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세상엔 현명하디현명한 신이 있었습니다.
신은 모든 피조물을 공평하게 사랑했으며 자신을 돕는 이들과 함께 세상을 평화롭게 유지하였어요.
덕분에 오랜 시간 세상의 균형이 지켜졌네요.
그러던 어느 날 세상을 굽어살피던 신은 갑작스럽게 힘이 다해 죽음을 맞이하고 말아요…….
하지만 신은 커다란 힘을 가진 탓에 죽고 나서 사랑했던 세상에 모두 묻힐 수가 없었어요.
죽은 신은 갈기갈기 조각납니다.
신의 파편들은 다른 세상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신이 보살피던 세상에는 단 한 조각을 남기는데. 세상에! 어느 날 이 단 하나의 조각이 묻힌 자리에 탐스러운 ‘장미’가 피었습니다.
바로 신이 살아 있던 시절 유달리 아끼던 작디작은 식물이었어요. 하지만 이 장미는 신의 파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세상에는 줄곧 없던 단 하나뿐인 장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 아래에서 신을 너무나 사랑했던 네 존재는, 신의 죽음에 엉엉 울다가……. 꽃으로 피어난 신의 파편을 본 순간 삶과 모든 영광을 버리고 힘을 버리고. 똑같이 꽃이 됩니다.
누군가는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마음을.
누군가는 영원히 지키고 싶은 보호와 신념을.
누군가는 아픔을 치유하던 기억을.
또 누군가는…… 강렬히 사랑했던 집착만을 남긴 채로.
모두가 말 못 하는 식물이 되었습니다.
죽은 신의 파편은 행복했을까요? 그건 모릅니다. 식물이 된 파편은 대답이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시간이 더욱 흐른 어느 날.
기적이 일어납니다.
신의 파편이 돌연 변덕을 부려 인간이 되었던 날.
다른 장미들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똑같이 인간이 되었죠!
그리고 그 뒤에는?
그리고……. 숨겨진 이야기가 하나 있어요. 아무도 몰래 신을 사랑하던 한 존재가 있었답니다.
멀리서 신을 애타게 사랑하고 존경하고 바라보았지만 힘이 부족해, 신의 어떤 존재도 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신이 죽은 뒤에 똑같이 꽃도 되지 못했어요.
하지만 그에게 신을 사랑했던 마음은 남아있던 탓에 스스로를 장미라 불렀습니다. 이 마음은 날로 날로 그리워지다가 어느 날 다른 이름이 되고 말았어요.
왜, 나만 이토록 사랑해야 하지?
바로, ‘질시’였지요.
***
“……질시한 그 존재는 똑같이 인간이 되었나요?”
거기까지 이야기를 듣다 말고 나는 질문했다. 황제의 그윽한 목소리가 멈췄다. 이야기엔 소질이 없다고, 길게 풀지도 않을 거라더니. 한편의 극을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네.”
동시에 내가 잘 꾸며진 동화를 들었나 의심스러웠다. 아니, 동화라고 하긴 했지. 내용이 동화 같지 않았을뿐.
“그러니까. 이게 모두 사실이란 말인가요?”
“황당한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지만 황제 앞에서 머리를 짚을 수는 없었다. 황제가 웃으며 묻는 말에 난 그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한 편의 위대한 건국 설화를 들은 것 같아요.”
“더 솔직히 말해보게.”
“신이 초대 황제쯤 되시나요?”
“애석하게도 그렇진 않네. 황실은 주인공이 아니니.”
황제의 음성이 약간이지만 낮게 가라앉았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럼, 마지막에 나온 존재가…… 황실인가요?”
“그렇네.”
황제는 그 뒤로 수많은 역사가 있었다. 라는 말과 함께 핵심만을 요약하면 이러했다.
“최초의 장미가 나타났던 시대엔 전쟁과 혼란으로 가득했지. 시간이 흐르며 황실의 시조가 인간의 권력을 잡았지만. 푸른 장미를 향한 다른 장미들의 맹목적인 충성을 꺾을 수는 없었다네. 장미 가문이 괜히 지금도 푸른 장미를 왕으로 받드는 것이 아닐세.”
