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권 - 1화 (62/87)

1장. 좋아하는 마음으로는 안 됩니까?

르나그의 집은 크고 우아한 분위기였다. 공간마다 필요한 것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었고 조화를 이루었다.

크지만 텅 빈 느낌이 강한 헤르님이나 마찬가지로 크고 우아하기까지 하지만 어딘가 살벌하고 긴장된 느낌이 흐르는 도뮬릿과는 상반된다고 할지.

‘진짜 집이란 느낌이네.’

나는 조금 신기한 마음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르나그의 직업은 알다시피 감옥의 총 관리장이다. 직장이 감옥인 만큼 그의 집이 제일 살풍경할 법도 한데, 반대라는 것이 꽤 신기하게 느껴졌다. 오히려 내가 보았던 성과 저택 중에 가장 가정적인 느낌이었다. 안내해준 방에서 쉬고 나니 어느덧 반나절이 흘러 저녁이었다.

“식사는 마음에 드셨습니까?”

내가 낮잠을 조금 오래 잔 탓에 이곳에서의 저녁 식사는 늦은 시간에 치러진 참이었다.

“네. 아주 맛있던걸요.”

난 식사를 딱히 가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맛있었다는 듯이 허공에 나이프로 써는 흉내를 냈다.

“특히나 구이 요리가 맛있던걸요. 아, 스튜랑요.”

정말이었다. 나름 남부럽지 않은 것들을 먹으며 살았지만 여기서 먹은 것도 참 맛있더라고. 이곳은 마법이 함께 발달한 세계라 언제 어디서든 음식을 갓 나온 것처럼 따끈따끈하게 한 채로 먹을 수 있었다.

“입맛에 맞으셔서 다행입니다.”

르나그가 맞은편에서 찻잔을 내려놓았다.

“원래 잘 가리지 않는 편이긴 한데, 맛있었어요. 정말요.”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응접실에서 간단한 차 한 잔을 하던 중이었다.

“그렇군요. 직접 만든 보람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네?”

다음 순간 나는 르나그의 말에 멈칫했다. 하마터면 찻잔을 놓칠 뻔했다. 출렁이는 잔을 얼른 수습하고 고개를 들었다.

“직접 만드셨다고요?”

“네.”

“어…. 요리 실력도 좋으셨구나.”

내 당황스러운 반문에도 태연한 답이 돌아왔다. 보통, 귀족 남성이 요리도 할 줄 알던가? 아니, 그렇지 않다. 내가 상식이 좀 부족해도 결코 흔한 일은 아니었다. 내 얼굴이 살짝 굳었다. 생각보다 더 귀한 요리를 먹은 것 같은데.

“부담 가지시라 드린 말씀은 아니었습니다만.”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제가 생각보다 더 귀중한 식사를 했구나 싶어서요.”

나는 뺨을 검지로 살살 문지르며 눈을 휘었다.

“그럼 더 감사 인사를 드려야죠. 아무나 먹지 못하는 것 같은데요.”

“그건… 그렇습니다.”

“네?”

“단 한 사람을 위한 식사였으니까요.”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르나그의 얼굴을 보아하니 저쪽은 순도 100퍼센트의 사심 없는 진심을 말한 듯한데. 심지어 이로 뭘 바라겠다는 얼굴조차 아니니, 퍽 곤란했다.

난 최대한 태연하게 입술을 열었다.

“저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예전의 제가 가정적인 남자가 좋다고 했나요?”

혹시 이것도 ‘이아나’가 남긴 말인가 싶어 물었다. 르나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아닙니다만. 가정적인 남성이 좋으시다면 기꺼이….”

“아뇨, 아뇨. 그렇다는 게 아니고요.”

“싫으십니까?”

“아니, 호오를 따지자면 좋은 쪽이긴 한데요. 그런 뜻으로 물은 건 아니라.”

“확실히 예전에도 그렇게 말씀하신 적은 없지만… 비슷한 말씀은 하셨지요.”

르나그가 턱을 잡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가는 말이었으니 기억하지 못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 말에 멈칫한 것은 물론이었다. 저건… 다시 말하자면 본인은 지나가는 말 한마디에 요리를 시작했다는 소리 아닌가?

“오래전에 맛있는 것이 좋다고 하셨습니다.”

“…맛있는 거야 누구든 좋아하니까요.”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준 것을 한 번쯤 먹어보고 싶다고도 하셨지요.”

“…….”

그건 나도 괜찮은 것 같긴 한데. 우연찮게도 ‘이아나’가 나랑 취향이 어느 부분에서 겹쳤구나 싶었다.

