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튿날.
제이르와 다시 만났다. 이번에 만난 장소는 책이 산처럼 쌓여 있던 방은 아니었다. 의외로 꽃이 만발한 정원이었다.
“어쩐 일로 이런 곳에서 다 만나자고 하네요.”
“아, 서재는 다른 보조 마법사들이 차지하고 있어서 말입니다.”
보조 마법사? 제이르의 부하 같은 사람인가.
“사람이 많나 보네요.”
“그렇다기보다는…….”
제이르가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을 하며 대꾸했다.
“아가씨께서 마주칠 이들을 주의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아, 도뮬릿의 첩자일 수도 있으니까?”
“그럴 가능성도 있겠습니다만, 비단 그렇다기보다는 솔직히 헤르님 성에 있는 사람이라고 다 믿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보니 말이지요.”
그가 설명했다.
“완전무결한 가문은 없듯 저희 또한 도뮬릿 외에도 적이 없는 건 아닙니다.”
흐음, 내부 첩자는 어딜 가나 경계의 대상이지.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라 끄덕였다. 나를 가둬두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혹시라도 있을 위험 요소로부터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니까.
아울러 리케도르안이나 그의 수하들이 나를 배려해 말을 고르는 모습이 느껴질 때마다 기분이 묘했다.
“그래서 왜 정원에서 만나자고 한 거예요?”
그런데 정원에서 보기엔 이런 곳은 뻥 뚫려 있지 않나. 오히려 보안에 취약할 것 같은데.
“이곳은 특별한 정원입니다.”
제이르가 이곳은 아무나 올 수 없는 정원이라 보안이 철저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피어 있는 장미를 가리켰다.
“붉은 장미 중에서도 헤르님에서만 피는 장미입니다.”
탐스럽게 피어난 붉은 꽃, 보통 장미보다 크기가 훨씬 컸다. 얼핏 보면 크기가 동백만 한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생기가 훨씬 넘쳐 보이며 향기 또한 진하기 그지없었다.
“아득한 세월동안 오직 헤르님 영지에서만 자라던 꽃입니다. 수장의 안전을 지키는 장미라고도 불립니다.”
이곳엔 리케도르안이 허락한 자가 아니면 발조차 들일 수 없다고.
“아마 각 장미별로 이런 공간이 있을 겁니다. 도뮬릿에는 없었습니까?”
“아…….”
나는 문득 체이서의 정원을 떠올렸다.
흑장미로 가득했던 정원.
그러나 그곳엔 흑장미만 있지는 않았었다. 붉은 장미만 피어 있는 지금 이 정원과 다르게 그곳에는 두 가지 장미가 공존했다.
“있었던 것 같네요.”
도물릿의 정원 또한 체이서 그 남자를 닮아 흑장미가 유달리 탐스러웠다. 거기다 수줍게 피어난 주황 장미가 군데군데 장식하듯 피어 있었지. 내가 좋아했던, 나름의 볼거리가 있던 곳이었다.
“아무튼 안전하다니 다행이네요. 당신이 건넨 자료 모두 봤어요.”
“빨리 보셨군요.”
“밤을 새웠으니까요.”
사실 리케도르안이 내 방 앞에서 밤을 새운다는 얘길 듣고 정말 내 방에서 재울 생각을 했었는데……. 한 가지 생각으로 인해 관뒀다.
‘진짜 문신 새기자고 하면 어떡하냐?’
솔직히 말해서 나로선 땡큐…… 가 아니라 크흠. 뭐 내가 혼전 순결주의자라거나 이런 사람은 아니다. 근데 저쪽에서 임하는 태도가 다르니 어찌 신경이 쓰이지 않겠나. 온몸을 부딪친 사람에게는 진심을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다.
아울러 한 가지 이유를 더 대자면, 물리적인 것도 있다.
아니, 수하가 대놓고 장난이 아니라잖아. 거기다 다른 말이지만 이성이 없는 모습이 대책없이 던지는 모습만 봐도…… 내가 아침에 일어날 수는 있는가 싶은데.
‘그놈의 처음이에요! 소리 그만 듣고 싶은데 말이지.’
이제 와서 리케도르안의 처음을 누굴 줄 수는 없으니 결국은 내 거란 소린데……. 어째 다 차려놓은 밥상을 외면한 기분이긴 했다.
“흠흠, 보고서 얘기로 들어가서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던데.”
“어느 부분 말입니까?”
아무튼 리케도르안이 문 앞에서 밤을 지새우는 동안 결국 나도 방 안에서 지새웠다는 얘기다. 보고설 모두 읽으면서 느낀 건데, 대부분은 내가 아는 이야기더라. 책 속에서 읽었던 리케도르안이 감방에 있어야만 했던 이유라거나 전대 헤르님 대공의 만행. 그리고 내 감방 생활 이야기와 프란시아를 통해 들은 푸른 장미의 이야기 등등.
피차 서로 아는 김에 서론은 치우고 본론, 즉 처음으로 알게 된 이야기를 꺼냈다.
“캄브라캄이요. 오래전에는 감옥이 아니었다던데?”
