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59/87)

***

이후, 여러 날이 흘렀다.

수도에는 영지에 본성을 두고 기거하는 이들이 많아 귀족들이 소유한 저택이 매우 많았다. 리케도르안이나 르나그 또한 따로 수도 내 저택을 소유했고, 프란시아마저 신전 수도 지부가 있었다. 어디로 가겠느냐는 질문에 나는 리케도르안의 저택을 택했고, 다른 두 사람은 탐탁하게 여기지는 않았지만 금방 수긍했다.

어째 매 순간 말은 잘 듣고 귀엽지만, 남들에게는 매우 사나운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내가 만족 못 하면 물어뜯을 것같이 사나운 멍멍이가 셋 씩이나 존재했다.

‘강아지 갱단이랄지.’

-갱? 갱이 뭐냐, 인간.

‘있어. 깡패 같은 애들.’

나는 푸딩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나는 회의실에 있었다. 정확하게는 리케도르안이 사용하는 집무실이었으나 이제는 회의실이 된 공간. 쇼파에는 세 명의 장미가 각기 앉거나 등을 기대고, 옆에는 짐승이 한 마리씩 나와 있었다. 우습게도 내가 푸딩이를 꺼내 놓았더니, 다들 기다렸다는 듯이 수호신을 꺼내서 옆에 두었다.

마치 보아달라는 듯이 말이다.

“실패했다고요?”

말을 꺼낸 이는 프란시아였다. 하얀 법복을 입은 그녀 옆에는 오늘도 조그만 곰의 모습을 한 수호신 칼리스토가 제 앞발을 열심히 핥고 있었다. 수호신의 앞에는 조그만 꿀통이 있었다. 내가 선물로 준 것이었다.

“그래.”

리케도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책상 위에 있던 둘둘 말린 양피지를 들어 각각 두 사람에게 던졌다. 그중 하나를 가볍게 잡아챈 르나그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양피지를 펼쳤다. 그런 그의 허벅지에는 조그만 뱀이 머리를 얹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르나그의 수호신인 아줄르였다.

나는 양피지를 굳이 받거나 펼칠 필요가 없었다. 이미 내 손에 있을뿐더러 알고 있는 내용이었으니까.

“이번에도 실패했다는 거군요.”

“그렇네.”

도뮬릿으로 잠입한 첩자가 사망했다. 벌써 7번째 사망이었다. 나는 조금 굳은 표정으로 양피지를 붙잡았다.

전혀 알지 못하는 이의 죽음이라 해도 누가 되었든 죽음이란 것엔 익숙해지지 않는다. 더군다나 나는 처음부터 잠입이 쉽지 않을 거라 예상했다. 그리고 이건 리케도르안이나 다른 이들 또한 예상했을 것이다.

황제의 티아라는 도뮬릿 지하에 있다.

정확히는 지하에 있는 창고. 처음부터 그곳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 건 아니었으나, 현 상황을 알기 위해 사람을 들여보내기부터 한 거였다.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경계가 더욱 강해졌군요. 하지만 설마하니 진입부터 막힐 줄은.”

시중인으로 들어가기는커녕 우회로를 택했건만, 체이서는 외부 접촉자, 이를테면 식료품을 전달하는 이마저 철저하게 배격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를 밖으로 빼내려는 시도마저도 무산되었다. 리케도르안이 한마디로 일축했다.

“본래 그런 곳이긴 했어. 다만, 더욱더 철옹성이 된 것뿐이지.”

그리 말하는 리케도르안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사실 본디 세 장미의 인적 자원이라면 웬만해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문제는 도뮬릿 저택에 잠입하는 건 ‘웬만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지. 나는 속으로 줄곧 미루고 미루던 질문을 물었다.

‘푸딩아.’

-응?

‘리케도르안의 수명. 아니, 시간이 얼마나 남았어?’

푸딩이는 리케도르안과 떨어져 나와 계약했지만 원래는 그의 일부였다. 그래서인지 내게 리케도르안의 남은 시간을 흘리듯 말한 적이 있었다. 움찔한 푸딩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 적은데, 냥.

‘말해줘.’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그래서 묻지 않았다. 굳이 듣지 않아도 촉박한 건 알 수 있었으니까. 마침내 푸딩이에게 일자를 듣고 나서, 나는 결론을 내렸다.

“다들 내 이야기 좀 들어줄래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 처음부터 한가지 밖에 없었지. 가장 빠르고 가장 위험한 방법이었다.

“거기, 내가 갈게요.”

체이서는 세상에서 단 한 사람의 말만 듣는다. 그 사람의 명을 맹신하며, 맹종했다.

그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안겨줄 것처럼 소중히 여겼던 이.

<내 이아나.>

……그것이 나라는 건,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내 얘기에 모두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럴 만했으므로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다.

“언니!”

“이아나, 당신이 갈 필요는 없어요.”

리케도르안이 프란시아를 제지하며 제일 먼저 뜻을 알렸다. 이어 남은 이들이 줄지어 말했다.

“언니, 안 돼. 무슨 위험이 있을 줄 알고!”

“맞습니다. 이아나 양이 돌아갈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특히나 프란시아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마치 이 결혼 반댈세 외치는 얼굴로다가. 그녀는 리케도르안과 르나그를 번갈아 보았다.

“차라리 흑장미를 밖으로 불러내면 어때요? 누구든 그놈 초대해 봐요!”

두 사람 다 고위 귀족이다. 따라서 직위로 어떻게든 갈 수밖에 없는 자리를 만들라는 건데.

“일단, 전 어렵습니다. 제 작위가 그 사람보다 낮습니다.”

대답한 건 르나그였다.

“그리고 대공 각하께서는 작위가 거의 동등하시지만…….”

“철천지원수지.”

리케도르안이 받았다.

“초대하는 것이 이상하며 응하는 건 더욱더 이상한 사이. 라는 걸 여기 모두가 알 것 같군. 세상에 알릴 것이 아니라면 말이야.”

그리 말하는 리케도르안도 그리 편한 얼굴은 아니었다.

