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53/87)

***

헤르님 성에서 열렸다는 회의.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꽤나 오래 걸리는 일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일주일 내내 이어질 일은 아니었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성 앞에 놓인 마차가 하나씩 하나씩 사라졌다. 설명해주는 이 말로는 중요하지 않은, 말단 이들이나 급한 일이 있는 이들부터 돌아가는 것이라나.

‘가신이 부하랑 같은 말은 아니라는데.’

나는 푸딩이를 안은 채 창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마차가 꽤나 사라졌다고 하나 아직 상당수가 남아 있었다.

‘같은 말인 것 같기도 하고.’

-부하 말이냐, 냥?

‘응.’

그리고 사라지지 않은 마차 중에는 누가 보아도 눈에 띄는 번쩍번쩍한 새하얀 마차가 포함되어 있었다. 신전의 마차다.

프란시아가 타고 온 마차.

‘정말 눈에 띈다니까.’

다들 하나둘씩 돌아가는 와중에도 프란시아는 여전히 헤르님의 성에 머물고 있었다. 리케도르안은 영 못마땅한 눈치였지만 의외로 나가라고 꺼내지는 않았다. 추측하기로는 아마, 이것도 두 사람 사이에 모종의 약속이나 거래가 있었던 것 같단 말이지.

-아하, 냥! 알았다, 인간. 부하란 말이지.

그사이 내 손가락을 가지고 휙휙 장난치던 푸딩이 고개를 홱 들어 올렸다. 푸딩은 모처럼 본연의 모습, 아기 설표의 모습이었다.

-인간, 너와 나 사이를 말하는 것 아니냐, 냥!

‘허?’

설마 내가 부하라는 건가. 맞나 싶어서 물었더니 맞댄다. 그것도 의기양양하게 두툼한 앞발을 척 올리며 얘기하더라.

-인간, 이 몸이 널 돌보아주고 있지 않겠느냐, 냥!

‘돌보긴 누가.’

나는 평소처럼 심드렁히 넘어가는 내신 푸딩이를 소파에 내려놓았다. 며칠 전 리케도르안과 입을 맞췄던 그 소파였다. 나는 그대로 푸딩이의 뺨을 꾹 잡아 쭉쭉 늘였다.

“누가, 네 부하라는 거야. 응?”

캬옹, 캬옹캬옹, 캬아아옹!

“우리, 푸딩이. 그동안 조용했다, 응? 그치.”

캬앙, 캬옹!

-인간, 인간 잘못했다, 냥! 수염 빠진다, 냥!

“어차피 영체로 만든 거라며.”

-그래도 아픈 건 똑같다, 냥!

3년이란 시간이 흘러 3살 수호신은 동물의 나이로 치면 나름 청년기(?)에 접어들었지만 본연의 모습을 했을 땐 아직도 다소 작은 편이었다.

아직은 아기라 부르는 쪽이 맞을 정도로.

‘일부러 아기 동물 같은 모습을 하는 건지. 아니면 성장을 하지 못한 건지.’

물어도 이를 알려주지 않으니 알 수가 없다. 가끔 이 점이 조금 신경 쓰였다. 나와 계약해서 성장하지 못한 거라면 미안한 마음이었으니까. 이런 마음이 드는 건 네 원래 계약자인 붉은 장미로 충분한데 말이지.

나는 푸딩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푸딩이와 마음이 통한다는 건, 이따금 푸딩이 내 마음을 읽고 조용해지거나 위로하듯 머리를 비비는 것과 같이, 반대로도 가능하단 점이었다. 내게도 푸딩이의 마음이 느껴지곤 했다.

아직 어린 수호신님답게 그리 깊은 생각들은 아니다. 그리고 전해지는 생각 중에 가장 큰 건…….

자신이 더는 어디로 보내지지 않는 것에 대한 ‘안심’이었다. 하아, 어쩜 이런 것도 붉은 장미끼리 똑같은 건지.

가끔은 리틀 리케도르안을 키우는 기분이다. 털이 보송보송하고 귀와 꼬리가 달린 리케도르안이랄까.

……가만.

