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57/87)

***

알현실을 나온 뒤로 리케도르안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그의 침묵을 존중했다.

황제가 터무니없는 조건을 내걸었을 테니 생각이 많겠지. 고민될 것이다. 물론 헤르님이 가진 정보력과 인적 재산이라면 단서를 찾지 못할 것은 없으나 시간이 오래 걸렸다가는 더 중요한 일을 놓친다. 그의 생명 말이다.

황제는 나가기 직전 우리에게 말했다.

<찾는 동안 도뮬릿과 관련한 건은 막아주겠네.>

기간 한정이었지만 체이서의 공식 추적으로부터는 자유로울 거란 얘기였다. 어쨌거나 나는 체이서의 여동생이었으니 체이서가 대놓고 나를 찾는다면 막을 명분은 없었다. 그럼에도 막아주겠다는 거니, 일단은 고마운 일이었다.

앞으로 그 도뮬릿으로 직접 들어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래, 문제는 이것이었다.

난 흘끗 리케도르안을 보았다. 이 얘기를 언제 하면 좋을지 타이밍을 보고, 전달할 요량이었다. 일단 복도는 듣는 귀가 너무 많아. 이대로 방으로 돌아가면…….

“각하.”

우리는 동시에 등을 돌렸다. 그곳에는 살짝 숨을 몰아쉬는 시종이 보였다.

“황제 폐하께서 잠시 보고자 하십니다.”

황제가? 조금 전에 헤어졌건만 이상한 제의였다.

“…조금 전에 알현한 참인데.”

“그저 잠시 전할 것이 있다고 빠르게 들렀다 돌아가라 하셨습니다.”

“그럼 함께…….”

“빠르게 오라 하셨습니다.”

시종은 그리 말하고는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감히 대공의 말을 끊은 것에 대한 사과였다. 그만큼 빠르게 돌아오라는 황제의 뜻이기도 한 듯했다.

“그리고 홀로 오시라고도 하셨습니다.”

리케도르안은 더욱 차게 표정을 굳혔다.

“명이 흡사…….”

우리는 이미 복도 끝까지 나온 참이었다. 돌아간다면 내 걸음으로는 한참 걸릴 터 이 명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나와 일행을 떼어놓으려 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착각인가?”

“……죄송합니다.”

리케도르안은 눈을 가늘게 좁혔다. 푸른 눈으로 얼핏 분노가 스쳐 지나갔다.

“하나 폐하께서는 자리를 비우는 것을 염려하지 말라며 이를 보내셨습니다.”

시종이 손을 내밀었다. 시종의 손에는 조금 전 알현실에서 보았던 황제의 박쥐가 앉아 있었다. 황제가 제 수호신마저 내주니, 리케도르안으로서는 듣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동시에 더욱 불쾌함을 느끼는 것 같지만.

“리케도르안.”

결국 내가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빨리 다녀와요.”

무슨 변덕을 부린 것인지 몰라도 황제는 일단 우리에게 호의적이다. 나쁠 것은 없었다.

“지금 전해주는 것이라면 당신에게 나쁘지 않을 거예요.”

티아라에 관한 단서라면 굳이 필요는 없었지만. 만약 다른 것이라면 놓칠 이유가 없었다.

“거기다 푸딩이도 있으니까. 잠깐은 괜찮을 거예요.”

이렇게 말하고 보니 내가 봐도 영 못 미덥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꼭 영화 클리셰를 답습하는 것 같네. 괜찮을 거라고 가라고 했던 영화 속 인물들은 꼭 괜찮지 않은 일을 겪는단 말이지. 그리 생각하면서 리케도르안에게 끄덕여주었다. 사실 황제를 믿는 것은 아니지만 수호신까지 내준 저의가 궁금하긴 했다. 더군다나 푸딩이를 괜히 언급한 게 아니었다.

‘암살 위협은 푸딩이로 충분할 거야.’

-물론이다, 냥. 허약한 인간은 내가 지킨다, 냥!

나는 속으로 웃음 지었다.

‘그래그래.’

