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52/87)

***

해가 기울어진다.

나는 하루 중에서 석양이 지는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해가 뜰 때와 해가 지는 때는 하늘의 색이 비슷하다. 이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오묘함과 모순이 좋았다. 도뮬릿에서도 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아가씨는 이 저택이 답답하지 않으세요?>

사실 도뮬릿에게 원한을 품은 이 중에서 내게 정을 준 이라거나 나를 안쓰럽게 여긴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엔 하나같이 복수를 택했지.

그런 이들은 항상 내게 묻곤 했다. 왜 멍하니 계시냐. 답답하지 않냐. 무섭지 않으시냐…….

‘무섭진 않았지.’

아무튼 나는 그들의 생각과 다르게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좋아했다. 다만 지금은 평소처럼 평온함이 가져다주는 잔잔함에 잠기지 못했다.

머리가 복잡했다.

이렇게 혼란스러웠던 일이 언제 있었더라. 감방에서 헤르님 대공이 오기 전까지 어떻게든 리케도르안을 아프게 하려 했을 때.

출소하고 도뮬릿 저택에 막 도착하고 바로 탈출을 위해 맹렬히 머리를 굴릴 때. 아울러 3차 시도가 될 때까지 열심히 시도해볼 때.

‘그 시도가 성공해도 밖에서 편히 못 사는구나 깨닫기 전까진 그랬었지.’

몇 안 되는 복잡함이 들던 때에 끝에는 언제나 해결책이 나타나곤 했다. 어떻게든 말이다.

푸른 장미가 가진 ‘무효화’.

사실은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능력이 이렇게 누군가에게 필요할 줄은 몰랐다. 그리고 모르는 사이에 리케도르안의 생명이 차차 사라지고 있는 줄은.

……애옹.

푸딩이 다가와 축 늘어트린 손에 이마를 비볐다. 평소처럼 애교를 부린다기보다는 위로를 하는 느낌이었다. 일부러 머리로 말을 걸지 않는 것도 내 복잡함을 마음을 통해 느껴서이리라.

“괜찮아.”

나는 푸딩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난 언제나 괜찮았어.”

눈을 한번 내렸다가 다시 들어 올렸다.

“앞으로도 괜찮겠지.”

그래. 그럴 것이다. 나는 느긋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괜찮지 않은 적이 없다. 고개를 완전히 들면 조금 전에는 없던 이가 고요하게 서 있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보지 않아도 괜찮아.”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만은.

리케도르안, 당신의 눈은 언젠가 나를 안쓰럽게 여기며 복수와 연민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이들의 눈과 닮아 있었다.

내게 복수를 품었단 얘기가 아니다. 안쓰럽게 여기는 그 눈, 왜 이제 보았을까 싶었다. 복수를 품은 이들은 끝내 지난 세월 켜켜이 쌓인 원한을 외면하지 못했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을 거란 걸 안다. 확신했다. 이 올곧고도 맹목적인 눈을 보노라면 누구나 느낄 것이라고.

“이리 와요, 왜 서 있어.”

리케도르안이 말없이 다가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맞은편에 앉으란 소리였는데. 내 앞에 커다란 짐승처럼 무릎 꿇고 앉은 모습이 감방에서의 그를 떠올리게 한달지. 참 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란시아는 본인의 얘기를 끝내고 돌아갔다. 리케도르안의 얘기뿐만 아니라 자신과 관련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하나 시간이 많지 않아 전부 할 수는 없었고, 결국 다음을 기약하며 돌아갔다. 그는 오늘 낮 나와 프란시아의 대화를 모두 들었을 터였다. 그럼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는 얼굴이었다.

혹시 몰라 한번 물어보았다.

“모두 들었죠?”

주어도 목적어도 없는 말을 곧잘 하더니, 그는 알아듣는 것도 곧잘 알아들었다.

“……흰 장미와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라면, 네.”

제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데. 그는 몹시도 태연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왜 얘기 안 했어요?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거.”

리케도르안이 잠시 멈칫했다.

“중요한 얘기잖아.”

내 목소리에서 조용히 요동치고 있는 것을 그도 느꼈을 것이다.

나의 모든 것에 예민하게 감각을 세우는 남자였으니까.

