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51/87)

***

“언니!”

오늘부터 헤르님에서 대대적인 큰 회의가 열릴 거라고 했다. 신전은 헤르님의 가신은 아니었으나 협력자로서 이 자리에 참여한 것이란다. 그래서 프란시아가 같은 공간에 있지만, 우리가 보게 된다면 한참 뒤의 일일 거라 생각했다. 적어도 회의 몇 차례나 끝난 뒤 말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무색하게 프란시아는 방문한 바로 그날 바로 찾아왔다.

심지어 난간 아래로 본 지 한 시간도 안 된 시점이었다.

“언니, 정말 너무 보고 싶었어요. 잘 지냈어요? 네?”

사실 나는 그녀가 내게 달려올 때만 해도 알아보지 못하고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그도 그럴 것이 가까이서 본 프란시아는…….

“…프란시아?”

“네!”

완벽한 ‘성인’이 되어 있었다.

“멋진 여자가 되었죠? 응?”

물론 그녀가 나보다 한 살 어릴 테니 성인임은 맞다.

“약속했잖아요.”

다만 4년 전 너무나 앳되다 못해 성장하지 못해 어린 모습을 보았던 나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는 변화였다.

‘분명 ‘성장’해서 보자고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다를 줄은 몰랐네. 놀랍다. 그녀는 책 속에서 아름답고 착한 아가씨하고 누누이 표현하던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욱더 아름답고 선량한 얼굴이었다. 숫제 책을 보며 상상했던 모습 그대로 성장했다.

“놀랐어요?”

눈앞에서 미인이 나를 보며 활짝 웃어주니 감개가 무량하고 황송할 지경이다.

“어, 조금 놀라긴 했어.”

“헤헤. 나 성장했어요!”

흰 장갑을 낀 손이 내 손을 잡고 붕방붕방 흔들었다.

동그랗고 선량한 눈매 안쪽엔 여전히 한쪽은 은빛, 한쪽은 녹색과 은빛이 뒤섞여 오묘한 빛깔을 띤 파이 아이와, 오드 아이가 여전했다. 시간이 흘러 색이 더욱 진해진 눈동자는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냈다. 지금 걸친 새하얀 의장과 잘 어우러졌다.

‘성스럽기까지 하네.’

왜 책 속에서 두 주인공의 분위기가 비슷하게 느껴졌는지 알겠다. 두 사람 다 신이 정성 들여 빚은 것처럼 청아하고 우아했으며, 범접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현재 프란시아와 만난 장소는 다름 아닌 내 방이었다. 정확하게는 내 방 옆방에 딸린 자그만 응접실이다.

내 옆에는 팔짱을 낀 리케도르안이 ‘나 불만 있음’을 차가운 얼굴로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으며. 반대로 프란시아의 옆에는 처음 보는 낯의 미남이 리케도르안의 눈치를 보며 진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누구지?’

나는 처음 보는 이에게서 의문을 숨기며 프란시아를 향했다.

“많이 놀라긴 했어.”

주워온 콩이 <잭과 콩나무>의 콩나무였나 잠깐 엉뚱한 생각을 할 정도로 그녀는 나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커 보였다. 이렇게 보니 활발하면서도 성숙해 보이는 인상이다. 자연스럽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건강하니 다행이다. 훨씬 보기 좋아.”

비단 그녀가 커지고 아름다워진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모습이 비쩍 마르고 날카롭던 그때보다 훨씬 생기 있어 보였다. 동생처럼 어여뻐하던 기억 때문인지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정말?”

“응.”

내가 소파에 먼저 앉자, 프란시아가 기다렸다는 듯 쪼르르 달려와 내 옆에 앉았다. 그녀가 콧잔등을 설핏 찡그리며 내게 팔짱을 꼈다.

“언니, 언니. 제가 여기 오려고 얼마나 애타게 허락을 구했는지 몰라요.”

흡사 일러바치는 듯한 음성이었다.

“이곳의 주인이 들여 보내주지 않으려 한 거 있죠?”

흘끗 프란시아의 눈이 리케도르안을 가리켰다. 이를 본 리케도르안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쓸데없는 소리 마.”

