물들이며 수줍게 미소했다.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내가 착각했던 건가? 나는 머리를 갸웃하며 얼른 손을 들어 올렸다. 시간이 없었다.
한쪽 무릎을 접고, 들어 올린 손을 그대로 바닥의 주술진에 가져다 댔다.
쿵!
한차례 작은 진동이 일었다. 당황하지 않고 푸르른 힘을 일으킨 순간, 바닥뿐만 아니라 홀 전체가 진동했다.
-인간…….
때마침 안쪽에서 푸딩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일어났어? 괜찮아?’
푸르른 아지랑이가 움푹 패인 주술진 사이로 찰랑 물처럼 고였다. 이윽고 거대한 주술진을 가득 채운 아지랑이가 그대로 눈부신 푸른빛을 발산했다.
-인간, 냥! 그게 문제가 아니야! 냥, 할 말이 있다, 인간 네가 꼭 들어야 한다!
비산하는 빛과 함께 푸딩이가 다급하게 내게 소리쳤다. 무슨 일이냐고 대꾸해주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이쪽에 집중할 수 없었다. 천장까지 솟아오른 푸르른 빛의 기둥, 그 가장자리에 발을 걸친 남자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땀에 젖은 머리칼, 생긋 웃는 얼굴은 약간의 숨을 고를지언정 지쳐 보이지도 힘들어 보이지도 않았다.
“……체이서.”
기어이 쫓아왔구나.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와 동시에 내 어깨로 커다란 무게가 느껴졌다.
“리케도르안?”
“……하아, 이아나. 할 말이 있는데. 그…….”
“당신? 왜 몸이 뜨거워요? 어디 아파요?”
“하아, 미안해요. 이제, 조절이 되지 않아서…….”
분명 조금 전에 안겨 올 때만 해도 뜨겁기는커녕 정상적인 체온이었다. 그러나 내게 안겨 오는 몸은 비정상적으로 뜨거웠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내용이 푸딩의 급박한 말과 같아, 문득 깊은 불안과 두려움을 불러왔다.
“왜, 왜 그래요? 갑자기 왜 이런 거예요?”
그러나 내게 안긴 리케도르안에게서는 말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뜨거운 숨을 참느라 말이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그의 모습은 오래전 감방에서 약으로 인해 거센 열을 일으키던 모습을 연상케 했다. 내 심장이 쿵 떨어진다.
“잠시만, 잠시만 견디면 괜찮아질 거예요…….”
“리케도르안!”
이 순간에도 빛은 착실하게 퍼져나갔다. 그리고 번쩍!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눈 부신 빛이 퍼졌을 때, 나도 모르게 눈을 꽉 감았다.
리케도르안을 강하게 안으며. 제발 그를 놓지 않게 해주세요. 제발……!
그러나 눈을 떴을 때, 새로운 공간이 보임과 동시에…… 내 품에는 아무도 없었다.
“리케도르안?”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내가 있는 곳은 검은 어둠이 내린 1층 복도였다. 복도 옆으로 보이는 정원 풍경이 익숙했지만 그보단 리케도르안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아무래도 따로 이동한 모양이네.”
그러나 곧이어 찾고 있던 이 대신 그다지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지, 이아나?”
고개를 돌리면 긴 기둥 그림자에 반쯤 잠긴 채로 서 있는 체이서의 모습이 보였다. 그와 나 사이에 거리가 있었으나 체이서는 당장 좁히지 않았다.
“그렇게 경계할 것 없어, 이아나.”
안심하라는 듯 그는 양손바닥을 보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테니까.”
내게는 그저 헛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 말이었다.
“정말이야.”
그는 도리어 딱 반보 걸음을 물렸다. 제 말을 증명하려는 것처럼.
“여기 온 이유는 이제 잘 알겠어. 흠, 붉은 장미에게 걸린 저주를 풀러 온 거지?”
“…….”
“그렇겠네.”
체이서야 좋을 대로 떠들라고 하고는 나는 듣는 척 눈을 이리저리 돌렸다. 조금 전엔 경황이 없어 보지 제대로 못했지만 우린 제대로 이동했다. 이곳은 캄브라캄이었다.