“이봐요, 대공님.”

점차 바뀌는 목소리와 내 호칭에 리케도르안이 설핏 몸을 굳혔다.

“나는, 내 얘기를 타인에게 잘 하지 않아요. 사실 예전엔 나도 나에 대해 딱히 궁금하지 않기도 했고.”

그저 편히 살 수 있을 줄로만 알았던 날의 이야기.

“이미 일어난 건 얘기해봐야 소용없기 때문이에요.”

이와 비슷한 이유로 나는 화를 잘 내지 않는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굳이 그럴 이유가 없다면 하지 않는 것들.

“그리고 사실 남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크게 관심이 없어요. 그냥 내 등 따뜻하고 잘 먹을 수 있으면 충분하니까.”

그렇게 여기며 살아온 날들. 내 안위만 있다면 다른 것들은 상관없었던 날들.

“그런데 왜 당신은.”

나는 그에게 잡힌 손을 빼냈다. 나치고는 크고 단호한 동작에 리케도르안의 눈이 커진다.

“왜 나를 후회하게 해?”

웃으려 했지만 잘 되었는지 모르겠다. 두려움과 무서움과 낯섦으로부터 태연함을 가장하기는 쉬웠는데 반대는 영 쉽지 않다.

우화 속 나그네의 옷을 벗겨버린 따뜻하고 간질간질한 것들은 오히려 매서운 감정들보다 나를 취약하게 만들었다.

당신의 맹목은 나를 곤란하게 만든다.

“나는 다시 돌아가도 당신에게 미안할지언정, 지금보다는 무겁게 생각할지언정. 당신과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을 잘한 일이라고 생각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놓았다.

평소 감정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무심하게 놓아버린 사람은 가슴에 이는 불길에 당황하곤 한다. 나처럼.

<1년 뒤. 이, 이곳에서 벗어나는 날, 나……랑 만나주세요!>

4년 전 그때 나는 용기가 없었고, 책임을 지기 싫었으며, 책임질 방법 따위도 몰랐다.

“그게 제일 나았던 일이니까.”

그러니 돌아가면 또다시 리케도르안을 버릴 거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말했잖아요. 나 이기적이고 참 뻔뻔하다고.”

그래. 나는 몇 번이고 돌아가더라도 당신을 위한다며, 당신의 의사를 고려치 않은 이 이기적인 이유를 대며 당신을 가장 우선시하지 않을 거다. 버릴 거다. 약조를 지키지 않을 거다.

“아까워요. 아깝다고. 나한테 주기에는 당신의 모든 것이! 당신이 알아?”

아깝고 안타깝고 안쓰럽다.

“미쳤어요? 목숨을 걸게?”

당신은 내가 안쓰럽나? 나는 당신이 안쓰럽다.

“그게 뭐라고 목숨을 걸어요!”

석양을 바라보며 실로 오랜만에 평온하지 못했다. 체이서가 피를 묻힌 검을 들고 온 날에도 무심히 하늘만을 바라보았건만.

머릿속에는 온통 프란시아가 전해준 이야기뿐이었다.

내가 위험을 감수하고 푸딩을 데리고서 쉬르멜라로 향했던 이유가 무엇이던가. 당신이 살길 바랐다.

기왕이면 행복해지길 바랐다.

그런데 이미 그가 엉망이 되어버렸다니. 그것이 나로 인해 일어난 일이라니. 어찌 허탈하고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이 미련한 사람에게.

“……화, 났어요?”

이 순간에도 리케도르안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나를 살폈다. 자신보다 나를 우선하는 모습이었다.

만약 어린 리케도르안을 두고 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가 출소하는 날까지만이라도 곁에 있었다면. 아니. 그의 손을 잡고 차라리 헤르님으로 갔다면.

소용없는 가정은 이 순간에 필요치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평소 하지 않는 일이었다.

이성과 평온을 흩트려놓는 일. 비합리적이라 여겼다. 그러나 이제는 재회할 때의 냉정함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남자를 보며 허탈함을 품은 미소밖에 나오지 않았다.

