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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제국에는 타국에 없는 특별한 세 가지가 있다.
오래전 감방 동료였던 남작 아저씨의 말을 빌려 설명하자면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태양의 황궁」
「캄브라캄」
「다섯 가문의 장미」
아래 두 가지야 신물 나게 보고, 또 주변 인물이들이기도 했으니 제외하고서 첫 번째 것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태양의 황궁’.
이쪽으로 말할 것 같으면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뚝 서 있던 거대한 건물이다.
이제는 전설로만 남은 발명가의 최고이자 최후의 역작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름에서 느껴지듯이 태양을 닮은 듯한 위엄과 위압감을 갖춘 성이라나.
이를 처음 본 감상은 설명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물론 황성에는 이미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온 적 있었지만 그때 와는 상황이 달랐다. 당시엔 해가 질 무렵 즈음에 도착한 데다 바로 옆에는 체이서가 붙어 있었지.
막 푸른 장미란 것을 알게 되는 바람에 구경할 새가 없었다.
거기다 연회 전까지 내내 손님들 전용인 별궁에만 머물렀었다. 특히나 황제가 도뮬릿에게 특별히 내준 성은 중앙과 거리가 조금 있었다. 연회가 열린 홀도 별궁 근처였고, 이러한 이유로 황제가 머문다는 본궁은 보지 못했다.
‘……미친 듯이 크네.’
고개를 들었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찌푸리면 겨우 첨탑에 대롱 매달린 태양이 보였다.
혹자가 말하길 이 거대한 성에 태양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깎아지른 것 같은 높이, 그리고 지붕이 태양을 꿰뚫은 창과 같이 뾰족해서였다던가.
태양을 지붕에 얹은 성, 이름과 걸맞긴 했다. 무엇보다 거창한 이름이 잘 어울리게 크고 웅장했을 뿐 아니라 곳곳에 배치한 섬세한 무늬덕에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다.
<한번 가본 이는 절대 잊지 못한다고 하지!>
이럴 때 남작 아저씨의 가이드 아닌 가이드스러운 설명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모른다. 무려 4년이 지났음에도 이런 것을 기억하는 건 한 번씩 감방 생활을 반추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아저씨와의 대화는 옛날이야기를 듣듯이 재미난 구석이 많았으니까. 문득 허허 웃는 아저씨 얼굴이 생각났다.
‘그 아저씨도 잘살고 있으려나.’
죄목이 그리 무겁지는 않았으니 어쩌면 출소했을지도 모르겠다. 살다 보면 다시 한번 만날지 모르니. 그때 가면 작은 보답이라도 해야지.
“이아나.”
기둥을 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긴 채 걷고 있는데, 어깨로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슬쩍 고개를 들자, 어른스런 얼굴에 걱정 어린 표정을 한 리케도르안이 보였다. 성장한 그는 서늘한 얼굴이 기본 낯이나 다름없었으나 내게는 이렇게 누그러지곤 했다.
“추워요?”
춥냐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좀 온도가 낮다 느끼긴 했지만… 그정도는 아닌걸.
그러고 보니, 수도는 헤르님이 있는 남쪽보다 조금 추운 편이라고 했던 것 같네. 평균 기온이 낮다고. 도뮬릿에서도 호들갑을 떨며 내게 외투 따위를 안겨주었던 기억이 있다.
리케도르안은 무언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더니 작게 한숨을 쉬었다.
“당신, 어깨를 떨고 있었어요.”
난 고개를 갸웃했다.
“……그랬어요?”
리케도르안은 아예 걸음을 멈추고, 제 외투를 벗었다. 그는 현재 허벅지 아래까지 내려오는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장신이었다. 고로, 그의 외투를 내가 걸치면 옷에 파묻힌 꼴이 될 터였다. 리케도르안 또한 이를 느꼈는지 멈칫했다. 슬쩍 나와 코트를 번갈아 보는 것 같았다.
“……무거울까요?”
그는 나와 결이 다른 생각을 한 듯했다. 나는 심각해진 그의 얼굴이 우스워 설핏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지 않을까요?”
리케도르안의 외투는 단순한 외투가 아니라 이것저것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망토라거나 밧줄처럼 생긴 장식이라거나. 여기에 옷감도 두툼해 보였으니 모르긴 해도 내가 걸치면 휘청거리지 않을까? 리케도르안은 본인 말에서 답을 느낀 듯했다. 이내 시무룩한 얼굴이 스쳐 지나갔으니까.
결국 그와 나는 그의 외투에서 짧은 망토만 떼어 두르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짧은 망토라지만 내가 걸치니 숄의 길이와 비슷해졌다. 확실히 없는 것보단 따뜻했다.
리케도르안이 작게 한숨 쉬었다.
