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 날 오전.
이른 아침보다는 오전에 가까운 시각 수도 헤르님 저택에서 마차 한 대가 은밀하게 빠져나왔다. 허름한 짐마차보다는 고급스럽고 그렇다고 너무 사치스럽진 않은 마차였다.
그리고 그 마차 안에는 내가 넋이 나간 채로 창문에 기대고 있었다. 맞은편에 타고 있던 제이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가씨?”
“네.”
“어디 불편하십니까?”
그는 넋이 나간 내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아니요…….”
제이르는 대마법사로, 현재 수도를 빠져나오고 일정 지점에 다다르면 나를 이동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돌아가 나머지 인원을 이동시킬 터였다.
가장 주요한 역할 중 하나를 맡은 만큼 그는 평소와 다르게 살짝 긴장이 엿보이는 표정이었다.
“혹시 아프십니까?”
“…괜찮으니 그대로 가세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대답하지 않으면 마차를 돌릴 기세였으니까. 말 그대로 몸은 멀쩡했다. 아니, 멀쩡은 한데 기운이 달린다고 할지. 정확하게는 정력이 모자란다고 해야 하나…….
나는 먼 산을 쳐다봤다.
“제이르 씨, 당신 말이 맞았네요.”
“네? 어떤 말을…….”
댁 대공이 짐승 같다는 거요. 아주 그냥……. 후, 연거푸 숨을 쉬었다.
“아가씨?”
“아니에요.”
나는 차마 잇지 못한 말을 삼키며 시선을 돌렸다. 제이르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일 뿐이었다.
“그나저나 리케도르안의 저주 말이에요. 황제의 허락을 받은 뒤 감방으로 나란히 들어가서 내가 힘을 쓰면 된다고 했었죠?”
만약 성공적으로 황제의 티아라를 가져올 시 약속대로 캄브라캄으로 들어갈 수 있을 터다. 그리고 최근에서야 느끼는 거지만 힘을 쓰는 방식을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도 같았다.
이건, 첫 시작은 아퀼라가 사라지던 시점 나도 모르게 내 손에서 푸르른 빛이 흘러나오던 때부터였다.
“네. 맞습니다.”
“캄브라캄으로는 그냥 들어가면 돼요?”
지금부터 있을 일에 긴장감을 덜어내려, 일부러 먼 이후의 일을 먼저 꺼냈다.
“아닙니다. 대공 각하의 행차로서 가는 건 안될 일이지요. 요란스러울 테니까요. 시선이 몰리지 않게 적당한 죄목을 만들어 들어갈 예정입니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좀 이상하네요, 대공님이 죄짓고 캄브라캄에 들어가도 돼요?”
“명예에 손상이야 있겠지만 괜찮습니다. 가벼운 죄목으로는 다들 그러려니 할 겁니다.”
어차피 겉으로는 혀를 찰지언정 헤르님이 쫄딱 망하지 않는 이상 걱정 없다고.
“사실 역사를 돌아보면 고위 귀족들은 한 번씩 그곳에 다녀올 것을 선고받습니다. 가주가 아니라 먼 친척들이 대신 가기도 하는 방식을 자주 쓸 뿐이지요.”
“대리인을 세운다?”
“으레 세상 돌아가는 게 그렇듯 이런 문제도 그렇지요. 권력.”
이를테면 돈 많고 권력을 쥔 인간치고 깨끗한 사람이 없다는 소리란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던 제이르가 잠시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실례했습니다. 아가씨 앞에서 해도 될 이야기는 아니었군요.”
“상관없어요.”
아마 내가 오빠와 아빠의 죄를 대신해서 캄브라캄에 갔던 걸 말하는 모양인데, 상관없었다. 진짜 죄를 대신해 간 것도 아니었으니까.
“내가 캄브라캄에 갔던 건 아빠와 오빠의 싸움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간 것 같으니까요.”
“추측입니까?”
“그렇죠?”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제이르가 턱을 쓰다듬었다. 긴장이 한결 가신 얼굴이었다.
“그러고 보니, 캄브라캄의 지하 하니까 생각난 것인데 최근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발견되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요?”
“예. 각하와 함께 들어갈 공간 말입니다.”
“저주를 풀러 가는 공간말이군요.”
“네. 그곳은 푸른 장미가 모든 저주를 풀 수 있기도 한 장소인데. 그와 동시에……. 차원을 이동할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그 순간 나는 멈칫했다.
“차원? 갑작스러운 얘기인데요.”
“예, 보통 사람에게는 터무니없는 주제지만 마법사들에겐 오랫동안 흥미로운 주제였지요.”
하지만 입술은 착실히 대화에 충실한 척 내뱉었다. 제이르는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는지 태연하게 말했다.
“흥미롭지 않습니까? 각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라 보고서에서는 제외했지만.”
그가 씩 웃었다.
“고대 주문을 외우기만 하면 차원을 이동하거나 누군가가 이동되어 온다니 재밌지 않습니까.”
그는 연신 터무니없는 소리라 했지만…… 나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세계는, 내 세계가 아니었으니까.
“언젠가 연구해보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평화로워진다면 말이지요.”
그랬다.
나는 어느 날 감방에서 눈을 떴다.
“그렇군요.”
난 입술을 꾹 다물었다.
사실 그동안 내가 어떤 경위로 어떻게 그곳에 눈을 떴는지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두지 않은 게 아니라 두지 못한 것에 가까웠지. 눈 뜨자마자 적응하기 바빴으니까.
거기다가, 적응한 뒤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일어난 일이니 이유를 알아 무엇하겠나? 돌아갈 수도 없을 텐데, 하면서. 그렇기에 ‘이아나’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가문인지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거였다.
앞으로 잘 살아갈 생각만 했지.
‘그게 실수였던 것 같네.’
캄브라캄, 푸른 장미, 그리고 나.
과연 이 얘기가 연관이 없을 수가 있을까?
제이르는 캄브라캄에서 이런 이동, 즉 차원 이동을 하려면…… 이 고대 주문을 실행하려면 거대한 힘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다. 보통 거대한 게 아니라 아주아주 어마어마한 힘이 필요하다. 어느 고대 문헌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고.
“제이르 씨, 만약에 그 주문을 쓰려면요.”
“네? 차원 이동 말씀이십니까? 아가씨께서도 관심이 있으셨나 보군요.”
