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64/87)

***

“……아이고.”

생각해보면 이전 세계에서 나는 책을 참 좋아했던 것 같다. 뭐, 감수성을 자극하는 문학을 즐겨 읽었다면 좋았겠지만…… 내가 즐겨 읽었던 건 도색 서적이다.

그럴싸한 단어로 말해서 그렇지 야한 책, 꾸금 책, 빨간 책 말이다. 아무래도 연령 제한 있는 책을 읽다가 우연히 전연령이 읽는 책을 보게 되면 동화책을 잡은 기분을 느끼곤 했다.

각설하고 그런 곳에 나오는 아침의 짹짹짹, 하고 새 우는 소리가 정말 싫었는데 말이지…….

짹짹짹.

나는 새가 지지배배 지저귀는 오전의 풍경을 보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눈 깜빡할 사이에 아침이네…….’

나는 어찌저찌 상체를 일으켜 세우기는 했지만 이불을 둘둘 감은 채 일어설 줄 몰랐다. 그도 그럴 게 허리에서 느껴지는 뭉근한 고통, 온 몸이 뻐근해서 움직이질 못하겠다.

‘할 일이 많은데 말이지.’

나는 슬그머니 아래를 향했다. 조금 전까지 이곳엔 단단한 팔을 내게 휘감고 새근새근 잠든 남자가 있었다. 한데 지금은 왜 없느냐 하면……. 아침에 끙끙 숨을 흘리며 앓는 나를 보고 깜짝 놀라 일어났다는 얘기다. 그러고는 헐레벌떡 달려나가서 데려온 사람이 바로, 프란시아였다.

“전쟁이라도 일어난 줄 알았네.”

그녀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자다 말고 대공새끼가 쳐들어와서 깜짝 놀랐어. 전쟁이라도 난 줄 알았네, 정말.”

아무래도 늘어지게 늦잠을 자던 모양이었던지 색이 연한 곱슬머리카락이 부스스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심지어 옷차림도 바지 잠옷 위로 가운만 하나 걸친 모양새였다.

“그건 그렇고.”

프란시아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눈을 마구 찡그렸다. 이어서 이마에 마저 주름을 지웠다. 화를 내기 직전의 상태였다.

“누가 이렇게 무식하게 해?”

나는 그저 미소하고 말았다. 나도 동의 못 하는 건 아니었던 지라. 가리기엔 이미 늦었다. 살짝 이불을 내리자 보이는 어깨가 온통 울긋불긋 물들어 있었다. 더 내리자면 더욱 난리통일 터였다.

“언니, 죽여도 돼?”

“어?”

“개새끼네.”

그녀답지 않은 험한……은 아닌가. 몇 년 전 도뮬릿에서도 그녀의 입은 이미 험한 바 있었다. 나는 뺨을 긁적였다.

“음, 진정해. 이건 어, 쌍방인데.”

“누가 몰라? 그래도 그놈이 개새끼야.”

“어…….”

“명확히 말하면 다른 말도 아니잖아, 언니.”

프란시아가 돌연 화사하게 웃었다.

“대공 각하는 짐승 같은 힘을 가지셨고, 그러니까 연약한 사람을 대할 땐 조심해야 한다, 그렇지? 보통 사람의 뼈는 버드나무 가지처럼 똑 부러트리는 사람이니까.”

“……그렇지?”

예시가 살벌하긴 하지만 실제로 그러했다.

“짐승 같은 사람이 그 힘을 함부로 막 썼어. 그럼 그게 뭐다?”

“뭔데?”

“짐승 새끼지.”

“…….”

나는 입술을 감싸 쥐었다. 실상 프란시아가 말한 것처럼 리케도르안이 거칠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아나, 조금만…… 조금만 더 힘을 빼요……. 다, 흐, 다칠 것 같아서…….>

침대 장식을 악력으로 부술지언정 나는 유리 세공하는 것처럼 몹시 조심스럽게 대한 남자였다. 그럼에도 아픈 건 아마…….

‘무식한 크기 때문인가.’

나는 손으로 원통 모양을 만들어보다 이내 포기했다.

재현이 어려울 것 같았다.

아무튼 간에 리케도르안이 헐레벌떡 프란시아를 데려온 건 치료를 위해서였다. 프란시아 본인도 이를 모르지 않는 듯했고, 오히려 이 사실에 더욱 날뛰었음은 물론이었다.

“자는데 깨워서 미안해.”

“아니야. 언니가 사과할 일은 아니지!”

프란시아가 거세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고는 활짝 화사하게 웃었다.

