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61/87)

***

제이르가 말했다.

그곳에 머무른 시간이 일정 시간을 넘어서는 안 됩니다. 라고 말이다. 내가 도뮬릿 내에서 체이서를 쓰러트리고, 티아라를 챙겨서 나오는 동안 그는 다른 곳에서 사건을 일으킬 거라했다.

도뮬릿 영지 근처에는 범죄 도시가 많다. 이들은 ‘자유도시’란 이름으로 불리지만, 실상은 무법지대. 이런 도시가 많은 이유는 체이서가 의도한 바였다. 정확하게는 전 도뮬릿 공작이 저지른 일을 물려받아 더욱 크게 키웠다.

아무튼 제이르는 범죄를 소탕한다는 목적 하에 이 도시들 중 하나에 문제를 일으켜 시선을 끌 예정이었다.

이 도시 중 어디가 중요한지는 르나그와 도뮬릿의 내부 사정을 아는 내가 정보를 주었고, 도시를 직접 건드리는 건 제이르가, 프란시아는 성기사들을 빌려주었다. 체이서는 함정인 걸 알겠지만 사람을 아예 보내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럴 만할 걸 건드릴 테니까.

나는 여기에 대해 이리 생각했다. 오랫동안 원수지간이니 헤르님은 도뮬릿을, 도뮬릿은 헤르님을. 서로의 치부 정도는 하나씩 알고 있겠지.

나는 고요하게 기다렸다. 사실 저택에 돌아온 뒤로 내가 할 일은 없다. 본래 여기 살 적에도 내가 할 일은 없었다. 그저 등 따시게 먹고 자고, 가끔 밖을 산책할 뿐이었으니.

푸딩이는 잔뜩 긴장한 탓인지 내 안에서 빠져나오지 않았다. 여차하면 바로 튀어나와야 한다나.

조그만 흑마법사님과도 재회했지만 이야기를 오래 나눌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살벌한 낯을 한 체이서가 단 한 순간도 빼놓지 않고 내 방, 내 곁에 있었으니까.

물론 여기서 살벌한 얼굴이란 당연히 내가 보는 얼굴이 아닌 그가 부하 혹은 조그만 흑마법사님에게 보이는 얼굴이었다.

내가 돌아보면 언제나처럼 빙긋이 웃고 있었으니.

사색이 된 상대의 얼굴에서 짐작해볼 뿐이었다.

이처럼 전과 같은 생활을 해도 들여다보면 판이했단 소리다. 체이서는 작정한 사람처럼 내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이쪽이 도움이 되긴 한데.

기회를 노리는 입장이니, 나로서는 그가 책무를 보러 사라지는 것보다야 자주 보이면 좋긴 했다.

‘설마하니 그 책무를 내 방에서 볼 줄은 몰랐지.’

오늘도 자연스럽게 내 방 책상에 앉아 있는 이를 보며 속으로 쯧 혀를 찼다.

“계속 이야기해봐. 푸른 장미가 사라지면 상실감을 느낀다고?”

내 시선을 느꼈는지 부드러이 웃는 얼굴이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 어쩐지 내 방에 못 보던 책상이 생겼더라니, 마음먹고 옮겨놓은 거였나.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하던 대화를 계속했다.

“맞아. 상실감을 느끼지.”

체이서의 옆에서 기회를 엿보는 한편 나는 또 다른 기회도 놓치지 않았다. 모든 정보를 아는 이에게 직접 물을 수 있는 기회 말이다.

“푸른 장미가 없어졌을 땐 본능적으로 알아, 내 삶엔 더는 의미가 없구나. 하고.”

“……그게 심해?”

“글쎄, 한 번 겪어보니 심하진 않던데.”

체이서가 고개 숙여 웃었다. 잔잔 웃음이 뒤따랐다.

“인간은 때로 절망해도 결국 살아가잖아? 그런 느낌이야.”

나 이전의 푸른 장미이자 여동생의 죽음을 이야기한다기엔 참으로 고요한 웃음이었다. 웃는 것부터가 이상한 거지만.

“모르지. 나는 그랬지만 다른 장미들이 어땠을지는. 비슷했을 것 같지만…….”

체이서가 고개를 돌렸다.

“푸른 장미는 반드시 같은 세상에 존재해야 해. 그래서 영혼이 없으면 다른 세상에서라도 데려오기 위해…… 푸른 장미의 힘 중 하나가 차원 이동을 할 수 있게 하는 힘인 걸지도 모르지.”

“회귀하는 건?”

“그건 푸른 장미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경우. 그땐 회귀하는 힘을 갖지.”

체이서가 턱을 괸 채 알려주었다.

“그런데 이상하지? 최초의 장미로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더는 장미들은 예전처럼 푸른 장미에게 연연하지 않아.”

그의 고개가 느릿하게 기울어졌다.

“갈증을 느낀다고 하던데?”

“그렇지. 견딜 수 있는 정도의 갈증.”

체이서가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푸른 장미가 죽더라도 견딜 수 있는 고통이 찾아올 뿐이니까.”

한 번 푸른 장미를 상실해본 회귀자가 말했다. 이에 나는 눈을 찌푸렸다.

“아까는 반드시 같은 세상에 있어야 한다며.”

“아프지 않을 뿐이지 미치지 않는다고는 안 했어, 이아나.”

그는 나긋하게 설명했다. 예전에는 차라리 죽는 것이 좋을 만큼 커다란 고통과 상실, 이와 함께 미쳐버렸다면, 시간이 흘러 공백이 생긴 지금은 고통은 무뎌지고 서서히 광기가 찾아올 뿐이라고.

어느 쪽이든 좋은 것은 아니었으나 전자가 훨씬 끔찍한 일인 건 사실이었다.

여기서 나는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왜 푸른 장미와 장미들은 이런 기형적인 관계를 갖게 되었는가? 타인의 존재 여부와 선택으로 삶이 갈리다니 다른 장미 입장에서는 너무나 억울하지 않은가?

이 맹목은 어디서부터 기인한 것이지?

이처럼 그는 정보를 술술 알려주는 것 같았지만.

“대체 왜 이렇게까지 기울어진 관계가 된 거야?”

“그거야, 기원이 그러하니까?”

“최초에 어땠길래?”

체이서는 결코 쉽지 않았다. 그에게 많은 것을 물었다. 대체로 푸른 장미나 장미에 관한 것, 그리고 푸른 장미 수호신에 대한 것이나…… ‘이아나’에 관한 것을 묻기도 했다.

체이서는 모든 것을 답해주지는 않았다. 특히나 푸른 장미의 수호신이나 ‘이아나’에 관한 것은 물어보아도 웃을 뿐 들어주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처럼.