“이아나, 당신은 스스로에게 너무 무딘 것 같아요.”
“그래요?”
그런 것보단 추위를 잘 안 타는 체질인 것 같은데. 아니, 안 타는 줄 알았다. 감방에서는 얇은 죄수복을 입고 잘만 지하에 다녔는걸.
“내가 추위엔 강한 줄 알았어요.”
“강한 게 아니라 무딘 것 같아요.”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는데, 짐짓 리케도르안이 뒤에서 내 양어깨를 붙잡았다.
“그쪽 아니고 이쪽 방향요.”
“아.”
앞을 보니 아니나 다를까. 우리를 안내해주는 시종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바깥 정원에 눈을 빼앗겨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튼 것도 몰랐다. 슬며시 눈을 들어 올리면 리케도르안이 조금 뚱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봐요, 당신 무디잖아.’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좀 멍하니 있는 편이긴 해요.”
나는 솔직하게 인정할 건 인정했다. 그러고는 손을 뻗었다.
‘푸딩.’
속으로 조그만 수호신님을 부르자, 내 안에서 수호신님이 쫑긋 귀를 새운 것 같이 응답하는 기운이 느껴졌다.
‘나와 줘.’
내 부름이 무섭게 포르르 붉은 기운이 뭉치더니 내 품 안에 포옥 안긴 짐승이 등장했다. 내 의지를 느낀 것인지 조그만 고양이 모습이었다.
“잘 잤어?”
-우웅, 냥. 잘 잤다. 인간.
괜스레 깨운 것이 미안해 이마를 쓰다듬어 주었다. 푸딩이는 기분 좋은지 고롱고롱, 목에서 긁는 듯한 소리를 흘렸다. 나는 골골송을 들으며 품에 고쳐 안았다. 따끈따끈. 영체라고는 하나 체온을 가진 동물의 온도는 몸을 딱 알맞게 덥혀주었다.
“봐요.”
나는 고개를 들고는 씩 웃었다.
“이러면 걱정 없겠죠?”
망토를 덮어주고도 내 몸을 걱정하는 것 같기에 푸딩이까지 소환했더니. 어째 리케도르안의 표정은 개운하지가 않았다.
왜 그러지? 나는 눈을 깜빡이면서 품속의 수호신을 꼬옥 껴안았다.
“왜 그래요?”
“……나도.”
“나도?”
리케도르안이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직접 안아다 움직일 수 있어요.”
그가 머뭇거리며 말하고는 제 말에 발긋 뺨을 물들였다. 민망한 듯했다. 아니, 할 것 다 해놓고 이제 와서 이런 말에?
참 귀여운 대공님이었다.
“그건 나도 나쁘지 않은데. 너무 눈에 띄지 않을까요?”
언제는 밤새도록 뭘 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시던 대공님께서 말이지. 난 ‘흐응’ 소리를 내며 입술을 끌어올렸다.
“대공님은 안기만 하진 않을 것 같은데. 아니에요?”
“네?”
“안기 전에 벗길 것 같,”
“이아나!”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는 충분히 들었을 것이다. 리케도르안이 손등으로 입술을 가렸다. 새하얀 목까지 빨개진 것이 보였다.
“……사, 사람이 있는 곳에서 그런 소리는.”
“좀 별로예요?”
“당장 집으로 돌아가고 싶게 해요.”
이상한 곳에서 저돌적이시네. 잠깐 그의 인격이 바뀐 건 아닌가 걱정했지만 붉어진 얼굴은 그대로였다.
현재 우리는 황성에 최대한 빠르게 도착한 상태였다.
본디 프란시아도 함께 출발하기로 했지만 너무 눈에 띈다는 이유로 그녀와는 시간 차이를 두기로 했다. 그동안에 헤르님에 주둔한 성기사단과 신전 쪽 문제를 잠깐 해결하고 온다나.
<아악, 내가 정복해야 했어! 공국이라도 정복했어야 밀리지 않았지!>
<시끄럽군.>
<대공님, 당신 여기까지 생각한 거지? 날 쫓아내고 가려고! 이 더러운 권력!>
물론 여기까지 결정되기까지 양 장미 간의 신경전이 있었으나 승자는 리케도르안이었다. 그 승리자께서 고개를 돌린 채로 작게 날숨을 쉬었다.
“…이아나, 당신은 잘 모르는 것 같아요.”
낮지만 맑게 느껴지는 음색이 귀를 푹 파고들었다.
“당신이 얼마나 눈에 띄는지.”
“내가요?”
