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58/87)

***

“그대가 무슨 상관인지?”

장소를 옮겨봐야 황성 내였지만 더는 관찰하는 시선이 없는 점에서 만족스러웠다. 다행스럽도 리케도르안 또한 이동하는 도중에 이성을 되찾아 현재는 평상시의 모습이었다.

다만, 의상은 이미 엉망이라 잡아 뜯은 크라바트는 어찌할 수 없어 단추만 꿰어 입은 상태였다. 이외에도 터져버린 단추는 주워 담지 못해 윗단추 몇 개가 실종된 상태였다. 금욕적인 얼굴로 저리 흐트러진 모습이라니…… 좀 자극적이긴 했다.

음, 착한 생각. 착한 생각.

이제 더는 착한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되지 않나 싶었지만. 일단 그 생각은 뒤로 미뤄두기로 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리케도르안과 르나그는 제2차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자자, 그만들 해요.”

나는 그들을 보다 못해 일단 리케도르안을 제지하고 르나그에게 차근차근 설명했다. 어찌 이 상황에 도달하게 되었는지. 내가 리케도르안에게 머물기로 결심한 까닭과 사정을 모두. 거기에 황제를 알현한 뒤, 황제의 조건으로 받은 티아라에 관한 이야기까지 모두.

이는 물론 리케도르안이 시한부라는 중대한 정보를 포함했다.

적어도 이 남자에게는 뭐든 털어놓아도 된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리케도르안에게는 아닐 수도 있었기에 이야기하기 직전 리케도르안을 보았지만, 그는 괜찮다는 듯이 서늘한 낯을 풀며 끄덕여주었다.

“……사정은 알겠습니다. 모두 이해했습니다.”

“와. 한 번에 이해했다고? 후작님은 더럽게 똑똑하시네요.”

“비꼬는 겁니까?”

“내가 언제요?”

르나그에게 설명하던 도중에 손님이 난입하는 해프닝이 있기도 했다. 물론 그 손님은 바로 프란시아였다. 어쨌거나 이런저런 해프닝 끝에 나는 모든 사정을 설명하는 데 성공했다.

“비꼰 게 맞지 않습니까.”

“아니? 왜 비꼬아요? 내가 언니 약혼자였으면 눈 뒤집힐 것 같은데. 당신은 놀랍도록 차분하게 말하니까 신기하단 건데?”

“프란시아.”

정말 약혼자가, 르나그가 눈 뒤집고 날뛰면 제일 곤란해지는 건 나거든? 이런 의미를 담아서 보았더니 프란시아가 생긋 웃더니 내 팔에 매달렸다.

르나그는 인상을 찡그렸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뭐. 틀린 말은 아니로군요. 허락만 하신다면 모두 뒤집어엎고 싶은 기분이니.”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날카로운 얼굴이었다.

“대공, 결국 당신이 한 짓은 저열한 납치에 불과하지 않나?”

르나그가 조용히 읊조렸다. 목소리만 작았다뿐이지 분노를 꾹꾹 눌러 담은 음성이었다.

리케도르안 또한 서늘한 낯을 풀 줄 몰랐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놓았다. 주먹을 쥐면서. 그의 눈으로 죄스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하나 적어도 난 리케도르안이 어떤 얼굴로 용서를 빌었는지 알고 있었다.

“음, 르나그.”

그렇기에 차분히 르나그를 불렀다.

“일단 그건 넘어가 주지 않을래요?”

용서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이는 나를 위해 분노해준 르나그에게 못할 일이었으니. 그러나 그럼에도 르나그의 얼굴이 잠시 흐려졌다. 리케도르안이 눈물을 툭툭 떨어트리며 운다면 르나그는 긴 눈물 줄기를 조용히 흘려내는 쪽이었다.

나는 이미 그 모습을 보고 알았기에 그가 울지 않길 바랐다.

“……당신이 원하신다면.”

“고마워요.”

그는 천천히 평온한 낯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속까지 괜찮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말했듯 나는 내 의지로 헤르님 성에 남기로 했어요. 그리고 대공 각하의 저주를 푸는 데 일조할 생각이에요.”