“그리고 언니는 언제나 예외야. 언제라도 부려먹어도 돼.”

나는 리본을 묶다 말고 손을 들었다.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마주 웃었다.

“고마워.”

프란시아의 능력은 실로 대단했다. 그녀의 흰빛이 나를 감싸자, 둔탁한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진 것이다.

이어서 프란시아는 보복이랍시고 리케도르안이 내 살갗에 남긴 모든 흔적을 지워버렸다. 어디 한번 분해 보라고 말이다. 나는 리케도르안이 이를 알게 된다면…… 다시 한번 새기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녀를 위해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옷을 꺼내 입고 리본까지 바로 묶고 나니 어제의 흔적도 없이 깔끔해졌다. 어제의 일은 흐트러진 침대보와 부서진 침대 장식으로만 남아있을 뿐.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프란시아가 손을 앞으로 모았다가 꼼지락 쥐었다가 폈다. 무언가 할 말이 많은 기색이었다.

“저 언니…….”

“응?”

“있잖아. 솔직하게 물을게.”

프란시아는 말이 잘 나오지 않는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가 놓았다.

“나랑 노란 장미는 이제 여기서 나가야 해?”

리케도르안이 그녀를 데려온 까닭에 이제 프란시아는 어제 있던 일을 모르지 않았다.

“푸른 장미가……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장미들은 따라야 하니까…….”

그리고 이를 ‘선택’이라 여기는 듯했다. 나는 그녀를 천천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나가 달라고 한다면 나갈 거야?”

“응.”

“앞으로 나랑 평생 못 봐도?”

그러자 놀란 듯 나를 본 프란시아가 눈을 크게 깜빡였다. 동그란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건 싫지만. 그래도…….”

“그래도?”

“언니가 선택한 거니까.”

그녀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따를 거야.”

눈물을 머금고도 꿋꿋하게 참아내는 모습이 처음 프란시아를 만났던 때를 떠올리게 했다. 악에 차 있었으며 두려움과 공포로 가득 찬 눈동자는 눈물을 잔뜩 품고 있었지만 끝내 울지는 않았던 작고 처참했던 소녀를.

나는 빙긋 웃었다. 그러고는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장난스레 껴안았다.

“그럼 여기 있으면 되겠다.”

“응. 바로 나갈…… 어?”

“여기 계속 있으면 돼.”

우리가 처음 만난 날처럼. 이번에도 내가 한걸음 먼저 다가간 채로 그녀의 양 손을 잡았다.

“계속 같이 있어도 돼.”

“…….”

“사람 관계를 어떻게 무 자르듯이 하루아침에 자를 수 있겠어. 너도 르나그도 리케도르안도. 세상에는 맹목적인 관계 하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야.”

프란시아는 그날같이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저 길을 잃은 아이처럼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사람에게 소중한 것이 꼭 하나만 있으라는 법은 없어.”

물론 그 소중함에는 차등이 있을 수 있으나 그럼에도 모두 소중하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하나를 선택하면 나머지를 비참하게 버리는 관계. 천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누군가는, 아니, 수많은 선택 받지 못한 이들이 이 기형적인 관계에 아파하고 상처받아 왔을까.

“내겐 너도 소중해, 프란시아.”

맞잡고 있던 손등으로 눈물이 뚝 떨어졌다. 프란시아는 눈조차 깜빡이지 못한 채로 눈물만 뚝뚝 떨어트렸다. 커다란 눈동자에서 떨어진 것이라 그럴까. 옥구슬같이 굵고 큰 눈물만 뚝뚝 떨어트리는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마치 이런 말은 평생 처음 들어보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어차피 난 선택 받지 못할 테니까. 버림받을 거라 생각했어.”

프란시아가 턱 끝을 소매 끝으로 꾹꾹 누르며 단정하게 말했다.

“우린 그런 관계니까. 그래도 언니를 다시 볼 수만 있으면.”

담담해서 더욱 가슴을 파고드는 목소리로.

“계속 아주 먼 곳에서라도 볼 수 있다면 좋을 거라고.”

“왜 그런 생각을 해. 아니. 이제 안 해도 돼.”

난 위로에 서툴지만…… 어쩐지 앞으로 그 능력이 아주 많이 커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으음, 안아줄까?”

우는 아이를 달래는 데는 뭐가 좋을까 고심 끝에 나온 말에, 대답을 들을 겨를도 없이 나와 비슷한 체구가 품에 쏙 안겼다.

프란시아에게서는 청순한 향기가 났다.

오래전에 주워듣기로는 백장미는 장미 품종 중 향기가 흐린 편이라 했는데…… 내가 잘못 안 것 같다.