나는 눈을 끔뻑였다. 지금 시선에 띌 일이 뭐가 있다고? 더군다나 이곳엔 사람도 별로 없었다. 은밀한 입성이었기 때문이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황성 복도를 지키는 기사가 보였다. 나와 눈을 마주친 기사가 이내 휙 고개를 돌렸다. 거리가 가까워서인지 시뻘게진 얼굴이 고스란히 보였다.
“흐음, 외양을 말하는 거라면 새롭긴 하네요.”
감방에서 만난 이들은 놀랍도록 내 외양엔 관심이 없었다. 한쪽은 같은 귀족이었고 한쪽은 날 죄수로만 보는 간수들이어서 그런가? 도뮬릿에서는 사람들이 내 얼굴을, 정확히는 나를 볼 겨를이 없었다. 시중인들은 나와 일정 시간 이상 함께 있지 못했고, 그중 태반이 복수를 품고 온 이들인 데다가 손님은 머무는 족족 어디론가 떠났다. 이를테면 탄광이라던가…….
‘살풍경한 곳이었지.’
-인간, 너는 무심했고 말이다, 냥.
‘그렇긴 했어.’
고개를 슬쩍 끄덕이며 푸딩의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이를 본 리케도르안이 한 번 더 날숨을 내쉬는 것 같았으나 그는 곧 그래요, 내가 감수할 운명이겠죠. 하고 말한 것도 같았다.
그 뒤로 우리는 황성에서 나온 안내인을 만나 문제없이 그를 따라갔다. 우리는 채 십 분도 걷지 않아 화려한 문 앞에 도착했다. 보통은 홀 전체가 알현실인 전용 성에서 만나지만, 은밀한 알현을 요청한 만큼 다른 곳에서 만나는 것이라 한다.
‘여기도 작아 보이진 않는데 말이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문이 열렸다.
“폐하, 약조한 손님이 오셨습니다. 리케도르안 폰 헤르님 대공이십니다.”
문 앞에서 누군가 우리의 방문을 알렸다. 목소리를 내는 사내와 내 눈이 마주쳤다. 수염을 기른 노년의 남자였다.
“……그리고 일행분이 함께 있습니다.”
그는 나를 가리키는 수식어를 찾지 못한 듯 이렇게 말했다. 하기야 얼굴로 내가 누군지 알아보긴 어려울 터다. 유일하게 참석했던 자리에도 머리색과 눈색을 변형한 채였으니.
“호오, 붉은 장미가 왔는가? 들라하라.”
안쪽에서 낮은 음성이 들렸다. 여성치고는 쉰 목소리가 섞인 낮고 그윽한 음성이었다.
탁.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나는 리케도르안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아주 잠시 푸딩이를 되돌려야 하나 싶었지만 이미 안고 들어와 버린 뒤였다. 그러나 왜일까 얌전히 안겨 있던 푸딩이 짐짓 몸을 곧추세웠다. 귀를 낮게 눕힌 것으로 모자라 이를 드러낸다.
하아악!
-인간, 인간!
‘왜 그래?’
사나운 울음소리를 내는 푸딩이를 말리지도 못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인간, 여긴 위험하다! 위험하다 냥!
푸딩이가 훌쩍 내 품에서 내려와 그대로 털을 곤두세웠다. 발톱마저 드러낸 모습이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사나웠다.
얼른 푸딩, 하고 부르려 할 때였다.
궤애애액!
안쪽에서 푸딩의 울음소리에 답하듯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처음 듣는 짐승의 울음소리였다. 날카로운 칼날이 귀를 후펴파는 것 같다. 듣는 내내 귀가 쨍하고 아파 왔다.
‘윽, 이게 뭐지?’
고통이 커지기 전에 커다란 손이 귀를 감싸 안았다. 리케도르안의 손인 듯했다. 그 사이, 눈을 꾹 감았다가 뜨면 처음 보는 짐승이 푸딩이의 앞에서 파닥파닥 날고 있었다. 아니, 처음 보는 짐승은 아니었다. 그저 여기서 볼 거라곤 생각도 못 한 짐승이었지.
‘……박쥐?’
피막 날개를 가진 짐승은 모로 보나 박쥐였다. 다만 내가 아는 박쥐와는 생김새가 살짝 달랐다. 새카만 날개와 삐죽 튀어나온 송곳니. 여기까지는 박쥐의 모습과 비슷했으나……. 눈동자는 동굴 속 자수정처럼 짙은 보라색이었다. 더군다나 몹시도 커다랬다. 사람의 팔에 앉으면 모두 덮을 만큼.
“폐하, 힘을 거둬 주십시오.”
내 귀를 막고 있던 리케도르안이 말했다. 그와 동시에 안쪽에서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웨스벳, 이리 오련.”
웃음소리의 주인공은 낮고 그윽한 음성이었다. 박쥐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박쥐가 안착한 곳은 누군가의 손등 위였다.