“글쎄.”

체이서가 의자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내가 있는 곳으로 손쉽게 성큼 걸어왔다.

“……듣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래도 생각이 나지?”

“…….”

“궁금하고.”

그의 나긋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마치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바를 알고 있다는 듯이.

확실히 그렇기는 했다.

내 힘을 다루고 싶었고, 다루기 위해서는 알아야 했으며 그 정보는 저 남자가 가지고 있다.

“거래라도 하자는 거야?”

“그렇게 말하면 안 돼. 이아나.”

그는 웃으며 친히 악당론 강의를 해주기까지 했다.

“날 이용하겠다고 해야지. 뼛속까지 발라 먹어주겠다고.”

“……그렇게 말하면 이용은 당해주고?”

“물론.”

그가 제 단추 위에 손을 얹었다.

“어디서부터 벗을까?”

“뭐?”

“뼈를 바르려면 몸을 봐야 하지 않겠어?”

“미친 소리 그만해.”

체이서는 더는 금욕적인 옷차림을 고집하지 않았다. 아니, 옷 갈아입는 시간조차 아까워하는 것 같았다. 갈아입는 시간에도 아주 잠시 잠깐 사라져 채 단추를 채우지 못한 흐트러진 옷차림으로 나타나곤 했으니까.

지금도 그러했다. 나는 은근히 눈길을 돌렸다.

“너무 많은 걸 내주면 날아가 버린다는 걸 이젠 알았으니까. 어떡하면 좋을까.”

탐색전의 연속이었다.

“듣지 않아도 상관없는데. 이젠 알려주는 사람이 하나가 아니니까.”

“나밖에 대답해줄 수 없을걸.”

나른한 목소리에는 확신이 가득 담겨 있었다.

“푸른 장미에 관해서는. 특히나 네가 바라는 정보는 말이야, 이아나.”

왜인지 그의 눈이 잠시 내 다리 쪽을 향한 것 같았다.

“그래서, 묶어두려고?”

움찔.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래도 상관없는데. 어차피 마음대로 할 거라면.”

“……아니야.”

정말 그리해도 상관없다는 투로 이야기했다. 이리 된다면 곤란은 해지겠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체이서도 더 긴장을 놓을지도 모르고.

“하나씩 알려주려고.”

하나 그렇지 않다는 듯 대답한 그가 나를 응시했다. 동시에 그의 손이 뻗어왔다.

“남은 것이 아쉬워서라도. 곁에 머물러 주면 좋겠는데.”

손가락이 부드러이 귀에 닿았다가, 사락 소리와 함께 내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무슨 짓이야?”

내 얼굴 위로 어느새 그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채였다.

“난 지금 납작 엎드리는 거야, 이아나.”

낮게 속살거리는 목소리는 유혹적인 한편 낮고 황홀했으며 은근했다.

나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

“어딜 봐서?”

“정말인데.”

심드렁한 내 표정에 체이서가 턱을 잡고 고민하는 시늉을 하더니 이내 천천히 무릎을 접었다.

“무릎이라도 꿇으면 되려나.”

그는 다리를 꼬아 희게 드러난 내 무릎에 입을 맞췄다. 맨살에 닿는 부드럽고 물기 어린 감촉이 선연했다.

“제발 나를 선택해주세요.”

그는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나를 버리지만 말아 주세요.”

넘실넘실 광기가 흘러넘치는 눈 위로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이 담겼다.

“다른 장미와 나누는 건, 끔찍한 일이지만.”

한순간 그의 시선이 날카로이 변했다. 하나 이건 잠시뿐이었다. 그는 광기와 간절함이 뒤섞인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무릎 위에 올려놓은 그의 손을 떼어냈다. 그러나 떼어놓기 위해 잡았던 손은 도리어 내 손을 잡고 옭아맸다.

“네 일부라도 가질 수 있다면.”

그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럼 네 그림자에라도 머무를 수 있을 것 같아.”

난 교차한 손을 응시하다 무심하게 시선을 돌렸다. 아주 작은 행동이었지만 그의 반응을 이끌기에는 충분했다.

무심한 내 얼굴에 그의 표정이 무너져 내렸다.

“네가 바란다면 세상도 가져다줄 수 있는데.”

그가 내 손에 얼굴을 기댄 채로 작게 중얼거리며 자신의 권력을 은연중에 드러냈다. 난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오빠가 말하는 세상 안에 내가 원하는 것이 없을 테니까.”

이렇게 말하면서 나는 속으로 낭패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아나, 넌…… 나를 황홀한 나락에 가둬두는구나.”

그가 중얼거리는 틈에서 그의 정수리를 가만히 내려다본다. 끊어질 듯 작은 음성이 새어 나왔다.

“끝내는 후회하게끔.”

체이서는 빈틈을 내줄 듯하면서 결코 내주지 않았다.

이제는 의심스러웠다.

도전할 기회가 오긴 할까?

하나 다시 며칠이 흘렀을 때, 기회가 왔다.

기다려왔던 순간이었다.

***

말했듯 체이서는 내 방에서 모든 책무를 처리했다. 책상이 생긴 것과 더불어 앉아서 양피지를 보는 것을 종종 보았다. 처음부터 저기 앉았던 건 아니고, 며칠이 지나니 그저 내내 옆에만 있을 수 없는지 뭔갈 하나씩 가져와 보더라고.

책무를 여기서 처리한다는 것은 곧 보고 또한 이곳에서 받는다는 것을 말했다.

“공작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정중히 노크하고 들어온 수하 하나는 정중함과 다르게 다급함을 얼굴에 가득 담고 있었다.

“스체루텐에서 대규모 분란이…….”

“분란?”

수하가 일이 터졌음을 보고하는 동안 나는 옆에서 모든 것을 듣고 있었다. 당연했다. 여긴 내 방이었으니.

‘시작한 건가…….’

제이르가 보내는 신호였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손을 가벼이 쥐며 초조함을 달랬다.

“스체루텐이라…….”

체이서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그는 수하에게만 보이는 차가운 얼굴로 머리를 비스듬히 기울일 뿐이었다.

그는 여유로웠다.

“어떡할까요? 인원을 더 보내야 하겠습니까?”

“글쎄.”

그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눈은 전혀 웃지 않은 채로.

“지켜보도록.”

체이서가 그렇게 명을 내린 순간이었다.

똑똑똑.

누가 들어도 빠른 템포의 노크소리가 울려 퍼졌다.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문이 열렸다. 활짝 열린 문 사이에서 누군가가 사색이 된 채로 달리듯 들어왔다.

“공작님, 판테스가 불타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급히 들어온 수하가 또 다른 도시의 이름을 언급했다.