이리 보면서도 그는 맞은편에 앉는 대신 문 쪽으로 걸어가 팔짱을 끼고 이쪽을 지그시 보았다. 마치 감시라도 하듯이. 프란시아도지지 않고 응수했다.

“치사한 게 누군 줄 알고 저런 말을 하시는지? 찾으면 보여주기로 약속했으면서.”

그리고 낯선 미남은 프란시아와 리케도르안 사이에서 눈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자연스럽게 소파 뒤쪽에 가서 섰다. 유약한 인상이나 마른 체격을 보아서는 호위는 아닌 것 같은데.

“저기, 저 사람은?”

“아아. 신경 쓰지 마요. 교황이에요.”

나는 그렇구나 끄덕이다 말고 멈칫했다.

……잠깐만, 교황?

“천천히 설명할게요, 언니.”

프란시아가 싱긋 웃으며 고갯짓하자 남자는 얼른 끄덕이더니 알아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이제 방 안에는 나와 리케도르안, 프란시아. 세 사람밖에 없었다.

‘아니 4년간 무슨 일을 했길래 무려 교황이, 아니 그보다. 무슨 애완동물처럼…….’

아니. 이건 방금 그 미남에게 실례인 것 같다. 얼른 지우고 일단 다른 것을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다 문득 사고의 방향이 엉뚱한 곳으로 쇄도했다. 생각해보면, 몇 년 전 프란시아를 도망가게 했을 때 이를 도와준 것은 르나그였다.

어쩌면 프란시아라면 르나그와 연락할 방도가 있지 않을까?

‘내 소식만이라도 전할 수 있게.’

되도록 체이서를 거치지 않고 소식을 전달하고 싶었다. 나는 괜찮다고, 잘 지낸다고. 그리 생각할 즈음에 프란시아가 입을 떼었다.

“언니, 푸른 장미라면서요?”

시작부터 홈런 급 직구였다. 무슨 이야기가 시작부터 산 중턱에서 시작하는지. 웃음과 함께 날아온 핵폭탄에 나는 눈을 크게 깜빡거렸다.

“아버지와 제가 찾던 것이 있었다고 했던 거 기억해요? 그게 바로…… 푸른 장미거든요.”

이렇게 가까이 있을 줄은 몰랐지만. 하고 프란시아가 옅게 입술을 끌어올렸다. 나는 놀랐지만 이내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렇다고 하네.”

“뭐예요, 언니. 왜 이렇게 심드렁해.”

보아하니 이쪽도 이미 알고 있었나 보네. 하긴 뭐. 리케도르안의 조력자가 되었다면 알 수도 있겠거니 했다. 이쯤 되면 나만 빼고 아는 정보였나 싶기도 하고, 그랬어도 상관없지만…….

동시에 잘 됐다는 생각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나 또한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했으니까.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나는 푸른 장미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리케도르안은 자연스럽게 나오는 체이서 얘기에 묻기가 꺼려졌고, 다시 볼 기회가 없어서 그렇지 제이르라도 다시 만나면 물어볼까 싶었던 것이었다.

“푸른 장미는 어떤 장미며, 어떤 능력이 있는 거야?”

프란시아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이내 그녀의 뾰족한 표정이 닿은 곳은 리케도르안이었다.

“이봐요, 대공님. 당신 제대로 설명 안 했어?”

리케도르안이 대답하지 않자, 그녀의 표정이 더 찡그려졌다. 그러나 내게 돌아왔을 때는 다시 활짝 웃는 낯 그대로였다.

“아무래도 저 대공님은 언니를 물고 잡고 끙끙대느라 아무것도 설명 안 해줬나 보네요. 열받게.”

“어어?”

“로제니아, 네게 허가된 시간은 한 시간뿐인 걸 명심하도록.”

“아, 네네. 네네네.”

프란시아가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젓고는 나를 보았다. 그러고는 샐쭉 미소했다.

“하기야, 저쪽은 처음부터 푸른 장미가 아니라 언니라는 사람 자체만을 애타게 찾았으니까 당연한가.”

심드렁한 어조와 말이 영 매치가 되지 않았다.

“근데 저라도 그랬을 것 같아요. 나도 그랬으니까요.”

