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7/87)

***

같은 시각,

이아나와 멀리 떨어진 자리. 마법사들과 도구를 점검하는 데에 여념이 없는 이아나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가 있었다. 마법사가 다가가 이아나에게 팔찌를 다시 채워주자 바라보던 이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그는 바로 이곳의 총 사령관, 리케도르안이었다.

“아주 뚫어지겠네. 뚫어지겠어요.”

그런 남자를 보며 쯧쯧 혀를 차는 이도 있었다.

“질투도 적당히 해야지. 지나치면 사랑받지 못한답니다?”

볼멘 소리가 한 번 더 이어지자 그제야 뚫어지듯 팔찌를 바라보던 리케도르안이 흘끗 시선을 돌렸다.

“어머나. 대공 각하.”

프란시아가 턱을 기울이며 피식 웃고 있었다.

“뭘 그리 쳐다보시나요?”

프란시아는 이아나 쪽을 한번 보고는 그녀의 위치를 확인했다. 이아나가 제 쪽을 완전히 등진 것을 확인하고서야 미소의 모양을 바꿨다.

“아니. 꼬나본다고 해야 하나. 어휴 무서워라!”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비속어를 서슴지 않고 사용했다.

“괜히 날 상대로 힘 빼지 말아요. 가뜩이나 곧 발바닥 불나도록 뛰어야 할 텐데?”

곧 작전이 시작할 것이다. 이 작전에서 프란시아와 리케도르안이 맡은 것은 체이서 루브 도뮬릿 앞에 나타나 최대한 격렬한 전투를 벌이는 것이다. 그들의 역할은 침투와 전투. 그리고 교란이었다. 체이서의 발을 묶거나 적어도 그의 수하들이 다른 것을 하지 못하도록.

이는 이아나가 수호신을 찾으러 갈 시간을 버는 것이기도 했다.

그들의 왕이 짠 계획은 생각 이상으로 파격적이었고 동시에 허를 찌르는 것이었다. 젊은 나이치고는 수많은 격전을 겪어온 그녀가 놀랄 정도로 말이다. 오히려 제 안위를 생각하지 않으니 나오는 작전이기도 하였다.

프란시아는 불만 어린 목소리를 숨기지 않았다.

“뭐 그리 불안해 안절부절못하고 그래? 어차피 언니가 사랑하는 건 당신이야.”

말의 뒤로 이것으로 부족하냐는 말이 숨겨져 있었다. 리케도르안이 이를 모를 리 없었다.

“붉은 장미께서 배가 부르셨지. 누구는 갖고 싶어도 못 가지는데.”

이미 이아나와 재회하기 전까지 두 사람은 무수히 많이 만나고 부딪쳐 온 사이였다. 리케도르안은 이아나 앞에서 보이던 순진한 낯과는 상반된 얼굴로, 차디찬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고는 묵묵하게 한 마디 던질 뿐이었다.

“태도가 잘도 변하는군.”

얼음장같이 차가운 음성에도 프란시아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왜 이러실까. 내가 이딴 식인 걸 몰랐던 것처럼?”

리케도르안 옆에는 푸딩이 네 발로 서 있었다. 이아나를 따르는 대신 이곳에 남아 있던 참이기도 했다. 푸딩은 사나움을 숨기지 않으며 날카로운 울음을 토해냈다.

이아나에게 속했다고 하여서 수호신의 본질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푸딩은 여전히 리케도르안의 심상을 공유했다.

아니, 어쩔 수 없이 닮고 마는 것이 장미와 수호신이라. 칼리스토 또한 귀여운 형태가 아닌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드러냈다.

“흐응, 근데 사랑받아도 불안한 건 어쩔 수 없나 봐?”

“너야말로 날 살살 긁어서 좋을 게 하나도 없음에도 이러는 이유가 궁금한데. 이 자리에서 끝을 보자는 소린가?”

리케도르안, 헤르님 대공은 냉철하지만 결코 싸움을 피하지 않는 이로 소문이 자자했다. 거기다 비단 소문으로 그친 것이 아니었다.

“야호, 우리끼리 싸우면 언니가 참 좋아하겠네!”

일촉즉발의 긴장감 속에서 프란시아는 걸음을 옮겨 교묘하게 절벽의 그림자로 숨었다. 그러고는 느릿하게 돌벽에 등을 기댔다. 완벽한 사각이었다. 이아나가 볼 수 없는.

“난 앞으로도 내가 이딴 식으로 살아 온 걸 말 안 할 거야.”

그녀가 눈을 들어 올렸다. 색이 다른 오묘한 눈동자, 한쪽 눈으로 선명한 흰 장미가 그려져 있었다.

“사실 당신도 그렇잖아?”

“…….”

“난 알아.”

껍질처럼 싸고 있던 마지막 예의가 프란시아에게서 지워졌다. 화사하지만, 가시를 품은 미소를 가감 없이 드러내면서.

“당신도 나와 같은 부류의 인간이야.”

그녀가 그리 말하는 순간 그들의 곁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성기사 단원이었다. 특이하게도 그는 하얀 셔츠를 손에 들고, 상반신을 탈의 한 채였다.

“성녀님.”

묵직한 체격을 가진 이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프란시아는 보지도 않은 채 고개를 까딱였다. 기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쿵, 무릎을 꿇었다.

기사의 얼굴이 프란시아의 허리에 올 듯 말 듯 했다. 프란시아는 상체를 살짝 숙여 성기사의 턱밑을 살살 문질렀다. 아주 익숙하다는 듯이.

프란시아의 한 손에는 어느새 긴 막대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아무렇지 않게 빙빙 돌렸다.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돌아가는 건 다름 아닌 긴 지휘봉이었다.

“미안하지만 조금 전의 대화를 모두 들었거든.”

성황의 봉이라 불리는 이 황홀은 다름 아닌 성황만이 소유하는 역사적 성물이었다.

“뭘 망설이는 거야?”

이것이 프란시아의 손에 있다는 건 그녀가 신전의 권력을 모두 쥐었음을 의미했다. 막대의 크기가 손바닥만큼 작아졌다. 프란시아는 이것의 주인임을 드러내듯 자유자재로 다뤘다.

그녀의 입술이 막대의 끝을 살짝 깨물었다.