“언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해사하게 웃는 얼굴에서는 세상 어디를 뒤져도 찾지 못할 향기가 가득 묻어 있었으니까.

“칼리스토, 뭐해! 너도 안겨! 이제 언니한테 꼭 붙어 있는 거야.”

캬오! 아웅! 어느새 그녀 옆으로 소환된 칼리스토가 앙증맞은 앞발로 내 다리에 폭 매달렸다. 수호신과 장미가 하는 행동이 아주 똑같았다.

“언니, 미안해.”

프란시아가 눈물을 머금은 눈으로 배시시 웃었다.

“뭐가?”

“……으응, 안 되면 엉엉 울어서라도 언니를 잡아보려 했어. 동정을 사도 좋으니까. 연민만큼 질척한 건 없으니까.”

“연기였다는 거야?”

그녀는 웃음으로 대답했다. 프란시아는 이렇게 말했지만 나는 이 눈물이 가짜고 연기일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 정도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순진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모른척하기로 했다.

“괜찮아. 연기여도 기뻤으니까.”

“…….”

내 말에 멈칫한 프란시아가 눈을 둥글게 휘었다.

“언니는 무심한 것 같으면서도 다정해.”

“그거 이상한 말이네.”

“그런데 언니를 표현하기엔 더 적절한 말이 없는 것 같아.”

그녀도 동의하는지 내 말에 끄덕였다가 다시 나를 보았다.

“언니가 내 푸른 장미라서. 우리의 왕이라서 너무 좋아.”

잠시지만 뜻을 알 수 없는 것이 그녀의 눈동자로 스쳤다.

“난 언니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못되고 약은 아이지만.”

프란시아가 고개를 숙여 톡 내게 이마를 가져다 댔다. 내게 이마를 맞댄 채로 아름다운 미소를 보였다.

“이런 내게 평생 속아줘, 언니.”

색이 다른 눈동자에 각기 다른 빛이 고였다. 반달로 접힌 눈이 몹시 어여뻤다. 나는 눈을 크게 깜빡이다가 이내 웃었다.

“그래. 그럴게.”

앞으로 삶을 함께할 장미. 내 삶의 동반자를 마음속으로 인정하면서.

***

프란시아와 이야기를 끝내고 문을 열었을 때, 나는 문 앞에서 예상치 못한 사람과 마주쳤다.

“잘 주무셨습니까.”

르나그였다. 그가 내 방 앞에 있다니? 아니, 엄밀히 말하면 응접실이었으니 내 방은 아니었다.

“네. 좋은 오전이에요. ……저, 르나그. 계속 여기에 있었어요?”

프란시아는 방을 나간 지 오래였다. 점심시간에 보자며 약조를 하고서 말이다. 프란시아가 르나그를 보았다면 한마디 했을 것 같은데,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나 싶어 물어보았다. 본능 같은 확신이 들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이 또한 대답이다. 르나그의 침묵은 언제나 긍정에 가까웠으니까. 나는 언제나처럼 단정한 모습을 한번 훑듯 보았다.

단정해 보였으나 무언가 조금 이상했다. 미묘하게 잘못 채워진 단추라거나, 평소보다 느슨하게 묶여 살짝 흐트러진 긴 머리라거나.

“……이른 아침에 산책 도중 발소리가 들렸습니다. 대공 각하가 급하게 어디론가 달려가기에.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나는 왜일까. 그가 이곳에 계속 서 있던 거라면 나와 프란시아의 대화를 모두 들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미들은 기본적으로 신체 능력이 뛰어나다. 보통 사람과는 다른 신체는 비단 가장 뛰어난 리케도르안 만큼이 아니어도 이런 문 너머의 말소리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하였다.

물론 그렇기에 헤르님 성의 모든 방은 방음 마법이 기본으로 걸려 있었지만…….

나는 흘끗 문을 응시했다. 오늘 아침에 리케도르안이 부순 탓에 문고리가 날아가고, 문 아귀가 살짝 맞지 않았다. 아마 문틈으로 말이 샜거나. 마법이 사라졌거나 둘 중 하나였을 거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보다시피 아무런 일도 없어요. 염려 마세요.”

내 말에도 그는 내게서 눈을 떼어내지 못했다. 꺼내지 못한 말 대신 눈으로 수많은 말을 건네는 듯한 시선이었다.

“이아나 양.”

그가 작게 읊조렸다. 아주 낮고 작아서 귀를 아주 기울여야 겨우 들리는 크기였다.

“……한 번만.”

“네.”