확실히 체이서를 밖으로 불러내는 방법도 있으나 빼낸다고 한들 도뮬릿 저택에 무슨 짓을 해놓았을지 모르며, 이들은 도뮬릿 내의 지리를 잘 모른다.

‘더구나 그 남잔 초대에 응하지도 않겠지.’

도뮬릿 저택에 들어가 체이서를 기절을 시키든 뭘 하든 무력화시키고 내가 가져오는 방법이 빨랐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피력했다.

“흑장미를 기절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나요?”

“기절…… 말입니까?”

“네.”

이미 우린 할 수 있는 방법 대부분을 썼다. 여기서 더 시도하는 것은 인적 낭비라는 걸 이들도 알고 있을 터였다.

무엇보다 나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 사람은 내게 무방비할 거예요.”

이 말을 하는 순간 세 사람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처음보다 조금 더 진득하거나 집요해진 시선이었다. 그리고 르나그가 천천히 끄덕였다.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나처럼 체이서를 아는 이가 수긍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여전히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아나 양이 그곳으로 갈 이유는 되진 않는 것 같습니다.”

재고해달라고, 청유 형태를 띤 그의 말은 완곡하지만 동시에 단호하게 거절을 말하고 있었다.

“이아나, 당신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줄 수 있지만…… 그건 안 돼요. 다시 생각해볼 수 없나요?”

리케도르안의 조심스러운 말에 프란시아가 얼른 끄덕이며 ‘맞아, 맞아!’ 하고 동조했다. 그들에게 미안하지만 사실 난 여기까지도 예상했다. 반발 말이다.

이들의 반응이 예상 이상으로 거세고 단호해서 놀라긴 했지만 한편으로 고마운 마음이었다. 이만큼 생각해준다는 거니까.

하나 그렇기에 나는 더욱 단호해졌다.

“그럼 이보다 더 좋은 해결방안이 있나요?”

있다면 물러나겠다. 세 사람은 침묵했다. 불편한 침묵인 줄 알면서 뾰족한 수는 내지 못할 것이다.

나 또한 무턱대고 가려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리케도르안의 수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내가 캄브라캄에 함께 가야 한다. 이를 잊지 않았다.

“걱정하지 말아요. 이대로 돌아오지 않으려 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젠 알지 않던가. 체이서가 내게 했던 모든 행동들이 잘못되었다는 걸. 그곳에서의 생활에 대한 생각은 차차 변하다 못해 재평가되었다.

“미리 말해둘게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들은 나를 유리돔 속의 장미로서 보고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다고 옳은 말 또한 아니다.

적어도 하고자 한 일에 내가 폐가 될 만큼 무능력하진 않다는 거다.

“나는 돌아와요.”

르나그를 응시하고, 프란시아를 바라보다, 마지막으로 리케도르안을 향했다.

“체이서를 기절시킬 방법을 찾아줘요.”

장미들은 체이서 못지않은 세력과 능력을 갖춘 이들. 찾아보면 방법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난 티아라가 놓여 있는 장소를 알고 있으니까.

“난 티아라를 가지고 돌아올 자신이 있어요.”

창고를 보호하는 마법들은 나를 위협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에 돌아갈 때, 혼자서는 멀리 도망치지 못할 거예요.”

체이서의 부하들은 예민하다. 주인의 성정을 닮아 기민하고 민첩했다. 체이서의 이상함을 예상보다 빠르게 눈치챈다면 탈출이 어려워질 것이다. 하지만 돌아갈 땐 홀로 움직일 필요는 없겠지. 나는 천천히 가슴에 손을 올렸다.

“그러니. 내가 빠져나온 뒤 전력을 다해서 데리고 가줘요.”

리케도르안을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당신에게 돌아갈 수 있게.”

나를 보던 푸른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다. 나는 눈을 휘었다.

“부탁해요, 들어줄 거죠?”

“…….”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으라고. 말해주었잖아요.”

그 말에 리케도르안의 얼굴이 차차 흐려졌다. 그는 얼굴을 살짝 물들이며 고개를 모로 돌려버렸다. 손등으로 입술을 가리면서.

“……치사합니다.”

“네, 나 치사해요.”

나는 씩 웃었다.

“감방에서도 보았다시피. 이기적이기도 하죠.”

장난스럽게 사족을 덧붙이며 시선을 옮겼다.

“들어줄 거죠?”

이번엔 르나그 차례였다. 이어서 프란시아에게도 말했다. 두 사람은 각기 곤란한 표정을 하거나 울상을 지었지만 끝내는 끄덕였다. 마치 불가항력이라는 듯이.

“제가 어찌 당신을 이기겠습니까.”

마침내 르나그가 쓴웃음과 함께 가슴에 손을 얹고 정중히 고개를 기울였다.

“모든 것은 당신의 뜻대로.”

3장. 황홀한 나락

작전의 핵심이 세워지자 나머지 계획을 세우는 것은 금방 이루어졌다. 이 작전의 핵심 요소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내가 직접 간다는 거였고, 다른 하나는…….

“이게 뭐라고요?”

“독입니다!”

독이었다.

“이 독으로 말할 것 같으면 말입니다. 무려 코끼리 300마리를 기절시킬 수 있는 위력을 자랑하지요.”

“흐음.”

“사용하실 때에는 손목이나 목. 혈관이 보이는 곳이면 어디든 괜찮습니다.”

체이서를 재우는, 혹은 기절시키는 것. 이 방법을 찾는데 총괄을 맡은 이는 놀랍게도 제이르였다. 가만히 설명을 듣던 나는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거 사람한테 써도 되는 거예요?”

“네? 당연히 보통 사람은 죽습니다.”

제이르가 눈꺼풀을 끔뻑였다. 무슨 소리냐는 표정이었다.

“사람한테 쓴다면서요?”

“장미가 어디 보통 사람입니까?”

제이르는 대마법사. 동시에 여러 방법에 통달한 이였다. 그렇기에 ‘기절 독’을 만드는 일도 능히 해냈다.