“방화인가?”

“아, 아니요.”

수하는 아주 잠깐이지만 나를 흘끗 보았다. 눈치를 보는 듯하다가 얼른 이어 말했다.

“싸움 도중에 커다란 폭발이……. 아무래도 화기류 취급을 잘못한 것 같습니다. 왕국에 전달할 폭약이…….”

폭약, 이 제국에서는 군수품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범죄 도시에 있다는 소리는 곧 이 남자가 군수품 밀수에도 관여했다는 소리였다. 체이서의 표정이 처음으로 변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가 곧 고개를 돌렸다. 내가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었으니까. 나는 천천히 눈을 들어 올렸다.

“……가게?”

허공에서 시선이 교차했다. 다급함에 일단 붙잡고 본 것에 가까웠다.

그도 그럴 것이 체이서가 그곳에 가서는 안 되니까.

초조함을 이기지 못한 손에 꾹 힘이 들어갔다. 아주 잠깐이었으나 그가 알아차리기엔 충분했을 것이다.

체이서의 표정으로 뜻 모를 빛이 스친 것 같았다.

“가지 말까?”

나지막한 목소리가 내게 물었다.

나는 체이서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무심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상관없어.”

네가 가든 가지 않든 상관없다는 듯이. 그리고 내려가는 내 손이 덥석 붙잡혔다.

“이아나, 무엇을 해도 좋지만.”

“…….”

“나를 놓지만 마.”

체이서가 내 손에 깍지를 쥐며 작게 속삭였다. 허리로 단단한 팔이 감긴다. 그가 고개를 숙여 내 귀에 직접 목소리를 흘렸다.

“그렇기만 하면 뭐든 속아줄 테니까.”

작은 웃음기가 포함된 녹진한 음성이었다. 아울러 끝에는 한숨 쉬듯 웃은 것도 같았다.

“뭐든 들어줄 테니까.”

나는 눈동자를 느릿하게 굴렸다. 그의 어깨 너머 수하를 향해서였다. 체이서에게 눈짓하자 그의 입술이 반사적으로 열렸다.

“공작님.”

체이서가 수하를 보지 않고 말했다.

“먼저 가 있도록.”

그는 그리 말하고는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1대대를 데려가.”

“예! 알겠습니다!”

수하는 잠깐 이해할 수 없다는 낯을 했지만 이어 흘러나온 체이서의 말에서 의심의 빛을 모두 지웠다. 수긍했다는 듯이 인사를 올리면서.

1대대는 체이서 휘하 기사 중 가장 뛰어난 이들이었다. 특히나 대인 상대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들이었다. 들개 같은 무리였으니까.

체이서의 옆에서 그들이 어떻게 침입자를 저지, 처리하는지 보아왔기에 나는 숨을 꼴깍 삼켰다. 제이르와 프란시아의 기사들은 괜찮겠지? 괜찮을 거야.

쿵쿵.

조용히 뛰는 가슴을 달래듯 속에서 부드러운 기운이 느껴졌다. 이건 푸딩이의 기운이다. 마치 손등을 핥듯 까슬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에 웃음을 흘렸다.

‘고마워.’

이어서 문이 닫히고 방 안에는 나와 체이서만 남았다.

바깥으로 우르르 몰려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아마 내 방 앞에 대기해 있던 기사단일 터다.

그렇게 소란이 가라앉고, 고요함이 찾아왔다.

내 손은 여전히 체이서의 손에 잡혀 있었다. 어쩐지 평소와는 다르게 방이 드넓게 느껴진다. 나와 그의 시선이 교차했다.

“갖고 싶은 건 없어?”

체이서가 뜬금없는 말을 했다.

갖고 싶은 것. 바라는 것.

신기하게도 체이서와 리케도르안은 내게 묻는 것이 같았다. 하나 내가 뜻에 반하는 소원을 이야기했을 때 반응은 판이하다. 리케도르안이 울면서 들어주는 남자라면 반면 체이서는 선별해서 들어줄 남자였으니까. 그리고 내게 체념을 만들어준 남자였다.

몇 년 전 내가 도망을 포기하고 도뮬릿 저택에 남기로 정했을 때도 그는 이렇게 물었다.

나는 그때 소원으로 정원을 산책하고 싶다고 말했다.

“왜. 세상의 보화라도 잔뜩 가져다주게?”

그러자 그는 다시 보지 못할 진귀한 것들을 저택에 가득 쌓아두고.

“바란다면 못 해줄 것도 없지.”

내게 선물이라 말했다.

“내 물건들은 모두 지하창고에 박아뒀니?”

당시 나를 살살 달래려는 듯한 나긋한 음성을 모를 리 없었다. 지금도 그는 나를 그렇게 달래려 하고 있었다.

“박아두다니. 보관이지.”

그가 고개를 기울여 부드럽게 웃었다.

“언제든 네가 원하면 가져올 수 있게 말이야.”

체이서는 내게 수많은 선물을 주었지만 대부분이 창고로 돌아갔다. 내가 쓰지 않거나 무관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걸 확인했다.

‘모든 물건은 창고에 있다.’

티아라도 마찬가지다. 다행히 창고에도 가본 적 있었다. 이 저택 내에만 있는 거라면 어디든 갈 수 있었으니.

체이서는 제 개인 방마저도 아무렇지 않게 드나들 수 있도록 했다. 여기에만 있다면 무엇을 해도 상관없다는 듯이. 설사 도뮬릿의 기밀이 쌓인 곳이라도 내가 바라면 기꺼이 내주었으리라.

체이서가 내게 선물을 주던 무수히 많은 날 중 황제의 티아라를 주던 날을 떠올렸다.

<네게 잘 어울린다. 역시 네 건가 봐.>

내게 왕관을 씌우며 즐거워하던 날을.

전부 그대로 있다면 계획에는 차질이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을 확인한 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남은 건.’

이 남자를 쓰러트리는 거다. 며칠간 고민했다.

‘찌르는 곳은 목 아니면 손목.’

그 밖에 핏줄이 드러난 곳이어야 한다. 피부층이 두꺼운 곳에 넣어서는 소용이 없을 거라고 들었다. 난 고심 끝에 항상 노출된 목이 가장 쉽다고 여겼다.

손목은 늘 웃옷에 가려져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 주사기를 어떡하면 이 남자의 목에 꽂을 수 있는 것인가.

처음엔 이 남자가 자는 순간을 몇 번이나 노리려 했다.

하지만 이런 시도 실패 끝에 도리어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될 뿐이었다. 그는 단 한 순간도 긴장을 풀지 않는다는 걸. 이 남자의 삶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나는 가볍게 숨을 토해냈다.

