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63/87)

***

“이아나!”

리케도르안을 다시 만나게 된 건 이로부터 무려 이틀이 지난 뒤였다.

르나그는 내게 고백한 다음 날 아무것도 없었던 얼굴로 헤르님 저택으로 이동했고, 그의 예상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아무도 없는 헤르님 성이 우릴 반긴 것이다. 리케도르안은 발테이즈 저택으로 떠나고 없다고. 말을 돌려 돌아오는데 꼬박 하루가 걸려, 이틀이 지나고서야 그를 다시 보게 되었다.

나는 박살이 난 문과 리케도르안을 번갈아 보았다. 문은 무슨 죄일까, 생각하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리케도르안.”

내 작은 부름 한 번에 꽃망울이 터지듯 환하게 피어나는 울음과 웃음이 있었다. 커다란 짐승처럼 달려온 그는 내 앞에서 멈칫하더니 머뭇거렸다.

“뭘 망설여요?”

“안아도 될까 해서요.”

나는 소리 내어 웃다가 이내 팔을 벌렸다.

“그럼 이렇게 해주면 돼요? 읍!”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그도 그럴 것이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발이 붕 허공으로 떠오른 것이다. 그는 내 허벅지를 안은 채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놀랐잖아요.”

“아……. 미안해요.”

리케도르안이 시무룩하게 시선을 늘어트렸다가 얼른 들었다.

“너무 반가워서.”

그제야 그의 손에 무언가 들려 있음을 알았다. 그건 황제의 티아라였다. 그가 내 머리 위에 이것을 씌우며 청아하게 웃었다. 반짝반짝한 햇살을 반사하면서.

“이아나, 당신을 본 순간 해가 다시 뜬 것처럼 행복해졌어요.”

나라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예쁜 말만 골라 했더라. 이 남자가? 매번 왕왕 짖던 남자가 말이지.

아무래도 아직도 어린 그의 잔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걸까. 나는 미소와 함께 자연스레 그의 뺨을 만져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가 성큼 걷자, 놀란 나는 리케도르안의 목을 얼른 끌어안았다. 리케도르안은 그대로 성큼성큼 걸어 나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리케도르안?”

그러고는 반문할 틈도 없이 입술로 입술이 파고들었다. 나는 놀라 눈을 깜빡이다 말고 그의 옷자락을 쥐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허리로 손이 파고들었다. 나는 황급히 한 손을 등 뒤로 짚었다. 이대로 눕지 않기 위해서 버티는 동안 그는 틈을 놓치지 않고 리본을 풀어 내렸다.

아니, 잠깐만 시작부터 너무 격렬한데…….

리케도르안이 잠시 입술을 떼어내며 느릿하게 혀로 입술을 쓸었다. 붉은 입술과 선홍빛 혀가 야릇하게 보였다.

“언제든, 해도 좋다고 했잖아요?”

……목적어 빼먹는 건 여전하구나. 나는 맛이 가기 직전의 그를 보다 난감하게 눈을 굴렸다. 일단 싫은 건 아닌데……. 문제는 이 방에 그와 나만 있던 건 아니었다는 거다.

“어머나, 별꼴이다.”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지, 칼리스토?”

리케도르안 어깨너머로 팔짱을 끼고 어처구니없게 그를 노려보는 프란시아가 있었으니까.

“죽여버릴까?”

캬앙! 캬웅!

“너도 별꼴이라 생각한다고? 좋네.”

프란시아가 삐죽 입술을 끌어올렸다.

“가라, 몸통 박치기.”

그녀가 저 변태 대공님을 박아버려. 하고 중얼거리고. 나는 마찬가지로 심상치 않은 한 사람, 르나그의 반응을 보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도 그럴 것이 르나그의 손에는 어느새 아줄르가 꽤나 거대한 크기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나는 리케도르안의 입술을 손으로 막으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장판이네.

***

소란스러운 응접실이 정리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었다. 의도치 않게 장미 배 수호신 대전을 볼 뻔한 나로서는 한 것도 없이 지치는 기분이었다.

이동 마법에는 이동 피로가 분명 없는 것으로 아는데, 그러니 이 피로는 눈앞에 보이는 풍경 때문이다.

-냥. 왜 그러냐, 인간?

나는 고개를 돌리고 지그시 옆을 응시했다.

‘너 때문이잖아.’

주먹으로 콩, 아프지 않게 푸딩이의 머리를 때렸다.

-냥, 이 몸이 뭘 했다고?

뭘 했기는. 조금 전에 날 두고 벌어진 싸움엔 빠질 수 없다며 제일 먼저 뛰어드는 것이 이 3살 수호신이었다. 아니, 수호신과 장미가 어찌나 닮았던지 먼저 도발하고 선빵 치는 것까지 닮았더라고. 덕분에 개판 오 분 전이었던 상황을 정리한 것이 내 한마디였다.

<다들 여기서 싸우세요, 전 방에 갈게요.>

그냥 무심히 보다가 툭 던진 작은 말에 다들 조용해지더라?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이었다.