어느덧 3살이 된 수호신님은 나름의 능력을 쓸 줄 알았다. 육체에 능력이 집중된 붉은 장미와 본래 파트너였던 만큼 시간을 버는 데는 푸딩의 능력으로 충분했다.

이는 리케도르안이 더 잘 알 터였다. 이미 연결이 떨어진 지 오래지만 본래는 함께 성장하는 관계였으니 지금도 푸딩의 힘은 느낄 수 있었다. 리케도르안은 돌아오면 나를 안고 가겠다며 고집을 보였지만 끝내는 이를 북북 갈며 시무룩한 표정으로 알현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남은 것은 시종과 나뿐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쪽은 왜 안 돌아가지 않는 거지?’

물론 보통 인간의 속도로 리케도르안의 속도를 쫓기야 하겠냐마는 굳이 내 옆에 남은 것도 이상했다.

거기다 박쥐는 여전히 시종의 손에 앉아 있었다.

“지금부터 전해드리는 것은 황제 폐하의 전언입니다.”

“……네?”

나는 이어지는 시종의 말에 살짝 당황했다. 그러나 곧 눈을 깜빡였다. 시종은 내 눈치를 보며 박쥐를 내밀었다.

-먼저 내 가벼운 장난을 용서하게, 어여쁜 영애.

신기하게도 박쥐에게서 황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 박쥐의 입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고 귀에서 웅웅 울리는 느낌이었다. 박쥐는 본래 초음파로 감각을 느끼는 동물로 아는데, 이것도 텔레파시 같은 건가 싶기도 했다.

-그대에게서 대공을 떼어놓은 건 다름이 아니라 꽤 재미난 광경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서였네.

“……재미난 광경이라니요.”

뭘 말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박쥐에게서 느껴지는 목소리는 얼핏 들어도 호의적이었다.

-조금 전에는 짐이 의도치 않게 사납게 굴었다만, 그대를 좋게 보고 있네.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모습이 깜찍했네.

……깜찍? 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이 언니. 기준이 조금 묘하시네.

-부동(不動)과 무심함은 푸른 장미의 특징이지. 하지만 그런 모습이 오히려 장미들에게 있어 최고의 자극제라고들 한다지.

그런가. 저 특징이 사실이라면 내 성격과도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다. 스스로는 그저 안락, 평온한 삶을 추구하고, 느긋한 성격이라 생각했던 것이지만.

-안달 나게 하기 딱 좋단 말일세.

“……장미들이요?”

-그렇지. 그러니 그대의 용맹스러운 멍멍, 아니. 장미를 떼어놓은 것에 부디 용서해주길 바라.

지금 용맹스러운 멍멍이라 하려다 정정한 것 같은데.

-재밌는 걸 보고 싶어서 말이야.

이어 흘러나오는 장난스러운 어조에 나는 설핏 웃음을 흘렸다. 리케도르안을 두고 이리 말할 수 있는 이는 몇 없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말하니 마음을 조금 편히 가져도 되려나.

그리 생각할 때였다.

타다다닥.

발소리가 들렸다. 이곳은 신기할 정도로 사람이 드문 복도였다. 그렇기에 소리는 선명히 느껴졌다.

-아, 왔군. 그럼 짐은 이만.

발소리가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이 정도면 보통 사람의 속도는 아닌 것 같은데.

그리 생각한 순간, 커다란 그림자가 나를 덮쳤다.

그림자뿐이 아니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대로 한 번, 두 번…… 세 번을 깜빡인다.

나를 덮친 체온에 당황스러웠지만……. 어깨로 거친 숨결이 느껴졌다. 이 남자와는 어울리지 않는 날 것에 가까운 숨소리였다.

그는 날카로울지언정 항상 정제되고 우아하던 남자였으니까.

시종이 몇 걸음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더는 황제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 헐떡이는 소리와 체온에 온몸을 집중할 뿐. 나는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르나그.”

그의 숨이 아주 잠깐 멈췄다. 동시에 목으로 뜨거운 날숨이 쏟아진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들을 내려놓는 것처럼.