“오빠.”

손을 까딱까딱 움직이자, 체이서가 꽃에 이끌린 나비처럼 나붓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와 나 사이가 훌쩍 가까워졌다. 내가 소파에 앉아 있었기에 그에게 갇혀 올려다보는 형국이었다.

‘동정할 생각은 없지만…….’

나는 천천히 눈을 내렸다.

아무래도 이 저택에 너무 오래 머문 것이 틀림없다.

제 아버지를 살해한 다시 없을 죄를 저질렀지만 리케도르안 못지않은 학대와 아버지가 남긴 원한을 유산처럼 받은 남자였다. 악이 되지 않고는 버티지 못할 환경. 이해하고 싶지는 않다만 연유는 알 것 같단 소리다.

딱히 알고 싶지 않은 걸 알게 되는 기분은 이렇다.

귀찮고 성가시다.

이 남자가 이렇게 키워질 수밖에 없던 환경을 아는 것은 흡사 얇은 피아노 줄이 손목에 감긴 것 같았다. 얇고 투명해서 느슨할 때는 전혀 느끼지 못하다가, 팽팽해지고서야 존재감을 문득 알아차리는 거지. 지금처럼.

그렇다고 하고자 하는 걸 멈출 생각은 없지만 마음이 조금 약해지려고 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시간은 흔적을 남기니. 이 남자가 여기까지 생각했나 싶기도 하다.

이윽고 나는 입술을 열어, 조용히 이야기했다.

“푸른 장미는 모든 장미를 굽어살필 의무가 있다고?”

체이서가 잠시 놀라 눈을 깜빡 이내 고개를 숙여 미소했다.

“의무는 아니야. 그냥 그리하지 않으면 하나가 미쳐버리는 거지.”

살랑. 눈앞에서 결 좋은 검은 머리칼이 흔들렸다.

“관심받지 못한 한쪽이.”

체이서가 엄지로 자기 입술을 꾹 눌러 늘어트리듯 문질렀다.

“노란 장미가 왜 배신이란 꽃말을 뒤에서 달게 된 줄 알아?”

부드러운 목소리는 가볍게 옛 이야기를 담았다.

“긴긴 시간 동안…… 거의 선택 받지 못했거든.”

르나그, 긴 장발을 가진 남자의 모습을 떠올리고 움찔했다.

“그들은 단 한 번 푸른 장미를 강탈한 순간 배신자가 되었지. 충성을 삶의 목적 삼은 이들이었으니까 반발하지도 않았어. 마침 수호신도 뱀이라 오해 사기도 좋았고.”

체이서가 웃음과 함께 한마디를 덧붙였다.

“뭐, 대체로 뱀 같은 성정을 뒤에 숨기고 있는 편이니 오해만은 아니었지. 이번 시대의 노란 장미가 유달리 특이한 남자였을 뿐.”

“르나그.”

“그래. 너만 바라보고 있으니 떼어놓지 않을 수가 없잖아.”

나는 내 뺨에 다가오는 손을 탁 치고는 눈을 들어 올렸다.

“단 한 번의 나쁜 짓으로 배신자가 된 거라면 흑장미는 어때?”

흑장미들의 만행을 꼬집는 말이었다. 체이서는 웃음과 함께태연히 대답했다.

“참을성이 가장 없는 것이 흑장미지.”

“사랑받지 못하면 죽어?”

“응.”

그의 눈에서 웃음기가 잠시 사라졌다. 진지한 시선이 허공에서 겹쳤다.

“사랑받지 못하면.”

체이서가 고개를 숙인 채로 속삭였다.

“죽을 것 같아.”

나는 오랫동안 생각했다.

이 남자가 긴장을 푸는 순간은 없다.

그래,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한 가지였다.

“그렇다면.”

스스로 풀게 만들어야겠지, 긴장을. 그의 멱살을 쥐고 쭉 잡아당겼다.

“베풀어줄게.”

“뭐?”

대답할 겨를은 없었다. 체이서의 입을 막았으니까. 입술로. 그의 눈동자가 커졌다. 난 처음으로 찢어질 듯 크게 벌어진 붉은 눈동자를 보았다.

입술에서 푹신한 감촉을 느끼며 손을 그의 목 뒤로 감았다. 그대로 손을 뒤로 쭉 뻗는다.

제이르가 내게 준 주사기의 개수는 3개다.

‘실패할 때를 대비한 거였지만…….’

나도 제이르도 알고 있었다.

한 번이라도 실패하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걸. 더는 기회는 없을 거란 것도. 본디 사냥이란 그렇지 않던가. 짐승 같은 이 남자를 목표로 설정하는 순간부터 우리 두 사람은 알고 있던 것이다.

잡아먹지 못하면 잡아먹힌다는 걸.

그렇기에 제이르는 마지막 이동하기 직전에 인사 뒤로 죄송하다고 했다. 나보다는 주군의 생명이 중요했을 것이다. 탓할 생각은 없었다. 장미들의 강렬한 반대가 있었음에도 내가 고집한 계획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실패하고 싶지 않다.

체이서의 몸이 채 풀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고 입술을 살짝 떼어냈다.

그도 나도 눈은 감지 않았다.

“당신 말대로야. 나는 사랑하고 사랑받는 건 잘 모르겠어.”

나는 체이서가 하듯이 눈을 가늘게 휘었다.

“하지만.”

그를 조롱하듯이.

“한 번쯤은 베풀어줄게.”

그의 오만함을 흉내 내면서. 떨어진 입술이 다시 겹쳐진다. 이번 또한 가만히 멈춰선 그를 관찰하며 기회를 가늠하던 그 순간이었다.

“……흡!”

시야가 확 뒤집혔다. 나는 그대로 눈을 크게 깜빡였다.

어느새 자세가 뒤바뀐 채 체이서의 다리 사이에 앉아 있었다. 그가 내 허리를 잡은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엉덩이로 단단한 허벅지가 느껴졌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나른한 웃음을 보였다.

다행스럽게 손은 여전히 쭉 뻗은지라 소매 속에 숨긴 주사기는 들키지 않은 채였다. 하나 입술이 막혀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의 눈이 천천히 더욱 깊게 휘어진다. 눈꺼풀 사이로 위험할 정도로 빛나는 눈. 붉은 눈동자는 맹수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모든 욕망이 풀려난 것처럼 단단하게 나를 잡아챘으니까.

체이서가 눈을 감았다. 마치 지금부터 모든 것을 방관할 것처럼.

그의 키스는 리케도르안의 서툴지만 날것 같은 입맞춤과 다르게 능숙하고 부드러웠다. 별생각이 없던 나조차 움찔하고 말 만큼.