나는 할 말을 잃고 그의 어깨너머를 바라봤다. 그러다 말고 얼굴을 길게 쓸어내렸다.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생각해보면요.”

나는 찻잔 손잡이를 괜히 잡았다가 놓았다.

“이것저것 은혜를 받아놓고서 제대로 돌려드린 적이 없네요.”

“아닙니다. 저는 주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르나그가 제 손을 가슴에 가져다 댔다.

“어디까지나 제가 좋아서 베푼 호의니까요.”

이 남자는 상대의 마음을 가볍게 하는 말솜씨를 가졌다. 그리고 때로 이것은 사람의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들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말이다.

“저희는 내일 돌아가나요?”

“일단은 그럴 예정입니다만.”

르나그가 가슴에서 손을 떼어내며 찻잔을 살짝 잡았다가 놓았다.

“아, 그리고 연락 말씀인데.”

연락이라면 리케도르안, 즉 헤르님 측에 건네는 연락을 말할 터다.

“연락은 내일 하려 합니다.”

“아, 네.”

이미 한 줄 알았는데. 아직 안 한 건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르나그는 웬 보석을 내 앞에 보여주었다. 정확하게는 보석이 박힌 목걸이였는데, 중앙 보석 부분이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이것이 연락장치라고 했다. 먼 곳에서도 통신할 수 있다고.

“…이거, 계속 빛이 들어오는데요?”

“아마 헤르님 연락일 겁니다.”

르나그가 산뜻하게 말했다.

“미친 듯이 연락이 오고 있지만 받고 있지 않지만요.”

“아하하, 네.”

그렇게 부드럽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이리 생각하면서도 그저 웃었다.

“이미 하얀 장미와는 합류했을 테니 지금쯤 이아나 양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예상했을 겁니다.”

“으음, 그렇군요.”

“아니었다면 도뮬릿 저택 앞으로 어마어마한 사병이 몰렸다는 소식이 들렸겠지요.”

내가 빠져나오지 못했다면 그대로 전쟁이 일어났을 거라는 얘기로 들리는데. 나는 난감하게 웃었다. 이렇게 맹목적이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지.

“아마 지금쯤 한창 달려오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르나그의 긴 손가락이 잔 손잡이를 톡 건드렸다.

“좌표를 모르니 이동 마법을 쓸 순 없을 테고.”

그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마치 상황을 가늠하는 것처럼 보였다.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을지도요.”

마찬가지로 나도 같은 생각이긴 했다. 리케도르안이라면 어떻게든 달려올 것 같은 느낌이 든달까. 그래서 굳이 연락을 해달라 강력하게 피력하지 않았다. 빠르면 내일쯤 다시 보게 될 것 같았으니까. 아마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르나그는 보일 듯 말 듯 미소 지어 보였다.

“그리고 대공 각하께서 여기 도착하셨을 즈음에 이아나 양을 이동시켜드릴까 싶기도 합니다.”

봄바람처럼 보드라운 음성이었으나 담긴 의미는 그렇지 않았다.

“…네? 어디로요?”

“헤르님 성으로 말입니다.”

“짓궂으시네요.”

“이런 심술 정도는 봐주십시오.”

그가 찻잔을 들어 올린 채로 고개 숙여 얼굴을 누그러트렸다.

“당신에게 위험을 감수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으음. 보복할 대상을 잘못 고르신 것 같은데…. 저한테 하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아닙니다. 잘 골랐습니다.”

본인이 그렇다면야 할 말은 없지만. 리케도르안에게 미안했지만 하루 정도는 르나그의 심술 아닌 심술을 넘어가기로 했다. 르나그에겐 빚진 것이 많았으니까.

그렇게 한차례 차를 마시고 우리는 티 테이블에서 소파로 자리를 이동했다. 방 안에 시종을 전혀 두지 않은 터라 르나그는 직접 테이블을 치우는 신기한 모습을 보였다.

성격상 직접 치우는 게 편하다나.

캄브라캄에서는 별도의 시종을 두지 못하는 터라 몸에 익었다고 한다. 치우는 모습을 한참 보다 소파에 목을 기대 눈을 감았다. 이곳에 오자마자 잠시 잤지만 그럼에도 피곤했다. 줄곧 도뮬릿에서 신경을 곤두세워 잠을 잘 자지 않은 탓이다.

‘기회를 노렸어야 했으니.’

긴장이 풀려서인지 맥없이 잠이 계속 쏟아진다.

잠깐 동안 눈을 감았던 것 같은데.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눈앞에 뭔가 일렁이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눈을 떴다. 그리고 눈앞에서 멈칫한 손이 보였다. 르나그의 손이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아….”