“좋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르나그가 한숨과 함께 뱉었다.

“저기 있는 성녀를 탈출시키던 날에 당신은 끝내 함께 가자던 제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으셨지요.”

가만히 지켜보던 프란시아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저는 그날의 당신보다 지금의 모습이 더 좋아 보입니다. 이아나 양. 당신이 편안히 웃는 것 만으로. ……그걸로 만족합니다.”

르나그가 보일 듯 말 듯 입술을 끌어올렸다. 그러다 눈을 가늘게 좁혔다.

“다만, 저쪽을 전적으로 돕는 것이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나 묻지. 후작.”

침묵하던 리케도르안이 팔짱을 천천히 풀었다. 이성이 돌아온 리케도르안은 말투도 원래의 대공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대는 이아나가 푸른 장미임을 알고 있었나?”

“네. 알고 있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르나그의 얼굴을 향했다. 그에게서 생각보다 담백한 답이 흘러나온 탓이다.

“그렇다면 나야말로 묻고 싶군. 오랜 시간 전에 알았다면 내가 하고픈 질문도 알 것 같은데.”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건지 알겠습니다만은.”

르나그는 부드럽지만 강한 어조로 말을 가로챘다. 이어 눈을 아래로 내렸다.

“그것이 무슨 문제입니까?”

날카로운 얼굴에서 나온 말은 온화했으나 동시에 단호했다.

“그저, 제가 좋아한 사람이 푸른 장미였을 따름입니다.”

보는 이로 하여금 말을 잃게하는 절절한 표정이기도 했다.

“그리고 대공을 돕기 위해 이곳에 계신 거라면, 제가 물러날 이유도 없겠지요.”

“내가 쫓아낼 거란 생각은 하지 않나?”

“순순히 쫓겨날 것 같습니까?”

리케도르안이 싸늘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팽팽한 시선의 줄다리기를 보노라면 옆에서 프란시아가 콕콕 찔렀다.

“언니, 언니.”

프란시아는 어느새 손에 과자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방에 들어올 즈음 황실 시종이 가져다 준 다과다.

“세상에, 진국이다. 그렇지? 요즘 보기 드문 젊은이야.”

“……말투가 왜 그래?”

“아니. 그렇잖아. 남자는 지고지순. 순종. 복종! 아닌가?”

“앞에 하나는 그렇다 쳐도 뒤에 두 개는 뭐니.”

하필이면 프란시아 손에 있는 과자가 하얀색이라 그럴까. 모양도 그렇고 언뜻 팝콘처럼도 보였다. 프란시아가 팝콘, 아니 하얀 과자를 든 채 씩 웃었다. 프란시아의 팔이 내 옆구리를 꾹 찔렀다.

“아니이. 그러니까. 굳이 하나만 가질 필요 있냐는 거지.”

“뭐?”

“둘 다 가져 그냥.”

나는 대치하는 두 남자도 잊고 눈을 깜빡였다.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지! 어차피, 장미들은 언니를 두고 다툴 수밖에 없어.”

와삭. 그녀는 하얀 과자를 입에 가져다 대며 유쾌하게 베어 물었다. 하얀 장미의 흰 손에서 하얀 과자가 잘게 부서졌다.

“경배든. 경애든. 존경이든. 사랑이든. 그리고…… 질시와 집착이든. 모두 상대를 좋아하고 차지하고 싶은 욕구를 수반하는 거지.”

나는 두 남자가 검이라도 빼어들까 싶어 시선을 저쪽에도 관심을 잃지 않으며 욕구? 하고 반문했다.

“그래. 욕구. 욕구란 게 별것 있겠어? 옆에 있어 줬으면 하는 거. 그런 순수한 마음. 그러다 음습하게 물들면 집착 따위가 되는 거고.”

이 욕구를 상대에게 강요하는 것이 문제이나, 욕구 그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란다. 나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웃고 있지만 차분히 말하는 그녀는 확실히 성숙해 보였다.