프란시아가 내 손을 꼬옥 쥐었다가 놓았다. 성장한 미인이 날 향해 경계 없이 허물어졌다.

“언니가 푸른 장미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언니를 찾아갔을 거예요.”

그녀는 보디빌더들이 하듯 팔을 구부려 근육을 보이는 시늉을 했다.

“그자의 성문을 부수기 위해 열심히 힘을 길렀거든요.”

어째, 과거보다 훨씬 활발하고 씩씩해진 건 맞는 것 같네. 잠깐이지만 어린 모습만 보아서일까. 성숙해진 지금도 귀엽게만 보였다.

피식 웃으며 끄덕였다.

“질문해주신 걸로 돌아가서요.”

“말 편히 해도 돼. 마지막에 인사할 땐 아니었잖아?”

“그래도 돼요?”

그럼 당연하지, 그리 대답하자 프란시아의 낯이 새싹처럼 피어났다.

그러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내 양손을 쥐었다.

“그럼 이 얘기만 하고서요.”

우리가 처음 만난 날엔 내가 이렇게 손을 잡았던 것 같은데, 어느새 성인이 된 그녀가 나를 잡았다. 감회가 새로웠다.

“언니, 제가 아버지와 애타게 찾았다는 것이 푸른 장미였단 건 조금 전에 이야기했죠?”

“그랬지.”

“언니, 우리는 언니를 위해 존재해요.”

나는 멈칫했다. 프란시아의 낯에서 차차 미소가 지워지며 진지함이 자리했다.

“모든 장미는 각성 후부터 언니를 따르고픈 마음을 절로 품은 채 존재하며.”

색이 다른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은빛 눈동자로 장미 문양이 그려졌다 지워진 것 같았다.

“언니를 찾고요.”

“……날 찾아?”

“네. 흑장미가 언니를 꼭꼭 숨겨둔 까닭은 그들이 독차지하고 독점할 생각이었겠지요.”

나긋하게 설명하던 목소리 속에 가시가 박혔다.

“그네들의 본능처럼.”

프란시아에게 어린 시절 같은 사나운 빛이 어렸다.

“어쩌면 독차지한 채 말라가는 걸 보려던 심산인지도 모르죠.”

이가 딱딱 갈리는 소리가 그녀의 음성 속에 스몄다. 그러나 이도 날 보는 순간 누그러졌다.

“……그만큼 집착을 이끌어 내는 대상이라는 거예요.”

그녀는 이렇게 사납게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하며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 과거 그녀가 도뮬릿에게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아는바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언니는 모든 장미들의 중심, 모든 장미들의 본능은 푸른 장미를 찾아 헤매는 것.”

프란시아의 손이 나를 살짝 붙잡았다. 잡은 손이 장미 넝쿨처럼 느껴졌다.

“언니는 우리들의 왕이니까요.”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리케도르안을 쳐다봤다. 답을 구하듯 보았던 걸까?

‘이게 무슨 소리야.’

왕이라니. 터무니없는 소리 아닌가? 이리 말한들 아 그렇군요. 할 일은 아니었다. 황당했다. 장난치는 거 아니지? 아닐 거 아니야.

그러나 머리로 감방에서 보았던 벽화가 스쳐 지나간다.

장미들로 둘러싸여 있던 그 중심에 있던 자리. 이제야 이 위치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아울러 누군가 파낸 듯 뻥 비워진 흔적이 함께 스친다.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말이죠. 보통의 장미들은 각성 전에 장미를 느끼는 감각이 희미해요. 그러니까 미숙해서 바로 앞에 두고도 잘 모른단 거죠!”

프란시아는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얼른 말했다.

“그러니까 제가 언니를 좋아하는 마음은 따로예요. 알았죠?”

프란시아가 성숙한 얼굴에 무구함을 품고 조잘조잘 설명했다. 성숙해졌지만 여전히 커다란 눈망울 때문인지 낑낑대는 조그만 강아지 같았다.

여기서 리케도르안이 차갑게 헛소리다, 그건 아니다 해주기라도 하면 안정이 될 것 같았다.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지만…… 그만큼 적응이 되지 않았다. 왕이라니. 모든 것이 너무나 생소한 단어였으니.

‘그럼 리케도르안은 어떨까?’