강아지는 버림받았을 때 무정한 주인을 원망하는 대신 자신의 탓을 한다고 한다. 이전 세계에서 본 적 있다. 내가 발이 느려서 쫓지 못한 것이다, 생각하면서 떼어놓고 또 떼어놓아도 낑낑대며 상처 입은 발로 끝내는 제 몸보다도 훨씬 큰 자동차를 쫓아온 티브이 속 강아지를.

리케도르안 또한 그랬다.

그를 보고 있노라면 평생 한 주인만을 바라보는 짐승을 보는 기분이었다.

“……협조할게요.”

좀처럼 시선을 피하는 법 없던 내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당신 몸에 걸린 그 저주, 어떻게든 내가 풀어줄 거야.”

결자해지란 말이 있다. 결국엔 내가 묶어버린 것이라면 푸는 것 또한 내 몫이다.

“정말, 내가 푸른 장미가 아니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사실 이것이 가능한 건 그나마 내가 푸른 장미라서다. 물론 내가 푸른 장미가 아니었더라도, 제이르와 헤르님에서 어떻게든 ‘푸른 장미’를 찾았겠지만. 그 사람이 협조하지 않았다면? 이미 죽었었더라면?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가능성이 희박한 도박을 했다.

급하고 절박했다고 해도 그렇지. 판돈에 제 목을 걸어놓다니!

나는 고개를 돌리며 손등으로 뺨을 훔쳤다. 입술이 꾹 다물어졌다. 한숨이 흘러나왔다.

“……사람이 어쩜 그렇게 미련해요.”

다른 손으로는 리케도르안이 날 보지 못하게 손으로 눈을 가려버렸다. 아마도 엉망일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하나 감각이 짐승같이 발달한 남자라 했던가.

“……이아나.”

그가 머뭇거렸다.

“울어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기도 했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고작 한줄기 흘린 것 가지고 누가 울었다고 한단 말인가.

민망함에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니요.”

리케도르안이 입술을 달싹였다.

“거짓말. 울었잖아요.”

그의 혀가 천천히 자신의 아랫입술을 축였다.

“나 때문에.”

리케도르안의 목소리가 한껏 낮아져 있었다. 높낮이뿐만 아니라, 살짝 쉰 듯 유혹이 흘러나왔다.

이는 인격이 변했다는 증거였다. 하필이면 이럴 때…….

나는 난감함을 느끼며 손을 떼어내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허공에서 잡아채였다. 리케도르안이 내 손을 잡고 나른하게 웃고 있었다.

“나 때문에 울어주는 거구나.”

청초한 눈매가 가늘어지며 우아하게 접혔다. 그러나 평소에는 볼 수 없던 농밀함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기뻐요.”

그가 배시시 미소하며 내 손을 뺨에 비볐다. 아까와 그리 다를 것이 없는 동작이었으나 전해지는 느낌은 달랐다.

“목숨을 건 보람이 있네.”

“지금 그게 할 말이에요?”

“응.”

태연자약한 음성에 울컥해 무어라 하려 했지만,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쏙 들어간다.

“하, 그렇게 웃지 말아요.”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물먹은 백합같이 청아하고도 야살스러웠다. 모순된 모습을 자아낸다.

“……뭘 잘했다고 웃어요. 웃기는.”

한숨과 함께 그의 이마를 살짝 밀어냈더니 살살 뒤로 밀려나 주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라 그대로 상체를 일으켰다. 일으키는 것으로도 모자라 다리도 펴니, 어느새 커다란 그림자에 갇혀 있었다.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리케도르안.”

“응.”

그에게 뻗은 손이 그대로 그의 입술에 삼켜졌다. 리케도르안은 내 손바닥에 입술을 묻은 채로 시선을 내렸다.

“듣고 있어요. 이아나. 당신의 말이라면 언제든.”

다른 날보다도 갈증이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그가 그대로 고개를 기울여 내 뺨에 입을 맞췄다. 그치고는 가벼운 입맞춤이라 생각했을 때였다.

할짝.

내 뺨을 살짝 핥기 전까지는.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짜네.”

“뭐…… 뭐 하는 거예요?”

황급히 떨어지려 했지만 이미 소파는 만석이었다. 등받이에 푹 기대서 눈을 깜빡였다.

“정말, 나를 위해 울어준 거구나.”

리케도르안이 눈 밑을 발긋 물들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기쁘고, 행복해요.”