‘나쁘지 않은데.’

-……인간, 또 무슨 뵨태 같은 생각을 하는 거냐, 냥?

나는 피식 웃으며, 푸딩이의 머리를 아프지 않게 꽁 두드렸다.

“너야말로. 마쉬멜 말투는 언제 배운 거야?”

뵨태, 하는 발음은 우리 조그만 흑마법사님의 주특기였으니. 맨날 나더러 의아하게 보면서 독설을 툭툭 뱉곤 했지.

잘 지내려나.

체이서의 최측근이었다. 내게 잘해준 좋은 사람이었지만 다시 보는 건 어려울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이곳의 인연들은 참 얕은 것 같다. 얄팍하고 덧없는……. 감방에서의 귀족 동기들과 그러했고, 도뮬릿에서의 조그만 흑마법사님과 그러했듯이.

이전 세계에서도 난 비슷한 성격이었지만 주변에 사람이 없진 않았는데 여기에선 영 다르다. 마치 소중한 것은 굳이 만들지 말라는 듯이. 실없는 생각이지만 가끔은 누가 이렇게 이끄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웬걸 사람이 있어야 할 곳엔 아무도 없었다.

‘어라.’

고개가 저절로 아래로 내려간다. 그리고 바닥을 보았을 때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안녕?”

그곳엔 조그만 곰이 있었다. 아기 곰이다.

나는 놀라지 않고 조그만 곰을 반겨주었다. 내 인사에 살짝 놀랐는지 아기 곰은 두리번거리다 말고 문 뒤로 몸을 숨겼다. 그러고는 고개만 내밀었다.

빼꼼.

‘흐응, 되게 귀엽네.’

곰을 보고도 놀라지 않은 건 이미 한차례 본 적 있기 때문이었다. 예전에 프란시아가 도뮬릿 저택에서 열심히 자랑하던 수호신이다.

<많이 컸죠!>

거기다 이미 그저께 한차례 보여준 아이이기도 했다.

캬옹, 캬아아옹!

옆에서 푸딩이 이 몸이 더 귀엽고 위대하다며 존재감을 피력했지만 슬그머니 무시했다. 조그만 발톱이 쿡쿡 팔을 찔렀으나 이 또한 함께 모르는 척했다. 아예 푸딩이를 잠시 내려놓고 손을 펼쳤다.

“이리 와.”

아기 곰은 기웃거리며 머뭇거릴 뿐 다가오지 못했다.

아마 수호신이 계약자 의지 없이 막 자유로이 움직이진 못할 거고, 흰 장미 프란시아가 보낸 것일 터다.

으음,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칼리스토?”

곰의 새카만 눈동자가 깜빡, 깜빡였다. 그러더니 두 발로 일어난 것으로 모자라 발을 땅에 디디더니. 네 발로 이쪽을 향해 뛰어왔다.

쿵.

곰의 돌진은 내 다리에 부딪히고 나서야 멈췄다. 아기 곰이라 표현했다지만 무게가 제법 있어서 나도 모르게 휘청거렸다.

“에고, 놀라라….”

나는 그대로 중심을 잡고 쪼그려 앉아 곰을 마주했다. 칼스토도 내가 신기한지 얼른 두 발로 서 보였다. 내 손을 잡고 낑낑대며 지탱하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안녕, 우리 구면이네?”

칼리스토가 낑낑대며 내 손을 잡았다가 놓았다. 나를 올라타려고 하기도 했다. 나는 곰의 이마를 잡아 슬그머니 진로를 막았다.

“으음, 안 돼. 여기 무서운 설표가 하나 있거든.”

소파를 흘끗 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꼬리를 탁탁 두드리며 심기가 불편함을 고스란히 드러낸 푸딩이 털을 곤두세웠다.

-인간, 안지 마라, 냥! 안지 마!

‘안 안았어.’

피식 웃으며 푸딩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와 동시에 문이 활짝 열리며 누군가 들어섰다. 누군가 했더니 이 귀여운 아기 곰 수호신의 계약자였다.

“언니!”