그것들은 염려나 걱정이 아닐까. 나는 조심스레 짐작했다.

“……이아나 양.”

그가 낮게 나를 불렀다. 부르는 것조차 탈이 날까,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걱정했습니다.”

한참 만에 내려놓은 목소리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그를 그대로 두었다.

어깨가 살며시 젖어가는 것을 모른 척하며.

이 남자 성격에 걱정할 것을 알았다. 염려할 거란 것도. 그렇지만 그에게 연락할 방도가 없었다.

차라리 체이서처럼 장미라도 새겨 넣었다면 모를까. 그러나 이 남자는 내 허락 없이는 숨도 쉬지 않을 것 같은 남자였다.

르나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미안해요.”

그렇게 말하다 말고 나는 멈칫했다. 가늘게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남자의 얼굴이 엉망이었다.

툭. 내 어깨에 엉성하게 놓여 있던 안경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르나그가 놀라더니, 황급히 제 눈을 가렸다.

“……보, 보지 마십시오.”

그는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특이하게도 그는 귓바퀴만 붉게 물들이곤 했다. 그런 그를 보면서 나는 조금 곤란해졌다.

“엉망일 겁니다…….”

이미 다 봐버렸는데…….

“으음, 네. 아무것도 못 봤어요.”

불행히도 나는 거짓말에 익숙하지 않았다. 편할 대로 산다는 건 거짓말을 할 일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과 같았다. 목소리로 다 들켰겠지. 나는 품을 뒤적여 손수건을 하나 꺼냈다.

“원래 이런 걸 들고 다니진 않는데.”

은밀하게 입성하는 것이라고 하나 그래도 황제를 만나는 자리였다. 그래서 평소에 챙기지 않던 것들을 제법 챙겼더랬다.

“이 순간을 위해서 들고 온 건가 봐요.”

나는 조금 무심한 어조로 말하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가락 사이로 나를 보던 르나그가 머뭇거리더니 손수건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그다운 단정한 인사였다. 그가 손수건으로 남은 물기를 닦아내는 사이 나는 몸을 숙여 안경과 망토를 주웠다.

르나그에게 급작스럽게 안긴 통에 걸치고 있던 리케도르안의 망토도 떨어진 참이었다. 내가 줍는 모습을 본 르나그가 사색이 되었다. 동시에 뺨이 붉어진다.

“죄, 죄송합니다, 이아나 양. 제가 갑자기….”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사과가 빠른 남자였다. 거기에는 군더더기도 붙이지 않았다. 용서해준다면 하는 대로 화를 내면 내는 대로 벌을 달게 받겠다는 듯이.

“당신을 보고 너무 놀란 마음에…… 아니. 이것도 변명입니다. 듣지 마십시오.”

“이미 들어버렸는데요…….”

“읏.”

“농담이에요.”

르나그가 안경을 건네받고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덩치는 산만 한데 어깨는 떡 벌어지고 사납고 날카롭기 그지없는 남자가 쩔쩔매고 있으니 조금 우습기도 했다. 이렇게 쩔쩔매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다.

‘흐음.’

그런 르나그를 보며 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뱀을 떠올리는 나도 좀 이상하긴 한데. 르나그의 행동을 보고 있으려니 수줍지만 반갑게 인사하던 조그만 뱀이 떠올랐다.

“아프진 않았어요? 수척해진 것 같아서.”

한참이 지나 걸맞지 않은 인사임을 알면서도 나는 그에게 건넸다. 그가 눈을 아래로 내렸다.

“……잘 지내지 못했습니다.”

“응. 당신이 날 찾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네. 찾았습니다.”

르나그가 안경 밑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아주, 애타게 말입니다.”

이에 대해 나는 다시 한번 미안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납치가 내 뜻이 아니었다고 해도 이 남자는 나를 말 그대로 애타게 찾아 헤맸을 테니까. 보아하니 체이서가 정보를 공유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미…….”

“아니요. 사과하지 마십시오.”

그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의 탓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고는 머뭇거리다가 한마디 더 붙였다.