본능이라며. 그에게 집중한 순간 리케도르안이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고는 모양 좋은 입술을 열었다.

“맞아요. 경배와 사랑은 달라요, 이아나.”

초조함과 애달픔이 담긴 목소리였다.

“각성 전에 희미하게 느끼는 게 맞아요. 하지만 나는 다른 장미들과 다르게 이미 수호신을 어린 시절에 잃어서인지. 인지능력이 없었거든요. 푸른 장미를 찾아야 한다는 본능도.”

얼핏 느끼기로는 혹시라도 오해하지 않도록 덧붙이는 것 같았다.

“전혀 몰랐어요.”

곧 그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겼다.

“당신이 푸른 장미인 줄 느끼지 못하던 때에도 당신을 동반자 삼아, 당신을 사랑했듯이요.”

사랑. 그 울림에 손이 저절로 멈췄다. 최대한 담백하게 담으려 한듯했으나 그 속에 담긴 것까지 담백하게 숨길 수는 없었다.

나도 모르게 바닥을 향했던 눈이 그를 다시 담았다. 얼굴이 궁금해졌던 탓이다. 리케도르안의 눈동자는 기다렸던 것처럼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 나만을 응시해온 것 같았다. 미미하게 뺨을 물들인 것 같았지만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와, 저렇게 대놓고 얘기하는 사람은 처음 봐요.”

흡사 둘만 있던 것 같은 분위기를 가르고, 프란시아가 끼어들었다.

“고백한 거지? 무슨 고백을 이렇게 한 대.”

프란시아가 다리를 꼬았다. 그녀의 하얀 치마 위로 무릎이 불쑥 솟는다. 그녀가 팔짱을 낀 채로 씩 웃었다.

“되게 멋없게.”

……응?

잠시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나 프란시아를 바라 보면 제가 무슨 말을 했냐는 양 선량한 얼굴이었다. 미소는 산뜻했고, 목소리 또한 피크닉이라도 간 듯 온화하기 그지없었다.

이는 성녀라는 직책에 너무나 잘 걸맞은 성스럽고 신비로우며 따뜻한 외양이었지만.

“나였으면 도망갔다. 도망갔어.”

나오는 말은 전혀 달랐다. 가냘프고 어여쁜 목소리에 삐딱한 말을 담으면서도 표정에 한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안 그래요, 언니?”

내게 동의를 구하는 말에 나는 긍정도 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부정도 하지 못한 채 애매하게 표정을 흐렸다.

이걸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거지.

분명 구속구가 벗겨진 것을 보고 리케도르안과 프란시아가 무언가 관계가 있을 거라곤 생각했다. 리케도르안이 달라졌으니 책 속과 같은 관계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었지.

적어도 사랑하진 않을 거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서로 노려보는 광경을 생각한 건 아니었는데.’

할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인상 깊게 본 책의 주인공이 서로를 원수지간인 양 쳐다보고 있다. 특히나 리케도르안은 아예 눈을 가늘게 좁히며 프란시아를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한번 이야기한 적 있지. 너는 그 입을 조심하는 편이 좋을 거라고.”

“어머나. 그 말은 정정되는 것이 좋겠어요. 대공 각하. ”

프란시아가 생긋 웃었다.

“본디 말을 조심해야 한단 소리는…… 그 말을 책임질 권력을 쥐지 못한 자들에게 주어진 주의사항이지요.”

그녀의 고개가 우아하게 기울어졌다. 활기가 넘치는 낯이었지만 그 위로 위엄이 덧입혀지는 모습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난 아니고.”

프란시아의 한 손이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난 할 말 정도는 하고 살아요.”

프란시아의 가슴에는 원형 목걸이가 늘어져 있었는데, 납작한 판 안 쪽에 마차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신전의 표식이 있었다. 훨씬 간단하게 표현된 형상이었으나 금이란 재질에서 범접하지 못할 화려함이 느껴졌다.

“그러려고 여기까지 기어 올라왔는데. 그래야죠.”

모르긴 몰라도 저게 높은 사람이 하는 것인 듯했다. 이리 붙잡은 걸 보아서는.

“허락했잖아요, 대공 각하도?”