길게 내려온 휘장이 바람에 흩날렸다. 아니, 바람은 아니었다. 문과 창문은 모두 닫혀 있었으니까.
“내 아이가 놀란 모양일세.”
무형의 힘에 의해 저절로 휘장이 올라가고, 그곳에 있던 이가 드러났다.
“실례라는 말은 하지 않겠네, 먼저 우를 범한 건 그대이니.”
여인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검갈색 머리칼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린다. 한쪽 눈을 가리고 머리마저 한쪽으로 흘러내리게 둔 듯한 자연스러운 스타일이었다.
“짐이 부르지 않았다면 베어버렸겠어, 대공의 검이.”
다만 옷차림은 평범하지 않은 제복을 걸치고 있었다.
여인의 얼굴이 차차 돌아가 리케도르안에서 나를 향했다. 우아한 손에서는 지팡이와 비슷한 왕홀이 까딱 움직였다.
“저쪽은 붉은 장미의 짐승인가?”
이윽고 중성적인 하얀 얼굴과 눈에 띄게 아름다운 자색 눈동자가 나를 담았다.
“짐승을 안고 있는 쪽은…… 호오라. 의외의 얼굴인걸.”
나와 같은 자색 눈동자였으나 느낌이 전혀 달랐다. 저쪽이 좀 더 어두운 듯 신비로운 느낌이었다. 아니, 신기하게도 푸른색이 옅게 섞여 있는 것도 같았다.
“이것 참 신기하구나.”
여인이 제 뺨을 괴며 느른하게 웃었다.
“분명 붉은 장미의 수호신인데. 다른 이와 연결되어 있으니.”
그녀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물었다. 직설적인 화법이었다.
“혹시 그대가 바로 전설의 푸른 장미인가 싶은 생각이 드는데, 그러한가?”
무어라 대답하지 못한 사이, 여인이 먼저 눈을 접어 미소했다.
“농일세.”
그녀의 등 뒤로 거대한 왕관과 왕홀, 그리고 한껏 흐드러진 보라색 장미가 보였다. 거대한 제국 황실의 상징이었다.
“이아나 로즈 도뮬릿. 아니, 도뮬릿의 보물.”
스칼렛 셰에라자드.
이 나라의 주인이 내게 호의를 보이며 더욱 깊은 미소를 지었다.
“내 성에 온 것을 환영하네.”
황제가 정확히 내 이름을 불렀지만 나는 당황하지 않고서 고개를 숙였다. 시선은 바닥을 향한 채로. 이미 황제와는 구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에 참석한 연회에서 알현했었으니까. 물론 그때에는 가면을 쓰고 있었으나 황제의 앞에서 쓰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후로는 체이서만 긴밀하게 불려가 가까이에서는 보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내 얼굴을 본 적 있었다. 비록 머리색과 눈 색은 달랐지만 문제는 되지 않을 것이다.
황제씩이나 돼서 그런 눈썰미가 없지도 않을 터이니, 또한, 그때의 변형이 눈 가리고 아웅하는 수준이었단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푸른 장미임을 알아보는 건 별개의 일이었다. 농이라 말했지만 황제씩이나 되어서 그냥 하는 소리는 없을 터. 아니면, 체이서와 함께 인사한 날에도 알고 있었던 걸까.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보통 귀족이 인사할 때에는 황제를 향한 찬사가 동반되어야 했지만 공작급 인사가 되면 단순해진 인사말도 무례는 아니었다.
황제 또한 개의치 않는 듯 고개를 들란 말이 이어 나왔다.
“흐음, 과연 도뮬릿 공작이 불쾌할 정도로 싸고 돌만 하군. 이런 미모의 혈육을 숨길 줄이야. 더구나 정체까지 말이지.”
코앞에서도 알아보지 못했다는 말로 나는 조금 전의 고민이 전자에 가깝다는 것을 알았다. 체이서가 수를 썼는지, 그녀도 이제야 내 정체에 대해 짐작한 듯했다. 혹은 알아보지 못한 모종의 이유가 있거나.
“도뮬릿의 보물이 인사하는 동안에 그대는 무얼 하는가. 헤르님?”
왜 인사도 안 하고 멀뚱히 서 있느냐는 말이었다. 하나 리케도르안은 서늘한 표정으로 황제를 바라볼 뿐이었다.
“헤르님은 격식이 없어도 황실에 충성이 전해질 줄 압니다.”
“흐음, 입만 살았구나.”
아슬아슬한 리케도르안의 태도에도 황제는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헤르님과 황실 사이는 좋은 편이 아니었나?’