그랬다. 나와 리케도르안이 있던 감옥은 본래부터 감옥이 아니었단다. 오래된 건물인 건 알았지만……. 놀랍게도 수없이 오래전엔 영혼을 묶거나 정화, 진정시키는 신전이었다고 한다.
“아, 거기까지가 저희가 미리 찾아낸 이야기입니다. 저희는 어째서 붉은 장미의 힘을 가지고 태어난 대공가 자제를 가둔 곳이 하필 캄브라캄의 지하 수감실이었나. 근원적 의문을 파고들었으니까요.”
제이르는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을 이었다.
“그래서 붉은 장미는 아주 오래전부터 후계자들을 그곳으로 보내왔던 걸 알게 되었지요.”
“예전에 신전이었으니까?”
“예, 아직 그런 힘이 남아 있다는 모양입니다. 영혼을 묶고, 정화시키는 것이지요. 그래서 황실에서도 그곳을 특별 관리하는 겁니다. 고대의 힘이 남은 곳이니까요.”
고대의 힘, 내가 지하 감방의 동굴에서 본 것도 그것과 관련 있는 것일까? 그럴 것 같았다.
“그래서 저희 또한 ‘푸른 장미’를 찾으면 각하와 함께 그곳으로 가게 할 생각이었지요.”
“저주를 풀게 하려고?”
“예. 장소는 그곳이 되어야 한다는 것까지는 확인했습니다. 문헌을 통해서요. 보셨습니까?”
“네, 봤어요.”
보고서에는 앞으로의 계획 또한 쓰여 있었다.
“그럼 내가 할 일은 감옥으로 돌아가, 저주를 푸는 것이고요?”
“일단 푸른 장미와 또 장소가 필요하니 이론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제이르가 망설였다. 그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들의 보고서는 꼼꼼하고 일견 완벽해 보였지만 한 가지가 빠져 있었다.
“그곳에 도착한 뒤에 어떻게 하느냐. 그건 당신들도 모른다는 것이죠?”
푸른 장미가 ‘어떻게’ 저주를 푸느냐. 이것은 적혀 있지 않다.
“……예.”
푸른 장미가 무효화를 시킬 수 있는 건 맞다. 그 장소가 캄브라캄이 된다는 것도. 그러나 아무리 뒤져도 푸른 장미가 어떤 방법을 쓰는지, 정확하게는 어찌 힘을 쓰는지 모른다는 거다.
문제는…….
‘나도 모른다는 거지.’
이제야 푸른 장미가 무엇인지 알게 된 내가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혹시나 싶어 내 안에 몸을 숨긴 푸딩이에게도 물어봤더니 모르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추측하기로는…….”
“푸른 장미의 수호신과 관련 있을까요?”
“예. 마침 그 말을 하려 했습니다.”
그럴지도 모른다. 수호신들은 생각보다 자기 장미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니까. 푸딩이만 해도 가르쳐주지 않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근데 나 내 수호신에 대해서 잘 몰라요. 내게 없기도 하고.”
“예?”
제이르가 놀란 얼굴을 했다가 수긍했다.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다며 중얼거리는 것도 같았다.
‘프란시아는 알고 있을까?’
난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모를 것이다. 알았다면 진작 재잘재잘 이야기해 주었을 테니까. 사실 이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역시…….
‘체이서인데.’
나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체이서, 내 오빠를 가장한 남자가 알려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 정보를 알 것 같으면서도 체이서와 가깝고, 그러나 체이서의 편은 아니면서 내 편을 들어줄 수 있는 자.
……난 이미 그런 사람을 알고 있네.
“혹시 헤르님에서 발테이즈 후작과 연락 안 돼요?”
이미 프란시아를 통해 연통을 넣은 참이었다. 그러나 신전을 잠시 떠나온 프란시아보다는 헤르님에서 넣는 게 빠르지 않을까.
“발테이즈 후작요? 설마 그…… 후작을 말하는 겁니까? 캄브라캄의 지배자?”
“저희가 아는 발테이즈가 또 있었나요?”
제이르가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내가 덤덤하게 응수하자 차차 차분함을 되찾았다.
“아가씨,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나…… 연락을 취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재고해주시겠습니까?”
“잘 생각해봐요. 그쪽도 장미라면서요. 노란 장미.”
사실 내가 푸른 장미인 것 이전에 르나그는 푸른 장미가 아니라도 날 도와줄 것 같았다. 내가 근거를 들어 설득하자 제이르도 차츰 감화되는 기색이었다.
“으음, 그의 협조를 받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제이르가 뒷목을 긁적였다.
“도뮬릿의 편 아닙니까?”
“아니에요.”
그렇게 대답한 동시에 제이르의 뒤편으로 누군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한 사람이 아니었다. 리케도르안? 그리고 프란시아?
두 사람이 경쟁이라도 하듯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내 편을 들어줄 거예요.”
나는 일단 마저 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주인을 등지느라 접근을 눈치채지 못한 제이르가 마침내 수긍했다. 깨달았다는 듯이 씩 웃으면서.
“아, 약혼 관계셨지요!”
목소리가 매우 우렁찼다. 그러고도 그는 생각에 골몰하느라 지척에 온 리케도르안을 눈치 못 챈 것 같았다.