이건 신관들의 기력을 돋우는 역할을 해, 그녀와 같은 치료능력을 지닌 이에겐 곱절의 능력을 안겨주는 물건이기도 했다. 신전의 권력을 상징하는 황홀, 상의를 탈의한 기사, 그리고 단정하고 편안한 성복 차림의 성녀.

리케도르안이 줄곧 보아온 성녀, 아니. 신전의 진정한 ‘교황’의 모습이기도 했다.

“이제 와 언니가 당신을 버릴 리가 없는데. 집착하는 것도 참 이 몹쓸 장미의 영향인가 싶다가도.”

리케도르안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냥 천성이 그렇게 생겨 먹은 거야, 그렇지?”

다분히 비꼬는 어조처럼 들렸지만 프란시아는 씩 웃었다.

“당신과 나는 참 닮았으니까. 방식도 가치관도.”

어쩔 수 없이 억세게 살아온 과거도. 프란시아는 마지막 말을 막대를 깨물며 꿀꺽 삼켰다. 리케도르안과 프란시아에게는 태생적이든 환경적이든 자라며 어쩔 수 없이 세상의 그림자를 짊어진 채 자라게 된 사정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치열하게 살아야만 했다.

“어쩌면 언니를 만나지 않았다면 우린 다른 방식으로 연을 맺었을지도 모르지.”

프란시아는 의미 없는 가정을 뱉었다.

“약혼 관계라거나.”

놀리는 기색이 다분한 말투였다. 리케도르안의 표정이 더욱 차가워진 것은 물론이었다.

“뭐 손잡고 다른 새낄 밟아버리기엔 이것만큼 좋은 관계가 없잖아요?”

“오늘 진정 끝을 보고 싶다면 말리지 않겠다.”

“누가 싸운대요?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주세요, 각하.”

프란시아는 커다란 눈을 접어 웃었다.

“나도 댁은 싫으니까.”

여기에 한마디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프란시아는 이아나가 제게 한 모든 말을 기억했다.

“그리고 이건 언니가 싫어하는 방법이니까.”

“…….”

“안 써.”

짧은 스침이라 할지 몰라도 프란시아 생에 다시 없을 따스한 순간이었다.

“어디까지나 가정인 거지.”

그녀는 그렇기에 이아나의 선택을 존중했다. 비록 장미로서의 본능이 저 남자를 치워버리고 푸른 장미의 옆을 차지하라 속삭이더라도 이를 참을 수 있을 만큼.

“당신이나 나나 이 지긋지긋한 집착과 본성을 숨기는 건 언니를 위해서잖아?”

“…….”

“그러니까 언니를 차지하고서 그런 얼간이 같은 얼굴을 하지 말란 소리야.”

리케도르안의 표정이 점차 평소의 평온함을 되찾았다. 프란시아는 리케도르안이 얼마나 흉포해질 수 있는지 알았다. 몇 번 같이 싸워보며 직접 보았으니 말이다.

“누군 누리지도 못하는 선택의 행복을 올바르게 누리란 말이야. 알겠어?”

붉은 장미의 본성이란 사람을 상상 이상으로 더 야수에 가깝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저 남자는 그 야성을 제 이성과 의지로 억눌렀다. 피를 짜내는 고통이 있었으리라.

“내 태양을 나눠 가지는 건 쓰리지만.”

프란시아는 툭 건드렸던 성기사의 얼굴에서 손을 떼어냈다.

“적의 적은 동료라는 말 잊지 마. 울리면 언제든 앗아갈 테니까. 나와 노란 장미가.”

프란시아는 언제든 기회가 된다면 기꺼이 르나그와 손을 잡아서라도 옆자리를 차지할 의향이 있었다. 그럴 기회는 희박하겠지만. 대신 이럴 때면 잔뜩 일그러지는 저 대공을 구경하는 맛이 쏠쏠했다.

리케도르안이 곧 픽 웃었다.

“그럴 일 없어.”

그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네 자린 없어. 언제고 그 자리를 내어놓지 않을 테니.”

“이거 봐. 성격 안 좋다니까.”

프란시아는 꺄르르 소리 내어 웃으며 이아나 쪽을 보았다.

“이 음습한 속을 어찌 숨기고 다니는지. 우리 언니가 알아야 하는데.”

프란시아는 알고 있었다. 이아나는 설사 이 모습을 보았어도 리케도르안을 버리거나 사랑하지 않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건 그저 심술이었다.

‘부럽다니까.’

이아나를 담는 순간 프란시아의 얼굴엔 맑은 빛 도는 함박웃음이 새겨졌다. 그녀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표정이었다. 이를 보던 리케도르안은 거울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앞뒤가 다른 프란시아와 자신의 모습은 가식인가?

아니.

리케도르안은 이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아나는 그의 가장 깊은 본연의 표정을 지을 수 있게 만들었다. 지금 그와 그녀의 표정,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진심 어린 표정이었다.

“정신 차려, 이 사람아.”

프란시아는 언제 그에게 심술궂게 굴었냐는 양 얼른 이아나에게로 달려가 버렸다.

“잘생긴 남자도 질투하면 흉하더라.”

하얀 장미가 마지막으로 남긴 심술은 의외로 그에게 유효타를 먹였다. 리케도르안은 손을 들어 얼굴을 문질렀다. 성스럽기 그지없는 낯이 살짝 일그러졌다.

“하……. 추한가?”

그때였다. 누군가 그의 다리를 툭 밀었다. 지금까지도 계속 리케도르안의 곁을 지키던 푸딩이였다. 작은 짐승은 앞발로 그의 다리를 밀었다. 그러고는 툭툭 건드린다.

-넌 고생길 훤하구나, 냥.

푸딩이 절레절레 머리를 저었다.

-내 계약자가 될 뻔한 인간이 이렇게 등신 같다니, 넌 이 몸이 아까웠도다. 냥.

사실 이아나에게 말할 기회가 없었지만 리케도르안은 푸딩의 말을 모두 알아들었다. 물론 거리에 따라서 듣지 못하기도 했으나 이를 제외하면 모두 가능했다. 그야 본디 그의 일부이자 수호신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까지는 푸딩의 말이 들리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이 순간마저 그럴 수는 없었다.

“……넌 수호신치고는 위엄이라곤 전혀 없군. 그딴 말은 어디서 배운 건지.”

-뭐? 등신? 인간이 알려준 것이다, 냥!