원래라면 그러했다. 책 속에서는 전대 헤르님 대공. 그러니까 리케도르안의 부친이 쌓아둔 충성을 리케도르안이 이어간다는 설정이었다. 그는 부친을 증오했지만 갑자기 살해당한 부친의 길을 좇아 충성을 다하는 이이기도 했다. 이는 오랫동안 황실에 충성해온 붉은 장미의 길과도 일치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리케도르안의 태도를 보건대 이 자리를 달가워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황실로 가자고 했을 때도 반가운 기색은 아니었지.’
리케도르안 또한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받아들였지만 흔쾌한 허락은 아니긴 했다. 사실은 껄끄러웠던 걸까. 동행을 허락한 것을 보아선 적대 관계는 아니란 거겠지만…….
“이런 반응은 짐도 달갑지 않네만.”
황제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녀는 느슨하게 머리를 기울였다. 달갑지 않다는 말과 다르게 전혀 그런 것이 느껴지지 않는 얼굴이었다.
“짐을 불쾌하게 만들고자 한 것이 아니라면, 그대들에게 묻고 싶은데.”
“폐하의 질문을 어찌 막겠습니까.”
리케도르안은 한 걸음 물러났다.
“흐응, 이 순간에 나타난 푸른 장미라. 거기다 도뮬릿 공작의 동생.”
그녀의 시선이 나를 쓸어내렸다.
저쪽은 단 한 번 보고서 나를 푸른 장미로 느끼고 있었다. 만약 황제가 프란시아나 리케도르안 같이 장미라면 이상한 일은 아닌데, 한편으로 이상했다. 내가 석판에서 보았던 장미 가문은 총 다섯, 이미 사라진 푸른 장미 가문을 제외하면 넷. 하지만 이 안에 황실은 없었다. 황제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장미라는 얘기도 들은 바 없다.
그런데 그녀는 어떻게 한 번에 나와 푸딩의 연결고리를 알아본 것일까?
“전설 속에나 내려오는 존재를, 다름 아닌 붉은 장미 그대가 데려온 것에 대해서 짐이 어떤 생각을 하겠나?”
“제가 어찌 폐하의 생각을 짐작하겠습니까만.”
리케도르안은 조금 전보다 공손했으나 여전히 황제를 알현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나는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짐이 모르리라곤 생각하지 않을 텐데. 그대는 짐이 가진 ‘보는 눈’에 대해서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순간 침묵하여 말을 아끼는 것은 나를 기만하는 것과 같음을 알고 있겠지.”
황제에게서 일렁거리는 무형의 기운을. 저건 색이 보랏빛이란 것만 다를 뿐 리케도르안이나 프란시아에게서 보았던 익숙한 아지랑이였다.
오싹, 소름이 돋았다.
왜 황제에게서 저런 기운이 보이는 걸까. 석판에 있던 오직 다선 장미 속에 보라색은 없었는데,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아니면, 이제 와 도뮬릿 영애에게서 푸른 장미의 기운을 느낀, 짐의 무능력을 비웃는 것인가?”
내 몸이 장미에 걸맞게 변해가고 있는 건지. 아니면, 본래부터 느끼고 있던 걸 이제야 깨달았는지 몰라도 기묘한 감이 불길함을 암시하는 것 같다.
황제가 왜 장미의 힘을 가지고 있는가. 단순하게 생각하면 간단했다. 장미들은 각각이 가문이었으며 그녀는 모든 가문들을 통솔하는 제국의 주인이었다.
그러니 그만한 힘이 있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닌데. 자꾸만 석판이 떠올랐다. 캄브라캄에서 본 것은 5개의 장미뿐인데……. 하는 내가 줄곧 석화로서 보았던 그림의 잔상이. 그곳에는 5개의 장미뿐이라는 생각이.
저기, 황제의 뒤로 새겨진 보라색 장미가 더욱 부각되어 보였다.
“말하라, 헤르님의 주인.”
황제가 가벼이 침묵했다.
“감히 제국의 주인을 능멸하려 한 것인가?”
이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기운이 황제에게서 흘러나왔다. 이에 따라 리케도르안 또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어찌 제 충성을 알아주시지 않는지.”
“충정?”
황제의 팔걸이에 앉은 박쥐가 날개를 펼쳤다. 황제는 천천히 입술을 입맛 다시듯 우아하게 움직이다 와그작 입술을 콱 깨물었다. 사납지만 그조차 고아하게 보일 정도로 위압감이 드러났다.
“짐은 오랫동안 사라진 푸른 장미의 등장이 달갑지 않아. 기적이 도려내진 시대에 다시 등장한 기적의 존재는 혼란을 야기하기 좋지. 아니 그런가?”
그녀가 뺨을 괸 채 눈을 가늘게 좁혔다.
“짐이 먼저 찾아냈다면, 이리 좌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짐은 모든 과거를 기억해. 푸른 장미의 등장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그리고 천천히 말이 이어졌다.
