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4/87)

***

제이르와 만나고 난 뒤 방으로 돌아왔더니. 머지않아 프란시아가 방을 방문했다.

“오늘도 별 소득은 없었어.”

그녀가 내 앞 소파에 푹 파묻히면서 중얼거렸다. 아마 이제 하루인가 이틀쯤 남았다는 회의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회의?”

“응.”

프란시아를 볼수록 내가 책을 볼 때 여주인공 언니가 짱이다 하고 봤다는 걸 떠올리게 된다. 프란시아를 향한 무한한 호감은 여기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이제는 모두 커버렸지만 도뮬릿에서처럼 애교를 부리는 그녀가 싫지 않았다. 그녀는 내게 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지난 며칠간 리케도르안의 방문이 뜸한 시간은 그녀가 찾아와 채우곤 했다.

프란시아가 내 허벅지에 푹 묻었던 뺨을 떼어냈다. 프란시아가 기댔던 자리에 그녀와 잘 어울리는 산뜻하고 청아한 향기가 남았는데, 아무래도 고유 향기는 장미들의 공통점인 듯했다.

“오늘도 고리타분한 이야기들뿐이었어. 언제까지 지지부진한 이야기만 할 건지.”

프란시아가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전쟁이 끝난 지가 언젠데.”

듣기로 이 제국은 몇 년간 동쪽 왕국과 국지전을 벌였단다. 본래라면 더 오래 끌 전쟁이었으나 여기서 활약한 세력이 있었으니, 바로 성녀가 이끄는 부대였다고.

‘상상한 것 이상의 거물이 되었지. 이쪽도.’

본래 신전의 우두머리는 둘, 각기 성녀와 교황을 이른다.

수장인 둘인 형태였으나 전통적으로 교황의 권위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이전 세계의 연예계 소속사를 예시로 들자면 책 속에서 여주인공이 맡았던 성녀가 기획사 간판스타라면 교황은 소속사 사장과 같은 느낌이랄까. 겉보기 화려함은 성녀가 모두 가져가되, 실리는 교황이 모두 취하는 형태였다.

‘프란시아의 모습을 봐서는 지금은 조금 다른 것 같지만.’

그때였다. 조그만 발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낯설다고 할지. 아니, 얼굴은 한 번 본 이가 서 있었다. 활짝 열린 문으로 들어온 사람은 프란시아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저 사람은, 첫날 봤던 사람인가.’

쭈뼛쭈뼛, 머뭇거리는 남자는 이곳에서 프란시아와 재회한 날 한 번 본 적 있던 남자였다. 교황이라고 했던가? 줄곧 저기 서 있었던 것 같은데. 프란시아의 존재감에 시선을 빼앗겨 보지 못했나보다.

찬찬히 살펴보면 남자 역시 빼어난 미모를 지녔다. 갈색 눈동자에 근사한 백금발을 가진 유약한 인상의 미남이라고 할까. 첫날 이후로 보지 못한 이였기에 호기심이 들었다.

“저 사람은…….”

“아, 언니. 이미 얘기한 적 있죠?”

프란시아가 생긋 웃었다.

“교황이에요.”

쿨럭.

다시 들어도 놀라운 사실에 헛기침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저 남자가 교황이라 치자. 그럼 신전의 모든 수뇌가 여기 있는 것이고…… 따라서 헤르님은 신전과 완전히 결탁한건가.

연이어 우물쭈물하는 남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사실 빨개지지 않는 것만 제외하면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자세다.

‘리케도르안 어릴 때 모습 같네.’

외양이 같다거나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어딘가 소심하고 눈치를 보는 모습이 그러하단 거지.

“음, 그래. 너는 성녀고 저쪽은 교황이면…… 그, 둘 중 한 사람은 원래 신전을 지켜야 하는 것 아니야?”

“그럴 필요 없을걸? 지켜야 할 것은 여기 있는걸.”

프란시아의 손가락이 교황을 한 번 가리키고 천천히 돌려 자기 가슴을 향했다.