“네. 그렇다고 해두죠. 리케도르안의 마법을 푸는 것 말고 그거요. 그 주문도 푸른 장미만 가능한가요?”
제이르는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아가씨에게 이런 질문 받을 줄은 몰랐다며 웃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쪽은 푸른 장미가 아니어도 될 겁니다. 그런 말은 없었습니다.”
“그럼…….”
“다만, 말했듯 어마어마한 힘이 필요합니다.”
“얼마나요?”
“장미 하나가 대단한 힘을 품고 있는데도, 그것만으로는 안됩니다. 한 명으로는 절대 모자란 힘이 말입니다.”
제이르가 설명을 마치고 잠시 침묵했다. 그는 창문을 보고 있었다. 진지해진 표정이 알려주고 있었다. 목적지까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얼마 남지 않았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생각은 여전히 그가 한 이야기에 머무르고 있었다. 창문을 보면 숲이 뚜렷하지 않았다. 아직은 생각할 시간이 있다는 소리.
‘생각해.’
한번 가정해보자.
내가 만약 차원 이동을 해서 온 것이다. 누군가 캄브라캄에서 그런 주문을 실행했다면? 그럼 그 사람은 누구일까.
다각다각.
마차 바퀴가 마구 돌아간다. 내 머릿속 바퀴도 맹렬하게 돌아갔다. 마침내 머릿속 바퀴는 내가 현재 향하고 있는 곳과 맞물렸다.
좀 더 깊이 파고들어, 가정해볼까.
‘이아나’의 심장이 멈췄다.
누군가 ‘이아나’를 살리기 위해 주문을 사용했다면. 만약 그 주문이 또 다른 영혼을 불러다가 빈 육체를 눈뜨게 하는 것도 가능했다면?
논리적 비약이 가득했음에도 왜인지 나는 내가 틀린 답을 선택한 것 같지 않았다.
감이 말하고 있었다.
그 주문을 사용한 사람은 바로, ‘체이서’라고.
그와 동시에 마차가 멈췄다. 나는 모든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럼 아가씨, 이동하실 시간입니다.”
문이 열리고 제이르의 인도를 따라간 곳에는 커다란 마법진이 있었다. 아마 나를 익숙한 곳으로 이동시켜줄 마법진일 터였다. 나는 마법진 중간으로 조용히 향했다. 이미 이야기된 사항이었다. 막 한가운데 멈춰 섰을 때, 거대한 바람이 불었다.
끄트머리에 제이르가 서 있었다.
“그럼, 몸조심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제이르 씨도요.”
푸른빛이 몸을 휘감았다. 마법사들이 쓰는 마법은 푸른색이다. 딱 한 번 보았던 푸른 장미가 내뿜는 바다같이 반투명한 색과는 다른 빛이었다.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나는 익숙한 저택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도뮬릿 저택이었다.
숨을 꾹 참았다가 내려놓으며 걸음을 옮겼다.
다시 돌아온 저택을 향해서.
***
눈앞에 우뚝 서 있는 저택은 예전과 다를 것이 없었다. 물론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변화가 있겠느냐마는 신기할 정도로 그대로였다.
내가 이 저택의 외양을 본 것은 단 두 번뿐이다.
캄브라캄에서 출소하여 이 저택에 들어갔을 때, 그리고 황성으로 가기 위해 마차를 타고 나왔을 때. 물론 쉬르멜라로 몰래 갈 때도 있었지만 그때는 숨어 있느라 창문을 보지 못했으니, 예외로 치자.
새삼 내 처지가 와 닿았다.
한걸음도 밖으로 나갈 수 없던 처지. 나는 눈을 깔았다.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몰랐던 건 아니지. 외면했던 거지.’
다시 돌아온 고향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건 벨을 누르는 것으로 충분했다. 물론 진짜 벨을 누른 것은 아니고, 근처 기사를 불러다 내 얼굴을 보여주는 것으로도 충분하더라고.
나는 허둥지둥 튀어나온 체이서의 정예 부하들을 따라 걸어갔다. 이들이 안내하는 목적지란 빤했다. 나는 마치 죄수인 양 원으로 둘러싸인 채 걸었지만 이들의 표정을 보면 결코 연행이란 말이 어울리지 않았다. 극성 팬에 시달리는 배우라면 모를까.
‘어째 경계가 더욱 심해진 것 같네.’
아닌 게 아니라 저택 내 경비가 삼엄했다. 도뮬릿 전 공작의 장례식이나, 내가 쇠사슬 매달고 돌아다닐 때도 이 정도는 아닌 것 같았는데…… 눈앞에서 커다란 문이 열리고, 나는 마침내 내가 찾던 이와 재회했다.
“……무슨 일이지.”
체이서는 소파에 누워 있었다. 그는 보지도 않고서 말했다. 그 목소리에 옅은 짜증이 묻어 있음은 물론이었다. 체이서의 목소리에 짜증과 염증이라, 꽤나 신선한 느낌이었다. 단 한 번도 내 앞에서 부정적인 음성을 들려주지 않던 남자였으니까.
거기다 내가 안내받은 방이…… 바로 내 방이란 것도 어찌 보면 예상대로랄지.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푸른 장미가 가까이 있는지는 알아차리지 못하나 봐?”
내 말에, 체이서가 멈칫했다. 그것도 잠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아나?”
나는 흠칫 놀랐다.
이 남자가 정녕 내가 알고 있던 남자가 맞나? 모습만은 금욕적이던 남자였다. 잔뜩 흐트러진 모습은 신선하다 못해 생경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체이서의 셔츠 단추는 여며지지 않은 채 반 이상이 풀려 있었다. 체이서는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미간을 찌푸렸다.
“또 환상인가?”
“환상 아닌데.”
“환상은 다들 그렇더라고.”
그는 조금 야윈 낯이었다. 그 덕에 더욱 날카로워보였다.
“자긴 환상이 아니라 하던데.”
찡그려진 미간 주름 사이로 예민함이 서린 웃음이 흘러나왔다. 체이서가 그렇게 얼굴을 반쯤 가린 채 웃었다.
“참 편리한 능력인데, 가끔 짜증 날 때가 있어.”
손가락 사이로 붉은 눈이 짐승의 것처럼 낮게 빛을 드러냈다. 광기와 함께 뜻을 알 수 없는 것이 일렁거렸다.