“아가씨, 장미는 인간의 몇 배에 해당하는 신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체적 힘,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나는 그렇지 않은 거지?’

그보다 신체 능력이 뛰어난 건 리케도르안만 그런 것 아니었나?

“물론 우리 각하께서는 장미 중에서도 특히, 뛰어난 신체를 가지셨지요. 능력 자체가 신체 관련된 일이니까요.”

그러니 리케도르안에겐 이 독마저 통하지 않을 것이라 했지만 체이서는 다르다나. 흑장미는 정신 계열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상대적으로 육체 공격에는 취약하다. 오랜 기록서에 적혀 있었단다.

“이 또한 오랫동안 붉은 장미와 흑장미가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적힌 기록이지만. 어쨌거나 저희에게 딱 필요한 정보가 아니겠습니까?”

제이르가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지요.”

이 말은 맞다. 나도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손에 쥐게 된 독을 내려다봤다. 자그마한 주사기였다.

“이걸 그대로 꽂으면 됩니다.”

제이르가 설명했다. 육체적 힘이 없는 나도 사용할 수 있는 거라며.

주사기.

과연, 내가 이걸 그 남자에게 잘 꽂아 넣을 수 있을까?

***

다시 며칠이 흘렀다. 준비는 빠르게 갖춰졌고, 내일 떠나기만 하면 되도록 완벽했다. 준비에 예상보다 며칠 이상 걸린 것도 이들이 돌아가며 내게 주의 사항을 알려주거나 얼토당토않은 호신술, -물론 호신술은 프란시아가 이야기했다.- 아무튼 이런 것들을 알려주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마지막 점검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늦은 저녁이 된 뒤였다.

홀로 방문 앞에 도달했을 때, 나는 문 앞에 서 있는 이를 보고 멈칫했다.

“리케도르안?”

그가 등을 기대고 있다 말고 상체를 바로 세웠다. 내가 걸어오고 있는 것을 알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본 채로. 살짝 어둑하긴 했으나 나를 보는 데는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어쩐 일이에요?”

이미 오늘 낮에도 그와 함께 있었다. 그가 한시도 내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찬찬히 바라보다 한 가지를 깨달았다. 아니, 예상했다고 보는 것이 옳으리라.

“혹시, 내 방 앞에서 밤새우려고 한 거예요?”

이미 그에겐 전적이 있다. 르나그 또한 그러려고 해서 뜯어말리느라 고생 좀 했었지? 하지만 리케도르안은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어쩐지 그는 미묘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내 눈치를 보는 것도 같았다.

왜 그러지?

“……이아나.”

보기 좋은 붉은 입술이 느릿하게 열렸다. 긴장 어린 음색이 흘러나온다.

“오늘 밤에…….”

그가 숨을 삼켰다.

“당신에게 장미를 새기고 싶어요.”

나는 움찔했다.

장미?

……그거?

순간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거의 폭풍이라 봐도 좋았다.

침묵 끝에 나는 눈을 들어 올렸다. 내게 당황한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뒤였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문을 열었다.

“흐응, 각오는 되었고요?”

“……각오요?”

“네. 누가 더 힘들지는 모르는 일이잖아요.”

문고리를 잡은 채로 고개를 돌린다. 그러고는 태연하게 한마디 했더니, 곧바로 화르르륵 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난 그런 모습을 보다 입술을 끌어올렸다.

“들어와요.”

채 불이 켜지 않은 방은 깜깜했다. 마치 아가리를 벌린 짐승의 머리 같다 생각했다.

‘어느 쪽이 짐승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나는 불을 켜지 않은 채 뚜벅뚜벅 걸어 곧장 침대로 향했다. 리케도르안의 걸음 소리가 멈췄다. 돌아보니 그는 내게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멈춰선 채였다.

“치, 침대로 바로 가요?”

이 무슨 수줍은 대사란 말인가. 나는 고개를 슬며시 기울였다. 본인이 유혹했으면서 말이지… 한참 떨어져 있는 그를 보며 설핏 미소 지었다.

“그럼 침대에서 하지, 어디서 하려고요?”

그리 말하고는 방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침대는 멀지만 쇼파는 가깝다.

“소파는 몸이 아프지 않을까요?”

“……네?”

푸른 달빛이 방을 비추고 있었다. 그렇기에 신체가 좋지 않은 나라도 아주 앞이 보이지는 않았다. 저, 활활 탈 것 같은 붉은 얼굴도 아주 잘 보였다는 거다. 특히나 그의 귀를 보자면, 흰 곳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붉었다. 하나 나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시선을 한곳으로 향했다.

눈에 들어온 것은 발코니였다.

“……그럼 혹시 설마 야외에서…….”

“아, 아니에요!”

리케도르안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언감생심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얼굴이다. 참으로 낮에 보여준 얼굴과는 달랐다. 르나그나 프란시아와 함께 있을 때는 세상 서리는 모두 모아둔 것 같은 서늘한 얼굴, 제이르와 있을 땐 유능한 대공의 얼굴.

나는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요, 나도 처음부터 바깥은 좀 그래.”

어느새 내게서는 감방에서처럼 편안한 어조가 흘러나왔다.

“서로 힘들 필요는 없잖아요.”

배려해주면 나야 좋지.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무릎을 굽혀 팔을 올리고는 턱까지 괴었다. 그러고는 빙글 웃었다.

그는 단 한 걸음도 옮기지 않은 채였다.

“어디에 새기고 싶은 거예요?”

“……어디에요?”

“네.”

체이서는 손목 안쪽에 새겼다. 그때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지만, 새기는 지점은 장미가 직점 정할 수 있는 걸까? 아니면 지정되어 있는 걸까.

“그거, 정할 수 있는 거예요?”

리케도르안이 얼굴에서 손을 떼어냈다. 내가 손짓하자 주춤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아직 침대와의 거리가 조금 있었다.

“……정할 수 있을 거예요.”

“어떻게요?”

“그…… 그러니까. 그.”