“거기다 지킬 게 사람이라면 이동이 자유롭지.”

프란시아의 검지가 제 가슴을 꾹 찔렀다.

“그렇지 않아도 호시탐탐 자릴 갈아치우려는 세력이 있어서 데리고 다니는 쪽이 편해.”

그러자 교황의 가녀린 어깨가 들썩 움직였다. 으음, 어째 교황 씨의 간이 그리 커 보이지는 않는데. 괜찮은 건가.

“너는 어떻고.”

“나? 나야 문제없지. 각성하고서는 더욱이. 누가 날 건드리겠어?”

프란시아의 눈이 예쁘게 접혔다.

“나, 언니에게 장담한대로 됐거든.”

“가장 강한 하얀 장미?”

“응.”

나는 프란시아의 거대한 망치를 떠올리며 끄덕였다. 그런 걸 휘두르는데 누가 덤비겠냐마는. 푸흐, 작게 숨을 내쉬며 웃었다.

“정말 멋지게 자랐네.”

내 중얼거림에 프란시아가 씩 미소했다.

“언니가 그랬잖아, 입맛에 길들여 만들라고.”

내가? 내 시선이 돌아갔다.

“저 그래서 그렇게 했어요.”

프란시아가 얇고 긴 손가락을 쭉 뻗었다. 그녀의 말투는 어느새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맨 처음엔 신전의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서, 전쟁에서 공을 좀 세우고.”

그녀의 손가락이 하나 접혔다.

“마음에 안 들면 좀 부수고.”

……뭘 부숴? 난 눈을 끔뻑이면서도 잠자코 들었다.

“일단은 도뮬릿의 눈을 오래 피할 곳이 거기밖에 없었거든요. 발테이즈 후작의 의견도 같았고.”

프란시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은 아직 세 개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대로 모두 접어버렸다. 그러고는 밝게 웃어 보였다.

“여차저차해서 내가 앞에서는 성녀, 뒤에서는 교황이야.”

……여차저차가 많이 빠진 것 같은데. 그리 생각하면서도 덧붙이지는 않았다.

지난날 그저 흘리듯 지나간 한마디가 이런 영향을 주었을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그러나 사람은 본디 누구나 제 인생만의 시련을 겪기 마련이고 나는 묻지 않길 바라며 넘어간 것을 파고드는 취미는 없었다. 프란시아 또한 더는 잇고 싶지 않았는지 말을 돌렸다.

“언니, 묻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응.”

잠깐이나마 진지했던 녹색과 은색 눈이 별처럼 초롱초롱한 눈으로 돌아왔다.

“발테이즈 후작과는 왜 연락하려 하는 거야?”

그 말에 나는 어제 프란시아에게 부탁했던 것을 떠올렸다.

<혹시 발테이즈 후작과 연락할 수 있겠어?>

<어렵지 않지. 해볼게.>

그녀는 이유를 묻지 않고 흔쾌히 대답했다. 하지만 사실 무엇 때문에 찾는지 궁금했던 걸까?

“흐음, 글쎄. 그 사람이 필요해서?”

깜빡이는 오드 아이를 보고 있으려니, 장난기가 샘솟았다. 프란시아가 눈을 깜빡였다. 생각지 못한 반문이었던지 그녀는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하나 다른 생각을 한 것인지 자신의 가느다란 턱을 붙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노란 장미의 능력이 필요한 거야?”

그녀는 조금 달리 받아들인 듯했다.

“누구 슥삭하게?”

무구하게 고개를 기울이면서 자기 목에 손을 그어 보이기는 모습이 스산하기까지 했다. 도리어 내가 당황할 만큼.

“어어?”

“마음에 안 드는 놈이라면, 우리 애들도 해줄 수 있어.”

“응? 그런 게 아니라.”

그녀는 내 말을 끝까지 듣지 않은 채 벌떡 일어났다.

“성기사단, 성기사단 하는데. 솔직히 애들이 말만 성검이니 성창 들었지 들개들이나 다름없어서.”

“프란시아.”