“사용하는 사람마저 스스로를 세뇌시키다니.”
“…….”
“난 그저 너를 보고 싶다고 중얼거렸을 뿐인데 말이지. 이아나.”
나는 겁먹는 대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 정도야 사람들 쥐잡듯 잡아들일 때 무수히 보았던 모습이었다. 물론 그 사람들이 내게 해를 끼치거나 끼칠 예정이었던 사람임은 당연했다. 그는 내 위험에 극도로 예민했으니까.
“뭐, 상관없어.”
체이서의 얼굴에서 분노가 차차 가라앉았다. 가라앉은 광기는 미소 속에 사라졌다. 그리고 남아 있는 것은 내가 익숙하게 보았던 부드러운 얼굴이었다. 그는 성큼 다가와, 손을 들어 올렸다. 나붓하게 내려앉은 손이 내 양 뺨을 잡았다. 깨질 듯 귀한 것을 다루듯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널 볼 수만 있다면 무슨 상관이겠어, 이아나?”
그의 손가락이 내 뺨을 쓸어내렸다. 그의 눈이 휘어졌다. 악마의 미소처럼 유혹이 담뿍 담긴 웃음이었다.
‘얘, 제정신이 아니네.’
내가 진짜인지 아닌지, 그는 부하들을 보고서 바로 알아차렸어야 했다. 이미 문은 닫혔고, 부하는 나간 지 오래인데, 이걸 알아보지 못하는 건……. 제정신이 아니란 소리밖에 더 되겠는가? 무엇보다 완벽함을 관철하던 남자였기에 생소하고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더군다나 나는 체이서의 눈 밑에 까맣게 내려온 그림자를 보았다. 대체 얼마나 잠을 자지 못한 건지 흰자위에는 실핏줄이 터진 자국이 보였다. 문제는 이런 요소들이 미모를 퇴색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퇴폐적이고 예민한 미남으로만 보이게 했다는 점이다.
거기다 저렇게 반쯤 벗다시피 단추를 풀어헤친 채이니 눈 둘 곳이 없었다. 리케도르안이야 셔츠만 입거나 풀어 헤친 모습을 더러 보았지만, 체이서는 달랐다.
고집스러울 정도로 금욕을 고집하던 이가 풀어헤쳤을 때의 충격과 파급이 더 큰 법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나도 뭘 또 여기까지 생각하고 있나.
“저기, 오빠.”
난 얼굴을 쓸어내렸다. 결심했던 것이 시각적인 것에 흐려지고 말았다는 걸 인정했다.
“난 진짜야.”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바보 같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머리라면 비교할 이가 없을 정도로 잘 돌아가는 이 남자에게 하다니.
“응, 이아나.”
체이서가 제 손을 떼어내는 내 손을 다시 붙잡고 나른하게 웃었다. 포식자의 웃음이었다.
“진짜인지, 아닌지 판별하는 건 아주 쉬우니까.”
“……어?”
내 얼굴 위로 체이서의 그림자가 졌다. 내가 눈을 깜빡이기 무섭게 체이서가 고개를 휙 꺾었다.
눈앞의 얼굴에서 달큰한 향기가 느껴졌다. 기억에 있는 향기인데……. 도뮬릿의 흑장미 정원에서 느껴지던 그 향기였다.
“내가 네게 입 맞추면, 환상은 그대로 있지 않을까?”
잠깐, 잠깐만.
모든 생각이 일시에 지워졌다. 그러나 이미 얼굴이 한껏 다가온 뒤였다. 날숨이 입술로 느껴졌다.
하나 그의 입술은 채 내게 닿기 전에 막혔다. 나는 그의 입술을 막은 채로 씨근덕 숨을 내쉬었다. 미간을 잔뜩 찡그리면서.
“헛수작 부리지 마.”
중간부터 깨달았다. 아니, 가까이 다가온 남자의 눈을 보고서야 알았다 할 것이다.
“이미 제정신이잖아?”
체이서는 제정신이었다. 아니다. 어쩌면 처음에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변화를 알아차린 건 당연한 일이었다. 지난 몇 년이나 바로 옆에서 그를 보았으니까. 그가 나를 알듯 나도 그를 알았다.
“떨어져.”
누가 계략으로 먹고사는 인간 아니랄까 봐.
“어라, 진짜네.”
체이서는 내게 입을 가로막힌 채로 눈을 천천히 휘었다. 이어서 내 손등 위로 손을 올리더니, 떼어냈다. 그러고는 내 손목에 입술을 묻었다.
“이아나구나. 진짜 이아나.”
반으로 휘어진 눈동자로 맴도는 광기, 이것은 진짜였다. 그제야 저택으로 돌아왔다는 것이 실감 났다.
아니,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돌아와 준 거야?”
대답 없는 나를 향해 체이서가 그윽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은 나를 탐구하듯 깊고 깊었다. 그의 머리칼은 땀으로 젖어 달라붙어 있었다. 옷깃 또한 그러했다. 흡사 악몽이라도 꾼 모양이었지만 속으로 고개를 젓는다.
“꿈만 같네.”
그와 악몽이라니 어울리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악몽이 되었다면 모를까. 낮게 웅얼거린 체이서가 묻었던 입을 떨어트렸다.
“네가 직접 돌아오다니.”
그는 그대로 입술을 열고 내 손가락을 입술에 물었다.
“이건 내 곁에 있어 주겠다는 의지일까.”
작은 중얼거림은 대답이 없음에도 이어졌다. 동시에 아릿한 고통과 함께 축축한 감촉이 들었다. 야릇한 자극이었다.
“응? 이아나.”
손을 빼려 하자, 체이서는 손쉽게 내 손을 놓아주었다. 강제하지 않겠다는 듯이. 나는 숨죽인 채 뒤로 숨긴 손을 쥐었다가 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아니,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난 곧 인정했다.
체이서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는 바람에 평정을 잠시나마 잃었다는 것을. 천천히 이성을 가다듬을 시간이 필요했다. 눈을 감았다.
향기가 자욱하다. 이 장미들은 누가 이름값 못한다 할까 봐. 하나같이 지독하고 깊은 향기를 자랑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지독한, 사람을 유혹하는 향기를 꼽으라면 단연 눈앞의 남자였다. 거기다 이젠 생소한 모습으로 당황하게 하기까지.