프란시아의 말은 다시 존대로 돌아왔지만 그녀의 표정은 흡사 ‘이제 와 왜 말을 바꾸느냐.’ 하는 듯한 언짢음이 스쳐 지나갔다.

“그보다 언제까지 거기 계실 거죠?”

이어지는 프란시아의 말에 리케도르안의 미간 주름이 하나 더 겹쳤다.

“여긴 내 방인데?”

이 둘의 뒤로 어쩐지 거대한 고양잇과 맹수와 곰이 우워우워, 울부짖는 것 같다. 나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너희 대체 왜 서로 못 잡아먹을 것처럼 으르릉대는 거니?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이 서로를 노려보는 광경이 몹시 생경했다.

“말은 바로 하셔야죠. 언니의 방 아닌가요?”

“네가 딛고 있는 바닥이 헤르님 저택이지.”

아니. 적어도 니네가 책 속처럼 불같이 사랑은 안 할 거라곤 생각했는데. 왜 불같이 투기를 불태우는 것인지. 어쩐지 퀴즈 쇼 방청을 하러 왔다가 서바이벌 복불복 예능을 보게 된 기분이 이러할까. 나만 외따로 떨어진 도토리가 된 기분이었다.

“본인이 유치하다는 자각은 있으신지?”

“세상에서 내게 그따위 수식을 붙이는 건 그대가 유일할 테지. 판단력이 모자란다고 생각해주겠다.”

“와. 지금 내숭 떠시는 건가?”

내숭? 리케도르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에 고개를 갸웃했다. 잠깐이지만 리케도르안의 얼굴로 난감함이 스쳐 지나갔다.

“이아나가 오해할 단어는 말아주지?”

“뭐가요. 보니까 딱 답이 나오네. 푸른 장미 얘기 안 한 것도 푸른 장미라서 찾은 것인 줄 알까 봐 안 한 거죠?”

“…….”

이에 리케도르안이 얼굴을 짚었다. 작게 숨을 내쉬는 것도 같았다.

“……정말 잊은 거야.”

그가 한숨과도 같이 말했다.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으니까.”

그러고 보면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긴 했다. 제이르가 푸른 장미를 열심히 운운하는 동안에도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내게만 시선이 꽂혀 있던 모습을.

거기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헐레벌떡 달려와, 미안하다며 엉엉 울었지? 납치해서 미안하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 이후로는 물을 겨를이 없긴 했다. 그가 영 불편해하는 듯해서 묻지 않은 거기도 했고.

“흐응,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대단하시네요.”

프란시아의 표정이 살짝 누그러졌다. 그렇다고 살가운 얼굴은 아니었다. 비꼬거나 뾰족함은 없는 말투였다.

“그렇게 여유가 있으실 상황이 아닐 텐데.”

“프란시아 올르 로제니아.”

“네네.”

프란시아가 가녀린 어깨를 으쓱했다. ‘알아서 하시길 바라죠’, 하고 중얼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감각이 뛰어난 리케도르안은 이 소리도 놓치지 않고 들었을 터였다.

두 사람의 사이엔 조금 전과 같은 날선 견제는 전혀 없어 보였다. 그저 오래 본 동료, 아니. 그것도 사이좋지 않은 직장 동료를 보는 듯한 미묘한 공기만 느껴질 뿐.

“그보다, 이젠 언니랑 이야기 좀 할게요?”

프란시아가 손을 뻗어 내 손을 살짝 잡았다.

“나와 언니의 시간을 방해하다니. 약속이 다른데요, 붉은 장미님?”

그녀는 그 채로 내 손을 들어 올려 잡은 손을 리케도르안에게 휘휘 저어 보였다.

“나 언니랑 단 둘이 이야기할 거라고요.”

마치 보여주려는 의도가 팍팍 느껴지는 행동에 리케도르안이 또 한 번 찌푸렸지만 무어라 하지는 않았다.

“꽉 쥐지 마.”

“왜요?”

“부러져.”

“아하.”

프란시아가 끄덕이더니 정말로 손에서 힘을 풀었다.

……얘네가 지금 뭐래는 거지.

“……저기, 내 손목은 그 정도로 부러지지 않거든?”