놀랄 정도로 예민한 곳을 찾아 건드렸다. 나는 파고드는 것에 눈이 감기는 것을 참으며 시선을 옮겼다.

더는 숨길 필요가 없다.

소매 밖으로 주사기가 튀어나왔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이것을 그의 목에 꽂아 넣었다. 입술을 떼었다가 다시 겹치면서.

나는 체이서가 주사기를 뽑거나 몸을 벌떡 일으켜 나를 던지거나, 하다못해 나를 분노한 눈으로 볼 줄 알았다. 이 순간이 가장 관건이었다. 식은땀 어린 긴장이 손을 가득 채운다.

그러나 체이서가 보여준 행동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체이서가 한 손을 내 손을 잡고, 주사기를 더욱 깊숙이 찔러 넣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살짝 벌어지는 입술을 놓치지 않고 더욱 파고들었다. 허리를 단단하게 얽맨 손이 허리 위를 살살 문질렀다.

“흣…….”

야릇한 감각이 척추를 파고들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선은 오직 내게 고정한 채였다. 마치 이걸로 저를 찌르는 대신에. 찌르는 동안만이라도 자길 보아달라는 듯이. 이를 알아챌 수 있을 만큼 강렬하고 집요한 시선이었다.

강한 극독이었으나 약효가 돌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그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도 그를 떼어놓을 수 없었다.

떼어내지 못하는 내 난감함을 알아챈 듯 체이서는 내 손에 깍지를 얽고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입술을 잠깐 떼어내 목과 손목 안쪽에 깊이 맞췄다.

“너……. 흡.”

하나 이는 잠시뿐 다시 입술이 맞부딪쳤다.

째깍째깍. 초침이 흘러간다.

나는 시계를 바라보며 교차하듯 흘러가는 쾌락을 꾹 눌러 참았다.

체이서는 거짓말처럼 내가 느끼는 지점을 찾아내 살살 문지르고 핥았다. 내가 참지 못하고 그의 손을 잡아 내 손에 가둬둘 만큼. 그럼에도 그가 입술을 깊이 파고들다 못해 가슴의 리본이 살살 풀렸다.

벼랑을 달리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키스였다.

나는 그의 목을 끌어당긴 채로 체이서의 뒷머리를 한 움큼 잡았다. 노려보면서. 체이서는 웃으며 입술을 꾹 눌러 붙였다. 그의 손은 더는 움직이지 않은 채 내 허리를 잡고 있을 뿐이었다.

천천히 입술이 떨어진다.

그리고 툭. 주사기가 떨어졌다.

텅 빈 채로.

나는 깨끗하게 비워진 주사기를 내려다보다 시선을 들었다. 격렬한 키스에 숨이 차, 달뜬 날숨을 내쉬면서.

“흐음.”

먼저 입을 연건 체이서였다.

“시스타민 독과 알타파 풀, 저주마법을 혼용한 건가. 나머지 하나는 모르겠네. 새로운 극독인가?”

체이서가 작게 속삭였다.

“확실히 이 정도면 나라도 듣겠어. 이아나.”

격렬한 키스 끝에 막 입술이 떨어진 뒤라 여전히 거리가 가까웠다. 나는 입술에 달라붙는 날숨에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럴 거야.”

아무렇지 않게 손등으로 입술을 비비며 목소리를 흘렸다.

“코끼리 삼백 마리도 쓰러트린다는데, 아무리 너라도 쓰러지겠지.”

“아하.”

내 말에도 그는 별 반응이 없었다. 내 표정이 이상해졌음은 물론이었다.

“극독이야, 당신. 죽을지도 몰라.”

그의 가슴을 꾹 찌르며 무심하게 보았다. 체이서는 내 손가락을 잡으며 눈을 휘었다.

“네 손에서라면 죽어도 괜찮겠다.”

“……미쳤구나.”

나는 농담은 그만두고 표정을 굳혔다.

“당신. 알면서……. 왜 당한 건데?”

그가 몰랐을 리 없다. 이해되지 않는 일의 연속이었다. 이 남자는, 날 붙잡아 더한 결과를 돌려주면 돌려주었지 얌전히 당할 남자가 아니었다.

“그래야. 네가 날 봐줄 테니까.”

내 얼굴이 어땠을지 보지 않아도 상상이 갔다. 이해할 수 없는 낯으로 보고 있겠지.

“이대로 죽는 건 아닌가 보네.”

그의 혀가 느릿하게 제 입술을 축였다.

“그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체이서가 고개를 숙여 내 어깨 위에 머리를 얹었다. 조금 지쳤거든 한눈에도 그의 몸이 느려진 것이 느껴졌다.

“그냥 도망가려는 건 아닌 것 같고, 뭐가 필요해?”

체이서 정확히 내 의도를 맞췄다. 흠칫 소름이 돋았다. 이내 입술을 꾹 깨물었다.

“……황제의 티아라.”

역시나 모든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아. 그거.”

귀로 체이서의 웃음소리가 파고들었다. 더욱 낮아진 소리였다.

“……이번에도 필요한가 보네.”

“이번에도?”

체이서는 더는 말이 없었다.

“지하실에 있어. 위치는 알지?”

“……알아.”

체이서는 웃음이 헤퍼졌다. 나직하게 소리를 내며 머리를 내 어깨에 문질렀다. 착하다, 중얼거리면서.

“가져가.”

“그냥 준다고?”

“네가 필요하다면. 본래 네 거잖아.”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체이서의 목소리는 천천히 작아지고 동굴을 기어가듯 낮아지고 있었다. 흡사 잠에 잠긴 것 같은 음성이었다.

반항 한번 없이 얌전히 잠에 빠져드는 모습을 보며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모든 시간 나를 감금하고 묶어두던 남자였다.

“왜 주는 거야.”

이것을 찾으면 나는 지체 없이 떠날 것이다. 그가 모르지 않을 것이다.

“내 부탁 들어줬잖아.”

체이서가 속삭인다.

<와서 재워줘.>

거기에 대고 묻고 싶었다.

“……무슨 꿍꿍이야.”

이건, 네 방식이 아니지 않으냐고.

“사랑해, 이아나.”

그러나 대답할 체이서는 이미 잠들고 없었다. 그의 몸을 밀어내자 부드럽게 소파로 밀렸다.

잠들 듯 기절한 그를 남겨두고 등을 돌렸다.

깨물린 입술이 따끔했지만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나는 문을 열고 걸음을 옮겼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마 체이서의 명에 전부 다 제이르가 있는 도시로 몰려간 듯했다. 하기야 저택, 특히나 내 방 주변을 지키는 이들은 가장 실력이 뛰어난 이들이었으니까.