“일단 다들 보다시피. 황제의 티아라는 무사히 가져왔어요.”

상황이 상황이었다 보니 황제의 티아라는 아직도 내 머리 위에 얹혀 있었다. 내가 벗으려 하자 프란시아가 벌떡 일어났다.

“앗 언니, 벗지 마! 잘 어울린단 말이야. 완전 언니 거!”

프란시아가 콧김을 내뿜을 기세로 크게 말했다.

“어울리고 말고를 떠나서…… 이건 반납할 건데.”

“반납하기 전까지 쓰고 있으면 안 돼?”

“어?”

“그러면 되겠다!”

프란시아는 자신이 말하고서 박수를 짝 쳤다. 그러고는 성큼 걸어와서 삐뚤어진 왕관을 바로잡아 주기까지 했다.

“잘 어울려.”

“아니……. 고마워.”

이게 그렇게 초롱초롱한 눈으로 말할 일인가. 그리 생각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죠?”

그러다 고개를 돌리다 말고 르나그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 또한 진지한 낯으로 입술을 열지 않겠나.

“잘 어울리십니다.”

“아, 고……마워요?”

그러더니 내 인사를 듣고 수줍게 고개를 돌리는 것이 아닌가.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일단은 이야기를 계속해보자 싶어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걸 얼른 황제 폐하께 전달하고, 원했던 목표를 달성하도록 해요.”

우리가 바란 바는 캄브라캄으로 들어가는 것. 이를 위한 황제의 요청을 무사히 수행해냈다.

“황실로 바로 달려가야겠죠?”

“그럴 필요는 없을 거예요, 이아나.”

잠자코 있던 리케도르안이 말했다.

“대화라면 당장 나눌 수도 있을 테니까.”

“어떻게요?”

그의 말인즉 이러했다. 황실 측에서 언제든 소통할 수 있게 마법 도구를 건네주었다는 것이다. 통신 마법이 걸린 구슬은 언제든 원할 때 황제와 대화할 수 있다고. 무려 제국의 주인과 말이다.

‘그러고 보니 대공이었지.’

새삼스럽게 리케도르안의 직위가 실감 나는 기분이었다. 일단 오늘은 시간이 늦어 내일 오전에 바로 황실에 연락을 취하기로 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보기보다 일찍 주무시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리케도르안이 헤르님 성으로 돌아온 시간이 늦은 밤이긴 했다. 여기서 발테이즈 후작령까진 평범한 속도로 나흘에서 일주일이 걸리니 얼마나 숨 가쁘게 달려왔느냐는 증거도 되겠지만. 그렇게 앞으로의 계획 등 이야기가 하나씩 마무리되어갈 즈음이었다.

문득 생각난 것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르나그. 물어볼 것이 하나 있는데요.”

눈앞의 지도를 정리하던 르나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조금 전까지 막 캄브라캄으로 가는 최단 거리를 설명했던 참이었다.

“무엇입니까? 무엇이든 물어주십시오.”

“아, 다름이 아니라요. 혹시 도뮬릿의 흑마법사에게 편지를 하나 받으신 적 있으세요?”

난 이리 말하고는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이름은 마쉬멜이에요.”

그러자 르나그가 움찔했다. 짐작 가는 바가 있는 낯이었다.

<아가씨, 내가 보낸 편지룰 받지 못해써?>

마쉬멜은 분명 내게 편지를 보냈다. 듣자 하니 르나그가 내게 전달하지 못했던 모양이지만.

<이런. 발테이즈 휴작에게 부탁했눈데. 씹었군.>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르나그는 오직 나만 생각한 내 편이었고, 마쉬멜은 최측근이었으니 자연히 경계당했을 것이다. 나와 마쉬멜의 관계는 잘 몰랐겠지.

“죄송합니다. 가로채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르나그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별도의 검증을 거쳐 안전성을 확인한 뒤에 건네려 했다며.

“다만 이아나 양의 얼굴을 본 순간 반가운 마음에 모두 잊은 탓에…….”

“아니에요. 탓하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다행히 르나그는 짐 속에 편지를 가지고 있었고, 나는 곧 이것을 받아볼 수 있었다. 자연히 회의는 파하는 대신 좀 더 이어졌고. 나는 장미들이 보는 앞에서 편지를 열었다.

「살다 살다 내가 아가씨에게 편지를 쓸 일이 오다니. 이거, 원. 말세로군. 말세야.」

인사말을 대신한 투덜거림에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삐뚤삐뚤한 어린애 글씨와 다르게 다분히 어른스러운 말투의 불균형이 그저 우습기만 했다.

그러나 곧 내 입술에서 웃음이 차차 사라졌다.

“이아나?”

“언니.”

이를 이상하게 여긴 것인지 리케도르안과 프란시아의 부름이 들렸다. 하지만 나는 편지에서 눈을 떼어낼 수 없었다.

손이 살짝 떨렸다.

편지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이전에 푸른 장미의 능력에 대해서 물은 적 있지? 아가씨, 말해두는데. 푸른 장미에 관한 기록은 제국 어디에도 없어.