직구와 커브, 둘 중 어느 것으로 시작할까. 고민하던 나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못 잤어?”
내게서 흘러나온 것은 일상적인 질문이었다. 마치 어제까지도 대화했던 것 같은 평범한 질문. 체이서의 표정은 웃는 그대로였다.
“질문이 많아. 그거 말고도 내게 묻고 싶은 말이 많을 것 같은데. 오빠.”
그러나 나는 그의 눈매가 미미하게나마 흔들렸음을 알아차렸다. 체이서는 시선을 아래로 내려 내 질문에 하나씩 대답했다.
“응. 못 잤어. 넌 어때?”
“잘 잤지.”
내 대답은 태연했다. 체이서 다시 질문했다.
“넌 내가 질문하면 대답해주려고?”
“듣고 싶어?”
나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너 하는 것 봐서? 하는 의미가 가득 담긴 행동이었다. 그는 어렵지 않게 내 뜻을 알아차릴 것이다. 하나 알아들었음에도 그가 보인 것은 또 한 번 예상을 벗어나는 행동이었다.
“아니, 나는 대답 듣는 것보다는…… 네가 재워주면 좋겠어. 이아나.”
체이서가 내게 허리를 숙였다.
그의 얼굴이 내 얼굴로 다가왔을 때 흠칫했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인가. 여차하면 걷어차 줄 생각으로 발을 드는데, 그의 얼굴은 내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졸려…….”
오싹하도록 나른한 음성이 귀를 파고들었다. 황홀하다시피 낮고 듣기 좋은 울림을 품고서.
“나 재워줘. 응?”
그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로 중얼거렸다.
“한 번만…….”
이는 지독하리만치 피로감을 품은 목소리이기도 했다.
나는 그의 정수리에 시선을 주는 대신에 방을 한번 훑었다. 내가 자릴 비운 이후로 어느 것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내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내게서 무심한, 그러면서도 삐딱한 말이 흘러나왔다.
“왜. 푸른 장미를 곁에 두지 못하면 잠들 수 없기라도 해?”
“비슷해.”
“아, 불면증?”
체이서는 헤르님 성에서 나타났을 때도 이리 말했었다. 잠을 자지 못 했다. 재워달라……. 체이서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로 피식 웃었다.
“그렇지. 하지만 내가 이러는 건 네가 없기 때문이야.”
체이서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비록 웃는 것을 보진 못했지만, 나직한 바람 소리로 늘 하던 것 같이 웃고 있구나 추측할 수 있었다.
체이서가 뒤로 숨긴 내 손을 더듬어 쥐었다. 그답지 않게 섬세한 손길이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손길이 우락부락하거나 사나운 남자는 아니었다.
늘 깨질 것처럼 부드럽게 나를 붙잡던 남자이긴 했지. 보이는 행동과 말이 달랐을 뿐. 나는 작게 웃었다. 재밌어서 나온 미소는 아니었다. 헛웃음이었다.
“뭐가 달라?”
체이서가 흠칫 어깨를 굳혔다. 그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잠시지만 놀란 표정이 스쳤던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는 이내 본래의 얼굴로 돌아와 웃었다.
“헤르님 대공이 이런 것들은 알려주지 않았나 봐.”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뚝뚝 떨어진다.
“장미들의 부작용에 관해서는.”
글쎄. 프란시아에게 그런 걸 듣기도 한 것 같은데. 나는 웃었다.
“거긴 솔직하게 얘기해주던걸.”
“…….”
“흑장미들이 줄곧 푸른 장미를 숨겨왔던 것 또한 거기서 들었는데.”
나는 고개를 들었다.
“정말 그래?”
“보다시피.”
체이서가 웃음으로 답했다.
“헤르님 대공이 무어라 한 거야?”
“글쎄, 많은 것을 들었지만 잊었을지도 몰라. 적어도 나한테 뭘 숨기지는 않아서.”
체이서가 웃는 그대로 눈을 가늘게 좁혔다.
“……나도 뭘 숨긴 적은 없는데?”
“굳이 말을 안 한 건 아니고?”
“그렇게 생각하면 섭섭해, 이아나.”
체이서는 고개를 숙인 채로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머리를 팽팽하게 굴렸다.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을 잊지 않았으니까. 이윽고 방 한구석을 한 번 보고는 난 고개를 까딱였다. 아주 태연하게.
“앉고 싶어.”
그의 말을 깔끔히 무시한 것에 가까웠다. 이에 체이서는 눈썹을 까딱였다. 하나 웃음이 흐려지지는 않았다.
“앉자.”
체이서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그런 그를 한번 쳐다봤다.
“뭐해? 재워달라며.”
그의 손에서 빠져나와 먼저 걸어갔다. 내가 앉기가 무섭게 체이서가 느릿하게 내 옆으로 걸어왔다.
나는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안 누울 거야?”
“……정말 해주려고?”
“내가 언제 빈말을 했던가?”
그도 나도 마치 공백은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로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일상적인 분위기 속에 스며 나오는 이 긴장을. 체이서가 소파 등받이를 잡고 상체를 기울였다. 내게로 긴 그림자가 진다. 앉는 대신 나를 덮칠듯한 기세로. 나는 겁먹는 대신 그의 옷을 잡아당겼다. 그는 순순히 몸을 내주었다.
“자장가라도 불러주려고 이러는 거야?”
체이서의 태도는 네가 무엇을 하든 함정에 가까운 걸 알지만 일부러 빠져준다, 하는 것에 가까웠다. 평소 같았으면 내게 이것저것 묻거나 추궁했을 이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그는 이렇게 말하고서 순순하게 소파 위로 몸을 뉘였다.
나는 눈을 찡그렸다.
“나는 내 다리를 베라는 말은 하지 않았는데?”
그는 뻔뻔하게 웃었다.
“그 말 아니었어?”
잠시 침묵 속에 긴장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체념한다는 투로 시선을 던지고는 그의 눈 위로 손을 얹었다.
“그래. 뭐. 자.”
그와 나의 관계는 언제나 그가 손을 뻗는 쪽이었으므로 이런 일은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나 그도 나도 티를 내지 않았다. 특히나 나는 태연하게 그를 응시했다. 정말 피곤하긴 했던 것인지, 아니면 속아주는 척하는 것인지, 속눈썹이 손바닥을 간질이는 감각이 느껴졌다. 이내 그의 눈이 감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 잘 해주는 걸까.”