“안아봐도 되겠, 습니까?”

그는 말하던 도중 무언가 목에 걸린 듯 잠시 멈췄지만 이어 끊어질 듯 작은 목소리로 이었다. 그의 얼굴은 붉지 않았다. 나는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끄덕였다.

커다란 몸이 나를 끌어안았다. 리케도르안은 언제나 내게 안기려 들듯 파고들었다면 르나그는 작은 포옹조차도 그다웠다. 포근한 이불 같았다. 그저 체온으로 나를 덮을 뿐이었다. 불면 날아갈까 주의를 기울이는 배려가 넘치게 느껴졌고 닿은 것도 닿지 않은 것도 아닐 정도로 조심스러웠다.

“사랑합니다.”

나는 손을 들어 그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이 사랑이 부디 그를 너무 상처입히지 않길 바란다. 내 무심한 배려가 오히려 나쁜 선택이 아니었기를 바란다.

“당신은 그저 사랑하는 것을 허락했을 뿐이고, 그저 그뿐이지만. ”

그는 작게 자신의 기쁨을 흘려주었다.

“버림받지 않아 기쁩니다.”

그는 배려 넘치는 음성으로 조곤조곤 속삭인 뒤에 떨어졌다. 한걸음 떨어지고서야 깨달았다.

그는 더는 안경을 끼고 있지 않았다.

***

그로부터 단 이틀 뒤.

황제를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티아라를 가져왔다는 소식에 곧바로 황성으로 향하는 이동마법진을 열어준 것이다. 그럼에도 먼 거리였으나 이쪽에 제이르가 있는 탓에 이동은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나와 리케도르안이 은밀하게 입성했다.

-기분 나쁜 기운이 느껴진다, 냥.

푸딩이가 내 안쪽에서 속삭였다. 그 말에 나는 걷다 말고 움찔했다. 헤르님 성으로 돌아온 뒤로 한동안 푸딩이는 내 안에 있지 않고 헤르님 성을 활보했다.

적어도 나와 리케도르안이 거사를 치르는 동안엔 내 안에 없었단 얘기다. 그래서 오랜만에 내 안으로 들어왔더니 좀이 쑤신 듯 다른 날보다 말이 많았다.

‘기분 나쁜 기운이라니? 자세히 말해봐.’

-모르겠다 냥, 비 온 뒤의 질퍽질퍽한 땅에 빠진 것처럼 기분 나쁘다. 냥!

세 살치고는 이제 나름 훌륭한 어휘를 갖추게 된 수호신님이었지만 여전히 푸딩은 자신이 경험한 것에서 표현하는 한계가 있었다. 나는 곰곰이 고민하다가 옆에서 걷던 리케도르안에게도 작게 알려주었다.

‘푸딩이 뭔가 이상하대요.’ 그의 귀에 속삭이는 정도였으니 앞에서 걷던 시종은 듣지 못했으리라. 설사 들렸다 하더라도 이 말에서 추측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터였다.

‘생각할수록 푸딩, 이름 잘 지은 것 같단 말이지.’

-난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냥!

이름으로 잠시 투덜거림을 들어주는 사이, 알현실에 도달했다. 이번 또한 은밀한 입성이었던 탓에 커다란 방은 아니었다.

문이 열리고, 작은 홀이 우릴 반겼다. 물론 말이 작다지, 이 거대한 황성의 한 곳답게 보통의 응접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넓었다.

찌이익! 궤애액!

문을 열고 들어온 뒤로 가장 먼저 우릴 반긴 건 황제의 음성도 시종의 음성도 아닌 박쥐의 울음소리였다. 지난 알현에서 보았던 박쥐가 문 바로 위 천장에 앉은 채 궤애액 울고 있었다.

‘……초인종인가.’

나는 무심히 생각하며 울음소리를 넘겼다.

-초인종이 뭐냐, 냥?

‘그런 게 있어.’

지난번엔 시종이 우리의 방문을 알렸던 것과 다르게 우리만 들여보내고 다시 문을 닫았다. 달칵, 문이 닫힌 뒤에야 홀을 훑어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아니, 한 사람 있다면 지난 알현에서도 보았던 수염을 기른 노년의 남자였다. 그는 우리를 보더니 살짝 묵례했다. 나보다는 리케도르안에게 한 듯했다.

“웨스벳.”

우아하면서도 쉰 음성이 부르기 무섭게 박쥐가 얼른 날아올라 한곳에 내려앉았다. 새하얀 손목 위였다.

“왔는가?”

휘장이 저절로 걷히고, 그곳에 앉아 있던 황성의 주인이 등장했다.