“으응, 르나그?”

나는 눈을 비비며 목을 바로 세웠다. 불편한 자세로 졸았더니 목이 뻣뻣했다. 다시 눈을 뜨면, 르나그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주춤 서 있었다. 여전히 손을 허공에 멈춘 채로.

아마도 내게 뻗으려 했던 것 같은데.

르나그가 화들짝 놀라 자신의 손을 다시 가져왔다.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는 듯 당황한 얼굴이었다.

“저, 불편한 자세로 주무시는 것 같아 계속 불렀는데…. 깨어나지 않으셔서.”

“네. 깨우려 했던 거죠? 괜찮아요.”

나는 손을 뻗어 그의 팔을 톡톡 토닥여주었다. 그러고는 내 옆자리를 툭툭 쳤다. 그가 숨을 삼키며 내 옆자리에 앉았다.

나는 우아한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입을 뗐다.

“조금 전에도 말했던 것 같은데.”

왜일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르나그와 이렇게 조용하고 차분하게 대화를 나눌 시간은 없을 것 같다고. 그러니 이 순간에 담았던 말을 해야 했다.

“내게 바라는 것이 없나요?”

잔잔하게 가라앉은 침묵 속에서 서로 다른 색의 눈이 교차했다. 노란 장미를 품은 듯 금색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눈매가 날카로울 뿐 놀라는 모습마저도 차분하고 정갈한 남자였다.

“지금이라면 들어줄 수 있어요.”

“…무엇이라도 말입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극구 사양하던 남자가 조용히 반문했다.

“정말, 무엇이라도 들어주실 수 있습니까?”

보통 평소에 장난스러운 사람이었다면 이런 모습이 어색해 보일지도 모르나 그는 늘 진지하고 정돈된 남자였다. 나는 칼처럼 벼려진 눈매를 마주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오해하지 않도록 느릿하게.

“무엇이든지요.”

그의 눈이 일순 깊어졌다. 동시에 망설임이 스친 듯했다. 추측하기로는…… 내게 바라는 것이 없거나 이제 생각하는 건 아닌 것 같고. 아마도 이렇게 말했음에도 꺼내기를 저어하는 것 같았다.

결국 내가 먼저 손을 뻗었다.

“생각하신 것이 있는 거죠?”

톡. 내 손이 닿자 그가 움찔 놀랐다. 살짝 커진 눈동자가 우스워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워낙 무섭고 심각한 얼굴을 기본형으로 가진 사람이라 이렇게 조금만 놀라도 전혀 다른 표정이 되곤 했다. 나는 그의 손가락 끝을 잡았다. 그는 약간의 난감한 기색을 보이면서도 피하지는 않았다.

“제가 생각한 것이 맞나요?”

“맞습니다.”

그가 숨을 삼키며 대답했다. 목울대가 꿀꺽 넘어가는 것이 고스란히 보였다.

“그럼 말씀해주세요.”

그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진다.

“곤란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여기지 않을게요.”

그렇게 말하고는 속으로 잠시 멈칫했다. ……잠시만.

‘여기서 입이라도 맞추자면 어떡하지?’

앞서 나간 상상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괜히 심각해졌다. 쉽게 생각하자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체이서와도 한 마당에 모든 장미랑 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나 싶지만…….

‘하는 김에 프란시아 뺨에 뽀뽀하는 기분으로 르나그랑도…….’

여기까지 엉뚱한 생각을 하다 나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그저 실없는 생각이었을 뿐. 르나그를 두고서 그리 여기고 싶진 않았다. 되도록 진지해지는 것을 피하고 싶을 뿐이지 닥친 상황을 회피하지는 않았다. 이미 뱉어버린 말이 있지 않나.

“그래서 뭔가요?”

“그건…….”

망설이듯 고개를 떨어트렸던 르나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결심이 선 눈이었다.

“그럼 곤란하시더라도…….”

***

곤란했다.

‘분명 곤란해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에게 미안한데 곤란하다. 그냥 곤란한 것도 아니다. 매우 곤란했다. 나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 상황에 대해서 어찌 말하면 좋을지 몰랐다.

“저, 르나그.”

한참 준비하던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이제 와서 물린다는 말은 못 하나요? 진짜 할 거예요?

그러나 입속을 맴맴 맴돌던 말은 단 한마디도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뱉은 사람이 나인 걸 어떡하겠나. 그저 손에 얼굴을 반쯤 묻고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가 그렇게 말하는 사이 준비가 모두 된 것인지 그가 내 앞에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가 내려놓은 것을 본 나는 더욱더 심란해졌다. 다름 아닌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물이었으니까. 대야인지 뭔지. 크기는 대야인데 한눈에 봐도 금박을 씌운 데다 아주 비싸 보이는 그릇을 보고 있으니 심란함이 더욱 커졌다.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죄송한데, 르나그.”