그는 얼굴을 반만 드러낸 채로 입술을 끌어올렸다.
“내게 원하는 것이 있어?”
“글쎄.”
“바라는 것이 있어, 이아나?”
똑똑한 남자였다. 그러니, 상황의 이상함은 이미 알아차렸으리라. 나는 이 남자가 어째서 핵심을 족족 빗겨 가며 말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오빠야말로 묻지 않아?”
사람의 침묵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말하기 어려운 것 그리고 말하고 싶지 않은 것, 그리고 할 말이 많아서 어느 것도 꺼내지 못하는 것. 또 많은 것이 있겠지만.
체이서의 입술이 달싹인 건 어느 쪽이었을까.
어째서 이 남자는 내가 여기를 탈출하려 했을 때, 푸딩이를 숨기려 했던 때처럼. 내게 추궁하듯 묻지 않나?
“오빤 궁금한 게 많을 텐데.”
“……맞아. 네가 내게 궁금한 것이 있듯이 나도 네게 궁금한 게 있지.”
체이서가 여전히 눈이 가려진 채로 말했다.
“하지만 기다리는 거야.”
나는 시선을 떨어트렸다. 그가 이런 식으로 나온 탓에 아주 잠깐 목적을 가라앉히고, 진심을 꺼내 들었다.
“나한테 뭘 해주려 하지 않아도 돼.”
그가 움찔했다.
“아니, 더는 나한테 그렇게 하지 않아도 돼.”
체이서의 손이 눈을 가린 내 손을 붙잡았다.
“이아나.”
하나 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이제 와 오빠가 해주었던 것이 나쁘다고 말할 생각은 없어.”
그저 이상한 것을 이상하다고 깨달았을 뿐.
“다만 나는 당신에게 바라는 게 없으니까.”
그라면 달라진 호칭의 의미를 알아챌 것이라 생각했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 체이서가 입술을 열었다.
“……내가 싫어진 거니?”
체이서는 내가 출소하던 날, 날 부르던 나긋한 그 목소리 그대로 물었다. 그러나 난 알았다. 이건 평정을 가장한 목소리라는 걸. 아울러 벽이 무너지기 직전의 음성이라는 것도 알았다.
“아무 생각 없어.”
그럼에도 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싫어하냐고 물었지?”
내 손은 여전히 체이서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당신에게 아무런 기대도 없어.”
아마, 이번 일이 지나면 더는 이런 이야기를 할 기회는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도뮬릿 저택에 있을 때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그때 내겐 딱히 생각이란 게 없던 때긴 했지만, 그럼에도 가끔 드는 이상함을 그저 넘겼으니까.
어쩌면 나와 이 남자는 서로를, 스스로를 기만하며 마주한 채 살아온 건지도 모르겠다. 분위기는 몇 초 전과 판이했다. 실을 당기듯 팽팽해진 공기가 뺨을 쿡쿡 찔렀다. 나는 압박에 밀리지 않았다.
체이서가 얼굴에서 내 손을 떼어냈다.
“지금부터, 네가 바라는 걸 들어준다고 해도?”
“그런 게 의미가 있어?”
나는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내가 무엇을 바라든 오빠는 오빠가 바라는 대로 행동할 거잖아?”
나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내게 족쇄를 채웠던 것처럼.”
체이서는 내가 도뮬릿에서 지내는 동안 저 편할 대로 행동했다.
“나를 감금했던 날처럼.”
물론 그로 인해 생명을 구했던 날들을, 그의 노고를 잊지 않았다.
그저 그뿐이다.
“하……. 하하.”
체이서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흐트러진 모습 그대로 나를 빤히 응시했다.
“하, 하하……. 이아나. 이거, 내가 후회할 차례인가?”
그 순간 시야가 휙 뒤집혔다. 정신을 차렸을 때 등 뒤로 푹신한 소파의 감촉이 느껴졌다. 시선을 올리면 체이서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고서.
공기는 끓어 넘칠 것 같은 냄비 속 물처럼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이것이 뚝 끊어지면 어찌 될지 나도 알 수 없었다.
그는 곧이어 잠을 자지 못해 잔뜩 붉어진 눈으로 나를 담았다. 눈앞의 붉은 홍채 속에서 가늠할 수 없는 것들이 침잠하고 다시 파도치고 있었다.
“이제 와 붉은 장미를 사랑하게라도 되었나?”
그에게서 으르릉거리는 듯한 낮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가 내 목이라도 갖다 바치라던가? 널 이렇게 홀로 사지로 돌려보내는 놈이?”
“도뮬릿이 사지였어?”
내 반문에 그가 깊은 웃음을 흘렸다.
“붉은 장미에게 그렇겠지.”
이 또한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이아나, 나를 포기하려고?”
나는 눕혀진 그대로 고개를 갸웃했다. 포기라.
“그건 한 번이라도 가졌을 때 하는 이야기 아닐까?”
“이아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했으니까. 하나 그럼에도.
“왜?”
내 입이 멈추지 않았다.
“응?”
“그리고 왜 후회하려고?”
나는 천천히 웃었다. 그러고는 이어서 말했다.
“어차피 오빠는 후회하지 않을 거잖아.”
와르르 쏟아낸다. 굳이 자극할 생각은 없었으나 나도 모르게 진심이 흘러나왔다.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있지 소용없을 때 하는 게 후회야. 오빠.”
내가 더는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체이서는 이미 많은 걸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정녕 우스워서 나온 소리가 아님을 그도 나도 알고 있을 것이다.
난 태연하고 고요하게 말을 이었다.
“후회한다고 해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지.”
지나간 일은 결코 돌이킬 수 없다. 이제는 상흔조차 남지 않았지만 가끔은 발목이 무거워 들여다보게 되는 것처럼.
걷다가 나도 모르게 쇠사슬의 소리를 듣는 것처럼.
이 모든 것이 결국 이상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듯이. 똑똑한 당신은 이미 알았겠지.
내가 알아차린 것을 이 남자가 모를 리 없었다. 이 남자는 도덕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도덕마저도 이용하는 남자였다.
“이미, 오빠는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라 생각하지?”
당신은 똑똑한 남자니까.