“이토록 빠르게 재회할 줄이야, 놀랍기 그지없구나.”

그녀는 커다란 황좌에 앉은 채로 우리를 반겼다. 한쪽 눈을 가린 긴 머리칼도 고아하리만치 사람을 압도하는 느낌도 여전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마쉬멜의 편지를 본 탓에, 나는 전과 같이 그녀를 볼 수 없었다.

황실은 제 손에 ‘푸른 장미’기록이 없으면서 있는 척 나를 속였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나는 망토를 잡고 허리를 깊이 숙였다. 이어서 리케도르안이 인사를 올렸다. 생략된 것이 많은 약식 인사였다.

“고개를 들라.”

고개를 들면 느릿하게 웃는 황제의 얼굴이 보였다.

“그래, 이번에도 그대는 건방지기 짝이 없군. 헤르님?”

“제 인사의 무엇이 마음에 차지 않으셨는지 모르나. 존경하는 마음은 예와 다름없으니 감히 헤아려 주시길 바라봅니다.”

리케도르안은 고개를 까딱 숙인 그대로 말을 이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한 걸음을 더 좁혔다. 황제에게 가까워지기보다는 내 앞을 지키겠다는 듯이.

“재밌구나.”

황제는 불쾌해하는 대신에 손가락 끝으로 턱밑을 비비듯 쓸어내렸다.

“이리 건방지게 구는 것은 마땅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일 거야. 그렇겠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그래야 할걸세. 짐이 그동안 얼마나 힘들게 도뮬릿의 청을 끊어냈으니 노고를 안다면 말이지.”

“도물릿에서 어떤 제안을 했습니까?”

“로스넌 탄광을 황실에 선물하겠다고 하더군. 짐이 수년간 눈독을 들이던 제안조차 어렵사리 끊어낸 것을 알아야 할 걸세.”

체이서가 끊임없이 황제에게 무언가 협상을 제안했다는 소리였다. 그것으로 무엇을 바랐는지는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본론부터 꺼내자는 얼굴이군? 짐은 그대의 그런 모습을 좋아하네, 대공.”

“영광입니다.”

“아, 물론 옆에 앉히고 싶단 얘기는 아니니 안심하게.”

황제가 툭 제 옆자리를 가리켰다. 남편 삼을 생각은 없다는 농에 리케도르안은 웃지 않았다.

“그래, 간결하게 가볼까. 그것은 가져왔는가?”

“예. 가져왔습니다.”

이미 통신 마법으로 보고했기에 전부 알 것이면서도 한차례 물음과 대답이 오갔다.

“이아나.”

황제의 티아라는 내 손에 있었다. 정확히는 내가 든 상자에. 나는 상자를 열었다. 튼튼한 보석함 속에서 티아라가 영롱한 자태를 드러냈다. 잠시 놀란 눈을 하던 황제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오늘도 긴 머리로 한쪽 눈을 가린탓에 표정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진짜로군.”

황제는 단 한마디로 판단하더니, 이어서 손을 뻗는 순간 보랏빛 아지랑이가 티아라를 들어 올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티아라는 황제의 손에 들려 있었다.

“……드디어 내 손에 다시 들어왔다.”

황제가 티아라를 문질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문득 생각났다.

<……이번에도 필요한가 보네.>

체이서는 이번에도 이것이 필요하냐고 했다. 이상했다. 체이서가 말하는 이번이란 그가 회귀한 후를 말할 터. 그렇다면 회귀하기 전에도 저것이 필요했단 소리다.

왜 필요했지? 만약 ‘이아나’가 저것을 필요로 했다면? 어디에 썼을 것인가. 생각의 줄기가 쭉쭉 뻗어나갔다.

오랜 시간 동안 흑장미는 푸른 장미의 모든 것에 집착했다. 푸른 장미에 대한 모든 정보를 제 가문에만 두고 독점할 정도로.

사고가 한차례 널을 뛰었다. 감에 가까운 질문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저것은 푸른 장미와 관련한 물건인가?

논리적 근거가 없는 의문이나 체이서가 건넨 한마디로 인해 나는 그럴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렸다. 마침 황제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럼 캄브라캄에 대한 허락은 주시는 것으로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허하겠다.”

기다렸던 허락이 떨어졌다. 그래, 지금은 기이한 의문이 아니라 리케도르안의 생명을 최우선을 생각할 때였다. 내가 한껏 고개를 치든 의문을 삼키는 순간이었다.

“한데 짐이 주기로 한 것이 하나 더 있었지. 푸른 장미와 관련한 이야기였나. 그러했던 것 같은데.”