“네. 말씀하십시오.”

“제가 원래 말을 번복하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네. 말씀하시지요.”

내가 하려는 말을 눈치챘는지 그가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응접실에는 그와 나 둘뿐이었다. 이런 광경을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건 정말 다행인 것 같긴 한데.

“저,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서 다시 한번. 아니. 아니. 마지막으로 한번 물을게요.”

나는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정말 이걸로 괜찮아요?”

“예.”

그가 작게 웃었다.

확실히 내가 허락하면서부터 딱딱하던 그의 표정이 더욱 누그러지고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발을 씻게 해 달라니요!”

근데 그가 바란 소원이 터무니없다는 게 문제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없겠어요? 발은…… 그. 보통 시종이 씻겨줄뿐더러 나는 직접 씻을 줄 알아요.”

“네. 저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니, 그런데 왜 이런 걸 소원으로 비는 건데. 나는 더 크고 거창한 것도 들을 마음의 준비를 했단 말이다. 그것도 만반의 준비를!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을 잃었다.

“왜 발인가요?”

“예?”

“손도 있고, 팔도 있고. 몸도 있는데…….”

그러자 르나그가 고개를 돌리며 뺨을 살짝 부여잡았다. 어찌하나 싶은 곤혹스러운 기색이었다.

“다른 곳이면 모르나 몸은 조금…….”

“아니. 예시가 그렇단 말이에요.”

물론 짐작 가는 바가 없는 건 아니었다.

“저 르나그, 혹시 조심스러운 질문인데, 혹여 이런 쪽으로 취향이 있으시다거나. 성, 성벽이.”

“네?”

“설마 발을…….”

“예?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지 잘은 모르나 아닙니다.”

그가 단호하게 부인했다. 성벽이란 단어에서 놀란 것 같았다.

“아뇨 농이에요. 그냥 여쭤봤어요…….”

나도 안다. 그런 건 아닌 것 같아서 엉뚱한 질문부터 해봤다. 왜, 발을 특히나 좋아하는 성향이라거나……. 혹시나 이런 성벽이 있나 해서 말이다. 실없는 소리는 여기까지 하고. 나는 끙 숨을 흘리며 진짜 질문을 꺼내 들었다.

“혹시 이것도 제가 이전에 무심히 흘려보냈던 말인가요?”

“…….”

그는 대답이 없었다. 침묵은 곧 긍정이었다. 나는 손에 얼굴을 묻은 채로 쓴웃음을 지었다. 이쯤 되면 ‘이아나’가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생생하게 그녀의 취향을 하나씩 답습하고 있으니.

르나그는 그릇의 끝부분을 쥐었다가 놓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곤란한 부탁을 드렸던 것 같습니다.”

찰랑거리는 물을 톡 두드린 르나그가 곧 고개를 들어 나를 담았다.

“그럼 이건 없던 걸로 해주…….”

“아니요. 앉으셔요.”

르나그가 이상한 취향을 가진 것도 아니고. 과거의 ‘이아나’가 어떤 상황에서 이런 말을 꺼냈는지 몰라도 그는 지나가는 말조차 기억했다. 내가 들어주겠다고 이야기 한 것이다. 번복할 생각은 없었다.

“그냥 한번은 빼보려 했어요.”

나는 치마를 살짝 들어 발끝으로 툭 물을 두드렸다. 그러고는 곤란하다는 듯 웃어 보였다.

“부끄럽잖아요.”

부끄럽다기보다는 평생 이런 걸 해볼 일이 있었을까 싶은 마음이었지만.

“……이아나 양께서 이전에 하신 말씀도 있었지만.”

나와 마주하던 르나그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오늘 슬리퍼를 신고 뛰지 않으셨습니까.”

실례하겠습니다, 작은 인사와 함께 그의 손이 조심스럽게 내 발목을 쥐었다. 그의 손이 큰 건지 발목이 한 손에 잡혔다.

“이건 약초를 섞은 물입니다.”

그도 검사인 것은 마찬가지라 손에 긴 흉터가 보였다. 아니다. 무기는 활이었던가. 그는 내 발등 위로 물을 끼얹으며 말을 이었다.

“오늘 급히 뛰셨으니 상처가 나지 않았을까 염려했습니다.”

