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68/87)

***

눈을 뜨면 고요한 풀숲 속이었다.

‘이동한 거지?’

나는 천천히 일어났다. 몸에 붙어 있는 잎을 대충 털어내며 주변을 살폈다. 깊은 풀숲이라 여겼지만 앉아서 보았을 때 착각이었던 듯 나뭇가지 사이로 마을이 보였다. 조그만 마을이었다.

“……의논한 곳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네.”

장미 제전의 규칙, 모든 장미들은 영지로 송환된다는 규칙하에 모두가 각기 영지에 도착했을 터였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다가 아니란 걸 알고 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은 시작한 것이 아니라…… 한 가지 과정이 더 남아 있었다. 기다리기 무섭게 하늘을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피커를 귀 바로 옆에 둔 듯 머리와 귓가를 바로 쿵쿵 울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중립과 균형의 노란 장미가 제전을 열었노라. 제전의 참가를 요청하나니, 이를 승낙한다!」

생각하기 무섭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열정과 야성의 붉은 장미가 제전의 참가를 요청하나니, 이를 승낙한다!」

「치유와 존경의 흰 장미가 제전의 참가를 요청하나니, 이를 승낙한다!」

그리고 이어서 다시 한번.

또 한 번 더.

1차로 장미들이 영지로 송환되면 장미 후계자가 맞는지 인증 절차를 밟는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서 인증을 완료하면 참여할지 선택할 수 있다고. 기록된 바에 따르면 지금까지 단 한 장미라도 빠진 적은 없었다고 하지만.

‘아직 한 사람……. 남았어.’

가장 중요한 음성이 들려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불참 여부로 넘어갈 것이었다. 사실 이쪽도 나쁘지 않았다.

이 제전에 참여하지 않은 장미는 다신 내 곁에 다가올 수 없으니까. 그에겐 혹독한 대가일 터. 나는 손을 꾹 쥐었다가 폈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가득했다.

이윽고 잠시간의 간격이 있고 나서 다시 한번 더 울렸다.

「집착과 애욕의 검은 장미가 제전의 참가를 요청하나니, 이를 승낙한다!」

보이진 않았으나 체이서가 치열하게 고민하다 참가를 청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참가가 끝이 났네.’

‘일단 첫 고비인 참가는 넘겼네.’

나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이 목소리는 일종의 ‘가이드’란다. 이 전쟁의 주체인 나를 비롯해 참여자에게 공지를알려주고 전달하는. 신의 음성이 아닐까 싶을 만큼 온 하늘에 쩌렁쩌렁했지만 정체를 알 수는 없었다. 정보원인 황제도 몰랐으며 기록에도 나와 있지 않았고.

일단 제전을 일으켜 불리한 싸움터를 피한다는 방법은 성공을 거두었다.

“……이제 시작인가.”

나는 마을을 바라보다가 길을 가늠했다.

“빠르게 움직여야 해.”

이제 남은 것은 리케도르안과 만나 캄브라캄으로 최대한 빨리 달려가는 것이었다. 이젠 힘을 되찾았고, 내 안에 푸딩이뿐만 아니라 막 풀려난 수호신도 있으니 안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더군다나 이미 황제의 허가를 받았으니 캄브라캄으로 달려가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이곳은 푸른 장미가 송환되는 장소, 다시 말해 모든 장미들의 영지의 한가운데였지만 엄밀히 말해 이곳과 가장 가까운 영지가 있다. 바로 발테이즈, 르나그의 영지였다.

‘체이서도 이를 알고 있을 테지.’

아마도 체이서 또한 이를 알고 있을 바, 내가 이곳으로 향하리라 생각할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내가 캄브라캄으로 가려 한다는 내 목적을 모르고 있을 테니까. 르나그가 미끼 역할을 잘해주길 바랄 뿐이었다. 이는 르나그가 직접 자청한 역할이기도 했다.

그렇게 모든 참여자 확인 및 작전 검토를 마치고, 막 발을 옮기는 순간이었다.

「마지막 장미의 요청을 수락하노라!」

……뭐?

나는 얼른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게 무슨 소리야?

「하나 그대는 적법한 참가자가 아닌바, 심사를 거치겠다!」

하늘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숫제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당황한 나머지 아무런 생각도 못 하는 사이 하늘에서 답이 흘러나왔다.

「심사가 완료되었다.」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불완전한 존재여, 그대의 참여는 본디 허락되지 않는 일. 하나 천년의 세월을 인정하기로 하였다. 그대의 이름을 인정하겠노라.」

불완전. 이 한마디로 모든 사태를 파악했다.