“설사, 당신의 뜻이었다고 해도. 그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체이서의 곁을 떠난 것이 잘한 일이라고. 이로 인해 온 제국을 찾아다녔으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정작 본인은 이렇게 뛰어올 정도였으면서.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해서 끝내 그저 웃었다.

르나그의 팔에는 뱀 모양으로 장식된 단추 장식이 있었다. 아마도 그의 가문을 상징하는 것인 듯했다. 이건 무슨 전지적 장미 시점인 건지. 어째 보는 장미들마다 뒤로 그네들의 동물이 보이는 기분이었다. 난 그가 진정한 뒤에야 궁금한 것을 물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예요?”

“프란시아 올르 로제니아.”

르나그에게서 익숙한 이름이 흘러나왔다.

“아니, 이제는 127대 성녀라 불러야겠지요. 그녀가 알려주었습니다.”

나와 리케도르안이 황실로 떠난 건 극비리에 붙여졌다. 헤르님 사람이 거의 오지 않은 것이 증거였다.

리케도르안의 힘이 아무리 강하다고는 하나 도뮬릿이란 큰 적이 있는 한 위험이 없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이리 결단을 단행했다는 건 그만큼 헤르님도 이것이 시간 싸움이란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안전보다는 보안을 선택한 거다. 그래서 정보의 출처를 듣고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프란시아가 쉽게 알려주던가요?”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이름에 르나그가 멈칫했다. 하나 잠시뿐이었다.

“어떤 위협이 있을지 모르니. 제가 나서 달라고 했습니다.”

“아.”

“적어도 본인이 도착할 때까지, 라고 하더군요. 그것이 정보의 대가라고.”

르나그가 어찌 이리 급하게 나타날 수 있나 했더니 프란시아의 안배였던 모양이다. 확실히 장미가 둘이라면 체이서라도 어찌할 수 없을 터였다.

프란시아는 현재 해결할 일이 있어 출발이 늦었는데, 자신이 발이 묶여 있는 틈을 타 취약한 내 안전이 염려되었던 모양이었다. 그리 좋아하지 않는 상대에게 스스럼없이 조건을 내걸고 거래를 제안했다는 점에서 그녀가 내게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알 수 있었다. 가슴이 뭉클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사실 부탁할 필요도 없던 일입니다.”

“네? 어째서요?”

“곧 도착할 것 같더군요.”

르나그는 입성하기 전에 전해 들었다며 내게 프란시아가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신전의 마차가 그리 빠른 줄은 처음 알았습니다.”

덧붙인 말에 그 모습마저 프란시아답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날 위해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이용했구나, 프란시아.

나는 짐짓 뒤를 슬쩍 보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시종이 그대로 서 있었다. 시종의 팔에 앉아 있는 박쥐도 함께. 박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왜인지 나는 황제가 박쥐를 통해서 모두 보았겠거니 싶었다.

“일단 움직여야겠네요.”

황제와 이야기가 끝난 이상 더는 여기 있을 필요가 없었다. 물론 움직이는 건 리케도르안이 온 뒤의 얘기였다.

그리 생각하며 걸음을 옮기는데 휘청 몸이 기울었다. 바닥이 미끄러워. 다리가 휘청거린다. 겹쳐 잡은 손이 차가웠다. 그다지 춥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새 다리가 얼어붙기라도 한 걸까. 한 걸음 더 딛기 무섭게 쭉 미끄러졌다.

그대로 아픔이 느껴질 줄 알았건만 몇 초가 지나도 아프지 않았다. 눈을 뜨자 나를 단단하게 잡아챈 팔이 보였다.

“괜찮습니까?”

눈앞에는 놀란 르나그의 얼굴이 있었다. 붙잡아준 것은 좋은데…… 어째 상당히 진부한 자세가 되었다.

“음, 네. 추워서 다리가 얼어붙은 것 같아요.”

“……태연하게 이야기하실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아하하. 그런가요?”

나는 그에게 안긴 채로 뺨을 긁적였다. 어째 이 세계의 남자들은 사람을 번쩍번쩍 잘도 든다는 생각을 하면서.