프란시아가 옷자락을 붙잡고 뛰어왔다. 하얀 바지 자락은 붙잡지 않아도 될 터인데 더 빠르게 뛰고 싶다는 듯 야무지게 쥔 손이었다. 그 모습이 조금 전 네 발로 뛰어오던 조그만 곰의 모습과 똑같아 웃음을 터트렸다.

“회의는 끝났어?”

“응. 끝났지!”

프란시아가 내게 안기듯이 달려들어 소파 밑에 털썩 앉았다. 그녀에게서는 은은한 장미 향기가 났다.

“그나저나 언니는 참 대단한 사람이야.”

“갑자기?”

프란시아가 몸을 파묻으며 웃었다.

“그냥. 푸른 장미가 아니었어도 대단한 사람이었겠다 싶어서.”

회의 이야기를 하다 말고 뜬금없는 이야기에 나는 눈을 굴렸다.

“붉은 장미가 언니한테 꽉 잡혔다면서?”

“어?”

“회의를 하는데 말이야. 이 회의에 수장 노릇을 해야 할 사람이 도통 정신을 못 차리네?”

프란시아가 양손으로 내 허벅지 위에 턱을 괴었다. 조금은 심통 난 얼굴이었다.

“지금 일이 되게 많거든. 헤르님이 세력을 펼친 곳이 어디 한두 곳이어야 말이지. 그 와중에도 대공은 나가겠다, 니네 알아서 해라. 하지. 그래놓고 갈 곳이 어디겠어?”

“으음.”

“아래 이들은 졸졸 쫓아다니며 이것만 보시고 가라…….”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주 가관이었어.”

어째 프란시아의 설명으로 상황이 눈앞에 그려지는 기분이었다. 현재, 리케도르안에게 대답을 건넨 지 사흘이 지난 시점이었다.

‘삼 일동안 리케도르안의 방문이 전보다 조금 뜸해졌다 싶더니.’

이를 두고 내 대답에 실망이라도 했나 싶었다. 고백에 대한 대답으로 시간을 달라고 했으니 아닌 척하지만 사실 태연할 수는 없었던 게 아닐까 하고.

톡톡. 다리에서 조그만 노크가 느껴졌다. 프란시아가 상념을 깨우듯 톡톡톡 내 다리를 두드리고 있었다.

“언니.”

“응?”

“언니, 나보다 그 인간 더 좋아하지 마. 응?”

프란시아가 예쁜 얼굴을 갸웃하면서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내 턱에서 내 손가락을 떼어내 붙잡고 어리광부리듯 흔들었다.

“그쪽이 더 먼저 만난 건 어쩔 수 없지만. 나도 좋아해 줘.”

나는 손끝을 잡은 가느다란 손가락을 보다 이내 미소를 터트렸다. 그녀에게는 미워할 수 없는 면모가 있었다.

“이미 좋아하는데.”

“정말?”

그녀가 실로 기쁜지 방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이제는 내 손을 잡아 붕방붕방 흔들었다.

“으음, 그럼 난 뭘 주지. 언니, 얘 가질래?”

내 손을 놓고서 프란시아가 들이민 것은 다름 아닌 아기 곰 수호신이었다.

“……네 수호신이 놀라는데.”

칼리스토도 놀란 듯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왜? 대공은 언니한테 수호신을 바쳤다며.”

“그건 바친 게 아니야.”

“아니야?”

“그래. 아니니까. 내려놔. 네 수호신이 울먹이잖아.”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수호신 칼리스토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릴 것 같은 울먹이는 눈으로 나와 프란시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그만 앞발로 프란시아 옷자락을 잡는 것이…….

나 버리지 마, 잘할게! 하고 외치는 아이 같았다. 그 덕에 졸지에 이산가족을 만들 뻔한 나로서는 황당한 기분이었다.

2장. 이아나와 ‘이아나’

“으음, 언니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어쩔 수 없지만’이 아니라.”

나는 프란시아의 이마를 톡 두드렸다.

“네 수호신을 소중히 여겨야지. 울잖아.”

“아냐, 중요하지 않아서 주는 게 아니라.”

프란시아가 곰을 안고, 내 다리에 턱 머리를 올렸다.