「미완성과 탐심의 보라 장미가 제전의 참가를 요청하나니, 이를 승낙한다!」

이는 다섯 번째 장미의 등장이자…… 황실의 참여를 알리는 소리기이도 했다. 나는 숨을 꿀꺽 삼켰다.

‘이게 무슨 일이지?’

당연하겠지만 이는 전혀 약속된 바 없는 일이었다.

황제는 내게 도움을 청했다. 그리고 자신이 도울 수 있는 것은 모두 돕겠다며 내게 제전에 관한 정보를 아낌없이 넘겨주었다. 특히나 황제가 가진 정보는 그저 기록상으로 남겨진 게 아닌 역대 수많은 역사를 실제로 살았던 선대황제들의 기억이었다. 그 어떤 기록보다 보존 가치가 높았다.

이렇듯 제전이 열리고 정보가 모두 사실로 드러난 이상 거짓을 고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여전히 마지막에 자신이 참여하는 건…… 언급한 바 없는 일이다.

지금쯤이면 모두가 이 음성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겠지.

일단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어쩐지 너무나 쉽게 도움을 주더라니, 여기까지 생각한 걸까? 그저 황제가 가진 사정 때문이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하였고.

이 순간 체이서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걸렸다.

끝까지 황제와 손을 잡지 말고, 믿지 말라는 그 말……. 분노가 치밀었다. 이를 부득 갈았다.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믿지 말라고 하는 거야.”

나는 주먹을 꾹꾹 쥐고는 미간을 눌렀다.

다행스러운 건 마지막까지 황제에 대한 찝찝함과 의심을 거두지 않았던 탓에 작전을 공유한 것은 아니란 점이었다. 그저 제단을 이용할 허가만 받았을 뿐이니까.

‘하지만 내가 캄브라캄으로 가리란 걸 알고 있어.’

그녀가 모르는 건 내가 가는 루트일 뿐.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당황할 시간은 없었다. 불안하게 우짖는 푸딩이를 진정시킬 새도 없이, 처음 만난 내 수호신과 제대로 회포를 풀 겨를도 없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일단 리케도르안과 약속 지점으로 향해야 해.’

제전에 영향을 받는 건 어디까지나 장미 당사자들로, 그들의 수하와는 상관없었다. 이러한 즉, 아마 저 마을을 스쳐 가면 헤르님의 기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미리 준비해둔 마법과 함께 있겠지? 마법은 추적이 가능했기에 여기 도착하자마자 섣불리 사용할 수 없었다. 지금쯤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을 체이서에게 내가 향하는 방향을 최대한 숨겨야 했다.

‘이젠 숨겨야 할 사람이 하나 더 늘었지만.’

황제가 어떤 이유로 제전에 참여했는지 쉬이 예상하지 못했지만 감으로는 결코 좋은 의도는 아닐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감이 마구 외쳤다. 마주쳐선 안 된다고. 황실에도 유능한 마법사가 있을 터이니, 더욱더 마법 사용에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한참 걸음을 옮길 즈음 눈앞에서 수풀이 흔들렸다.

본능적으로 허리춤에 매단 단검을 붙잡으며, 한발을 뒤로 물렸다. 생각하기 무섭게 손끝에 푸르른 빛이 어렸다.

“오잉? 안녕하세요!”

그리고 수풀 사이로 등장한 것은 맥빠지게도 아주 작은 어린아이였다. 그것도 귀여운 여자아이.

“손님이에요? 우리 마을에 여행자는 거의 오지 않는데!”

나는 아이의 차림새나 얼굴을 유심히 응시했다. 혹시라도 속임수나 계략이 아닐까 했지만 마법 특유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수호신을 얻으며 더욱 예리해진 감각에도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진짜 일반인인 것 같은데…….

오래 전 도뮬릿에 살 적 나는 어린 아이처럼 변장한 납치범에게 끌려간 적 있다. 경계를 지우지 않으며 걸음을 뒤로 물렸다.

“…맞아. 난 지나가던 길이야. 넌 왜 여기 있는 거니?”

“여긴 제가 도토리를 줍는 길이에요!”

아이의 손에는 이 말을 증명하듯 도토리가 한 줌 쥐여 있었고, 조금 열린 주머니로도 도토리가 한 움큼 보였다. 경계가 조금 풀렸다.

“……저, 이상한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여긴 곧 위험해질지도 몰라. 얼른 집으로 돌아가.”

“헉, 왜요? 전쟁이 일어나요? 장미님이 오세요?”