그의 말처럼 내 발목과 발등에는 자잘한 생채기가 있었다. 도뮬릿 저택 내에서 나는 실내용 신발을 신고 활동했고, 그건 뛰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하지만 체이서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는 미리 신발을 갈아 신을 수 없었고, 체이서를 눕힌 뒤에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나조차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떠올린 걸까. 나는 살짝 놀랐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문제였으니까.

“이런 건 내버려 두면 금방 나아요.”

“맞습니다.”

르나그가 수긍했다.

“물론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무는 것이나…… 아픈 시간이 짧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얼굴을 보고 아프지 않다고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끄응 소리를 내며 그에게 발을 내주었다.

찰싹.

한동안 응접실에는 물을 끼얹는 소리, 참방참방 물이 튀겨지는 소리만 들렸다. 부드러운 체온과 따뜻한 물 때문인지 나른한 졸음이 쏟아진다. 나는 졸음을 쫓으려 눈을 비볐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는데…….”

여전히 이건 아니다 싶었지만 그가 평소보다 더 부드럽고 즐거워 보여, 지적하는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대화로라도 어색함을 몰아낼 요량이었다.

“말씀하십시오.”

생각해보면 오늘 낮 도뮬릿의 후원에서 그와 마주했을 때 나는 갈림길에 서 있었다.

“낮의 갈림길에서 혹시 다른 방향은 다른 문이랑 연결된 길이었나요?”

그냥 혹시나 싶어 가벼이 물었다. 조금은 어색한 이 상황에서 할 말이 딱히 없었으니 분위기를 풀 겸 겸사겸사해서 말이다. 그런데 의외의 반응이 돌아왔다. 르나그가 난감한 얼굴을 보인 것이다.

그는 내 발을 잡은 그대로 눈을 살짝 내렸다.

“그렇습니다.”

나는 작은 헛웃음을 토했다.

“르나그는 정말 거짓말을 못 하네요.”

그는 난감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살면서 절대 듣지 못했을 말을 들은 사람처럼.

“꼭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만……. 이아나 양 앞에서는 그럴지도요.”

이런 모습도 진솔하기 짝이 없단 걸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싫으십니까?”

“거짓말 하는 사람보다는 진솔한 쪽이 좋아요.”

나는 그리 말하고는 물이 튄 뺨을 살짝 문질렀다.

“상대가 거짓을 말하는지 아닌지 파악하는 건 힘들고 귀찮거든요.”

그런 노력조차 들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게으른 것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난 그랬다. 이렇게 말하고는 턱을 괴었다. 대화 도중에도 그는 열심히였다. 참 뭐든 열심히 하는 사람이네.

그가 내 발을 잡은 탓에 가까이서 르나그의 얼굴을 보게 되었는데, 그의 안경에 미세하게 실금이 가 있는 것을 보았다.

‘안경에 금이 갔잖아?’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만큼 미세했다. 하지만 예전에 누군가에게 듣기로 안경 낀 입장에서 저런 건 매우 거슬리고 시력에도 좋지 않다고 들은 것 같았다.

물론 르나그는 실제로 눈이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영향이 없진 않을 거였다. 르나그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저, 르나그. 안경에 실금이 간 것 같아요.”

“아, 보셨습니까? 맞춰둔 안경이 없어서.”

“다른 것은 없나요?”

“있었습니다만, 모두 깨져서요.”

그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작게 미소했다. 안경은 전투에 맞지 않다. 그리고 그는 전투가 멀지 않은 직위와 작위를 가진 사람이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턱에서 손을 떼어냈다.

“저, 실례해도 되나요?”

“이아나 양이라면 얼마든지 괜찮습니다만…….”

나는 망설임 끝에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그가 내 발을 조심 조심히 잡았듯 천천히 르나그의 안경을 벗겼다.

“이아나 양?”

“괜찮아요.”

나는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그가 한마디도 놓치지 않도록.

“더는 무섭지 않아요.”

그가 울 것 같은 표정을 했다.

“그러니, 안경은 끼지 않아도 돼요.”

“불……편한 것은.”

나는 한 번 더 말했다.

“무섭지 않아요.”

그가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우는 걸까?

아니, 울 것이다. 왜인지 확신에 가까운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울고 있지 않았다.

대신 나지막한 목소리로…….

“사랑합니다.”

내게 고백했다.

그의 얼굴을 본 순간 그저 아직은 울지 않았을 뿐이라는 걸 알았다.

“당신께 폐가 되는 줄 알면서도 품은 이 마음은……. 어찌하여야 합니까? 그럼에도 저는.”

그가 무어라 더 이야기하기 전에 나는 얼른 손을 뻗었다.