단 한 곳, 도뮬릿을 제외하고는.」

분명 황제는 황제의 티아라를 가져오면 캄브라캄에 갈 수 있게 허락하는 것은 물론, 푸른 장미에 관한 정보를 열람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건 황실의 말과 다르지 않은가?

아니. 이를 떠나서……. 편지엔 연이어 충격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아가씨, 아가씨가 그 몸에서 눈을 뜨기 전까지. 그 몸을 살아 움직이게 한 흑마법을 어떻게 고정시켰으리라 생각해?」

나는 마법을 잘 모른다.

그러니 마법에 대한 것은 잘 모를지라도 글은 아니까 이 편지는 제대로 읽을 수 있다.

「흑장미의 능력이야.

아가씨의 몸에는 흑장미의 세뇌가 남아 있어. 흑마법을 고정하려고 했던.」

체이서의 힘은 세뇌다. 그것은 무의식중에 사람을 조종하는 힘 아니던가.

「자꾸만 도뮬릿으로 돌아가고 싶단 생각이 들지 않았어? 그랬다면 여전히 아가씨 몸에 남아있는 거야.」

나도 모르게 편지를 꽉 쥐었다.

「아가씨, 만약 이것을 없애고 싶다면. 그리고 푸른 장미의 힘을 제대로 쓰고 싶다면. 아가씨가 해야 할 일은 한 가지야.」

편지는 한 가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푸른 장미의 수호신을 찾아.」

나는 편지를 내렸다.

어쩐지 순순하게 보내주던 모습이 조금은 이상하다 싶더라더니. 체이서의 마지막 얼굴을 떠올리던 나는 허탈한 웃음을 토해냈다.

물론 그것이 진심이 아니었던 건 아니겠지만. 그는 평생을 악당으로 살아온 남자답게 마지막까지 최후의 보루를 만들어두었다.

푸른 장미의 수호신.

<푸른 장미의 수호신이 궁금하지 않니?>

체이서가 보내온 편지에 쓰여있던 말들.

<네게 돌려줄 날만 기다리고 있어.>

그의 편지에 있던 말들이 눈앞에 놓인 마쉬멜의 편지와 겹쳐진다.

「친애하는 제자이자 내 죄악에게. 이것이 아가씨에게 보이는 내 마지막 친절이야.」

나와 함께 수년을 보낸 조그만 흑마법사님. 나의 스승이자 친우가 마지막 호의를 남기고 있었다.

「잘 기억해둬. 장미와 수호신은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아가씨는 느꼈을 거야. 아직 깨닫지 못했을 뿐.」

여기까지 읽었을 때 내 손에서 편지가 뚝 떨어졌다. 모두가 놀란 낯으로 보는 것 같았지만 되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이아나!”

나는 황급히 테라스의 문을 열고 난간을 붙잡았다. 그리고 떨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상체를 길게 내밀었다.

이윽고.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왜, 그동안 듣지 못했나?

내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너구나.’

희미한 소리라 생각한 것의 소리가 변했다. 흡사 목소리 같은 것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점점 커지는 소리가 이제야 닿아서 행복하다는 듯이 더욱 커졌다.

아주 기분이 좋다는 듯이.

이 음성은 물속에서 울리듯 거대하고 웅장했으며 감미로웠고…… 아주 따뜻했다. 테라스를 쥐고 있던 내 손이 하얗게 질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들려오는 이 소리가 바로, 수호신의 음성이라는 것을.

끝으로 체이서가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간다.

<기억해. 칸탈라의 대성당이야, 이아나.>

체이서가 말한 일자를 떠올린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며칠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고개를 숙여 웃다말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뒤로는 어느새 내 허리를 꽉 잡은 손이 있었다. 등을 돌리면 나를 걱정 어린 눈으로 보는 리케도르안이 있었다. 나를 보며 유려하게 떨어진 속눈썹이 둥근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는 마치 울 것 같은 낯이었다.

“괜찮아요.”

나는 그의 손을 잡고 토닥였다. 왜인지 지금 생각하는 것을 잊고 이렇게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잠시 침묵했다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머릿속이 시원해졌으니까.”

진심이었다. 내겐 안개 속을 걷는 듯 두루뭉술한 것보다는 차라리 계략일지언정 불편한 가시밭길임이 한눈에 보이는 편이 나았다. 해결 수단을 강구할 수 있을 테니까.

‘생각할 것이 많겠네.’

시간이 별로 없지만 말이다.

“이아나, 지금 당신의 얼굴을 알고 있어요?”

“어떤 얼굴인데요?”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내게 왜 족쇄는 채우지 않느냐고, 물을 때의 얼굴이에요.”

나도 모르게 내 뺨을 만졌다. 내가 어떤 표정이었지? 그가 말하는 것이 어떤 얼굴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리케도르안이 이런 표정을 할 만큼 서글프게 만든 건 알겠다.

“잘은 모르지만 아무렇지 않게 느낄 일이 아닌 거죠?”

“그건 그렇죠.”

그저 내 수호신이 나만큼, 아니.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갇혀 있었다는 것이 안타까웠을 뿐이다.