그야 그럴듯했다. 듣자 하니 시작부터가 신을 쫓아 모든 걸 버린 존재들이라 하지 않나.
“황실의 시조는 가장 인간적인 존재였기에 제국의 주인은 될 수 있었지만. 영향력은 푸른 장미를 이 땅에 가둬두는 데에 그쳤다네.
황제가 꾹꾹 자신의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 자신은 여전히 신을 갈망하는 그 마음을 품은 채로, 자신을 ‘보라색 장미’라 일컫지.”
조금 전부터 황제의 목소리가 달라졌다고 느꼈다. 착각인가 싶었지만……. 착각이 아니었다.
“황실의 시조는 영원을 꿈꾸었던 모양이야.”
황제가 깊이 숨을 내쉬었다. 많은 감정과 한이 섞인 숨이었다.
“푸른 장미를 사랑하다가 미쳐서 질시하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픈 꿈을 꾼 것이지.”
배배 꼬이고 괴팍하며 삐딱한 웃음이 그녀의 우아한 얼굴에 걸렸다.
“그래서인지 시조가 남긴 이 힘은 역대 보라색 장미를 품은 인간의 영혼을 물들였네. 후손들 하나도 빠짐없이.”
터무니없던 이야기와 내가 알고 있던 장미의 이야기들이 톱니바퀴처럼 이가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짐은, 이걸 ‘오염’이라고 부르고 있다.”
황제가 천천히 손을 올렸다. 나는 어느새 황제의 손끝이 떨리고 있음을 목도했다. 영문 모를 불안감이 나를 덮쳤다. 왜? 황제가 이토록 내게 호의적인데, 뜻을 알 수 없었다. 푸딩이가 느끼는 감정인가?
아니다. 그것과도 달랐다. 내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내가 지금 보는 것은 조금 전의 황제와는 다른 존재라고. 이건 황제를 처음 알현했을 때 느꼈던 불길한 느낌이었다. 이윽고 황제의 주변으로 검고도 음습한 자색의 희끄무레한 인영이 보이는 것 같았다. 착각이 아니었다.
저 황제의 곁에는 ‘다른 것’이 함께 있다.
황제는 줄곧 한쪽 얼굴을 머리카락으로 가리고 있었다. 살랑.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도 꿋꿋하게 가려져 있던 것이 그녀의 손에 들려 움직였다. 지난 알현에서 보았던 상처가득한 반쪽 얼굴이 드러난 순간 난 숨을 삼켰다.
“짐은 삼켜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네만.”
짐승이 할퀸 듯 깊이 할퀸 상처로 가득한 얼굴, 관자놀이부터 눈가, 입술 끝까지 가로지르는 거대한 사선이자 흉터.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네. 시간이 지나면 짐도 오염되고 말 거란 것을 말일세.”
“그것이 무엇인지.”
그녀는 이 흉터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웃었다. 차디찬 미소였다.
“……그 오염이란 게 정확히 무엇인가요?”
그녀의 눈이 깊고도 어두운 빛을 드러냈다.
“그 전에 들어야 할 것 있다. 짐이 가진 힘 안에는 역대 보라색 장미였던 영혼이 있네.”
“네?”
그 순간 영롱하다고 생각했던 보라색 눈으로 기묘한 푸른 빛깔이 섞였다.
“쉽게 말해 선대 황제들의 영혼이. 이 힘에 휘둘려 끔찍한 질시에 사로잡힌 영혼들이 죽어서도 안식을 받지 못하고 들러붙어 있단 말일세.”
눈동자가 굴러 나를 향했다. 오싹함이 들었다.
“덕분에 제국의 황제는 누구보다 현명하고 분별 있는 판단과 계책을 낼 수 있지만.”
그녀는 고개를 기울여 아름다운 낯으로 미소했다. 사람을 홀리듯 황홀했으나 광기가 스민 시선과 함께.