짝. 나는 얼른 박수를 쳤다. 주변을 환기하는 효과를 주었는지 프란시아가 말을 멈췄다. 나는 일단 상황정리부터 했다.

“아니, 농담이야. 내가 그 사람을 찾는 건 그런 건 아니고. 일단 그보다…… 저 교황님은 저렇게 세워둘 거야?”

유약한 교황님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랐다.

“아, 아니. 아니.”

그가 손을 마구 휘저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빨개지진 않았지만 난감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프란시아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앉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인다.

나는 프란시아에게 돌아와 눈짓으로 교황님 쪽을 가리켰다.

“대체 어떤 사이인 거야?”

“음, 부하? 보좌? 으으음, 그 중간 사이?”

만약 프란시아가 정말 내 이야기를 따라 겉으론 성녀의 입장을 취하되 뒤에서는 모든 권력을 잡은 것이라면 저쪽은 말 그대로 허수아비 교황이란 얘기다.

“처음에는 전략적 동맹이었다가 점차 내 아래로 들어온 사이.”

“합의 하에?”

“응. 합의 하에.”

프란시아가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일견 무구해 보이는 낯이었지만 실상 그 아래 사정은 그렇지 않았으리라.

사실 3년이란 시간은 이렇게 자리 잡기에 짧은 시간이다. 리케도르안의 경우 핏줄이라도 있었지. 헤르님이나 도뮬릿과 다르게 프란시아의 가문은 그리 큰 가문이 아니었다. 신전에서도 그리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을 터였다.

책 속에서도 프란시아가 성녀가 되는 과정은 개연성이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뜬금없었다. 녹록지 않은 자리였단 거다. 그런데 프란시아는 원작 시간대로도 아니고 심지어 원작보다도 일찍 그 자리를 거머쥐었다.

‘대단하다고 할지.’

난 고개를 살짝 숙였다.

‘하지만 결코 쉽지 않았겠지.’

신전 기존 세력이 아무리 노쇠했다고 하나, 프란시아가 자리 잡기가 쉽지는 않았을 터 그녀의 피눈물 나는 고생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흰 장미의 능력과 이름, 그리고 본인의 힘만으로 여기까지 올라온 것이 참으로 대단하다 못해 마음이 아릴 만큼.

그리고 빠른 변화, 즉 혁명은 언제나 커다란 반발 반대 세력의 부상을 불러오는 법이었다.

‘교황 교체를 노리는 이들이 호시탐탐 노린단 걸 보니까 말이지.’

그리고 아직 정리가 채 되지 않은 듯했고. 그러니까 결국 저 교황님은 헤르님의 제이르나, 도뮬릿의 마쉬멜 같은 존재란 거네.

“그렇구나.”

생각을 정리하며 끄덕였다.

“음, 언니 근데 그래서 노란 장미는 왜?”

르나그의 능력은 대략적이나마 알고 있었다.

주연이 아니었을 뿐이지 그는 체이서의 오른팔 격 악당으로서 이런저런 모습을 보였으니까. 더군다나 감방에서 제이르에게 듣기도 했다. 이게 노란 장미란 개연성 덕이었단 건 이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누굴 죽이려 하는 건 아니야. 다치게 하려는 건 더더욱 아니고.”

르나그의 능력은 ‘첩보’와 ‘암살’에 매우 적합했다. 괜히 매혹안을 가진 체이서가 옆에 둔 사람이 아니다. 더구나 일신의 무력 또한 뛰어난 걸로 알고 있다. 내가 감방에서 그를 두려워했던 것에는 날카로운 얼굴 말고도 이런 능력 탓도 있었으니까.

“그냥 연락을 좀 할 수 있었으면 해.”

하나 나는 이제 알고 있다. 그 남자는 사실 내 솜털 하나도 건드리지 못할 사람이란 것을. 오히려 연회에 가기 위해 손잡는 것조차 쩔쩔매던 남자였다.

“지금쯤 날 찾고 있을 테니까.”

작은 미소가 새어나갔다. 미안함이 담긴 미소였다.