“그렇다고 리케도르안 당신이 그런 얼굴을 하게 할 일은 아니에요.”

“…….”

“음, 아닌가.”

나는 그의 머리를 잡아, 내 어깨로 내려오게 했다. 그러고는 살짝 토닥였다. 새삼스럽게 도뮬릿을 벗어났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 했다. 그리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편안히 머물렀던 발테이즈 후작저도 아니라는 생각 또한. 그만큼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남자의 존재감은 컸다.

리케도르안의 어깨너머로 프란시아가 보였다. 그녀는 리케도르안을 지그시 노려보다가 입을 삐죽이고는 날 보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자신의 입술을 잡아 쭉 늘였다가 잘라내는 시늉을 하고는 이어서 제 목에 손을 가져다 대고 쭉 그었다. 마치 변태는 처단해버려! 하는 듯한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아, 나는 작게 미소를 터트렸다.

나는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다가 이어 프란시아와 눈을 마주쳤다. 내 입술이 소리가 들리지 않게 그녀를 불렀다. 그녀에게 입 모양으로 작게 중얼거리자 그녀가 끄덕였다.

‘언니 부탁이라 들어주는 거지만.’

입 모양으로 대꾸하면서.

‘질투나.’

그러고는 그녀는 르나그를 붙잡아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방 안엔 나와 리케도르안 둘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르나그가 나가기 직전 나를 한번 보았지만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나갔음을 알았다. 내가 무엇을 하든 따르겠다는 얼굴이었으니.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고요한 방 안, 아니. 테라스로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그러나 추위는 크게 느낄 수 없었다. 커다란 체구가 나를 감싸다시피 하고 있었으니까.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칼 위에 올려두었다.

부드러이 흩날리던 은빛 머리칼이 손가락에 휘감겼다. 이 밤과 달빛에 잘 어울리는 은은한 청색으로 물든 채로.

“리케도르안. 상황에 맞지 않지만 할 얘기가 있어요.”

나는 너무나 커서 내 어깨에 기대려면 한참을 숙여야 하는 남자에게 말했다. 그러자 심상치 않은 말이란 걸 눈치채기라도 하듯 내 허리에 감긴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나를 보지 않은 채로 내 어깨에 얼굴을 더욱 묻었다. 마치 커다란 짐승이 어리광을 부리는 것 같았다.

“……나를 버린다는 말이면 싫어요.”

그가 애원하듯 중얼거렸다. 파묻힌 음성은 뭉개졌지만 알아듣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기민한 남자구나 싶었다.

“아니요. 그 반대인데.”

가지런히 정돈된 가마를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젠 대답을 돌려줄 때가 된 것 같아서요.”

생각해보면 리케도르안은 육감마저 짐승처럼 발달한 남자였다. 언제나 내가 결정적인 말을 하려 할 때면 본능적으로 눈치채고 표정부터 달라졌다.

캄브라캄에서 이별을 말할 때라거나 다시 만날 수 없을 약속을 할 때라거나. 그가 움찔하더니 내 어깨에서 얼굴을 떼어냈다.

“당신에게 고백에 대한 대답을 돌려줄 차례 말이에요.”

쭉 생각해왔다. 여전히 푸른 장미와 장미들의 관계는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내가 이 세계에 와서 이뤄낸 것과 ‘이아나’가 피워낸 것들 그 사이에서 손을 휘적거리며 유영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꽃들.

사람을 꽃으로 만든 세계. 질식할 만큼 아름다운 향기를 품은 이들은 각기가 형언할 수 없는 상처를 품고 있었다. 여기 눈앞에 모든 어린 시절을 차가운 캄브라캄 지하에 빼앗긴 남자처럼.

리케도르안은 잔뜩 얼어붙고 긴장한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 나를 붙잡은 손은 떨어질 줄 몰랐다. 리케도르안이 입술을 깨물었다.

“……울어야 해요?”

“글쎄요.”

나는 가벼운 미소를 터트리며, 손을 그의 입술로 가져갔다.

“입술, 깨물지 말아.”

“…….”

“아프잖아.”

그의 눈이 순간 흔들렸다. 푸르른 눈으로 물기가 일렁거린 것도 같았다. 달빛이 은은하게 쏟아지는 아래, 여전히 아주 머나먼 곳에서 나의 수호신이 행복한 노래를 들려주고 있었다.

나는 미소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내 활짝 웃으면서.

“사랑해요.”

그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그리고 나는 그의 눈을 보며 또박또박 다시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당신에게 사과해야 할 것 같아요.”

타인과 스스로에게 무심하다는 것은 결국은 나에 대해서도 잘 모른 채로 살아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체이서는 푸른 장미는 사랑을 할 수 없다고 거짓을 말했지만, 나도 ‘이아나’도 사랑을 했다.

여기 있는 색색의 장미들, 장미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처럼.

“당신이 좋아요. 이제 당신을 향해 느낀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아.”

나는 가슴을 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하지만, 하고 속삭였다. 사랑이 사랑이란 것을 깨닫게 된 이 시점에 한 가지를 더 알게 되었다.