“두 분 깊은 사이셨습니까?”
……음, 그걸 지금 굳이 물어야 할까. 나는 슬쩍 리케도르안의 표정을 살폈다. 리케도르안은 몇 걸음을 앞둔 채로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그러고는 잠시 제이르의 뒤통수를 응시…… 아니 차갑게 노려본 것 같았다. 그리고 프란시아는 재밌다는 듯이 흥미진진한 눈으로 리케도르안과 제이르를 번갈아 봤다.
“그럼 발테이즈 후작을 이쪽으로 불러도 좋겠군요.”
“뭐…… 네…… 음.”
그럼 일단 나야 좋은데. 가장 최우선 과제는 리케도르안의 저주를 풀고 생명을 구하는 거니까.
하지만 아무래도 나와 생각이 같으신 헤르님 대마법사님께서는 리케도르안의 목숨을 구한다는 사실에만 여념이 없는 나머지 한 치 앞을 못 보신 게 분명했다.
“확실히 약혼 관계시라니 협조를 구하기도 쉽겠군요. 그쪽도 강력한 장미니 아가씨 보호를 맡겨도 좋고요.”
……이 사람이 이렇게 눈치가 없는 인간이 아니었는데. 보스를 살리겠다는 의지가 정말 강하긴 한 모양이었다. 보다 못한 프란시아가 한마디 했다.
“대공님, 당신 보좌는 눈치가 좀 없는 것 같다.”
조금 전까지 흥미롭게 웃던 프란시아의 눈은 식어 있었다.
“듣자하니 뻔히 나를 두고, 다른 장미를 끌어들이네?”
음, 그쪽이 화가 난 걸까. 나는 눈을 슬쩍 굴려 리케도르안을 향했다. 옆에서 히익, 가, 각하!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제이르는 이제야 그의 존재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때는 이미 늦었지만.
다행히 나는 별말 안 한 것 같은데. 이게 다행인 건지, 스스로 되새겨보는데 문득 손이 붙잡혔다. 리케도르안이 내 손끝을 잡고, 표정을 굳혔다.
“리케도르안?”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약혼.”
“응. 하긴 했어.”
없는 사실은 아닌지라 수긍했다. 날 조사했으니 그도 모르진 않을 것 같은데. 아닌가? 그러나 리케도르안은 정말 몰랐던 것처럼 아니, 그보단 진짜인 줄은 몰랐던 것처럼 충격받은 표정을 했다.
……당신 몰랐어?
그는 마치 버려진 강아지 같은 낯을 하다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천천히 표정을 가라앉혔다. 그러더니 진지하게 입술을 떼었다.
“나랑은 결혼해.”
……네?
정신 차려보니 그가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또박또박 말했다. 떨리는 음성으로.
“아니, 겨…… 결혼해주세요.”
어느새 붉어진 눈가가 그렁그렁했다. 그러려고 의도한 것인지 꾸며내기라도 한 것인지 몰라도.
“……잘 ……할게요.”
“뭘 잘해?”
“……밤새도록?”
파괴적이었다.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만 뻐끔거리고 있었더니, 누군가가 나를 대신해 입을 열었다. 프란시아였다.
“와, 끝내준다.”
나도 모르게 시선을 돌리면 산뜻하게 웃는 얼굴이 있었다. 표정은 흡사 자애로운 성녀의 얼굴을 하고서.
“욕해도 돼요, 언니? 응?”
……하며 해맑게 물었다. 물론 여기에 리케도르안이 미간을 찌푸렸음은 물론이었다.
“대공 각하께서 줄곧 저렇게 꼬셨어? 언니는 저런 게 좋아?”
“어…….”
좋으냐고 물으면 싫지는 않은데, 대답은 무어라 할 수가 없지. 이 상황에? 솔직한 말이 목 끝에서 나올 듯 말 듯 했다. 그러나 프란시아가 먼저 내 표정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흐응, 언니!”
프란시아가 내 손을 양손으로 잡았다.
“그럼. 나도 저렇게 꼬시면 돼? 나 봐줄 거야?”
목소리를 낮추긴 했으나 내게는 몇 년 전의 어린 모습이 겹쳐 보일 뿐이었다. 나는 그녀의 이마를 아프지 않게 살짝 두드렸다.
“아니, 넌 너다운 쪽이 어울려.”
엄지로 프란시아의 손등을 톡톡 쳐주었다.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좋아, 이렇게 언니만 열심히 보면 된다는 거지? 맞아, 나한테도 기회가 있어야지.”
프란시아가 내게 팔짱을 꼈다. 참으로 자연스러운 일련의 흐름에 나조차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언니 언니, 푸른 장미는 모든 장미를 굽어 보살펴야 한대요.”
“보살펴?”
“네. 원래는 언니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였으니까요.”
이제는 아니더라도 여전히 푸른 장미를 향한 각인 같은 것이 남아 있다며, 프란시아가 덧붙였다.
“그러니까 저한테도 무관심하면 안 돼요. 음, 그러니까 흰 장미랑 붉은 장미만 예뻐해 줘.”