그가 우물쭈물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설마 행위 도중에 남기기라도 해야 하나?

“왜요, 도중에 새겨야 해요?”

다시 달아오른 얼굴로 보아 내가 정답을 말했음을 알았다. 난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목적어가 없이도 척척 이루어지는 대화에 대한 감탄도 함께.

“그렇구나. 그래서 생각한 부분은요?”

내가 한 번 더 묻자 리케도르안은 어찌할 줄 몰라 했다. 마치 내가 이를 물을 줄 몰랐다는 듯이.

“흐응, 말하기 싫어요? 묻지 말까요?”

“……그게 아니라…….”

“그럼요?”

달빛에 물든 흰 얼굴이 하얀 부분 없이 붉었다. 이리저리 굴러가며 난감해하는 시선이 싫지 않았다. 내 손가락이 툭툭 침대 보를 두드렸다.

그가 고개를 슬쩍 들었다. 머리카락이 한들한들 흔들린다. 발긋 달아오른 눈 밑이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그런 사람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순진한 사람 희롱하는 몹쓸 인간이 된 기분이 들었다. 이 또한 싫지 않으니 문제였다.

“없으면, 그만…….”

“있어요!”

리케도르안이 목소리를 살짝 높였다. 당황한 낯이었다. 흠, 없으면 그만 곁에 오라는 뜻이었는데.

“그, 그만둘 생각 없어요.”

그는 오해한 듯 고개를 마구 저었다. 그러더니 성큼 더 걸어왔다. 이제는 거리는 채 세 걸음도 되지 않았다. 슬며시 긴장되는 한편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보통 이때쯤 되면 다른 인격이 나오던데.’

오늘은 이성이 있는 상태 붉어진 얼굴 그대로 오래간다 싶었다. 싫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나는 오래전 감방에서도 그가 이성이 있는 쪽을 좋아했다.

멍멍이가 된 버전도, 이성이 날아가고 본능만 남은 버전도, 각각이 귀엽고 치명적이었지만……. 이쪽의 모습이 온전한 그의 모습이란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이요.”

“네?”

잠깐 생각에 잠겨 듣지 못했다. 그의 손가락이 잠시 움츠러들었다가 펴진다.

“손목이요.”

그는 더는 떨지 않았다. 그리고 말을 더듬지도 않았다. 내 시선이 천천히 시선이 올라간다. 청초하게 드러난 목과 조각같이 수려한 얼굴이 차례로 시선 속에 담겼다.

나는 손을 뻗었다. 이것이 내 대답이었다.

“새기세요.”

그의 손에 닿기엔 거리가 모자랐다. 그가 깨닫고 한 걸음 더 걸어왔다. 이마저 용기가 필요했던 듯 그가 작게 숨을 내쉬면서. 파르라니 떠는 손끝이 나를 붙잡았다. 체온이 끓을 듯 뜨겁다. 그의 온기가 절로 무심하던 심장을 두드리는 기분이었다.

왜, 당신은 늘 다른 계절 같은 이 온도로 나를 흔들어 놓는 걸까. 줄곧 가슴을 채운 의문이 머릿속을 물들였다.

“당신 입까지 맞춰놓고서, 왜 이리 떠는 거예요.”

“……다르니까요. 모두 전적으로 당신의 동의가 필요하지만.”

그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아니, 차분해지려 애를 쓰는 것 같은 음성이었다.

“이건…… 특히나 더 필요하니까.”

내게 손을 까딱이는 것을 보았는지 그가 두 걸음 더 다가왔다. 손끝이 빈틈없이 맞닿았다. 그가 상체를 숙였다.

“근데 왜 손목이에요?”

나는 침대를 잡아 지탱한 팔을 스윽 쓸어내렸다. 걷어올린 셔츠 위, 도드라진 근육을 하나하나 핥듯이 느끼면서. 내 손목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러나 어찌할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쥐면 부러질까 싶은 조심스러운 낯이었으니.

‘이렇게 잡지 않아도 되는데.’

리케도르안이 숨을 내쉬었다. 뜨거웠다.

“……그 남자가 새긴 곳이니까요.”

리케도르안의 시선이 손목 안쪽을 훑었다. 농밀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탓일까, 아니면 내 눈에 뭐가 씐 건지. 그의 조심스러운 모든 행위가 오히려 야릇하게 느껴지며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흑장미요? 읏.”

“네. ……아파요?”

“아뇨.”

당신 표정이 자극적이어서다. 나는 붉어진 얼굴을 지적하는 대신 고개를 저었다.

“……그건 지울 수 없는 거라고 하던데.”

이미 나도 알아본 바 있었다. 하지만 장미의 문신이란 건 한번 새기면 지울 수가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러니까, 제가 덧씌우고 싶어요.”

“새겨도 될까요, 이아나?”

경건하게 묻는 시선에 달뜬 숨이 묻어나왔다. 그는 뭔가를 억눌러 참는 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설마 그가 인격이 바뀌려는 것을 눌러 참고 있는 것일까 싶었다.

그것이 참을 수 있는 것이냐는 둘째치고 왠지 그럴 것이라는 감이 강하게 들었다. 그만큼 필사적인 표정이었다. 이어서 그가 흘린 말은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려주었다.

“……이런 것마저, 본능에 흐. 맡겨선 안 되니까.”

“리케도르안.”

내가 다른 손으로 그의 손을 잡고 잡아당겼다. 열이 높아 보여 나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그는 순순히 내게 이끌려왔다. 몸을 일으켜 그대로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는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억지로 변화를 눌러 몸을 가눌 수 없는 듯했다. 힘겨워 보였다.

“나는, 하아, 이아나. 당신에게 항상 미안해서…….”

“뭐가 미안해요.”

“너무 많은 것을 받은 것 같은데. 흐, 준 것이 없는 것 같아요.”