손을 끌어올려 그의 목을 잡았다. 아니, 그가 붙잡게 한 것이었다. 그사이 그의 손가락은 살살 아래로 내려간다.

<목에 흉터도 남았을걸. 잘 안 보여서 그렇지.>

프란시아의 음성이 귀로 생생하게 재현되었다.

아직은 선명한 석양이 떠 있는 시간이었다. 창문 앞 소파는 조명 없이도 밝았다. 그래서 나는 희미한 흉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새하얀 피부 위로,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옅은 흉터를.

프란시아는 이리 말했다. 붉은 장미는 어떤 상처도 재생하는 몸을 가졌다고. 실제로 그의 부친이 한 학대 흔적들은 시간이 지나면 말끔히 사라지곤 했다.

그런데 그럼에도 흉터가 남은 것이라고. 완벽한 치유력을 자랑하는 흰 장미의 치유를 받았음에도.

<흉터를 일부러 남긴 건지. 어쩔 수 없이 남은 건지는 몰라도요.>

프란시아는 조금은 짓궂게 덧붙였으나 상황의 심각성만은 충분히 전해졌다.

“이아나, 내가 얼마나 못된 사람이냐면요.”

리케도르안이 툭, 나와 이마를 맞대며 속삭였다. 나른한 숨결이 느껴졌다. 누워있던 등줄기가 저절로 펴진다. 평소의 그라면 절대 할 수 없을 대범한 접촉이었지만, 이미 그는 평소의 그가 아니었다. 하나 기억과 감정을 공유하는 그에게서 진심이 흘러나왔다.

“이 흉터를 보면서 네가 죄책감을 가지지 않을까. 그런 못된 생각을 했어.”

나는 피하지 않는 대신 그의 뺨을 살짝 잡았다.

“……정말 못됐네.”

“응.”

그가 소리 죽여 웃었다.

“그 정도로 절박했으니까.”

목숨은, 생명까지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단 말로 들렸다. 그는 그 말이 더 미련하고 안쓰럽게 느껴진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나는 매끄러운 뺨을 엄지로 살살 문질러 보았다. 그러다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벌 받아야겠네.”

눈을 내리깔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너무 못돼서, 벌 받아야겠다. 당신은.”

오래전 강아지처럼 낑낑대는 인격을 떠올리며 달래듯 그리 중얼거렸더니, 리케도르안이 고개를 기울여 시선을 맞췄다.

그러고는 느릿하게 눈을 휘었다.

“벌로 키스해줘.”

아주 요망하게.

누구도 위협하지도 겁박하지도 않았건만 팽팽한 긴장감이 이 짧은 거리 안에 존재했다.

나는 그런 그를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작게 내뱉었다.

“……눈 감아.”

***

사실 리케도르안은 키스해 달라, 말하고서도 기대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저 깍지 낀 손에 내 손가락을 굴렸을 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 증거였다.

그래서일까. 내 한마디에 인격이 변한 채임에도 놀란 눈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말을 잘 듣는 짐승이었다. 지금 이성을 놓은 상태라면 더더욱 충실한 짐승이리라.

“나는 눈감는 쪽을 좋아해.”

비록 이성이 없는 쪽은 다소 제멋대로이긴 했지만 큰 알맹이는 다르지 않았다. 나를 최우선으로 하는 마음, 그건 지금도 다르지 않아, 아프지 않게 뒷목을 쓸어내리더니, 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은발과 같은 색의 속눈썹이 팔랑 내려간다. 유려한 눈꺼풀이 닫히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숨을 살짝 삼켰다.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나는 그의 옷깃을 잡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 그저 입술을 맞대는 요령 없는 입맞춤이었다. 하자고 말하고서 빼기는 좀 그랬지만 실상 이 이상은 그다지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상황은 뜻대로만 흘러가지 않는 법이었다.

몸이 그대로 스르륵 흘러내렸다. 깍지를 낀 손이 나를 고쳐잡았다. 놀라 눈을 홉뜨며 입술이 살짝 벌어진다. 애써 일으키던 몸이 다시 소파에 눕혀졌기 때문이었다.

“리케, 흡.”