텅 빈 복도를 달리면서 나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것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내려가며 더욱더 커졌다.

<사랑해, 이아나.>

어째서 다들 이토록 맹목적인가? 나는 진실한 사랑을 해보지 못했다. 하지만 보아온 것은 있다.

사랑이란 내가 가진 것을 모두 희생한다는 의미만은 아닐 텐데. 팽팽한 피아노 줄이 나를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후회하나? 아니. 나는 같은 순간이 온다면 똑같이 그를 눕혔을 것이다. 그럼에도 더는 이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어쩌면 내 발목을 잡는 건.

나는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

지하실에 다다라서였다. 그리고 지하실 문 앞에 서 있는 조그만 인영을 보았다.

“마쉬멜.”

나도 사람이기에 주변에 정을 주고 만 것일지도 모른다. 나를 옭아맨 자와 그자의 귀여운 수하에게까지도.

“오럔만이네, 아가씨.”

변함없이 조그만 흑마법사님이 몸을 돌렸다. 그의 손에는 잘 보지 못했던 긴 지팡이가 보였다. 저게 뭔지 안다. 그가 대규모 마법을 쓸 때가 잡곤 하던 것이었다. 이를테면 내 발목을 묶은 쇠사슬을 저택의 길이만큼 늘릴 때처럼.

“응, 오랜만이네요.”

우리는 공백이 없었던 것처럼 반갑게 인사했다. 정확히는 나만 반갑게 웃었지만.

“보고 싶었어요.”

“모라고? 넌 쥬인님한테 내가 쥭는 꼴이 그렇게 보고 싶냐?”

“에이, 안 죽을 텐데.”

“왜?”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 주인님 제가 잠재우고 왔거든요.”

마쉬멜이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오이 일을 쳐꾸나. 쳐써.”

“오이요? 기어이겠죠.”

“기오이!”

“네네. 오이.”

나도 마쉬멜도 한껏 풀어진 표정을 하고 있지만 서로가 알고 있으리라. 물밑에 자욱하게 깔린 긴장을. 마쉬멜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나는 그런 마쉬멜을 담았다.

“그래서 저 잡으러 온 거예요?”

“아니.”

마쉬멜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비슷한 묭을 들은 것 같낀 한뎨.”

그러고는 나를 보지 않으며 중얼거렸다.

“나눈 정확한 묭을 듣찌는 못했다.”

그렇기에 눈감아주겠다는 이야기였다. 지나가게 해주겠다는 건지, 빠져나가게 해주었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럼 나 저쪽에 필요한 거 있는데 가도 되죠? 지금 내가 바빠서.”

“아가씬 요전하구나.”

“그럼요. 사람이 어디 쉽게 변하나.”

창고의 문을 여는데 툭, 마쉬멜의 지팡이가 내 어깨에 닿았다.

“아가씨, 내가 보낸 편지룰 받지 못해 써?”

“네? 그런 거 받은 적 없는데.”

마쉬멜이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그가 조그만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이런. 발테이즈 휴작에게 부탁했눈데. 씹었군.”

“그러게 평소에 잘하지 그러셨어요.”

“뭐야?”

나는 씩 웃고는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창고에는 삼엄한 감시 마법과 고난도의 다중 함정 마법이 걸려 있었지만 나에게는 예외였다. 체이서가 마쉬멜로 하여금 이 마법을 수정하며 나만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게 만들었으니까.

길을 잘 알고 있는 창고 안에서 황제의 티아라를 꺼내오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티아라를 거머쥐고 나오니, 마쉬멜이 긴 지팡이를 잡고 기대어 서 있었다.

“아직 안 갔어요?”

“뭐야, 그 떠돌이 개를 보눈 눈은?”

“아니, 그렇게 보진 않았는데.”

나는 웃으며 들고 있던 것을 손에서 흔들었다.

황제의 티아라를 본 마쉬멜의 눈이 커졌다.

“아가씨, 너 설마 캄브라캄에 들어갈 고냐?”

“네? 네.”

“집으로 돌아가려고?”

“네?”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아니라 대꾸했다. 그리고 알아차렸다.

“마쉬멜 씨도 알고 있었구나? 내 정체에 대해서요.”

“…….”

“어쩐지 처음부터 아가씨, 아가씨 하면서도 막 대하더라니. 가짜인걸 알아서였네.”

“나눈 모든 사람을 그로케 대한다.”

“그건 자랑이 아니에요.”

마쉬멜이 조그만 손으로 머리를 쓸어내렸다. 복잡하고 머쓱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영횬이 없어진 몸을 살려듄 건 흑마법이니까.”

그래서 알고 있단 소리다. 하기야 체이서 최측근이니 모르는 것도 이상할지도. 물론 그 남자는 고고하게 홀로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신기하긴 했다.

“오빠가 마쉬멜 씨를 믿나 보네요.”

“주인님은 내 절박함을 믿는 거겠지.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조그만 아이 같은 얼굴로 어울리지 않는 어른스러움이 스쳐 지나간다.

“그래소 나눈 너를 도울 수 없다, 아가씨.”

내가 정이든 만큼 이 조그만 흑마법사님 또한 그랬을 것이다. 그만큼 이 저택은 크고 사람은 없고, …외로운 곳이었다.

“하지만 쥬인님은 말씀하셨찌. 아가씨가 위험해지면 안전한 곳으로 데료다주라고.”

“명이군요.”

“묭이지.”

마쉬멜은 원래 몸으로 돌아가고 싶고, 그렇기에 체이서를 배신할 수 없다.

“이졔 2대대 기사들이 이곳에 들이닥칠 것 같우니. 위협에서 이동시켜쥬는 거다.”

“네. 그럼요.”

나는 웃으며 끄덕였다. 왜인지 마음이 짠했다.

“고마워요.”

활짝 웃는 얼굴을 끝으로 마쉬멜의 얼굴이 사라졌다.

눈을 뜨면 익숙한 풀숲이 보였다. 저택 뒤쪽 후원이었다.

오래전 저택에서 첫 탈출을 할 때 와 보았던 곳이기도 했다.

‘여기서 어디로 나가면 문이었지?’

현재 나갈 수 있는 모든 문에 리케도르안의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촉박했으니 얼른 밖으로 나가야 했다. 땀이 나는 손에 왕관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고쳐 잡고, 치마를 올려 돌돌 묶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걸으며 머리 장식을 했던 것들을 툭툭 풀어내렸다. 체이서의 장단에 맞춰주기 위해 했던 것이었다.