“리케도르안, 당신이 말한 사랑이 다른 이를 제외하는 배타적인 사랑이라면.”

“…….”

“나는 아마 다른 장미를 버리지 못할 거예요.”

수호신의 존재를 아는 순간 불현듯 찾아온 깨달음이었다.

나는 프란시아와 르나그를 버리지 못할 거야.

“당신에게 오롯하게 모든 마음을 쏟지 못할지도 몰라요.”

버린다는 것은 몸과 마음에서 떼어놓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나는 리케도르안에게만 집중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마음 한구석을 간지럽히고 따뜻하게 채우는 이것이 사랑이란 걸 알았다.

하나 나는 르나그에게 사랑을 허락했다. 오히려 체이서의 엇나간 감정과 르나그의 우직한 감정을 보며, 이들의 사랑을 보며 깨우친 깨달음이었기에. 내가 꽃피운 것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리케도르안이 내게 보이는 맹목적인 감정을 안다. 내 모습은 그를 괴롭게 할지도 모른다.

“나는 당신이.”

“상관없어요.”

리케도르안이 내 말을 단호하게 자르고 들어왔다.

“나는 단 한 가지가 중요해요.”

“리케도르안.”

“나를 사랑해?”

“…….”

그의 눈을 마주했다.

“맞아.”

그도 나도 알고 있다. 돌려 말하는 건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널 사랑해.”

“나만?”

“……너만.”

심장이 미약하게 쿵쿵 뛰기 시작했다.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케도르안은 내 입술에 도장을 찍듯 입술을 꾹 눌렀다.

“한 번 더.”

내가 놀라 눈을 깜빡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번 눌렀다.

“한 번 더, 응?”

나른하게 가라앉은 눈은 어찌할 줄 모르는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싫어.”

“하아, 이아나.”

“……또 하면 닳을 것 같으니까. 당신이 되새기는 게 좋겠어요.”

좋아하면 닮는다는 말이 있던데. 나는 리케도르안이 늘상 하던 손등으로 입술을 가리는 행동을 따라 하며 슬쩍 얼굴을 돌렸다.

그러나 리케도르안은 이런 나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는 듯 내 얼굴을 따라 얼굴을 움직였다. 피해도 푸른 눈동자가 쫓아왔다.

“이아나.”

“부르지 말아요.”

강렬한 떨림은 아니었다. 그러나 심장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떨림은 무심한 흑백과 같던 세상을 색채로 물들이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슬그머니 눈을 돌리면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담은 남자의 얼굴이 있었다. 이를 채 한눈에 담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나를 덮었다. 여전히 서툴면서도 날것에 가까운 키스였다. 나는 서서히 눈을 감았다. 조급한 손이 내 가슴 위의 리본을 잡아당겼다. 오늘은 리본을 푼다고 내려가는 옷은 아니었지만…….

나는 푸스스 웃음 지었다.

“뭐예요. 그때 못했던 2차전?”

살짝 입술이 떨어졌을 때 하아, 숨을 몰아쉬며 말했더니, 그의 눈동자가 따라붙었다. 어느새 리케도르안의 손에는 완전히 풀려난 리본, 아니 이제는 끈이 나풀나풀 흩날리고 있었다.

“고백하자마자 이런 반응이라니. 사실은 내 몸이 목적이었어요?”

웃음기 어린 내 농에도 리케도르안은 웃는 대신 눈을 천천히 내리깔았다. 청순하며 고결하기까지 한 얼굴이 고스란히 달빛 아래 드러났다. 새하얀 낯빛과 다르게 붉디붉은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아니요.”

가라앉은 눈동자는 그의 인격이 어느 쪽인지 가늠할 수 없게 했다. 그는 내 리본을 가져가 입을 맞추더니 떼어냈다.

그러고는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의 손가락이 다시 내려가 목 앞에 위치했다.

“이렇게 하려고요.”

그가 내 손을 잡아, 리본이 제 목을 두르게 했다. 묶기만 한다면 어여쁜 목장식이 될 것처럼 흰 목덜미 위로 붉은 끈은 몹시도 잘 어우러졌다.

그가 고개를 숙여 내 입술을 살짝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귀 끝과 목덜미를 붉게 물들인 채로. 입술을 떼어낸 그가 천천히 한쪽 무릎을 접었다.

“내가 당신을 가지는 것이 아니에요. 이아나.”

낮지만 청명한 목소리가 귀를 가득 채웠다. 캄브라캄에서도 나는 이 목소리를 좋아했던 것 같다.

“당신이 날 가져주세요.”

“…….”

“날 묶어둔 채 언제든 당신이 나타나기만 한다면 기꺼이 꼬리치는 짐승이 될 터이니.”

평생의 반을 갇혀 구속만큼은 누구보다 끔찍하게 여길 남자가 말했다.

“사랑은 내게만 허락해주세요.”

기어이 묶어버린 끈의 끝을 내게 내밀며.

“그 말은 오직 나만을 위해 남겨둔다면.”