그리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입술이 내 아랫입술이 가르고 들어왔다. 언젠가 감옥에서 사탕을 입에 머금었을 때처럼 아찔한 감각에 발가락이 그대로 곱아들었다.

살짝 들썩이는 어깨를 단단한 손이 쭉 그었다가 놓았다. 목과 어깨 사이 매끄러운 피부로 닿는 감각, 굳은살로 울퉁불퉁하고 거친 손끝은 막 예민해진 살갗에 오히려 자극이 되었다.

신음이 흘러나왔다.

누군가 등줄기로 짜릿한 전기 신호를 보낸 것만 같았다. 입술로 빠져나온 소리는 정말 내 목소리가 맞나 싶은 목소리였다. 가녀리게 흘러나오는 소리에 얼굴이 빨개질 것만 같았다.

정신이 혼미한 틈에서도 한줄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분명, 4년 전에도 지금에도 내가 처음일 것이다. 다른 사람은 없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잘해?

똑같이 처음인데 이 차이 나는 능력치는 신이 남자주인공에게만 특별히 내려주신 능력인가.

별생각이 들었다.

내가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리케도르안이 살살 가르고 들어와 툭 한곳을 자극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숨이 모자라자, 그가 살짝 입술을 떼어내며 부드러이 살살 문질렀다. 톡톡, 새가 부리로 쪼는 듯한 키스였다.

“저기.”

그러나 나는 입술에만 신경을 쓸 수 없었다.

“리본은 왜 당기는데?”

입술을 떼어낸 리케도르안이 고개를 기울였다. 어느새 가슴을 장식했던 끈은 스르륵 풀려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이것을 푼다고 옷이 벗겨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걸 보니 기분이 묘했다.

사실 그가 잡아당겼다기보다는 소파에 누우면서 풀린 것 같긴 한데. 반신반의했다. 리케도르안은 나와 리본을 번갈아 보다가 어느 순간 얼굴을 화끈 물들였다.

리본이 풀린 자리로 옷섶이 벌어진다. 하얀 가슴골이 보였다.

“이, 이건…… 내가 벗긴 게.”

“아닌 거 맞아?”

“아, 아니. 아니……에요.”

그는 이성이 돌아온 듯했다. 어느 순간에 돌아온 건지 몰라도 붉어진 채 손사래 치는 모습은 진짜였다.

“아니야?”

“아, 아니에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가 이내 수긍했다. 뭐. 아니라면 다행이긴 한데. 내 인생 아직은 전연령가이고 싶으니 말이지.

“입술 아파.”

움찔.

리케도르안이 잔뜩 붉어진 얼굴로 눈을 굴렸다.

“당신, 거친 거 좋아해요?”

“네, 느, 어, 네?”

“농담.”

저돌적으로 달려든 건 본능이었으려나. 마지막에는 살살 부드러워졌지만 잠깐 동안은 그대로 삼켜지는 줄 알았다.

이걸 뭐라고 하더라.

‘낮져밤이?’

아니다. 하지 말라면 또 하진 않으니 낮져밤져인가. 영 엉뚱한 생각을 하며 고개를 슬며시 저었다.

‘저런 표정은 변함이 없네.’

저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감방에서의 그의 모습이 떠올라 살풋 웃음을 터트렸다. 웃고 나니 그가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위에 계속 앉아 있을 거예요?”

“네? 아…….”

4년 전의 그였다면 화들짝 놀라 얼른 비켰을 터였다. 하나 리케도르안은 머뭇거리면서도 몸을 옮기지 않았다. 대신에 단단한 손으로 소파 등걸이를 잡았다가 놓을 뿐이었다.

그러더니 붉어진 얼굴로 나를 그윽하게 담았다.

“…번만. 한 번만 더 해도 되나요?”

뻔히 보이는 수작이건만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자태로다가. 이걸 대체 어떻게 이기란 말인가? 결국 내 끄덕임에 그의 고개가 다시 내려왔다.

“그럼 나도 바라는 게 있는데.”

“…뭔데요?”

“만져 봐도 되나요?”

“네?”

붉어진 눈가가 끔뻑였다. 나는 그가 오해하기 전에 얼른 말했다.

“그쪽이 만진 만큼만요.”