“뭐하러 후회해?”
나는 그 상태에서 마침표를 찍었다.
“이렇게 생각하잖아.”
이 남자가 나를 아는 만큼 난 이 남자를 안다. 우리는 너무나도 곁에 붙어 있었다. 지나칠 정도로.
다가온 것은 이 남자였지만 거리를 허용한 것은 나다.
이 남자 덕에 수없이 목숨을 보전했다. 이날까지 살아 있게 해주었다. 거기에 마음이 느슨해져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관성과 타성에 젖어가면서 잘못되었다는 것을 모른 채.
내 손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의 뺨을 건드린다. 그러고는 무심히 이어 말했다.
“하지만 나는 잘못이라고도 생각 안 해.”
사람인지라 이 공간에서 매번 목숨을 다해 나를 지키는 이 남자와 조그만 흑마법사님에게 정이 들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내겐 용서할 수 없는 게 생겼고. 오빠는 반성하지 않을 거야. 우리는 서로를 잘 알아.”
밉지만 밉진 않다. 모순덩어리를 치워내는 건 사실 쉽다.
“오빠가 후회하지 않는다면, 나도 용서할 필요는 없겠지.”
둘 중 하나를 완전히 지워내면 된다.
“그냥 오빠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어.”
체이서의 표정이 처음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건 안 돼.”
산산이 부서진 채 날것에 가까운 낯이 드러났다.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은 그가 분노할 때조차 보지 못한 표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역시, 붉은 장미를 사랑하게 된 건가?”
체이서가 목소리를 잔뜩 낮췄다. 쉬어버릴 것 같이 황홀하고 오싹한 음성이 귀를 가득 메운다.
“하지만 그거 알아?”
그가 일그러진 얼굴로 미소했다.
“이아나. 푸른 장미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어.”
나는 눈을 들어 올렸다. 한눈에 담게 된 모습은 엉망일 정도로 처참했다.
“잘 생각해 봐.”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젖은 머리카락이 달라붙은 얼굴은 막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처럼 농염하고 선정적이었다.
“그 남자를 볼 때 심장이 터질 듯 뛰던가? 보지 않을 때 보고 싶어 타는 갈증을 느낀 적은? 한걸음에 뛰어가기 위해 전쟁마저도 불사할 만큼 집착을 느낀 적은?”
나는 그것이 누구의 감정이냐고는 묻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쳐다볼 뿐.
“아니, 없어.”
진심이었다. 그가 말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나는 그런 것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내 삶은 언제나 잔잔한 물처럼 고요하고 잠잠했다. 나는 모든 일에 쉽게 적응했고 쉬이 놀라지 않으며 타인에게 관심을 거의 두지 않았다. 마치 이런 것에 타고난 사람처럼.
“많은 장미를 거느려야 하는 푸른 장미는 타고나길 무심함을 갖고 태어나지. 모든 푸른 장미가 그러했어. 이아나.”
이것이 정녕 푸른 장미의 특징이라면 나는 푸른 장미다운 사람이었다.
“태초의 장미가 정한 규칙이었지. 어느 것에 지나친 사랑을 준다면, 미쳐버린 다른 장미들이 세상을 파괴할 테니까. 죄 없는 이들이 다칠 테니까.”
호흡이 교차했다.
“붉은 장미에겐 열정을, 노란 장미에겐 충성을, 흰 장미에겐 희열과 치유를, 마지막으로 흑장미에겐 집착을.”
느릿한 목소리 사이로 수많은 가늠할 수 없는 감정들이 스며 있었다.
“그러니, 이아나 넌 사랑을 할 수 없어.”
나는 그를 빤히 응시하다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거짓말이지?”
이것은 거짓말이다.
“내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면서.”
과거 ‘이아나’는 체이서를 사랑했으니까. 이건 거짓말이다. 나를 바라보던 체이서가 점차 표정을 가라앉혔다. 그러더니 고개를 숙여 웃음을 토해냈다.
“맞아, 거짓말이야.”
이윽고 고개를 든 그는 평소와 같은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표정 여기저기에 채 가시지 못한 붉음이 묻어있었다. 그의 웃음 사이로, 붉은 눈에는 떨어져 내릴 것 같은 눈물이 자리했다.
“하지만 이아나, 넌 단 한 번의 거짓은 허락한다고 했는걸.”
긴 눈물이 그의 뺨으로 가로질러 내려갔다.
“……그건, 내가 아니지?”
내가 아니라 ‘이아나’.
마차에서 느꼈던 의문을 이리도 빠르게 묻게 될 줄은 몰랐다. 이런 기회가 오게 될 줄도.
“맞아.”
체이서는 순순하게 인정했다. 오히려 가벼운 대답에 내가 놀랄 정도로. 나는 그의 팔을 콱 붙잡았다.
진실이 드러날 시간이었다.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사람이 너야?”
나는 마침내 근본적인 의문에 도달했다. 서로 색이 다른 눈동자가 마주한 이 순간에.
“맞아, 이아나.”
이 남자는 내 이름이 이아나가 아님을 알면서도 그렇게 불렀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내 소유가 되어버린 이름을.
“내가 널 이곳으로 데려왔어.”
체이서의 손이 무방비한 내 손을 파고들어 깍지를 꼈다.
“그리고 너를 사랑하게 되어버렸지.”
쓴웃음을 짓는 얼굴로 가는 눈물 줄기가 흘러내린다. 남자는 울고 있으면서도 나긋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희고 긴 섬세한 손가락이 장미 넝쿨이 칭칭 감기듯 내 손을 옭아맨다.
“이렇게 미쳐버릴 줄은.”
깍지를 낀 손으로 희미한 빛이 일렁거렸다. 그 빛을 본 순간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내 동생이 죽을 때까지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
그 빛은 푸른색이었다. 언젠가 내 손에서 본 적 있는, 푸른 장미의 빛이었다. 귀로는 계속해서 체이서의 음성이 들려왔다. 진한 후회를 담은 목소리였다.
“어째서 내가 푸른 장미의 수호신이 있는 곳을 아는지 궁금하지 않아?”
그는 내게 보냈던 편지를 말하고 있었다.
“어떻게 붉은 장미의 수호신을 봉인할 수 있었는지는?”
그와 동시에 내 안에서 여차하면 언제든 튀어 나갈 준비를 하던 푸딩이가 움찔 떠는 것이 느껴졌다.