“좋은 말이군.”

이아나가 알려줬다는 말에 리케도르안은 한 점 부끄럼 없이 말을 바꿨다. 그 모습을 보며 푸딩이 절레절레 다시 한번 머리를 저었다.

-너도 중증이다, 냥.

그러나 푸딩이나 리케도르안이나 둘 다 이아나를 쳐다보고 있는 건 매한가지였다.

-물론 우리 인간이 대단하긴 하다, 냥. 최고다, 냥!

“당연한 말이다.”

-엣헴, 냥!

그렇게 말하는 푸딩이야말로 역시 내 계약자는 대단하다! 하고 뿌듯해하는 것이 리케도르안과 똑같은 사고임을 전혀 알지 못했다. 한참을 이아나의 매력에 대해서 제 수호신과 입씨름을 하던 리케도르안은 돌연 고개를 들었다.

‘시간이 오는가.’

하늘을 바라봤으나 그가 정작 보고 있는 것은 저 멀리 보이는 도시, 정확하게는 성벽이었다. 칸탈라의 성벽. 저 너머에는 체이서 루브 도뮬릿이 만들어놓은 함정이 산재할 것이다.

‘죽인다고는 했지만.’

리케도르안은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손에 피를 묻히지 못할 거란 걸. 그를 죽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피가 묻은 손으로 이아나의 손을 잡고 싶지 않은 것이다.

깨끗하고 좋은 것만 잡아야 할 손이니까.

무엇보다…… 체이서 루브 도뮬릿의 힘은, ‘매혹’. 즉, 세뇌 능력이었다. 저 성벽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몰라도 결코 쉽진 않을 것이다. 그와 프란시아가 맡은 역할이 제압인 만큼 더욱더. 이와 동시에 리케도르안은 다가오는 끝을 느꼈다.

-……너 말이다, 냥.

그 순간 리케도르안이 거칠게 기침을 토했다. 누가 들어도 비정상적인 거친 기침 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졌다. 리케도르안은 당황하는 대신 교묘하게 등을 돌려 사각지대로 들어갔다.

“……아무 말도 하지 마.”

리케도르안이 푸딩이 하려던 말을 가로막았다.

-느긋하게 구니까, 네 몸이 여기까지 내몰린 것 아니냐, 냥!

“너야말로 말을 듣는 법이 없군.”

-네 육체가 서서히 말을 듣고 있지 않다, 냥! 넌 장미로서 생명이 얼마 남지 않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 않으면서 뭐하는 거냐!

“조용히 하래도.”

그러나 그럼에도 푸딩은 으르릉거리는 목소리로 끝내 내뱉었다.

-대체 언제 말할 거냐, 냥?

이미 이 수호신은 이아나와 계약해 그와 연결이 꽤 멀어진 상태지만, 그럼에도 푸딩에게 약간이나마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이 짐승이 이아나에게 하고픈 말 하나 정도는 못 하게 하는 거라거나.

-네 생명이 생각보다 더 빨리 닳아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

푸딩의 음성은 사나움을 품었으나 한편으로 어찌할 줄 모르는 목소리였다.

-빨리 가지 않으면, 넌 죽을 거다 냥.

리케도르안은 피식 웃고는 눈을 감았다.

“네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이 싸움은 곧 끝날 거야.”

누구에게도 꺼내지 못한 진실.

이 싸움은, 시간 싸움이었다.

***

다음날 새벽, 칸탈라의 대성당에는 여느 날과 다를 것 없이 종이 뎅뎅 울렸다. 저 종소리가 얼마나 큰지는 이 도시 근처에 머물며 이미 느꼈다. 실로 거대한 종소리였다. 마치 이곳으로 온 나를 반기는 것처럼 웅장하고 묵직한 울림.

칸탈라의 성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적어도 성당에 오기까지는 건드리지 않겠다는 듯이 거리 또한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결코 작은 도시가 아님에도 텅 비어있는 광장은 소름을 자아냈다.

나는 벽의 진동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거대한 종소리 사이로 희미한 울음소리가 겹쳐진다. 내가 듣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듯 점차 울음소리가 커졌다.

‘여기 있구나.’

푸른 장미의 수호신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문에 손을 가져다 댔다.

“……잘 부탁해요, 리케도르안. 그리고 부탁해, 프란시아.”

성당에 있는 문은 두 개. 여기서 체이서가 말한 문은 정문이다. 그러나 내가 붙잡고 있는 것은 정문이 아니었다. 나는 숨을 꾹 참으며 고개를 돌렸다. 뒷문 근처엔 아무도 없었다.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아주 멀리서 사람이 보이긴 했지만 순찰을 도는 것인지 근처를 움직이다 갈 뿐이었다. 가까이에 있었더라도 나를 보지 못했을 거다. 강력한 투명화 마법을 쓰고 있었으니까. 이를 위해 열이 넘는 마법사가 참여했으니.

이윽고 뒷문 안으로 발을 디디는 순간이었다.

“어서 와, 이아나.”

귓가로 유혹하듯 달콤한 음성이 들려왔다.

“왜 그래? 들어오지 않고서. 널 기다렸어.”

나는 텅 빈 앞을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목소리의 주인공인 체이서가 여기 없음에도 그를 본 것같이 등으로 소름이 돋았다.

당연했다. 지금 내게 들려오는 말은 마법 도구를 통해 들려오는 말이었으으며, 지금쯤 체이서와 만났을 리케도르안과 프란시아에게 건넨 말일 테니까. 아마도 나로 분장해, 환상 마법까지 덧씌운 프란시아를 보며 한 말일 것이다.

나는 걸음을 재게 놀렸다.

<체이서는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아요.>

귓가로 내가 지시했던 말들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그 남자는 분명 내가 장미들과 함께 나타날 거라 예상했겠죠. 나와 만나기로 한 장소에 나타나 거기 모든 힘을 집중할 거예요.>

날 데려가야 하니까.

<똑똑하고 치밀하지만 맹목적이에요.>

걸음을 걷는데, 귓가로 아슬아슬한 음성이 들려왔다.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그런데 이상하네, 이아나.”

체이서의 웃는 미소가 스쳐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왜 날 보지 않을까.”