“언니, 옛날에 푸른 장미가 온전했을 시대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무슨 일이 있었는데?”

당연히 알지 못했다.

“‘장미 제전’. 고대의 힘이 허락한 거대한 전쟁이 열렸어.”

그녀는 간단히 설명했다. 이건 모든 장미의 요청에 따라 열리며, 정해진 시간 내에 푸른 장미를 찾는 일종의 영지전 같은 거라고. 나는 눈을 찌푸렸다. 기묘한 방식이었다.

“그게 뭐야. 사냥도 아니고.”

“아냐. 사냥보다는 보물찾기에 가까워. 그리고 보물에게 선택도 받아야 하고. 까다롭지. 어떻게 감히, 푸른 장미를 다치게 하며… 사냥 따윌 하겠어?”

프란시아가 생긋 웃었다. 그녀의 손에는 여전히 하얀 과자가 들려 있었다.

“많은 장미가 죽고 나서야 이런 말이 생겼겠어. ‘차라리 다 가져주세요.’”

그녀는 과자를 먹던 손을 탈탈 털며 이제는 조용해진 두 남자를 가리켰다.

“이게 전쟁이 일어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그리고…….”

“그리고?”

“이런 경쟁 속에서 푸른 장미가 다치면 그놈이야말로, 척결이야.”

프란시아의 웃음이 점차 옅어졌다.

“숨 쉬는 것마저 사라질까, 아까운 사람인데.”

슥삭, 그녀가 목에다 손을 대고, 그대로 휙 그었다. 유쾌한 표정이었지만 눈에 담긴 것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다 가져도. 대공은 아무 말도 못 할걸?”

그녀가 화사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제게로 가져왔다.

“그리고 나도 가져, 언니.”

장난치듯 말하는 그녀의 말속엔 내 기분을 풀어주려는 의도가 느껴졌다. 나 또한 피식 웃었다. 웃다 말고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장미는 넷 아니야?”

그 말을 하고 나서 황제를 떠올렸지만, 그쪽은 일단 제외하고서. 내가 말한 건 하나였다.

흑장미.

다 가지라면, 체이서도 포함된 것 아닌가.

“다 가지라면 그쪽도 가지라고?”

그와 동시에 프란시아 그리고 두 남자마저 나를 향했다. 약속이라도 한 듯이 놀란 시선이었다.

“언니, 안 돼. 무슨 말이야!”

눈동자에 ‘그놈은 안 돼!’ 하고 박아둔 것 같았다.

리케도르안 또한 비슷한 시선이었다. 심지어 르나그도.

“따라 해 줘, 언니. 안 돼요.”

“어?”

……그거 너 어릴 때 내가 가르친 것 아니니?

“안됩니다.”

“안 돼, 이아나.”

“그래! 용납 못 해. 안 돼. 언니의 안전을 위해서 그놈은 안돼!”

그리고 연이어진 프란시아의 다그침에 나는 얼떨떨하게 끄덕였다. 어째 단합력이 끝내주네. 생각하면서. 더는 도뮬릿과 어울리지 않길 바라는 마음도 이해하지만……. 나는 뺨을 긁적였다.

“뜻은 알겠는데…….”

아직 이들에게 하지 못한 주요한 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여러분, 흥분한 도중에 미안하지만.

“도뮬릿이랑은 한 번은 엮일 수밖에 없을 거예요.”

프란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어째서?”

“음, 황제 폐하가 말씀하신 티아라.”

나는 후, 숨을 뱉듯 말했다.

“그건 도뮬릿 저택 지하실에 있으니까.”

어째서 이를 기억하느냐. 이건 언젠가 체이서가 날 위해 세상 가장 좋은 것을 끌어모아 눈앞에 보여줬을 때, 그중에 하나였다.

<세상을 준다고 했잖아.>

그때 그것을 보았을 때 내 심정은 별생각이 없었다. 왜냐, 저것이 이야기의 주축이라 한들 나와는 관련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물론 체이서가 프란시아를 데려올 줄 몰랐던 때였고, 후에 프란시아를 도망가게 해 원작을 아예 뒤집어 놓을 줄도 몰랐던 때였다. 말했듯 프란시아가 오기 전에 있었던 일이었으니까.