프란시아의 말속에는 리케도르안과 자신을 말하고 있었지만 뉘앙스는 붉은 장미도 선심 써서 넣어준다는 느낌이 강했다. 이를 못마땅하게 보던 리케도르안이 막 입술을 달싹일 때였다.
“각하!”
아주 멀리서 외침이 들려왔다. 낯선 이의 목소리였다. 그 소리는 결코 작지 않아 내게도 들렸다.
감각이 예민한 리케도르안은 더 크게 들었을 것이다.
이어 이쪽으로 새 한 마리가 날아왔다. 조그만 카나리아 같았는데, 발목에 긴 줄이 감겨 있었다. 그리고 줄 끝에는…….
“편지?”
흰 봉투가 매달려 있었다. 척 봐도 범상치 않은 봉투였다.
“아, 서신이 온 겁니다.”
“서신이라니요?”
설명한 사람은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던 제이르 쪽이었다.
“이곳은 각하께서 허락한 이가 아니면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니까요. 그래서 밖에서 청을 할 일이 있을 땐 이렇게 새를 보내곤 합니다.”
“동물은 되고요?”
“그렇지요.”
참 신기한 체계네.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리케도르안이 봉투를 열었다. 그 순간 봉투에서 희미한 금빛이 흘러나왔다.
“마법인가.”
리케도르안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마법? 리케도르안의 손에서 빠져나온 편지가 저절로 펴졌다. 그리고 읽어보던 리케도르안의 표정이 굳었다.
“무슨 내용이길래 그래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프란시아가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가 함께 표정이 굳었다.
왜 그러지?
“황실의 문양입니다.”
제이르가 옆에서 작게 설명했다. 그제야 봉투 밖에 새겨진 장미가 보였다. 장미와 왕관, 그리고 왕홀. 확실히 도뮬릿에서도 본 적 있었다. 나를 초대하는 황궁 무도회 초대장을 보았을 때.
“매우 황당하네.”
프란시아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이거, 언니한테도 보여줘요.”
“…….”
나? 내가 저런 편지를 볼 이유가 무에 있다고……. 그러나 리케도르안은 순순히 내게 편지를 넘겼고, 나는 자연스럽게 내용을 보게 되었다.
중간중간 미사여구를 제외하면 핵심은…… 이런 내용이었다.
「……하여, 도뮬릿의 보물이 그대의 성에 있다지?」
도뮬릿의 보물.
이는 다름 아닌 나를 말하고 있었다.
「도뮬릿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는데, 어찌 생각하나. 나는 보류하고 있네만.」
문제를 제기한다. 여기 있는 누구도 이 말의 뜻을 모르지 않을 터였다. 그렇게 함께 보던 리케도르안이 그랬듯 내 표정도 슬며시 굳어졌다.
그리고 마지막, 편지의 주인이 물었다.
「어떤가. 황궁에 오는 것은?」
편지의 주인이 누군지는 익히 짐작이 가나 조금은 장난스러운 기색이 있는 물음이었다. 고개를 들면 나를 향한 시선들이 느껴졌다.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놀라거나 당황해서는 아니었다.
천천히 생각을 정리하고, 또 정리했다.
나는 눈을 한번 굴렸다.
“내 오빠가 전쟁이라도 하자던가요?”
차분하게 흘러나온 말에 움찔 어깨를 떨었다. 아니, 어깨를 떤 사람은 제이르뿐이었다.
프란시아는 태연하게 리케도르안을 쳐다봤다.
“비슷한 말을 하긴 했죠?”
리케도르안은 대답이 없었으나 그의 침묵은 긍정에 가까웠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슬며시 시선을 피했으니까.
“별것 없는 말이었어.”
그가 고개를 돌린 채로 말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금세 존댓말로 흘러나왔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하긴 했구나.’
하기야 그 남자라면 능히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체이서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면 그쪽을 믿을 수 없었으리라. 특히나 리케도르안의 반응을 보아선 체이서가 무언갈 해도 제대로 한 것 같은데.
“이아나,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공간에 있을 수 있어요.”
리케도르안이 확신을 담아 말했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내게로 돌아온다.
“헤르님은 충분히 견딜 수 있어요.”
때로는 무의식에서 나온 표현이 진심을 대변하기도 한다.
견딘다.
아무리 헤르님이라 한들 도뮬릿의 공격에 태연할 수는 없단 얘기였다. 그렇다고 당장 돌아가야겠다, 이런 생각이 든 건 아니었지만……. 아니, 정말 그러한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또 이러네.’
머리 한구석, 그리고 마음 한편에서 도뮬릿으로 돌아가야 한다, 외치고 있었다. 내 의지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었다.
“언니, 신전도 좌시하지 않을 거야. 결코.”
프란시아가 생긋 웃었다. 자애로운 낯이었으나 그 위로 결연한 표정이 스쳤다.
“대공 각하의 말처럼 언니는 언니가 하고 싶은 대로 뭐든 할 수 있어.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줄게.”
그녀가 아직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 내 팔을 잡았다.
“있고 싶은 곳에 있어.”
그녀 또한 확신에 찬 어조였다. 사실 갑작스럽게 진행되는 상황에 얼떨떨함이 없진 않았던 차라 이 말이 고맙게 느껴졌다. 난 작게 미소했다.