“아, 후작이 사람을 풀어 약혼자를 찾는다곤 들었는데.”

“그게 나야. 너도 알고 있겠지만.”

“응. 알지.”

모를 리 없었다. 몇 년 전 직접 나와 르나그의 대화를 보았으니까. 그녀 또한 떠올렸는지 끄덕였다.

“그랬구나. 난 또 이게 도뮬릿 공작의 계략이라도 되나 싶었지.”

“그 남자는…….”

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나와 관련한 계략엔 손을 빌려주지 않을 거야.”

그런 사람이니까. 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무심히 말했다.

“그리고 내 오빠는 눈에 뻔히 보이는 계략은 쓰지 않을걸.”

프란시아는 그런 나를 빤히 보다가 수긍했다.

“그건 그래. 그건 언니가 제일 잘 알겠다.”

그녀의 눈이 잠시 내 발목 쪽을 담는 것 같았다.

“하긴 아빠의 얘길 들어도 흑장미란 이들은 언제나 그랬다고 해. 갖고 싶은 건 꼭 가져야 하고.”

프란시아의 음성은 뒤로 갈수록 점차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소유에서 힘을 얻는 이들이니까.”

그녀 또한 도뮬릿에 씻을 수 없는 원한이 있는 사람이었다.

“흐음, 아무튼 그래. 난 걔들이 좋아질 수가 없네.”

무거운 공기를 지우고자 한 듯 프란시아가 애써 가벼이 미소했다. 그러고는 다른 화젯거리를 찾으려는지 제 수호신을 번쩍 들어 품에 안았다. 칼리스토는 아마 성체가 되었을 텐데 어째 이쪽도 아기 곰의 형태를 하고 있다. 여전히 딱 저 정도 크기를 유지한 채로 말이다.

“언니, 그보다 내가 생각해봤는데. 우리 칼리스토를 안 받아줬잖아.”

“……안 받아준 게 아니라.”

얘도 동의했겠니, 칼리스토의 얘기도 들어봐야 한다, 이거.

“으음……. 모습이 마음에 안 들어? 대공이 언니가 작고 귀여운 고양이를 좋아한다고 했는데. 그래서 우리 칼리스토가 작아진 건데…….”

프란시아가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고양이가 아니라서 그래?”

그 말에 나도 모르게 푸딩이를 향했다. 어디서 저런 오해가 생긴 건가 하니……. 아무래도 리케도르안은 푸딩이의 모습을 보고 작은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미안해. 고양이로 만들 수는 없거든.”

“아니. 아니아니.”

난 손사래를 쳤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그런 거 아니니까. 그리고 그건 오해야.”

어째 장미들은 하나같이 내게 뭘 주지 못해서 안달인 걸까. 혹시 이것이 장미의 공통 특성인가 싶은 의문도 들었다.

“혹시 자꾸 내게 뭘 주고 싶은 것도 장미의 의지인 거야?”

“응? 그냥 언니한테 주고 싶은 건데.”

프란시아가 산뜻하게 대답했다. 그러면서 살짝 원망 어린 눈을 숨기지 않았는데, 이는 마치 내 진심이 그렇게 보였단 말이야? 묻는 것 같았다.

“엄밀히 따지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의지를 대신할 순 없어.”

“응. 미안해.”

“응. 계속 오해했다면 슬펐을 거야.”

순순한 사과에 프란시아는 본인의 입술을 툭툭 두드리더니, 눈을 반짝 떴다.

“대공님의 말처럼 숭배와 감정은 다르니까. 사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도 대대로… 단순히 군림하고 지배받는 관계는 아니었어. 푸른 장미와 우리는.”

그녀는 시무룩함은 금세 지워버린 뒤였다.

“꼬이고 꼬여 버렸지만 사실 난 과거의 기록을 찾아볼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곤 해.”

“어떤 생각?”

“푸른 장미가 사라지지 않았다면 어땠을지를.”