말하고 보니 그다지 건전한 소린 아니긴 한데, 뭐 어때. 공평하잖아. 리케도르안은 잠시 망설이다가 끄덕였다. 서로의 동의하에 나는 천천히 손을 가져다 댔다. 처음은 뺨이었다.

그는 온도 차에 놀란 듯 잠시 움찔했다가 이내, 내 손바닥에 뺨을 기댔다. 커다란 짐승이 몸을 내맡긴 기분이었다. 전쟁에도 참여한 대공이라더니, 피부는 어찌나 좋으신지. 나는 보드라운 솜털을 쓸어내리다가 목에서 멈췄다. 검지로 목선을 사아악 쓸어내린다. 파드드득! 놀란 리케도르안이 내 손을 잡고 나를 보았다.

“이, 이아나?”

“쉬이, 약속했잖아요.”

나는 그에게서 부드럽게 손을 빼내어 조금만 더 아래로 내려갔다. 마침내 가슴에서 손을 멈췄다. 쿵쿵. 얇은 셔츠 아래로 미친 듯이 뛰는 박동이 느껴졌다.

이미 한 손은 그에게 깍지를 잡혀 붙잡혀 있으니, 다른 한 손만으로 단추를 툭 건드렸다. 내 손아래서 희롱당한 단추가 투툭 풀린 건 순식간이었다. 와, 역시 생각한 대로네. 조금 엉큼한 소리지만 절경이었다. 셔츠 사이 탄탄한 근골의 곡선이 숨을 쉬는 대로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흘끗 위를 보면 신기하게도 그는 새하얀 목이 이렇게나 붉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나는 살짝 미소 지었다.

“당신이 위에서 그렇게 내려다보고 있으니, 굉장히 선정적이네요.”

움찔, 그가 움질했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깃을 콱 잡아당겼다. 순순히 이끌려오는 남자는 얼떨떨하고도 수줍은 얼굴이었다.

“계속 내 위에 있으려고요?”

톡, 입술이 겹치자 그는 참지 않고 파고들었다.

내 위에 앉아 있을 거냐고 묻긴 했지만 리케도르안은 내게 무게를 싣기는커녕 자신의 힘만으로 버티며 입을 맞췄다. 솔직히 그의 덩치가 나를 덮다 못해 자리가 한참 모자랐으니 좀 더 거칠었다면 이 소파가 견디지 못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아무리 봐도 최대 3인용인 작은 소파인 것 같으니까. 물론 어디까지나 내가 그와 그럴 생각이 있었다면 말이다. 나는 리본까지 내려온 손을 꼬옥 쥐었다.

“저기, 리케도르안. 이 타이밍에 미안한데.”

나는 평소답지 않게 말을 망설였다. 리케도르안이 붉어진 채로 귀를 쫑긋 세워서 미안해졌다.

“나 파렴치한 같은 소리 좀 해도 돼요?”

이렇게 말하고 보니, 정말 나쁜 사람처럼 느껴졌다. 더군다나 그의 모습은 엉망이었다. 나, 단추 두 개밖에 건드리지 않은 것 같은데 아래 몇 개가 또 찢어져 있다. 대체 힘이 얼마나 센 건지. 리케도르안이 드물게 순진하게 눈을 깜빡이며 더욱더 눈을 키웠지만 나는 모른 척 말했다.

“먼저 당신의 마음에 제대로 답을 준 것도 아닌데, 입 맞춰서 미안해요. 음, 좀 파렴치한 짓을 한 것도요.”

일단 사과할 것부터 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아, 아니에요! 나도……. 내가, 머, 먼저 했으니.”

“응응. 무슨 말 하고 싶은지 알아요. 일단 들어줄래요?”

저쪽이 청하고, 분위기에 휩쓸렸다고 한들 내가 먼저 한 건 맞으니. 나는 그를 달래며 말을 이어갔다.

“내가 감정에 무뎌요. 음……. 정확하게는 내 감정에도 상대의 감정에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요.”

사실이었다. 나는 평온하게 지낼 수만 있다면 상대를 깊이 들여다보지 않았고, 나 스스로라 할지라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래서 감정을 생각하고, 마주 보는 것에도 시간이 걸린다는 얘기에요, 나는. 그런데 지금은 신중히 생각하고 싶거든요.”