“저는 제가 추위를 안 타는 줄 알았어요.”

무딘 것은 감정뿐이 아니며. 무신경한 건 성격 탓이 아니었던 걸까.

“이전엔 몰랐는데. 제가 감각에 좀 무디긴 한가 봐요.”

겹쳐 잡은 손끝이 차갑다. 그러나 나는 타인의 손을 잡기 전까지 내 체온이 이토록 내려간 줄 몰랐다.

‘이건 좀 이상한 게 아닐까.’

리케도르안은 내가 어깨를 떨었다고 했으나 나는 그 또한 느끼지 못했다. 감방에서도 추위나 더위를 크게 느끼지 못했다. 다른 죄수들이 오늘따라 유달리 싸늘하다며 제 몸을 열심히 비비고 난로 자리를 차지할 때에도. 추운가? 하고 고개를 갸웃했을 뿐.

“일단 내려주시겠어요?”

그 말에 르나그의 얼굴로 망설이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몸이 찬 것이라면 잠시 이대로 있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음, 그건 그런데. 내 발로 서 있고 싶어요.”

보는 눈이 있다. 날 보고 있는 박쥐, 정확하게는 박쥐의 주인이 이 상황을 연출하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몰랐다. 이렇게 말했음에도 르나그는 아주 잠깐 더 망설였다. 염려가 가득 담긴 표정으로 묘한 것이 스쳤다.

“조금만…….”

“네?”

그러다 막 그가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조금만 더…….”

그와 동시에 발소리가 들렸다. 발소리는 금세 가까워졌다. 고개를 돌리면 리케도르안이 서 있었다. 그대로 표정을 굳히는 것으로 보아 이쪽을 보고 바로 어떤 상황인지 대번에 눈치챈 듯했다.

“…하, 갑자기 부르시질 않나. 갔더니 신변잡기만 늘어놓질 않나…… 폐하께서 무엇 때문에 이리 떼어놓으시나 했더니.”

말을 이을수록 시선이 점차 차가워졌다. 리케도르안은 성큼 다가오며 단정하게 매여 있던 크라바트를 느슨하게 풀어냈다.

“이것 때문이었네.”

르나그를 향한 시선은 몇 년 만에 재회했을 때의 낯보다 더욱 사납고 서늘했다. 그러나 이도 나를 향하는 순간 겨울에서 봄이 오듯 사르르 녹아버렸다.

“이아나.”

핀트가 살짝 어긋난 듯한 미소와 시선에서 바로 알아차렸다.

리케도르안의 인격이 바뀌었다.

그가 아름다운 푸른 눈을 반으로 접어 사람을 녹여내듯이 해사하게 미소했다.

“다친 데는 없어요?”

“어, 어?”

“넘어질 뻔했잖아요. 놀라서 달려왔는데.”

황제를 보러 간 리케도르안이 어떻게 알았겠느냐마는. 정보의 출처는 뻔했다. 나는 박쥐를 쳐다봤다. 시선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박쥐가 날개를 흔들었다.

“이아나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발테이즈 후작.”

“……내가 알던 각하의 말투가 아니로군요.”

“말투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의외로 리케도르안은 인격이 변한 것치고는 차분하고 침착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적이었단 거다. 원래 미친놈도 차분하게 미친놈이 제일 무섭다고… 리케도르안은 곧 본색을 드러냈다.

“날이 덥군요, 안 그래요?”

투둑. 잘 매여 있던 크라바트가 그대로 끊어져 바닥으로 떨어진다.

리케도르안은 답답한 듯 단추를 풀어 내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제는 대공이라기보다는 저 뒷골목에서 볼법한 방탕 귀족 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이제야 답답함이 해소되었는지 느릿하게 고개를 틀었다. 그러더니 나를 향해 웃었다.

“이리와주면 안 돼요, 이아나?”

마치 자신이 중병에라도 걸린 듯 신음을 내면서.

“나, 마음이 많이 아픈데.”

이에 나를 붙잡고 있던 르나그의 손이 움찔했다.