“언니도 중요하고, 칼리스토도 중요하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끼리 함께 있으면 좋잖아.”

그리 말하며 배시시 눈웃음을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이 모습에 넘어가지 않을 수는 없었겠구나 싶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살짝 잡으며 함께 웃어 보였다. 그러다 잠시 망설인 끝에 입술을 열었다.

“혹시, 프란시아. 내 부탁 하나 들어줄 수 있어?”

그동안 품어왔던 것이었다.

어떤 부탁? 프란시아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물었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줄곧 생각하던 것을 털어놓았다.

“혹시 발테이즈 후작과 연락할 수 있겠어?”

르나그와 연락할 수 있는지를.

***

다음 날.

문득 생각해보면 나는 책을 읽을 때 여주인공을 제일 좋아했던 것 같다. 그 이전에 내용에 충실한 라이트 독자였긴 해도 여기서 최애를 찾자면 프란시아였달까.

사실 캐릭터보다 좋아한 건 꾸금한 장면이었지만, 이렇게 말하면 변태 같은데 난 그저 욕망에 충실했던 거다. 솔직하다고. 그저 ‘다 같이 살고 말지.’ 생각했던 소설 속에 들어올 줄은 몰랐을 뿐이지. 오늘도 착한 생각을 외치게 하는 어여쁜 남자주인공의 성, 헤르님. 이곳의 이들은 아주 바빴다. 물론 막바지 회의가 끝나지 않아 본디 바쁜 시기이긴 하나 그 외의 일로도 바빴다는 거다.

그 외의 일.

바로 리케도르안의 수명을 되돌릴 방법이었다. 이들이 가장 사활을 걸고 있는 일이기도 했다.

“이 많은 책을…….”

“예. 모두 보았지요.”

나는 천장까지 쌓인 책을 보며 작게 감탄을 토해냈다. 사실 더 큰 소리를 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위태롭게 쌓인 책이 넘어질 것 같았다. 그만큼 책이 많았다. 돌돌 말린 양피지 또한.

“만져봐도 괜찮습니다.”

“아, 아뇨.”

제이르는 마법으로 쌓인 책이니 넘어지지 않을 거라고 했으나 그래도 조심스러웠다. 여기 온 건, 리케도르안에게 약조한 것, 그의 저주를 풀어주겠단 약속을 위해서였다.

이를 위해선 제이르를 먼저 만나야 할 것 같았는데. 마침 그가 찾아와 흔쾌히 이쪽으로 데려와 준 것이었다. 흔쾌히도 아니었지. 아주 쌍수를 들고 반기더라.

“푸른 장미께서 협조해주신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한 일이지요. 마음껏 보십시오.”

이걸 언제 다 보란 말이지. 허망한 눈을 본 건지 제이르가 농담이라며 씩 웃었다.

“역시 내가 푸른 장미라서 도뮬릿 공작의 여동생인 건 신경 안 쓴 거군요?”

“들켰습니까?”

그는 부정도 하지 않았다. 대신 감방에서처럼 장난스레 끄덕여 보인다.

“네. 그렇습니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기에 새삼 놀랄 것도 없었다. 곧이어 제이르가 내미는 것을 받았다. 지난 몇 년간 사활을 걸고 조사한 것이라나. 손때 묻은 서류에서 그들이 얼마나 필사적이었을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각하께서는 현재 마지막 회의를 진행 중이십니다.”

“네, 들었어요.”

오전에 내 방을 방문한 리케도르안에게 들은 사실이었다. 오후 늦게야 다시 올 수 있을 것 같다고.

<나 잊으면, 안 돼요?>

오전과 오후 사이가 길면 얼마나 길다고. 이런 요망한 말을 남기고 갔었지. 어디 요망한 말뿐이랴.

<흣, 그…… 그만. 거긴…….>

<조금만 더요, 응?>

입술도 잔뜩 남기고 갔다. 그것도 중간에 인격이 바뀌며 눈이 돌아가는 바람에 푸딩을 끌어 들여가며 겨우 말렸다.