툭.

안경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아니요, 르나그.”

나는 그의 눈을 가린 채로 작게 속삭였다.

“당신에게 이야기할 것이 있어요.”

나는 좀 더 빨리 얘기해야 했는지도 모른다.

당신에게 미안하지만 이젠 안다. 내가 깨달음이 늦었다. 이 눈물을 봐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다. 이리도 날카로운 얼굴을 하고서 가슴에 품은 것만은 지나치게 순수한 이 남자의 마음을……. 가볍게 외면해선 안 됐던 것이다.

그동안 무심히 흘려보냈던 시간을 반성했다. 아울러 이제야 알았다. 왜 오늘이어야만 했는지. 당신과의 조용한 대화가 어째서 오늘이 마지막일 거라 예감했는지.

오늘로 모든 걸 이야기하면 더는 이전의 관계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알기에.

하지만 이야기해야 했다.

나는.

‘이아나’가 아니에요.

그리 말하려던 때였다.

“하지 마십시오.”

그의 말이 빨랐다. 그의 손이 내 손위로 겹쳐지고 이어 내 손을 쥐었다.

“르나그? 잠시만 그게 아니라, 중요한 말이라.”

그가 거절한다고 느꼈을까 봐 얼른 말을 이으려 했다. 그러나 그가 내 손을 단호하게 잡았다.

“아니요. 하지 마십시오.”

말을 가로챈 그가 빠르게 토해냈다.

“……어떤 말씀을 하시려는지. 알고 있습니다.”

르나그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처럼 아주 세차게. 그가 눈을 감는 것이 느껴졌다. 손바닥으로 물기가 느껴진다. 이윽고 그의 목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미약한 음성이 쥐어짜듯이 힘겹게 흘러나왔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니, 무엇을 말인가. 나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그의 얼굴을 훑었다. 내가 눈을 가려놓은 탓에 보이는 것은 반절의 얼굴밖에 없었다.

“어떤 걸 알고 있단 건가요?”

“아마도. 모두일 겁니다.”

그가 드러낸 것의 반만 알아들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차렸다.

“알고 있었습니다.”

조금 전 그의 말이 인정하지 못하듯 애절했다면 이젠 확신이 깃든 어조였다.

“당신이 우리의 첫 만남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의 목소리는 내가 흠칫 놀랄 만큼 태연하게 흘러나왔다. 공연히 손이 움찔 떨렸다.

“어쩌면 저와의 모든 기억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도 함께.”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알지 못했다. 입술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결국 할 말을 찾지 못했으니까.

나는 내가 위로에 너무나 서툴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런 내가 감히 위로조차 건네지 못할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침묵 외엔 없었다.

“이전의 당신을 본 사람이라면 알 겁니다.”

그는 반만 드러난 얼굴로 읊조렸다.

“……다른…… 사람 같다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느 날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건 어떤 기분일까.

“당신에게 더는 제가 기억하는 모습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도. ……곧바로 알았습니다.”

르나그가 무엇을 어디까지 아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결국 다른 사람이 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는 사랑했기에 더 잘 알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어쩌면.”

그의 속눈썹의 잔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를 따라가듯 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어느 날 죽음에서 깨어난 당신은 모든 기억을 잃은 것이고.”

그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제가 아는 당신은 사라지고.”

그러나 끝으로 갈수록 헐떡이듯 숨이 흩어진다. 숨을 고르는 시도는 번번이 날숨에 부서지고 기화했으나 그는 애써 말을 맺었다.

“다시 눈 뜬 당신은 전혀…… 전혀…….”

그는 결국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그가 침묵한 말을 알고 있었다.

“새로운…….”

어느 날 이 남자가 아는 ‘이아나’는 사라지고. 다른 사람이 있었다는 걸.

“태연하려 애썼습니다.”

캄브라캄이라는 거대한 단체의 수장이었다.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모른 척 눈 감고 있던 사람은 나 하나만이 아니었던 거다.

난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눈 감고 있는 이에게 억지로 눈을 틔워 보게 해야 하는가. 아니면 지금처럼 계속 모른 척해야 하나.

“어쩌면, 그 말이 맞아요. 당신이 사랑했던 사람이 더는 이 세상에 없다면요?”

그럼에도 나는 남자에게 끝내 알려주고 싶지 않은 진실을 알려주었다. 눈앞에 있는 것이 그저 낯선 사람이라면 어찌할 것이냐고.

손바닥 밑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아주 오래전에…… 감으로서 먼저 깨달았는지도 모릅니다.”

웃지도 울지도 못한 입술은 이 순간에도 나를 배려하듯 부드러운 목소리를 토해냈다.