“푸른 장미의 힘은 둘 중 하나. 시간을 회귀하거나. 차원을 넘게 하지.”
“……뭐?”
“내 동생은 시간을 회귀하는 힘을 가졌고, 죽기 전에 내게 모든 힘을 넘겼어. 그리고 난 시간을 거슬러 왔지.”
결국 모든 것을 아는 채로 시간을 거슬렀기에 푸딩이를 봉인했고 푸른 장미의 수호신도 손에 넣었다는 소리였다.
나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사실 내가 있던 곳은 내 동생이 예기치 못하게 죽은 시점에서 장미가 다 같이 미쳐버렸을 테니까.”
“……세상이라도 지켰다는 거야?”
“그런 거창한 것은 아니야. 이아나, 내 동생은 이기적인 푸른 장미였거든.”
체이서가 고개를 숙였다. 그와 동시에 그에게서 눈부신 푸른빛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이내 검은빛과 뒤섞이고, 오묘하고도 신비하지만 음습한 느낌을 자아냈다.
“그 애는 내가 자신을 사랑해주길 바랐지. 오직 나만 살려 과거로 보내면서까지.”
오래전 아퀼라가 보여주었던 장면을 떠올렸다. 체이서가 ‘이아나’를 잡고 눈물을 흘리던 장면을.
“그 애는 어리석었어. 그 힘을 쓰면 사라지는 거니까. 돌아가서 마주한 건 영혼이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아 있는 모습이었지.”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흘러나오는 푸른빛과 검은빛이 섞인 아지랑이 때문인 것 같았다.
“내가 돌아간 곳은 푸른 장미의 영혼이 사라진 세상이지만 나는 그 애의 껍데기만이라도 지켜야 했지.”
모든 퍼즐이 착착 맞아떨어지며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감방에서 눈을 뜬 도뮬릿 공작의 여동생. 자신의 죄목을 모르는 여인.
그리고 간수들이 기억하던 ‘이아나’의 모습.
<제가 배운 사람이 아니라 적당한 표현을 못 찾겠군요. 그…… 그때의 아가씨의 눈에 초점이 좀. 없었다고 할지…….>
“어떻게든 육체만이라도 살려서, 고대 힘을 가득 품은 신전에 넣고.”
캄브라캄.
<으음, 표현하자면 말입니다. 그때의 아가씨는…… ‘인형’ 같은 느낌이었지요, 아마?>
“하지만 유일무이한 것은 다시 존재할 수가 없었던 거지.”
체이서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웃었다.
“그래서 널 부르게 된 거야.”
그가 깍지를 낀 내 손을 들어 올려 입술에 스치듯 가져다 댔다.
“이아나.”
일렁이는 빛 사이로 진한 향기가 느껴진다.
“차원을 넘어온 나의 푸른 장미.”
그가 천천히 내 앞에 무릎을 접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고고하던 얼굴을 떨어트리며.
“난 그저 껍데기만 남은 동생에게 충실하려 했지만.”
나직한 음성이 다른 때와 다르게 더욱 진득하게 파고들었다. 그가 다시 한번 앞서 했던 말을 중얼거렸다.
“너를 사랑하게 될 줄은 몰랐다는 거야.”
웃음기 사이로 광기 어린 눈동자가 아찔한 유혹을 담고 휘어졌다.
“이렇게 갈망하게 될 줄도.”
채 떨어지지 못한 눈물을 턱 끝에 매단 채로.
나는 말을 침묵한 채 체이서를 응시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나는 알지 못했다. 그저 체이서가 남긴 말이 액체 속 덩어리진 가루처럼 목구멍을 가로막았다.
답답한가? 아니, 그보다는 아주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나치고는 드물게 복합적인 감정을 느꼈다.
어느 날 감방에서 눈을 뜨게 된 것이 이런 이유였다니. 이것과 관련해서 나에게는 작은 비밀이 있었다. 사소하다면 사소한, 보잘것없는 비밀이.
“설마 내가…….”
나는 입술을 열다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자연히 말도 끊겼다. 입 밖으로 채 나오지 못한 말은 목구멍에서 맴돌았다.
내가 세상을 이동한 것과 이곳 책 속, 즉 원작만을 기억하는 건 당신 탓이야?
내가, 다른 세상에서 누구였는지 어떤 얼굴이었는지. 가족은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것도 당신이 한 일이야?
그리고 내가 단 한 번도 내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도 당신 탓이야?
모든 것이 이 남자의 탓이었냐고 물으려 했다.
그러나 나는 입술을 가로막았다. 묻지 않으려 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말을 하려는 순간에 번개와 같은 무언가가 머리를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일종의 감에 가까웠다.
이 남자의 탓이 아니다, 라는 감이 강렬하게 들었다. 몹시도 비논리적인 감이었지만 그럼에도 자연스럽게 이것이구나 받아들이게 된 것.
나는 이게 푸른 장미의 힘이라는 걸 알았다.
내 힘이 진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건 이 남자의 탓이 아니라 내 능력이었다는 걸. 낯선 세계에 지나치게 적응을 잘하는 것도, 무심했던 것도. 아니, 내 성격이 이러한 것이 모두. 적응을 잘하게 만들어 준 푸른 장미의 힘이자 특성 덕분이었다는 것을.
나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상황이 다르지만 갑자기 ‘이아나’가 이해가 갈 것 같았다. 그녀의 일기장에 꼿꼿하게 쓰여 있던 악필이 가슴에 꾹 박혀 들어갔다.
「모두가 날 필요로 했어.」
그녀는 괴롭다고 한마디도 적어놓지 않았지만, 저 한마디만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꼭꼭 눌러쓰다 못해 양피지가 뚫릴 것같이 진하게 말이다.
나는 ‘이아나’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흑장미가 오랫동안 푸른 장미를 감금했으며 도뮬릿이 아니면서 그들의 성을 가진 채 살았고 체이서를 사랑했다는 것을 알 뿐. 의도하지 않았던 것이 삶에 억지로 개입했다는 점은 같지 않았을까.
푸른 장미의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면 자신을 필요로 하는 관심들이 부담스러웠겠지.
하나 생각할 시간은 길지 않았다.
괴로움은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나타난 것보다 빠르게, 스펀지에 스민 물이 거꾸로 빨려가듯이 깨끗하게.