은근히 흘리는 말은 그녀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이를 넌지시 말할 뿐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마치 협상하듯이.

그녀가 정확히 나를 보고는 다시 리케도르안을 향했다.

“이건 푸른 장미와 단둘이서만 이야기하겠네.”

나를? 나는 고개를 살짝 숙이는 척하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지난 알현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그때도 내 정체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이런 식의 과도한 관심을 주지는 않았다.

그때와 다르게 독대를 요청할 만큼의 일이 생긴 것인가. 아니면 관심을 보일 법한 ‘변화’가 내게 일어난 것인가.

“대답이 없군.”

나와 같은 색이지만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품은 자색 눈동자는 결단코 반대를 용납할 생각이 없다고 말하는 듯했다.

“…송구하오나 그건 어려울 듯합니다.”

리케도르안의 등이 시야를 가렸다.

“장미들이 푸른 장미를 어떤 존재로 여기는지는 짐도 알고 있네만. 하나 그렇다고는 하나 짐은 그대가 밟고 있는 이 땅의 주인이다. 지금 내 뜻을 무시하겠다는 건가?”

“그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제가 드린 것이 결단코 작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물러나지 않으면 짐과 반목하겠다? 재밌군, 대공. 나는 지금이라도 도뮬릿의 손을 들어줄 수 있네.”

“폐하.”

나는 리케도르안의 손을 잡았다.

“제가 현재 몸이 좋지 않습니다. 대공 각하께서는 제 몸과 건강을 염려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황실과 반목해서는 좋지 않다. 어찌 됐든 그녀는 이 제국의 주인이었고, 캄브라캄에 드나들 권한을 주는 이였다. 나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침착하고도 차분하게. 그리고 무심하게 시선을 흘리면서.

“보통 사람의 뼈 정도는 버드나무 가지처럼 부러트리는 대공 각하와 다르게 제 몸은 한없이 약하여 오랜 시간 바깥 공기를 견디지 못합니다.”

“호오라.”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체이서가 내게 이야기 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황실이 한쪽의 편을 들면 곤란하다는 이야기. 그러니 이제 와 체이서 쪽으로 마음이 돌아서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적이 되면 곤란했다.

“제 오라비가 저를 저택에만 둔 것도 그런 까닭에서입니다.”

물론 체이서가 나를 가둔 건 다른 이유가 있었지만 그 성격에 황제에게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지 않았을 터다. 아니나 다를까 황제가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였다.

“흐음, 그런 거라면야. 대공이 예민한 것도 내 친히 이해하겠네만.”

“감사합니다.”

“그대의 몸은 다른 장미와 다른가 보군.”

“…그렇습니다.”

실제 로푸른 장미가 연약한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황제가 생각하기에 체이서가 싸고 돌만 한 이유는 되겠지. 역시나 체이서는 황제에게도 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던 거다.

“그럼에도 나는 그대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네.”

“외람되오나 그건 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이야기일까요?”

“맹랑한 영애로구나.”

그녀는 재밌다는 듯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고는 끄덕였다.

“짐의 모든 것을 걸고 맹세하지. 이야기는 단 5분. 이야기가 끝났을 때 그대는 안전하게 이 방에서 나갈걸세. 이 정도면 되겠나?”

왜인지 황제에서 숨길 수 없는 호의가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이것을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리케도르안.”

나는 그를 불렀다.

“끝나고 나면 푸딩을 같이 먹어요.”

리케도르안이 움찔했다. 현재 내 안에 푸딩이 있다는 사실을 그도 알아차린 것 같았다. 황제가 위험하다면, 언제든 대처할 수 있으리라.

이윽고 리케도르안이 한 발짝 양보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끼이익, 시종이 문을 열었다.

“긴장하였나?”

“독대라니 참으로 떨립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고는 그다지 떨리는 낯은 아니군. 그래.”

“본래 표정이 없는 편입니다.”

“그러한가.”

“제게 하실 말이 있으신가요?”

리케도르안이 채 물러나지 않았건만 흘러나온 내 말에 황제는 유쾌하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없다고 하면 거짓이겠군.”

리케도르안의 걸음이 멈칫했다. 그는 가만히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으로 위험한 빛이 스쳤다. 마치 날 잘못 건드렸다가는 그대로 두지 않겠다는 듯이.

나는 문이 닫히기 직전 리케도르안의 얼굴을 보았다.

차갑게 가라앉은 얼굴로 황제를 보던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얼굴을 누그러트렸다. 그러고는 낮게 한숨을 쉬며 내게 문 바로 바깥에 있겠다고 속삭였다.