“아는데도, 눈앞의 당신에게 심장이 뛰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열렸다.

“다시, ……다시. 사랑에 빠지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나는 점차 깨달았다.

“제가 어찌하여야 했을까요.”

담백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사실 그의 심장을 찢어 흘러나온 고백일 것이란 걸.

“당신의 가문에 대해 제대로 눈치채지 못한 당신조차 이다지도 사랑스러운데.”

그가 입을 다문 채 헐떡였다.

“제가 어찌하여야…….”

나는 그가 어떤 혼란을 겪었는지 묻지 않았다. 그저 괴로운 목소리로 짐작해볼 뿐. 마침내 그 끝에서 사랑의 끝을 어찌하기로 마음먹었는지 또한 묻지 않았다.

“당신이 그동안 어떤 생각을 한 건지 더는 묻지 않을게요. 하지만 르나그, 이젠……. 당신이 깨달은 것이 있다면, 앞으로 우리 관계 또한 바뀌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모든 걸 알았으니. 상황이 다르지 않으냐 말하려 했다. 내게 기억이 없고, 다른 사람인 걸 알았다면 앞으로 그만 더욱 괴로워질 뿐이니까.

그 사랑이 ‘이아나’로 기인한 것이라면 더욱더.

“나는 당신에게 돌려줄 수 없어요.”

“돌려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괴롭잖아요.”

무엇보다 설사 정말 나를 사랑한다고 해도 나는 돌려줄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저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상관없습니다. 하나 돌려받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여 정리하라 하신다면.”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는다. 그는 끝끝내 마지막 물음과 울음을 함께 던졌다.

“그럼 이미 사랑해버린 마음은 어디로 흘려보내야 합니까?”

내 거절을 부드러이 다시 거절하면서. 날카롭고 벼린 칼 같던 남자가 무너지는 모습은 강인했던 만큼 애처로웠다.

나는 그를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손을 살짝 움직였다.

“일단 눈물부터 닦고 얘기해요.”

일단 그의 눈물부터 닦아주어야 할 것 같아 손을 떼어내려 하는데, 그가 내 손을 잡고 고개를 한 번 더 저었다.

“보지 마십시오.”

그가 망설이더니 작게 덧붙였다.

“흉합니다.”

“흉하지 않아요.”

“……보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솔직한 말로 상황엔 어울리지 않지만…… 우는 미남의 얼굴은 절경이면 절경이었지. 결코 흉하진 않을 텐데.

나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알았어요. 그럼.”

그러고는 내 손을 잡은 그의 손을 떼어낸다. 그의 손이 움찔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손을 내 얼굴에 올려두었다.

“이렇게 하면 되겠다, 그렇죠?”

우리는 서로의 눈을 가려준 형국이었다. 조금 우스운 몰골에 작게 웃음이 새어 나간다.

“나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걸로 할게요.”

이미 모든 걸 듣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으나 그럼에도 당신을 위해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울지 않았고, 나도 보지 않았어요.”

당신이 토해내고 알고 싶지 않아 하던 진실들. 이것은 이 남자의 절절한 사랑에 대한 배려였다.

“그러니 말해 봐요. 돌아간다면, 어찌하고 싶나요?”

나는 듣지 않은 때로 돌아간다면요. 하고 덧붙였다.

이 세계는 체이서가 회귀한 세계다. ‘이아나’는 텅 빈 몸뿐이었고 몸만이 살아 움직였다고 했다. 돌아온 시점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이아나’가 르나그와 처음 만난 뒤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볼 뿐이다.

그러니.

“바라는 대로 해줄게요.”

당신의 사랑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죽은 이를 줄곧 홀로 사랑해온 남자가 더는 괴롭지 않길 바랐다. 안타까웠다. 그저 무심히 끝낼 수도 있던 것이나 지금까지 아무런 계산 없이 잘해준 그에게 주고 싶었다.

포기하든 일깨워주든. 그가 스스로 만든 착각에 잠기든.

선택할 수 있게.

작은 바람 소리가 들렸다. 나 또한 눈이 가려져 알 수는 없지만 그가 웃은 것 같았다.

“이아나 양은 참으로 잔인하신 분이시군요.”

그가 ‘과거의 당신과 현재의 당신을 택하라니.’ 하고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다신 볼 수 없는 사람과 눈앞에 있는 당신.”

실제로 그리 말한 건 아니었지만 반문하지 않고 그의 답을 기다렸다.

“시작은 오래되었습니다. 아주 오래. 그럼에도 눈앞에 집중하고 싶다 하면요.”