나는 소파 위에 얹힌 그의 손을 잡았다. 그가 했듯이 손에 깍지를 끼고 그의 손끝에 툭 입을 가져다 대 보았다.

멈칫. 그가 멈칫하더니 손끝마저 붉어진다. 참 미모사 같은 남자였다. 반면에 나는 입술을 가져다 대도 무언가 커다란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가 어떤 기분으로 맞추는지 궁금해서 해봤는데.

잘 모르겠다.

조금 전 입을 맞추던 때처럼 조금은 간질간질하고 달콤하던 것, 더욱 깊이 파고들고 싶은 녹진한 기분을 느끼진 못했다는 거다.

“이를테면, 나는 당신이 좋아요.”

좋다. 그렇지 않으면 내내 마음에 걸리지도 않았을 것이고, 결국엔 마음의 돌부리가 되어 이곳에 눌러앉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얼마만큼 깊은지 또 어떤 색을 했는지, 모양은 어떤지. 나 스스로도 잘 모르겠어요.”

물론 감정을 어찌 모양이며 색깔로 재단하고 판단하랴. 그러나 특별한 것이라면 특별하게 대우해야 하지 않을까.

“마주 보고 살지 않았거든요.”

줄곧 이런 것들을 신경 쓰지 않았지만 당신이 내게 보이는 태도를 보노라면, 어쩐지 나도 내 스스로를 좀 더 소중히 여겨야 할 것만 같다.

당신이 내게 보이는 것처럼.

만지는 것만으로도 소중해 어쩔 줄 모르는 태도를 볼 때마다, 가슴 안쪽에서 느껴지는 것들을 더 알고 싶다.

“입을 맞춘 마당에 참 미안한데. 조금만.”

“당연히.”

리케도르안이 내 말을 끊고 들어왔다.

“기다려줄 수 있느냐 묻는 거라면. 당연한 얘기예요.”

리케도르안이 진지한 눈으로 깍지를 낀 손을 가져왔다.

“이대로 평생 기다려달라고 하더라도 가능하니까요.”

나는 잠시 침묵했다가 대꾸했다.

“……당신 현재 평생 못살잖아요. 누굴 속이려 들어요.”

움찔.

“그건 말이 그렇단…….”

“말을 그럴싸하게 하기 전에 본인부터 소중히 여겨요. 알았어요?”

“그건 이아나야말로.”

“나요?”

눈이 마주치자, 리케도르안이 입을 달싹였다. 흐음, 하고싶은 말이 많은 표정이네. 나는 우물거리는 입술을 보다 살짝 웃었다.

“알았어요. 나도 그렇게 해볼게요.”

하고 싶은 것, 가지고 싶은 것. 그리고 해보고 싶은 것. 그가 내게 물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하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한번 찾아볼게요.”

나는 리케도르안의 손등에 얼굴을 살짝 비볐다.

“노력해볼게요.”

뻔히 보이는 답을 두고 돌아가는 내가 어째 하룻밤 자고 나서 우리는 하루 즐긴 거야 말하는 나쁜 인간이 된 것 같지만.

한 번쯤 소중히 여겨보고 싶었다.

내 삶은 흐르는 물과 같았다. 감방에서 도뮬릿으로, 도뮬릿에서 다시 헤르님으로. 지금까지 그저 흘러가는 흐름에 몸을 맡길 뿐이었다. 그중에서 처음으로 있고자 선택한 곳이 당신이 있는 곳이니까. 이것이 무엇인지 나는 더 파악하고 싶었다.

당신에게 미안하게도 내 모든 감정의 온도는 워낙에 낮아서, 미지근한 이것이 진짜 사랑인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저 입술이 주는 온도가 좋아, 몸이 먼저 오가는 관계는 되고 싶지 않았다.

“그, 그럼…….”

천천히 손을 놓아주자 리케도르안이 내 몸을 일으켰다. 말이 일으켰다지, 나를 한 번에 번쩍 들어 제대로 앉혀주었다. 누가 짐승 같은 능력을 가진 붉은 장미 아니랄까 봐. 정말 사람을 번쩍번쩍 드는구나 싶었다.

“앞으로도…….”

“앞으로도?”

“입……. 맞춰도 돼요?”