“과거 ‘장미 제전(祭典)’이 그러했듯이 말일세.”
장미 제전. 처음 듣는 말이었지만 황제의 뉘앙스로 보아서는 좋은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짐의 역할은 제국의 평화를 수호하고 지키는 바. 이 순간에도 저 개화하지 못한 가녀린 꽃을 꺾어, 씨앗을 삼켜버릴 수 있네.”
한순간에 살벌해진 분위기가 작지 않은 방을 짓눌렀다. 이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기라도 한 듯 리케도르안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불안을 느꼈다.
방에는 우리 세 사람을 제외하고서 아무도 없었으니까.
“위대하신 폐하의 결정에 어찌 한마디를 붙이겠습니까마는. 그리하신다면 폐하. 제가 지켜보지 않으리란 것도 아실 겁니다.”
“…….”
“현명하신 분이 아니셨습니까.”
폐하의 말이 여차하면 눈앞의 나를 슥삭 해버리겠다는 말임을 모르지 않았다. 웃고 있지만 위압감 가득한 눈으로 나를 보는데 어찌 모를까. 그보다는 조금 전부터 저 보랏빛, 그녀의 눈에 기묘하게 일렁이는 보라색과 푸르른 색이 섞인 빛에 신경이 쏠렸다.
자꾸만 불안함을 일으켰다. 본래 대부분의 일에 무심한 나인데도. 처음에 푸딩이가 나가자고 했을 때 확 돌아서야 했나.
‘이래서야 푸딩이가 나를 바보 같다 말해도 할 말이 없겠는걸.’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내 앞으로 긴 팔이 뻗었다. 리케도르안의 것이었다. 유사시엔 그대로 심각한 사태, 싸움에도 임하겠다는 듯이 그의 턱이 단단하게 다물려 있었다.
“뭐, 좋아.”
황제가 픽 웃었다.
“사실 지금 그대의 뒤에 있는 영애는 푸른 장미가 아니더라도 문제일세. 헤르님.”
리케도르안을 향한 호칭이 바뀌었다.
“그대가 데려간 보물로 인해 일어날 일을 생각해보게. 그대는 아둔한 자가 아니지. 한쪽에서는 전쟁도 불사하겠다 하지 않나? 그대는 어떤 각오를 품고, 씨앗을 이곳에 데려온 것이지?”
황제가 말한 한쪽은 당연히 체이서일 터였다. 왜, 굳이 불화의 씨앗을 이곳에 데려왔냐고, 맵씨있는 언어로 따져묻고 있었다.
“이곳으로 저를 부르신 것은 폐하이십니다.”
“그렇지. 짐이 그대를 불렀네. 그대가…… 이런 씨앗을 가져올 줄은 전혀 모르고.”
황제의 눈이 흘끗 나를 향했다.
“‘푸른 꽃’이 나타난 이상 그대들은 저 영애를 경애하며 짐보다도 더욱더 따르겠지. 때로 경쟁과 희생을 불사하고서.”
그녀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제국의 안위를 생각하는 짐으로서는 고려하지 않을 수 없네. 이해하지?”
한마디 한마디가 위협적이었다.
“깨닫는 순간 저 꽃을 말살해야 하는 것인가 고민도 했지.”
나를 바라보던 자색 눈이 가라앉았다. 그와 동시에 그녀에게서 느껴지던 기운이 더욱 강렬해졌다.
“하늘 아래 두 태양은 없어.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짐의 생각도 이해하리라 믿겠네.”
이유는 모르겠지만 황제가 푸른 장미를 지나치게 경계하는 것만은 알았다. 불안의 원인은 이것인 듯 했다. 이곳에 오기로 한 선택이 잘못되었던 걸까?
그 순간이었다.
“하지만 역시, 내키지 않아.”
황제가 손을 늘어트렸다.
“이건 질시지. 역사가 아주 오래된.”
나와 리케도르안을 위협한 무형의 기운은 일순간에 사라졌다. 눈앞의 눈에는 분노가 가시고 그 자리를 흥미가 메웠다.
“그것도 이를 느끼는 감정이, 내 것이 아닌 질투라면 더욱이 말일세.”
흥미라니… 여기서? 순식간에 경계를 풀어버린 이 상황이 이해가지 않았다. 나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리케도르안은 짐작이 가는 듯 표정을 풀지 않았다.
“……강인한 분이시니 이겨내시리라 생각하겠습니다.”
“흐음, 여태까지와 마찬가지로 말인가.”
그렇게 말을 주고받던 황제가 돌연 고개를 돌려 나를 향했다.
“아직 저쪽의 영애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인데. 알려주지 않았나?”