눈을 뜨면 손 틈으로 희미하게 비치는 빛이 보였다. 넓은 손가락 사이로 툭 잘린 그의 얼굴이 보인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사람이 스스로 다른 사람이라 주장하는 당신이라면.”

긴 눈물이 날카롭고 섬세한 턱선 끝에 맺혔다. 어쩜 눈물마저도 본인을 닮은 것인지. 차마 떨어지지도 못한 물방울이 애처롭게 흘러 목울대까지 흘러내린다.

“이 마음이 지워지지 않으면 어찌합니까?”

그는 잠시 손을 떼어냈다.

커다란 손이 조심스럽게 내 얼굴을 더듬어 다시 내 눈을 가렸다. 나를 불편하게 했다 생각했던 모양이다. 나는 가만히 그가 내 눈을 가리도록 두었다.

누군가가 그러길 인간의 눈동자는 진실의 창이라 했다. 그건 거짓을 담을 때의 제스처 등을 말한 것이었던 거겠지만.

다른 의미에서 눈은 그 사람을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 같은 몸이라도 사람이 달라지면 눈빛이 다르다. 나는 눈을 피하지 않는 버릇이 있었고, 그는 오래전부터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결국.

“캄브라캄에서 유일하게 나를 웃게 하던 당신은 언제나 마른 땅 같은 내 삶의 단비 같은 존재였습니다.”

나는 그의 눈물을 가려주었고.

“더는 이전의 당신이 없다고 해도.”

그는 내 눈에서 흘러나오는 진실을 외면한 것이 아닐까.

“해바라기가 태양을 향해 자라나듯. 그저 지금 이대로 당신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참 손이 따뜻한 남자였다. 그렇기에 내 손도 따뜻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말씀드렸듯 다시, 다시 사랑에 빠지는 것은 어렵지 않았기에.”

말과 다르게 떨리는 목소리는 나를 달리 보는 건 결코 쉽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당신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이젠, 당신이 없으면 죽을 것 같아요.”

그가 끝내 최후의 한마디를 토해냈다.

“현재의 당신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이아나’는 과연 알고 있었을까. 자신이 사라졌다는 소리에 세상이 사라진 듯 구슬피 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새로운 사랑에 이다지도 슬피 우는 남자는 섧고 사랑스러웠다. 무심한 나조차 마음이 아주 아프도록.

“사랑을 감히 청하지는 않겠습니다.”

이 순간 체이서의 말이 머리를 스쳤다. 긴긴 시간 동안 선택받은 적이 없다던 노란 장미.

“사랑해도 되겠습니까?”

단 한 차례의 과오로 배신자란 꼬리를 붙이게 된 이들은 오랫동안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내가 이전의 ‘이아나’가 아니라도 말인가요?”

“…….”

그는 대답이 없었다. 눈물을 떨어트릴 뿐이었다. 그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처음 사랑했던 이는 다시는 세상에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그가 어떤 마음인지 알지 못했다.

“예. 당신이 눈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숨을 쉴 수 있으니까요.”

만약 지금의 나를 사랑하더라도 그는 마찬가지로 보답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저 현재의 나를 사랑하고 싶다는 착각이라고 한다면.

“르나그.”

그에게서 나온 간절한 바람이었다.

“사랑하는 것을 허락해주십시오.”

이 사랑이 혼란 속에 피어난 착각이었다 해도 기꺼이 가려주기로 했다. 어쩌면 세상에 더는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있을지도, 혹은 긴 짝사랑의 종말 끝에 또 한 번 외사랑을 시작한 걸지도 모를 남자에게.

“나를 사랑해도 좋아요.”

가장 슬픈 허락을 내렸다.

그 순간 눈에서 그의 손이 떨어졌다.

“예.”

그리고 그곳에는 처음 보는 얼굴로 웃는 남자가 있었다.

더는 안경도 가면처럼 쓰고 있던 예의도 온데간데없는 부드러운 웃음이.

“이아나.”

나는 깨달았다. 지금까지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사랑합니다. 지금까지처럼요. 아니, 어쩌면 더욱더.”

그가 사랑하는 건 오롯이 나였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사랑을 말하고 있다.

“저는.”

그가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아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늘 한 걸음 뒤에 있겠습니다.”

내가 없으면 곧 죽을 것같이 굴면서. 곁에만 있게 해달라는 모습을 한 채.

“허락만 해주신다면.”

“……그래요.”

이리 말하고는 아주 잠깐 생각했다. 사랑을 받지 못한 장미는 미쳐버리고 만다는 체이서의 말을.

아울러 조금씩 이 기형적인 관계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내가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