프란시아가 내 허벅지를 톡톡 두드렸다. 장난스레 웃는 얼굴은 도뮬릿에 있을 적 어린 모습을 떠올리게 했으나 곧 성숙함이 그 위를 덮고 진지하게 물들였다.

“우리는 아마 결핍을 겪는 대신 완전한 채로 존재했겠지? 과거의 장미들처럼.”

“결핍이라니?”

“붉은 장미나 내가 겪고 있는 거. 사실 오랫동안 누군갈 애타게 찾아야 한다 의무감이 드는 거, 사실 그리 달가운 기분은 아니었거든.”

푸른 장미를 찾아야 한다고 느끼는 감각은 참을 만했지만 지속적으로 들어오는 자극과 같단다. 프란시아가 검지와 엄지로 입술을 문질렀다.

“언니, 대공 각하하니까 생각난 건데, 붉은 장미의 ‘동반자’가 나타난 건 푸른 장미가 사라지면서부터인 거 알아?”

“뭐?”

내 질문에 질문이 답으로 돌아왔다. 프란시아는 웃으며 설명했다.

“푸른 장미는 몇 세기 동안이나 사라진 존재였거든. 최근에서야 흑장미들이 왕을 독차지한 게 알려졌지만. 이게 다른 장미들에게는 아주 곤란한 일이었단 거지.”

이 시대뿐만 아니라 과거 긴 시간 동안에 푸른 장미가 아주 나타나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단다.

이 시기 장미들은 스스로 결핍을 채우기 위해 수단을 강구했고. 이 중 붉은 장미는 ‘동반자’라는 것을 만들어냈다나.

“원래라면 그들이 사랑과 열정을 바칠 존재는 푸른 장미인데, 매번 나타나지 않잖아. 그래서 동반자가 생겨난 거야. 힘을 받아줄 반려를 만들어 생존해왔던 거지. 이건 붉은 장미뿐만이 아니야.”

프란시아가 잠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흰 장미는 치료를 필요로 하는 자를, 보호를 위한 노란 장미는 보호가 필요한 자를, 그리고 흑장미는 집착할 상대를.”

붉은 장미의 동반자와 같은 개념으로 다른 장미들 또한 각기 파트너 혹은 반려를 필요로 했다고.

“고대 시대에 푸른 장미가 없으면 숨조차 쉬지 못하던 시대보다는 나아진 거야. 기록에 의하면 그땐 푸른 장미 없이는 죽기도 했다니까.”

프란시아는 그리 덧붙이며 청아하게 미소를 맺었다.

“사실 발테이즈 후작에게는 연락을 취해뒀어.”

“정말?”

바로 어제 말했건만 상당히 빨랐다.

“응. 몇 년간 연락을 하지 않았긴 한데 수단은 남아있었거든.”

프란시아가 곧 눈을 가늘게 좁히며 입을 삐죽였다.

“근데 그쪽에서는 언니 소식을 알려달라고 해도 안 해주더라?”

그녀는 그리 말하고는 툭 덧붙였다.

“쪼잔하기는. 장미들은 다 똑같아. 하나에 빠져서는.”

프란시아는 그래서 저도 르나그와 연락을 끊었다며 투덜거리듯 이야기했다. 시선이 제법 매섭기도 했다. 곧 온순한 얼굴을 했지만.

“곧 그쪽에서 대답이 올 거야.”

“고마워.”

내가 진심을 담아 말하자, 프란시아가 고개를 저었다.

“가벼운 거니까 인사하지 않아도 돼. 언니는 내게 인사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니까.”

프란시아의 새끼손가락이 내 다섯 번째 손가락에 걸렸다. 약속하듯이 마주하면서.

“언니가 바란다면 언제든. 날 살려준 은혜는.”

입술이 잔잔한 곡선을 띠었다. 그녀의 뒤로 청초한 흰 장미의 잔상이 보이는 듯했다.

“되도록 평생 갚고 싶어.”

곧 프란시아의 미소는 함박웃음이 되었다.

“그럼 언니 옆에도 평생 있을 수 있겠지?”

눈을 배시시 아름답게 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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