“그래, 고마워.”
실상 나는 내가 보호받아야 한다는 생각도 누군가에게 이렇게까지 소중히 여겨질 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못났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으나 그저 보통 이들이 생각하듯 스스로를 평범했다 여겼던 그런 게 있다. 그렇기에 이 순간 남의 이야기를 보듯 초연한 듯한 기분이 든다는 것.
-인간, 그건 그냥 느긋한 거다, 냥.
‘그런가?’
하긴. 지켜주겠다고 나서는 이들이 워낙에 쟁쟁한 데다 나보다 더 아우성이라 이쪽은 도리어 느긋해진 걸지도 모른다.
웃다 말고 검은 그림자가 앞으로 어른거리는 듯했다. 이런 기분은 착각이었으나 어쩐지 이곳이 도뮬릿 저택 같고, 체이서가 거짓말처럼 앞에 나타날 것 같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4년이 너무 길었던 걸까.’
매일매일 보던 얼굴을 보지 못하는, 이곳이 아직은 완전히 익숙하지 못한 탓일까. 어쩔 수 없이 도뮬릿의 생각과 그 남자의 낯이 스쳐 지나가곤 했다. 관성처럼 말이다.
“이아나, 잠깐 다녀올게요.”
그사이 리케도르안은 프란시아와 이야기를 나누더니 자리를 잠시 비우겠다고 했다. 정원 밖 대기하는 이와 이야기를 잠깐 나눠야겠다고. 프란시아 또한 리케도르안과 함께 다녀오겠다고 했다. 거기에 제이르까지 자리를 비우니 나는 금세 혼자 남아 있게 되었다.
‘이곳이 헤르님 성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니.’
제이르가 이곳은 아무도 오지 않는데다 안전할 테니 안심하고 있어 달라고 했다. 그 말은 사실일 거다. 나는 눈을 크게 깜빡였다. 홀로 남으니 도리어 아무런 생각이 없어지는 듯했다.
눈앞, 붉은 장미 향기에 취할 것 같았다.
“황성이라…….”
모두가 사라지니 생각의 방향은 조금 전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갔다. 아무도 딱 잘라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서신의 주인은 ‘황제’일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나라에서 리케도르안, 헤르님 대공에서 말을 편히 할 수 있는 사람은 황제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생각의 흐름이 황제에게 다다랐다.
이 나라의 황제.
‘이름이 뭐였더라…….’
내 상식 스승이자 선생님인 조그만 흑마법사님에게서 기나긴 풀 네임을 들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윽고 생각나는 이름이 이러했다.
스칼렛 셰에라자드.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여성 황제였다.
‘원래라면 이야기에 한 번은 등장해야 하는데 말이지.’
그리고 황제의 티아라의 주인으로서 본래는 원작 속에서 주요한 이야기 소재를 안겨주는 인물이었다.
이는 상당히 중요했다.
이 티아라로 인해 프란시아, 리케도르안, 체이서가 걷잡을 수 없는 삼각관계로 접어들었으니까.
지금에서야 더는 미래가 어디로 진행될지 쉬이 알 수 없었지만. 이 티아라가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쓸 일이 있을지는 몰라도. 아무튼 조그만 흑마법사님의 강의에 따르면 이러했다.
현 황제는 아주 안정적인 통치 중이다.
헤르님과 도뮬릿. 거대한 가문이 힘을 불릴 대로 불린 상태에서도 발언권과 힘을 잃지 않은 황제였으니, 그녀의 수완은 익히 증명된 것이라 할 수 있을 터였다.
거기다 황제는 두 가문 사이에서 어느 가문의 손을 들어주는 대신 균형 잡힌 권력 구도를 택했으나…… 실상은 충성도가 높은 헤르님을 선호하긴 했다.
거기다 황제에게는 남편도 아이도 없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 거대 가문의 남성들은 자연스럽게 황제와 엮이기 마련이었다. 정작 이는 황제도, 상대가 되는 각 가문의 이들도 원하지 않는 쪽이라 하였지만. 그런 황제가 헤르님에게 나를 데려오라 권했다.
말이 권유지, 황제가 하는 말은 권유일 수가 없다.
“흐음, 어떡해야 할까…….”
그러나 리케도르안으로서는 이를 완강히 거부할 수 없으리라.
황제의 말의 이면엔 리케도르안이 들어주지 않으면 도뮬릿의 손을 들어주겠단 뜻도 담겨 있을 테니까. 아마도 체이서는 여기까지 생각하고 황제에게 고했을 것이다. 많은 수를 내다보는 남자였다. 생각을 하는 동시에 손목에서 느릿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아프진 않았다.
아마 누군가 내 손목을 붙잡으면 이러할까?
-인간, 네 손목이!
“응, 알고 있어.”
나는 천천히 손목을 들어 올렸다. 내가 누르지 않았음에도 왜일까. 천천히 검은 장미 문양이 새겨지고 있었다. 하나둘씩 그려지던 꽃잎에서 새까만 장미가 완성되어 간다.
“……체이서.”