“뭐?”

정확한 용어에 나는 멈칫했다.

“우리 마을은 푸른 장미님을 모시는 마을이에요!”

아이는 맑은 얼굴로 활짝 웃었다.

“저기, 저 마을이요.”

“…마을이 있다고?”

“네! 아주 옛날에는 태초의 푸른 장미님이 여기 살면서 우리를 예뻐해줬대요. 그때의 힘이 남아서 마을에서 태어나는 사람은 모두 푸른 눈을 가져요!”

그렇게 말하는 아이의 눈은 짙은 바다처럼 진한 푸른빛이었다. 연한 푸른색을 가진 리케도르안의 눈과는 다른 느낌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익숙했다.

이건 내 수호신이 내뿜던 기운의 빛이 띤 색과 비슷했으니까.

“여기는 푸른 장미님이 다스리던 땅이었어요.”

“……영지 말이니?”

“네. 나라요! 예전에는 아주아주 컸지만 지금은 작아졌대요.”

아이는 설명하기를 좋아하는 듯 해맑은 뺨을 붉히며 말했다.

“아주 가끔 푸른 장미님이 우리 마을로 돌아오는데 촌장님이 이때 아주 잘 모셔야 한댔어요. 우리를 이때까지 잘 살게 해준 귀한 분이라고.”

아이가 손을 크게 벌렸다.

“우리는 그분의 사람들이니까, 오래오래 행복하실 수 있게 빌어야 한다고요!”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언니는 누구예요?”

“나는…….”

아이의 영롱한 푸르른 눈에는 어떠한 사심이나 계략 없이 순수한 동경, 경의만이 어려 있었다.

“…너는 푸른 장미를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도 기다리는 거야?”

“네. 언젠가는 오실지도 몰라요!”

그래서 너는 누구냐는 아이의 눈이 내게 돌아왔다.

모든 장미는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황제에게서 현재 장미의 영지란 태초의 장미가 뿌리 내린 곳이라 들었고 이들의 가문 이름이 곧 태초의 장미 이름이란 것도 들었다.

이런 유용한 정보 속에 푸른 장미의 사람이라거나 영지에 대한 것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모든 장미들이 자신의 땅을 가지고 있었다면…… 푸른 장미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그 답을 눈앞의 존재로 들은 기분이었다.

모든 장미는 영지로 소환된다. 그리고 나도 영지로 소환 된 것이라고.

“나는 그냥 우연히 길을 잃고 여길 지나가는 여행자야.”

“아, ……정말요?”

아이가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혹시나 언니가 푸른 장미님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너무너무 예뻐서요.”

“그러니? 고마워.”

시간이 없었다. 한시라도 바삐 이곳을 떠나야 했다. 나는 살짝 웃어주고는 아이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렇지만 수도로 가면 푸른 장미님을 만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언니가요? 정말요? 진짜예요?”

“응.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전해줄게.”

아직 이런 거짓이 통할 법한 작은 아이라 끔뻑 넘어간 것 같았다. 예상대로 아이는 활짝 웃었다. 나는 아이가 푸른 장미에게 이 마을을 한번 방문해달라고 말하지 않을까 싶었다.

“헤헤, 그러면 행복하게 지내 달라고 전해주세요! 언제나 행복하시라고요!”

“……뭐?”

그러나 생각지 못한 말에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촌장님이 그랬는데, 푸른 장미님은 아주 강하고 아름다우신데, 그런데도 뜻대로 살 수가 없었대요. 자유롭지 못했다고.”

나의 고래를 닮은 푸른 눈이 깜빡였다.

“그래서 가끔 이곳으로 돌아오시는 거라고도요.”

아주 가끔 들렀다는 푸른 장미는 아마도 장미 제전을 치르기 위해 이곳으로 소환되었던 역대 푸른 장미들이리라.

과거 장미 제전이 일어난 것은 푸른 장미가 선택을 체념했거나 싸움이 너무나 치열했기에 일어났다 하였으니 과거 푸른 장미 중에는 도피한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저희는 푸른 장미님이 주신 땅에서 잘 지내고 행복했어요. 그러니까 저희는 언제라도 장미님의 행복을 빌 거예요.”

아이가 자그만 손을 펼쳤다.

“늘 자유로우시길! 늘 행복하시길!”

커다랬지만 점차 줄어들어 이제는 조그맣게 명맥만을 유지하는 조그만 마을. 수호신의 기운과 똑같은 눈색을 가졌다는 사람들. 나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푸른 장미의 이름 따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을지언정 반쯤은 성기시고 이해할 수 없다고만 느꼈는데…….