한 번도 그리 느낀 적 없건만 나에게 부채감을 느끼고 있던 걸까. 그가 고개를 더욱 숙여 얼굴을 비비적 문질렀다. 정신을 차리려는 행동 같았다. 의도치 않게도 흐트러진 옷자락 사이, 내 가슴골에 얼굴을 묻은 셈이었다. 가슴으로 뜨거운 숨이 느껴졌지만 그는 아직 느끼지 못한 듯했다. 나는 배 속에 뭉근히 뭉치는 열기를 모른 척했다.

“……내 고집에, 당신이 억지로 받아준 것일까 봐.”

“…왜 그렇게 생각해요.”

이어서 발끝을 타고 오르는 야릇한 욕구를 참는 대신 그의 머리를 쓸어내린다. 부드러운 머리칼은 땀에 살짝 젖어 있었다.

“시선 들어봐요.”

그가 마찬가지로 젖은 시선을 들어 올렸다.

“내가 억지로 뭔갈 할 사람이에요?”

내 삶은 물 흐르듯이 몸을 내맡기긴 해도 싫은 것을 억지로 하는 삶은 아니었다.

물론 여기에 일찌감치 포기하고 타협한 것이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난 안 그래요. 그리고 앞으로도 안 그러려고요.”

내 손가락이 그의 뺨을 맴돌다가 그의 입술을 만졌다. 닿기 무섭게 그의 입술이 저절로 벌어졌다. 그의 치열을 톡 두드렸다. 그러고는 살짝 미소했다. 점차 고조되는 분위기 속 더는 신변잡기도, 농을 할 상황도 아니었다.

“길게 끌려던 건 아니었는데. 사실 내 몸에는 이미 붉은 장미가 새겨져 있어요.”

그 말에 그가 몸을 움찔했다. 시선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어디, 에요? 왜?”

“잊었어요? 난 붉은 장미 수호신이 있잖아요.”

리케도르안은 명민한 머리로 상황을 알아차린 듯했다. 그가 입술을 꾹 물었다.

“어디에요?”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곧 대답했다.

“허벅지. 허벅지 안쪽에요.”

“내 수호신이 거기에.”

“맞아.”

“……봐도 돼요?”

“그야 물론…… 네?”

리케도르안이 내 가슴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가 분명 이쪽으로 쓰러지긴 했는데…… 헐떡임이 가라앉고 나니 자세가 어째 묘했다. 그저 그의 표정이 바뀐 것만으로 아련하고 섧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쪽으로 변했으니까.

“안 돼.”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내일은 작전일이다. 나는 작전일 전에 거사를 치를 만한…… 체력이 되지 않았다. 솔직하게 인정했다. 젠장. 다 차린 밥상을 외면하는 꼴이지만! 나는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마음을 다잡기 위함이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셔츠에서는 손을 떼지 못했다. 욕구가 만들어낸 미련이었다. 평소 무심한 편인 내게 이런 욕구가 들 줄은 나조차 알지 못했다. 이건 다 눈앞의 남자가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정확히는 달뜬 숨을 내쉬는 이 절경이.

“……안 돼요?”

고개를 기울이는 그를 보지 않으려 했다. 안 돼. 네가 그러는 순간 수위가 올라가요. 리케도르안의 표정이 차차 변했다. 꾹 눌러 참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하아, 그럼…….”

리케도르안이 내 손목을 잡지 않은 손으로 제 입술을 스윽 문질렀다. 그는 고개를 모로 기울인 채로 눈을 살살 휘었다.

인격이 바뀐 모습이었다.

“어떡하지?”

그는 나를 내려다보며 무언가를 안다는 듯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작정하고 사람을 홀리는 듯한 미소였다. 그의 한 손이 천천히 자신의 단추를 풀어내렸다. 하얀 셔츠 사이로 툭 불거진 가슴 근골을 본 순간 나는 숨을 삼켰다. 시선이 훑듯 아래로 흘러내리다가 허벅지 쪽에 확연히 튀어나온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모를 수 없었다. 그는 제 분신을 숨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옷 위로 만져 봐도 돼?”

야릇함을 뚝뚝 떨어트리며 해사하게 웃음을 흘리는 모습을 보니 금방이라도 너 여기 좀 누워봐라, 외치고 싶었지만.

동시에 위험한 짐승 같은 분위기에 농락되어선 안 될 일이었다.

‘……어째, 여기서도 안 된다고 하면 당장 이불을 들출 것 같은 느낌이네.’

나는 슬며시 웃음을 머금으며 몸을 살짝 뒤로 뺐다.

“그건 좀……. 아니, 그래.”

“아니?”

“해요.”

그러다 말고 변덕을 부려 돌연 떨어진 허락에, 리케도르안에게로 놀란 얼굴이 스쳤다. 그러나 그는 참지 않았다.

“어느 쪽이에요?”

“……오른쪽.”

리케도르안의 커다란 손이 허벅지를 붙잡았다. 꾹 누르는 손이 생경한 한편 등줄기가 절로 펴졌다. 리케도르안이 느릿하게 고개를 내렸다. 바로 허벅지를 들출 줄 알았더니, 그는 발등에서부터 잡아 천천히 숨을 흘려 올라왔다. 숨결로 입을 맞추듯이.

“리케도르안?”

얇은 옷 너머로 뜨거운 체온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젖힌다. 목줄기가 파르르 떨렸다. 이대로 확 벗어던지고픈 충동이 일 정도로.

“왜, 허벅지 안쪽이에요?”

그가 허벅지 안쪽 어느 곳에다 입술을 묻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살짝 불만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당장 보지 못하지 않느냐 하는.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오빠랑 살면서 들키지 않은 거야.”

체이서가 알았다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을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반응은 뚱했다. 입술을 묻은 채 들어 올린 그의 눈에 여러 복합적인 것이 지나갔다.

“오빠라, 부르지 말아요.”

“……그럼 체이서?”

이름을 부르란 소린가? 나는 그에게 다리를 내준 채로 눈을 깜빡였다. 부르지 말라고? 하나 리케도르안이 홱 상체를 들었다. 금방 그의 몸에 갇힌 형국이었다.

“그렇게도 부르지 말아요.”