“이제 그만 놔주지 그래요. 후작?”

르나그가 천천히 나를 내려주었다. 발끝이 바닥에 닿는다. 어째 돌바닥이건만 살얼음판을 디딘 듯한 느낌이 들었다. 르나그가 그대로 나를 놓아주리라 생각했으나 이게 웬걸, 르나그는 떨어지는 대신 제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내 손등을 잡아, 입을 맞추었다. 아주 정중하고 예의 바른 모습이었다. 마치 리케도르안에게 너와는 다르다, 하고 알리듯이 한번 쳐다보면서.

“난 오직 한 사람의 말에만 귀를 기울입니다.”

르나그가 느릿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나야말로 묻고 싶군요, 각하.”

안경알 아래로 무심하고도 날카로운 눈이 드러났다.

“그쪽이야말로.”

다분히 귀족적인, 그러면서도 권태로운 어조와 함께.

“제 약혼녀께 무슨 볼일이신지?”

이 한마디로 인해 복도의 온도가 더욱 싸늘해졌음은 물론이었다.

“아하.”

리케도르안은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이아나가 내 성에 머물기로 결정한 것은 모르는 모양이군요?”

그는 불그스름해진 눈가를 비비며 여유롭게 말했다. 르나그는 표정을 굳혔지만 잠시뿐이었다.

“영원히 그럴지는 모르는 일이지요.”

“…….”

리케도르안이 한 방 먹은 표정을 했다. 르나그는 거기서 끝내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직 약혼 관계인지라. 악혼녀이신 이아나 양에게 의사를 먼저 물어볼 것 같은데. 각하는 그러지 않았나 봅니다?”

리케도르안이 다시 웃음 지었다.

“아아. 그건 내가 미처 생각 못 했군.”

그러고는 얼른 덧붙였다.

“이아나가 먼저 남아 있겠다고 해줘서.”

“…….”

나는 두 남자를 번갈아 보다가 느릿하게 숨을 내쉬었다.

‘치정문제네. 치정.’

-인간, 네가 중심에 선 것 아니냐, 냥?

의외로 3살 수호신님이 핵심을 꿰뚫었다. 팩트로 때리면 더 아프단 걸 모르는 듯한 순진한 말투였다.

‘알아.’

아는데……. 나는 마치 남 일을 보듯이 두 남자를 보았다. 어째 너무 살벌하게 노려보며 싸우니 도리어 내 일 같지가 않아졌달지… 사람은 너무 비현실적인 풍경을 보면 그때 가서는 자신을 떨어트려 남일 보듯 보게 되는 것 같다.

‘대체 모자랄 게 없는 인간들이 왜 나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걸까.’

-인간, 그건 너무 자신감이 없는 것 아니냐, 냥.

‘자신감이랑 좀 다른데……. 굳이 찾자면 갈수록 내 편안함은 멀어진다는 생각? 난 사실 등 따신 곳이면 어디든 좋은데…….’

-너는 좀 움직여라, 냥!

푸딩이가 버럭 화를 냈다.

-내 계약자가 다리가 얼어서 넘어지다니! 치욕이다, 냥! 운동 부족이다!

결국 3살 수호신님이 참지 않고 버럭 잔소리를 하기에 귀를 막았다. 어쩔 수 없이 엉뚱한 도피를 관두고 현실로 돌아왔다. 날숨을 푹 내쉬었다.

어느 쪽이든 대화가 필요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난 흘끗 시선을 옮겼다. 여전히 관찰하듯 앉아 있는 박쥐를 바라보며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저기.”

나직한 한마디에 두 남자가 언제 그랬냐는 듯 나란히 입술을 다물었다. 그 모습에 웃음이 먼저 튀어나왔다. 내가 소리 내어 웃는 동안 무려 세 쌍의 시선이 함께였다. 둘은 사람이고 하나는 신수다. 그중 두 사람은 눈을 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웃음을 꾹 누르고서는 한결 후련해진 어조로 얘기했다.

“일단 우리, 자리를 옮길까요?”

더는 구경거리가 되어 줄 생각이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