“……고마워.”

“네?”

“아니야. 꼭 전해줄게.”

왜 눈 밑이 잠시나마 시큰했던 것인지.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그저 내가 모르는 곳에서 순수하게 나의 행복을, 자유를 빌었던 이들이 있던 것에.

나는 감사함을 느꼈다. 어찌할 줄 모르는 감정 또한 함께.

이제는 정말로 떠날 시간이었다.

“그럼 난 가볼게.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아이는 친절하게도 마을을 끼고 이 수풀을 나가는 길을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사냥꾼 아저씨들의 덫을 피하라며 덫이 있는 자리도 알려주면서.

“네. 예쁜 언니! 또 봐요! 언니는 예쁘고 신비로워 보이고 또 웅, 아름답고! 또 보고 싶어요.”

“그래. 고마워.”

나는 그길로 아이와 헤어져 뛰듯이 걸음을 옮겼다. 내 체력을 안배하여 헤르님의 기사와 만날 지점은 그리 먼 곳에 배치하지 않았다.

푸르른 기운이 내 발을 휘감고 있었다. 아무리 걸어도 발이 아프지 않고 속도는 내 본래 속도보다 훨씬 빨랐다.

그렇게 수풀을 해치고 막 거대한 들판으로 나왔을 무렵.

“이제 오는가.”

나를 기다리던 무리와 마주했다. 애석하게도 가장 만나고 싶었던 헤르님의 기사가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달려올 내 장미들도 아니었다.

휘이잉.

긴 적갈색 머리칼이 흩날린다. 상처 가득한 뺨을 그대로 드러내 보인 황제가 우아하게 웃고 있었다. 드레스는 어디로 가고, 친히 제복을 걸친 채였다.

“다시 보는군, 푸른 장미.”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대하게 준비된 마법이 나를 덮쳤다.

***

쾅! 쾅쾅!

드넓게 펼쳐진 들판에 때아닌 굉음이 울려 퍼졌다. 어떤 것은 들판을 불태우고, 또 어떤 것은 얼렸으며 마치 염산인 듯 치익 타들어 가게 하기도 했다.

“하아, 하아.”

순식간에 움푹 파인 땅들은 얼마나 거대한 마법이었는지 또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알려주었다.

나는 숨을 작게 몰아쉬었다. 나를 보호하듯 감싼 푸른 장막 위로 먼지가 가라앉고, 그 사이로 웃는 황제의 얼굴이 보였다.

“……예상 밖인데.”

하나 그녀는 웃고 있지만 더는 여유로운 얼굴이 아니었다.

싸움이 격렬했다. 짧은 시간이었으나 불같이 맹렬했던 싸움은 서로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이 무수히 많은 마법을 막는 것이 어렵지 않다는 것과 이 정도로는 내가 쓰러지지 않음을 저들이 깨달은 것.

“폐하께서 여기까지 어인 일이신가요?”

서로의 깨달음이 스친 사이로 황제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이제야 이를 묻는 건가?”

“물을 시간을 주셨어야 말이지요.”

“그대의 말투는 여전하군. 건방진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짐의 상태도 여전해.”

황제의 입술로 웃음이 스민 사이, 잠시 마법이 멈췄다.

“이미 보인바 무엇을 못 하겠나? 그대를 데리러 왔네.”

“죽이려는 것이 아니고요?”

이 살벌한 마법들이 어디가 마중이란 말인가.

“아, 짐은 숨만 붙어 있다면 상태는 상관없어서 말일세.”

마법이 멈추고서야 제대로 황제의 얼굴을 보았고, 그제야 알 수 있었다.

“하하하, 하하하하. 그대를 다시 보니 아주 좋아.”

형형한 보랏빛이 도는 눈동자는 어딘가 이상했다. 황제의 주변으로 맴도는 희끄무레하던 형제가 이전보다 더욱 진하게 보였다.

“망령들도 그대를 보아 즐겁다고 하는군! 아주 좋은 날이야, 하하하!”

보는 순간 불길함을 자아내는 형체들이었다. 나는 내 안에 푸딩이가 뛰쳐나오지 않도록 가라앉혔다.

저들은 내 능력을 전부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니 푸딩이는 비장의 수로 두어야 했다. 이미 그것이 아니라도 마법을 막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검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 위험을 눈치챈 것인지 내 수호신은 나를 보호한 푸르른 장막을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더 푸르게 나를 감싸 안을 뿐. 마치 포근한 파도에 안긴 기분이었다.

“……고마워.”