<애 보기에 선정적이라고요!>

뭐든 그러려니 하는 내가 이런 소리까지 하며 말렸다니. 아침을 생각하면 얼굴이 붉어질 지경이었다. 정작 애(?)가 된 3살 수호신은 저게 뭐 어떠냐며, 순진하게 머리를 갸웃했지만 말이다.

-뭐냐, 또 생각하는 거냐, 냥. 입술 비비는 거야, 3년 전에도 하지 않았냐, 냥?

‘조용히 해.’

내 몸에 몸을 숨긴 채 재잘재잘 떠드는 푸딩의 말을 한 귀로 흘려 넘겼다. 이를 모르는 제이르가 설명을 시작했다.

“그곳에는 아가씨에 대한 이야기도 적혀 있습니다.”

“네.”

나에 대해 조사했다는 말이네. 이 또한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근데 용케 나에 대해 알아냈네요? 내 입으로 이야기하긴 좀 그렇지만, 내 오빠는 결코 만만찮은 사람이 아니었을 텐데.”

“아, 그건.”

제이르가 자기 턱을 문질렀다. 잠시 고민의 기색이 스쳤지만 이내 곧 지워졌다.

“각하의 공작원을 총괄하는 ‘쉐로’란 자가 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도뮬릿 내부에 사람을 들여보내기 위해 애를 썼고.”

“성공했다는 말이군요.”

“네. 이미 도뮬릿 공작의 동생이 푸른 장미가 아닐까 하는 전제로 추론하던 참이었으니까요.”

남은 건 확인하는 일이었단 얘기다. 그 말에 끄덕이는데, 때마침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처음 보는 얼굴인가, 싶었더니 아니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저 사람은…….’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다. 남자 또한 나를 보았는지, 인자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정중한 인사였다.

“안녕하십니까?”

“……구면이네요.”

나는 인사 대신 놀람이 드러난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는 4년 전 내가 감방에서 보았던 간수였다.

‘이름이, 안톤이었던가?’

리케도르안이 산책하던 중 폭주를 일으켰을 때 간수를 지휘하던 유능한 상급 간수. 내게 시동어를 외쳐달라고 소리치던 사람이었고, 또 그날의 상황이 원체 잊히지 않을 상황인지라 똑똑하게 기억했다.

“당신, 안톤이죠?”

“미천한 이의 이름을 기억해주시니 영광입니다.”

그가 예의 바르게 미소 지어 보였다. 그러면서 다시 소개하기를 헤르님 대공가 기사단 부단장 ‘안톤’이라고. 하, 제이르가 감방에 동료가 많다고 하더니. 그 또한 그중 하나였던 모양이었다.

뭐. 하기야 헤르님의 하나뿐인 후계자를 감방에 들여보내면서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겠느냐마는.

나는 순순히 수긍했다.

“이런 말씀 드려도 되는지 모르겠으나, 이곳에서 아가씨를 다시 뵙게 되니 새삼 반가운 기분입니다.”

그는 르나그의 명으로 간수가 싹 바뀌기 전까지 나와 자주 마주하던 간수였다. 이것도 추억이라면 추억인지, 나는 가볍게 끄덕여 수긍했다.

“인사드릴 기회가 있을까 싶었는데 말이지요. 하하하.”

그는 호탕하게 웃고는 내가 들고 있던 보고서를 가리켰다. 그곳엔 자신이 증언한 것도 있다며.

“아가씨가 도뮬릿가 영애이자 푸른 장미인 것, 거기다 감옥에 있던 사실이 밝혀졌을 때. 저는 감옥에서 있었던 일을 보고했었지요.”

그렇겠지. 사실 감방에서의 나라고 해봐야 특별한 것은 없었을 거다.

“뭐. 특별한 것은 없었겠네요.”

그러자 안톤은 잠시 눈을 크게 굴렸다. 딱 봐도 그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표정인데.

왜?

“으음, 그렇다기엔 감방에서의 아가씨의 존재감이…….”

“제가 왜요?”

“좀, 눈에 띄었다고 할지. 예. 눈에 띄었습니다.”