그는 내 허벅지 뒤쪽을 잡아 제 쪽으로 당겨왔다. 치마가 들리며 하얀 발목이 드러난다.

“나는 기꺼이 당신의 장미 정원조차도 눈 감을 테니.”

리케도르안은 이마저 달콤하다는 듯 한쪽 허벅지에 내 발을 올리곤 그대로 내 종아리를 잡아 들어 올려, 발목에 입술을 맞췄다.

“……사랑해요.”

그의 손이 종아리까지 올라간 치마 아래로 내려가 조금씩 파고들었다. 야릇한 손길에 나는 신음을 터트리지 않게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말해주세요.”

그의 눈매가 온순하게 접혔다. 귀와 목은 붉게 물들인 채로. 그러나 나는 이 순간 그가 세상에서 오직 내게만 얌전한 짐승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의 사랑은 내 거야.”

밤이 내려앉은 이곳에 희고 푸르게 욕구로 물든 남자의 얼굴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였으니까.

“그렇죠?”

청초하지만 눅진하게 달라붙는 집착이 깃든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것이 싫지 않았다. 어떤 연유에서 나온 것인지 이제는 모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를 그저 물끄러미 바라봤다.

한참을 달싹였다. 목구멍으로 맴맴 맴도는 말을 쉬이 뱉지 못했다. 그리하여 내가 말을 다시 꺼낸 건 약간의 시간이 더 흐른 뒤였다. 그때까지도 리케도르안은 가만히 내 대꾸를 기다렸다. 마치 이대로 망부석이라도 되어 영원히 기다릴 것처럼.

“……미련하네요, 당신.”

이런 말이 먼저 나가고 말았다. 그의 말에 헛웃음이 나오고 말았으니까. 처음 볼 때부터 느낀 것이지만, 은은하고 깨끗한 은발과 순도 높은 푸르른 눈동자는 그를 귀족적이고, 성스럽게 만들었다. 이런 그는 결단코 지하와 밤, 어둠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나를 향해 볼을 붉혀 나른하게 웃는 남자는 누구보다 뒤로 뜬 달과 밤이 잘 어우러져 보였다. 언제부터 당신은 낮보다 밤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었나.

가슴에 깃든 어둠이 그를 밤에 어우러지게 만든 걸까? 괜한 감상에 사로잡혔다.

“나는 사람에게 대체로 무심하고, 대부분의 일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주의지만.”

나는 나지막하게 고백을 덧붙였다.

“이럴 때 그런 말을 하면 안 되는 건 알아요.”

“상관없잖아요. 제가 괜찮다면.”

하나 리케도르안은 수줍게 웃어 보였다. 그 말이 틀리진 않지만. 내가 못내 표정을 지우지 못하자, 그는 더욱 깊이 웃었다.

“이아나는 불편한가요? 내가 너무 쉽게 받아들여서?”

그가 손을 조금 더 올렸다. 거친 손끝과 내 허벅지가 마찰한다. 나는 이번에도 신음을 꾹 눌러 참았다. 그는 내 무릎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오히려 지금 내 모습이 기쁘고 반갑다는 듯이.

“더 불편해 해주세요.”

“흣, 리……케도르안”

“그렇게 계속 내 생각을 해주세요.”

나도 모르게 상체를 숙여 그의 머리를 잡았다. 그는 내 무릎에 입술을 가져다 댄 채로 바람 소리를 내며 웃었다. 분명 발갛게 물든 얼굴은 그인데, 여전히 어느 쪽 인격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이아나, 대답해주세요.”

그가 답을 종용했다. 아니, 청에 가까웠다. 그러나 입술은 무릎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네?”

어느새 더욱 올라간 치마는 커튼 자락처럼 나풀나풀 올라가 그대로 흔들렸다. 그는 하얗게 드러난 허벅지를 조심스럽게 잡아 손끝으로 문질렀다.

“사랑은 내 것이죠?”

“읏…….”

“내게만 사랑한다고 말해줄 거죠?”

“……그래요.”

결국 나는 더운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내 끄덕임을 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눈은 한곳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기어이 보고 마네.’

희게 드러난 허벅지 안쪽으로 붉게 새겨진 문신이 보였다. 활짝 피어난 장미 문신이었다. 자리가 자리다 보니 나도 씻을 때나 옷을 갈아입을 때 정도가 아니면 잘 보지 못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가 하는 양을 바라보다 보니 몸의 열이 더욱 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그는 내 문신에서 눈을 떼어내지 못했다.

이대로 두면 쭉 그저 바라보기만 할 것처럼.

“예쁘네요.”

그가 눈을 반쯤 내리뜨며 중얼거렸다. 달뜬 숨이 함께였다.

“예뻐요.”

거친 손끝이 문신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 쓰다듬었다. 살살 문지르는 감촉에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곳이 이렇게 예민한 곳인 줄, 처음 알았다. 샤워할 때 직접 만져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감각이었다.

“이아나, 참지 말아요.”