“예. 아직은 모두 모를 것이나 오늘 내로 모두 알게 될 것입니다.”
“그대가 시한부임은 알고 있는가?”
훅 들어오는 직구였다. 리케도르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태연하게 대답했다.
“예, 압니다.”
“그렇단 말이지.”
황제가 천천히 상체를 바로 세웠다. 흘러내린 머리칼이 사르르 흩어졌다. 언뜻 나타났다 사라졌지만 나는 똑똑히 목도했다.
“그렇다면 짐에 대한 사실만 알면 되겠군.”
그녀가 재미있다는 듯 턱을 쓰다듬었다. 또,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뒤의 장미가 그려진 휘장이 흩날렸다. 이제는 알았다. 아니, 보였다. 바람처럼 불고 있는 보랏빛 힘이 휘장을 흔들고 있다는 것을.
“황실이 실상 불완전한 장미라는 사실과 불완전체인 주제에 군림하고 있다는 것 또한. 아, 이것도 알려주어야 하나?”
그녀는 즐거워 보였다.
“어여쁜 영애에게 험악한 것을 보일 짐의 마음이 조금 걱정되는 군. 그래, 도뮬릿 영애, 험한 것을 잘 보나?”
“네?”
내가 무어라 반문하기도 잠시, 황제가 머리를 쓸어올렸다. 한쪽 눈을 가린 곳의 머리가 부드러이 올라가며 아래로 흉터가 나타났다. 눈꺼풀 위를 가로지르는 실로 거대하고 깊은 흉터였다.
화상을 입은 듯 뭉게지긴 했지만 군데군데 나타난 것을 조합해보면, 아마도 이마부터 관자놀이까지…… 본래 문신이 있었던 것 같았다. 장미 문신이.
“짐이 ‘불완전함’에 저항한 흉터지. 쉽게 말해 장미의 힘을 가지고 싶지 않아서 푹.”
그녀가 제 눈을 찌르는 시늉을 했다.
“한 것이라네. 한심한 자태지.”
“…과거 여러 차례 말씀드렸듯 그 자리에 앉아 계신 한 스스로를 낮춰 말씀하실 필요는 없다 여겨집니다.”
“권력은 짐이 쥐었다 이것인가?”
황제가 후후, 낮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긴 손가락으로 자신의 뺨을 툭 내리쳤다. 나는 황제가 이야기한 것을 정리하느라 바빴다. 늘 무심하고 느릿한 나지만 이마저 그냥 지나갈 수는 없었다.
황제, 황실은 석판에 없던 보라색 장미다. 보라색 장미는 불완전한 장미. 그리고 저 황제는 힘이 갖고 싶지 않아 제 눈을 찔렀다…. 머리가 빠르게 돌아간다.
리케도르안은 짐승이 되는 저주와 수명이 깎여나가는 저주에 걸렸다. 완전한 장미임에도 이럴진데 불완전함이란, 더욱 큰 대가를 치르게 한 건 아닐까?
감이지만 황제의 태도를 보아서는, 내 추론이 틀리지 않은 것 같았다. 그 사이 황제는 리케도르안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내가 언제부터 헤르님에 몸을 의탁했는지에 대한 시기 이야기였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가린 채,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그래. 도뮬릿에서 벗어났나.”
“예, 헤르님의 보호 아래 있습니다. 로제니아 또한 그녀를 수호할 것입니다.”
“벌써 흰장미까지? 호오라. 쉽게 건들지 말아라?”
황제가 소리내어 웃었다.
“뭐, 그래 알았네. 짐도 이리 어여쁜 영애를 세상에서 지워버리는 건, 아쉽다 생각해.”
나를 향해 휘어지는 눈은 위압감이 넘쳤지만 동시에 매력적이었다. 이런 게 군림하는 이들의 카리스마인가 싶었다.
“아무튼 간에 이렇게 짐의 소환에 기꺼이 응한 바가 있을 터. 바라는 바가 있는가?”
황제가 손잡이에 앉아 있던 박쥐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도뮬릿의 이야기를 꺼내며 황성으로 오라 초대한 것은 황제 쪽이었다. 그러니 원하는 것이 있을 터, 그럼에도 그녀는 능숙히 우리를 협상 테이블로 인도했다.
“짐은 단도직입적인 것을 좋아해.”
이리저리 재지 말고 본론만 이야기하라는 소리로 들렸다.
“덧붙이자면, 능글능글한 도뮬릿 공작의 낯짝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편이야.”
그녀는 웃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위태롭게 아름다운 것들은 늘 그렇듯 독을 품고 있지.”
도뮬릿이 먼저 청했으나 이쪽에게 기회를 주었다는 뜻을 내포하는 말이기도 했다.