분장은 금방 들통 날 짓이었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속이는 게 목표가 아니었다. 나는 여러 얼굴을 지우며 발을 재게 놀렸다. 이곳에 오며 더욱 커진 내 수호신의 존재감을 쫓아서. 시간이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이 성당 전체에 퍼져 있는 수호신의 기운을 느꼈다. 나를 부르고 있었기에 찾기 어렵지 않았다.

<그 남자는 내가 바라는 것을 바로 주지 않을 거예요.>

“오히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숨겨두었겠지.>

걸음을 옮길수록 나를 부르는 노랫소리가 더욱 커졌다.

나는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마음이 급한 만큼 속도가 빨라졌으나 동시에 차분해졌다.

실수해서는 안 돼.

누군가의 무리가 포함된 작전이었다. 지금의 이 싸움이 더욱 커다란 전쟁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빠르게 찾을 것만 찾고 빠지는 것이 최선이었다. 이 작전은 푸른 장미 수호신의 기척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이 유일하게 나밖에 없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니까.

‘복도에 아무도 없어.’

-기척 또한 느껴지지 않는다, 냥.

속으로 중얼거리는 말에 내 안에 숨어 있던 푸딩이 대답했다.

‘……모조리 예배홀 쪽으로 배치한 건가?’

체이서에게는 수많은 기사가 있었다. 그것도 그가 직접 키우고, 단련시켜 강한 데다 체이서라면 죽는시늉을 할 정도로 맹목적인 이들이었다. 책 속에서 느낀 바 있지만 충성이 아니라 맹목이었다.

거기다 그는 필요하다면 기꺼이 사람을 세뇌시켜서라도 원하는 명을 수행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완전 악당이네.”

그리 중얼거리다 말고 나는 작게 실소를 머금었다. 이는 당연한 사실이었다. 이제 와 깨달은 척 할 필요 없이 무수히 본 모습 아닌가. 그럼에도 중얼거린 건 도뮬릿에서의 그의 진실 고백이 꽤나 인상 깊었던 탓일 거다.

‘감상에 빠져 있을 겨를 없어.’

나는 고개를 흔들고 방향을 꺾었다. 여기서 오른쪽. 다시 왼쪽. 수호신을 찾으러 가는 길은 미로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계속해서 나를 부르는 울음소리 탓에 헤매진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음습한 성당이 미로를 헤매는 기분을 들게 했다. 희미한 빛에 의지해 한참을 걸을 때였다.

-저, 인간.

돌연 푸딩이 나를 불렀다.

“왜 그래?”

나는 잠시 멈칫했다. 평소답지 않은 가라앉은 음성 탓이었다.

-그게, 냥…….

“뭔데 그래, 급한 거야?”

나는 멈췄던 걸음을 걸으며 급히 되물었다. 혹시 리케도르안에게 이상이라도 생겼나?

-아니,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말이란 건 알고 있다 냥. 그런데…… 인간 너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붉은 장미는…… 캬아앙!

그 순간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렸다. 다름 아닌 푸딩이 내 안에서 짧게 비명을 지른 것이다. 나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뭐야, 너 왜 그래?”

-아, 아니다. 냥. 따끔했다……. 진짜 말을 못 하게 하다니…….

뒷말은 너무 작아서 들리지 않았지만, 잔뜩 불만 어린 어조였다.

-아무튼 인간, 붉은 장미는 내가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다.

“뭐?”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야.

“언제부터? 원래는 못 들었잖아?”

-오래되진 않은 것 같다, 냥. 네가 붉은 장미에게 납치될 즈음에는 못 들었던 것 같고…….

“그렇지. 그땐 절대 아니야.”

그때 푸딩이의 말을 들었다면 푸딩이의 정체도 눈치챘을 거니까.

-아마도 최근인 것 같다. 최근에 붉은 장미와 무슨 일이 있었냐, 냥?

“……최근에? 그런 것 없…….”

없다고 말하려다 말고 말을 멈췄다. ……혹시 밤에 그렇고 그런 일을 한 것 때문인가.

“……짐작 가는 게 있긴 한데.”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날짜를 하나 말했다. 푸딩이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그즈음 부근인 것 같다고 했다.

-인간 너와 말을 할 때 노려봤다, 냥.

“그래? 진짜인가 보네.”

나는 복잡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수호신과 장미가 의사소통이 된다는 기쁜 마음 반, 내 생각은 들리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푸딩이의 말로 유추할 수 있던 내 생각들. 뭐.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푸딩이는 이상하게 더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마치 누가 입을 못 열게 꾸욱 잡기라도 한 듯이.

-하아, 인간. 네가 꼭 들어야 할 말이 있다. 꼭 알아야 한다, 냥!

“어? 알았어. 꼭 얘기해줘.”

그렇게 푸딩이와 짧은 대화를 나누고 다시 방향을 꺾었다.

-인간, 그렇게 가볍게 넘길…….

“……잠시만. 거의 다 온 것 같아.”

멀지 않은 곳에 작은 문이 있었다. 이 성당의 문들은 대부분이 컸지만 저 문은 이상하게도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작았다.

“저쪽인 것 같은데.”

문 주변으로 희미한 기운이 파도처럼 넘실넘실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발걸음을 옮기는 찰나였다.

콰앙!

땅이 흔들렸다. 나는 재빨리 벽장식을 붙잡고 휘청거리는 몸을 지탱했다. 천장을 바라보면 천장화에 금이 간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이었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크흡!”

귀로 커다란 숨소리가 들려왔다. 챙강, 들려오는 병장기 소리.

“……내 이아나는 어디에 있지?”

귀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한순간 끊겼다가 다시 돌아온다. 아마도 리케도르안이 체이서와 직접 검을 맞대고 싸우는 것 같았다.

“내가 왜 그걸 알려줘야 하지?”

“흐음, 아직 그런 말을 할 여유가 있나? 대공, 이곳 어딘가에 있다면 찾는 것 어렵지 않아.”

“여기 없다면, 아주 찾지 못하겠군.”

쿵! 다시 한번 복도가 진동했다. 나는 이 진동이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다는 것을 알았다.

‘……전투 장소가 멀지 않아.’

아울러 추측하기로 이 진동은 리케도르안이 일으킨 거란 것도 알 수 있었다.

“또 세뇌당한 이들인가.”

작게 중얼거리는 리케도르안의 음성에는 숨이 섞여 있었다. 나는 얼른 고개를 들어 올렸다.