이 안에서 리케도르안을 다시 만난다면 문제없어. 그래,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야. 보이지 않게 이를 꽉 깨물었다. 그에게 들키지 않도록.
“아, 하는 김에 붉은 장미 수명도 원래대로 돌리려고?”
나는 고개를 돌렸다. 이 순간만큼은 내 무심한 표정에 감사했다. 담담한 낯으로는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방해하지 않을 테니까.”
나는 피식 웃었다.
“그걸 믿으라고?”
“난 네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 알잖아.”
체이서가 손을 내리며 뒷짐을 졌다. 그러고는 한 손만을 내밀어 제 가슴을 짚었다.
“그렇다면 이건 어때, 내 모든 사랑을 걸고 네 목적을 방해하지 않는다고 맹세할게.”
나는 멈칫했다. 내게 제 사랑만은 진실하다 인정받고 싶어 하던 남자였다. 수단과 방법이 삐뚤어졌음을 시인하면서도 이 사랑은 순수했다고. 그런 것을 걸겠다고?
여기서 느껴지는 진실함이 오히려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넌. 내가 너를 싫어하게 만드는 데 천부적인 재주가 있어.”
뚝뚝, 잘리는 내 말에 체이서가 잠시 표정을 굳혔지만 이내 부드러이 웃었다.
“사람을 살살 유혹하는 그 말재간이 바로 네 악취미지. 방해하지 않겠다면 왜 쫓아온 건데?”
“보고 싶으니까.”
“…….”
“그렇게 노려보지 않아도 정말로 방해하지 않을 거야. 이아나.”
어째서일까. 여전히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체이서가 가까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애초에 난 네게 수호신을 돌려주고, 마지막 사실을 전하려 했으니까. 이건 정말이야.”
“사실? 웃기지 마. 아직도 내게 할 말이 있어? 그런 건 접도록 해. 이젠 네 말이 무엇이 됐든 들을 생각 없으니까.”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동하자마자 힘이 풀려 주저앉아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고개를 들면 어느새 가까워진 체이서의 모습이 보였다. 가까워진 기분은 착각이 아니었다.
“돌려주려 한 것뿐인데.”
“말장난은 더는 사양하겠어.”
“기억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무얼.”
“이전 세계의 네 기억.”
나는 거짓말처럼 멈춰 섰다. 딱딱하게 굳은 채로 그를 보았다.
“네가 무심할 수 있었던 건, 그리움이 없기 때문이지.”
그는 단정 짓듯이 말했다. 어떤 순간에도 권유하는 듯한 어조를 사용하는 체이서, 그는 자신의 능력에 걸맞게 항상 나를 매혹하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이 순간 그의 목소리에는 어디에도 날 기만하거나 속이려는 듯한 태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를 알기에 더욱 잘 보였고, 그렇기에 나는 멍하니 그의 말을 곱씹었다.
지금 뭐라고 한 거지?
“내가 가지고 있었어.”
슬슬 정신이 돌아온다.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황당해서였다. 가증스러움보다도 당혹감이 먼저였다. 전 세계의 기억이라니? 그런 건 당연히 나한테도 있었다. 이젠 무슨 기만을 하려 하는 걸까.
“기억한다고 자신하는 얼굴이네. 그럼 이아나, 물어볼까? 이전 세계의 네 이름이 뭐야?”
“그거야…….”
잘만 열린 내 입술이 더는 움직이지 못했다.
“나이는?”
“…….”
체이서는 얼어붙은 내 얼굴을 즐겁게도 그렇다고 서글프게도 보지 않았다. 그저 부드러이 웃는 그대로 볼 뿐이었다.
마치 제 할 일을 하듯이.
“이제 돌려줄게.”
그 순간 체이서의 손이 내 눈을 덮었다.
“원래 네 거야.”
힘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음에도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무언가가 머릿속으로 덮쳐들었기 때문이었다. 깜깜한 어둠 속, 어째서인지 처음 체이서를 만났던 순간이 스쳐 지나갔다.