풀숲 사이로 툭툭 사라지는 보석들, 어느새 나는 가벼운 원피스 하나만을 걸치고 있었다. 그렇게 쭉 걸었을 때 길이 양방향으로 나뉘었다. 아무래도 중문으로 이어지는 길인 줄 알았는데. 아닌 것 같지?

‘어느 쪽으로 가야 하지?’

고민하는 순간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다급하게 뛰어오는 발소리, 이 순간 내게는 결코 달갑지 않은 소리였다.

“여긴가?”

“찾아보지!”

아가씨, 아가씨! 어찌 이리도 빨리 알아차렸는지 몰라도 2대대 기사들이 나를 찾고 있었다. 나는 낭패한 얼굴로 뒤를 보았다가 얼른 다시 길을 바라보았다. 어쩌지? 이 선택이 아주 중요한 선택이 될 것 같은데. 내가 입술을 꾹 깨물 때였다.

쉬이익!

긴 화살이 바닥에 꽂혔다. 놀라 소리를 지를 뻔하다 가까스로 입술을 가로막았다.

“저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는데?”

“화살 소리야. 미친! 누가 화살을 쏜 거냐? 아가씨가 다치시기라도 하면……. 어서 달려!”

가까워지던 발소리가 멈추고, 곧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제야 숨을 흡 내쉬었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가 부드러이 내 어깨를 잡아 차렸다.

“저쪽입니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나직한 음성의 주인공은 바로…….

고개를 들어 올리면 긴 활을 잡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그는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르나그?”

활에서 금빛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익숙한 느낌이라 생각했다. 프란시아가 칼리스토를 무기로 만들었을 때 무기에서 흰빛이 기운이 흘렀던 것처럼. 그의 활에서는 아줄르가 가진 우아한 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르나그의 무기는 활이었구나. 고아한 곡선이 그와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무기가 참 잘 어울리네요, 르나그.”

상황과는 맞지 않는 내 인사에 르나그의 얼굴에 잠시 난감한 기색이 어렸다.

“감사합니다, 이아나 양.”

그리 말하면서 그는 주변을 한 번 더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내 앞을 가리듯 서더니, 활을 들어 조준했다. 동시에 활의 모양이 순식간에 작아졌다. 신기하게도 겨눈 화살이 전혀 없는데도 그가 시위를 잡아당기자 반투명한 화살이 생겨났다.

쉬이익.

쇄도하는 소리와 함께 신음이 들렸다. 털썩 쓰러지는 소리도 함께였다.

“더는 여기 머무는 것은 위험할 것 같습니다. 이아나.”

나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보인 기사들은 르나그가 시선을 돌리거나 눕혔지만, 얼마나 더 남아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거기다 체이서가 예상과 다르게 얼마나 누워 있을지도 모르고. 르나그가 무릎을 접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르나그의 얼굴을 본 순간, 그는 이런 순간에도 안경을 끼고 있구나 싶었다. 참 고집스럽게 안경을 낀다는 생각 또한 함께.

여기까지 생각한 순간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으음, 저도 달릴 수 있는데…….”

그의 얼굴은 시간이 없다고 외치는 것 같았다.

“시간이 없네요.”

“네.”

“그러니 제가 할 말인 것 같아요, 그건. 나야말로 실례할게요.”

나는 그의 손을 잡으며 중얼거렸다. 손을 잡았지만 그는 잠시 멈칫했다. 하나 이는 잠깐일 뿐 르나그가 내 손을 가벼이 잡아 허리에 팔을 둘렀다. 곧이어 발끝이 휙 들렸다.

정말이지. 다들 휙휙 잘도 안아 드네. 사람의 몸이 그리 가벼운 무게가 아닐 텐데 말이다. 옆으로 풀숲이 휙휙 지나갔다. 르나그는 사람을 안은 채라곤 믿기지 않을 빠른 속도로 뛰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이 근처에 중문이 하나 있을 건데. 그쪽으로 간다기엔 영 낯선 길이었다.

“담을 넘을 겁니다.”

“담이요?”

나는 드높은 벽을 보았다. 넘기엔 너무 높은데?

“쭉 뛰어가면 벽이 낮아지는 구간이 나옵니다. 벽보다는 담에 가까운 구간이지요.”

“아하.”

르나그가 말한 것처럼 조금 더 달려가자, 잠시 낮아지는 구간이 나왔다.

르나그는 아마 저 구간이 본래 문을 만들려다 막은 것일 거라고 설명했다.

“본래 저곳에도 감시가 삼엄했으나 소란이 일고 모두 중문과 정문 쪽으로 향하더군요.”

기사들은 내가 문으로 나갈 줄 알았나 보다. 하긴 실제로 그리했으니.

“제가 알기 쉬운 사람이라서 다행이네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패턴이니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르나그는 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리고 이아나 양은 결코 알기 쉬우신 분은 아니고요.”

그치고는 신기하게도 희미한 장난스러움이 깃든 말이었다. 조금 놀라 그를 쳐다보려 했지만 그보다 르나그의 움직임이 빨랐다. 한 번에 크게 도약한 르나그가 담에서 튀어나온 돌들을 하나씩 밟았다. 마치 산양이 절벽을 오르는 것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담 꼭대기로 휙 올라갔을 때 르나그는 지체하지 않고 한 번에 뛰어내렸다. 나는 힉, 소리를 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곳에서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을 느낄 줄이야.’

이전 생에서도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 아닌가.

눈을 뜨면 다시 땅이었다. 나는 느린 숨을 토해냈다.

“괜찮으십니까?”

어느새 르나그가 걱정 어린 낯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그건, 조금 전에 뛰어내릴 때 놀라서 그래요. 여기서 느낄 줄 몰랐던 기분이었던 지라.”

나는 슬쩍 웃으며 그의 팔을 토닥이듯 두드렸다.

“절 도와주신 건데, 여기서 징징거릴 만큼 못돼먹지는 않았어요.”

“……여기서 제가 징징거리고 못돼먹게 행동하셔도 괜찮다고 하시면 어찌 됩니까?”

“네?”

르나그가 아닙니다, 말하며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느슨하게 풀린 머리카락이 함께 움직였다.

그러고 보니 그의 옷자락을 붙잡는 동안 그의 머리칼도 함께 잡고 있었구나 싶었다. 아프진 않았으려나?

“이아나 양,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하나씩 있습니다.”

“어느 것부터 들으면 되나요?”

“당신이 바라시는 대로.”

난 시간이 없으니 둘 다 빠르게 설명해달라 부탁했다.

“좋은 소식은 벽을 벗어난 순간부터 추적으로부터는 자유로워졌다는 겁니다.”

그가 고개를 돌리더니 내게 한 곳을 가리켰다. 르나그가 손짓한 곳으로 시선을 옮기니, 대기하고 있는 이들이 보였다.