“푸딩, 빠르게 움직일게!”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다. 단 몇 마디가 들렸을 뿐이지만 이를 눈치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음성이 쉴 새 없이 끊겼다 들려 왔다를 반복했다. 이건 연결이 불안정하다는 신호인 동시에, 리케도르안이 격렬히 몸을 움직인다는 소리였다.

애초에 리케도르안은 작전 한 순간에만 이 도구를 다시 켜기로 했는데……. 조절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이 상황의 방증이기도 했다. 제이르가 경고한, 결코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최악이 되기 전에 찾아야 해!

나는 지체할 것 없이 문으로 달려갔다.

“조금만, 더, 다 왔어…….”

초조하게 중얼거리며 문을 열었지만 덜컥, 문은 잠겨 있었다. 나는 재빨리 주변으로 고개를 돌렸다. 근처에 갑옷 장식이 있었다. 저기 놓인 검으로 문고리를 부수면 되지 않을까?

그리 생각한 순간, 호통이 돌아왔다.

-인간, 넌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냥!

순식간에 모습을 드러낸 것으로 모자라 문고리를 부숴버린 작은 수호신님이 씩씩대며 말했다. 나는 쓴웃음을 짓고는 얼른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문 안쪽은 텅 비어 있었다. 아니, 왜 잠가뒀는지 모를 만큼 깨끗하게 비어있다. 오히려 이것이 강한 위화감을 자아냈다. 나는 입술을 삐뚜름하게 말아 올렸다.

“보통 이런 곳에는 응당 비밀 통로가 있는 법이지.”

그러나 이 순간에 은밀한 통로를 찾을 시간은 없었다.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리일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울음소리가 전과는 조금 다르게 들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경고라도 하듯이.

‘뭐지?’

벽에는 거대한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언젠가 캄브라캄에서 보았던 장미들로 이루어진 그림이었다. 나는 이것을 유심히 보다 말고 벽을 두드렸다.

‘비어 있어.’

나는 벽 한 지점을 두드리다가 얼른 고개를 들었다.

“푸딩아…… 물어!”

말하고 싶어서야 아차 싶었지만 수호신님은 적절하게 달려갔다.

그리고 쾅! 와르르르, 부서지는 벽을 가만히 보았다. 자욱하게 일어난 먼지바람이 가라앉자 그 사이로 벽 너머가 보였다. 부서진 벽 뒤로 또 다른 공간이 있었다. 예상한 대로였다.

그 너머로 또 한 번 사방이 막힌 방이 보였다.

“방?”

방 중앙에 무언가 보였다. 반짝거리는 것은 왕관 같기도 했다. 이상하게도 황제의 티아라와 비슷하게 생긴 물건이었는데……. 티아라에 있는 것보다 더욱 커다란 푸른 보석이 붙어 있었다.

‘저기에 봉인당한 건가?’

푸르른 기운이 언뜻 보인 것도 같았다. 나는 지체할 것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이었다.

-인간!

푸딩이의 날카로운 음성이 들린 것과 동시에 철컥, 거대한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철컹!

무언가 발목을 잡았다. 익숙한 감각에 고개를 내리면……. 발목을 휘감은 족쇄가 보였다. 잡아당겨 보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행이라면 빠르게 달려간 탓에 왕관을 손으로 잡은 거랄까.

나는 허탈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건 ‘가짜’다.

우리는, 아니……. 나는 속았다. 이를 증명하듯 귀로 선명한 음성이 들려왔다.

“거기, 있었구나. 이아나.”

즐거이 웃는 체이서의 음성이었다. 곧 병장기 소리에 파묻혔으나 알 수 있었다. 이로 내 위치가 고스란히 노출되었단 걸.

나는 왕관을 자세히 내려다보았다. 옆에서는 푸딩이 쇠사슬을 찢으려 몸을 키워 마구 물고 흔들고 있었다.

‘이거, ‘가짜’만은 아니네.‘

정확하게는 처음엔 ‘가짜’가 아니었다.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힘으로 알았다. 한때 이걸로 수호신을 봉인했었을 거란 걸. 다만, 다른 곳으로 옮겼을 뿐이지. 느껴지는 흔적으로 보아서는 비교적 최근에 말이다.

나는 철그렁. 길게 늘어진 쇠사슬을 보았다.

“도돌이표네.”

생각해보면 이건 나와 아주 밀접한 것이었다. 캄브라캄에서부터 시작해 도뮬릿의 저택과 잠시지만 헤르님 성에서까지. 나는 항상 감금당한 채로 눈을 뜨고 어딘가에 갇혔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런데, 오빠. 이번엔 당신이 잘못 안 것 같아.”

내 첫 번째 자유는 체이서가 캄브라캄에서 나를 꺼내줬을 때 얻었다. 그러나 잠시 후 다시 감금되었고, 이 사슬은 리케도르안이 부쉈다. 도뮬릿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었던 것은 그다.

항상 누군가에게 해방과 자유를 맡겨왔다.

“푸딩, 더는 물지 않아도 돼.”

입술에 피가 나도록 쇠사슬을 씹는 푸딩이를 멈춰 세웠다. 그대로 고개를 들었다.

“보고 있지?”

천장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비록 움직이지 못하더라도 그이가 아주 가까이 있는 것이 느껴졌다. 나의 일부.

“울지 말아.”

울음소리가 서글피 들려왔다. 마치 내 모습이 무척이나 서러운 모양이었다.

“괜찮아, 익숙하거든.”

체이서는 우리가 이토록 가까이 있을 때 일어나는 일을 몰랐던 모양이야. 나도 이제야 안 거지만 말이야.

“도와줄래?”

첫 번째 사슬은 다른 이가 풀어주었다. 남에게 내맡긴 자유는 또 한 번 찾아온 구속에 구원만을 기다리게 할 뿐이다.

이제는.

내 손으로 부서야 할 때였다.

그렇게 생각한 것과 동시에 천장에서 부드러운 기운이 흘러나왔다. 물결 같은 푸르른 아지랑이는 나를 감쌌다. 미약했으나 이것만으로 충분하다. 손끝에서 푸르른 빛이 꽃처럼 피어났다.

“……항상 푸른 장미의 몸은 왜 이렇게 약할까. 보통 사람과 같을까 궁금했는데.”