그는 일단 외양부터 평범하지 않지 않냐고 말했다. 나는 흘끗 내 머리카락을 보고서 동의했다. 좀 드문 머리색이긴 하지.

죄수들도 자주 언급하긴 했다. 그럼에도 그들 중 누구도 내가 누구인지 몰랐지만.

“하긴, 내 머리색이 특이하긴 하죠.”

“아뇨, 머리색이 아니더라도…….”

안톤이 무어라 말을 하려 하더니, 이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남자는 제 뺨을 긁적이며 조금 난감한 얼굴을 보였다.

“사실 생각해보면 각하께서 계신 지하 수감실에 다녀가실 때라거나. 응접실에 갈 때가 보기 좋아 보이긴 했습니다. 생기 있어 보이셨지요.”

“네?”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에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지하 감방에 다니던 때? 제이르는 흥미롭다는 듯 나와 안톤을 볼 뿐 안톤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혹시 이전의 저를 본 적이 있으신가요?”

지하 감방을 오가기 전이라면 이 몸의 주인이 내가 아닐 때다. ‘이아나’일 때.

“예? 예. 있습니다.”

안톤이 보였던 난감함은 이 때문이었나.

“아가씨께 별로 좋은 일이 있으셨던 건 아니라, 얘기하기 조금 꺼려졌습니다만.”

그는 이전에 지하 감방 총괄을 맡기 전, 귀족 죄수 층 순찰을 총괄했다고 한다. 그때 이따금 나를 한 번씩 본 적 있었다는데.

내가 심장마비로 쓰러지던 때도 바로 옆에서 목격했었다고.

르나그가 불문에 부쳐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했단다. 물론 그의 본진인 헤르님에게는 토해냈지만, 뭐 이런 건 상관없었다.

“사실 지금의 모습이 훨씬 생기 있고, 좋아 보이십니다.”

내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긍정으로 여겼는지 그가 덧붙였다. 외람되지만 더 좋아 보인다고.

“이전에는 어때 보였는데요?”

“이전에는 뭐랄까. 항상 핏기없고, 유약한 인상이셨지요.”

그건 그랬다. 내가 막 눈을 떴을 때만 해도 이아나의 몸은 병약하고 극도로 약해진 상태였다.

“음, 그리고 불러도 대답이 없으신 데다가 눈동자도 끄응…….”

나는 그를 독려하듯 사근사근하게 얘기했다.

“괜찮으니, 있는 그대로 얘기해주세요.”

“제가 배운 사람이 아니라 적당한 표현을 못 찾겠군요. 그…… 그때의 아가씨의 눈에 초점이 좀. 없었다고 할지…….”

초점이 없었다?

“간수들 사이에서도 이야기가 나오곤 했습니다. 끼니도 거의 하시지 않았으니까요.”

심각한 표정을 하다 말고, 안톤이 커다란 손으로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자신이 말을 잘못한 것 같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그는 실수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

“제가 너무 무례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괜찮아요. 아무렇지 않은걸요. 그럼 정확히 어떤 느낌이었다는 거예요?”

“정리하자면 말입니까?”

“네.”

내가 괜찮다고 말해보라 했더니, 그에게로 에라 모르겠다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에게 집중했다. ……왜일까. 그냥 지나갈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았다.

“으음, 표현하자면 말입니다. 그때의 아가씨는…… ‘인형’ 같은 느낌이었지요, 아마?”

단조로운 평가 한 마디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는 이내 천천히 가늘게 좁혔다. 유약하고, 눈에는 초점이 없어 보였으며, 밥조차 잘 먹지 못했다.

정황상 이전의 ‘이아나’는 체이서를 사랑했고, 그에게 마음을 보답받지 못했다. 그리고 부친의 눈에서 벗어나기 위해 체이서에 의해 감방에 왔고. 그 이상은 모른다.

하지만 당시의 ‘이아나’의 상태는 이 사실과 관련 있지않을까?

곱씹어볼수록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으니까. 안톤 또한 그렇기에 이야기한 걸 거다. 전과 달랐으니까 이야기한 거겠지.

안톤은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산뜻하게 웃어주었다. 그러자 긴장이 풀렸는지 미미하게 굳어 있던 그의 눈꼬리가 내려갔다.