무의식중에 그의 이름을 부른 순간 꽃이 활짝 피었다. 검은 기운이 파도처럼 흘러나왔다. 기운이 둥글게 뭉쳐 흐물흐물 움직이다가 이내 단단한 형체를 그렸다.
날개를 펼친 새였다. 조그만 새. 그리고 익숙한 새였다.
“……아퀼라?”
아퀼라가 부리를 크게 벌렸다. 울음소리를 내고 싶은 듯했으나 아퀼라에게서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막아버린 것처럼. 아니나 다를까 아퀼라의 몸으로 뾰족한 가시가 돋았다. 몸에서 돋은 것은 아니었다.
삐이이익!
근처에 있던 붉은 장미들이 넝쿨을 뻗어 아퀼라의 형상을 조이고 있었다.
“괜찮아?”
체이서는 체이서고. 이 수호신은 내게 각별했다. 목숨 빚이 있는 데다 나름의 정이 든 상태였다. 그러나 아퀼라는 아픔을 신경 쓰지 않는 듯 부리를 몇 번 털다가 내 손 위에 부리를 비볐다.
“……응. 그래. 잘 지냈어?”
내게 대답하듯 아퀼라가 내 손가락을 아프지 않게 물었다가 놓는다. 푸드득 날개를 펼쳐 손가락을 쓰다듬기도 했다. 새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애정 표현이었다. 아퀼라가 부리를 뗀 자리 위로 자그만 봉투가 놓여 있었다.
이를 본 순간 아퀼라의 머리를 비비다 말고 멈칫했다.
“……체이서가 보낸 편지니?”
입 밖으로 꺼내었지만 이미 답을 안다. 이런 것을 보내는 자가 누구겠는가. 내게 답을 주기라도 하듯 봉투가 저절로 열리더니 안에 담겼던 편지가 두둥실 떠올랐다.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은 종이에 차차 글씨가 새겨진다.
「안녕, 사랑스러운 내 동생.」
더는 동생이 아니라 해놓고서는. 인사말이 장난스럽기 그지없었다.
정갈한 글씨를 보며 오래전 감방에서 이름 모를 오빠와 편지를 나누던 기분을 떠올렸다.
「직접 가고 싶은데, 이동할 수가 없네? 아쉬워.」
나는 주변을 살폈다. 아퀼라를 꽁꽁 묶고 옭매던 장미 가시넝쿨.
이곳에 아무나 들어올 수 없단 말처럼 체이서도 올 수 없는 듯했다.
이윽고 곧 체이서의 본론이 그곳에 쓰였다.
「내 이아나.」
나는 천천히 입을 벌렸다. 아니, 벌릴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푸른 장미의 수호신이 궁금하지 않니?」
그도 그럴 것이 체이서의 다음 말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으니까.
「네게 돌려줄 날만 기다리고 있었어.」
어쩐지 눈앞에서 유혹할 듯 아찔하게 웃는 낯이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그가 주요한 말을 슬쩍 넘기고 싶을 때 짓는 특유의 표정이.
「이걸 봉인하는 건 아무리 나라도 힘들었거든.」
“봉인…….”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읽다가 멈췄다. 내 안에서 푸딩이 부르르 떨고 있었다. 푸딩이의 기분이 고스란히 넘어온다. 공포와 떨림. 내가 보고 느끼는 것을 함께 느끼니 당연한 일이었다.
‘괜찮아. 쉬이. 괜찮아.’
나는 푸딩이를 다독이며 다시 편지에 시선을 주었다.
「처음부터 이걸 가지고 있으면 네가 진실에 빨리 도달할 테니까.」
체이서는 푸딩이를 봉인했듯이 푸른 장미의 수호신을 어딘가에 붙잡아 두었다. 이를 알게 됨에 따라 의문이 수반되었다. 왜 그렇게까지 행동한 것인가? 그리고 마침 이에 대답하듯이 다음 구절이 떠오른 것이었다. 내가 진실에 빨리 도달하길 바라지 않았다고.
“진실?”
저절로 ‘이아나’의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전에는 뭐랄까. 항상 핏기없고, 유약한 인상이셨지요.>
나와는 전혀 달랐다던 모습.
<으음, 표현하자면 말입니다. 그때의 아가씨는…… ‘인형’ 같은 느낌이었지요, 아마?>
이것과 관련 있는 걸까? 도대체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만들었으며, 거기다 어찌하여 그녀의 수호신이 봉인되었는가, 그것도 체이서를 사랑했다던 이의 수호신이.
「알고 싶다면 내게로 돌아와.」
궁금하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알고 싶지는 않은데. 인상을 구기는 동시에 구절이 바뀌었다.
「물론 이런다고 네가 바로 움직이진 않겠지?」
나를 아주 잘 안다는 듯이.
「그럼…… 테니까. ……까지…… 와. 어때?」
왜일까, 갑작스럽게 글자가 깨져서 보이기 시작했다. 황급히 아퀼라를 보았다.
“아퀼라?”
아퀼라의 형체가 깨진 화면인 양 불안정했다. 흐릿해졌다가 진해졌다가를 반복하며 아슬아슬한 상태처럼 보였다.