맨손으로 돌을 부수고, 철을 찢거나 아무리 말을 타도 지치지 않는 체력, 왜 이런 강인한 육체가 푸른 장미에게는 주어지지 않을까 궁금했었다.

“근데 이젠 알겠다.”

원래의 힘보다 아주 약한 힘이 손끝에 맺혔는데도 알 것 같다.

“그럴 필요가 없었던 거구나.”

쩌쩌적. 쩌적.

챙그랑!

그 말과 동시에 사슬이 유리 조각처럼 산산이 부서졌다.

몸 안에서 무언가 충만한 것이 느껴졌다. 주변으로 푸른 아지랑이가 파도처럼 넘실거린다. 마치 뻥 뚫려 있던 구멍을 메운 듯 잊고 있던 몸의 일부를 되찾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일부가 이 정도 힘이라니.’

나는 내 힘의 아주 일부를 되찾았을 뿐이었다. 내 수호신은 여전히 묶인 채 봉인 당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똑똑히 느껴졌다. 내가 어느 부분에서 길을 잃었고……. 또 어디로 가면 되는지.

“푸딩, 이리 와.”

푸딩이 훌쩍 내 품에 뛰어들었다. 안기기 직전 몸을 작게 만드는 것은 물론이었다. 작아진 짐승을 꼭 끌어안았다. 말하지 않아도 내 심정을 느낀 듯 푸딩은 붉은빛으로 산화하며 내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손을 꾹 쥐었다가 폈다.

수호신은 여기 없어.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분명했다.

‘그곳으로 가야겠지.’

눈을 감았다가 뜨자, 나는 전혀 다른 공간에 서 있었다.

눈앞에는 거대한 홀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홀을 가득 메운 사람들.

쉴 새 없이 부딪치는 병장기 소리와 곳곳에서 신음이 들려왔다.

전체적으로 새카만 옷을 입은 이와 평범한 옷을 입은 사람이 하얗거나 하얗고 푸른 옷을 걸친 이들을 삼면에서 압박하는 형세였다.

당연하겠지만 입구를 등지고 싸우는 희고 푸르른 옷의 이들은 프란시아와 리케도르안의 기사들이었다.

사방에서 타는 냄새와 비릿한 내음이 코를 찔렀다. 여기서 비릿한 냄새는 아마도 피일 것이었다. 나는 무심히 고개를 돌리다 날 집요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마주했다.

“안녕, 오빠.”

단상과 멀지 않은 거리. 리케도르안과 검을 맞대고 있던 체이서가 뒤로 물러났다.

제이르와 장미들이 경고했던 것이 하나 있었다. 흑장미의 능력이 매혹안인 것, 아마도 성당에는 세뇌당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 말처럼 이 홀에는 초점이 없는 눈으로 농기구, 식칼과 삽 등을 붙잡고 휘두르는 이들이 있었다.

아마도 도시에서는 사라졌던 영주민들일 것이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사이에도 체이서의 눈은 내게 고정된 채 벗어나지 않았다.

놀라 크게 뜨인 눈이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간다. 체이서는 검을 거둬들이며 뒤로 물러났다. 여유로운 웃음과 다르게 민첩한 움직임이었다. 그가 비운 자리를 텅 빈 눈동자를 한 사람들이 메웠다.

“어서 와, 이아나.”

그는 언제나처럼 녹진한 음성으로 나를 반겼다. 그러나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목소리에 당황이 담겨 있다는 것을.

나는 빠르게 상황을 훑었다.

모두들 짧은 시간 내에 엉망이었다. 그나마 멀쩡한 것은 리케도르안과 저 멀리 프란시아 정도였지만 그들도 지쳐 보이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아마도 사람들이 다치지 않게 제압하는 싸움은 무척이나 고되었을 것이다. 홀 안은 여전히 병장기 소리로 가득했다. 싸움을 멈춘 것은 오로지 리케도르안과 체이서 주변의 소수뿐이었다.

“흐윽…….”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신음은 사실 기사들에게서 나오는 것이었다. 세뇌당한 이들은 한눈에 봐도 아픈 것을 모르고 신음조차 내지 않고 덤비는 모습이 보였으니까.

계단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던 나는 망설임 없이 싸움 한복판으로 뛰어내렸다.

“이아나!”

거의 2층 높이였지만 나는 익숙하기라도 한 듯 푸르른 기운으로 내 발을 붕 띄웠다. 리케도르안이 내게로 달려오려 했다. 그는 저를 막는 이들을 붉은 기운을 두른 검으로 가볍게 쓰러트리고 다가왔다.

“어째서 여기에…….”

“당신이 다치는 걸 더는 볼 수 없잖아요.”

아마도 어째서 숨어 있지 않고 이쪽으로 왔냐, 이런 의미를 담은 음성이었지만. 난 손을 뻗어 리케도르안의 뺨을 다정하게 매만져 주었다.

“수고했어요, 정말로.”

이미 상황을 아는데 더 다치는 것을 두고 봐서 무엇하겠는가.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수록 묶여 있는 네가 느껴진다. 내 수호신이 아주 가까이에서 숨을 쉬고 있었다.

이 순간에도 내게 꽂혀 있는 한 쌍의 시선은 떨어질 줄 몰랐다. 바로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체이서의 눈이다.

악당과 나 사이의 거리는 멀지 않았다. 리케도르안은 모두를 지키기 위해 최전방에 서 있었으니까.

나는 발을 멈췄다.

“이곳에 있는 거지?”

내 말에 체이서가 낮게 숨을 내쉬었다.

“……역시, 이건 숨기지 못하나 보네.”

아쉬움이 가득 담긴 말이었다.

“그대로 있었다면 안전했던 것을.”

나는 피식 웃었다.

“묶어두기만 하려는 네 방식은 이제 좀 진절머리 나려 해.”

“이아나, 넌 잘 몰라.”

“뭘 자꾸 모른대?”

어느새 내 앞으로 다가온 리케도르안이 나를 지키듯 서고, 검을 겨눴다. 나는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리케도르안, 지금부터 무슨 일이 있어도 움직이지 말아요.”

그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이고는 리케도르안 앞으로 나섰다. 어느새 내 손에는 단검이 하나 들려 있었다. 제이르가 호신용으로 들려준 것으로, 작지만 예리해 무엇이든 벨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나는 이걸 아무렇지 않게 내 목으로 가져와 그대로 손을 내리그었다.