리케도르안은 그런 나를 알아차렸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얼굴을 내려 입을 가져다 댄다. 하아, 낮은 숨이 속옷에 부딪쳤다. 절로 허벅지에 힘이 들어간다.

“참지 말아 주세요, 네?”

“무, 뭐를?”

그가 올려다보고 내가 내려다보는 형국이었다.

“무엇이든지요.”

그의 뒷머리를 잡고 고개를 숙인 탓에 내 머리칼이 그의 머리 위로 장막을 두르듯 흘러내린다. 그대로 바람에 흔들렸다. 달콤한 장미 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그는 내 머리칼 사이에서 해사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내려 내 문신 위로 다시 입을 맞추었다.

“허락해주신다면, 이대로…… 당신과 밤을 보내고 싶어요.”

그가 입술을 묻은 채로 낮게 속삭였다. 농익은 음성에는 채 숨기지 못한 수줍음이 묻어나왔다. 이제는 붉은 장미를 새길 필요가 없었다. 이미 그의 문신이 아주 은밀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으니까. 가슴에도 자리 잡은 것처럼.

그럼에도 이리 묻는 것은……. 붉게 달아오른 이 얼굴에 일렁이는 욕망을 대변한 것이리라. 나는 그의 양 뺨을 잡고 그대로 들어 올렸다.

“정말…….”

내 목소리가 작게 새어 나간다.

“요망하네. 당신.”

배시시. 청초한 눈매가 휘어졌다. 하지만 웃으면서도 내 눈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싫어요?”

그렇기에 인격이 변한 것이 아닌, 이성이 있는 그쪽이란 것을 알았다. 나는 작게 웃었다.

“아니. 싫지 않은데. 당신은 언제나 곧게 던지는 것 하나밖에 모르는구나 싶어서요.”

“나쁜 말도 나쁜 짓도 모르지 않지만요.”

그럴 것이다. 황제 앞에서라거나 체이서와 있던 모습을 보니 어엿하다 못해 냉정하고 위엄 넘치는 대공이었으니까.

“당신이 이런 모습을 가장 좋아하고. 또 이런 모습만을 보이고 싶으니까요.”

“어떤 모습?”

“솔직한 모습이요.”

그가 내 손에 기댄 채로 눈을 감았다. 긴 속눈썹이 파르라니 떨렸다.

“……설사 거절당하더라도 다시 당신의 발밑에 울며 빌고 엎드릴지언정.”

“…….”

“당신을, 더는 아프게 하고 싶지 않은 내 바람이기도 해요.”

그가 한 손으로 내 손목을 쥐었다가 놓았다. 날 쇠사슬처럼 옭매던 흑장미와는 다르지 않았느냐고 묻는 듯이. 나는 고개 숙여 미소했다. 그의 뺨을 쓸어내렸다.

“응. 그러네요.”

“…….”

“달라서 좋아한 게 아니라. 당신이라서 좋아한 거지만.”

그러자 고개를 든 그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참 눈물이 많아요.”

“싫…….”

“싫지 않아요. 내가 눈물이 없어서 그런가.”

나는 엄지로 툭 굴러떨어지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나 때문에 우는 얼굴 보기 좋다고 하면 이상해요? 변태인가.”

결국 흘러나온 울음 때문에 붉게 흐려진 얼굴이 참 예쁘다고 하면 이상할까.

“우는 얼굴이 참 예쁘거든.”

그러나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리케도르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를 그대로 번쩍 들어 올렸다.

“리케도르안?”

나는 반문하면서도 순순히 그의 단단한 몸에 몸을 맡긴 채 그가 하는 양을 그대로 두었다. 그와 내가 있던 곳은 응접실이었지만 응접실 바로 옆에는 간이 침실이 있었다.

전형적인 귀족 저택 구조였다. 그는 푹신한 침대에 나를 내려놓고는 손을 쥐었다가 폈다. 막상 침대에 내려놓으니 긴장이라도 되는지 더는 손을 뻗지 못했다.

“……괜찮나요?”

허락을 구하듯 건네온 청아한 음성에 나는 웃음을 머금고는 그대로 돌아앉았다. 그리고 긴 머리칼을 한데 모아 한쪽 어깨로 늘어트리고는 그대로 고개만 반쯤 돌렸다.

“어쩌죠.”

그가 숨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나, 단추가 많은데.”

나는 손을 들어 등 뒤의 단추를 쓸어내렸다.

“풀어줘.”

이어서 파르르 떠는 손이 단추를 하나씩 풀어내렸다. 떨림이 등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리케도르안이 풀어내다 말고 멈칫했다.

“리케도르안?”

“이아나…….”

그런 그가 이상해 불렀더니 놀란 음성이 돌아왔다. 돌아보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그가 내 어깨를 붙잡고 그대로 등에 입술을 가져다 댔기 때문이었다.

“당신 등에 장미 문양이 나타났어요.”

“어떤 장미 문양이요?”

“푸른…… 장미요.”

등에? 지금까지는 없던 것이었다. 있었다면 거울 등을 통해 한 번도 보지 못할 리 없을 테니까.

“내가 처음으로 보는 거예요?”