캄브라캄에서 ‘오빠’로 등장해, 나의 눈을 가리고 말을 걸었던 순간. 그때, 그는 내게 자신을 용서했냐고 물었다. 물론 그 말은 ‘이아나’에게 했던 것이겠지만…… 왜 이제야 그것이 동시에 나에게도 건넨 말이란 생각이 드는지.
나는 뒤로 휘청거렸다. 체이서의 다른 한 손이 내 손목을 붙잡아 넘어지지 않게 지탱했다.
“흐…….”
속이 울렁거렸다. 식은땀이 나고 내장이 쥐어짜이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시야도 결코 정상적이지 않다. 공간이 뒤집히고, 땅이 젤리인 양 물컹하게 느껴지며,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 토할 것 같은 고통이 고약할 정도로 나를 마구 덮쳤다.
발바닥이 푹 꺼지는 감각에 그대로 주저앉고 싶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짧은 시간 동안 무슨 정신으로 이렇게 참았던 것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체이서가 천천히 손을 떼어냈다.
“생각해보니, 이아나. 끝내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나긋하고도 황홀한 목소리가 화살처럼 귀를 푹 파고들었다.
“네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 보내주어도 괜찮을 것 같아서.”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들었지만 감상이 제대로 흘러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것이 마구잡이로 쏟아지는 기분이었으니까.
아아, 어째서 잊었을까?
체이서는 가증스럽게도 내 턱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툭 닦아주었다. 흐릿한 시야에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왜, 난 이걸 잊은 거야?
체이서가 한걸음 뒤로 물러난다. 그리고 다시 한 걸음.
“언니? 언니!”
이대로 체이서의 그림자에 사로잡힌 것 같은 기분이 든 순간에 반가운 목소리가 뒤에서 흘러나왔다. 한줄기 구원같은 프란시아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녀에게 정말 미안하게도… 그 목소리가 구원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반갑지 않았다. 울렁거리는 무언가가 넘쳐흐를 것만 같았다.
다시 체이서가 있던 곳을 보면 체이서는 온데간데없었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같이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완벽하게 몸을 숨긴 것처럼.
“언니, 어떻게 된 거야? 나랑 노란 장미가 어떻게든 여기 통제권은 잡고 있는데, 황제가 나타나서는……. 언니?”
프란시아를 본 순간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언니!”
나는 프란시아를 볼 수 없었다. 그저 체이서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체이서, 체이서, 체이서! 단 한번도 격해진 적 없던 내 감정이 마침내 폭주기관차처럼 폭발했다. 울음과 함께 웃음이 흘러나왔다. 머리가 고장난 것처럼 삐걱거린다. 생각나는 것은 오직 웃고 있던 한 남자의 얼굴뿐.
“……당신, 정말……. 쓰레기구나.”
이 순간이 얼마나 다급한 순간이며 내가 해야 하는 일이 촌각을 다투는 일인지 알고 있었다. 움직여야 하는데, 움직여야 하는데……. 하, 하하. 허탈함이 섞인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왜, 하필… 지금…….”
그럼에도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에 ……어.”
“언니? 언니! 미안해. 잘 안 들려. 어디 아파? 응? 아파?”
프란시아의 목소리는 숫제 울먹이고 있었다. 평소 같았다면 그저 평온하게 왜 울려 하냐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녀를 토닥여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들이마시는 숨이 가빠졌다. 목구멍이 좁아지는 것 같았다. 가슴에 갑작스럽게 끓는 듯한 파도가 치는데 흘러넘칠 곳이 없었다.
차마 가슴을 쥐지도 못했다. 나는 프란시아의 어깨를 잡은 채 그대로 주르륵 무너져 내렸다.
“흐읍……. 흡……. 나…….”
나의 무심함과 태연함은 장장 5년을 눌러온 그리움과 나의 추억들에 허물어진다. 막아서는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었다.
“집에, 가고 싶어…….”
우습게도 이전 세계의 나는 너무나 행복했던 사람이었다.
너무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