더군다나 프란시아를 도망치게 한 뒤에도 이것을 떠올리지 못한 건, 내가 내용을 바뀌게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저것과는 상관없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야 그럴 게 그때는 저게 필요하게 될 줄 몰랐을뿐더러, 무려 황제가 찾아오라 할 줄은 몰랐지!

<전부, 네 거야.>

……그러니까 한 마디로 도뮬릿의 저택에 있는 황제의 티아라는 내 거라는 거다.

“…허.”

모든 사정을 알게 된 세 사람의 표정은 비슷했다.

리케도르안은 표정이 굳었고 프란시아 또한 다르지 않았다. 아니, 프란시아의 낯에는 얼핏 증오에 가까운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르나그는 날카롭긴 해도 이 중에서 제일 평상시와 같았다.

“사람을 심어야겠군요.”

이윽고 가장 먼저 이야기를 꺼낸 사람은 놀랍게도 르나그였다. 무겁게 가라앉은 시선이 나를 향했다.

“이아나 양, 당신이 이 일에 책임감을 느끼시는 거라면, 저는 대공 각하가 수명을 회복할 때까지 협조하겠습니다.”

그는 잠시 틈을 두었다가 이어 말했다.

“저는 당신이 더는 도뮬릿과 엮이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엮여야한다면 최대한 안전하고, 빠르게 해결하길 바랍니다. 제가 도와도 되겠습니까?”

권유하듯 물었지만 결심을 굳힌 것처럼 보였다. 이리 말하는 르나그는 이번 일이 끝나면 내가 더는 도뮬릿과 엮이지 않을 것이라 믿는 것 같았다.

그는 체이서와 손을 잡고 있었으나 사실은 체이서를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으며 이것이 ‘이아나’ 때문이란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불편하지 않게 여겨주십사 합니다.”

“…물론이에요.”

“당신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 맹세했으니까요.”

나는 천천히 끄덕였다.

“불편한 일은 당연히 아니에요. 다만 매번 신세를 지는 것 같아 불편한 마음이긴 하네요.”

르나그가 협조해주면 나야 고마운 일이다. 리케도르안은 좋아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이를 감수하더라도 수명을 원래대로 돌리는 일이 먼저였다.

이 순간에도 시간은 지나고 있다.

르나그는 무어라 더 말을 하려 했다. 하나 입만 달싹일 뿐 아무것도 아니라 고개를 저었다.

“…좋아. 거지 같긴 하지만! 어떻게든 해보자고.”

그렇게 체이서를 제외한 아니, 황제마저 제외한 세 장미 간의 연합 아닌 연합이 탄생했다. 잘은 모르긴 해도 면면이나 세력이 결코 만만찮은 연합이었다.

***

“역사상 이런 일은 처음일걸.”

그날 밤. 프란시아가 침대에 누우며 말했다. 거다란 매트릭스 위에는 널브러지듯이 팔을 벌리며 내 쪽으로 돌았다. 낮까지만 해도 우아하고 반듯한 성녀님 같은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르나그가 있을 때는 그래도 나름 성숙한 모습을 보이려 애를 쓰기라도 하는 것 같았는데. 나와 둘만 있게 되자 금방 몇 년 전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그때에도 잠버릇이 나빴었지, 아마.’

같이 자겠다고 붙어 있다가 체이서가 몇 번이나 몰래 응징을 했던 기억이 있었다. 추궁하려 해도 전혀 꼬리를 남기지 않아 심증만 남았지만. 프란시아는 모조리 기억하고 있을 터였다.

이런 걸 보면 현시대의 장미들은 사이가 나쁠 수밖에 없지 않나 싶기도 했지만.

‘아니. 그런데 원작에서는 어떻게 삼각관계가 된 거야?’

뜯어볼수록 프란시아와 리케도르안의 성격은 잘 맞는 편이 아니었다. 내가 읽었던 책에서는 프란시아가 아름답고 착한 아가씨로 나왔던 통에 원작 내용은 도리어 나를 의아하게 만드는 원인이었다.