그녀는 내 말에 그래요? 하고 웃으면서도 손에 다시 힘을 주지 않았다. 그러고는 리케도르안을 돌아봤다.

“각하.”

부름과 동시에 프란시아에게서 뚝뚝 격식을 갖춘 우아함이 흘러나왔다.

“한 번 더 이야기 드립니다. 우리 약속이 다른데. 언제까지 거기 계실 참이신가요?”

두 사람이 또 한 번 서로를 노려보았다. 볼수록 사이가 무지 좋지 않은, 애니메이션 속 고양이와 조그만 생쥐를 떠올리게 했다.

“언니를 만나면 둘만 있게 해주겠다고 하셨잖아요.”

마침내 궁금했던 약조의 정체가 흘러나온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한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하게 맞섰다.

“……문 앞까지다.”

결국 한 걸음 물러난 것은 리케도르안이었다.

“여부가 있겠어요?”

프란시아가 제 가슴을 짚고 앉은 채로 인사하는 시늉을 했다. 물론 진정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인사였다.

리케도르안이 방에서 나갔다. 아무래도 문 앞이란 표현은 문 앞에서 대기하겠다는 소리인 듯했다.

“음, 문 앞에 있는 거면, 다 들릴 텐데.”

나와 프란시아, 둘만 남은 상황에서 내가 이렇게 말하자 그녀가 입술을 휙 휘었다.

“헤르님 성은 모든 방의 문에 방음 마법이 걸려 있어요, 언니.”

그녀의 설명에 잠시 그녀를 보았다가 살짝 웃으며 대꾸했다.

“말 편히 해.”

“앗, 그래도 돼요?”

“당연하지. 안 될 게 뭐 있어.”

이젠 이쪽이 훨씬 높으신 분인데 말이다. 아니다. 훨씬은 아닌가?

‘내가 도뮬릿 둘째라도. 일단 도뮬릿 권력은 체이서가 다 가진 거니까.’

그리 생각하는 동안 프란시아가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이 웃음만큼은 나와 함께 지냈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너무 좋아!”

프란시아의 몸이 나를 폭 감싸 안았다. 아마도 그녀는 내 품에 안기려던 모양이었으나 이제는 그녀가 조금 더 커진 탓에 내가 안긴 모양새가 되었다.

“아마 붉은 장미의 능력이라면 마법을 무시하고 대화가 들리겠지만…… 상관없어.”

그녀는 그래도 좋은지 내 어깨에 마구 고개를 비볐다.

“언니랑 둘만 있고 싶었으니까.”

나는 잠시 당황했으나 이내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어린 시절, 아니. 도뮬릿 저택에서 잠시 머물 때도 하던 행동이었다. 이제는 나보다 조금 더 커버린 아이지만, 아주 잠깐 도뮬릿에 있었던 시절에 그것도 키운 것이라고 싫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나도 프란시아가 있던 시간에 많이 웃었던 것 같으니까. 내게도 친구가 필요했었던 거구나. 싶었지. 푸딩은 반려동물 같은 느낌이니까.

애옹?

제 생각을 하는 걸 느꼈는지 발치에서 푸딩이 한번 울었다.

“어휴, 쫓아내기 참 힘드네.”

그사이 내 어깨에 머리를 파묻었던 프란시아가 푸하, 소리를 내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세상에, 미련이 줄줄 넘친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보니까 신기하기도 하고.”

“리케도르안 말이야?”

프란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니. 응.”

그녀는 잠깐 문 쪽을 향하더니 콧잔등을 찡그렸다.

“정말 시간 안 주는 줄 알고 얼마나 간이 쫄렸던지.”

“그렇게 보이진 않던데.”

“아닌 척 한 거지. 쫄아서야, 원하는 걸 얻어내겠어.”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여차하면 망치라도 꺼내야 하나 싶었네, 하고 덧붙였다.

“그나저나 기쁘고 행복한 건 알겠지만 본인이 저럴 때가 아닐 텐데 말이지.”

“저럴 때가 아니라니?”

거기까지 혼잣말이었는지, 프란시아가 눈을 깜빡였다. 그러더니 배시시 웃었다. 이어 뺨을 긁적이는 모습에서 망설임이 얼핏 보였으나 이내 그녀는 어깨를 한번 으쓱였다.