귀로 잔잔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내게 도와달라더니. 이제 와서 제전에 참여한 건 모두 계산된 일이었나요?”

정말 궁금하진 않았다. 그저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던진 질문이었을 따름이었다.

“글쎄. 그랬나? 하하하. 그랬었나…….”

황제가 고개를 느슨하게 기울였다. 형형한 눈동자를 숨기지 않는다. 그녀의 말투는 마치 나쁜 약을 한 것처럼 나른했고 말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그러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한데…… 아니지. 무슨 상관인가. 이제 와 그 자리와 힘이…… 존재가 욕심났지. 그래. 그랬어……. 다, 갖고 싶어….”

황제의 손가락이 제 턱을 쓸어내렸다.

“역대 장미들은 이 제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별수를 다 썼다 하던데…… 짐은 흑장미의 방식이 가장 마음에 들어…… 소중한 것을 부숴버린다 협박을 했다 하였나. 아, 그래!”

중얼중얼 말을 외던 그녀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우리가 대치한 곳은 너른 들판이었다. 들판의 지대가 높았던 탓에 옆으로는 탁 트인 마을의 풍경이 그대로 보였다.

조금 전 아이가 살던 마을이었다.

“무고한 이들의 목숨을 인질 잡고 회유도 했었다던데……. 저 마을이나 불태워볼까?”

동요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 순간 해맑은 아이의 표정이 스쳤고, 나도 모르게 흔적을 드러내 보인 건지도 모른다.

“오호라?”

들켰다.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는 표정이 황제에게로 스쳤다.

“의외로 이런 게 정답이란 말인가?”

“무슨.”

그녀의 얼굴이 화사하게 밝아졌다.

“공격해.”

그녀의 손가락은 나를 향해 있지 않았다. 불길이 마을로 향한 것을 본 순간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막아줘!”

저기, 저기로!

불행하게도 내 수호신은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내 간청을 들어주든 무시하고 나를 지키든. 그러나 힘의 주체는 나였고, 내 힘은 모든 마법을 막아냈다.

그리고.

-인간!

눈앞에서 조그만 설표가 내게 날아온 검을 대신 막았다. 붉게 일어난 기운이 모든 검을 튕겨내고 기사를 날려버렸다.

그러나 다시 한번 무수한 검이 날아왔다. 검이 설표를 꿰뚫는 순간 나는 주저앉아 푸딩이를 꽉 끌어안았다. 푸욱. 손끝에서 만들어진 푸르른 아지랑이가 꿰뚫린 검을 밀어냈다.

“너, 너 괜찮아? 빨리, 빨리. 내 안으로……. 들어가, 어서! ”

그러나 이 착해빠진 짐승은 아웅아웅 울며 내 걱정밖에 할 줄 몰랐다.

-인간, 냥! 인간, 빨리 나를 놔라! 인간!

동시에 등에서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한발 늦게 푸른 기운이 나를 감쌌다. 내 수호신이 길게 울부짖고 있었다. 흡사 제 탓을 하는 양.

“……괜찮아. 네 탓…… 아니니까.”

어렵사리 고개를 돌리면 멀쩡한 마을이 보였다. 높다란 하늘 아래, 마을은 내가 보았던 그대로 평화로웠다. 밥을 짓는 듯 연기가 흘러나오는 모습이 느릿하게 흘러간다.

이거 참. 내가 언제부터 인류애가 넘쳤다고.

그저 웃음이 나왔다.

이와 함께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다가온 마법이 내 장막을 퍽 내려쳤다. 막는 건 거뜬한데, 몸에서 피가 흐르는 것 같다. 아, 생각보다 좀 커다란 것을 맞은 것 같네.

‘……리케도르안에게 가야 하는데.’

그리고 눈이 서서히 감겼다. 흘러내리는 풍경으로 황제의 얼굴이 담겼다. 아, 이제야 알겠다.

<짐은 삼켜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네만.>

비단결같이 윤기가 흐르는 머리카락 아래 뱀의 눈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것. 활짝 웃고 있지만 결코 정상은 아닌 광기 어린 황제의 미소를 마지막으로 응시하면서.

“하하하하, 가졌다! 드디어 가졌다! 아하하하하!”

그곳엔. 인외의 힘이 인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단 내 말에 웃으며 단단한 얼굴로 동의하던 이는 없었다.

<나는, 미치고 싶지 않아.>

미치고 싶지 않다는 당신의 소망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구나. 나는 마지막으로 피식 웃었다.

‘적이 늘었구나.’

암전을 맞이하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