“역사를 돌이켜봐도 장미들이 서로 협력한 전례가 거의 없을걸.”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 정도야?”

듣다 보니 이상하네. 장미들이라 해도 그들은 장미이면서 한 가문이었다. 긴긴 시간 동안 가문끼리 협력할 일도 부딪칠 일도 한번 없었을까? 이렇게 말했더니 프란시아가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언니, 장미들은 태초부터 서로 경쟁하는 사이가 맞아. 바로, 푸른 장미의 총애를 두고 말이지.”

프란시아의 손가락이 콕, 내 팔뚝을 찍었다.

“우리들의 왕이라 했잖아.”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그러고는 ‘내가 오늘 언니 옆자리를 차지한 것처럼.’ 하고 덧붙였는데. 나는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리곤 실소를 머금었다. 조금 전 상황이란 리케도르안과 르나그가 나를 두고 다투던 상황이었다.

정확히는 내 방 앞을 누가 지키느냐, 뭐 이런 싸움이었는데.

<다 나가요.>

한 2시간쯤 이어지기에 보다 못한 내가 둘 다 내쫓았다는 결말이다. 나로서는 최선이었다.

내 방문 앞을 지키다 밤을 꼴딱 지새운 전적이 있는 리케도르안이든 막 황성으로 달려온 르나그든.

어느 쪽이든 밤을 새울 생각 말고 방으로 돌아가길 바랐으니.

“이런 사람이 사라진 지 오랜 시간이 흘렀어. 갈증은 심해지고, 이 상태로는 서로가 부딪쳐봐야 피를 볼 테니까 피하려 했지.”

프란시아가 그리 말하고는 내 팔뚝에 고개를 묻었다.

“그러니 우리 정도면 평이한 편이야. 장미 제전이 열린 것도 아니고.”

“그 제전이란 건 어떻게 열리는 건데?”

“장미들이 황실로 가서 빌어.”

“……황실에 허락을 받는 거야?”

“아니. 그곳에 비는 장소가 있어.”

프란시아는 황성에 장미들의 힘, 즉 고대 힘의 기원을 기리는 장소가 있다고 말했다.

“모든 장미가 제전에 응하면 그때 가서 하늘이 열리거든?”

“응. 그리고?”

“그리고 뭐. 전쟁인 거지.”

제전. 이는 제사나 축제를 뜻하는 말인데, 실상은 전쟁이라니 쉬이 상상되지 않았다. 듣다 보니 트로이 목마가 나오는 역사 속 전쟁이 생각나긴 했다. 그 전쟁도 세상 제일 미인을 두고, 단 한 사람으로 인해 일어나지 않았던가. 어쨌거나 일어나지 않는 편이 좋겠구나 싶을 뿐이었다.

“……어째 취급은 세상 제일 미인과 비슷하네.”

“미인?”

트로이 전쟁의 주인공 헬레네는 세상을 전쟁으로 이끌 만큼 아름다웠다고 한다. 왜, 나라를 망하게 하는 미인을 경국지색이라 하지 않던가.

“에이. 그 정도로 비교가 되겠어?”

“그건 그렇지.”

나는 경국지색은 아니었으니. 그런 의미로 끄덕였더니 프란시아가 웃음을 싹 지웠다.

“언니는 역사를 돌이켜봐도 최고야.”

“……미모가?”

“응.”

“그건 좀 어폐가…….”

“아냐!”

프란시아가 벌떡 일어나 눈을 반짝였다. 그녀의 색이 다른 눈동자가 각기 다른 색으로 영롱한 빛을 드러냈다.

“내 눈에 제일 예쁘면 됐지! 언니가 제일 예뻐.”

그렇게 좋아해 주니 고맙긴 한데……. 무심하게 갸웃했다. 무어라 한마디 더 할까 고민하다 이내 웃으며 프란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고마워.”

그렇게 어부지리로 내 옆자리를 차지한 프란시아와의 밤이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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