“제 사병입니다.”

“아하.”

아직 체이서의 기사들은 저택 내부를 뒤지고 있는 것 같으니 잘된 일이었다.

“그럼 나쁜 소식은요?”

그러자 르나그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여기 오기 전 장미들은 내기를 했습니다. 아니, 치열한 거래와 협상에 가깝습니다.”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나는 가만히 경청했다.

“도뮬릿 저택은 출입문이 3개입니다. 정문과 중문 그리고 은밀한 후문이지요.”

“맞아요.”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후문은 내가 아니라 헤르님의 첩자가 알아온 것이었지만.

“저희는 치열한 언쟁 끝에 한 방위씩 맡기로 결정했습니다. 각각이 정문, 중문, 그리고 후문을 맡는 식으로요.”

그렇다는 건 르나그가 중문을 맡았다는 이야기였다.

“협의한 것은 자기가 맡은 방향으로 이아나 양이 나타나면 어떻게든 당신을 안전한 곳으로 모시는 것이지요.”

“어……. 고마운 일이네요.”

싸움이 일어나지 않은 게 어디냐 싶었다. 체이서 때문에 뭉쳤다뿐이지 세 사람은 일촉즉발의 폭탄처럼 자주 살벌했으니 말이다.

“여기서 나쁜 소식입니다. 이아나 양.”

르나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바퀴에 내려앉았다. 볼수록 나직한 목소리와 살벌한 눈매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구나 생각할 때였다. 그의 입매가 보일 듯 말 듯 끌어 올라갔다.

“목적지는 헤르님의 성일 것이나, 제 마법사의 실력이 부족하여 한 번에 그곳으로 이동하긴 어렵군요.”

“아……. 그래요?”

“예. 그래서 발테이즈 저택으로 먼저 이동하려는데 어떻습니까?”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연락은…….”

“물론 할 생각입니다.”

르나그는 그리 말하고 쓴 웃음을 지었다. 잠시 침묵 끝에 그가 이어 말했다.

“어차피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건 그랬다.

“그리고 대공 각하 성격에 그쪽에서 곧 집요하게 연락하겠지요.”

“하하하…….”

소란이 일었고 본인과 프란시아가 만나지 않은 걸 알게 되면 그럴 터였다.

어쩐지 르나그가 ‘각하’라는 단어를 미묘하게 삐뚜름하게 말한 것 같았지만 모른 척했다. 어차피 리케도르안과는 다시 만나야 했다. 우리의 목적은 그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었으니까. 르나그도 이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인 듯했다.

그렇다면야. 티아라를 손에 넣은 시점에서 어디로 이동하든 상관없었다. 당장 이곳에서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으니까.

“그런데, 르나그.”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쩐지…… 즐거워 보이시는데요?”

르나그가 멈칫했다.

“……오해이십니다.”

그가 눈을 슬쩍 굴렸다가 희미하게 눈매를 휘었다.

“그저…… 수하가 부족하여 완벽하게 모시지 못한 슬픔은 느끼고 있습니다만.”

슬픈 얼굴이 아닌 것 같은데. 내 시선을 슬쩍 피하는 거로 보아, 이 남자 거짓말을 잘 못 하는구나 싶었다.

하나 완전히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제이르가 이 정도 거리를 한 번에 이동하는 건 본인 같은 대마법사 정도나 되어야 가능하다고 했으니까.

그런 그도 마법진의 보조를 받았을 정도였다. 도뮬릿과 헤르님의 거리를 떠올린 나는 수긍했다. 그러니까 그거네. 밖으로 나왔을 때 리케도르안이 아닌 프란시아나 르나그를 만날 경우 헤르님으로는 당연히 가지 못한다. 세 사람이 찢어져 기다린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럼 시간이 없는 것 같으니 바로 이동해요.”

나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그를 채근했다. 어쨌거나 시간이 촉박했다. 언제 문이 열리고 기사들이 바깥까지 뛰어나올지 모르는 일이었으니.

그리 말하면서도 고개 숙여 살짝 웃었다. 다들 대단한 이들이면서 어찌 내 앞에서만큼은 속이 빤한 사람들이 되는 것인지. 웃는 한편 마음 한구석의 의문이 갈수록 커졌다. 이런 맹목적인 관계는 왜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이동하겠습니다.”

르나그의 마법사가 익숙한 마법진을 그리고, 이어 백마법의 푸른빛이 우릴 휘감았다. 푸른빛을 본 순간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체이서의 손에 맺혀있던 푸른빛.

위험하게도 두 장미의 힘을 가진 남자. 쓰러트렸지만 어쩐지 그게 끝이 아닐 거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도착했습니다.”

눈을 뜨면 우아한 양식의 저택이 보였다.

“발테이즈 저택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리 중얼거리는 르나그는 왜인지 내 얼굴을 보지 못했다.

“르나그?”

“아. 죄송합니다.”

“평생 이런 일이 있을 줄 몰라서…….”

그가 나를 보지 않은 채 작게 읊조렸다.

“……행복합니다.”

반대로 돌려진 얼굴 대신 귀 위쪽이 붉어진 그의 귀를 겨우 보았을 뿐이었다. 나는 눈을 굴리다가 말고 아직 그에게 안겨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그러나 그에게 이 사실을 일깨워줬다간 더욱 빨개진 얼굴을 볼 것 같았다.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해, 제가 잘 모실 수 있을지 염려되지만…….”

일단 이동을 위해 잠시 르나그의 저택에 머무르기로 한 것이니 서로가 편한 쪽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그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적당한 말을 태연히 던졌다.

“긴장하지 말아요.”

그의 팔을 톡톡 다독여주면서.

“만약 저희가 결혼했다면 제가 이곳에서 살았을 거잖아요?”

약혼 관계였으니, 그렇지 않았을까? 물론 그리되진 않았지만 가정하고 편하게 여겨달라는 의미로 말했다. 그런데 이게 화근이었나 보다. 어디선가 펑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어라. 말을 잘못했나.

“그…… 그런 말은.”

시선을 들면 르나그가 엉망으로 붉어진 얼굴을 애써 가리고 있었다.

자신의 얼굴이 잘 붉어진다는 점을 인지하는 리케도르안과 다르게 그는 이런 스스로에게 익숙하지 못한 것 같았다.

“어, 괜찮으세요?”

그가 얼굴을 잡은 채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아……. 보지 마십시오.”

결국 그가 애원하듯 말했다.

“상상만 해도 행복한 탓에. 엉망일 테니까요.”

<5권에서 계속>

감방에서 남자주인공을 만났습니다 4권

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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