“무슨 일 있으면 크게 날 불러요. 아니. 작아도 상관없어요.”

그가 엄지로 입술을 죽 그으며 말했다.

“당신 목소리라면 어떤 크기라도 상관없이 들을 수 있을 테니까.”

황제에게도 들렸겠지만 아랑곳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나는 웃으며 그를 안심시키듯 답했다.

“있다 봐요.”

적인가 아군인가.

그녀는 대체 무슨 꿍꿍이인가.

끼이익, 문이 닫혔다. 그렇게 리케도르안이 완전히 나간 뒤, 적막한 공간엔 나와 황제 그리고 황제의 시종인 노년 사내뿐이었다.

“이것 참. 언제 보아도 헤르님 대공의 행동은 용맹하달지. 맹랑하달지…….”

작게 중얼거리던 황제가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어스름한 푸른 빛이 섞인 신비한 자안이 나를 담았다.

“그럼 오붓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영애.”

황제는 곧바로 본론을 꺼내려는지 별다른 인사치레와 같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한 번 쓰다듬고 떼어냈다. 손 위에는 우리가 바친 티아라가 있었다. 그녀는 긴 손가락에 티아라를 끼고 빙글빙글 돌렸다.

“먼저 이건 정말 고맙네.”

“아닙니다.”

“이제야 말하는 것이네만 사실 그대들이 가져올 거라 생각하지 않았어.”

“그런가요?”

나는 대답하고서야 내 말투가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음을 알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뒤였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황제는 크게 신경을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가만 보면 어딘가 시원시원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대에게 호의를 베풀고 싶은 생각이 들었네. 빠른 시간 내에 가져온 보상이라 생각하게.”

군더더기 없이 핵심만 쭉쭉 들어가는 것이, 남에게나 자기에게나 바라는 것이 똑같은 사람인 것 같기도 했다.

“기왕 솔직해진 참에 한마디 더 해볼까? 난 그대를 참 보고 싶었네. 혹시 아는가?”

“……영광입니다.”

“그대의 오라비에게 무수히 보고 싶다 말했건만 한번을 보여주지 않았지.”

보통 이럴 땐 가문의 영광이라 말하는 법이라는데. 가문이 가문인지라 그 말은 뱉지 못했다. 뱅뱅 돌던 티아라가 멈췄다. 황제가 허공으로 던진 티아라를 탁 잡아챈다.

“영애, 이걸 보고 무언가 느껴지는 것이 없나?”

“황관을 보고…… 말인가요?”

“그래.”

그녀가 툭툭. 티아라의 가장 큰 보석을 엄지로 건드렸다. 이윽고 모양 좋은 입술이 열리며 생각지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이건 본래 푸른 장미의 물건이거든. 느껴지는 바가 있을 터인데.”

나는 흘끗 티아라를 보았다가 끄덕였다. 태연자약한 내 반응에 황제는 놀랍다는 낯이었다. 이어서 눈을 살짝 찌푸렸다.

“그렇군요.”

“놀라지 않나?”

“……송구하나 그동안 너무 놀랄 일이 많았습니다.”

누가 최근 내 행보를 알았다면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황제는 놀란 표정을 지우지 않으며 티아라로 턱을 톡톡 두드렸다.

“으음, 아무리 부동, 무심함이 푸른 장미의 특성이라지만 이리도 놀라지 않을 줄이야. 그럼…… 그대는, 그대가 이 시대의 푸른 장미가 아니란 사실도 이미 알고 있는 건가?”

그녀의 말에 나는 멈칫했다. 그녀는 이 말에도 내가 놀라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말한 것 같지만 도리어 난 이 말에야말로 놀랐다. 저 말인즉 황제도 내가 차원을 이동한 걸 안다는 소리 아냐?

‘황당하네.’

당혹스럽고 놀라웠다. ……이쯤 되면 리케도르안이랑 프란시아만 몰랐던 것 같은데. 남자주인공이랑 여자주인공이 이런 곳에서 특별함을 뽐내는 거냐고.

나는 침착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리케도르안과 프란시아. 이 두 사람은 본래의 ‘이아나’와 마주하지 않았으니 알 수 없었다 쳐도. 황제는 어떻게 이를 알아차릴 수가 있나? ‘이아나’를 보지 못했을 텐데? ‘이아나’의 일기로 보아, 그녀는 나처럼 흑장미 저택에 감금되었다. 주체가 체이서가 아니라 체이서의 부친이었을 따름이다.