계속 머뭇거리더니, 이 말이 하고 싶었던 걸까. 나는 대답하는 대신 엉뚱한 것을 물었다.

“대답하기 전에 나 궁금해서 묻는 건데, 혹시 문신을 새기는 방법이 키스예요?”

“네? 아. 아뇨. 그건 아닌데……. 이건 장미마다 방법이 조금씩 달라요.”

“그래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붉은 장미는 어떤데요?”

볼수록 장미마다 각각 특성이 참 두드러지는구나 싶었다. 한 가지 행위를 하는데도 각각이 방법이 다르다니. 체이서는 힘들이지 않고 새긴 것 같았는데. 뭔가 더 있었던 걸까?

그사이 리케도르안이 고개를 푹 숙였다.

“……요.”

“네? 안 들려요.”

“……방법……. 잠요.”

잠?

그렇게 되묻다 말고 깨달았다.

“당신이랑 자는 거라고요?”

……설마 하룻밤 보내는 거라고?

순화해서 표현했지, 관계하란 소리 아닌가. 리케도르안에게 되물었더니 정말 한참 만에 어렵사리 대답이 흘러나왔다. 맞다고.

이것 참. 낭만적이라고 할지. 설정 한번 엉뚱한 곳에서 십꾸금스럽네.

‘어쩐지 새겨도 되냐고 물은 뒤로 말을 못 꺼내더라니.’

혹시 처음 물을 때만 해도 내가 아는 줄 안 건가. 바로 아니란 걸 안 거고? 덕분에 나는 앞으로의 일이 좀 망설여졌다.

‘사실 푸딩 때문에 이미 붉은 장미 문신을 가지고 있긴 한데.’

허벅지 안쪽에 있다는 말을 했다간 간신히 풀어진 분위기가 이상야릇해질 것 같았다.

“안, 안 새겨도 돼요. 내가 말을 잘못했어요. 그건 나중에…….”

아니. 당장에 새기진 않더라도 문신 얘기는 해볼까 했더니 결국엔 리케도르안이 먼저 말을 넘겨버렸다. 내가 어물어물하는 사이에.

“그리고 나는 괜……찮아요. 기다려도.”

그사이 리케도르안이 고개를 푹 숙인 그대로 이어 말했다.

“……계속, 아니. 영원히 기다려도 좋아요.”

잠깐 영원히라니. ……그럼 기다리다가 죽어도 좋단 말인가?

너무 극단적이다 못해 그의 저 한마디 덕에 내가 더 파렴치한이 된 것 같았다.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좋아한대도요.”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눈앞에서 청초한 남자의 얼굴이 꽃처럼 피어났다. 그의 미소를 보아온 나조차도 놀랄 정도로 해사한 얼굴이었다.

촉.

그가 고개를 기울여 입을 살짝 맞추고 떨어진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붉어지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동백꽃처럼 붉고 가려하게 물든 얼굴을 보노라면 가슴에 피어나는 의문이 있었다.

“혹시 변하지 않는 건, 장미들의 특징이에요?”

문득 물었다.

체이서는 지난 4년간 참으로 한결같았다. 한결같이 하나를 갈구했다. 프란시아도 잠깐 본 것으로도 알 수 있을 만큼 줄기는 변하지 않았으며 르나그 또한 그렇다. 이중 최고봉은 눈앞의 리케도르안이었다.

“……보통 사람보다는 조금 오래 사니까.”

리케도르안은 푸딩이 그러했듯 제 뺨에 내 손끝을 살짝 문질렀다.

“그래서 변하기 힘든 걸지도 몰라요.”

언젠가 수호신은 장미의 마음과 행동에 영향을 받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내게 집착하고 헌신적이던 체이서 그리고 아퀼라와 라탄처럼 푸딩과 리케도르안도 닮아 있었다.

“어린 나무는 언제든 옮겨 심을 수 있지만 고목은 불가능한 것처럼.”

그의 맑은 푸른 눈이 나를 향했다. 심해처럼 깊은 눈이었다.

“당신 마음 또한 그렇다는 거예요?”

“네.”

리케도르안이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석양 아래서 석양만큼이나 붉은 물을 들이며.

“당신을 사랑해요.”

정말이지, 직구 말고는 던지지 못하는 남자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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