그와 동시에 내 손이 붙잡혔다. 시선을 들어 올리면 내 손을 붙잡고 거칠게 숨을 내쉬는 남자가 있었다.

체이서의 눈이 사납게 흔들렸다.

“너, 무슨 짓이야.”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위협하듯이 흘러나왔다. 이 순간에도 유혹할 듯 황홀한 음성이었으나 난 그저 미소 지었다.

그는 자각하고 있을까. 자신이 이 짧은 시간에 얼마나 빠르게 내게 달려왔는지. 그리고 적들이 포진한 곳으로 달려왔다는 것도.

“진짜 널 모르는 건 너인 것 같은데.”

이 남자가 나를 묶어두려 했던 건, 아마 이 전투에서 나를 위험하게 하지 않기 위함이었겠지.

“참 삐뚤어진 애정이다, 당신도.”

흑장미가 가진 상징은 ‘집착’. 뿌리부터 올바르지 못한 것이 과연 그의 탓이었을까. 그러나 그가 행한 모든 것들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했다.

“미안, 오빠.”

“…….”

“이제 네가 하는 말은 안 들으려고.”

뚝뚝. 붉디붉은 핏방울이 땅으로 떨어졌다.

“너에겐 기대조차 하는 게 아니었어.”

끝끝내 단 한 번도 꺼내지 못했던 말. 당신도 안타까웠다는 그 말은 해선 안 될 것 같아서. 혹시나 이것이 너와 함께 살며 나도 모르게 세뇌된 것일지도 모를까 봐, 꾹꾹 누르고 또 눌렀다. 마음의 작은 틈 하나도 주지 않으려 했다. 그렇지만 이젠 상관없을 것 같다. 미련없이 놓을 수 있다고.

나는 그대로 검을 놓고 체이서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체이서는 눈을 부릅뜬 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마치 내 말에 꽁꽁 묶인 사람처럼.

“몸에는 지니지 않았나 보네?”

흘끗 시선을 던지면 체이서의 눈이 가늘어지는 것이 보였다.

나는 무심히 그의 몸을 훑었다.

곁에 있으니까 알겠다.

힘이 어떤 건지.

어떻게 써야 하는 건지.

“모두 멈춰.”

노래하듯 흘러나온 내 음성에 모든 사람이 거짓말같이 움직임을 멈췄다.

“당신의 수를 알아채지 못하고 한 방 먹었어. 그래서 깜빡 속았지 뭐야.”

나는 천장을 보며 씩 웃었다.

“사실, 이 홀 전체가 봉인 장소였던 거지?”

머리 위로 거대한 푸른 기운이 나타나며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운 형상을 맺었다. 이 거대한 홀을 가득 메우는 모습, 푸른 물결이 파도치는 아래.

거대한 고래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랫동안 봉인되었던 푸른 장미의 수호신. 고래의 거대한 몸에는 쇠사슬이 칭칭 감겨 있었다. 그러나 쇠사슬이 모습을 나타내는 것도 잠시.

챙강!

쇠사슬에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산산이 조각나듯 부서졌다. 흩어진 쇠사슬 조각이 바스러지고 흑색 별빛처럼 아래로 흩어져 내렸다. 검은 별빛이 쏟아지는 광경에서 나는 눈을 들어 올리고 내 수호신과 눈을 마주했다.

“안녕.”

진하고 낮은 울림이 홀 전체를 둥둥 울렸다. 수호신의 기분 좋은 노랫소리였다. 내게도 수호신의 해방감과 기쁨, 행복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 봉인은 내가 수호신과 만나는 것으로 풀리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체이서는 마지막까지 나와 이 수호신을 마주하지 않게 하고 싶었겠지.

“결국은 내가 이곳에 오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었구나.”

정말이지, 수 싸움엔 도가 튼 남자였다.

아니지. 내가 저이를 아는 만큼 나를 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더욱더 간파당한 건 나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어떠하랴? 봉인이 풀린 이상 더는 상관없는 이야기인 것을.

고래에서 흘러나온 푸르른 파동에 모든 사람이 세뇌에서 깨어났다. 홀 안은 순식간에 혼란스러워하는 주민들의 말소리로 가득 찼다.

“이런.”

이대로 해피엔딩이었습니다, 하는 결과였다면 참 좋았겠지만……. 상대는 이 소설의 최종 악역이라 불리는 자였다.

“놀랍네. 여기까지 망치게 될 줄은…….”

몰랐어.

그가 얼굴을 감싸며 중얼거렸다.

리케도르안이 다시 검을 드는 것이 보였다. 체이서의 기사들이 자세를 낮추는 것에 따라 헤르님의 기사들도 다시 검을 들었다.

“하지만, 이아나.”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던 이 상황에서도 남자는 끝까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끝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해.”

그와 동시에 무시무시한 검은 기운이 그에서 흘러나왔다. 여느 때와도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기운이었다. 나는 이 검은 기운 사이로 언뜻 보이는 푸르른 색을 발견하고는 표정을 굳혔다.

체이서는 이전 ‘이아나’의 힘을 받아 회귀했고, 그 탓에 푸른 장미의 힘도 쓸 수 있는 것 같았지.

그게 일부인지, 전부인지는 몰라도.

나는 숨을 훅 들이마셨다.

사실상, 체이서가 세뇌를 일깨운 사람들을 다시 세뇌시킨다면 상황은 불리하게 돌아갈 터였다. 내가 무엇을 하든 막을 것이고, 공백이 생긴 만큼 리케도르안이 활약하겠지만.

짐승처럼 부수고 파괴하는 붉은 장미의 힘은 제압과는 상성이 맞지 않았다. 정의를 지키려는 이들은 평범한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아야 하는 이 싸움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나는 이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피식 웃었다.

이런 걸 보면 악당이 참 편하지. 나라고 어찌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을까.

“타이밍이 잘 맞아야 할 텐데.”

나는 리케도르안을 대동한 채로 체이서의 행동을 지켜보기까지 하는 여유까지 보였다. 이윽고 검은 기운이 이 홀의 바닥을 가득 메웠을 무렵이었다.

쿠웅.

홀 안이 거세게 진동했다. 땅이 울렸나? 아니다. 공기가 울린 것이다. 이윽고 하늘에서 거대한 소리가 들려왔다.