“붉은 장미, 대공 각하요.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잖아요.”

가벼이 스쳐 지나가는 말이었으나 그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나는 흠칫했다. 프란시아는 내 떨림을 느끼지 못한 것인지 손을 들어 자신의 목을 톡톡 두드렸다.

“이걸, 억지로 끊은 덕에 한참 줄어버렸죠. 생명이?”

이것. 무언가를 가리키는 지칭어였으나 대번에 알아들었다. 목을 가리켰으니까.

분명 ‘구속구’를 말하는 걸 거다.

이미 여기에 대해선 제이르한테 들은 바 있었다. 정해진 조건에서 풀어내지 않고 푼 것이라고. 그때 분명 억지로 손으로 잡아 뜯었다고 말한 게 기억하는데.

“리케도르안과는 언제 만난 거야?”

혹시 몰라 물은 질문에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프란시아는 비밀도 아니라는 듯 곧바로 이야기했으니까.

“아, 캄브라캄에서 만났어요, 아니, 만났어. 그때…… 잠시 아버지의 죄를 대신해서 들어갔었거든.”

프란시아가 자신의 말투를 자각했는지 얼른 짧게 줄였다.

“사실 아버지도 누명을 쓴 거였지만 말이야.”

감방에서 만난 것은 알고 있는 것처럼 원작과 같았다.

“나 그때 많이 힘들었어, 언니.”

힝, 프란시아가 울상을 지었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그녀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그러자 프란시아가 금세 표정을 풀어냈다. 봄에 막 틔운 꽃잎처럼, 혹은 새싹이 돋듯 파릇하고 아름다운 낯이었다.

“감방에서면 리케도르안이 목에 구속구를 차고 있었을 거고.”

“맞아.”

“그건 너와 만날 때, 뜯은 거야?”

“음, 음……. 그렇지? 붉은 장미들도 참 미친 것 같아. 어떻게 자식한테 그런 걸 채우는지.”

프란시아가 턱을 괴고 투덜거리듯 말했다. 리케도르안을 그리 좋아하는 태도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구속구는 편치 않은 감상을 남겼던 모양이었다.

“하긴 방랑하는 흰 장미가 할 말은 아닌가.”

“방랑?”

“응. 멀쩡한 영지 두고, 푸른 장미를 찾아서 방랑만 한다고 해서 붙은 거.”

프란시아는 짧게 덧붙였다.

“그게 흰 장미의 숙명이거든. 푸른 장미를 치료해야 한다.”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자. 프란시아는 바로 말을 돌렸다. 이전에 하던 이야기로 돌아갔다.

“처음 만났을 때, 붉은 장미 대공은 무지, 무지무지 사나웠어. 얼마나 사나웠냐면 쇠사슬이 없으면 날 잡아먹었겠구나 싶은 정도?”

……실제로 잡아먹긴 했을걸. 의미가 달라서 그렇지.

나는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아마 상황이 달라졌으니, 저 사나움은 더는 십 구세용 사나움은 아니었으리라. 아니다. 똑같은 십 구세용인데 잔인한 쪽의 사나움이었을지도. 처음 봤었을 때 으르렁거리던 리케도르안의 모습은 내가 봐도 살벌했으니 말이다.

“아무튼 조금 지났을 때였나, 목에 있던 구속구를 스스로 억지로 벗어버렸는데. 얼마나 어처구니없고, 묘하고 조금 무섭고. 그랬는지 몰라. 세상에 그런 미친놈은 흑장미만 있는 줄 알아서…….”

하나 추억을 반추하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프란시아가 가벼이 던진 돌은 생각보다 무거운 주제를 품고 있었으니까.

“붉은 장미는 가슴의 문신, 거기서 꽃잎이 떨어지는 저주를 막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죽을 테니까.”

프란시아가 조금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동반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보호해줄 수호신도 없는 상태에서. 정말 미친 짓이었지.”

프란시아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근데 나한테 네가 흰 장미냐, 자길 도와달라고 하더라고.”

그녀를 토닥이던 내 손이 멈칫했다.

“자기는 어떻게든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여기서부터는 제이르에게도 듣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이 망할 힘을 디딤돌 삼아서 꼭 찾아야 할 게 있다고.”