“아퀼라? 너 괜찮아? 아퀼라!”
수호신들은 영체다. 다시 말해 나타나고 사라지고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으나, 지금 보이는 건 억지로 사라지는 것에 가깝다.
이건 억지로 돌려보내지는 행위, 즉 역소환에 가까웠다.
더군다나 아퀼라 주변으로 일렁거리는 붉은 기운으로 알 수 있었다. 헤르님이 도뮬릿을 밀어내는 중인 거다. 이에 대해선 마쉬멜에게 들은 적 있었다.
“푸딩, 이거 역소환이지?”
-그, 그런 것 같다 냥.
수호신들은 육체가 없지만 고통은 느꼈다. 특히나 극심한 고통을 느끼면 형체가 사라지며 계약자에게로 돌아가는데, 이 경우. 수호신에게도 수호신과 계약한 자에게도 타격을 준다고 했으며, 아울러 아주 고통스럽다고 했다.
「이런, 이게 한계인 모양이네.」
서체는 곧 원래대로 돌아왔다. 깨진 곳 하나 없이. 그리고 체이서는 다시 한번 일자와 장소를 알렸다.
「기억해. 칸탈라의 대성당이야, 이아나.」
정확하게 장소까지 말을 한 체이서의 글씨가 다시 흐려졌다. 이젠 아퀼라도 한계인 듯했다. 이어서 무어라 몇 마디가 더 적히긴 했으나 알아볼 수는 없었다.
내가 표정을 찡그리며 입술을 꾹 물었다가 놓을 때였다.
아퀼라가 머리를 휙 들었다. 그와 동시에 마지막으로 정갈한 글자가 새겨졌다.
「……사실은,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었어.」
왜일까. 서체에서 이 남자답지 않은 망설임이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눈을 뗄 수 없었다.
사각사각. 보이지 않는 펜은 천천히 종이를 물들인다. 검게. 손목에 새겨진 장미처럼.
「사랑해, 이아나.」
이어서 이어진다.
「불꽃이 쏟아지는 연회의 밤에 모든 걸 이야기하고 싶었지. 너는 사라졌지만…….」
나는 이 순간 그 남자가 앞에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했다.나도 모르게 정원에서 눈물을 뚝 흘리면서도 아름답게 웃던 얼굴이 스쳐 지나갔으니까.
「옆에 있어 줘.」
잠시, 틈을 두고 천천히 적혔다.
「어떤 형태라도 좋아.」
그리고 차차 끝에서부터 잉크가 흐려지고 사라진다. 이윽고 마지막으로 적힌 한 마디가 방점을 찍었다.
「……난 네가 있어야, 숨을 쉴 수 있으니까.」
아퀼라가 길게 울었다. 작은 참새 형태에서는 나올 수 없는 길고 우렁찬 솔개의 울음소리였다.
「널 위해선 전쟁이라도 불사해.」
진지하고도 장난스러운 말이 덧붙이듯 이어진다.
「내 이아나. 내가 미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건 아니지?」
정말 끝인지 이를 마지막으로 아퀼라의 형태가 아주 흐릿해졌다. 역소환을 바로 앞에 둔 듯했다. 나는 이 수호신이 느낄 고통을 생각한 순간 마음이 아렸다. 4년간 동고동락했던 새에 대한 연민이었다.
“……아프지 마.”
내 손이 툭, 새의 부리에 닿는 순간 아퀼라가 고개를 기댔다. 내 손의 온기를 찾듯이.
그 순간이었다.
내 손끝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흘러나왔다. 너무나도 연약하여 착각인 줄 알았지만……. 실로 바다처럼 푸르른 쪽빛이었다. 마치 물속에서 하늘을 바라본 듯한 오묘한 푸른색. 그것이 아퀼라의 몸을 감쌌다가 떨어진다. 그리고 아퀼라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아…….”
남은 것은 아퀼라를 옭맸던 가시넝쿨뿐이었다. 이마저도 아퀼라가 사라지자 제자리로 돌아간다. 아퀼라도 편지도 사라졌지만 나는 마지막 장면이 남긴 여운에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대체 방금 그 빛은 뭐였지?’
이곳에서 푸른 기운이란 제이르가 마법을 쓰던 순간에나 보았던 것이었다. 보통 백마법, 보편적으로 쓰는 ‘마법’을 쓸 때는 이렇게 푸른빛을 드러낸다고.
그러나 수어 번 보았던 마법의 푸른빛과는 달랐다. 오히려 리케도르안이나 프란시아, 체이서가 힘을 쓸 때처럼 아주 선명하고 강렬한 느낌이었으니…….
이게 바로 푸른 장미의 힘인 걸까. 나는 내 손가락을 한참 쳐다보았다.
‘어쩐지 등이 간지러워.’
-인간, 아프냐, 냥?
‘아니, 그냥 좀 간지럽고 따끔거리는데…….’
손이 닿지 않는 등 한가운데 주변을 손으로 꾹꾹 누르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황실과 푸른 장미의 수호신. 되도록 한곳에 몸을 누이고 좀 더 평온함을 즐기고 싶었지만, ……그리되기는 어려운 모양이었다.