“그렇게 경계할 건 없네. 이게 다름 아닌 짐의 장미로서의 능력이니 말일세. 장미의 능력은 알겠지? 흰장미가 가진 치유능력 같이.”

“예, 압니다.”

“흠, 이제야 동요를 보이는구나.”

“실례지만 어떤 능력인지 감히 여쭤도 되겠나요?”

“그대는 당황하면 말투가 미묘해지는군?”

나도 모르게 드러낸 당혹에 황제는 오히려 여유를 되찾은 것 같았다. 그녀는 흥미롭다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정확히는 능력이라기보다 이 내가 불완전한 장미라 알아보는 것에 가깝다고 알면 될 걸세. 완벽하지 못하니, 완벽한 자를 알아보는 것이지. 본능처럼.”

불완전한 장미.

그러고 보면 저 소리를 들은 적 있다. 지난 알현 때에도 나왔던 이야기. 캄브라캄 석판에 그려져 있던 장미는 푸른 장미를 포함해 총 다섯 송이다. 그 안에 보라색 장미는 없다.

“단순히 불완전해서 알아보는 것이라면, 그럼 능력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게 참 애매하단말일세.”

황제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짐이 가진 장미는 푸른 장미를 증오하는 것에서 힘을 얻는 존재거든. 참 기이한 존재이지 않나? 이 장미란 것의 기원이 그러하다네. ”

황제에게서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장미의 기원, 알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장미란 존재는 기묘하다.

“네. 이상합니다.”

“그래. 그럴 걸세. 짐은 지금 이 장미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 할 걸세.”

“푸른 장미에 대해 알기 위해선 거기서부터 들어야 하나요?”

“그렇지. 그래, 이야기 하기 전에……그대는 신을 믿나?”

“네?”

갑자기 신이라니. 확실히 이 나라는 신을 믿고 신전도 있지만……. 황실과 신전을 따로 둔 나라답게 신을 믿고 믿지 않고는 개인의 자유에 맡기는 나라였다.

“믿지는 않습니다.”

“그런가? 그럼 한 가지 철학적인 질문을 해볼까.”

그녀가 유혹하듯 녹진한 미소를 지었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나머지 한 손으로 피아노를 치듯이 타닥 자신의 뺨을 두드렸다.

“만약 신이 죽는다면, 죽은 신이 어디로 갈 것 같은가.”

장미 얘기를 하다 말고 신이라니. 신과 죽음이란 모순된 단어는 둘째치고, 널뛰는 얘기에 난 그저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군.”

“아닙니다.”

“아니. 지금 저 여자가 무슨 개소릴 하는 건가, 이렇게 생각하진 않나?”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는. 솔직한 영애군.”

황제가 내 말을 부분적으로 되풀이하다 말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마쉬멜이 그랬다. 내 성격은 자칫 잘못 입을 놀리다가 윗사람에게 칼 맞기 좋은 성격이라고.

“제가 무례했습니다. 놀란 나머지 실언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어쩌면 체이서가 나를 내보내지 않는 건 칼 맞지 말라는 조치인가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아닐세. 짐이 허락한 무례니까. 그리고 그대가 뭘 하든 그리 화가 나진 않아. 일단은 짐 또한…… 장미이니까. 본능을 좇지. 그래, 어쩔 수 없이 말이야… 그대가 사랑스럽게 보인다고 할까?”

그래서 자꾸 유혹할 듯 아찔하게 웃으시는 건가요, 언니? 하마터면 이렇게 물을 뻔했다. 진짜 그러려 했던 건 아니고 아름답게 웃으시는 얼굴이 그러했단 얘기다.

“푸른 장미, 그대는 불완전한 보라색 장미와 푸른 장미를 증오하면서도 애타게 갈구하는 이 장미에 대해 꼭 알아야 하네.”

“…예.”

“황실의 피를 이어받은 자 중, 황태자가 된 이들은 어떤 동화를 듣게 된다네. 짐 또한 그랬지.”

황제가 시선을 먼 곳에 두었다. 내가 눈앞에 있지만 다른 것을 덧씌워보듯이.

“그 동화는 굳이 길게 언급하지 않겠네. 길고 지루한 얘기가 될 테니. 짐은 이야기꾼 소질은 없어.”

글쎄. 사람들은 이 언니 얼굴만 봐도 훌륭한 관객이 될 것 같은데. 볼수록 사람의 시선을 끄는 미모에 언변을 구사하였으니까. 이걸 카리스마라고 하던가.

“이건 어느 이름 모를 신을 다룬 이야기이네.”

이야기꾼에는 소질이 없다는 말과 함께 그윽한 목소리가 나를 이야기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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