“…….”

“뭐랬지. 약속을 어기고 나타나지 않았다나?”

그녀의 말 속 주체가, 목적어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모를 리 없었다.

‘나구나.’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아니. 짐작하고 있던 사실을 되새김질 당하는 기분이었다.

“자칫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태연하게도 행동하더라고. 그때 다시 한번 느꼈지. 역시 장미들은 미친놈만 있는 게 분명하다고.”

그 말에 나는 잠시 르나그를 떠올렸지만 금세 사라졌다.

책 속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쪽도 정상은 아닌가. 아무튼 간에 프란시아의 말을 곰곰이 곱씹었다.

<각하께서 지옥 같은 부작용을 견디고, 어떻게서든 해내셨으니까요.>

그날, 제이르는 끝내 이 ‘부작용’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그저 리케도르안에게 직접 들으라고 말하며. 이제야 알게된 사실에 난 입술을 꾹 다물었다.

‘지옥 같은 부작용, 견뎠다며.’

끝난 것이 아니잖아. 당장에 찾아가 쏟아내고 싶었다. 거칠게 멱살을 쥐고 싶었다. 어쩐지 조금은 아귀가 맞지 않던 퍼즐이 맞아떨어진 기분이었다.

사실 리케도르안의 수하 입장에서 나를 반길 이유가 없다. 그것도 철천지원수인 도뮬릿 공작의 여동생이라면 더욱더.

그럼에도 반발은 전혀 볼 수 없었던 제이르의 얼굴, 오히려 감방에서 보았을 때보다 더욱 능글능글하게,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 같은 얼굴. 푸른 장미로 포장하기엔 좀 부족하지 않나 싶었더니.

내가 리케도르안의 생명을 구할 걸 알아서였나.

더는 당황하는 대신 찬찬히 상황을 정리했다. 놀라지 않은 건 아니지만 어차피 일어난 일이라면, 당황하는 것보다는 방법을 찾는 것이 효율적이니까.

‘그래.’

프란시아가 리케도르안의 구속구를 풀어줬……. 잠깐만.

나는 고개를 홱 들어 올렸다.

“프란시아.”

“으응? 응, 언니?”

그때까지도 조잘조잘하던 입술이 꾹 다물어졌다. 말 잘 듣는 새 같았다. 이 귀여운 모습을 감상할 새도 없이 얼른 말했다.

“그 구속구, 네가 풀어준 거 아니야?”

“구속구? 아, 대공의?”

프란시아의 근력은 익히 알고 있었다. 몇 년 전 도뮬릿 저택에서 자기 몸보다 거대한 망치, 자기 무기를 보이며 증명하지 않았던가.

장미들의 신체가 확실히 보통 인간보다 도드라지는구나 한 번 더 느낀 계기이기도 했다. 그래서 프란시아가 맨손으로 잡아 뜯은 것도 아무렇지 않게 믿었지.

한데 그녀는 조금 전 분명, 리케도르안 ‘스스로’ 풀었다고 했다.

“나 아닌데? 아니야.”

프란시아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기울였다. 질문의 의도가 궁금하다는 얼굴이었지만 순순히 대답했다.

“난 목이 찢어져서 과다 출혈로 죽을 뻔한 걸 치료해준 것밖에 없는걸.”

그때를 떠올리는지 프란시아가 자신의 목을 매만졌다. 조금 미간을 찌푸리면서.

“피가 어찌나 많이 나오는지. ……그때 붉은 장미 시체 치우는 줄 알았어.”

그녀의 눈이 질끈 감겼다가 뜨였다.

“능력을 쓰고 또 쓰고, 고갈 날 때까지 썼어. 그때 입힌 은혜는 평생 갚아도 모자랄걸. 내가 겨우, 살렸으니까.”

프란시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목에 흉터도 남았을걸. 잘 안 보여서 그렇지.”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자신이 아무리 치유 능력을 지녔지만 그때는 정말로 애를 먹었다며. 보통 상처가 아니었다고, 보통 사람이었으면 쇼크로 죽었을 거라고도 덧붙였다.

동시에 제이르와 헤르님에게 실로 내가 간절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문신의 꽃잎, 얼마 남지 않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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