“동시에 미치기 쉬워지지.”
긴 머리칼이 커튼처럼 흘러내린다.
“미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얼굴을 망가트리지 않았다면 짐은 푸른 장미에 미친 폭군이 되었을 것이네.”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여서일까. 저 자안 속에서 일렁이는 푸른 빛이 끝내 푸른 빛을 동경한 무엇인가로 보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몇 분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듯한 시선 때문일지도 모른다. 무거운 위압감이 나를 짓눌렀다.
“그래서 그대가 필요해 영애. 부탁하네.”
이 나라의 절대자가 한낱 영애인 내게 간청하듯 말했다.
“짐의 아군이 되어줄 수 없겠나?”
지금껏 내 장미들이 보인 시선과는 결이 달랐으나 그럼에도 그녀의 눈은 명백한 갈망을 품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이 최초의 푸른 장미가 가지고 있던 티아라로 어찌저찌 이 힘을 눌러뒀네만. 더는 힘들 것 같아서 말일세.”
“제게 무엇을 바라시는 건가요?”
“이 땅을 어지럽히는 장미들이 모조리 사라졌으면 하네.”
나는 숨을 들이켰다. 주먹을 꾹 쥐었다가 펴며 황제와의 거리를 가만히 가늠했다. 아직은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내게 위해를 가할 때를 대비해서였다.
“그 장미에 저와 현 장미 가문의 주인들도 포함된 걸 아시는지요?”
“역시 그건 어렵겠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황제의 얼굴에 초조함이 스쳤다.
“……미안하네. 실언이었군.”
그녀는 이제야 자신이 한 실수를 알아차린 것처럼 보였다.
지금까지 단단했던 얼굴이 놀랄 정도로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정말이지 지켜보고 있던 내가 깜짝 놀랄 정도로.
“하아, 보다시피 짐은 간신히 균형을 유지하고 있네. 방금도 짐의 의지로 한 말이 아니야.”
황제가 자신의 눈을 가렸다. 가늘게 열린 입술 사이로 여린 음성이 새어 나왔다.
“제발, 도와주게.”
나는 눈을 크게 깜빡였다.
“나는, 미치고 싶지 않아.”
허물을 벗어던진 음성에 쥐었던 주먹마저 스르륵 힘이 빠졌다. 손가락 사이로 드러난 황제의 눈이 울 것처럼 일렁거렸다.
“장미를 지워달라는 게 아니야, 내게서 이 힘을 지워주게.”
“…….”
“나를 잃고 싶지 않아. 나는 나로서 이 나라를 오래도록 이끌어가고 싶어.”
“……제가 무엇을 할 수 있나요?”
“캄브라캄으로 가게.”
황제가 정신을 차린 듯 조금 차분해진 음성으로 이야기했다.
“캄브라캄에 관한 자료를 주지. 캄브라캄으로 가면 그대는 충분히 그리 할 수 있어.”
우습게도 모든 것이 하나로 귀결되었다. 캄브라캄. 내가 눈을 뜬 공간.
그곳에서 리케도르안의 수명을 원래대로 돌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황제의 힘을 없앨 수도 있다고 한다.
나는 지고한 자리에 위치한 여성을 보며 숨을 삼켰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일단 목을 걸고 봐야 할 것 같은데, 그럼에도 하기로 했다.
“들려주신 푸른 장미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인 가요?”
“그렇네.”
“결국 황실에는 푸른 장미에 대한 자료는 없었던 거군요.”
“…….”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감히 제국의 황제 폐하께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한 가지 드리고픈 말이 있습니다.”
“무엇이지?”
“제게 바라는 것이 이리 크고 많으신데, 폐하께서는 제게 무엇을 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아름다우신 폐하께는 미안하지만 나는 정이 들지 않은 사람에게는 뻔뻔하고 단호하게 선을 그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옛이야기 하듯 거대한 진실을 던지고, 내게 반강제로 청을 하는 것이 어린아이의 아집과 다를 것이 무어란 말인가? 그녀에게도 나름의 고충과 상처가 있음은 알겠다. 하지만 이런 식의 통보는 달갑지 않았다.