“제이르, 이 보고서는 가져가서 봐도 되나요?”

보고서는 한 번에 읽기에는 양이 꽤 많았다.

한번 훑어본 것으로 판단하기론 그동안의 리케도르안의 상태와 ‘푸른 장미’를 찾아온 여정, 그리고 푸른 장미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가 적혀 있는 듯 하다. 상당히 깔끔했기에 내용을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가씨 방으로 가져가셔서 말씀입니까?”

“네.”

이건 어렵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제이르는 순순히 허락했다. 오히려 물어본 내가 놀랄 정도였다.

“이거 중요한 거 아니에요?”

“맞습니다. 대공가 최고 기밀에 해당하는 것이지요.”

그래. 대공의 목숨이 오가는 일이 보통 보안을 요하는 일이 아닐 거다.

“하지만 아가씨, 문제없습니다.”

“왜요?”

“아가씨께서는 현재 헤르님 성에서 가장 보안이 철저한 방으로 가져가시는 것이니까요.”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무려 대공 각하께서 밤새워 지키시는데 누가 들어가 보거나 가져오겠습니까?”

“잠시만요.”

얼른 머리를 짚었다.

“그 사람 아직도 그래요?”

“예.”

제이르가 빙글빙글 웃었다. 일부러 말한 것이 분명했다.

“혼내주십시오. 잠도 안 자고 지키십니다.”

“…….”

리케도르안이 막 나를 여기 데려왔을 때, 잠도 자지 않고서 내 방 앞을 지켰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대답을 건넨 지금, 없어진 줄로만 알았다. 실제로 밤이 되면 자연스럽게 방에서 나갔단 말이다!

‘그대로 방문 앞을 지키다니.’

당신이 뭐 집 지키는 강아지냐고.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분명 그러지 마라고 하면. 시무룩한 얼굴을 할 게 뻔했고.

<왜, 안 돼. 응? 이아나. 입술로 알려주면 안 돼요?>

<말은 당연히 입술로 하죠?>

<입술을 입술에 붙여서요.>

따위의 말을 할 거다.

‘실제로 겪었으니까.’

며칠 만에 리케도르안의 인격이 변하는 지점을 대충 알겠더라고? 기억을 공유하지 않았다면 짐승처럼 구는 쪽은 내게 한 번 얻어맞았을지도 모른다. 말만 하려 하면 이렇게 요망한 말을 내뱉어서 막으니 말이다.

“……알았어요, 얘기할게요.”

이전에도 이야기한 바 있지만 아무리 체력이 짐승 같은 붉은 장미라도 잠을 내도록 안 자고 버틸 수는 없다. 그럼 신이지 사람이겠나. 내 방을 지킬 때마다 거의 안 잔다고 하니, 이건 필히 문제가 있다.

“……내 방에서 재워야 하나.”

내 중얼거림에 안톤과 제이르가 움찔했다. 제이르 쪽은 잠시 미소를 지웠다가 이내 다시 웃었다.

“식은 언제 준비하면 됩니까?”

“무슨, 앞서나가도 30년은 앞서나갈 준비를 해요?”

“오, 생각은 있으시단 겁니까?”

“아니요. 댁이 터무니없는 소릴 했다는 얘기죠.”

“……한마디도 지지 않으시는군요.”

제이르가 낮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면서 퍽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저희 각하는 생각보다 더 순진하십니다.”

“그래서요?”

“방에 들이시는 건 진지하게 생각해보시길 바라겠습니다. 자고로 한 방에 자는 건 그렇고 그렇지 않습니까?”

“…뭐가 그렇고 그런데요?”

“모르시면서 하는 질문은 아니시지요?”

나와 제이르의 시선이 교차했다. 뭐.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지는 알겠는데. 그는 마치 사춘기 소년의 부모가 된 양 이렇게 말했다.

“신중하게 생각하십시오. 역대 붉은 장미 기록을 보아서는…….”

제이르가 눈을 굴렸다. 그러고는 장난스레 휘었다.

“정말이지, 장난 정도가 아닐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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