‘일단은, 체이서가 말한 기한까지는 시간이 남았어.’
“푸딩아.”
사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조금 전 아퀼라가 나타났을 때 나를 지키려 하던 푸딩이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전에는 느껴지지 않던 것이 자꾸만 느껴지는 걸 보니. 내 안에서도 무언가 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푸른 장미의 힘과 수호신.
눈을 꾹 감았다가 뜬다. 그저 흐르는 강에 몸을 맡기듯 편안히 있고 싶었던 적이 있다. 늘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리 살고 싶었다. 그러나 세상은 뜻대로만 되지 않는 법일까. 거대한 손이 내 등을 떠미는 것 같았다.
‘뭐든 간에 결단을 내려야 할 때네.’
멀지 않은 곳에서 리케도르안이 달려오고 있었다. 가까워지는 그를 바라보며 난 미소 지었다.
“리케도르안.”
그가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사람인 양 황급히 달려온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하아, 이아나 또…….”
“응. 나타났어요.”
아마 그는 검은 장미의 힘을 느꼈을 것이다. 나는 숨김없이 대답했다. 체이서 대신 도뮬릿의 수호신이 나타난 것. 그리고 체이서가 내게 했던 말, 푸른 장미의 수호신을 어딘가에 봉인한 것과 내게 언급한 시간 및 장소에 대한 것까지…….
“푸른 장미의 수호신이 그쪽에 있다는데. 수호신이 없는 게 큰 문제가 될까요?”
붉은 장미는 수호신이 없다는 것만으로 큰 위협을 받았다. 리케도르안은 고개를 저었다.
“푸른 장미에게 그런 특성은 없어요. 존재 자체로 완벽하기에… 푸른 장미라 했으니까요.”
“다행이네요.”
나는 미소를 지우지 않고 말했다.
“혹시 결정을 번복해야 하나 했거든요.”
수호신이 없다면 힘을 쓰지 못한다거나 그래서 리케도르안의 저주를 푸는데 해가 된다거나. 가뜩이나 급한 사정이 있는 판국에 시한부를 또 하나 만들어서는 곤란하다. 이런 것은 아니라니 다행이었다.
한편으로는 조금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아니다. 차라리 내가 아픈 것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네.’
상념이었다. 생각을 지워내며 나는 고개를 들었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 새하얗게 보이는 은색 머리칼을 마구 흩트려 놓았다.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황실로 가요.”
“……네?”
리케도르안은 잘못 들었단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내가 웃기만 할 뿐 번복하지 않자 표정이 흐려졌다.
“……어째서.”
어째서라니. 이는 리케도르안이 더 잘 알 터였다.
“이유는 더 잘 알잖아요.”
여기서 황실이 헤르님을 외면하면 곤란해진다. 겨우 유지하던 균형이 깨지는 꼴이 될 것이다.
“황실을 외면해선 안돼요.”
“……그건 문제없어요. 당신이 걱정할 정도는 아니에요.”
“네. 당신이라면 잘 해결하겠죠?”
나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정치를 잘 모르는 나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가는 게 당연한 상황이었다. 나는 리케도르안의 말에 반문을 던지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에 가자는 건 꼭 이것 때문만은 아니고요.”
대신 다른 이유를 꺼내 들었다.
“고위 귀족이 캄브라캄에 갈 때는 반드시 황제 폐하의 허락이 필요하다면서요.”
이건 제이르가 알려준 사실, 정확하게는 보고서에 있던 이야기다.
“그러니 허락을 위해서는 한번은 만나 뵈어야 하겠죠? 우리의 목표는 당신 저주를 풀기 위해 캄브라캄으로 들어가야 하는 거니까. 겸사겸사라 생각해요.”
그래서 황실로 간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장 다가오는 리케도르안의 시한부를 해결하는 일이었다.
“방법을 찾는 순간 바로 달려갈 수 있게 미리 해결해야죠. 지금도 시간이 부족해요.”
“하지만.”
“들어줘요. 나만 초조해요? 당신이 걱정된다니까요.”
방법을 아는 순간 곧바로 캄브라캄에서 시도해봐야 할 테니까.
그는 한참이나 침묵했다. 이윽고 내 의견이 타당하다고 여겼는지 끝내는 수긍했다.
나 또한 이게 맞다고 여겼다.
그리고 말하지 못한 이유로는…….
「널 위해선 전쟁이라도 불사해.」
정말로 전쟁이 일어나면 곤란했으므로.
조금 거창하기는 하나 신화 속 두 나라 간에 전쟁을 일으켰던 헬레네는 사양이었다. 그 미인으로 인한 결과를 생각하면 더욱더. 그러나 왜일까. 마음 한편으로는 어떤 선택을 하든……. 그 남자를 다시 한번 마주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언니!”
이어서 프란시아마저 정원으로 돌아왔다. 이야기는 금방 진행되었다.
“황성으로 간다고?”
프란시아는 지체 없이 대꾸했다.
“나도 함께 갈래.”
그렇게 황성으로 가는 인원이 빠르게 꾸려졌다. 우린 오래 기다릴 것도 없이 나흘 뒤 황성으로 떠났다. 아주 은밀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