리케도르안이 고개를 휙 틀어 내 목으로 향했다. 깨물 듯이 물긴했으나 축축하게 적실뿐 이를 세우지 않았다. 그쪽이 더 간지럽다 못해 내밀하게 자극했다. 침대보가 마구 구겨진다.

“흣……. 흔적은…….”

“안 남겨요.”

촉. 목으로 잔 키스가 이어졌다. 허리를 껴안은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온다. 나는 막지 않았다. 대신 이 손을 끌어다가 자연스레 내 가슴 위로 올려놓았다. 그는 잠시 놀란 얼굴을 하더니, 이내 눈을 녹진하게 휘며 야릇하게 미소했다.

“나는, 우리 이아나가 말하는 건, 하나도 어기지 않아요. 착한 장미니까. 그 남자는 아예 안 부르면 안 돼요?”

장난스러운 어조가 귀로 흘러들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의 손이 살살 가슴을 문질렀기 때문이었다. 능숙한 손길은 아니었으나 날 것에 가까운 움직임에 내 입에서 더운 숨이 터졌다.

“사랑스러운 이아나.”

쪽.

“응?”

쪽.

……미치겠네. 진짜.

결국 내가 백기를 들고서야 그는 몸에 쏟아내는 키스를 멈췄다. 어느새 가슴의 리본은 죄 풀리고 윗가슴이 훤히 보였다. 가슴 위로 보이는 축축한 흔적에 침이 고였다. 나는 목을 붙잡고 날숨을 내쉬었다. 리케도르안은 반쯤 붉어진 얼굴로 나를 보며 내 손을 살짝 부여잡았다. 그러고는 제 뺨을 내 손바닥에 비볐다. 맞닿은 허벅지에서 툭 불거지고 부풀어진 부피감이 느껴졌다. 모른 척하기도 어려운 존재감이었다. 그가 남은 제 단추를 모조리 찢어 풀어헤쳤다.

그러고는 내 손을 잡아 천천히 제 허벅지 위로 내렸다.

칭찬해달라는 듯이.

무엇을 칭찬해달라는 걸까. 답은 어렵지 않았다. 손에 느껴지는 묵직한 부피감. 그는 겹쳐 잡은 내 손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하아, 그에게서 밭은 숨이 흘러나온다. 나는 입술을 축이며 직접 손을 움직여 보였다.

“흐으, 이아…나…….”

옷 위로 접촉하는 마찰이 커진다. 내 숨도 덩달아 가빠졌다. 내 아래에서 붉어진 얼굴, 달뜬 눈가, 아찔하도록 야릇한 시선, 거기다 혀로 내 다른 손 손가락을 핥는 입까지. 숨이 꿀꺽 넘어간다. 허벅지 위로 느껴지는 부피가 더욱 커지고 천이 슬쩍 젖은 것이 느껴졌다.

“하아…….”

리케도르안은 내 다른 손을 잡고 손목 안쪽에 길게 입을 맞췄다. 그뿐이라 생각한 순간 아릿한 자극이 손목을 파고들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입술을 떼어낸 곳에는 살짝 붉어진 순흔이 남아 있었다. 곧 사라질 연한 자국이었으나 그는 만족스러운 듯했다. 리케도르안의 눈이 청초하게 휘었다.

“이러면, 흑장미가 떠도 붉게 보이겠다, 그렇죠?”

그러나 잘했느냐는 듯 맹목적인 시선으로 날 품으면서. 나는 웃고 말았다.

“키스해도 돼요?”

“네. 허락받지 않아도 돼요.”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입술이 나를 덮쳤다. 조심스러운 입술이었으나 사납게 변하기까지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나는 그의 목에 팔을 휘감고 괜찮다는 듯 토닥토닥 두드렸다. 마치 고삐를 쥐듯이. 그의 뒷머리를 살살 쓸어내리면서.

툭. 바닥으로 그의 셔츠가 떨어졌다. 완전히 맨몸이 된 그는 내가 덮고 있던 이불도 그대로 벗겨 던져버렸다.

그가 옅은 숨을 내쉬었다.

눈을 뜨면 갈급함이 가득 담긴 시선이 활활 타는 열기를 함께 품고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내가 눈을 살짝 휘자 그가 나를 덮쳤다. 워낙 큰 몸이라 덮었다는 말이 걸맞았다.

나는 그대로 침대에 누운 채 리케도르안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오로지 입술에 집중하고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은빛 속눈썹이 못내 청초하고도 아슬아슬함을 자아냈다. 붉어진 두 뺨이나 눈 밑은 어떠한가.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내 이성의 끈도 타닥타닥 타오르다 못해 끊어질 것만 같았다. 정신 차려야지, 하면서도 정신이 곧 흐려졌다. 정확히는 시야가 흐려진다.

잔뜩 흐려진 사이에 그가 바지의 단추를 풀어내는 걸 본 것 같았다. 나는 말리지 못했다.

“흣, 으……. 리케도르, 으읏.”

그렇게 많이는 한 것 같지 않은데. 리케도르안의 것은 내가 느끼는 부분을 정확하게 알고 문질렀다.

더군다나 내가 최소한으로 숨 쉴 틈만 주며 나를 몰아붙였다. 어찌 보면 첫 키스 하는 사춘기 소년처럼 서툴렀으나 어찌저찌 완급을 조절하는 모습은 노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덕분에 입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따라가느라 벅찰 지경이었다.

날 잡아먹겠네. 잡아먹겠어.

가까스로 눈을 떴다. 리케도르안은 반쯤 내리뜨고 내 입술에서 입을 떼어내지 않은 채로 손을 분주하게 움직였다. 나는 얇은 원피스형 속옷만 걸치고 있었다. 옆구리에 묶인 리본이 하나씩 풀려난다. 6개가 달려 있으나, 그중 3개가 풀려 있다.

지난 경우에서와 다르게 현재 입고 있는 옷은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모든 리본이 풀리면 그대로 옷이 벗겨진다는 얘기였다.

사라락.

남은 리본은 2개.