나는 본래 고민을 오래 하지 않았다. 이것이 푸른 장미에 특성이라 할지라도, 이미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것.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돌이킬 수 없는 거라면.
나는 고개를 휙 들어 올렸다.
체이서는 여전히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나의 손을 잡고 있었다. 마치 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독실한 기사처럼.
독실한 기사? 그와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문 채 그에게 손을 뻗었다.
내 손이 그의 멱살을 쥐었다.
“왜, 이제 와.”
그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죄인처럼 구는 거야?”
“…….”
“반성할 생각도 없으면서.”
내 말에 체이서의 입술이 차차 올라갔다.
“아……. 들켰어?”
그의 턱 끝에는 여전히 눈물이 매달려 있었다.
“넌, 돌아가도 똑같이 행동할 거잖아?”
“맞아.”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눈물이 뚝 떨어졌다.
“필요하다면 그렇게 할 거야.”
그가 미소 지었다.
“그리고 너를 다시 사랑하고 말겠지.”
그는 내가 잡아당기는 손에 못 이겨 순순히 끌려왔다. 아니, 못이긴 척하는 것이다.
“내가 듣고 싶은 건 그런 말이 아니야.”
“어떤 말을 원해?”
나는 대답하지 않은 채 손에 힘을 주어 그를 밀어냈다. 이내 그가 바닥에 누웠다. 아마 푹신한 카펫이 깔린 만큼 아프진 않을 것이다.
“일단 자.”
체이서의 눈은 이제 홍채의 색과 흰자위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붉었다. 피로에 잔뜩 적셔진 사람처럼. 물론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꿍꿍이가 있어서였지만 그가 알 리 없었다.
아니다. 꿍꿍이가 있는 것 정도는 알겠지만. 속내는 결코 알 수 없겠지.
“이아나, 난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거짓말처럼 체이서가 내가 막 생각하던 말을 읊조렸다. 그는 누운 채로 나를 느릿하게 올려다보았다.
“오빠가 모르는 것도 있어?”
“그럼. 항상 궁금해.”
흐트러진 그의 머리칼과 눕게 되며 구겨진 셔츠가 고스란히 보였다. 왼쪽 가슴 부근에서 어렴풋하게 검은 꽃잎같은 걸 본 것도 같았다.
“네 존재를 알게 된 순간부터.”
그는 멱살을 잡고 있던 내 손을 붙잡았다.
“너는 언제나 불가해의 영역이었어. 이해하지 못해서 궁금했고.”
그의 목소리가 조금씩 낮아지고 있었다. 분노해서 낮아진 것과는 다른 양상이었다. 낮고, 또 점차 잦아들고 있다.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이 어느 순간부터 즐거워졌지.”
그가 눈을 반쯤 감은 채, 네 편지를 받는 날을 기다렸어. 하고 중얼거렸다. 편지? 내가 반문하는 동안 체이서는 내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눈 위에 올려놓았다.
그의 입술이 그린 듯이 휘어졌다.
“넌 내 인생에 유일하게 풀지 못하는 물음표이자, 문제였음에도.”
나른한 숨이 튀어나왔다.
“너를 떠올리는 순간이 눈 깜빡이는 것보다 많았어.”
그는 매 순간 날 생각했다는 말을 돌려 말했다. 그리고 이윽고 낮은 날숨을 내쉬며 움직임을 멈췄다. 나는 붙잡힌 채로 속으로 숫자를 세다가, 40까지 세었을 즈음에 천천히 손을 떼어냈다. 손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쉽게 떨어졌다. 툭. 나를 잡고 있던 그의 손마저 바닥으로 떨어진다.
손 아래로 보인 것은 눈꺼풀을 닫고 긴 속눈썹을 아래로 향한 채 잠든 얼굴이었다.
몸부림 끝에 셔츠가 많이 구겨진 탓에 그의 모습은 마치 이대로 박제하면 조각인가 착각할까 싶을 만치 황홀하고 퇴폐적인 모습이었다.
나는 숨을 삼켰다.
인간인가 싶을 만치 화려한 모습에 눈을 빼앗길 시간이 없었다. 그대로 허공에 손을 들어 그의 얼굴 앞으로 조심스럽게 가져다 댔다. 그리고 휘휘. 미약하게 흔들어보았다.
‘정말 잠들었을까?’
그럴 것이다. 고르게 숨을 뿜고 있는 얼굴은 진짜 잠든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만큼 피로를 품고 있던 얼굴이었다.
하나 이 남자는 그럴 필요가 있다면 피로로 죽는 한이 있어도 눈을 감지 않을 수 있는 남자였다.
그를 잘 알지 않던가.
내게 꿍꿍이가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을 텐데……. 어째서 내 한마디에 바로 눈을 감았는지 몰라도. 천천히 손가락을 오므렸다. 다른 한 손으로 주머니를 꽉 쥐었다.
‘지금이라면…….’
주머니 속 주사기를 꺼내도 될까? 확인을 위해서 30여 분을 기다렸지만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이것이 인내심 대결일지 정말 잠든 것인지……. 생각의 추는 ‘잠들었다’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럼에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이윽고 손가락을 오므린 끝에 손을 과감하게 쭉 뻗었다. 그리고 그의 코앞에서 멈췄다.
덥석. 내 손이 붙잡혔다.
“심심한 거야?”
반쯤 눈을 뜬 체이서가 나른하게 웃으며 내 손끝에 입을 맞췄다.
“미안하지만…… 내 이아나, 조금만 더.”
잘게. 놀랍도록 쉬고 거친 음성으로 속살거리며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내 손을 입술로 가져온 상태 그대로.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른다.
‘대체.’
본능적으로 알았다.
체이서는 자지 않는다는 걸. 아니, 정확하게는 완전히 잠들지 않는다. 조금 전 실험하듯 펼쳐본 작은 동작에 알았다.
언제 어디서든 눈을 뜰 수 있게. 작은 기척에도 움직일 수 있게 짐승처럼 대비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만약 주사기를 꺼냈다면…….’
나는 곤히 잠든 얼굴을 보았다. 색색, 남자의 단 숨이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평화로운 악당의 얼굴과는 다르게 방 분위기는 긴장으로 가득했다.
그렇게 돌아온 도뮬릿에서의 첫 밤이 저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