「오래전 약조한 신성한 제전의 허가를 청한 바, 이 자리에 다시 한번 열리노라!」

하늘에서 빛이 흘러내렸다. 천장으로 막힌 탓에 창문으로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스테인드글라스로 만들어진 창문으로 빛이 쏟아지고,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어찌 보면 신자들이 환장할 하늘의 목소리와 더불어 신성하기까지 한 광경이었다.

「제786차 장미 제전이 허가되었노라.」

다행스럽게도 르나그가 타이밍을 잘 맞춰주었다.

나는 크게 웃음 지었다.

「신성한 규칙에 따라 모든 장미는 태초의 영지로 이동하리니.」

그와 동시에 나와 체이서, 리케도르안과 프란시아의 몸이 커다란 빛에 휘감겼다. 나는 통쾌하게 웃는 그대로 입술을 떼었다.

“이런, 우리가 싸울 일은 없겠다. 그렇지?”

3장. 장미 제전의 서막

아주 오래전 태초의 장미가 살아 있던 시대까지 거슬러 존재한다는, 유구한 역사의 신성한 전쟁. 하나 어느 순간에 발자취를 감추었던 의식이 이 자리에 재현되었다.

제전을 준비하면서 여기에 대한 걸 알아보지 않았을 리 없었다.

장미 제전의 규칙은 간단했다.

규칙 하나, 모든 장미는 제전이 시작되는 순간, 자신의 영지로 돌아간다.

규칙 둘, 푸른 장미는 장미들 영지의 한가운데로 이동한다.

규칙 셋, 장미들은 푸른 장미를 찾는다.

참으로 간단하지 않은가?

야만적이기까지 한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구조였다. 그러니, 무대는 더는 이곳이 되지 못했다.

창문으로 빛이 쉴 틈 없이 파고들었다. 흰빛이 너울너울 춤을 추는 광경은 실로 하늘에서 신탁이 내려왔다 해도 믿을 정도로 성스럽고 거룩했다.

빛이 일으킨 바람에 치마가 펄럭펄럭 움직였다. 적어도 이동할 때까지는 아무도 움직이지 못하리라. 체이서의 눈은 찢어질 듯 커져 가라앉을 줄 몰랐다.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서인가 싶었으나 그와는 조금 달랐다. 당황보다는 당혹?

“이아나, 너……. 설마 황실과 손을 잡은 거야?”

장미 제전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건국과 함께 지어진 ‘태양의 황궁’을 필요로 했다. 정확히는 이 거대하고 아름다운 성 한가운데 있는 신성한 제단이 필요로 하며, 반드시 이 시대의 장미가 직접 찾아가 빌어야 한다.

엄중한 감시를 띤 황성 한가운데란 말이었으니 정식으로 청할 시엔 황제의 명이 없고는 불가한 일이었다. 그러니 손을 잡다는 표현은 맞지 않으나 협력하기로 한 것은 사실이었다.

“대답해, 이아나!”

나는 체이서의 의문에 대답해주는 대신 뒤로 시선을 던졌다.

곧 내 발이 자유로이 움직인다. 앞서 아무도 움직이지 못한다 했으나 나만은 예외였다. 이 제전은 내가 주인이자, 나를 위해 열린 것이었으니.

나는 차분하게 걸어 한곳에 도달했다. 리케도르안이 있는 곳이었다.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리케도르안이 기다렸다는 듯 내 손을 마주 잡았다. 리케도르안의 몸에서 희미한 빛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맞잡고 있던 손이 희미해졌다.

“리케도르안, 돌아가면 캄브라캄에 갈 채비를 바로 해요.”

리케도르안은 내 팔을 그대로 잡아당겨 나를 품 안에 안았다.

뒤에서 끌어안긴 채로 그가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네. 곧바로 찾으러 갈게요.”

나를 안고 있던 팔이 점차 희미해졌다. 리케도르안이 얌전히 송환에 응한다는 소리였다. 프란시아가 있던 곳을 보니, 이미 그녀는 재빨리 응한 것인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뒤였다.

아마 남은 기사들은 제이르와 프란시아의 부관이 수습해 빠르게 물러날 터였다. 어렵지 않을 거다. 저쪽의 지휘관인 체이서도 역소환될 것은 매한가지였으니까. 리케도르안에게 흘끗 눈인사를 하면서도 체이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보고 싶을 거예요…….”

“금방 볼 것을요.”

우린 보지도 않고 이렇게 대화했다. 나는 무언가 이상함을 지우지 못했다. 마침내 등을 덮었던 리케도르안의 몸이 사라졌다. 등을 덮었던 커다란 체온이 사라졌기 때문일까?

등 뒤로 싸늘한 한기가 몰아쳤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불안과 함께. 왜지? 모든 게 생각한 대로 되고 있는데…….

파지지직.

이때 거대한 번개가 일어났다. 체이서가 무언가에게 저항하는 듯 검은 기운을 피워냈다. 그는 소환을 거부한 채 핏발선 눈으로 나를 보았다.

“크흡. 이아나. 다른 건 몰라도 절대, 절대. 황실과는 손을 잡아선 안 돼. 믿어선 안 돼.”

……무슨 말이야. 지금 상황에 체이서보다 위험한 악당은 없었다. 이런 와중에 누군가를 믿지 말라니.

우습지도 않은 얘기였다.

“웃기지마. 이 순간에 가장 위험한 사람은 다름 아닌 너야.”

“아무리 좋은 소릴 흘려도 듣지 마. 그래, 지금 네가 내게 하는 대로, 모든 걸 의심해. 이제까지 그러했듯이!”

“무슨 소리야, 당신.”

이제 와 동정이라도 살 생각일까? 머리가 좋은 남자였다. 합당한 의심이었다.

“날 의심하게 만든 건 너잖아.”

눈앞에서 사람이 끌려가는 것을 보았다. 내 발에 채워진 족쇄와 사슬을 보던 시절이 존재하는데 어찌 자신을 믿으라 말하는 것인가.

그답지 않은 얼굴과 다급한 어조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네 말은 더는 안 믿어.”

이어서 눈을 가늘게 좁혔다. 고개를 내리면 이렇게 말하는 내 손도 점차 희미해지는 것이 보였다.

“이아나! 제발, 들어. 후, 내가 밉더라도! 황실은……!”

그대로 시야가 암전되었다.

체이서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남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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