리케도르안이 돌연 리본 푸는 것을 멈추고 얇은 천 위로 가슴을 만졌다. 그러다 봉긋 솟아오른 정점을 건드렸다.

“으응, 리케, 흣. 아!”

어째, 대공님은 이성이 돌아오지 않은 것 같다. 아니, 돌아올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 침대에 눕혀진 사정과 더불어 키스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인 탓에 치마는 무릎까지 말려 올라간 뒤였다. 몸을 가릴 이불조차 이미 바닥으로 떨어진 지 오래였다.

리케도르안의 손이 내 무릎을 더듬다가 허벅지 옆쪽을 스쳤다. 오싹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싸늘한 공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스쳐 지나간 손길이 몹시도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던 탓이다.

하나 부드러운 손길과 다르게 그의 손은 다부진 검사의 손이었다. 오래 검을 쥔 손은 딱딱하고 거칠었고, 올록볼록한 굳은살이 스칠 때면 야릇한 자극을 자아냈다.

굳은살은 장미의 능력으로도 사라지지 않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곧 사라졌다. 어쩌면 이건 장미의 능력으로도 어찌할 수 없었던 리케도르안의 부단한 노력의 산물이었을지도 모른단 생각도 함께.

그가 한 번씩 움직일 때마다 탁탁, 허벅지로 치는 감각 또한 무척이나 거슬렸다. 느껴지는 이 부피감이 금방이라도 나를 잡아먹을 것 같았으니까.

“읏…….”

그보다 저건 언제까지 부피감을 늘릴까? 내 시선이 느껴진 것인지, 그가 빙긋 웃었다. 나른한 웃음이었다. 그러더니 바지 사이에서 제 분신을 꺼냈다. 나는 흥분에 사로잡힌 와중에도 아연함에 사로잡혔다. 탁, 탁탁. 리케도르안이 제 것을 붙잡고 살짝 흔들었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자, 우리의 손이 겹쳤다.

“예뻐해줘요, 이아나.”

정확하게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농밀하게 입을 맞추면서도 농밀해지지 못하는 손이 깔짝깔짝, 입구만 건드리는 느낌이었다. 마치 내 갈급함이 차오르도록 재촉이라도 하듯이.

마침내 입술이 떨어졌다.

“하아, 하아…….”

그러나 숨을 가쁘게 쉬는 건 한 사람뿐이었다.

나는 미간을 좁히며 리케도르안을 응시했다. 그는 내 시선에 움찔하면서도 눈을 배시시 휘었다. 그러고는 제 하반신을 느릿하게 밀듯이 내게 붙여왔다. 여전히 우리 손은 겹친 채로 그의 분신 위에 있었다. 찌걱찌걱, 노골적인 소리와 그의 단 숨이 귓바퀴를 적신다.

“이아나.”

낮지만 솜사탕처럼 달콤한 음성이 나를 부르는 순간, 설탕으로 푹 절인 과일을 입에 문 것만 같았다.

“조금 전에, 장미를 보는 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리케도르안이 고개를 숙였다. 그대로 코끝이 톡 부딪쳤다.

“당신 허벅지에 있을 내 장미. 보는 것이 안 되면, 만지는 건?”

“으응, 네?”

이미 거의 벗겨놓다시피 해놓고? 하지만 달뜬 숨에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와 겹쳐 잡은 손은 이미 미끌미끌했다.

“만지는 건, 해도 되나요?”

리케도르안의 손가락이 접힌 무릎 위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허락을 묻는 음성은 정중하고 담백했으며 달큰하게 느껴졌다.

여기서 이질감을 느꼈다. 아니, 잔뜩 키스하고 흐트러진 상태에서 정중하고 또박또박 묻는다니, 이건 도리어 그의 이성이 돌아올 길 없이 아주 날아갔다는 소리와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집요하리만치 꽂히는 시선이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 열기가 활활 오르는 것 같았다.

문제는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단 거다. 열기가 뇌까지 적시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목을 살살 쓰다듬다가, 이내 콱. 그의 머리카락을 부여잡았다. 그러고는 그를 밀어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 상태로 날숨이 겹친다. 나는 가까워진 얼굴을 앞두고 씩 웃었다.

“되겠어?”

참자, 내일은 거사 날이다. 참아야 한다.

남은 리본은 한 개. 내 옷은 아슬아슬하게 지탱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손을 천천히 허벅지에서 떼어냈다. 그러나 떼어내기 무섭게 리케도르안의 단단한 팔이 허리에 감겼다. 휙 감기는 굵기에 헉 소리가 나왔다. 우리의 자세가 바뀌었다.

“리케도르안.”

“네.”

그가 기쁘다는 듯 순종적인 얼굴로 방싯 웃었다. 하나 그의 몸은 전혀 순진하지도 순종적이지도 않았다. 나는 허벅지 사이로 느껴지는 감각에 잠시 당황했다. 조금 전 손으로 느꼈던 굵기를 가늠해본다. 축축한 손은 그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만약 저게 내 안으로 들어오기라도 한다면?

열기가 몽글몽글하다 못해 이제 지글지글 배 속을 잠식한 것 같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크기가…… 저게 들어가긴 해? 뭐. 후. 아니다. 착한 생각. 착한 생각. 고개 숙이지 말자, 보지 말자……. 이제 와 착한 생각을 외친들 소용이야 있겠냐마는 안 하는 것보다야 나았다.

“저, 나는 내일 멀쩡히 걸어서 가고 싶거든?”

“네. 이아나.”

그가 천진하게 답했다. 그러나 목소리에 고인 열기는 전혀 천진하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그의 손가락이 톡, 남은 리본을 두드렸다. 나는 그의 손가락을 잡고 내렸다.

“하아, 솔직하게 말할게.”

나는 그의 뺨의 손을 얹고 살짝 쓸어내렸다.

“나도 끌리지 않는 건 아니야.”

이건 사실이었다.