아마도 그럴 것이다. 내가 조용히 끄덕이자, 이내 허리로 단단한 팔이 파고들었다.

달뜬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너무 좋아요.”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나머지 단추가 뜯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등이 반쯤 드러난 곳이 느껴졌다. 소름이 오싹 돋는 서늘한 바깥공기를 느끼며 나는 작게 미소했다.

“뭐해요. 마저 풀어줘요.”

뚝. 무언가 끊기는 소리가 한 번 더 들렸다. 마지막으로 남은 단추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흘끗 뒤를 본 나는 리케도르안의 이성 또한 끊어졌음을 알았다.

낮게 가라앉은 눈이 내 등줄기를 낱낱이 훑고 있었다. 손끝으로 쓸어내리자 오싹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예뻐요.”

짧은 사이 쉬어버린 목소리는 더욱 분위기를 녹진하게 가라앉혔다. 배 속이 꽉 조여 오는 기분이었다.

“너무 예뻐서.”

“읏, 리케.”

“한입에 삼켜버리고 싶을 만큼.”

리케도르안이 선사하는 감각에 온몸을 예민하게 곤두세우면서도 그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혹시나 인격이 바뀐 것일까 봐. 그러지 않았으면 해서. 이성이 있는 당신이길 바랐다.

그리고 내 바람은 이루어졌는지 돌아섰을 때 그의 얼굴은 붉어져 어찌할 수 없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표정이다.

내 몸에서 벗겨낸 옷이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리케도르안은 내가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눕히더니, 차례차례 어깨, 가슴, 배꼽…… 순으로 입 맞추며 내려갔다. 나도 모르게 가슴에 놓인 손을 겹쳐 잡았다.

살살 문지르는 손은 다정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정점을 건드리기도 했다가 넓게 퍼지도록 주무르기도 했다. 이 나긋한 손에 몸은 빠르게 달아올랐다. 나는 이런 서툰 손길도 좋았다.

다리 사이에서 멈춰선 리케도르안이 촉, 붉은 장미 문신에 입을 맞추더니 그대로 더 위로 올라가 갈라진 살 속으로 파고들었다. 허벅지가 파르르 떨리다 못해 힘이 꽉 들어갔다. 숨이 막힐 법한데 그는 멈추지 않았다.

아득한 곳으로 툭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머리를 뒤로 밀어내며 눈을 꽉 감았다. 새하얀 빛이 툭툭 터지며 불꽃이 터지는 것만 같았다.

발가락을 꽉 조이던 끝에 툭, 떨어졌다. 바람 빠진 고무 인형처럼 늘어진 채 숨을 몰아쉬면, 그제야 리케도르안이 얼굴을 떼어냈다. 달빛 아래 잔뜩 상기된 얼굴, 입술이 번들번들했다. 뺨이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그의 눈으로 기대가 어둠 속 자수정처럼 맴돌았다. 리케도르안은 입을 맞추려다 잠시 멈칫하고는 목으로 내려왔다. 그러고는 한참이나 얼굴을 묻었다.

“이아나…… 여기까지, 할까요?”

숨을 몰아쉬는 와중에 나는 멈칫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내가 아무리 처음이라지만 이게 에피타이저 수준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당신이, 힘들어 보여서.”

“그럴 리가요. 참을 수 있어요?”

“…….”

“오늘이 지나면 언제 또 올지 모를 날인……”

입술이 나를 덮쳤다. 나는 입을 겹친 채 배시시 웃고는 그대로 단단한 목 뒤로 손을 감았다.

그 뒤로는 나도 리케도르안도 욕망에 몸을 맡긴 시간이었다.

“……이아나, 힘을 빼요.”

“흐, 빼, 뺐…….”

“큽, 조금만 더…….”

그는 땀을 뻘뻘 흘리는 나를 보며 어찌할 줄 몰라 했다. 우스운 건 이 어쩔 줄 모르는 얼굴과 하반신 아래가 정반대였단 거다.

“당신, 너무, 크……읏.”

정염이 활활 타오르는 시간이었다. 나는 붉은 장미의 새빨간 환상을 본 것도 같았다. 그만큼 땀과 열로 범벅된 농염한 시간이었다.

어느 순간 리케도르안이 모든 것을 토하듯 긴 신음을 터트렸다. 그가 내 어깨를 아프지 않게 물고는 그대로 꽉 끌어안았다. 핏줄이 선 팔뚝이 보였다.

“하아…….”

그가 긴 숨을 토해냈다. 마지막까지 무너지지 않은 자세에서 그의 배려를 느꼈다. 이대로 누워도 좋으련만 리케도르안은 위에서 나를 한참이나 바라봤다.

“……예뻐요.”

“……네.”

“예뻐요. 이아나.”

“응…….”

“정말, 예뻐서, 이대로 행복해도 될까 싶을 만큼요.”

나는 이 순간 본 웃음을 평생 잊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감상은 딱 거기까지였다.

“한 번 더 해도 될까요?”

리케도르안이 배시시 웃으며 귀로 야릇하고도 기함할 소리를 하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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