“그대와 대공이 캄브라캄에 가는 것을 허락했네.”
“이는 저희가 가지고 계신 티아라를 바친 대가로 알고 있습니다.”
“…….”
“약속하신 자료도 사실 기원에 대한 이야기로 끝입니다. 이 마저도 보라색 장미에 대한 설명이셨습니다. 푸른 장미의 정보가 ‘보관’되어 있다고 하셨지요.저 와 대공님에게 거짓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한데?”
“푸른 장미에 관한 것은 모두 사라진 지 오래라고 하던데, 사실인지요.”
“도뮬릿 공작이 말하던가?”
나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황제에게는 충분한 대답이 된 듯했다.
“모두 거짓은 아니네.”
그녀는 자신의 거짓을 일부 시인하면서도 해명을 함께 드러냈다.
“푸른 장미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야. 짐의 주변을 떠도는 망령들이 속삭이는 이야기는 알지만. 이쪽이 유용하다는 것도 알지.”
“기록이 있다는 것이 거짓이었군요.”
“그렇지. 망령의 말을 기록할 순 없으니 말일세.”
“그렇다면 이와 별개로 폐하께선 무엇을 해주실 수 있나요?”
“살다 보니 이런 질문을 듣는 날도 오는군.”
불호령이 떨어질지도 모른단 예상은 했다. 하나 왜인지 황제는 화를 내는 대신에 천천히 웃었다.
“뭐. 나쁘지 않아. 바라는 것이 있어 운을 떼었을 테니, 말해보게.”
오히려 감이지만 그녀는 이쪽을 더욱 반겨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씩 웃었다. 처음의 여유를 되찾은 얼굴이 위엄 어린 빛을 드러냈다. 동시에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신나 보였다.
“짐은 이 땅의 누구보다 ‘장미’에 대해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다. 푸른 장미뿐 아니라 다른 장미에 관한 것도 모두. 궁금한 것은 없나? 무엇이든 답할 수 있지.”
이 말은 과연 진실일까. 나는 그녀의 진실 여부를 두고 고민했다. 저울은 조금 전, 제발 이 힘을 거둬달라고 애원하던 모습을 믿는 쪽으로 기울었다.
“저는 오라비가 가둬둔 푸른 장미의 수호신을 되찾고, 캄브라캄에서 헤르님 대공 각하의 수명을 원래대로 돌리고 싶어요. 하지만 제 오라비가 가진 비정상적인 집착은 이를 가만히 두지 않겠죠.”
“그런데?”
체이서를 잘 알았다. 아름답지만 독과 가시를 품은 듯 위험한 남자. 사랑과 독점욕을 별개로 여기는 남자였으니.
아직은 내 목적을 모르는 것 같았지만……. 리케도르안을 살리려는 행동을 눈치채면 무슨 수를 써서든 방해할지도 몰랐다. 여인의 두 눈이 나를 담았다.
“짐이 가진 힘의 본질은, 흑장미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 그래서 잘 알고 있네. 이대로 그대를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란 것을.”
“네.”
“장담컨대 이대로 두면 도뮬릿 공작은 반드시 전쟁을 일으킬 걸세. 그대도 이미 알고 있겠지?”
“…….”
그 말이 사실이다. 실제로 다른 장미들, 리케도르안과 프란시아, 르나그도 예상한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를 절대 원하지 않기도 했고. 황제는 해결책을 던졌다.
“흑장미를 죽여 이 세상에서 말살하는 것이 제일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우니, 다른 방법이 없진 않아.”
살벌한 말을 담담하게 이은 황제가 말했다.
“장미제전을 일으키게.”
“네?”
장미제전. 익히 아는 단어였다. 하지만 여기서 나올 줄은 몰라 눈을 깜빡였다. 그거. 장미들끼리 합법적으로 치고받는 싸움 아닌가?