“폐하께선 제가 오래 살지 못하리란 사실을 익히 알고 계십니다.”
“그렇네만. 정확히는 달갑지 않은 이 힘이 알려주는 거지만.”
황제가 가린 눈을 톡톡 두드렸다. 아무래도 황제가 가진 힘은 정보와 관련된 힘인 것 같았다.
“예, 하여 저는 여기 있는 이아나와 함께 캄브라캄으로 가길 바랍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제가 바라는 것은 이것입니다.”
황제가 호오, 하고 감탄을 터트렸다.
“캄브라캄에서 그대의 저주를 아예 풀어버리겠다?”
“그렇습니다.”
정보와 관련한 힘뿐 아니라 아는 바가 많은 모양이었다. 하기야 황제씩이나 되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처음의 비정상적인 분노를 가라앉힌 뒤로 황제는 줄곧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짐도 제국의 기둥인 대공이 사라지는 건 바라는 바가 아니야.”
이미 헤르님은 제국을 뒷받침하는 거대한 가문이었다. 권력자가 사라진다는 것은 혼란을 야기할 테니. 수장이 갑자기 사라져서야 황실도 곤란한 일이었다. 물론 리케도르안이 사라져서 취할 수 있는 이득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지금의 평화를 유지하고 싶은 듯했다. 하나 다음 순간 알았다.
“그러니 허락은 해줄 수 있네.”
그녀는 녹록하지 않은 인물이었음을.
“다만, 조건이 있어.”
“…무엇입니까?”
그녀가 눈을 휘며 군주의 자리에 걸맞은 웃음과 함께 말을 이었다.
“짐에게 필요한 걸 가져오게.”
거래에는 오가는 것이 있는 법. 대가를 확실히 따지는 인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대들에게 캄브라캄을 무상으로 제공했던 것도 특혜였네. 알고 있겠지?”
“무엇을 원하십니까?”
“그대는 시원시원해서 참 좋아.”
황제가 다리를 꼬며 고개를 기울였다. 짐짓 우아한 자세였으나 딱 떨어진 제복에서 위엄이 흘러넘쳤다.
“조건은 말했듯 짐에게 필요한 것을 가져오는 것.”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짐의 왕관.”
황제가 긴 손가락으로 툭툭 제 머리를 두드렸다.
“짐이 아끼는 티아라 말일세. 알고 있지? 잃어버린 것을 찾고 싶네.”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황제의 티아라.
‘……이게 여기서 나온다고?’
원작에서 주요한 소재로서 긴 이야기를 차지했던 것이기도 했다. 물론 나는 이 티아라가 어디에 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나 길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황제의 질문이 내게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도뮬릿 영애, 그대는 푸른 장미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나?”
“아니요.”
나는 공손하게 고개를 저었다. 능력은커녕 내가 무슨 능력을 가진지도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다. 사라진 지 오래된 푸른 장미의 기록은 드물었다. 헤르님의 방대한 자료도 푸른 장미의 몇몇 능력을 파악했을 뿐 이외의 것은 찾지 못하고 있었다.
“푸른 장미의 자료는 소실된 지 오래지. 누군가가 작정한 듯이 모두 지워버렸네.”
“…….”
“그 세력은 그대도 아는 세력이지. 짐작이 가겠지?”
어쩐지 어떤 세력이 저질렀을지. 알 것 같기도 했다. 흑장미.
“하지만 황실에는 자료가 남아 있네. 대부분 상태가 좋지.”
이야기를 건네는 건 보여줄 의향이 있단 소리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시원하게 일갈했다. 팔짱을 끼며 피식 웃으면서.
“그대들이 짐의 티아라를 가져온다면 내 기꺼이 그것도 줌세.”
어찌 보면 이것을 어디서 어떻게 가져오면 좋을지 모른다면 한참이 걸렸을지 모를 문제였다. 그러나…….
나는 알았다.
이건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이었다는 것을. 그도 그럴 것이 나는 ‘황제의 티아라’ 이것의 행방을 아주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최근의 행방도 알고 있다.
‘그거…… 체이서한테 있었지.’
나는 얼굴을 쓸어내리고 싶었다.
황제의 티아라는 도뮬릿 저택 지하에 고이고이 잠들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것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옆에서 리케도르안이 평온하게 물었다.
“그대는 아는가?”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짐도 그렇네.”
황제가 재밌다는 얼굴을 했다.
“그 얼굴은 뭐지? 뻔뻔하군, 대공.”
그녀는 리케도르안의 의도를 파악했다는 낯이었다.
“그건 이제부터 자네가 찾아야지, 안 그런가?”
황제는 시간이 부족한 이에게 시간의 자비를 주지 않았다. 공평하지만 냉정했다.
“나가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