이렇게 잘 빠지다 못해 사람을 홀리는 남자를 앞두고 어찌 이성을 유지할까. 보통 때라면 눈 딱 감고 넘어갔을 터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 있었다. 내일 있을 거사가 더 크지 않겠나.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데!

나는 낮게 숨을 내쉬었다.

“이끌린단 말이에요. 하지만 더 중요한 게 있잖아요.”

나는 고개를 들어 올리고 진지하게 눈을 맞췄다. 장난스러움은 쏙 뺀 채로.

“그리고 더 솔직하게요.”

이건 꼭 말해야겠다. 이 말을 하기 위해 아래를 보았다. 그리고 그의 하반신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끄덕였다. 미쳤군. 어쩐지 손에 안 잡힌다 했어.

저절로 숨이 넘어가더라.

“이거 들어갔다가 나오면, 나 못 걸어요. 못 걸어.”

응. 진짜 못 걸어. 장담 못해. 나는 한없이 진지했다.

노크도 안 될 것 같은 크기였다. 지금도 한번만 보고 눈을 두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맙소사. ……짐승 같은 신체를 가지고 있다더니. 그게 설마 이중적 의미였다니!

“그러니까 안 돼.”

이 정도면 리케도르안도 충분히 알아차렸으리라 생각했다.

이성을 잃은 인격 쪽은 평소보다 날것에 가깝고 멋대로 하는 성향이 있긴 했으나, 내 의지에 반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러니,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의 상체에서 떨어지던 손이 붙잡혔다. 리케도르안은 내 손을 가져와 뺨과 입술에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느릿하게 눈을 떴다.

내 둥근 어깨를 만지는 손길이 농밀했다. 나는 흘러내리는 손을 잡지 않았다. 몹시도 야릇한 탓도 있지만 기분 좋은 손길이었기에. 그가 드러날 듯 말 듯한 하얀 가슴 위를 쓸어내렸다. 낯선 손길이 닿는 말랑한 살결이, 감각이 그의 손을 마구 반기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가 고개를 내려 내 가슴을 한 움큼 베어 물었다. 살살 정점을 달래는 행위에 내 다리가 절로 조여들고 발이 곱아들었다.

“흐으, 응, 아!”

그가 허공에서 갈피를 잃고 배회하는 내 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 리케도르안은 입술을 떼어내며 그대로 아래로 내려가 내 가슴 위에 입술을 묻었다. 아슬아슬하게 덮인 천 위로 커다란 손이 반대 가슴을 조심스럽게 쥐었다가 놓았다. 천 위로 정점이 스쳤을 때 나는 움찔했다.

촉촉, 입술 길을 남기며 내려간 리케도르안이 내 하반신에 머리를 묻었다. 이제 옷은 기능을 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배와 가슴만을 덮고 있었다. 제대로 말리지 못한 사이 리케도르안은 제대로 자리를 잡았고, 순식간에 이마와 목이 땀으로 가득 젖었다. 리케도르안의 어깨를 무의식중에 밀었다가 도리어 단단함에 제지당하는 기분이었다.

리케도르안이 다리 사이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무언가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손등으로 훔치며 다가왔다. 깍지를 낀 손이 나를 잡은 그대로 아래로 내려갔다.

“리, 하아…… 리케도르안.”

“네.”

눈꼬리가 예쁘게 휘어졌다. 땀에 젖은 머리칼이 몹시도 색정적이었다.

“더는 안 돼요…….”

“응.”

“그러니까, 흣?”

리케도르안의 손에 잡혀 다시 한번 만진 분신은 몹시도 단단했다. 부드럽지만 철심처럼 단단한 것. 양손으로 잡아도 크기가 남았다. 아래가 축축하게 젖어 드는 것 같다.

나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내 반응을 알기라도 한 듯 리케도르안은 수줍지만 즐거운 빛을 띤 얼굴로 내게 작게 속삭였다.

“이아나, 세상엔 들어갔다 나오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게 아주 많아요.”

……네?

나는 눈을 크게 깜빡였다.

잠깐만, 잠깐. 당신 그걸 어떻게 아는 건데?

“리케도르안?”

“네, 이아나.”

리케도르안의 눈 밑이 붉었다. 그는 그런 낯으로 해사하게 미소했다.

“잠, 흣, 잠깐, 으응.”

목에 사정없이 입술이 쏟아졌다. 나는 얼른 손을 가져와 그의 입술을 양손으로 막았다. 대화를 해, 이 사람아! 그런 의미로 입을 막았지만, 그는 내 손을 잡아 손바닥에 촉촉 입을 맞춘다. 이로도 모자라 눈을 휙 휘었다.

시선에서는 나른한 유혹을 뚝뚝 떨어트리며.

“넣지만 않으면 되는 거죠?”

아니, 무슨 해석이, 초월 해석이야!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사람을 바보로 아는 것도 아니고, 이런 말주변 잡기에 넘어갈 리가…….

“안 돼요.”

고개를 든 순간 나는 그대로 멈칫했다.

리케도르안이 울먹이고 있었다. 그것도 잔뜩 붉어진 얼굴로. 언제 고인 것인지 모를 눈물이 금방이라도 뚝 떨어질 것 같았다.

“정말…….”

“…….”

“……안 돼요?”

뚝. 떨어지는 눈물에 깨달았다.

“……정말로요?”

……망했다.

그가 내 목에 머리를 묻고 이마를 비볐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에게서 떨어져, 쇄골로 흘러내린 눈물이 가슴골로 흘러 들어간다. 이 무슨 신종 야릇한 자극인가 싶었다.

“제발, 이아나.”

리케도르안의 음성은 살짝 쉬어 있었다.

“나, 미칠 것 같아요…….”

뚝. 떨어진 것만은 눈물만이 아니라…….

아니, 이건 눈물이 떨어지는 소리뿐만 아니라 이성의 끈이 떨어지는 소리도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깨달아서 문제였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건 반칙이야! 속으로 외치면서.

“그럼, 입술만.”

“입술만요? 정말?”

“…….”

그러나 더는 생각에 잠길 겨를 없이 붉은 입술이 갈급하게 나를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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