말이 싸움이지 전쟁이다. 전쟁을 피하려는 방법을 물었더니, 전쟁을 하란다. 이런 모순이 또 어디 있나. 이 사람이 이미 반쯤 미친 건가. 그런 합리적인 의심을 할 즈음이었다.
내 표정을 보았는지, 황제가 미소를 띠었다.
“노려보지 말게. 지금부터 설명하려 하니까.”
“……노려보지 않았습니다.”
“이런 너무 귀엽게 굴지 말게. 나는 귀여운 영애에게 약하거든.”
그녀는 가벼운 농을 던지고는 설명을 이었다.
“장미 제전을 말한 것은 이 싸움에 정해진 규칙 때문일세. 이 제전은 고대 규칙에 따라 승자가 정해지면, 패배한 가문은 다신 문제를 일으킬 수 없네.”
“문제를 일으키지 못한다는 게 어떤 것을 말씀하시나요?”
“제약이 걸리게 되지. 죽기 전까지 평생.”
“……혹시 감금이라도 당하나요?”
“아니, 그런 게 아닐세. 이를테면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다’ 혹은 ‘푸른 장미의 곁에 나타날 수 없다’ 등으로 분란을 일으킬 수 없게 제약을 만드는 거야. 무언의 힘이라 생각하게.”
여기까지 듣고서 나는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장미들의 비상식적인 힘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잘 생각해보면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나는 생각 끝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고요한 홀 안에서 움직이는 것은 그녀의 어깨에 앉은 박쥐뿐이었다.
박쥐라. 왜 하필이면 수호신이 박쥐였을까. 박쥐를 옆에 둔 황제는 더는 반쪽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 거리낄 것이 없다는 듯이.
“폐하의 소원은 힘을 없애는 것, 이 하나뿐이신가요?”
“그렇네. 오직 하나뿐이야.”
그녀는 그리 대답하며 장미 제전의 과정에 대해서도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푸른 장미를 두고 벌이는 전쟁답게 방식은 내가 정할 수 있다고 한다.
결코 나쁘지 않은 정보였다. 아니, 이 정도면 대단히 만족스러운 정보 아닌가.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획이 스쳐 지나갔다.
이걸 잘만 사용한다면 어쩌면 이 꼬인 문제를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자리니, 감사할 것은 없지. 오히려 내가 영애에게 감사한 마음이군.”
그녀는 조금 전에 보였던 음습하고 광기 어린 낯은 온데간데없이 총명하고 현숙한 황제로 돌아와 있었다. 그제야 이 사람이 품고 있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조금 전의 모습을 보아 황제를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더구나 이미 한번 나를 속였다, 다시 속이지 말라는 법은 없다.다만 나라를 위해 힘을 버리고 싶다, 절박함을 일부나마 믿어보기로 한 것이지.
“폐하, 외람된 이야기지만.”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힘이 어느 날 주어지고, 휘둘린다는 건 어떤 느낌인가. 사실 나는 이런 느낌을 이미 알고 있다.
“사실 저는. 인외의 힘이 인간의 운명을 이리저리 좌지우지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건 어느 날 감방에서 눈을 떴을 때부터 줄곧 하던 생각이었다. 내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다른 세상으로 오게 되었으니까. 그렇기에 줄곧 이 기묘하고도 맹목적인 관계의 뿌리가 궁금했고, 기원이 궁금했다.
황제는 이를 충족시켜준 것이다.
잠시 눈을 크게 뜬 황제는 이내 천천히 눈을 휘었다.
“그 점은 짐과 생각이 같군.”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망령에 시달려 폭군이 되는 상황은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망령들은 올바른 판단을 내리되 자아는 죽어가는 황제를 만들지. 인형과 무엇이 다르겠나?”
그리 말하는 황제의 모습이야말로 그녀 본연의 모습이 아닐까 했다. 그녀는 좋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좋은 황제였다. 그 뒤로도 한참의 대화 끝에 독대가 끝이 났다.
“영애, 혹시 그대의 정원에 장미가 더 필요하진 않나?”
황제의 농밀하고도 짓궂은 농담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